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그림자 계승범 사계절 2024년 227/263쪽 ~10.22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다룬 논문 7편을 연결해서 책으로 엮었다.
아주 심도있는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았다.
16세기 말 왜란을 겪은 후 17세기 전반에 양대 호란을 겪은 조선의 상황을 설명한다.
광해군을 끌어내리고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의 명분은 폐모살제와 배명친금이었다.
광해군의 폭정도 문제가 되었지만 명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청나라와 명나라 사이에서 줄타기한 광해의 정치에 신하들이 반대해서 그를 축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에게 있어서 명나라는 군신관계일 뿐만 아니라 부자 관계이기도 했다.
군신관계는 군이 실정하면 몰아낼 수도 있지만 부자관계는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천리의 관계다.
이렇게 성립한 인조정권이 청나라의 침공으로 삼전도에서 항복함으로 자기들도 배명친금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인조의 반정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국가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척화파나 주화파가 다 나라를 위한 것이긴 하지만 당시 상황에서 명나라의 재조지은을 저버리고 청나라와 화친하자는 주화파는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결국 청나라에 항복하고 현실적으로는 청나라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겉으로는 청나라에 굴복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명나라의 중화를 따르는 시대가 되었다.
1644년에 명나라가 망하고 나서도 이런 흐름은 계속 되었다.
중화는 3가지로 요약된다.
공간(중원),종족(한족), 문명(유교)이다.
청나라는 위 세 가지 가운데 하나도 충족시키지 못한다.
명나라가 망하자 청나라는 오랑캐여서 중화가 될 수 없고 조선이 스스로 소중화로 자부했다.
위 기준에 의하면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문명 하나밖에 없다.
그래도 자신들이 중화라고 주장했다.
청나라에 항복하고 인조의 뒤를 이어 효종이 즉위한 후에도 이런 흐름은 계속되었고 현실성이 없는 북벌론은 효종의 즉위 당위성과 양반들의 기득권을 위해서 계속 주장되었다.
청나라에 의해 요구되었고, 두 차례에 걸쳐 참전한 나선(러시아)정벌은 수치스러웠기 때문에 전공을 세우고도 자랑할 수 없었다.
숙종대에 와서 청나라가 요구한 것은 지워버리고 승전한 것만 강조함으로서 기억을 조작하게 된다.
명나라에 대한 사대는 근대의 천도교 비문에까지도 나타날만큼 오랫동안 이어졌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한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나 신하들의 불만을 누르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홍타이지가 아버지 누르하치에 비해서 주전론자였기 때문이기도 하고 남쪽의 명나라가 아버지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큰 위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중요 내용들을 적는다.
주자학이 들어온 고려말부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중화의 인식이 달라졌다. 중화요건으로는 공간, 종족, 문화 세 가지를 보는데 고려에서는 종족 기준을 별로 고려하지 않았다.
이른바 정복 왕조의 시대였기에 한인이라는 종족을 강조하면 할수록 고려의 상황만 복잡해지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화이관으로 무장한 주자학이 아직 나오지 않았거나 등장했더라도 아직은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의 사정은 달랐다.
조빈의 주장에도 나오듯이 조선 태조가 천조(명나라)를 치러 가던 군대를 위화도에서 돌려 새 왕조를 세운 일은 존왕의 실천이었다.
또한 지금 백척간두의 국가 위기에 몰린 상태임에도 척화를 부르짖는 이유는 명을 단순히 강대국으로만 간주한 게 아니라 유교적 중화문명을 탐지한 천자국으로 상징했기 때문이다.
곧 군사력의 강약을 초월하여 문명론 차원에서 중화를 인식한 결과였다.
조선이 망하더라도 의리라는 국시를 저버릴 수 없다는 주장이 당시 양반 지배층이 골몰한 고민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명나라에 대해 대의를 지키는 문제는 전쟁의 승패나 나라의 존망을 초월하는 절대 가치라는 점이다.
그런데도 이제 또 화친을 도모하니 국시가 변해 없어졌다는 것이다.
조선 왕조의 국시는 앞서 확인했듯이 바로 존왕양이 곧 존주의리였으며 그것이 조선왕조의 존재 이유이자 국가 정체성이었다.
그러니 결단코 척화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심지어 나라가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야 할 정론이라 못 박았다.
이렇듯, 청의 칸이 황제를 칭하고 조선과의 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며 압박해 오자 조정 신료의 절대 다수는 강력하게 척화를 요구하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목소리가 더욱 거세졌고 온 조정을 휩쓸었다.
인조도 결국 이렇게 말하며 척화론을 따랐다.
한반도에 고려 왕조가 있을 때 중원에서는 패자가 수시로 바뀌었다.
중원의 제국과 조공, 책봉 관계를 맺은 고려 입장에서 보면 황제국이 계속 바뀐 것이다.
고려가 연호를 수용한 중원의 제국은 후당 - 후진 - 후한 - 후주 - 송 - 요 - 금 - 원 - 명 등 모두 아홉 나라였다.
이처럼 고려는 형세에 따라 수시로 새로운 패자를 천자로 인정하곤 했다. 때때로 전쟁을 불사하기도 했지만 시세에 따라 황제국을 바꾸는 일에 이념적 윤리적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고려는 중화의 세 기준(공간은 중원, 종족은 한인, 문화는 유교) 가운데 종족 요소를 개의치 않고 누구라도 중원의 패자가 되면 그것을 천명에 따른 결과로 인정하였다.
인조실록에는 청나라의 홍타이지가 보낸 서신을 중화의 명분을 굽히지 않기 위해 다른 것과 바꿔치기 해서 올린 경우도 있다.
청태종 실록과 인조실록에는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기록들이 있다.
청태종 실록을 읽으면 정묘년 이래 조선의 절화 움직임, 홍타이즈의 천자 등극에 대한 진하거부, 조선의 전쟁 준비, 천명을 거스르는 어리석은 선택 등이 홍타이즈가 진정을 감행한 주요 이유이자 명분임을 알 수 있다.
반면 인조실록을 보면 조선이 명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키려 한 것이 홍타이즈가 조선을 친정한 핵심 요인이었다고 읽힌다. 조선은 정당했다는 것이다.
신류가 명을 치러 가는 청나라의 전쟁에 출전하여 큰 공을 세우고 돌아왔지만 정명전에서 청태종의 칭찬을 듣고 돌아온 것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사론이 있다. 반면에 임경업은 비록 정명에 나서기는 하였지만 은밀히 명과 내통하고 청의 명령에 따르지 않다가 그로 인해 나중에 고초를 겪은 인물로 알려져 후대에 현창 사업이 끊이지 않았다.
민간에까지 그의 전기 소설이 널리 회자하고 심지어 신격화 현상까지 나타났다.
삼전도 항복(1637년) 이후 조선인에게 가장 깊은 상처가 되었던 두 가지 곧, 오랑캐에게 굴복하여 패륜을 범했다는 자괴감과 그것을 해소하기 위한 북벌을 현실적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었던 무력감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소재를 나선 정벌이 제공한 것이다.
신류와 동시대인이 함께 고민하던 나선 정벌의 내면적 상처가 세월이 흐른 뒤 어느새 바로 그 상처를 치유한 악재로 둔갑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겠다 조선의 국가정체성이 무너져버린 충격에서 벗어나기 위한 갖가지 자구 노력 중에서 나선 정벌에 대한 기억의 틀을 바꾸는 작업은 이렇게 큰 몫을 하였다.
북벌론은 처음부터 현실성 없는 정치 선전에 불과했지만 국내 정치에서는 일정기간 매우 효과적이었다.
삼전도 항복으로 졸지에 금수로 전락하고 중원에서 천자도 사라져버린 천붕의 국가 정체성 위기 속에서 국왕과 지배 양반층은 이해관계를 함께해 절치부심의 북벌 담론을 생성하고 확산함으로써 조선왕조의 레종데트르(존재 이유)를 분명히 하였다.
더 나아가 삼전도 항복 이후에 흐트러진 양반 사대부의 인심과 분위기를 조선 왕조라는 깃발 아래 다시 하나로 규합할 수 있었다.
휴전 협정 이후 한국이 북한을 상대로 독자적으로 북진 통일을 할 여력이 전혀 없었음에도 계속 북진 통일을 외침으로써 전후 국내 민심을 수습한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의 정치 선전과 매우 유사했다.
백척간두의 국가 위기에서도 척화론이 여론을 주도한 연유를 단순히 사대의리나 재조지은이나 예교 질서 정도로는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다.
가변적인 군위신강(충)보다 훨씬 더 중요한 절대 불균의 부위자강(효) 논리가 조선왕조의 국가 정체성으로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군부의 자장 안에 거하는 것을 영원불변의 천륜이라 믿었다. 그래서 부친상을 당한 후에도(명이 망한 후)에도 '아버지의 그림자' 밖으로 선뜻 발을 내디려 하지 않았다.
제사 행위를 절대적으로 중시한 유교 사회 조선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조선의 중화성을 강조할 때는 종족 요인을 무시하고 문화 요인만 강조하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생물학적이건 문화적이건 종족 개념으로 보자면 조선은 언어와 복색을 달리 하였고 지리상으로도 중원 바깥의 제후국, 곧 외복이었다.
스스로 중화를 자처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가 분명하였다.
16세기에 조선이 명나라 사신들로부터 소중화라 인정받은 기준은 조선이 이적임에도 불구하고 독서지예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이적의 땅에서 탄생한 조선이 중화에 최대한 근접하기 위해서는 종족 기준을 허물고 문화 기준을 강조할수록 유리한 구조였다.
조선 후기의 중화와 이적을 구분하는 기준은 의외로 단순하였다.
고담준론의 관념적 철학 차원이 아니라 변발이나 좌임 및 옷소매 넓이 등과 같이 몸치장 관련 양식으로 중화와 이적을 구분하는 일이 아주 일반적이었다.
외모와 복식에는 문화 전체를 함축해 보여주는 표상의 기능이 있다.
그 표상의 실제 생활에 깊숙이 스며들어 절대적 준거로 작동한다면 그 자체가 곧 목적이 되어 문화 일반을 규정하는 모습이 역사에서는 일반적이다.
조선 후기 상황도 이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