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산 광륜사 22-03-26
북한산 둘레길 돌면서 들르다.
큰 절은 아니고 신정왕후와 관련이 있는 절이라고 절앞에 소개되어 있다.
신정왕후를 다음 백과에서 찾아봤더니
효명세자의 부인. 순조·헌종·철종·고종의 4대를 지내면서 궁중의 최고 어른으로 거듭난 그녀는 효명세자의 유업을 달성하기 위해 흥선군 이하응과 손잡고 고종을 즉위시킴으로써 망국의 조선에 재기의 불씨를 제공했다.
일찍이 정조는 죽기 직전 자신의 모든 노력이 노론 벽파와 외척 경주 김씨에 의해 물거품이 될 것을 염려하여 순조의 장인으로 예정된 시파의 리더 김조순에게 왕실의 보위를 부탁했다. 그런데 시파가 우여곡절 끝에 벽파를 궤멸시키고 정권을 거머쥐자 어린 순조는 허수아비 국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정에서는 안동 김씨와 그들의 추종자들이 정권을 농단했고, 지방에서는 탐관오리들의 가렴주구로 인해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그로 인해 왕권이 땅에 떨어지자 순조는 정사에 염증을 느끼고 맏아들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다.
불과 19세의 젊은 나이에 국정을 위임받은 효명세자는 조만영과 조인영 등 풍양 조씨 인사들의 조력을 받아 탐관오리의 징치, 과거제도의 정비 등 다양한 개혁정책을 추진했고, 진찬연의 확대를 통해 자연스러운 왕권의 신장을 노렸다. 그 결과 신권의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안동 김씨 세력의 일방통행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하지만 세도정권의 조직적인 반격과 연이은 천재지변의 덫에 걸린 세자가 대리청정 4년 만에 세상을 떠나면서 개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안동 김씨는 헌종이 즉위하면서 재기한 풍양 조씨와 잠시 공동정권 체제를 유지했지만 헌종 사후 철종이 즉위하자 풍양 조씨를 몰아내고 정권을 독점했다. 신정왕후 조씨는 그들이 남편의 유지를 파괴하고 본가인 풍양 조씨 일문을 핍박하자 분개했지만 세력이 미약했으므로 은인자중하며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병약한 철종이 승하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그녀는 철인왕후 김씨보다 한발 앞서 대보를 확보하고 흥선군의 둘째아들 이재황을 보위에 올림으로써 역전의 계기를 마련했던 것이다.
신정왕후 조씨는 1808년(순조 8년) 12월 6일, 서울의 두모포 쌍호정에서 아버지 조만영과 어머니 은진 송씨 사이에 태어났다. 쌍호정은 애초에 쌍호정(雙湖亭)으로 불렸지만 신정왕후 조씨가 태어나던 날 밤에 집 앞에 호랑이 두 마리가 나타났다 하여 호수 호(湖) 자를 범 호(虎) 자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녀는 11세 때인 1819년(순조 19년) 효명세자와 국혼을 치르고 세자빈에 책봉되면서 역사에 이름을 올렸다. 남편 효명세자는 숙종 이후 처음으로 왕비에게 태어난 적장자로 왕실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고, 외가는 확고부동한 권력을 쥐고 있는 안동 김씨 일문이었다.
그해 4월 순조는 왕세자 가례를 위한 금혼령을 내렸고, 5월 6일 초간택, 19일 재간택, 8월 11일 3간택을 통해 부사직 조만영의 딸을 세자빈으로 낙점했다.
풍양 조씨의 대표주자였던 조만영은 대마도에서 구황작물로 고구마를 들여온 이조 판서 조엄의 손자요, 이조판서 조진관의 아들이다. 그는 일찍부터 기개가 뛰어나 중신들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은 강골이었다.
풍양 조씨 가문에서 세자빈이 나온 것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의 국혼에 조문명의 딸이 간택된 이래 두 번째였다. 이는 가문 본래의 명성과 함께 안동 김씨와의 정치적 관계, 효명세자에게 힘을 실어주려는 국왕 순조의 강력한 의지가 두루 작용한 결과였다.
그 무렵 풍양 조씨는 노론 벽파의 일원이었지만 청렴하고 강직한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관료사회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일례로 정조 즉위 초기 신정왕후의 할아버지 조진관은 평안도 관찰사로 재임하던 아버지 조엄이 백성들을 괴롭힌 죄로 탄핵을 받자 모함을 받았다며 궐내에 들어와 신문고를 두드렸다.
조진관은 그 일로 감옥에 갇히자 칼로 자해까지 하면서 무죄를 주장했다. 얼마 후 조엄의 혐의가 무고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정조로부터 올곧은 성정을 인정받은 조진관은 비변사 당상에 임명되었다. 수원유수로 재임하던 1806년(순조 6년) 벽파가 몰락한 병인경화가 일어나 노론 벽파의 대부분이 조정에서 쫓겨났지만 그는 탄핵받지 않고 예조판서, 호조판서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한편 풍양 조씨는 정조 이래 안동 김씨와 정치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만영의 종형인 조득영은 노론 벽파가 몰락하는 병인경화(丙寅更化)의 시발점이 된 김달순 탄핵상소를 올려 의리를 회복했다는 찬사와 함께 이조참판으로 승진했다. 1812년(순조 12년)에는 순조의 외삼촌 박종경의 비리를 상소하여 훈련대장에서 사직하게 함으로써 안동 김씨가 조정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일로 조득영은 진도 금갑도로 유배되었지만 곧 향리로 이배되었고, 1819년(순조 19년) 유배에서 풀려나면서 가문의 여식이 세자빈으로 간택되는 경사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조씨의 세자빈 간택에는 국왕 순조의 의지도 크게 작용했다. 순조는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난 뒤 의욕적으로 친정에 임했다. 전국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정을 살폈고, 《만기요람》을 통해 국가의 재정·군제·토지에 관한 내용을 파악했다. 또 무예청의 군병을 늘려 친위세력을 강화했다. 하지만 1811년(순조 11년)에 일어난 평안도의 농민전쟁으로 인해 왕권 회복에 대한 의지가 꺾이면서 안동 김씨 세력이 조정을 장악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순조는 김재찬, 이서구 등 반척족인물을 등용하여 안동 김씨를 견제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정치에 흥미를 잃었다. 그리하여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기로 하고 우선 인재가 많이 포진하고 있는 풍양 조씨와의 국혼을 치름으로써 세자에게 힘을 실어주고자 했다. 애초에 순조는 세자빈 초간택에서 세자익위사 김로의 딸에게 관심을 보였다. 김로는 순조가 믿고 의지하던 김재찬의 조카로 효명세자 사후 ‘익종4간신’으로 지목되었을 만큼 왕실의 신임을 받았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의 딸은 재간택 도중 학질에 걸려 세자빈 후보에서 제외되는 불운을 겪었다.
세자의 가례는 《국조오례의》에 입각하여 전통적인 육례로 진행되었다. 청혼의식인 납채는 9월 20일, 예물을 보내는 납징례는 9월 29일, 혼사날짜를 알리는 고기례는 10월 2일, 세자빈으로 책봉하는 책빈례는 10월 11일이었다. 이 행사는 모두 경희궁 숭정전에서 치러졌다.
10월 13일에는 숭정전에서 왕에게 훈계를 받는 초계례, 산 기러기를 가지고 별궁에 가서 신부와 인사하는 친영례, 신부를 데리고 경희궁에 돌아와 광명전에서 술과 음식을 나누고 첫날밤을 치르는 동뢰연이 행해졌다. 이튿날 아침 신랑신부는 왕과 왕비에게 아침인사를 올리는 조현례를 행했다. 그날 순조는 숭정전에 나가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교문을 발표하면서 며느리를 맞는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세자빈 조씨는 품성이 온순했고, 덕성은 천성으로 타고났다. 규방의 예의를 극진히 갖추었기에 좋은 소문이 자연스럽게 밖에 드러나고, 스승의 가르침이 번거롭지 않아도 몸가짐은 예법에 맞았다. 오래도록 덕을 쌓아 상서를 길렀으니 특이한 품질을 받아 태어났고, 아름다움이 드러났으니 원량의 배필로 마땅하다.”
세자 부부는 다음날 아침 왕대비전에 문안을 올림으로써 혼례의 공식 일정을 모두 마쳤다. 그때부터 세자의 장인 조만영은 승진을 거듭해 이조 참의, 성균관 대사성, 금위대장 등을 역임했다. 때마침 그의 동생 조인영도 추사 김정희와 함께 치른 과거에서 장원급제하여 홍문관 응교에 제수됨으로써 형의 백만대군이 되었다.
아들을 얻고 남편을 잃다
1822년(순조 22년) 11월 11일 세자빈 조씨는 홍역을 앓았다. 형조참판이었던 아버지 조만영은 궁궐에 들어와 시시각각 딸의 병세를 살폈다. 다행히 반점이 겉으로 발산되었으므로 12월 2일 약원들의 비상이 해제되었다. 그런데 다음에는 효명세자가 홍역을 앓아 순조가 기겁을 했다. 하지만 세자 역시 홍역의 약재인 마진방을 쓰지 않고도 나았다. 순조는 얼마나 기뻤던지 교문을 발표하고 그 동안 세자 부부의 치료에 참여한 관리들을 포상했다.
“반점이 만발한 꽃과 윤택한 구슬처럼 얼굴에서 사지까지 퍼지더니, 마치 봄이 돌아와 눈이 녹듯이 땀이 줄줄 흐르다가 대뜸 멎어버렸다. 더구나 열흘 사이에 양궁이 경사를 함께 보았으니 만년에 행복의 터전이 되었다.”
조만영은 그때부터 순조의 각별한 관심 속에 요직을 도맡았다. 1825년(순조 25년)에는 풍수재해가 잇따르자 6월에 비변사 제조, 10월에는 금주령을 단속하는 법사의 당상에 임명되었고, 11월에는 예조판서가 되었다.
1827년(순조 27년) 2월 9일 순조는 건강 악화를 이유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했다. 당시 순조의 나이 38세, 세자는 19세였다. 전례에 따라 순조는 인재 등용, 형벌 집행, 군사권을 관장하고 나머지 서무는 모두 세자가 직접 처결하게 되었다.
그해 7월 18일, 드디어 세자빈 조씨가 원손을 낳았다. 과거 효명세자에 이어 또 다시 왕실의 적장자가 태어나자 궁궐에는 화기가 맴돌았다. 순조는 매우 기뻐하면서 모든 행사를 관례대로 치르게 한 다음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 대각의 신하, 약원의 세 제조를 함인정으로 불러 치하했다.
대리청정을 시작하자마자 아들까지 얻은 효명세자는 의욕적으로 국정 개혁에 나섰다. 우선 안동 김씨 일파가 장악하고 있던 비변사 당상들을 감봉 조치함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어서 초산 출신의 탐관오리 서만수를 징치하고 우의정 심상규를 축출했으며 부왕 순조를 기만한 조봉진을 유배형에 처했다.
세자는 또 세도가문의 등용문으로 변질된 과거제도의 부정과 비리를 혁파하고 50여 차례의 과거를 실시하여 전국의 인재들을 끌어 모았다. 이때 김로, 홍기섭, 김노경, 이인부 등의 신진세력이 조정에 대거 진출했다. 이들은 대부분 외척의 세도정치를 반대하는 노론 청명당 계열이었으므로 안동 김씨 일문은 자못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세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장인 조만영과 그의 동생 조만영, 조종영, 조병현 등 풍양 조씨 일문을 중용했다. 이들 외에도 추사 김정희와 서준보, 서희순, 권돈인, 풍양 조씨와 사돈 관계인 이지연, 이기연 등이 세자를 굳건하게 보좌했다.
이어서 세자는 세도정권의 일방독재로 유명무실해진 왕권을 되살리기 위해 예악이라는 기발한 무기를 꺼내들었다. 연산군 이래 조선에서 예악이란 혼군의 상징이자 말세의 표상이었다. 하지만 효명세자는 부왕에 대한 효성을 빌미로 전례 없이 화려한 궁중연회를 주관하면서 옛 이름만 남아있던 정재들을 되살리고 연향의 규모를 확대함으로써 희미해졌던 군신간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이전의 정재들이 국가 창업의 정당성을 과시하는 춤이었다면 효명세자의 그것은 국왕의 권위와 왕실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수단이었다. 하지만 1830년, 효명세자는 대리청정 3년 3개월 만에 갑자기 숨을 거둔다. 그로 인해 세자빈 조씨의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풍양 조씨 가문의 영욕을 함께하다
효명세자가 세상을 떠난 지 4년 만에 순조가 승하하고 아들 헌종이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지만 신정왕후 조씨에게는 수렴청정의 자격이 없었다. 헌종이 즉위할 당시 그녀의 지위가 효명세자의 빈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수렴청정은 안동 김씨 출신의 대왕대비인 순원왕후 김씨가 맡았다. 하지만 헌종의 즉위와 함께 효명세자가 익종(翼宗)으로 추숭되자 신정왕후는 자연스럽게 왕대비로 존숭되었다.
신정왕후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풍양 조씨도 약진했다. 조만영은 어영대장·훈련대장 등을 지내며 동생 조인영, 조카 조병현 등과 함께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841년(헌종 7년)부터 헌종이 직접 정사를 주재하면서 조인영이 영의정에 오르고 아들 조병구는 총융사가 되어 군권을 장악했다. 또 이조판서 조득영의 아들 조병현이 또 다시 이조판서가 되어 인사권을 거머쥐었다. 그렇듯 풍양 조씨는 일족이 권력의 요직을 차지하며 안동 김씨를 압도했다. 하지만 1845년(헌종 11년) 조병구가 49세로 급서하자 실의에 빠진 조만영이 눈이 멀어 봉사가 되더니 이듬해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1849년(헌종 15년), 헌종이 후사도 없이 23살의 나이로 요절하자,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 김씨는 강화도에 살던 전계군(全溪君)의 아들 철종을 불러들여 보위를 잇게 하고 또 다시 수렴청정에 나섰다. 그녀는 이어서 인척인 김문근의 딸을 왕후로 삼아 안동 김씨의 60년 세도정치를 뒷받침했다. 그때부터 안동 김씨는 본격적으로 풍양 조씨를 탄압했다. 철종이 즉위한 해에 조득영의 아들 조병현이 재물을 탐하고 임금을 멸시했다는 이유로 사사되기까지 했다. 남편에 이은 아들의 죽음. 설상가상으로 친정까지 몰락 위기에 빠져들자 신정왕후는 몸을 낮추고 인고의 나날을 보낸다.
고종을 보위에 올리다
신정왕후 조씨는 1857년(철종 8년) 8월 4일 순원왕후 김씨가 승하하면서 대왕대비로 존숭되었고, 1863년 12월 8일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마자 철인왕후 김씨에 앞서 대보를 확보함으로써 남다른 권력의지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당일 아침 어전에 발을 치고 신료들과 대면한 다음 언문교서를 통해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아들 이재황을 철종의 후사로 발표했다. 그렇듯 신정왕후는 위기의 순간에 능동적으로 고종을 보위에 올리는 역전의 한 수를 작렬했던 것이다.
신정왕후는 이재황에게 익성군(翼成君)의 작호를 내리고 영의정으로 하여금 궁궐로 맞아오게 했다. 흥선군과 함께 입궐한 이재황은 대왕대비의 교서에 따라 그녀의 양자가 되어 관례를 치른 다음 12월 13일 보위에 올랐다. 조선의 26대 임금 고종이었다.
본래 고종의 등극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우선 고종의 증조부 은신군은 영조 대에 왕손추대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어 후사 없이 사망했다. 영조는 훗날 그를 복권하면서 남연군 이구를 양자로 삼았으므로 그의 손자인 고종은 선대의 원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편 고종은 철종에 이어 즉위했지만 신정왕후의 양자로 들어와 익종을 계승했으므로 혈연적으로 선왕인 철종과 거리가 멀었다. 가계의 촌수로 따지면 고종은 철종과 5촌 숙질 사이였고, 헌종과는 8촌 형제 사이다. 그렇게 촌수가 멀었으므로 자연히 임금의 정통성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부호군 김진형이 우회적으로 고종의 종통을 의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대간의 탄핵을 받아 유배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정왕후가 철종의 후사로 고종을 선택한 것은 안동 김씨에 의해 무수한 종친들이 희생당해 그때는 남연군의 후손들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남연군에게는 4명의 아들과 6명의 손자가 있었다. 하지만 흥인군, 흥선군 등 여러 아들은 익종과 항렬이 같았고, 만일 그들 중에 누군가를 보위에 올리면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신정왕후는 남연군의 손자들 중에서 왕위 계승자를 골랐던 것이다.
신정왕후가 그 중에서 특별히 흥선군의 차남 이재황을 지명한 것은 흥선군과의 오랜 친분이 작용한 탓이다. 흥선군은 철종 대부터 종친부 유사당상으로 궁중 의례를 주관하면서 왕실에 신망이 두터웠다. 특히 효명세자 계열과 가까웠던 김정희가 흥선군의 제자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흥선군이 풍양 조씨 세력과 일정 수준 이상의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흥선군은 궐내의 궁녀, 환관을 이용하여 궁중을 정탐했고, 이를 통해 신정왕후에게 비밀리에 안동 김씨를 몰락시킬 계책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렇듯 두 사람은 고종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신정왕후는 국왕의 어머니로서 수렴청정권을 거머쥐었고, 흥선군은 살아있는 대원군으로써 국정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수렴청정의 시간
어린 고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에 나선 신정왕후는 남편 효명세자가 못다 이룬 왕권 강화와 사회 폐단을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우선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핵심기구인 비변사를 혁파했다. 이어서 효명세자가 계획했지만 시행하지 못했던 경복궁 중건을 추진하면서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이처럼 중대한 일은 나의 정력으로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므로 일체를 대원군에게 위임하니, 모든 일은 반드시 의논하여 결정하라.”
이윽고 경복궁의 전각이 완성되자 과거 전각의 명칭을 정한 정도전의 문장을 칭찬하며 그의 훈봉을 회복시키고 시호를 내렸다. 그로 인해 정도전이 개국공신훈안에 다시 기록되었고, 그의 후손은 건원릉 참봉 자리에 임명되었다. 아울러 개국 초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정몽주와 길재의 제사를 지내게 하고 함흥 본궁 제향과 태조의 장남 진안대군 방우의 대를 잇게 했다.
한편 과거의 폐단에 주목한 그녀는 경시관들의 감독을 엄하게 하고, 응시자들이 과장에서 소란을 피우면 가장을 벌주었으며, 시권을 절도한 경우 태형을 가하게 했다. 서얼허통 문제에도 간여하여 영의정 조두순의 청에 따라 서얼의 등용을 허락하기도 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관리들의 장오죄, 즉 뇌물수수죄를 나라의 고질적 병폐로 인식하고 엄격한 형정의 시행을 통해 국가 기강을 확립하고자 했다.
1864년(고종 1년) 3월 의주부윤 심이택이 장오죄를 저질렀다는 암행어사의 서계가 접수되자 그를 차꼬를 채우고 칼을 씌워 잡아가두게 했다. 당시 신정왕후는 심이택에게 곤장을 칠 때 백관이 모두 서서 보고 상경했거나 하직하고 내려가지 않은 수령들이 함께 서서 보게 함으로써 경각심을 품게 했다. 그처럼 심이택은 공개적인 망신을 당한 뒤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녀는 또 위도첨사 김윤호, 인산첨사 김낙유가 장오죄를 저지르자 군민들을 모두 모아놓고 조리돌린 뒤에 죽을 정도로 엄하게 곤장 30대를 친 다음 멀고 험한 섬에 보내 죽을 때까지 종으로 삼게 함으로써 징계의 본보기로 삼았다.
신정왕후 조씨는 1866년(고종 3년)까지 4년에 걸쳐 수렴청정을 했지만 국왕의 생부인 대원군의 정치적인 입지가 높아지자 자연스럽게 정계 일선에서 퇴진했다. 그 와중에 안동 김씨 가문에 빼앗긴 권세를 풍양 조씨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친정 일가인 조면호의 딸을 왕비로 책봉하려 했지만 이미 실세로 군림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그 후 신정왕후는 궐내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 1890년(고종 27년) 4월 17일, 83세의 나이로 경복궁 흥복전에서 승하했다. 1899년(광무 3년) 효명세자가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추존되면서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로 함께 추존되었다.
광륜사 대웅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