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mple tour

강화 전등사 20-11-11

singingman 2023. 4. 13.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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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교감 부부와 함께 정족산성을 돌다가 들어가다.

산성을 따라 한바퀴 돌면 저절로 절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남문이나 동문에서 들어가면 입장료 3,000원과 주차비를 따로 내어야 하지만 이렇게 가면 등산도 하고 절도 공짜로 들어갈 수 있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진종사(眞宗寺)라고 했다고 하나 고려 중기까지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그 뒤 1266년(원종 7) 중창하였고, 충렬왕의 비인 정화궁주(貞和宮主)가 1282년(충렬왕 8) 승려 인기(印奇)에게 부탁해서 송나라의 대장경(大藏經)을 간행하여 이 절에 보관하도록 하고, 또 옥등(玉燈)을 시주했으므로 절이름을 전등사로 고쳤다 한다. 그러나 현재 그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그 뒤 1337년(충숙왕 복위 6)과 1341년(충혜왕 복위 2) 이 절의 승려들이 중수하였다. 1605년(선조 38) 불이 나서 전체 건물의 반 가량이 타 버렸고, 1613년(광해군 5) 12월 또다시 불이 나서 나머지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듬해 4월지경(志敬) 등이 중심이 되어 재건을 시작해서 1625년(인조 3) 2월 옛 모습을 되찾았다.

1678년(숙종 4) 조정에서 실록을 이곳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서 조선왕실의 비호를 받게 되었으며, 1707년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다시 별관을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이름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하였다. 1719년 이 절의 최고 승려에게 도총섭(都摠攝)이라는 직위를 부여했는데, 이는 1910년까지 계속되었다.

1726년(영조 2)영조가 이곳에 와서 취향당의 제액(題額)을 써 주고 고쳐 걸게 하였으며, 1734년 곡식 수십 석을 하사하였다.

또한, 1749년 2월 이 절의 중수불사(重修佛事)가 당시의 총섭 초충(楚充)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는데, 중수에 쓰인 재목의 대부분은 영조가 시주한 것이며, 이때 대조루(對潮樓)도 함께 건립되었다. 또한, 1761년 대연(大演)이 법당의 삼존불을 개금(改金)하였다.

1784년(정조 8) 정족창(鼎足倉)이 세워졌는데, 규모가 4, 5칸에 불과했으나, 1828년(순조 28) 양곡 5,000석을 보관할 수 있는 40∼50칸으로 확장되어 시설절목(施設節目)까지 마련되었다.

1839년(헌종 5) 서룡(瑞龍)을 비롯한 14명의 승려가 시왕전(十王殿)을 수리하고 담장 등을 보수하였다. 1841년 연홍(演弘) 등이 대조루를 중건하였고, 1855년(철종 6)규영(奎營) 등이 대웅전을 중수했으나 이때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1871년(고종 8) 포량고(砲糧庫)를 이 절에 건설하였고, 1872년 승군(僧軍) 50명과 총섭 1명을 두고 진상약애고(進上藥艾庫)와 산성별장소(山城別莊所)를 절 남쪽에 건설하였다.

1876년에는 효월(孝月)이 대웅전과 약사전을 중수하였다. 1884년 3월영담(映潭)이 관음암(觀音庵)을 중수하였고, 1905년 주지 서룡이 비로전의 불상과 약사여래 및 칠성탱(七星幀)을 개금불사(改金佛事)하였다.

1909년 오랫동안 이 절에 보존되었던 사고장본(史庫藏本)을 서울로 옮겼고, 1910년 당시의 군수 한영복(韓永福)이 이 절에 전래되어 오던 유물인 동향로를 궁내부(宮內府)에 바치고, 중수비 200원(圓)을 받아 절에 내렸다.

1912년 조선불교 30본산(本山)의 하나로 강화·개성 등 6개 군에 소재하는 34사찰을 관리하는 본산으로 승격되었다. 초대 주지는 김지순(金之淳)이었고, 2대 주지는 국창환(鞠昌煥)이었다.

1915년 국창환은 국고보조를 얻어 대웅전을 중수하였고, 1916년 신도들의 기부금으로 시왕전과 대조루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다.

1928년 3대 주지 이지영(李智永)이 지장상(地藏像)을 개금하고 명부전(冥府殿)을 다시 세우는 한편, 적묵당(寂默堂) 30여 칸을 수리하고, 식당 26칸의 기와를 바꾸는 대불사를 이룩하였다.

1932년 6대 주지 이보인(李普仁)이 국고보조금과 신도의 기부금으로 대웅전과 극락암(極樂庵)을 중수하고, 적묵당(寂默堂)·강설당(講說堂)·대조루·명부전·극락암 등을 중건하였다.

8대 주지 김정섭(金正燮)은 1934년 전문강원(專門講院)을 설립하고 안진호(安震湖)에게 부탁하여 사료를 모아 『전등본말사지 傳燈本末寺誌』를 편찬, 발행하였다.

1973년에 적묵당을 해체·복원했으며, 1977년 명부전을 해체해서 이전하고 종각을 신축하였다. 1979년 명부전을 중건했으며, 1986년에 극락암과 삼성각을 해체 및 증·개축하여 오늘에 이른다.

가람 배치는 전형적인 산지가람(山地伽藍)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 절 입구의 대조루를 지나면 정면 남향한 대웅보전이 있고, 그 주위에는 약사전·명부전·삼성각·향로전·적묵당·강설당·종각·대조루(對潮樓) 등이 있다.

대웅전은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석가·아미타·약사 여래의 삼불과 1916년에 그린 후불탱화, 1544년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한 『법화경 法華經』 목판 104매가 보관되어 있다.

대웅전 네 귀퉁이 기둥 위에는 여인의 형상이라고 하는 나녀상(裸女像)이 추녀의 하중을 받치고 있는데, 이에 관한 재미있는 설화가 전한다.

광해군 때 대웅전의 공사를 맡았던 도편수가 절 아랫마을에 사는 주모에게 돈과 집물을 맡겨 두었는데, 공사가 끝날 무렵 주모는 그 돈과 집물을 가지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에 도편수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어 그 여자를 본뜬 형상을 나체로 만들어 추녀를 들고 있게 하였다. 그럼으로써 불경 소리를 듣고 개과천선하도록 하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악녀를 경고하는 본보기로 삼게 했다고 전한다.

보물 제179호인 강화 전등사 약사전 내부에는 선정인(禪定印)을 취한 약사여래(藥師如來)가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내부에는 지장보살상을 비롯한 10구의 시왕(十王), 2구의 귀왕(鬼王), 2구의 판관(判官), 2구의 녹사(錄事), 2구의 장군(將軍), 10구의 동자(童子) 등 29구의 존상이 있다.

이 밖에 향로전은 대웅전의 분수승(焚修僧)이 거처하는 곳으로 현재는 주지실로 대용되고 있고, 적묵당과 강설당은 본래 대웅전에서 서로 마주보는 위치에 건립되었던 것으로 두 건물은 선원(禪院)과 강원(講院)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철종과 보물 제1785호 전등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보물 제1786호 전등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45호인 전등사 법화경판이 있다. 철종은 우리 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한 중국 종으로, 민족항일기 말기의 군수물자 수집공출 때 빼앗겼으나, 1945년 광복과 함께 부평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 절로 돌아오게 되었다. 또한, 법화경판은 귀중한 장경판으로서 본래 105매였으나, 1매는 6·25전쟁 때 파주의 모 부대에서 가져갔다고 한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옥등이 있다. 청동수조의 유래는 잘 알 수 없으나 산화된 상태로 보아 고려시대의 유물로 보이며, 옥등은 대웅전 안에서 불을 켜던 것이다. 또한,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된 대조루에는 선원보각(璿源譜閣)·장사각(藏史閣)·취향당 등의 편액이 남아 있고, 사찰 경내에는 70여 년 이래로 은행이 한 톨도 열리지 않았다고 전하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있다.

 

 

정족산성 남문이 전등사 들어오는 문이기도 하다.

 

 

이목당 서운 대종사 승탑이 있다.

 

 

 

 

 

 

 

 

 

 

 

 

 

 

 

 

 

 

 

 

 

 

 

 

 

 

 

 

 

 

 

 

 

 

 

 

 

 

 

 

 

 

 

 

 

 

 

 

 

 

대웅전

다음 백과에 의하면

전등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178호. 1916년 해체·수리할 때 발견된 〈양간록 樣間錄〉에 따르면 이 건물은 1605년에 일어난 화재로 일부가 불타버린 뒤 1614년 12월 또다시 불이 나 완전히 소실된 것을 당시 사승(寺僧)이었던 지경이 이듬해에 재건하기 시작하여 1621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한편 1855년(철종 6) 화주(化主) 규형(奎瑩)에 의해 대웅전이 중건되었다는 〈전등본말사지 傳燈本末寺誌〉의 기록과 지붕을 덮었던 기와의 명문 중에 1876년(고종 13) 효월화주(孝月化主)가 대웅전과 약사전의 지붕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어 이 건물의 건립연대는 조선 중기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자연석으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앞면에는 3짝의 분합문으로 된 빗살문을 달았으나 옆면에는 한쪽에만 출입문 1짝이 있고 다른 면은 벽으로 막혀 있다. 기둥은 배흘림으로 처리했고 그 위에는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차례로 올려놓았는데, 귓기둥이 약간 위로 향하고 있어 귀솟음을 강조했다. 공포는 외이출목(外二出目)·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기둥 사이마다 짜올렸으며 앙서[仰舌]와 수서[垂舌]로 장식된 살미첨차는 끝부분이 밖으로 뻗으면서 강한 곡선을 이루고 있어 조선 중기 사원건축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다포계(多包系) 양식으로 되어 있다. 기둥의 네 귀퉁이 위에는 추녀를 받들고 있는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는 점이 특이한데 이 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즉 광해군 때 이 법당을 지었던 도편수(都片手)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으나 그가 불사에만 전념하는 사이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을 가버리자 도편수는 식음을 전폐하고 일을 하지 않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법당을 다시 짓기 시작했는데, 기둥 위에 여인의 나체상을 조각하여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또 머리 위에는 무거운 지붕을 얹어 고통을 줌으로써 자신을 배반한 여인에게 복수했다는 내용이다. 내부에는 고주를 세우지 않고 평주 위에 대들보가 걸쳐 있으며 그 위에는 동자기둥이 받치고 있는 종량(宗樑:마룻보)이 설치되어 있다. 불단은 조각과 색채가 뛰어나며 그 위에 안치된 석가삼존불은 1761년(영조 37) 대연(大演)에 의해 개금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후불탱화는 화기(畵記)에 따르면 1880년(고종 17)에 유담(柔談) 대사의 화주가 조성했다고 한다. 그 양 옆으로는 목조 사자 등에 동판 업경대(業鏡臺)가 놓여 있는데 이는 황천 가는 길목에 두는 것으로 죽은 사람이 그 앞에 서면 이승에서 행한 선악 행적이 모두 비친다는 것이다. 불단 위에는 목조건축의 포작(包作)을 여러 겹으로 포개서 장식한 닫집을 마련했으며 그 아래로 용·극락조·연꽃 등이 여러 장식판과 함께 달려 있다. 천장은 우물천장으로 색채가 선명한 단청과 비천문, 연꽃무늬 등이 조화를 이루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모서리 추녀 밑에 벌거 벗은 사람의 모습을 조각하였는데.... 전설에 따르면 목수의 재물에 손을 댄 주막 여인의 나쁜 짓을 꾸짖어 하루 세 번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라고 추녀 밑에서 지붕을 받치고 있습니다. 옛 스님들이 중생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만든듯합니다

[출처] [강화] 전등사에 봄이 오고 있다|작성자 간JINA

 

 

문화재 T.V에 의하면

이 전등사 대웅전에서 눈여겨 볼 것은 바로 전등사의 추녀를 받치고 있는 조각상이다. 이 조각상을 살펴보면 벌거벗은 사람의 모습을 한 채로 쪼그려 앉아 추녀를 받치고 있다. 연붉은색을 한 이 조각상은 대웅전의 사방 모퉁이마다 배치돼 있다. 이 조각상에 대해서는 나부상, 원숭이, 나찰 등 다양한 견해가 갈린다.

이 조각상에 대한 의견들이 이렇게 갈리게 된 이유는 이 조각상 하나에 전해지는 이야기들 때문이다. 그 각각의 이야기들을 파헤쳐 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나부상에 관한 이야기다. 전설에 따르면 당시의 대웅전 건축을 담당한 도편수가 있었다. 그는 공사 도중 한 주막의 주모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도편수는 자신이 돈을 벌 때마다 주모에게 건네주었다. 도편수는 여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고, 계속해서 여인에게 돈을 주었다.
도편수는 어느날도 다름없이 주모를 생각하며 대웅전 공사를 하고 있었다. 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그가 주모를 찾아갔으나 여인은 온데간데 없이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도편수는 여인에 대한 배신감에 화가 치밀었다. 그의 분노는 작업현장인 대웅전 공사까지 전해졌고 대웅전 공사가 끝났을 때에는 대웅전 네 귀퉁이의 처마 밑에는 나부상이 만들어졌다.
두 번째는 원숭이상에 관한 이야기다. 이것은 한글대장경 『육도집경』에 나오는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다. 전생에 석가모니는 500마리 원숭이의 왕이었다고 한다. 원숭이 왕은 번뇌가 많은 원숭이들이 잘 살 수 있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번뇌를 잊고자 하는 의미에서 원숭이로 조각되었다는 것이다. 다만 앞의 이야기에 나온 도편수가 여인을 원숭이로 조각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
이러한 이야기들 외에도 다른 주장들이 있다. 인천시립박물관의 신은미 유물관리부장은 이 조각상에 대해 불교미술사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
“다양한 전설과 이야기가 있지만 불교미술사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불교의 수문장이나 수호자의 역할을 했던 야차상의 한 종류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불교적인 의미로는 나부상이라기보다는 야차상의 한 계통으로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야차'는 원래 불교에 있던 존재는 아니지만 고대 인도의 불교는 다양한 종교에 대해 포용력을 보였다. 야차신앙도 불교에 포용되서 전파되는 과정에서 불교의 수호신으로 되었다. 실제로도 이 조각상이 취한 쪼그려 앉은 채로 무언가를 떠받치고 있는 모습은 야차신앙에서도 흔히 발견되고 있다. 즉, 나부나 원숭이가 아닌 불교의 수호자라는 관점도 존재한다.
강화 전등사 대웅전은 그자체로도 훌륭한 보물이지만, 이 처마 끝의 이 조그만 조각상 하나에도 수많은 이야기가 있고 연구할 주제들이 많다. 단지 대웅전의 큰 모습만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조각상의 이야기도 알고 보면 새로운 관점에서 대웅전을 감상할 수 있다.

출처 : cpn문화유산 문화재TV(http://www.icpn.co.kr)

 

 

 

 

 

 

 

 

 

 

 

 

 

 

 

 

 

대웅전 안 삼존불

 

 

 

 

 

 

 

 

 

 

 

 

 

 

산신령

 

 

치성광 여래 - 북두칠성

 

 

나반존자

 

 

주련들을 설명했다.

 

 

 

 

 

 

 

 

 

 

 

정족산 사고

다음 백과에 의하면

정족산사고가 설치된 계기는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가 1653년(효종 4) 11월 실록각(實錄閣)의 실화사건(失火事件)으로 많은 사적들을 불태우게 되자 새로이 정족 산성 안에 사고 건물을 짓고, 1660년(현종 1) 12월에 남은 역대 실록들과 서책들을 옮겨 보관하게 되면서부터이다.

≪태조실록≫에서 ≪인조실록≫까지는 처음부터 봉안되었고, ≪효종실록≫은 1661년 11월에 봉안되었다. 그리고 1664년 12월에는 무려 223권에 달하는 실록들을 개사(改寫)하였다. 1665년 9월에는 그 동안 낙권(落卷)이 되어 있던 부분을 새로 등서(謄書)해 채워 넣었다.

≪현종실록≫은 1683년(숙종 9) 3월에 완성, 봉안되었으며, ≪숙종실록≫은 1728년(영조 4) 3월에 완성, 봉안되었다. ≪경종실록≫은 1732년 2월에 완성되었으나 노론에 대해 불리한 기사가 많다는 이유로 1778년(정조 2) ≪영조실록≫과 함께 다시 ≪경종수정실록≫이 편찬되기 시작해 1781년 7월에 완성, 봉안된 것이다.

≪정종실록≫은 1805년(순조 5) 8월에, ≪순조실록≫은 1838년(헌종 4) 윤4월에 각기 완성, 봉안되었다. 그리고 ≪헌종실록≫은 1852년(철종 3) 9월에 인쇄해 각 사고들에 봉안했으며, ≪철종실록≫은 1865년(고종 2) 윤5월에 인쇄해 봉안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 때에 강화도를 일시 점거한 프랑스의 해병들에 의해 정족산사고의 서적들이 일부 약탈되기도 하였다. 이 사고에 봉안되었던 역대 실록 및 서적들은 서울로 가져가기도 하고, 일부는 약탈되는 등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춘추관(春秋館)의 관장 하에 관리되어왔다.

대한제국시대에는 의정부에서 관원이 파견되어 강화군수와 협력하여 관리하고 포쇄(曝曬)를 실시하며 보존하였다. 그러나 1910년 일제가 국권을 빼앗은 뒤부터 정족산 사고본은 태백산사고의 실록들 및 규장각의 도서들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移藏)되었다. 이 후 1930년에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으로 옮겨진 뒤, 광복으로 경성제국대학이 서울대학교로 개편, 발전되면서 서울대학교에 옮겨 보존, 관리되고 있다.

현재 정족산사고지(鼎足山史庫址)는 정족산성 안 전등사 서쪽 높이 150m에 위치하며, 사고지의 보호철책 안쪽에는 주춧돌들이 놓여져 있다. 또한, 성내에는 수호사찰(守護寺刹)인 전등사에서 사고를 보호해왔으므로 1910년 조선총독부 학무과 분실로 실록과 서적들이 옮겨질 때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사고 건물이 언제 없어졌는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사고의 사진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는 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고 건물에 걸려 있었던 ‘장사각(藏史閣)’과 ‘선원보각(璿源寶閣)’이라 쓰인 현판이 전등사에 보존되어 있다.

이 사고에 보관되어오던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많은 변동은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 유일본으로 남은 전주사고본이 묘향산사고로 피난했다가 마니산사고로 옮겨졌고, 이 마니산사고본의 실록을 옮겨서 보관, 관리해 오늘에 전해질 수 있게 된 것이다. 현재 정족산사고본 실록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보존,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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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등사의 종각에 있는 중국 북송시대의 종. 보물 제393호. 높이 164cm, 입지름 100cm. 몸체에 새겨진 '大宋懷州修武縣百巖山崇明寺紹聖丁丑歲丙戌念三日鑄鐘一顆'라는 명문에 의하면, 원래 중국 허난 성[河南省] 회경부 수무현 백암산에 위치한 숭명사에 있던 것으로 1097년에 주조된 것이라고 전한다.

이 중국 종이 어떤 경위로 전등사에 전해지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말 군수물자 수집 때 강제로 빼앗겼다가 8·15해방 후 부평 군기창에서 발견되어 다시 전등사로 옮겨왔다고 한다.

철제로 만들어진 종으로 우리나라 범종과는 달리 정상에 음통(音筒)이 없고 다만 2마리의 용이 서로 맞대고 있는 용뉴가 달려 있으며 그 주위에는 복련의 연꽃무늬를 돌렸다. 어깨부분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돌려진 횡선대 사이로 9개의 화판(花瓣)과 팔괘가 장식되어 있는 점이 특이하다. 몸체는 여러 개의 선으로 8개의 방형 구획을 마련하고 그 안에 명문이 새겨져 있으나 마멸이 심하여 완전하게 해독하기 어려우며, 명문에 종이 주조된 지방이나 절·연대·시주인·장인(匠人) 등의 이름이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중국 원나라 장인이 만든 고려시대의 개성연복사종(1346)과 매우 유사하며, 11세기 이후 특히 조선시대에 유행하게 되는 중국 종의 시원적인 양식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전해지고 있는 몇 개의 중국 종 가운데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전등사 대웅전의 서북쪽에 있는 조선 중기의 목조건물. 보물 제179호.

이 건물의 창건연대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지붕의 막새기와 중에 1896년 대웅전과 함께 기와를 중수했다는 명문이 있고, 또 건물의 구조나 양식으로 보아 대웅전과 거의 같은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규모가 작은 건물이다.

계단식의 기단 위에 배흘림으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로 공포를 짜올린 다포식 계통으로 되어 있다. 앞면에는 2분합의 빗살문을 달고 옆면과 뒷벽은 벽으로 막았다. 공포는 외일출목·내이출목으로, 살미첨차의 끝은 모두 앙서로 되어 있으나 평방을 사용하지 않고 창방 바로 위에 공포를 얹어놓은 점은 일반적인 다포식과는 달리 주심포 양식을 따르고 있다. 건물 앞쪽에는 기둥 사이에 공간포를 배치했으나 양 옆면과 뒷면에는 공간포 없이 화반만 설치한 점도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내부에는 평주 양 옆으로 대들보가 놓여 있고 그 위에는 동자기둥이 받치고 있는 종보가 있다.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고 뒤쪽 한가운데 있는 불단에는 석조약사불좌상이 놓여 있다. 천장은 역시 우물천장이며 그 주위에는 연꽃과 비천문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동문 나가는 길

 

 

 

 

 

 

 

 

 

 

 

 

 

 

전등사 동문

 

 

 

 

 

산성 올라가는 길

 

 

 

 

 

 

 

 

 

 

 

 

 

 

정족산성에서 내려다 본 강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