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파랑길 29코스(삼척,동해 구간, 절터골~원덕 버스 정류장) 19'-2/27
2/27(수)
고양터미널에서 08시 버스로 12시 삼척 종합 버스 터미널 도착
죽서루 관람후
12시 50분 죽서루앞에서 식사 후 출발해서 충혼탑과 실직군왕비릉등을 보고 용화가는 버스를 한참 기다려서야 타고 갈 수 있었다.
2시 50분 용화 출발
용화에서 검봉산 자연휴양림으로 가다가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남매를 데리고 가는 용감한 부부를 만났다.
5시 20분 임원 무인 인증센터에서 휴식
5시 30분 출발
6시 50분 원덕읍에 있는 수모텔 투숙하고 근처에 있는 한식 부페에서 저녁식사 6,000원
7시간을 채 못 걸었다.
일산에서 삼척까지 가는데 이미 4시간이나 걸리고 삼척에 내려서 지난 번에 놓친 죽서루와 실직군왕비릉을 보고 난 후에 용화해변 가는 버스를 한 시간 가까이 기다려서 용화로 가니 시간이 많이 늦었다.
용화에서 2시 50분에 출발해서 호산까지 어두워지기 전에 가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 같아서 아주 빠른 걸음으로 걷다보니 다리가 상당히 많이 아프다.
다행히 3시간만에 원덕읍내에 있는 모텔에서 자고 다음날 일찍 울진버스터미널까지 갔다.
수로부인과 관련된 글들을 아래 카페(http://cafe.daum.net/heartwings(에서 복사해 왔다.
수로부인[水路夫人]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 때 순정공(純貞公)이 강릉(江陵)[지금의 명주(溟州)이다.] 태수로 임명되어 가던 중, 바닷가에 이르러 점심을 먹을 때였다. 주변에는 바위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러쳐서 바다를 굽어보고 있었는데, 높이 천 길이나 되는 그 위에는 철쭉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공의 부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꽃을 꺾어 바칠 사람 그 누구 없소(折花獻者其誰)?”
옆에서 모시는 사람이 말하였다.
“사람의 발자취가 이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모두들 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런데 옆에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있었는데,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고 노래까지 지어서 바쳤다. 그 노인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傍有老翁牽牸牛而過者 聞夫人言 折其花 亦作歌詞獻之 其翁不知何許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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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틀 동안 길을 가다가 임해정(臨海亭)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바다의 용이 나타나 부인을 납치해서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순정공은 넘어져 바닥에 쓰러졌으며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그러자 또 어떤 한 노인이 말하였다.
“옛 사람들 말에, 여러 사람의 말은 쇠도 녹인다 하였습니다. 지금 바다 속 짐승이 어떻게 사람들의 입을 무서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이 지역 내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막대기로 언덕을 친다면 부인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故人有言 衆口鑠金 今海中傍生 何不畏衆口乎 宜進界內民 作歌唱之 以杖打岸 可見夫人矣).”
그래서 공이 그 말대로 했더니, 용이 부인을 모시고 바다에서 나와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에서 있던 일을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칠보로 꾸민 궁전의 음식이 달고 기름지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 세상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옷에서도 이상한 향내가 풍겼으니, 이 세상에서 맡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수로부인은 자태와 용모가 뛰어나서 매번 깊은 산이나 큰 연못을 지날 때마다 여러 차례 신물(神物)들에게 납치되곤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부른 「해가(海歌)」의 가사는 이러하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龜乎龜乎出水路).
남의 부인 빼앗아 간 죄 그 얼마나 큰가(掠人婦女罪何極)?
네가 만약 거역하고 바치지 않는다면(汝若悖逆不出獻)
그물을 넣어 사로잡아 구워 먹으리라(入綱捕掠燔之喫).
노인의 「헌화가(獻花歌)」는 이러하다.
자줏빛 바윗가에(紫布岩乎邊希)
잡고 있는 암소 놓게 하시니(執音乎手母牛放敎遣),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吾肹不喩慚肹伊賜等)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花肹折叱可獻乎理音如).
[네이버 지식백과] 수로부인 [水路夫人]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유사,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신무대왕ㆍ염장ㆍ궁파[神武大王 閻長 弓巴]
제45대 신무대왕(神武大王)이 아직 왕이 되기 전에, 의협심이 강했던 궁파(弓巴= 장보고)에게 말하였다.
“나에게 같은 하늘 아래서 함께 살 수 없는 원수가 있다. 네가 나를 위해 그를 없애준다면, 왕위에 오른 뒤에 네 딸을 왕비로 삼겠다.”
궁파는 그렇게 하겠다고 하고, 마음과 힘을 합쳐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쳐들어가 그 일을 이루어냈다. 왕위를 빼앗은 뒤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강력하게 반대하며 말하였다.
“궁파는 출신이 미천합니다. 임금님께서 그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는 것은 아니되옵니다.”
이러하여 왕은 신하들의 말을 따랐다.
그 당시 궁파는 청해진(淸海鎭)에서 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였다. 이때 장군 염장(閻長)이 이 말을 듣고 왕에게 아뢰었다.
“궁파가 불충한 짓을 하려고 합니다. 소신이 그를 제거하겠사옵니다.”
그러자 왕은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염장이 명을 받들고 청해진으로 돌아와서는 사람을 통해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국왕에게 작은 원한이 있기에 명공에게 의탁하여 목숨을 보전하려고 합니다.”
궁파는 이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며 말하였다.
“너희들이 왕에게 말하여 내 딸이 왕비가 되지 못하도록 해놓고, 어찌하여 나를 보고자 하느냐?”
염장은 다시 사람을 통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여러 신하들이 말한 것일 뿐, 제가 그 논의에 참여한 것은 아닙니다. 명공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궁파는 이 말을 듣고 그를 관청으로 불러들여 말하였다.
“경은 무슨 일로 왔는가?”
염장이 말하였다.
“왕에게 미움을 받아서 그대에게 의탁해 해를 면하려고 할 뿐입니다.”
“다행이로다.”
궁파는 이렇게 말하고는 술자리를 준비해 염장을 매우 환대하였다. 그러나 염장은 궁파의 장검으로 그를 베어 죽였다. 궁파 휘하의 군사들은 놀라고 두려워서 모두 다 땅에 엎드렸다. 염장은 이들을 이끌고 서울에 와서 보고하여 말하였다.
“궁파를 베어 죽였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매우 기뻐하며 상을 내리고 아간(阿干)의 벼슬을 내렸다.
아래 3장의 사진은 http://cafe.daum.net/hanbithealth에서 복사해 왔다.
삼척 노곡리 마을 옛 국도변에 서 있는 비로, ‘소공대’위에 놓여 있다.
조선 세종 5년(1423) 이곳 일대에는 대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거의 굶주림에 고통받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구하고자 황희 선생을 강원도 관찰사로 파견하였고, 이곳으로 부임해 온 황희는 정성을 다해 이들을 도와 마침내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백성들은 그 은혜를 잊지 않고 당시 황희가 가끔 쉬곤 하던 와현(瓦峴)이라는 고개에 돌을 모아 단을 쌓고 ‘소공대’라 이름하여 그의 공적을 기리고자 하였다. 이후 중종 11년(1516) 그의 증손인 황맹헌이 강원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이곳을 둘러본 뒤 보수를 하고 비를 세워두었는데, 비바람에 쓰러져 부러지고 말았다. 현재 남아 있는 비는 선조 때 삼척부사로 부임해온 그의 6대손 황정식이 옛 비를 치우고 그 터에 다시 세워놓은 것이다.
비는 낮고 널찍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의 윗면 양쪽이 둥글게 다듬어져 있다. 비몸 앞면 위쪽에는 ‘소공대비’라는 비의 명칭이 가로로 적혀 있다. 선조 11년(1578)에 세운 조선 중기의 일반적인 비의 형태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곤이 비문을 짓고, 려원군 송인이 글씨를 썼다.
아래 소공대비 사진 6장은 http://blog.naver.com/leehc7211/130190442390에서 복사해 왔다.
이 모텔 사장님이 친절하고 저녁 먹을 식당까지 추천해 주어서 잘 먹고 편히 쉬었다.
바로 옆에 있는 Sun모텔 사장님은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숙박료를 50,000원 달라기에 평일인데 10,000원 깎자고 했더니 여인숙 가란다.
그래서 옆에 있는 수모텔 가서 45,000원 주고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