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신을 위한 음악 요한 힌리히 클라우센 저 홍은정 역 좋은 씨앗 2024년 420/437 ~9.6

singingman 2024. 9. 6.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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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을 공부한 독일 루터교 목사가 교회 음악에 관해 쓴 책으로 음악적 조예도 깊다.

고대의 음악에서 부터 현대 가스펠까지 폭넓은 음악을 다루었다.
교회 음악사도 다루고 오르간이라는 악기에 관해서도 깊이있게 다루었다.
팔레스트리나, 바흐, 멘델스죤, 모차르트의 음악에 관해서도 다루고 오라토리오, 미사, 레퀴엠 등에 관해서도 다루었다.
미국 블루스와 가스펠도 다루었다.

고대 성경의 악기들 중 킨노르와 네벨과 우갑과 쇼파르등에 등에 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서기 110년경 소아시아의 총독이던 소  플리니우스가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에게 기독교의 기묘한 회합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기독교도들은 정해진 날 통트기 전에 만나 유일신이신 그리스도께 번갈아가며 노래를 부릅니다."

교회 음악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4세기 후반에야 나왔고 이때 불린 노래들은 야외나 그들이 집에서 불리워졌을것이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집이나 야외에서 노래했고 예배도 거의 전체가 음악으로 채워졌다. 경전은 노래 부르듯이 낭송되었을 것이다. 구약성경의 시편은 한 사람에 의해 낭송되거나 신도들에 의해 돌아가면서 불렸을 것이다. 사이사이에 신도들은 아프리카인이나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하는 것처럼 혹은 지금도 오순절 교회 예배에서 그런 것처럼 아람어로 '마라나타' 혹은 '예수는 주님이시다' 같은 짧은 문구를 반복해서 외쳤을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 회심 이후에 기독교는 마침내 국교가 되었다. 예배는 이제 개인집이 아닌 거대한 성전에서 치러졌다. 성직자 계층이 예배를 책임졌으며 예배는 엄격한 형식에 따라 행해졌다. 이에 일반인들의 참여와 역할이 줄어들게 되었다. 가정음악은 이제 교회의 음악이 되었다. 낭송에는 음악의 기본 요소가 그대로 적용되었다. 큰 건물 안에서 큰 소리로 낭독하면. 저절로 낭독의 선율과 리듬이 더해지기 마련이다. 즉 자연스럽게 노래화! 과정을 밟는 것이다. 낭독이 단순한 읽기로 정착한 현상은 근대 유럽의 산물이었고 이 변화를 쇠락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집전자, 선창자, 낭송자는 낭독과 기도를 사전에 암기한 패턴에 따라 노래로 불렀다. 5 세기부터는 이 임무를 사제 계층에 떠안았고 이로써 직업적인 교회 음악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수도승들은 무리를 지어 광야를 돌아다니며 기도에 의존해서 살아갔다. 그런 그들에게 현악기는 좋은 도구였다.
이 방랑자들은 현악기를 뜯으며 시편을 낭송했다.
어느덧 시편 낭창은 수도승 삶의 전형이 되었다.

360년 경에 라오디게아 공의회가 예배에서는 성경 구절만 허용한다고 선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새 노래를 지어 부르려는 사람들의 욕구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그리스어, 시리아어. 라틴어 찬가가 예배에서 제 역할과 지위를 잃게 되었다. 오랫동안 성도들의 단합, 공동체와 주교의 합일을 아름답게 드러내던 찬가는 뒤로 밀려나고 그 대신 전문적인 성직자 음악가가 부르는 전례 성가가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

교회음악은 언어의 음악이라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했다. 교회 음악은 성서의 텍스트와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특별한 방식으로 표출시키는 역할을 했다. 교부인 카이사라의 바실리우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성령께서는 말씀에 담긴 이로운 것들을 우리가 들음으로써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믿음의 교리에 선율의 사랑스러움을 더하셨다. 시편의 선율은 아직 나이와 이해력이 미숙한 자들이 스스로 음악을 행하고 있다고 믿게 하면서 실제로는 그들의 영혼을 선의 세계로 인도할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다.

교회음악은 자기 목소리를 내세워서는 안 되며 가사의 시녀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고대 교회에서 기악이 금지되었다. 요하네스 크리소스토무스가 보기에 관현악 연주는 '악마의 오물'에 지나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클레멘스는 그보다 더 상세한 설명을 내놓았다.
"피리, 현악기, 이집트 딸랑이, 원무, 춤으로 경박하고 야단스럽게 굴면 경박함과 무례함에 금방 접게된다. 심벌즈와 소고로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 이 악기들로 인해 이교도의 광기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의 소박한 성찬에서 이들 악기를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평화를 안겨주는 경전이다. 전쟁을 수행하는 자들이나 좋아하는 나팔, 소고, 피리는 필요 없다. 그에 따라 3세기 교회 규율은 전문적으로 교육받은 연주자들을 교회공동체에서 배제하게 된다.

유럽 음악의 뿌리는 중세 음악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중세 교회 음악이다.

음악은 언제나 정치적이다. 음악의 정치성은 무엇보다 전근대시대의 종교음악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가장 신성한 음악도 그 정치적 소임을 파악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속에서 살고 성장하기 때문이다.

프랑크족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나서 이들은 정해진 미사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교황은 이들에게 12명의 칸토르 집단을 파견했다. 이들이 그들에게 미사 형태를 알려주기를 원했지만 이 12명도 일치된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미사 형태를 만들 수가 없었다.

갈리아 사람들은 로마에서 도입된 선율의 달콤함을 그대로 보존할 수 없었다. 그들이 경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레고리오 성가에 그들 본연의 거친 특성을 가미했기 때문이다. 요란하고 시끄럽고 큰 목소리를 지닌 알프스 너머의 사람들은 로마선율 특유의 감미로움을 재현할 수 없었다. 태생적으로 균열이 생긴 그들의 거친 후두가 마치 통제를 잃은 화물 마차가 계단 아래로 굴러 내려가는 듯한 소음을 냈기 때문이다. 몹시 거칠고 시끄럽게 내지르는 그들의 노랫소리가 달래야 할 청중의 영혼을 도리어 깜짝 놀라게 했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교황 그레고리오 1세 (540~ 604년)가 이 노래들을 작곡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 아니다. 그리고리오 1세는 그레고리오 성가의 작곡자가 아니다. 로마교황청에서 새로운 노래들을 지었으므로 그레고리오 성가로 불린 게 아니다. 그러기엔 교황청의 세력은 너무 약했다. 다만 교황청이 왕국 내부의 결속과 통합을 강화하고 옛 전례의 이상향을 제시한다는 의미에서 이들 노래에 그레고리오라는 명칭이 붙었을 뿐이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사실 프랑크족의 것이다. 그것이 새로운 프랑크 왕국을 지배자들이 요구하는 정치적 과제를 채워주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크족 칸토르들이 지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레고리오 성가는 원래 프랑크 성가라고 불리어야 한다. 아니 그보다는 프랑크 그레 고리오 성가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낫겠다.

카를 대제의 아들 경건왕 루트비히는 816년 아헨 공의회에서 수도 생활을 하지 않는 모든 수도사에게 예배와 일상생활에서의 행위를 본격적으로 규제하는 공식적인 규범적 지침을 마련했다. 거기서 음악의 지위는 매우 중요했다. 지침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칸토로는 목소리뿐 아니라 예술적 능력이 탁월하고 유명해야 한다. 칸토로는 재능을 타고났다고 해서 오만하게 굴어선 안 되며 다른 동료 형제들 앞에서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는 성직자의 수, 축일의 규모, 시간을 고려하여 성가를 확장하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한다. 노래할 때 음색이 선명하고 우아하게 들리도록 해야 한다. 이런 기술이 아직 익숙지 않다면 이를 습득할 때까지 침묵하는 편이 낫다. 급하거나 강하고 다듬어지지 않은 목소리가 아닌 곱씹는 마음으로 단순하고 분명하게 시편을 불러서 부르는 자신의 마음에도 차양분이 되고 듣는 이들의 귀도 즐겁게 해야 한다. 그리고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칸토르가 음악 수업에 교대로 참여하여 배우는 이들이 잡담을 나누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못하도록 신경 써야 한다. 신이 내려주신 재능을 나누는 일에 소홀한 칸토르는 엄벌을 받아야 한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모든 안락함을 포기한 채 언제나 기도에만 전념하며 살았던 아일랜드 수도사들이 중세 초기 유럽의 가장 중요한 교사가 되었다. 학교 시스템은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7세기 후반에, 프랑크 왕국에서 9 세기에 등장했다.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이미 은둔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로마의 그레고리오 교황에 의해 결정된 사항들에 대해 굳이 거리를 두려는 노력도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배움을 끊이지 않았으며 많지는 않아도 손에 넣을 수 있는 온갖 책을 섭렵했다. 이를 통해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었다.

평범한 중세 수도사들에게 있어서 노래는 제례의 의무, 힘든 과업, 어쩔 수 없는 삶의 희생이었을 수도 있다. 매일의 연습, 끊임없는 단련, 엄격한 훈련, 고된 집중, 이 모두는 천상의 기쁨을 맛보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대가는 절대로 싸지 않았다. 그레고리오 성가가 현대적인 의미의 음악이 아니라 노래가 곁들여진 명상이란 인상이 더욱 강해진다. 음악회에서 감상하거나 집에서 오디오 시스템으로 들어서는 그 의미와 아름다움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는 의미다. 그레고리오 성가는 함께 노래하고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 생활을 위한 것이지 공연이나 연주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기도를 바치는 신 이외에 다른 청중은 처음부터 고려되지도 않았다. 음악회장이나 소파에서 듣기만 하는게 아니라 교회에서 전례 시간에 함께 불러야 한다. 베네딕트 수도회에서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이 음악은 세속화되지 않았으며 세상으로 퍼져나가지도 않았다.
세상에서는 이 음악이 아무런 존재감도 발휘하지 못한 채 그저 단조롭고 지루하게만 여겨졌을 것이다.

종교 개혁은 근대에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노래 운동이었다. 종교 개혁의 성공과 메시지 전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새로운 방식의 설교나 인쇄술의 발견만이 아니었다. 코랄의 역할 또한 컸다. 코랄은 구체적으로 루터 교리를 널리 알리고 신교도를 한 세력으로 뭉쳐 새로운 신앙을 형성하게 한 놀라운 교회 투쟁의 사건을 전달하는 성가이자 발라드였고 시편 노래였다.

루터는 1530년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내가 음악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아닌 신의 선물이고, 영혼을 기쁘게 만들고, 악마를 물리치고, 순수한 환희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루터는 교회만이 아니라 학교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젊은이들은 흥겨울 수 있어야 하고 적어도 무언가 즐길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만약 내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아이들은 내게서 여러 언어와 이야기를 듣고 수학을 포함해 노래와 음악까지 배웠을 것이다.

성가대는 칸토르가 이끌었고 칸토르가 교사직을 겸하는 경우도 많았다. 칸토르는 이제 성직자 신분이 아니었으며 사법이나 국방의 임무를 맡는 시 공무원에 견줄만 했다. 학교 음악가의 전신인 이 직책은 보통 시의회를 통해 선출되었고 교회를 위해 책임을 다했다. 이제는 시민들에 대해 책임감을 지녀야 했다. 칸토러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본인의 직책을 경력을 위한 첫 단계로 활용했다. 이 시기에 칸토르와 더불어 성직자가 주축되었던 지금까지 교회음악이 세속적인 행태를 띠게 되었다. 성가대도 세속화되었다. 이제 성가되는 학생, 교사, 성직자, 시민으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성가대와 달리 규모는 작았다. 보통 소년 소프라노 9명과 테너, 베이스, 알토 내지는 카운터 테너를 맡은 12명의 성인 가수로 구성되었다. 성가대는 협회와 비슷한 조직체계를 갖추었고 재단과 정부 보조금, 그리고 합창 축제, 결혼식, 장례식 등으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자금을 충당했다. 예배에서는 성가대가 선창자 역할을 했다. 오르간이 회중 찬양을 인도하는 일은 아직 흔치 않았다. 성가대는 회중과 번갈아가며 새로운 찬송가를 불렀다. 이를 통해 둘로 나뉘어 교대로 노래하는 방식과 음악적 대화가 발전할 수 있었다. 노래는 주로 여러 성부로 불렸으며 종종 오르간이나 시 악사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프로테스탄트 학교의 음악은 예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의 음악 문화의 주축이 되었다. 하지만 초기 종교 개혁 때처럼 요한 발트 같은 주요 음악가가 교육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적은 없었다. 게다가 16세기 말이 되면 벌써 학교 음악이 예배의 임무를 상실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음악 수업도 줄어들었다. 음악이 더 중요한 과목을 위한 시간을 뺏지 말아야 했다. 이런 입장은 안타깝게도 널리 퍼져나갔다. 지금까지 과거의 영광을 간직하고 있는 학교로는 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학교와 드레스덴의 성 십자가 학교가 있다.

취리히의 개혁가 울리호 츠빙글리는 교육받았고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 시대의 거의 모든 악기를 다룰 줄 알았으며 노래도 대단히 아름답게 불렀다. 시인과 작곡가로서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 게다가 그는 실내악과 가정음악의 헌신적인 지지자이기도 했다. 음악성이 루터보다 월등히 뛰어났음에도 치빙글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음악을 완전히 금했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그는 쾌락을 적대시하는 음속주의자나 음악을 멀리하는 금욕주의자가 아니었다. 본인이 이 문제를 직접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저 그의 입장을 추정해 볼 뿐이다 .

칼뱅은 음악을 향해 무엇보다 두려움과 의혹을 느꼈고 음악으로 인해 애써 확립한 공동체의 종교적, 윤리적 규율이 깨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먹고 마시고 편안하게 빈둥대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존경하고 그의 선함을 깨닫고 그에게 감사하기 위해 세상에 태어났다. 그런데 인간이 탐닉에 빠져들고 흥겹게 흥얼거리고 춤추고 인생을 즐기는데 빠져 아무 생각도 못하게 된다면 그건 짐승보다 못한 일이다. 이런 발언을 보면 칼뱅이 루터보다 훨씬 더 경계심이 강하고 신중한 것 같다. 노래는 품위를 갖추어야 할 뿐만 아니라 거룩해야 한다. 그 점이 중요하다 노래는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그의 업적에 대해 곱씹어 보도록 우리를 자극하며 그래서 결국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고 존경하고 찬양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곳이면 어디서든 노래할 수 있는데 다윗의 시편보다 더 훌륭하고 안성맞춤인 노래는 없는 것 같다. 시편은 성령이 다윗에게 임하셔서 지어진 노래이다. 우리가 시편을 부르면 하나님이 그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우리 입에 말씀을 넣어주신 것 같은 확신이 든다.

칼뱅은 음악을 엄격히 제한하고 전례성가만이 아니라 오르간과 기악을 예배에서 허용하지 않았지만 단선율의 시편 찬성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것은 아름다움 위엄과 장중함을 충분히 발산할 수 있었다.

미사는 크게 네 단계 시작 예식, 말씀전례, 성찬전례, 마침 예식으로 구성된다.

팔레스트리나는 100개가 넘는 미사곡과 375개의 모테트를 작곡했다. 미사곡은 자그마치 13 권 모테트는 7 권에 이른다.

종교 개혁은 오르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극복했다고 믿었던 예술과 사치에 대한 반감을 또다시 불러왔다. 성상 파괴만이 아니라 오르간 파괴까지 초래했다. 1527년, 개신교 열성 신도들이 취리히 그로스민스트의 오르간을 파괴했다. 종교 계획에 심취한 사람들은 츠빙글리의 말대로 오르간을 교황을 위한 악마의 도구라고 생각했다. 츠빙글리처럼 종교개혁가 칼뱅도 오르간에 대해서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오르간이나 이런 종류의 온갖 다른 장난감으로 신에 대한 숭배를 더욱 가치 있게 만들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신전을 장식하는 것은 교황권에서 유대교 숭배를 아주 우스꽝스럽고 어색하게 모방한 것이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과 품격이 더럽혀졌고 대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보다는 외적인 의식에 더 치중하고 만족하게 되었다. 반면 루터는 그보다는 관대한 입장이었는데 오르간에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예배에 관한 글 어디에서도 오르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이 유익하지 못한 교황의 리라( 한 종교 개혁가가 오르간을 이렇게 불렀다)는 교회에서 추방당하거나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오르가니스트에겐 회중 찬양을 시작하고 반주하는 임무만 주어졌다. 1532년 교회 규율이 정한대로 그는 신도들이 '기도의 마음과 친밀감'을 갖도록 노래보다 조금 앞서 연주를 시작하고 조금 늦게 끝내야 했다.

장음계의 3음과 7음을 반음식 낮춰서 만든 음계를 블루노트 음계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