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논어 그 사람 공자 이덕일 옥당 2012년 1판 4쇄 382/440쪽 ~06.09
공자의 생애를 다루면서 그의 사상과 책들도 언급한 책.
정치를 하려고 천하주유하면서 겪은 일들도 다루고 많은 주석들도 곁들였다.
특히 다산의 주석도 자주 언급한 것이 특징적이다.
정치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역사가가 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공자는 논어 첫편의 학이에서 학을 두 가지 개념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하나는 안으로 자신이 몸을 닦는 수기의 도리를 배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밖으로 세상을 구제하고 사람을 이롭게 하는 제세 이인의 지식을 배우는 것이다.
유학자가 평생 추구해야 할 학이 이 한마디에 담겨 있었다.
공자 가라사대 군자는 두루 통하지만 편벽되지 않고 소인은 편벽되지만 두루 통하지 않는다.
공자가 태산 곁을 지나는데 한 부인이 무덤 앞에서 곡하면서 슬퍼했다.
공자가 식의 예를 표하면서 자로를 보내 그 까닭을 물었다.
자로가 가서 부인의 곡소리를 들으니 틀림없이 쌓인 근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라고 묻자 부인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옛날 나의 시아버지께서 범에게 돌아가셨는데 내 지아비도 또 범에게 죽었고 지금 내 아들도 또 범에게 죽었습니다.
공자가 왜 다른 곳으로 떠나지 않습니까? 라고 묻자 여기는 가혹한 정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공자가 말했다.
제자들아 기억해 두어라.
가혹한 정치는 범보다도 무섭다.
노론 벽파 가문 홍술해는 청조 재위 1년 (1777년) 7월 임금이 자는 경희궁 존현각에 자객 전흥문을 보냈다.
홍술해의 부친 홍계희는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직접 가담한 인물이었다.
홍씨 가문은 정조만 죽이면 세상은 다시 노론 벽파의 것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자격 전흥문이 대궐에 잠입하자 대궐 별감 강계창과 상궁 고수애, 복빙 등이 궐내에 은신처럼 제공했다.
임금을 죽이러 온 암살자인 줄 알면서도 또한 지금의 청와대 경호실 간부 격인 호위군관 강용휘가 전흥문을 정조의 침실로 안내했다.
정조만 제거하면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를 필두로 하는 노론이 자신들을 일등 공신으로 포상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궁중의 청소부인 조라치 황가도 가담했다.
공자가 위나라로 가니 백성이 많았다. 그래서 염유가 이미 백성이 많다면 그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백성을 부유하게 해야 한다라고 했다. 부유해진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자 백성을 가르쳐야 한다라고 답했다. 부유하게 하는 食이 먼저고 가르치는 敎가 다음이다.
이 순서를 바꾸어 백성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선민의식에 빠진 자이다. 주관적으로는 세상을 바꾸는 혁명가일지 몰라도 객관적으로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관념론자다.
학보다 이념을 앞세운 체제나 정권은 다 망했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다.
식위민천, 백성은 밥을 하늘로 삼는다.
밥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이념을 논해야 한다.
자장이 인에 대해서 공자에게 묻자 5 가지를 천하에 행할 수 있으면 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청컨대 그것을 물으니 공손함, 관대함, 믿음, 민첩함, 은혜로움이니 공손하면 모욕을 당하지 않고, 관대하면 민중을 얻고 믿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신임을 얻고, 민첩하면 공을 세울 수 있고, 은혜로움이 있으면 다른 사람을 부리기에 족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자공이 시경에 칼로 자른듯이 하고 줄칼로 간듯이 하며 정으로 쫀 듯이 하며 쇠로 간듯이 한다고 했는데 이것을 말한 것입니까라고 묻자 공자 가라사대 사(자공)는 함께 시경에 대해 말할 만하구나 지나간 것을 알려주었더니 닥쳐올 것까지 아는구나. 이것이 절차 탁마라는 사자성어의 유래다.
학문은 끊임없이 갈고닦아야 한다는 뜻이다.
절차탁마는 시경 위풍 기욱편에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이다.
다니실 때 문지방을 밟지 않으셨다라는 구절에서 나온 속담이 '문지방 밟지 말라,는 것이다.
정약용은 문지방을 밟지 않는 것은 위태로운 것을 밟을까 봐 꺼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희는 예기 곡례 상에 나오는 사대부는 임금의 문안으로 드나들 때 문지방의 오른쪽으로 다니고 문지방을 밟지 않는다. 라는 대목을 인용해서 설명했는데 일리가 있다.
문 가운데 서지 않는 이유는 가운데로 임금이 다니는 문이기 때문이다.
공자는 옷차림에 신경을 많이 썼다.
요즘 말로 하면 패셔니스트라 하겠다. 그러나 원칙이 뚜렷했다.
공자는 밥은 잘 지은 것을 싫어하지 않고, 회는 잘게 쓴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밥이 쉬어 상한 것과 생선이 상한 것과 고기가 썩은 것은 들지 않고 빛깔이 나쁜 것도 들지 않고 냄새가 나쁜 것도 들지 않고 너무 익힌 것도 들지 않고 때가 아니면 식사하지 않았다.
공자께서 상중에 있는 사람 곁에서 식사할 때는 배부르게 먹지 않았고 이날 곡했으면 노래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상갓집에서 밥을 적게 주는 것도 이것과 관련이 있을까?
논어의 마지막 구절
공자 가라사대 천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고, 예를 알지 못하면 설 수 없으며, 말을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알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