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조선시대 양반과 선비 정진영 산처럼 2024년 302/326쪽 ~9.10

singingman 2024. 9. 10. 16:12
728x90

조선 시대 양반들의 삶을 자세히 설명한 책.
대체로 아주 대단한 집안이 아니면 양반들도 나름대로 사는 것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니 서민들의 생활은 오죽했을까?
흉년에 농민들이 내어야 하는 세금이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세금을 내지 않는 양반들도 아주 부자가 아니면 의식주를 걱정해야 했다.

하지만 양반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서 직접 농사나 장사를 할 수는 없었고 노비들을 시켜야 했다.
굶어 죽더라도 위세가 있는 양반의 체통을 버리기는 어려웠고 몰락한 양반들은 일반 백성들처럼 직접 농사를 짓거나 지주들의 소작농이 되기도 했다.


조선의 양반이 인,의 또는 이,기 등의 문제에만 몰두했던 것은 아니다.
먹고 사는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두었다. 생존에 필요한 현실 문제뿐만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문제도 고민했다. 가작지 경작을 진두 지휘했을 뿐만 아니라 논농사를 크게 발전시키기 위한 새로운 농법인 이양법을 도입하는데도 앞장섰다.

경상도 북부 지역은 주곡이 보리였다. 양반도 대부분 보리로 연명했다.
흔히들 경상도 '보리문둥이'라고 표현한다.
이 말은 다름 아닌 보리를 주식으로 삼는 학동 즉 '보리 문동'에서 나온 것이다. 경상도 선비가 서울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한 것은 15세기 후반부터였는데 기껏 보리밥이나 먹고 촌티도 벗지 못한 경상도의 젊은 선비가 그 모양새와 달리 학문 수준이 높고 예의 범절이 깍듯해 서울의 관료를 깜짝 놀라게 한 것에서 붙여진 말이 보리 문동이다.

"이놈아! 보리죽 한 그릇도 못 얻어 먹었냐"는  말의 어원은
오늘날 보리로 죽을 어떻게 쓰는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보리를 아무리 끓이고 삶아 보아도 그저 땡글땡글할 뿐이다.
쌀과 달리 보리는 죽이 되지 않는다. 보리죽은 보리가 토실한 쌀이 되기 전 덜 여문 보리 꼬투리를 따서 방아에 찧으면 하얀 즙이 나오는데 그 즙으로 쑤는 것이다.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종법제도가 일반화되면서 점차 적장자 중심으로 상속제도가 바뀌어갔다.
종법이란 장자가 가계를 계승하여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것을 말한다.
이전에는 아들딸이 돌아가면서 조상의 제사를 모셨고 아들이 없으면 외손봉사도 흔하게 행해졌다.
또한 17세기를 거치면서 지방 양반은 관료로 진출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이에 따라 토지의 소유 규모도 크게 줄어들었다. 반면에 자손은 계속 늘어갔다.
똑같이 나누다가는 모두 가난해질 테고 그러면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것도 어려워질 형편이었다.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그래서 장자에게 더 많은 토지와 제사에 드는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전답(제위전)을 주어 가문을 지키고 제사를 받들게 했다.
이제 종가 자체가 지주가 됐다.
이런 지주를 종가형 지주라고도 한다.

15~16세기 경상도 지역의 상속 문서 (분재기) 40 여종을 통해 25 개 가문의 재산 상태를 분석한 연구 결과 당시 특권층 양반의 일원으로 존재하려면 최소한의 경제규모가 적어도 노비 60 ~ 80명과 전답 200 ~ 300 두락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산됐다. 이는 평균치라기보다는 '적어도' 혹은 '이상'이라고 했듯이 그 최소한의 기준으로 읽어야 한다.

사림파의 영수로 잘 알려진 점필재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의 노비와 토지는 165명과 1,140 여 두락 정도로 추산되고 김종직 자신도 노비 45명과 전답 600 여 두락을 소유했다. 600 혹은 1 천여 두락에 이르는 전답은 사족 가문의 경우라도 적지 않은 규모다. 퇴계 이황은 이보다 더 많은 노비 와 토지를 소유했다. 대략 250 여 명의 노비 와 전답 3000여 두락 그리고 집 5 채 정도로 추산된다.

퇴계의 위의 기록과 다른 면도 있다. 이황은 자신이 평생 남의 비웃음을 산 것도, 아들이 처가살이하는 것도 모두가 가난 때문이라고 했다.
타인의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이황의 제자 이덕홍은 선생의 가난에 대해 '집은 본래 가난해서 가끔 끼니를 잊지 못하고 온 집안은 쓸쓸하여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기 때문에 남들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선생님은 넉넉한 듯이 여겼다'라고 술회했다.
김성일이 본 이황의 삶도 이와 비슷했다. 이뿐 아니라 이황이 아들과 손자에게 쓴 편지 글에서도 가난을 걱정하거나 그로 인해 고생하는 모습을 숱하게 볼 수 있다.
"종이 가지고 온 편지에 따르면 영천의 타작이 이것밖에 안 되니 굶주림을 면할 수 없을 것 같구나 어찌 해야 하느냐 우리 집의 사정으로 말하더라도 식구는 많고 쓸 곳은 번거로워 보통 해의 경우라도 주림을 면할 수 없는 형편인데 더구나 이같은 흉년을 장차 어떻게 견디어 간단 말이냐 이런 형편을 미리 요량해서 모든 씀씀이를 철저히 절약하여 궁핍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사족과 농민의 관계에서 잊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전제는 사족은 치자로서의 자의식과 유자로서의 민본, 민생에 대한 공적 의식을 비록 형식적이나마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선비란 마땅히 천하가 근심하기에 앞서 근심하고 천하가 기뻐한 후에야 기뻐함을 자신의 의무와 책무로 생각했다.

재지 사족의 향촌 지배 조직은 크게 유향소와 향약 그리고 서원, 향교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조직은 지역에 따라 없기도 했고 있더라도 체계화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지역마다 개별적 또는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 재지사족이라는 공통의 인적 기반 위에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재지 사족은 조선 초 이래 유향소를 조직하면서 향리의 명부인 단안을 대신해 향안을 작성했고 유향소와 향안 등 향촌 지배의 전반적 운영 원리를 규정한 향규를 작성했다.
따라서 유향소와 향안, 향규는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유향소의 자치적 성향은 점차 왕권의 대행자인 수령과 마찰을 빚거나 농민을 침학함으로써 중앙집권화에 역행하는 경향을 띄게 됐다.
중앙집권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정부는 유향소의 자치를 인정하거나 방치해 둘 수 없었다.
마침내 1406년 (태종 6년) 유향소는 혁파되기에 이르렀다.
이후 세종대에 복설 됐다가 1467년 (세조 13년) 이시애의 난과 더불어 다시 혁파되는 등 설치와 폐지를 거듭했다.

우리 나라는 산도 하나의 생명으로 간주한다.
정기를 가졌다고들 한다.
훌륭한 사람이나 특출한 사람은 대부분 산의 정기를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특출한 인간의 출생에는 산과 관련된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이 전해진다. 이는 풍수지리설과 관련이 있는지도 모른다.
원래부터 그렇게 생각해 온 것인지 아니면 풍수지리설이 전래된 이후 형성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명문 양반가에서는 동격의 가문끼리 혼인 관계를 맺는 것을 가장 바람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경제적 또는 사회적 이해관계에서 서로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혼인도 적잖이 이루어졌다.
즉, 격이 높다고 생각되는 가문에서는 경제적 이익을, 격이 낮다고 생각하는 쪽에서는 사회적 지위를 얻고자 했다.
말하자면 지체가 낮은 집안에서는 딸을 출가시키면서 논밭 수십 마지기를 함께 보냈다.
이로써 가난한 양반 가문은 일정한 경제적이익을 취할 수 있었고 지체가 낮은 양반 가문은 사회적 지위를 높일 수 있었다.
이런 경우 전자를 낙혼이라고 하고 후자를 앙혼이라 한다.
이렇게 부유한 집안에 장가든 신랑을 '치마 양반'이라 부르기도 했다.

유교적 상례, 장례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죽음을 슬퍼하는 곡이다.
곡은 슬픔의 가장 상징적 표현으로 그냥 슬퍼서 우는 것과는 다르게 일정한 형식을 가진다.
곡이란 너무 슬퍼해서 난잡해지거나 한바탕의 울음으로 슬픔을 다 해버리는 것을 적절하게 통제하여 일정기간 동안 지속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슬픔과 관계없는 형식적인 것이 되기도 하고 지루하지 않게 고저장단을 가지기도 한다.
곡은 상주만이 아니라 조문객도 당연히 해야한다.
그러나 상주와 조문객의 곡은 다르다. 양반의 상례에서 곡은 필수이고 또 그것이 끊어져서는 안된다.
그래서 양반가문에서는 곡비라는 여종을 두고 밤낮으로 곡이 끊이지 않게 했다.

아주 먼 옛날 까마귀가 염라대왕의 명으로 저승사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까마귀가 명부를 입에 물고 저승으로 가던 중에 아래를 내리다 보니 마침 어느 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배도 출출하던 차에 까마귀는 잠시 본연의 임무를 잊은 채 마을로 내려가 정신없이 배를 채웠다.
어지간히 배가 푸른 까마귀는 바삐 저승으로 날아갔다 막 저승의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에야 입에 물고 있던 명부가 없어졌음을 알아차렸다.
깜빡 잔치 집에 놓고 와버린 것이다. 까마귀는 먼 길을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명부에 적혀 있던 사람들의 이름도 기억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그 자리에서 생각나는 아무 이름이나 적어서 염라대왕에게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작 잡혀갈 순서가 되지 않은 엉뚱한 사람이 사자의  명부에 오르게 됐다.
이때부터 태어나는 차례는 있어도 죽는 순서는 없어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