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이규보 선생님, 고려시대는 살 만했습니까 강민경 푸른역사 2024년 3743/87쪽 ~9.23

singingman 2024. 9. 23.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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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가운데서 재미있는 글들을 골라서 엮은 책.
그림과 시도 함께 실었다.

동국이상국집은 고려의 이씨 성을 가진 재상의 문집이란 뜻이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은 고려 무신집권기의 문인 이규보(李奎報)의 문집이다. 이규보는 당시 최고의 문장가로 명망이 높았던 인물이다.

동국이상국집이란 책에 관해 알아보면 서문이 아래와 같다.

(전략) "평생 동안 저술한 것을 종이 한 장도 모아두지 않았다. 아들인 감찰어사(監察御史) 이함(李涵)이 만 분의 일을 수습하였는데, 고부(古賦)·고율시(古律詩)·전(牋)·표(表)·비명(碑銘)·잡문(雜文)이 모두 몇 편이었다. 문집(文集)을 만들자고 청하니, 공(公)께서 그 청이 가하다 하셨다. 41권(卷)으로 나누고 호칭을 『동국이상국문집(東國李相國文集)』이라고 하였다. 이함이 또 청하기를, ‘문집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서문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공께서 내게 명하셨다. 나는 진실로 재주가 없고 또 아들 또래로 감히 서문을 쓸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공께서 더욱 은근히 명하시니, 다만 한 두 마디 서문을 쓴다. 신축년 8월 일. 입내시 조산대부 상서예부시랑 직보문각 태자문학(入內侍 朝散大夫 尙書禮部侍郞 直寶文閣 太子文學) 이수(李需)가 서문을 쓰다.”

여기저기에 흩어진 이규보의 글을 힘들게 모아 편찬하다.
41권의 문집이 1241년(고종 28) 8월에 완성되었다.
그런데 그 뒤에 새로 많은 글이 발견되어, 같은 해 12월에 추가로 엮게 되었다.
“모아서 만든 뒤에, 또 묻혀 있었거나 근래에 저술하신 고율시(古律詩) 847수와 잡문(雜文) 50수를 얻어 후집 12권을 만들었다.”
그리고 10년 뒤인 1251년(고종 38)에는 다시 한 번 대대적인 판각 작업이 벌어졌다.
이규보의 글은 조선 시대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동국이상국집』은 조선시대에도 몇 차례 간행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및 연세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등 여러 곳에 몇몇 판본이 전해지고 있다.

이규보는 자신을 백운거사등으로 불렀고 삼혹호선생이라고도 불렀다.
이는 시, 술, 거문고 셋을 좋아하여 까고 산다는 뜻이다.

이규보 시대에는 소주가 없었다.
술을 증류시켜 독하게 만드는 소주 제조법은 원래 아라비아와 이란 지역에서 개발되어 우리나라에는 13세기 말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를 거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전통 소주로 유명한 안동, 개성, 제주는 바로 몽골군이 오래 주둔했던 곳이다. 개성에서는 소주를 아락주라고 했는데 이는 아라비아에서 증류주를 부르는 이름인 아라크(arag)에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이 규보는 술잔을 기울일 때면 생선회와 게 찜을 안주로 즐긴 듯하다.
민화에서 물고기는 알을 많이 낳으므로 다산을 뜻하는 동시에 물고기 어(魚)의 중국어 발음이 남을 여(餘) 같아  부귀함을 상징하며 개는 껍질이 갑옷처럼 딱딱하므로 갑과 곧 장원 급제를 의미한다고 한다.



관아재 조영석(1686~1761) 노승 탁족도


박연 폭포의 명성은 황진이 시대보다 훨씬 전, 개경이 수도 있던 시절에도 더 하면 더했지 덜 하진 않았다.
이규보 또한 박연 폭포를 찾아 시를 남겼다.
그나저나 박연이 왜 박연이냐 조선 세종 때의 악성 박연(1378~145 이나 인조 때 온 네덜란드인 박연 (1595~1668)과는 전혀 상관없는 박연 폭포의 내력을 이규보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피리 소리에 반한 용녀 선생께 시집갔으니/ 오랜 세월 같이 즐거워하며 마음을 맞췄겠지./
그리고 임공 땅에 살던 새 과범 탁문군이가/ 거문고 소리 듣고 제 몸 잃은 것보단 나으리



강세황 박연도


겸현 우상하 노승 간월도



이인문 설중방우도



이정 문월도


고려시대에도 뇌물이 얼마나 성했는지를 알려주는 글이 있다.
"이규보가 남쪽으로 어떤 강을 건너는데 때마침 배를 나란히 해서 건너는 사람이 있었다.
두 배의 크기도 같고 사공의 수도 같으며 배에 탄 사람과 말의 수도 거의 비슷하였다.
그런데 조금 후에 보니 그 배는 나는 듯이 달려서 벌써 저쪽 언덕에 닿았지만 내가 탄 배는 오히려 머뭇거리고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배 안에 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저 배는 사공에게 술을 대접해 사공이 힘을 다하여 노를 저었기 때문이요라고 하였다.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탄식하기를 아! 이 조그마한 배가 가는데도 오히려 뇌물에 있고 없음에 따라 느리고 빠름, 앞섬과 뒤처짐이 있거늘 하물며 벼슬을 다투는 마당에 있어서랴. 나의 수중에 돈이 없는 것을 생각하며 오늘날까지 낮은 관직 하나도 얻지 못한 것이 당연하구나라고 하였다.
이것을 기록하여 후일의 참고로 삼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