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능,원,묘

용흥궁 2018-01-29

singingman 2023. 1. 23.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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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령 철종이 가족과 함께 유배와서 살았던 곳이라고 한다.

이름은 궁이지만 경복궁이나 창덕궁처럼 큰 대궐은 아니고 양반집 같은 분위기다.
성공회 강화성당 바로 아래 있어서 성당 구경 갔다가 함께 들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용흥궁은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용흥궁은 청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원래는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있던 농사꾼 이원범의 집으로 불렸던 곳으로 보잘것없는 초라한 초가집으로 알려졌으나 이원범이 조선왕조 25대 임금인 조선 철종으로 즉위하게 되고 신분이 평민에서 왕족으로 격상됨에 따라 이원범의 집으로 불렸던 초가집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기와집의 잠저를 지으면서 용흥궁이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다.
원래 철종은 전계대원군의 아들로서 실질적으로는 왕족이었지만 그의 가족들은 왕족 지위를 가지지 못하여 평민으로 신분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그 때문에 강화도에서 평민 신분으로 농사를 지으며 강화도의 초가집에서 지내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왕이 된 후에도 순원왕후와 철인왕후, 김조순 세력의 안동 김씨들 때문에 불행한 삶을 살았던 철종은 야사에 의하면 강화도 출신의 사랑하던 봉이와도 강제로 헤어지고 철인왕후와 결혼하게 된다.역적의 자식으로 나뭇꾼으로 살았으니공부를 많이 못했고 갑자기 왕이 되었으니 신하들의 조롱을 참고 사는 것이 참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이 궁은 은언군~전계대원군 이광~영평군 이경응~이재순~이해승의 후손이 소유하고 있다.
이해승은 친일 인물로 일제로부터 후작 지위와 당시 상금 16만 8천엔을 받았다.
국가와 친일파 재산 압류 문제로 현재도 소송이 진행중이다.

철종은 다음 백과에 의하면
 
 
철종 - Daum 백과

철종

철종은 1831년(순조 31)에 전계대원군의 서자로 태어났다. 전계대원군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서자다. 전계군의 일가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와 사면을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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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성당에서 내려오면 이 출입문이 있다.

 옆에 대문이 따로 있고 대문 앞에 비석이 두 개 있다.


들어가면 출입문이 하나 더 있다.

 

 
 

설명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 건물이 용흥궁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좋아보인다. 팔작지붕에 누마루가 있는 ㄱ자 집이다.

 원래는 초가집이었는데 철종 4년에 지금의 건물을 지었고 철종은 여기에서 19살이 될 때까지 살았다.


여기는 비각

 

 
 

우물

 

비각에 있는 향나무

 

아랫채일까?

 

대청마루가 있는 큰 집이다.

 

가운데 마당을 두고 건물이 둘러싼 전형적인 ㅁ자 구조다.

 

화장실

 

곳간?

 

대청마루

 

창고로 보인다.

 

 
 

부엌 안에 이런 장농이 있다. 원래 여기에 있어야 할 물건이 아닌 것 같은데 관리가 안 되고 있는 건가?

 

부엌 살림들

 

아궁이와 무쇠 솥

 

대청 마루에 있는 뒤주 - 뒤주를 보면 아버지와 노론들에게 죽임을 당한 사도세자가 생각난다.

 

우물이 아랫채에도 있다.

 

지금은 비어 있는 공간이지만 전에는 여기도 건물이 있었을 것 같다.

 

지형을 이용한 계단식 정원 - 창덕궁 정원이 생각난다.

 

 
 

이런 굴뚝도 창덕궁에서 본 것 같다.

 

위에서 내려다 본 모습

 

 
 

 
 

이 건물은 성공회 강화 성당 - 주차장에서 올려다 본 모습인데 아래 있는 굴뚝 문양이 아름답다. 이 성당 아래에 용흥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