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 행궁 24.02.28
수원 화성을 한 바퀴 돌 때 코로나로 인해 행궁을 개방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우무길 선생님 퇴임식 가면서 가게 되었다.
수원은 삼성이 먹여살린다고 하지만 정조도 한몫하는 것 같다.
우리 나라 행궁 가운데 가장 크고 잘 복원되었다.
의궤가 잘 남아 있어서 복원도 순조롭게 되고 있다고 한다.
일제 시대에 철저히 훼손했지만 거의 다 복원되어 가고 있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주로 조선의 국왕이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정조 이외에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 행궁을 찾아 이곳에 머물렀다. 평소에는 수원 부사 또는 유수가 집무하던 관아로서도 활용되던 곳이다. 수원 화성과 함께 정치적, 군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건축물이다.
화성 행궁은 조선 후기 정치와 군사 및 사회 문화의 변화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유산이며 발굴 조사 및 복원 정비 사업을 통해 조선 시대 행궁의 모습을 재현할 수 있게 된 중요한 문화 유적으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
화성행궁은 처음부터 별도의 독립된 건물로 일시에 건축된 것이 아니라 행궁과 수원부 신읍치의 관아 건물을 확장·증측하는 가운데 조성되었다. 주로 수원화성을 건설하는데 관심을 기울이던 정조 시기에 많이 증축되었다. 이 때문에 각 건물마다 지어진 시기가 다른데, 그 과정이 《화성성역의궤》에 잘 기록되어 있다.
정조 사망 직후인 1801년(순조 1년)에는 행궁 옆에 화령전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을 봉안했다.
일제강점기 동안 행궁의 건물들은 무참히 헐렸으며, 그 부지에는 신풍초등학교를 비롯한 많은 근대 건물들이 자리잡게 되었다. 1997년에 수원화성이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된 이후로는 수원시에서 1999년부터 복원 사업을 펼쳤고, 꾸준하게 화성 행궁지의 건물들을 매입하여 철거한 뒤 행궁 건물들을 복원해 나갔다.
https://song419.tistory.com/m/2702
신풍루, 좌익문, 중양문 3개를 통과해야 봉수당에 들어 올 수 있다.
수라상을 보면 오늘날 우리가 엄청 잘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뷔페 음식은 왕들도 먹어보지 못한 음식들로 가득 찼다.
아래는 행궁 뒤 언덕에 이는 정조대왕 동상
아래는 성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