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

남명 조식의 유두류록(遊頭流錄) https://young0568.tistory.com/m/2316에서 복사해 온 글입니다.

singingman 2024. 3. 15.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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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1501~ 1572)


유두류록은 남명 조식선생이 1558년 음력 4월 10일부터 25일까지 사천-하동-섬진강-쌍계사-불일사-신응사 등 화개동천의 여러 곳을 유람하며 남긴 기록입니다.

유두류록(遊頭流錄) / 남명 조식

1558년 음력 4월 첫여름, 나는 진주목사 김홍(金泓), 수재(秀才) 인숙(寅淑) 이공량(李公亮), 고령 현감을 역임한 우옹(愚翁) 이희안(李希顔), 청주목사를 역임한 강이(剛而) 이정(李楨) 등과 함께 두류산을 유람하였다. 산에서는 벼슬을 높이 보지 않아 술잔을 돌리거나 앉을 자리를 정할 때 나이를 기준으로 하는데 꼭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4월 10일

고령현감 우옹(愚翁) 이희안(李希顔)이 초계(草溪)로부터 뇌룡사(雷龍舍)를 찾아와 함께 묵었다.

*[뇌룡사(雷龍舍)는 김해에서 삼가로 돌아온 남명(南冥)이 48세 때 삼가면 토동(兎洞)에 세운 남명 자택인데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4월 11일

계부당(鷄伏堂)에서 식사를 하고 여정(旅程)에 오른다. 아우 환(曺桓)과 원우석(元右釋)이 함께 한다. 원우석(元右釋)은 일찍이 절에 출가 하였다가 환속한 젊은이로 총명하고 노래를 잘 불러 함께 하게 되었다.



*[계부당(鷄伏堂)은 뇌룡사 옆의 또 다른 남명의 집으로 닭이 알을 품어 병아리가 부화시키듯 차분히 침잠(沈潛)하여 학문과 인격을 기르겠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문을 나서서 십여 걸음 정도 걸어가는데 문득 어린아이 하나가 앞을 가로 막고 서서

“도망친 종(奴)을 잡으러 여기까지 쫓아왔습니다. 아래쪽에 종이 있는데 잡을 수 없습니다. 좀 도와주십시오.”

한다. 그러자 우옹(愚翁) 이희안(李希顔)이 재빨리 관노비 4, 5명으로 하여금 주위를 포위하게 하여 잠시 후 남녀 8명을 잡아 묶어서 데리고 온다.

이윽고 말을 채찍질 하여 길을 떠나는데, 우옹(愚翁)이

“우연히 행한 어떤 일을 두고 원망하는 사람도 있고 고맙게 여기는 사람도 있으니, 이 무슨 조화속인가?”

하고 탄식한다. 그래서 내가 웃으며

“우옹(愚翁)이 50년 동안 팔짱만 끼고 앉아 있어 그 주막이 메주덩어리 같은 줄 알았더니, 비록 중국의 황하와 황수 유역 천만리 땅은 수복하지 못할지라도 한번 숨 쉬는 동안 일 하는 방법과 계략이 출중하니 참으로 큰 솜씨로세.”

하고 칭찬하니, 일행들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는다.



저녁 무렵 진주(晋州)에 도착한다. 떠나기 전에 진주목사 김홍(金泓)과 약속하기를 사천(泗川)에서 배를 타고 섬진강(蟾津江)을 거슬러 올라 쌍계사로 들어가기로 한 것인데 진주 말티고개에서 뜻하지 않게 호남에서 어버이를 뵈러 오는 종사관 이준민(李俊民)을 만난다. 이준민(李俊民)은 인숙(寅淑) 이공량(李公亮)의 아들이다. 이준민으로부터 김홍의 벼슬이 갈렸다고 듣고 인숙(寅淑)의 집으로 가서 투숙하는데 바로 나의 자형(姉兄)이다.



*[인숙(寅叔) 이공량(李公亮)의 또 다른 호는 안분당(安分堂)이다. 이공량(李公亮)의 아들 신암(新庵) 이준민(李俊民)은 곧 남명의 생질(甥姪)인데 이 때 이공량의 나이는 58세, 아들 이준민은 35세였다.]



4월 12일

큰 비가 내리는데, 진주목사(晋州牧使)였던 김홍(金泓)이 편지를 보내 우리 일행을 머무르게 하고 음식을 보내온다.

4월 13일

김홍(金泓)이 소를 잡고 잔치를 베풀어 주어 우옹(愚翁), 김홍(金泓), 준민(俊民) 등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마음껏 마시고 잔치를 끝낸다.



4월 14일

자형(姉兄) 인숙(寅淑)과 함께 사천으로 가서 구암리(龜岩里)의 강이(剛而) 이정(李楨) 집에서 묵는다. 강이(剛而)가 일행을 위하여 칼국수, 단술, 생선회, 찹쌀떡, 기름떡 등을 내놓는다.



*[강이(剛而)는 청주목사을 역임한 이정(李禎)의 호(號)다. 1555년 청주목사로 나간 이정은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직을 사임하고 이때 고향 구암리에 머물고 있다가 남명과 만난 것이다. 남명과 강이는 11살 차로 남명(南冥)은 57세, 강이(剛而)는 46세, 말하자면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4월 15일

강이(剛而)와 함께 <사천강(泗川江)>과 <길호강>이 합치는 사천만(泗川彎) 안쪽의 장암(場巖)으로 향한다. 강이(剛而)의 서제(庶弟) 이백(李栢)도 함께 나선다.

먼저 옛날 고려의 무장 이순(李珣)의 전공이 서린 쾌재정(快哉亭)을 오른다.



*[쾌재정(快哉亭)은 고려 말 공민왕 때 이성계, 최영 등과 같은 반열의 무장 이순(李珣)이 사수현(泗水縣)에 출몰한 왜적을 물리치고 쾌재를 불렀던 곳이라 하여 이름 붙인 정자다.]



잠시 뒤 홍지(泓之)의 중씨(仲氏) 김경(金涇), 아들 김사성(金思誠)이 오고 맨 나중에 홍지(泓之)가 도착한다.

사천 현감 노극수(魯克粹)가 찾아와 고을 주인 자격으로 작은 술자리를 베풀어 준다. 이어 모두 함께 큰 배에 오르는데 사천현감이 술과 안주,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실어주고 돌아가고, 충순위(忠順衛) 정당(鄭澢)이 물품 조달을 맡아 여러 가지 물건을 대준다.

기생(妓生) 열 명이 피리와 장구를 가지고 모두 늘어놓았는데 이날은 성종(成宗) 임금의 원비, 공혜왕후 한(韓) 씨의 기일이라 음악 없이 채식(菜食)만 한다. 이때 유생 백유량이 배 위로 올라 일행에게 인사를 하고 함께 한다.

이날 밤 달빛은 낮같이 밝고 은빛 물결은 거울을 잘 닦아 천근(天根)과 옥초(沃焦)가 모두 자리에 함께 있는 듯하다.



*[천근(天根)과 옥초(沃焦) : 하늘에 뜬 별, 땅에 있는 모든 것들]



사공들이 번갈아 부르는 뱃노래 소리가 이무기 굴까지 미칠 듯하다. 삼태성(三台星) 별자리가 하늘 복판에 오를 때 얼마간 동풍이 인다. 서둘러 돛을 달아 노를 걷어치우고 배를 몰아 거슬러 오르는데 잠시 뒤 사공이 배가 이미 하동 땅을 지나쳤다고 아뢴다.



밤이 깊어 모두 세로, 가로로 눕는데 나는 처음 홍지(泓之)의 담요와 겹이불 폭이 넓어 그 한 쪽을 빌어서 누웠다. 그런데 자다가 보니 나머지를 모두 차지하여 홍지(泓之)를 자리 밖으로 밀어낸 모습이 되었다. 깊은 꿈속에 빠져 자기 물건이 남의 소유인 것을 몰랐던 것이 아닌가?



4월 16일

새벽빛이 조금 밝아질 무렵 거의 섬진에 다다르는데 잠을 깨고 보니 벌써 하동 땅을 지났다고 한다. 이때 막 아침 해가 떠오르는데 검푸른 물결이 붉게 타는 듯하고 양쪽 언덕의 푸른 산 그림자가 출렁이는 물결에 거꾸로 비친다. 퉁소와 북을 다시 연주하여 노래와 퉁소 소리가 번갈아 일어나고 서북쪽 십 리쯤 지점 멀리 구름 낀 봉우리가 두류산의 바깥쪽이다. 이를 가리키며 서로 뛸 듯이 기뻐하여

“방장산(方丈山)이 삼한(三韓) 밖이라 하더니 벌써 가까운 곳에 있구나.”

하고 반가워한다.

눈 깜짝하는 사이 악양(岳陽) 고을을 지나고 삽암(揷巖)이라는 강변 마을을 만난다. 녹사(錄事) 한유한(韓惟漢)의 옛집이 있던 곳이다. 고려가 혼란해 질 것을 미리 알고 밤을 타서 처자식을 데리고 이곳으로 도망한 것이다. 조정에서 그의 재주를 아까워하여 대비원(大悲院) 녹사(綠事) 벼슬을 내렸으나 나가지 않고 절개를 지킨 것이다.



*[삽암(揷巖)은 꽂힌 바위라는 뜻이다. 악양과 화개의 경계 부근으로, 옛날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나룻배가 다녔으며 고려 말엽 옛날 전설적 인물 한유한(韓惟漢)이 낚시를 하던 곳이라 한다. 옛날 왜놈들이 쳐들어오면 바위 위에 섶나무를 잔뜩 쌓아 놓았다가 불을 질러 연기를 내어 이를 신호로 물리쳤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한유한(韓惟漢) : 대대로 개경에 살면서도 벼슬하지 않다가 재주가 알려져 벼슬에 올랐는데, 이자겸(李資謙)[일설에는 최충헌]이 정사를 멋대로 하고 매관매직하는 등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처자를 데리고 이곳 악양(岳陽)으로 숨어들어 다시는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한다. 지금도 악양 섬진강에 <모한대(慕韓臺)>라는 글자를 새긴 바위가 있다고 한다.]



아! 망하려는 국가가 어찌 어진 사람을 좋아하겠는가. 착한 사람을 표창만 하는 것으로 어진 사람을 구하는 것은, 중국 춘추시대 초(楚)나라 섭자고(葉子高)가 용을 좋아한 것만도 못하는 일이니, 어지러워 망하려는 나라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문득 술을 가져 오라 하여 가득 부어놓고 거듭 한유한(韓惟漢)을 생각하여 길이 탄식한다.

한낮쯤에 배가 도탄마을에 멈추자 눈동자가 흐릿한 어수룩한 늙은 아전이 고깔 모양의 소골다(蘇骨多)를 쓴 차림으로 찾아와 인사를 하는데 악양과 화개고을의 아전들이다. 또 깃을 둥글게 만든 단령(團領)을 차려입은 아전 두어 사람이 와서 절을 하는데 목사 홍지(泓之)가 근무한 진주(晉州) 지방의 규찰과 권농을 맡은 관리들이다.



강가에 높고 낮은 산간 마을이 이어지고 가로세로로 놓인 밭이랑이 나온다. 지금 밭이랑이 열에 하나 정도 남아 있으니 임금의 덕화가 깊은 산골짜기까지 미치던 옛날에는 백성들이 번성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도탄에서 한 마장쯤 떨어진 화개 덕은리(德隱里)에 정여창 선생의 옛 거처가 남아있다. 함양 출신 유종(儒宗)으로 학문이 깊고 독실하여 우리 도학(道學)의 줄기를 이은 분이다. 오직 학문만 하려고 처자를 이끌고 산으로 들어갔다가 나중에 내한(內翰)을 거쳐 안음현감을 지내고 연산군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삽암(揷岩)에서 바로 10리쯤 떨어진 곳이다. 밝은 철인의 행복과 불행이 이러하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화개면 덕은리 악양정(岳陽亭)은 옛날 정여창 선생이 은거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홍지(泓之)와 강이(剛而)가 먼저 쌍계사(雙溪寺) 석문(石門)에 도착한다. 검푸른 빛깔의 바위가 양쪽으로 마주하고 서고 그사이로 길이 한 자 남짓 트였는데, 그 옛날 학사 최치원이 오른쪽에 <쌍계>, 왼쪽에 <석문>이란 네 글자를 손수 써놓았다. 자획의 크기가 사슴의 정강이만 하고 바위 속 깊이 새겨, 지금까지 이미 천 년 세월이 흘렀는데 앞으로 몇 천 년이나 더 갈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서쪽에서 시냇물 하나가 벼랑을 무너뜨리고 돌을 굴리면서 아득히 백리 밖에서 흘러오는데 곧 신응사(神凝寺)가 있는 의신동(擬神洞)의 물이고, 동쪽에서 시냇물 하나가 구름 속에서 새어 나와 산을 뚫고 아득하게 흘러온 것은 불일암 청학동(靑鶴洞) 물이다. 절 이름을 쌍계라 한 것은 두 시내 사이에 절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절 문에서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열 자나 되는 큰 비석이 귀부 위에 우뚝 섰는데 최치원의 글과 글씨를 새긴 것이다. 비석 앞 높다란 다락집 현판이 팔영루(八詠樓)라 씌어있고, 뒤쪽 비석 전각(殿閣)은 아직 수리가 끝나지 않아 기와도 덮지 않았다.

쌍계사의 중 혜통(慧通)과 신욱(愼旭)이 차와 산나물을 내어와 우리를 손님으로 맞아 대접한다.

이날 어두워지는 초저녁 무렵, 갑자기 구토와 설사를 만나 음식을 물리고 자리에 누웠는데 우옹(愚翁)이 나를 간호하며 서쪽 곁방에서 함께 잤다.



4월 17일

이른 아침, 홍지(泓之)가 와서 문병을 하는데 문득 어란달도(魚瀾撻島=海南)에 왜구(倭寇)의 배가 와 정박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래서 곧 여행 계획을 취소하기로 하고 아침을 재촉하여 먹고, 떠나기 전에 간단히 술 몇 잔을 돌린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온 호남 선비 김득리(金得李), 허계(許繼), 조수기(趙壽期), 최연(崔硏) 등을 법당으로 맞아들여 한 차례 술잔을 돌리고 풍악을 울리는데 갑자기 이별하는 행색이 서로들 몹시 급하여 <북산이문(北山移文)>조차 토론해 볼 겨를이 없다.



*[북산이문(北山移文)은 중국 남북조시대 남제(南齊) 공덕장(孔德璋 447~501)의 글이다. 개구리 울음소리까지 자연의 음악이라 하여 뜰의 풀도 베지 않을 정도로 음영(吟詠)을 즐긴 공덕장(孔德璋 일명 孔雉珪)은 '북산이문(北山移文)'이란 글에서 은자를 자처하던 주옹(周顒)이 세속의 욕망에 끌려 속세로 달려가 살아가는 위선자 모습을 슬픈 눈으로 보고 있다.]



어제 배 안에서 홍지(泓之)가 자색 띠를 허리에 매고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은 토끼와 원숭이를 묶는 물건인데, 도리어 토끼와 원숭이에게 묶여 갈까 염려가 되겠구려.”

하고 농담을 하여 모두 박수를 치면서 한바탕 웃었는데 지금 농담대로 된 것이다. 한스러운 것은 우리가 수행을 통해 기른 힘이 없어 한 늙은 벗을 보호하여 함께 지기석(支機石) 위에 앉아 창자에 가득한 티끌을 토해내고, 중국 한나라 때 적송자(赤松子)가 들어가 신선이 된 금화산金華山)의 정기를 빨아들여 늘그막의 양식으로 삼을 수 없는 점이다.



*[적송자(赤松子) :고대 중국에서 신선이 되어 장수하였다는 전설적인 인물]



*[지기석(支機石) : 전설에 직녀가 베를 짤 때 베틀이 움직이지 않도록 괴었다는 돌. 따라서 신선(神仙)이 자리할 만한 조용하고 깨끗한 곳.]



일이 이렇게 되어 기생 봉월(鳳月), 옹대(甕臺), 강아지(江娥之), 귀천(貴千) 등과 피리 부는 천수(千守) 등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서둘러 돌려보낸다.

이날 온종일 큰 비가 그치지 않고 검은 구름이 사방을 뒤덮어 산의 세계와 바깥 인간세상 사이에 구름과 물이 몇 겹이나 둘러쌌는지 모를 정도가. 정오 무렵에 호남지방 역리가 가져온 종사관의 편지에 봉화대에서 보고된 어란달도(魚瀾撻島)의 배는 왜구가 아닌 2∼3척의 우리나라 조운선(漕運船)이라 한다.

홍지(泓之)의 관상이 신선과 연분이 없어 도끼 자루 썩는 말미를 허락하지 않는데 그래도 중생을 제도하는 계율을 닦은 모양으로 한량없이 베풀 줄 알아 여러 사람들이 많은 술과 안주를 보내오고 소식과 서찰이 잇따른다.



놀이기구 육갑(六甲)과 취사에 관계되는 모든 것을 강국년(姜國年)이 도맡아 일행들은 계옥(桂玉)의 수고로움을 전혀 알지 못한다. 강국년(姜國年)은 진주의 아전이다.



*[계옥(桂玉): 계수나무보다 비싼 장작과 옥보다 귀한 밥이라는 뜻으로, 장작과 식량이 귀하고 비싸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날 강이(剛而)의 친척 이응형(李應亨)이 우리를 보러 쌍계사로 오는데 저녁에 인숙(寅叔)이 설사를 하고 신음을 하더니, 해가 어스름 할 무렵 갑자기 강이(剛而)가 가슴과 배가 꼬이는 듯 아프다 하여 두어 말이나 토해내고, 설사가 점점 급해진다. 소합원(蘇合元)과 청향유(靑香油)를 먹여도 아무 효과가 없다. 오직 전부터 가까이 지내는 기생 강아지(江娥之)가 머리맡에 붙어 간병한 보람이 있어 새벽녘이 되자 겨우 진정된다. 아침에 일어난 강이(剛而)는 밤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고개를 들고

“어제 저녁 가슴이 아파서 이겨내지 못할 것 같았지만, 내 비록 죽더라도 그대들이 곁에 있는데 어찌 여인네의 손에서 죽을 수 있는가?”

한다. 일행들이 강이를 위로하여

“그대 진정 겁쟁이구려. 오래 살고자 하여 대단찮은 병에 걸린 것을 죽을 것이 아닐까 겁먹은 것이야. 죽고 사는 것은 진실로 중요한 일인데 하찮은 것으로 어찌 죽을 것인가?”

한다.



4월 18일

산길이 비에 젖어 불일암(佛日庵)도 오르지 못하고 시냇물이 불어 신응사도 가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쌍계사에 눌러앉았는데 호남순변사 남치근(南致勤)이 술과 음식을 보내왔다. 남치근은 그의 종사관 이준민(李俊民)의 아비 인숙(寅叔)을 위하여 보낸 것이었다.



*[남치근(南致勤)은 명종 7년 왜구의 침입을 막지 못한 제주목사(濟州牧使) 김충렬(金忠烈)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왜구를 격파하고, 1555년, 1556년 두 차례 호남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섬멸한 명장이다. 1558년 전라도순변사(巡邊使)가 되었는데 이준신이 그 종사관으로 있었다. 남치근은 그 후 1560년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올라 경기·황해·평안 3도 토포사(討捕使)가 되어 1562년 황해도를 무대로 날뛰는 임꺽정을 잡아 죽였다.]



진사 하종악(河宗岳)의 종 청룡(靑龍)과 사인(舍人) 계회(季晦) 정황(丁璜)의 종이 술과 물고기를 가지고 찾아와 인사를 하고, 신응사(神凝寺) 지임 윤의(允誼)가 와서 인사를 한다.

동생 환(曺桓)의 말이 병이나 접천(蝶川) 밖 진(塵)이라는 사람에게 맡겨 보살피게 한다. 저녁에 우옹(愚翁)과 함께 뒤채 불당 서쪽 방에서 잤다.



4월 19일

아침을 재촉하여 먹고 청학동으로 들어가기로 하는데 인숙(寅叔)과 강이(剛而)가 건강이 좋지 못하여 동행을 포기하겠단다. 아무리 뛰어난 경치일지라도 참된 연분이 없으면 신령님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인숙(寅叔)과 강이(剛而)가 예전에 한번 청학동으로 들어와 보았다는 것은 꿈에서 일이지 진정으로 온 것은 아니다. 홍지(泓之)와 비교하면 차이가 있지만 연분 없기는 매일반이다.

돌아보면 나는 세 번이나 청학동에 들어오고도 아직 속세의 인연을 끊지 못하였다. 변변한 벼슬 한번 못한 팔십 노인네가 일찍이 봉황지(鳳凰池)를 세 번이나 갔다 온 일에 미치지 못하지만 악양(岳陽)을 세 차례 들어오고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이날 아침 김경(金涇)이 병 때문에 같이 가기를 포기하여 기생 귀천(貴千)을 딸려 보낸다. 77살 나이에 나는 듯이 천왕봉에 오르려 할 정도로 사람됨이 기개가 있어 당 현종 때 가무를 배우는 이원(利園)에서 노닐다 온 젊은이 같다.



*[이원(利園)은 중국 연극사에 희극을 발전시킨 음악의 황제 당 현종이 양귀비를 즐겁게 하여주려고 궁중에 두었던 연희자(演戱者) 양성 학교다.]



호남에서 온 네 사람과 백유량, 이백(李栢) 등 두 유생이 동행한다. 북쪽으로 오암을 향하여 나무를 잡고 좁고 험한 길을 타고 나아가는데 원우석이 허리에 맨 북을 두드리고, 천수는 긴 피리를 분다. 두 기생이 이들의 뒤를 따라 전진하는데 그 모습이 고기를 꼬챙이에 꿴 같다. 그 뒤를 강국년(姜國年)과 요리사, 종들, 음식을 운반하는 사람들 수십 명이 따르고 중 신욱은 길 안내를 맡는다.



중간에 나오는 큰 돌에 <이언경, 홍연>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오암에도 <시은형제>라 새긴 글자가 나온다. 썩지 않는 것에 이름을 새겨 영원히 전하려는 것이겠지만 대장부의 이름은 푸른 하늘의 밝은 해와 같은 것이므로 사관이 책에 기록하거나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의 입에 새겨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구차하게 수풀 속 바위에 숲속 잡초더미 사이, 이리나 다람쥐가 사는 수풀 속 바위에 새겨 썩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아득히 날아가 버린 새의 그림자만도 못한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지나가버린 새의 그림자를 보고 그것이 무슨 새인 줄 어떻게 알겠는가?

중국 진나라의 두예(杜預) 이름이 후세에 전하는 것은 비석을 물속에 가라앉혀 둔 때문이 아니라 이름 있는 책을 쓴 때문이다.



*[두예(杜預· 222~284) : 중국 진(晉)대의 학자. 명가(名家) 출신으로 오(吳)를 평정한 공으로 당양현후(當陽縣侯)에 봉(封)해졌으나, 만년에는 학문과 저술에 힘을 기울여 종래 별개의 책이었던 춘추(春秋)의 경문(經文)과 좌씨전(左氏傳)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춘추좌씨경전집해(春秋左氏經傳集解), 춘추석례(春秋釋例) 등을 저술하였다.



열 걸음에 한번 쉬고 아홉 번을 돌아보면서 비로소 불일암에 도착하니 세상 사람들이 청학동이라 하는 곳이다. 바위 부리가 허공에서 내리뻗어 굽어보는데 동쪽으로 높고 가파르게 서로 떠받치듯 솟은 것은 향로봉(香爐峯)이고 서쪽에 푸른 벼랑을 깎아내어 만 길 낭떠러지로 우뚝 솟은 것은 비로봉(毘盧峰)이다. 두 봉우리 바위틈에 둥지를 튼 청학 두세 마리가 가끔 날아올라 빙빙 돌며 하늘을 올랐다 내리곤 한다.



아래에 학연(鶴淵)이 있는데, 컴컴하고 어두워서 바닥이 보이지를 않는다. 좌우상하로 고리처럼 둘러서고 겹겹으로 층을 이룬 암벽 위쪽에서 폭포가 소용돌이치며 빠르게 쏟아져 내리다가 합쳐지기도 한다. 위로 초목이 수북이 우거지고 물고기나 새도 지나다닐 수가 없을 정도다. 천리나 떨어진 중국의 약수보다도 더 아득하다.

바람소리, 우레 같은 물소리가 서로 뒤얽혀 아우성치며 마치 하늘과 땅이 열리듯 낮도 밤도 아닌 상태에서 물과 바위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다. 그 중심에 신선의 무리, 큰 거령(巨靈), 기다란 교룡(蛟龍)과 짧은 거북이가 몸을 서로 웅크리고 숨어서 이곳을 영원토록 지키기 위하여 사람들의 접근을 막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호사가가 나무를 베어 만들어 놓은 다리가 있어 겨우 입구로 들어가, 이끼 낀 돌을 긁고 더듬어 보니 삼선동(三仙洞) 세 글자가 보이는데 어느 시대에 새긴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옹(愚翁)이 내 아우와 원생 등과 함께 나무를 부여잡고 내려가 이리저리 내려다보다가 다시 올라오고, 나이가 젊고 다리 힘이 좋은 사람들은 향로봉을 오른다.

이윽고 불일암으로 돌아와 방에 모여앉아 물과 밥을 먹은 후, 다시 밖으로 나가 소나무 아래에 앉아 마음껏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피리를 불어댄다. 노래 소리와 북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져 온 산을 뒤흔든다.



동쪽으로 백길 낭떠러지를 내리지른 물줄기가 학담(鶴潭)을 이룬다. 내가 우옹을 돌아보고

“물길이 만 길 구렁을 향해 곧장 내려만 갈 뿐 다시 앞을 의심하거나 뒤를 돌아봄이 없다 하더니, 여기가 바로 그와 같은 곳일세.”

하자, 우옹이 그렇다고 대답한다. 정신과 기운이 매우 상쾌한데 오래 머물 수 없어 언덕길을 더듬어 지장암(地藏菴)을 찾았더니 모란이 활짝 피어 반긴다. 모란 꽃 송이가 붉은빛 진주를 한 말이나 모아놓은 듯하다. 지장암에서 내려가는 길이 두 서너 리를 달려 겨우 한차례 쉴 수 있을 정도로 가파르다. 이윽고 짧은 시간에 쌍계사에 도착한다.

오를 때는 발을 내딛기 어려웠지만 아래로 내려갈 때는 발만 들어도 몸이 절로 흘러내린다. 선(善)을 좇는 일이란 산을 오르는 것처럼 힘들고, 악(惡)을 따르는 일은 내려가는 일처럼 쉽다.

쌍계사 팔영루(八詠樓)에 올라 기다리고 있던 인숙(寅叔)과 강이(剛而)가 반갑게 맞이하여 준다. 저녁에 인숙(寅叔), 우옹(愚翁)과 함께 다시 절 뒤쪽 동쪽 방장의 방에서 잤다.



4월 20일

신응사로 가기로 하는데 쌍계사에서 10리쯤 되는 지점이다. 쌍계사와 신응사의 어름에 보잘 것 없는 주막이 두어 군데 있다. 신응사 문간 앞에서 백 보쯤 되는 칠불사계곡 근처에 말을 내려 줄지어 앉아, 세차게 흐르는 냇물을 다른 사람의 등에 업혀서 건넌다. 신응사 주지 옥륜(玉崙)과 지임 윤의가 나와 일행을 맞는다.

절 입구에서 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곧장 시냇가 반석으로 올라가 앉는다. 인숙(寅叔)과 강이(剛而)를 가장 높은 바위에 올려 앉히고

“그대들은 아무리 위급한 경우를 당하더라도 자리를 잃지 말게. 만약 물에 빠지면 다시는 올라올 수가 없으니까.”

하니, 인숙(寅叔)과 강이(剛而)가

“바라건대 자리를 빼앗지나 말게나.”

하여 웃는다. 며칠 사이 내린 비에 시냇물이 불어 돌에 부딪혀 솟아올랐다가 부서진다. 만 섬의 구슬을 들이마시고 내뿜으며 다투어 솟는 듯하고, 번개와 천둥이 으르렁 거리는 듯, 하늘의 은하수가 뻗쳐 뭇별이 빛을 잃고 시들어 버린 듯하다.

신선이 사는 중국 주나라 요지(瑤池)에서 목왕(穆王)이 서왕모를 맞이하여 즐거운 잔치를 벌인 뒤의 비단 자리가 흐트러진 모습이다.

검푸르게 깊은 소(沼)는 용과 뱀이 비늘을 숨긴 듯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고, 우뚝 솟은 돌은 소와 말이 모습을 드러낸 듯 서로 뒤섞여 셀 수 없을 정도다. 그렇듯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시냇물 모습은 저 중국의 양자강의 물살 센 구당협(瞿唐峽)에나 견줄 수 있을 것이니, 진실로 하늘나라의 장인이 빼어난 솜씨를 숨김없이 마음껏 발휘한 것이라 하겠다.



*[양자강 구당협(瞿塘峽) : 삼국지의 무대가 되었던 곳으로 양안의 깎아지른 절벽에 연봉이 이어져 장관을 이룬다.]



너 나 없이 모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넋을 빼앗겨 시 한 구절을 읊조리고자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한바탕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러보아도 그 소리란 것이 기껏해야 큰 항아리 안에서 니나니벌 소리 정도라 제대로 소리를 이루지 못하여 물귀신의 놀림거리가 될 뿐이다.

신응사 중이 술과 과일을 소반에 담아와 우리를 위로하고, 나 또한 우리가 가져온 술과 과일로 서로 대접하면서 바위 위에서 춤을 추며 한참 즐기다가 내가 억지로 오언절구 한 수를 읊어본다.



水吐伊祈璧 山濃靑帝顏 謙誇無已甚 聊與對君看

[물은 아름다운 구슬 토해내고 / 산은 봄 신의 얼굴보다 짙은데/ 겸손도 자랑도 심하지 않으니 / 그대들과 마주 바라보며 즐긴다네.]



저녁에 서쪽 승방에서 묵는데, 누워서 조용히 글을 외우다가 사람들에게 경계하여 한 마디 한다.

“이름 있는 산에 들어온 자는 누군들 마음을 씻지 않겠으며, 누군들 자신을 소인이라 하는 것을 달가워할까마는, 필경은 군자는 군자, 소인은 소인이니, 한번 햇볕을 쬐는 정도로는 아무런 유익함이 없음을 알 수 있다.”



4월 21일

큰 비가 종일토록 그치지 않는다. 홍지(泓之)의 아들 김사성(金思成)이 갑자기 하직하고 비를 무릅쓰고 굳이 떠나고, 백유량도 함께 가버린다.

기생 셋과 악공을 함께 떠나보낸 후 호남에서 온 여러 사람과 함께 날이 저물도록 절 누각 사문루(沙門樓)에 앉아 불어난 냇물을 구경한다.



4월 22일

아침에는 비가 왔다가 저녁 무렵에 갠다. 돌다리가 시냇물에 잠겨 절 안에서 밖으로 통할 수 없으니 마치 중국 한나라 고황제가 흉노족에게 7일 동안 포위되어 백등산(白登山)에 갇혀 있던 상황이다. 사람 수가 무려 40여 명에 달하여 양식 모자랄 것을 염려하여 양식 자루를 헤아려 평소의 반으로 줄이고, 술은 제한 없이 마시도록 한다. 술은 아직도 수십 항아리쯤 남았는데 대부분 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않기 때문이다.



호남의 선비 기대승(奇大升)의 일행 11명이 천왕봉을 올랐다가 비에 길이 막혀 아직 내려오지 못하였다는 소문이다.

쌍계사와 신응사 두 절은 모두 두류산 한복판에 자리한다. 사방으로 푸른 산봉우리가 하늘을 찌르고 흰 구름이 문을 잠근 듯 산중턱에 걸린 곳이다.

이런 곳이라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을 것인데 관과의 부역이 많아 양식을 싸들고 무리를 지어 부역 나가는 사람들이 줄을 잇고, 고통을 이기지 못한 주민들이 모두 흩어져 떠나는 지경이다.

신응사 중이 나더러 고을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 세금과 부역을 조금이라도 완화해주기를 청하여, 나는 하소연할 데 없는 그들의 처지가 안타까워 편지를 써준다. 산에 사는 중의 형편이 이러하니 산촌의 무지렁이 백성들 사정을 더욱 알만하다.

정사는 번거롭고 과중한 부역에 백성들이 흩어져 아버지와 자식이 서로 돌보지 못하는 상황이라 조정이 바야흐로 이를 염려하건만 우리는 그들 등 뒤에서 한가로이 노니는 것이니 어찌 참다운 즐거움이겠는가?

인숙(寅叔)이 벼루 보자기에 시 한 수 써주기를 청하여 다음과 같이 쓴다.



高泿雷霆鬪 神峰日月磨 高談與神宇 所得果如何

[높은 물결은 우레와 벼락이 서로 싸우는 듯하고 신령스런 봉우리는 해와 달이 갈아놓은 듯하다. 신응사에서 나눈 격조 높은 이야기와 빼어난 경치로 얻은 바가 과연 어떠한가.]



다음은 강이(剛而)의 글이다.



溪湧千層雲 林開萬丈靑 汪洋神用活 卓立儼儀刑

[시내 계곡 물은 천 층의 구름으로 솟구치고, 숲은 만 길 푸름을 열었네. 살아 넘실대는 시내는 생기가 넘치고, 장엄한 봉우리는 우뚝 높이 솟았네.]



4월 23일

아침에 떠나려는데 신응사 주지 옥륜이 아침을 대접하고 전송한다. 두류산에 크고 작은 가람이 얼마인지 모르지만 신응사의 경치가 최고다. 전에 성중려(成仲慮)와 천왕봉에서 이 절을 찾아온 적이 있고, 그 뒤 약 30년 만에 천서(天瑞) 하중려(河仲礪)와 찾아와 한여름 내내 머문 적이 있다. 그리고 20년 세월이 지나 두 사람은 모두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이제 나 홀로 찾아오니 마치 은하수 사이에서 어느 날 뗏목이 올 것인지 까마득히 모르는 것 같은 처지다.



*[성중려(成仲慮)는 대곡(大谷) 성운(成運)의 중형(仲兄) 성우(成愚)로 1545년 을사사화로 화를 입어 세상을 떠났다. 하중려(河仲礪)는 인숙(寅叔) 이공량(李公亮)의 사위 하천서(河天瑞)라 남명(南冥)에게 생질(甥姪)이다.]



신응사 대웅전 부처 앞에 용과 뱀이 꿈틀거리는 모습의 모란꽃을 꽂고 그 사이에 기이한 꽃들도 섞여 있다. 바깥 창가에도 복사꽃과 국화, 모란꽃 등이 있어 그 빛이 눈을 현혹시킨다. 모든 것이 다른 절에서 보지 못한 것들이다.

신응사(神凝寺)는 구례 나루터에서 20리, 쌍계사에서 10리, 사혜암과 칠불암에서 각각 10리 정도 거리이며 이곳에서 천왕봉까지는 꼬박 하룻길이다.



절을 떠나 칠불암 시냇가에 이르러서 주지 옥륜과 지임 윤의가 나무를 걸쳐 다리를 만들어 주어 모두 천천히 편안하게 시내를 건넌다.

계곡물을 따라 내려가 쌍계사 건너에 이르자, 쌍계사의 중 혜통과 신욱이 물을 건너와 우리 일행을 전송한다. 건장한 중 3, 4명이 우리 일행이 물 건너는 것을 도와준다.



이곳에서 다시 예닐곱 마장을 더 내려가 물을 건너려고 말에서 내리는데, 전날 우리의 말을 맡아 보살피던 마을사람 3, 4명이 삶은 닭과 소주를 가지고 와서 일행을 대접하고, 악양(岳陽) 고을 아전이 대나무로 가마를 만들어 일행 모두를 태우고 냇물을 건넌다. 냇물 흐름이 사납고 몹시 급하여 하얀 바닥 돌이 드러나 보인다. 그런데도 우리를 건네준 노복들은 아무도 넘어지거나 미끄러진 사람이 없다. 누구는 잘 건너고 싶지 않을까만, 때에 잘 건너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니, 또한 운명이 아니겠는가?



냇물을 건너 10리 남짓 길을 가자 하종악(河宗岳)의 노복 청룡이 그 사위와 술항아리와 소반에 물고기와 고기를 차려와 기다리는데 차린 음식이 시장이 아니면 구할 수 없는 것들이다. 청룡의 처 수금(水金)이 예전에 서울에서 살았는데 인숙(寅叔)과 강이(剛而)가 혼인을 맺어준 은혜 때문에 인사드리러 온 것이다. 일행이 아낙의 인사를 받는 인숙(寅叔)과 강이(剛而)를 놀려댄다.

배에 올라 점심을 먹고 악양현 앞으로 내려가 정박하여 고을 객사에 들어가 잠을 자고, 강이는 현의 동쪽으로 두어 마장쯤 되는 곳에 사는 숙모를 뵈러 갔다.



*[진주의 진사(進士) 하종악(河宗岳)은 뒤에 남명의 자형(姉兄)이 된다. 하종악이 세상을 떠난 후 그 후처의 음행(淫行) 문제로 남명(南冥)은 강이(剛而)와 절교까지 한다. 강이(剛而) 이정(李楨)이 하종악 후처의 인척으로 이를 비호한 때문이었다.]



4월 24일

새벽에 흰죽을 먹고 동쪽 고개를 오른다. 삼가식현(三呵息峴)이라 하는 고개로 높은 고개가 하늘에 가로놓였다.



*[지금은 ‘삼하실재’라는 이름으로 악양면과 적량면 삼하실 마을을 이어주는 곳이다.]



고개를 오르는 사람들이 두 걸음에 세 번씩 가쁜 숨을 내쉰다하여 붙은 이름이다. 두류산 기세가 이곳까지 백 리를 내려왔는데 여전히 높아 조금도 낮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우옹(愚翁)이 강이(剛而)의 말을 타고 혼자 채찍을 휘둘러 먼저 올라 제일 높은 봉우리에 올라 말을 세워놓고 돌에 걸터앉아 부채질을 하고 있다.

일행 모두가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데 사람과 말이 비 오듯 땀을 흘리고 한참 뒤 겨우 닿는다. 내가 우옹(愚翁)을 질책하여

“그대는 말 탄 기세에 의지하여 나아갈 줄만 알고 그칠 줄 모르니 훗날 능히 의로움에 나아가게 되면 반드시 남보다 앞서게 될 것이니 또한 좋은 일이네.”

한다. 그러자 우옹(愚翁)이

“내, 그대에게 꾸지람 들을 줄 알았어. 내 죄를 내가 알겠네.”

하고 사과한다.

강이(剛而)가 지나온 두류산을 찾아 사방을 둘러보는데 검은 구름이 가려 산의 위치를 짐작하지 못하자 탄식하여

“산은 두류산보다 큰 것이 없고, 한눈에 바라보일 정도로 가까이 있건만, 사람들이 눈을 똑바로 뜨고도 오히려 보지 못하네. 하물며 두류산보다 어질지 못하여 눈앞에 닿을 듯 가까이 있어도 분명히 볼 수 없으니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한다.

사방을 돌아보는데, 동남쪽으로 남해의 뒷산이 파랗게 높이 솟고, 바로 동쪽으로 하동, 곤양의 산들이 물결처럼 널리 가득 차게 엎드리고 있다. 또 동쪽 은은한 하늘 저편에 검은 구름과 같은 사천의 와룡산(臥龍山)이 솟고 그 사이로 서로 꿰이고 뒤섞여 강과 바다와 포구를 이루는 혈맥이 경락처럼 얽혀 있다. 우리나라 산하는 그 견고함이 중국의 위(魏)나라가 보배 이상으로 여겼으며 드넓은 바다를 접하고 견고한 성곽에 의지해 있으면서 오히려 조그맣고 추잡한 섬 오랑캐에게 거듭 곤란을 겪고 있으니, 옛날 길쌈하는 실이 적은 것을 돌아보지 않고 중국 주나라 왕실 멸망을 근심한 과부와 같다 하지 않을 수 있는가?



저녁 늦게 하동 횡포역(橫浦驛)에 도착한다. 배가 몹시 고파 인숙(寅叔)의 배낭 속에 있는 과자와 꿩고기 말린 것에 추로주(秋露酒) 한 잔을 마신다. 정오에 두리현(頭理峴)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려 나무 밑에서 쉰다. 모두들 갈증이 심하여 찬 샘물을 두어 표주박씩 마신다. 그때 짚신에 깃이 곧고 짧은 직령 차림의 남자 하나가 말에서 내려 우리 일행 곁은 지나 빨리 가다가 강이(剛而)를 보고는 잠시 옆에 앉는데 가는 곳을 물어 보니 광양(光陽) 교관(敎官)이다.



그때 장끼 한 마리가 끽끽거리고 운다. 이백(李伯)이 활을 들어 시위에 화살을 올리고 살금살금 주위로 다가서는데 갑자기 장끼가 후드득 날아가 버린다. 이를 보고 사람들이 웃는다.

우리는 지금까지 구름과 물속에 있어 구름과 물이 아니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는데 이제 인간 세상에 내려와 지나가는 광양 교관이며 날아가는 산 꿩을 본 것이다. 그러니 어찌 식견을 기르지 않을 수 있는가?



저녁에 하동 옥종면 정수리 삼장골 정수역에 이른다. 객관 앞에 정(鄭)씨의 정려문(旌閭門)이 있었다.

열녀문의 주인공은 문충공 정몽주의 현손녀(玄孫女)로 승지 조지서(趙之瑞)의 아내였다. 조지서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세찬 찬바람이 휘몰아치면 벽 안에 있어도 추위에 떨리는 법이다.

조지서는 연산군이 선왕의 업적을 잇지 못할 것을 알고 10여 년부터 조정을 물러나 있었지만 화를 면하지 못하여 목숨을 잃고 부인은 적몰되어 죄인 신세가 되었다. 부인은 그 후로 성 쌓는 일에 끌려 다니며 고역을 하면서도 품에는 두 젖먹이를, 등에는 신주(神主)를 짊어지고 아침저녁 상식 올리는 일을 게을리 않았던 것이다.



*[조지서(趙之瑞)는 세자시절의 연산군 사부였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이 없는 연산군을 가르치면서 조지서는 책을 던지며 <저하께서 학문에 힘쓰지 않으시면 마땅히 임금님께 아뢰겠습니다.>하여 연산군을 곤욕스럽게 하였다. 하지만 동료 허침(許琛)은 부드러운 말로 연산군을 깨우쳐주어 연산군이 벽에 <조지서는 큰 소인이고 허침은 큰 성인이다>이라는 글을 써서 붙인 일까지 있었다.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갑자사화 때 조지서(趙之瑞)를 목 베고, 시신을 강물에 버리고 모든 재산을 빼앗았다.]



높은 산과 큰 내를 보고 온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유한, 정여창, 조지서 등의 세 군자는 높은 산 산봉우리에 다시 옥 하나를 더 얹은 격이요 천 이랑 물결 위에 둥근 달 하나가 더 비추이는 격이다. 바다와 산을 거치는 삼 백리 여정을 유람하고 오늘 하루에 세 군자의 자취를 만난 것이다.

산과 물을 보며 산속에서 열흘 동안 지내다가 인간세상으로 돌아오니 마음속에 품었던 좋은 생각들이 하루 만에 언짢게 변하여 버린다. 훗날 정권을 잡은 이가 산수를 구경하러 이 길을 돌아본다면 어떤 마음을 가질지 알 수 없다.

산속 바위에 이름을 새겨둔 것들이 많다. 세 군자[한유한, 조지서, 정여창]는 결코 바위에 이름을 새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앞으로 이들 이름이 반드시 세상에 길이 전해질 것이니, 어찌 바위에 새겨 만고의 역사에 전하려는 것인가?



홍지(泓之)가 또 숙수를 시켜 술과 밥을 이 역관으로 보내온 지도 벌써 4, 5일이 되었다. 생원 이을지(李乙枝)와 수재 조원우(曺元佑)가 찾아와 보았다. 날이 어두워서 을지(乙枝)의 부친이 술을 가져오고 조광우(趙光珝)도 왔다.

밤이 되어 우점(郵店)에 들르니 겨우 말(斗)만한 크기의 방 하나가 있을 뿐이다. 허리를 구부리고 방에 들어가는데 다리를 제대로 펼 수도 없고, 벽도 바람을 막아내지 못할 정도다. 처음에는 답답하여 견딜 수 없었으나 잠시 후에 네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베개를 뒤섞으며 단잠이 든다.



*[네 사람은 인숙(寅叔) 이공량(李公亮), 강이(剛而) 이정(李楨), 우옹(愚翁) 이희안(李希顔)이다.]



이를 보면, 사람의 습성은 주의하지 않으면 잠깐 동안에 낮은 쪽으로 내려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서도 그 사람, 뒤에도 같은 그 사람인데 전날 청학동에서는 마치 신선들이 된 듯하였을 때도 오히려 만족해하지 않았고, 또 신응동에 들어가서는 모두 신선이 된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부족하다 여겨 은하수를 타고 하늘에 들어가거나, 학을 부여잡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가 인간 세상에 내려오지 않으려 하였는데 뒤에 좁은 방안에 몸을 굽혀 잠을 자면서도 자기 분수로 달게 받아 들이는 것이다.

이는 비록 현재 지위를 편안하게 여기는 경우라 하더라도 수양이 높지 않아서는 아니 되며 머무는 것이 작고 낮아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또한 착하게 되는 것도 습관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악하게 되는 것도 습관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또한 끊임없이 발전하는 사람이 되느냐 끊임없이 퇴보하는 사람이 되느냐 하는 것도 단지 발 하나 까딱하는 사이에 달렸을 뿐이다.

4월 25일

역관에서 아침을 먹고 각자 흩어져 떠나려니 왠지 가슴이 아파 잠시 동안이나마 서로 머물게 한다.

인숙(寅叔)은 서울에 살고, 강이(剛而)는 사천으로 돌아가고 우옹(愚翁)은 초계로 돌아간다. 나는 가수(嘉樹)에 홍지(泓之)는 보은(報恩) 삼산(三山)에 사는데 이제 모두 나이가 오륙십 내지 칠십 줄에 들어서고, 사는 곳이 각각 2, 3백리 내지 5백리 또는 천리에 떨어져 있어 훗날 다시 만난다는 기약도 참으로 어렵다. 그러니 어찌 이별을 슬퍼하지 않을 수 있는가? 강이(剛而)가 술잔에 술을 가득 붓고는

“지금 이 순간의 이별에 어찌 할 말이 있겠는가?”

한다. 눈으로 직접 보고도 말을 잊는다더니 과연 그렇다. 모두들 할 말을 잊고 말을 타고 떠난다. 진양 수곡면에 이르러 칠송정(七松亭), 상고대(上高臺)를 오른다.



*[조지서(趙之瑞)가 은거하여 고기를 낚으며 시름을 달래던 곳으로 아들 조정이 정자를 지어 칠송정(七松亭)이 라 하였는데 지금의 진주시 수곡면 원계리로 정자는 없어졌지만 덕천강을 굽어보는 언덕에 큰 소나무가 자리한다.]



수곡면에서 배에 올라 다회탄(多會灘)을 건너 인숙은 강을 따라 내려가고, 다시 한 마장 더 내려가 강이와 작별한다. 우옹과 함께 쓸쓸히 돌아오는데 망연히 넋을 잃는다. 이어 우옹과 여행을 떠나기 전날 묵었던 뇌룡사로 돌아와 함께 자고 다시 우옹과도 이별한다.

활 같은 초승달이 하늘에 걸리고 드문드문 새벽별이 떠 있다. 이와 같은 서글픈 마음이 정녕 춘정에 겨워하는 처녀와 같다.



이번 여행을 함께 한 여러 사람들이 내가 두류산에 자주 다녀 사정을 상세히 알 것이라 하여 나로 하여금 여행의 전말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내 일찍이 두류산을 덕산동(德山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청학동과 신응동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용유동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 백운동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이었으며, 장항동(獐項洞)으로 들어간 것이 또한 한 번이다. 오직 산수만을 탐하여 왕래하였다면 어찌 번거로워하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나름대로 오직 화산(華山)의 한쪽 모퉁이를 빌어 일생을 마칠 장소로 삼으려 하였던 평생의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이 마음과 어긋나 그곳에 머무를 수 없음을 알고 배회하고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면서 나오곤 하기 열 번이었다. 이제 시골집에 매달린 박처럼 걸어 다니는 산송장 신세가 되었다.

이번 걸음은 또한 다시 가기 어려운 걸음이었으니, 어찌 가슴이 답답하지 않겠는가? 내 이를 두고서 일찍이 시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頭流十破黃牛脇 嘉樹三巢寒鵲居

[누렁이소 갈비 같은 두류산을 열 번이나 유람했고, 차가운 까치집 같은 가수마을에 세 번이나 둥지를 틀었네.]



또 다른 시는 다음과 같다.



全身百計都爲謬 方丈於今已背盟

[몸을 보전하는 백 가지 계책이 모두 틀어졌으니 이제 방장산과의 맹세도 저버렸구나.]



이번에 모였던 여러 사람들은 모두 길 잃은 사람이라 어찌 나만 허둥지둥 돌아갈 곳이 없겠는가? 다만 술에 취한 것처럼 길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앞장서서 인도하며 심부름꾼 노릇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