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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본문
살아가면서 '만족할 알면 욕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그래서 오래 간다'는 노자의 이 말이 정말 중요한 말이라는 확신이 점점 강해집니다.
춘추 시대 말기에 살았던 월왕 구천의 신하 범려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구천은 회계산 전투에서 오왕 부차에게 패하고 그의 신하가 됩니다.
그리고 범려와 함께 오나라로 끌려가서 갖은 치욕과 수모를 당합니다.
심지어는 부천을 속이려고 그의 똥을 맛보면서까지 치욕을 감수합니다.
또 부차에게 침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의 미녀인 서시를 바쳐서 부차의 환심을 사기도 합니다.
침어( 沈漁)라는 별명은 어느날 서시가 연못 속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물속의 고기가 서시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스스로 물속에 가라앉았다는 고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야기가 좀 옆길로 빠집니다만 아래는 서시와 함께 중국 4대 미녀로 알려진 미녀들의 별명 이야기입니다.
서시는 팜므 파탈로 알려진 경국지색이었습니다.
그녀는 속이 좋지 않아서 자주 미간을 찌푸리기도 했습니다.
워낙 예뻤기 때문에 미간을 찌푸려도 여전히 예뻤습니다.
여기에서 서시빈목(西施顰目)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미녀 서시를 부차에게 바치는 계략의 뒤에는 충신 범려가 있었습니다.
갖은 고생을 한 구천이 결국 부차의 환심을 사서 죽지 않고 범려와 함께 고국 월나라로 돌아옵니다.
이후 힘을 키워 결국 부차를 죽여 원수를 갚습니다.
장작을 베고 자고 쓸개를 핥으면서 복수를 꿈 꾼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고사성어가 이들 부차와 구천에게서 나왔습니다
범려는 구천과 함께 오나라에서 갖은 고생을 한 후 왕을 잘 보필해서 귀국했으니 이제 함께 부귀영화를 누릴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범려는 구천과 범려가 오나라에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월나라에 남아서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했던 대부 문종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월왕은 어려움을 함께 할 수는 있어도 부귀를 함께 누릴 만한 사람이 못됩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는 법이니 관직을 버리고 물러나라고 충고했지만 문종은 그 이야기를 그냥 흘려 듣고 따르지 않았습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이 이에서 나왔습니다.
결국 문종은 구천에게 자결을 명령받아 죽게 됩니다.
하지만 범려는 과감히 욕심을 버리고 월나라를 떠나 제 2의 인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서시와 함께 월나라를 떠나 장사를 해서 거부가 된 후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범려의 성공은 결국 멈추고 떠날 때를 알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한편 문종은 그 멈추어야 할 때를 놓쳤기 때문에 목숨까지 잃게 된 것이지요.
범려와 같이 멈출 때를 잘 안 인물로는 초한지에 나오는 인물로 유방을 도와 천하를 통일한 책사였던 장량을 또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추천했던 한왕 희신이 반란을 일으키자 바로 유방에게 나아가서 자신에게 벌을 내릴 것을 청합니다.
하지만 유방은 장량을 벌하지 않습니다.
이에 장량은 유방에게 "이제는 인간 세상의 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적송자(赤松子)의 뒤를 따라가 노닐고자 한다."며 은퇴를 청하고 유방은 소원을 들어줍니다.
후에 유방이 공신들을 제거할 때 장량은 일찍 은퇴한 덕분에 팽월이나 한신처럼 비참한 말년을 맞지 않고 그의 소원대로 유유자적하며 살 수 있었습니다.
또 내 친구 가운데 하나는 평교사로 시작해서 교육장으로 퇴임했습니다.
아직 정년까지는 나이가 있으니 다시 학교로 돌아가 교사를 계속 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육장을 지낸 사람이 평교사로 오는 학교의 교장이나 다른 교사들은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그래서 교사직으로 돌아가지 않고 과감히 퇴직하고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전원 생활을 즐기면서 주위 사람들과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멈출 때를 잘 알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받으면서 행복하게 여생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래의 다음 이야기는 잘 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멈출 때를 안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조선 초기 안평대군의 총애를 받았던 안견의 이야기입니다.
조카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이 아직 왕위에 오르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태종의 막내 아들 성령대군의 양자로 들어가서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안평대군은 그 부를 기반으로 많은 문인, 선비들과 교류를 나누었습니다.
이 때 안견도 안평대군의 문객이 됩니다.
조선 초기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몽유도원도가 바로 안평대군의 꿈을 안견이 그림으로 그린 것이지요.
안평대군의 한살 위 형인 수양대군은 권력을 키워나가면서 왕권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잘 알다시피 안평대군은 시서화에 능통한 삼절로 불리던 인물입니다.
특히 글씨가 뛰어났으며 송설체의 대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에까지도 잘 알려져서 사신들이 오면 안평대군의 글을 얻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야사에 의하면 안평대군이 안견을 불러놓고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도중에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안평대군이 아끼는 벼루를 안견이 몰래 훔쳤습니다.
돌아온 안평대군이 벼루를 찾는데 안견의 소매자락에서 벼루가 떨어졌습니다.
분노한 안평대군이 안견을 쫓아내고 다시는 보지 않았습니다.
얼마후 계유정난이 일어나고 안평대군과 그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하지만 안평대군에게 쫓겨난 안견은 그후 두문불출하고 있었기 때문에 죽음을 면합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안견이 수양대군이 역모를 일으킬 것을 미리 알아서 이런 행동을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섬기던 주인을 배반했다는 시각에서 보면 안견의 행동은 칭찬받을 수 없습니다만 목숨을 건졌다는 차원에서 보면 영리한 행동이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멈출 때를 몰라서 낭패를 당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간혹 노자의 말대로 멈출 때를 잘 알아서 可以長久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족불욕(知足不辱)이 지지불태(知止不殆) 앞에 오는 이유는 욕심을 버려야 멈출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지만 나같은 범인에게 욕심을 버리는 일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