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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 이색 기념관 2019-04-18 본문
해파랑길 걸으면서 들르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목은 이색은
고려 말의 학자. 성리학을 바탕으로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대표작으로 <부벽루>, <독두시>가 있다.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아버지는 찬성사 곡(穀)이다.
15세에 부음(父陰)으로 별장(別將)의 직을 얻고,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가 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아버지가 원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가 되자 조관(朝官)의 아들로 원나라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다. 이색은 이제현(李齊賢)을 좌주(座主)로 하여 주자성리학을 익혔고, 이 시기 원의 국립학교인 국자감에서 수학하여 주자성리학의 요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1352년(공민왕 1) 아버지가 죽자 귀국해 토지문제·왜구대책·학교교육론·이단배척 등의 상소를 올렸다.
1353년 고려의 과거에 합격했으며, 이듬해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鄕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에 가 회시(會試)·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응봉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應奉翰林文字承事郞同知制誥) 겸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이어 고려에 돌아와 전리정랑(典理正郞)·내서사인(內書舍人)을 지냈다. 1355년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본격화되자 왕의 측근세력으로 활약하면서 〈시정8사 時政八事〉를 올렸는데 그중 하나가 정방(政房)의 혁파였다.
이 일로 이부시랑 겸 병부시랑에 임명되어 문무(文武)의 전선(銓選)을 장악하게 되었다.
신흥유신으로서 현실개혁의 뜻을 가진 이색은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고 반영시키는 가운데 순조롭게 출세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색의 이러한 정치적 성장은 오히려 현실개혁의지를 약화시키고, 자신과 관계를 맺은 부류와 타협하게 되었다. 1357년 전녹생(田祿生)·정추(鄭樞) 등과 더불어 염철별감(鹽鐵別監)의 폐지를 논했다.
새로이 별감을 파견하면 이배(吏輩)들이 농간을 부릴 것이며 별감은 세포(稅布)를 많이 거두어서 왕의 총애를 받으려 하기 때문에, 일반 민은 소금을 받지도 못하고 포만 납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색은 왕이 재추(宰樞)와 대성관리(臺省官吏)를 모은 가운데 별감 파견의 가부를 물으려 하자 병을 칭하여 피했다. 이는 염제신과 같은 권세가가 별감 파견을 주장한 것에 대한 이색의 타협으로서, 다른 간관(諫官)이 이 일로 좌천된 것과 달리 이색은 중임되었다.
또한 1362년 성균시의 합격자를 뽑던 중 왕이 환관(宦官)을 보내어 벽승(嬖僧)의 사패(賜牌)에 어보(御寶)를 찍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색은 처음에 신하들과 의논할 일이라 하여 반대했지만 이내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찍었다. 사패는 국왕이 충성의 대가로 공신이나 기타 사원에게 설정해주는 토지의 증빙문서였는데, 당시에는 권세가의 토지확대방법으로 이용되어 토지겸병과 수취체계 중첩화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이색은 국왕의 힘에 의해서 자신의 뜻을 계속 관철시키지 못하고 이를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1359, 1361년 홍건족이 침입했을 때 왕을 시종하여 호종공신 1등에 책봉되어 전(田) 100결(結), 노비 20구(口)를 받았다. 또한 아버지에게서 받은 토지·노비와 관직을 통해 얻은 수조지, 그리고 공신전으로 중앙정계에 정치적 지위에 상응하는 경제적 기반도 마련하고 있었다.
1365년 신돈이 등장하고 개혁정치가 본격화되면서 그는 교육·과거 제도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될 때 이색은 대사성이 되어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더불어 정주성리(程朱性理)의 학문을 부흥시키고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유신들을 길러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되고 이어 공민왕이 죽자 그의 정치활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그후 1375년(우왕 1)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판삼사사를 역임했다. 1386년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해에 판문하부사 조민수(曺敏修)의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는데 동지공거 염흥방(廉興邦)이 그를 합격시킬 것을 청했으나 거절했다. 그는 1377년 장경(藏經)을 인성(印成)하고, 1387년 서보통탑(西普通塔)의 탑기(塔記)를 짓는 등 주자성리학자이면서도 불교를 선호하며 긍정하고 있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고려왕조의 존립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 개혁정치를 희구한 이색은 1389년(공양왕 1) 도평의사사에서의 사전혁파(私田革罷) 논의 때 이숭인·변안렬(邊安烈) 등과 같이 옛 법은 경솔히 고칠 수 없다고 반대했다. 불법적인 대토지소유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사전개혁과 같은 급격한 전제개혁에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위화도회군을 군령을 위반하고 왕의 명령을 거역한 행위로 이해했으므로 그 주체세력이나 동조세력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위화도회군의 중심인물과 동조세력은 당대의 대유(大儒)인 이색과 같은 반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오사충(吳思忠)·조박(趙璞)·정도전(鄭道傳)의 상소로 인하여 그는 장단으로, 아들 종학(種學)은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후 김저(金佇)의 옥(獄)과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노선을 같이하는 이숭인·변안렬·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투옥되거나, 금주·여흥 등지로 유배당하는 등 고려 말기의 정치권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색은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고려말에 결당모란(結黨謀亂)한 자로 지목되어 우현보 등 56명과 더불어 논죄되어, 직첩을 빼앗기고 서인(庶人)이 되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장흥에서 석방된 그는 3년간 한산에서 지내고 1394년(태조 3) 오대산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다. 1396년 여주 신륵사(神勒寺)에 가는 도중에 죽었다. 이색은 원나라에서의 유학과 이제현을 통하여 이 시기 선진적인 외래사상인 주자 성리학을 수용했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에 대처하면서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원의 주자학을 받아들였으므로 그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이(理)·기(氣)·태극(太極)과 같은 주자학의 핵심개념을 사용하여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했고, 주자학의 수양론인 성학론(聖學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주자학에서 말하는 수양론과 달리 죽음과 인간적 고뇌와 같은 초인간적·종교적 문제는 여전히 불교에 의존했다. 또한 송대의 혈연·의리·도덕·윤리 등을 말하는 도통론(道通論)을 전개한 것이 아니고 원의 형세론적 도통론을 전개했다. 즉 그의 주자성리학의 발원지인 원의 영향과 불교의 영향 속에서 송대의 주자학과 구분되는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저서로 〈목은유고〉·〈목은시고〉 등이 있다. 장단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아래 유품들의 사진은 바삐 지나가느라 직접 못 찍고 https://www.walkview.co.kr/3723 에서 복사해 왔다.
관어대소부
『목은시고(牧隱詩藁)』 권1에 실려 있다. 『동문선(東文選)』 권3에는 ‘관어대부(觀魚臺賦)’로 줄여져 전한다.
「관어대소부」 서(序)에 따르면 관어대는 영해부(寧海府)에 있다. 그곳에 자기의 외가가 있으므로, 작은 부를 지어 소중원(小中原)에 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또한 관어대란 물밑에 노는 고기도 헤아릴 만하다고
하여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관어대소부」는 관어대 아래의 바다 풍경을 묘사하면서 시작된다. “그곳은 움직이면 태산이 무너지는 듯하다. 고요하면 거울을 닦아 놓은 듯하다. 풍백(風伯)이 풀무질을 하는 곳이요, 해신이 거처하는 집이다. 이것을 대
위에서 굽어보면 위에는 하늘 밑에는 물이다. 대 밑에는 물결이 잔잔하고 뭇 고기들이 모인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으로 내 몸도 잊고 즐거움을 즐기며, 그 즐거움을 즐기다가 편안하게 자연으로 돌아가나니, 외물(外物)과
내가 한마음이다……. 종신토록 중용의 뜻에 침잠(沈潛)하여 자사(子思)를 스승으로 받들겠다.”는 말로 끝난다.
「관어대소부」는 세간에서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와 아주 비슷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서거정은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권근(權近)도 두 작품을 읽어보면 그 이유를 저절로 알게 될 것이라
말하고 있다. 이색의 문장은 그 폭이 넓어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 글은 특히 사부를 통하여 그의 운문능력을 과시한 명편이다.
「관어대소부」에는 높은 곳도 없으며 낮은 곳도 없다. 쫓거나 내닫는 성급함도 없이 한가롭고 여유에 차 있다. 애써 꾸미려 하지 않았지만 저절로 말이 풍부하다. 김종직(金宗直)의 말과 같이 먹을수록 맛이 있고 배부름을
느끼게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복사해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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