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ngingman 2023. 3. 11.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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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평화누리길을 걸으면서 가다.
반구정은 황희 정승의 유적지로 위키백과에 의하면
"반구정은 조선 세종 때 유명한 정승이었던 황희(1363∼1452)가 관직에서 물러나 갈매기를 친구 삼아 여생을 보내시던 곳이다.
임진강 기슭에 세운 정자로 낙하진과 가깝게 있어 원래는 낙하정이라 불렀다.
반구정은 황희가 죽은 후 조상을 추모하는 전국의 선비들이 유적지로 보호하여 오다가 한국전쟁 때 모두 불타 버렸다. 그 뒤 이 근처의 후손들이 부분적으로 복구해 오다가 1967년 크게 고쳐 지었다.
건물 규모는 앞면 2칸·옆면 2칸이며,기둥 윗부분과 옆면 등에 꽃무늬 장식을 돌려 붙였다."
 
황희 정승은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본관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는 구부(懼夫), 호는 방촌(厖村). 황석부(黃石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균비(黃均庇)이고,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이며, 어머니는 김우(金祐)의 딸이다. 개성 가조리(可助里)에서 출생하였다.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일정 기간 은둔생활을 하며 고려 유신으로 지냈다[장수황씨 가문의 전승에 의하면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는 설화가 전하지만 역사적 사실이었는지는 판단할 수 없다]. 그러다가 1394년(태조 3)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出仕) 요청을 수용하여 성균관학관에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를 겸임하였다. 이후 직예문춘추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398년 문하부우습유(門下府右拾遺) 재직 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했다고 문책되어 경원교수(慶源敎授)로 편출되었다가, 1398년(정종 즉위년) 우습유로 소환되었다. 이듬 해 언사로 파직되었다가 그 해 2월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되었다.
언사로 파직되었으며, 곧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를 거쳐 형조·예조·이조·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 1)경 지신사(知申事) 박석명(朴錫命)이 태종에게 천거해 도평의사사경력(都評議使司經歷)에 발탁되었다.
그 뒤 병조의랑에 체직되었다가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 군기(軍機)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다. 1404년 우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인에 오르고, 이듬해 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되었다.
1409년 참지의정부사가 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대사헌 등을 지냈다.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해 질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1415년 이조판서 재직 중 송사(訟事) 처리와 관련해 육조에 문책이 내려지면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행랑도감제조(行廊都監提調)에 복위된 데 이어, 참찬·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에는 세자인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실행(失行)을 옹호하다가 다시금 파직되었다.
그 뒤 조정으로 복귀해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1418년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交河)로 유배되고, 곧 남원부에 이치(移置)되었다.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고 아울러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년(세종 4) 남원에서 소환,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1423년 예조판서에 이어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구휼하였다.
그리고 판우군도총제(判右軍都摠制)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대하였다. 1424년 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하였다. 또한 1426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1427년 좌의정 겸 판이조사가 되었고, 그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이어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약산성기(藥山城基)를 답사하였다. 이 때 약산이 요충지라 해서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한 뒤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하였다.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監牧)을 잘못해 국마(國馬) 1,000여 필을 죽인 일로 해서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太石鈞)의 일에 개입해 선처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일국의 대신이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할 뿐더러,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래서 한때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하였다. 1431년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다.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침착하였다. 그리고 사리가 깊고 청렴하며, 충효가 지극하였다. 학문에 힘써 높은 학덕을 쌓았으므로 태종으로부터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공신으로서 대우했고,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접견했으며,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할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농사개량에 유의해 곡식 종자를 배급하고, 각 도에 명령해 뽕나무를 많이 심어 의생활을 풍족하게 하였다. 또한 『경제육전(經濟六典)』을 펴내면서, 종래 원집(元集)과 속집(續集)으로 나뉘어 내용이 중복되고 누락되거나 내용과 현실이 괴리되는 것을 수정, 보완하였다.
한편, 국방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북방 야인과 남방 왜에 대한 방비책을 강구하였다. 그리고 예법을 널리 바르게 잡는 데에 노력해, 원나라의 영향이 지대한 고려의 예법을 명나라의 예법과 조선의 현실을 참작해 개정, 보완하였다.
또한, 인권에 유의해 천첩(賤妾) 소생의 천역(賤役)을 면제하는 등 태종대의 국가기반을 확립하는 데 공헌하였다. 세종대에는 의정부의 최고관직인 영의정부사로서 영집현전경연예문관춘추관서운관사 세자사 상정소도제조(領集賢殿經筵藝文館春秋館書雲觀事世子師詳定所都提調) 등을 겸대하였다.
그리고 중앙과 지방의 백성들의 마음을 진정(鎭定)시키면서, 4군6진의 개척,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였다. 특히, 세종 말기에 세종의 숭불과 연관해 궁중 안에 설치된 내불당(內佛堂)을 두고 일어난 세종과 유학자 중신 간의 마찰을 중화시키는 데 힘썼다."고 한다.
 
 
황희 정승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들이 있다.

흔히 *두 마리 소 이야기'나 **'종들의 다툼 이야기'**가 유명하며, 그의 관용과 청빈함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 두 마리 소 이야기
황희 정승이 벼슬에서 물러나 잠시 쉬고 있을 때의 일화입니다.

상황: 어느 날 황희가 길을 가다가 밭을 가는 농부를 보았습니다. 농부는 누런 소와 검은 소 두 마리로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질문: 황희가 농부에게 다가가 별 뜻 없이 "두 소 중에서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하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농부의 대답: 농부는 밭을 갈던 손을 멈추고 황희에게 다가와 귀엣말로 "검은 소가 더 잘합니다"라고 속삭였습니다.

이유: 황희가 왜 귀엣말로 하느냐고 묻자, 농부는 "소가 비록 짐승이지만 자기가 못났다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서운하겠습니까? 어느 한 쪽을 편애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려는 배려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교훈: 이 일화는 황희 정승이 **역지사지(易地思之)**와 배려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로 전해집니다.

🗣️ 두 종의 다툼 이야기 (네 말이 옳다)
황희 정승의 관대함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상황: 황희 정승 댁의 두 계집종이 크게 다투고 황희 정승에게 찾아와 서로의 잘못을 고하며 하소연했습니다.

첫 번째 종: 먼저 온 계집종이 자신의 억울함과 상대방의 간악함을 길게 늘어놓았습니다. 황희 정승은 그 이야기를 듣고 **"네 말이 옳다."**라고 말했습니다.

두 번째 종: 잠시 후 다른 계집종이 찾아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이 피해를 입었음을 호소했습니다. 황희 정승은 그 이야기도 듣고 **"네 말이 옳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부인의 지적: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황희 정승의 부인이 "어떻게 두 사람의 말이 모두 옳을 수 있습니까?" 하고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황희의 대답: 황희 정승은 부인에게 **"부인 말도 옳소."**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의미: 이 이야기는 황희 정승이 갈등 상황에서 섣불리 한쪽 편을 들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원만함과 아량을 보여주었다는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 아이들과의 일화 (노비의 자식까지도)
황희 정승의 자상함과 인간 존중을 엿볼 수 있는 일화입니다.

상황: 황희 정승이 손님과 술상을 차려놓고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어린 아이 몇 명이 방으로 뛰어 들어왔습니다.

아이들의 행동: 아이들은 거리낌 없이 황희의 수염을 잡아당기고, 상 위의 음식을 집어 먹는 등 장난을 쳤습니다.

황희의 태도: 황희는 아이들을 야단치지 않고 "오냐, 오냐" 하면서 다정하게 달래 밖으로 내보내고는 태연하게 손님과 대화를 계속했습니다.

손님의 질문: 손님이 "대감께서는 손자들을 굉장히 귀여워하시나 봅니다"라고 물었습니다.

황희의 대답: 황희 정승은 **"아까 그 아이들은 우리 집 노비의 자식들이네. 나를 아주 잘 따르지."**라고 대답하며, 결례가 되었다면 미안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인간 존중: 이는 당시 엄격했던 신분 사회에서 노비의 자식에게도 스스럼없이 자상하게 대했던 황희 정승의 인권 의식과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반구정 입구

 
 

방촌 황희 정승 기념관

 
 
이 기념관 안에 아래 전시물들이 있다.

 
 
 

 
 
 

맹사성 기념관에 가도 이런 글들이 있다.
 
 

 
 
 

 
 
 

 
 
 

 
 
 

 
 
 

 
 
 

 
 
 

 
 
 

 
 
 

 
 
 

 
 

 
 
 

조선 시대 가장 뛰어난 정치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황희 정승

그의 사위가 살인 사건에 연루되자 그도 사람인지라 실수한 적이 있긴 하지만... 
 

 
 
 

 
 
 

 
 
 

 
 
 

 
 
 

 
 
 

 
 
 

 
 
 

 
 
 

 
 
 

 
 
 

고려와 조선 왕조를 다 섬겼다.

 
 

 
 
 

 
 
 

 
 
 

 
 
 

 
 
 
 
 


 

 



 
 
 

 
 
 

 
 
 

앙지대에서 바라본 임진강

 
 

 
 
 

반구정은 임진강을 내려다 보는 언덕 위에 서 있다.

 
 
 

 
 
 

 
 
 

반구정 안에는 편액들이 있다.

 










아래는 위 글들의 해석







 

반구정에서 바라 본 임진강

 
 

 
 
 

 
 
 

 
 
 

 
 
 

 
 
 

반구정 담장 밖에 있는 소명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