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교회 2015-04-13 23:58:56
금산사를 들렀다가 나오면 오른편에 자그마한 시골교회가 하나 있다. 바로 금산교회다.
전라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옛 금산 교회는 'ㄱ'자로 된 교회로 이 교회에는 아주 가슴 뭉클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교회에 도착했더니 담임목사님께서 막 새벽기도 끝난 교인들을 집에 태워다 주고 오셔서 교회역사를 아주 재미있게 말씀해 주셨다.
아래 글은 다른 사람의 블로그에서 복사해 온 글이다.
"나라의 운명이 다하여 가고 있던 구한말 1904년~1905년 무렵 젊은 미국인 선교사 르위스 B.테이트(Lewis B.Tate)가 말을 타고 전주에서 정읍을 왕래하면서 중간지점인 이곳 금산리에 머물곤 하면서 역사는 시작된다.
그는 금산리에 머무를 때는 조덕삼이라고 하는 이 지역 제일의 부자집 마방(馬房)에 말을 맡기고 하룻밤을 묵었습니다.
조덕삼은 이 일대의 가장 큰 지주요, 금광으로 큰 부자가 된 사람으로 유교를 믿는 보수적인 집안이었다.
이런 조덕삼이 테이트 선교사의 전도로 예수를 믿게 된다. 그리고 그의 사랑채에서 기독교의 씨앗이 뿌려진다.
이자익-당시 조덕삼의 집에서 마굿간을 관리하던 청년-그는 경남 남해 출신이다. 3살에 아버지를, 6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호구지책으로 걸어서 전라도 김제에 도착하여 마부로 채용되었다.
그는 틈틈히 독학을 하였고 주인을 따라 기독교 신앙에 접하게 된다.
이후 금산교회는 교인이 70명..200명이 넘어 장로 한명을 피택하게 된다.
그리고 조덕삼과 이자익이 경쟁을 한다.
아직 반상(班常)을 따지던 구한말-주인과 머슴이 경쟁투표를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피택투표 결과 마부 이자익이 장로로 당선됩니다.
교인들 모두가 놀라고 당황했습니다.
그러나 조덕삼은 모든 것을 수용하고 곧바로 교인 앞에 나아가 "이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나는 이자익 장로를 모시고 하나님 섬기는 일에 열심히 봉사하겠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 이자익은 강대상에서 설교를 하고, 지주 조덕삼은 마루에 꿇어 앉아 설교를 듣습니다.
집에와서는 반대로 조덕삼은 주인자리에서, 이자익은 마부의 일을 합니다.
그 뒤 조덕삼도 장로가 되고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에 유학을 보냅니다.
그리고 그 어려웠던 일제말엽에 조선의 기독교를 이끌어가는 총회장을 3번이나 지내는 인물 이자익
목사를 배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조덕삼 장로의 집안에서 손자인 조세형 국회의원이 나옵니다.
서울 승동교회 백정 출신 박성춘 장로이야기가 생각난다.
이 교회는 백정이 장로가 되니까 당시 양반들이 함께 할 수 없다고 교회를 분리해 나가서 홍문수골 교회를
세웠다.
하지만 조덕삼 장로는 그러지 않아서 좋은 교회로 계속 남게 된다.
승동교회는 원래 이름이 사무엘 무어 목사가 목회하던 곤당골 교회(고운 담 골 교회)(1893년 설립)였다.
원래 양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던 교회였다. 여기에 백정인 박성춘이 들어가자 양반들이 무어 목사에게 박성춘을 다른 교회로 보내라고 했지만 무어 목사는 교회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자 양반들이 따로 나가서 홍문수골 교회를 세웠다.
얼마 후 곤당골 교회는 계속 부흥하고 홍문수교회는 내리막길을 걷자 3년 후 두 교회는 합쳐서 지금의
승동교회가 된다.
아래는 승동 교회와 안동교회의 역사를 말해주는 글입니다.
https://m.blog.naver.com/jgpark99/50119756796
금산교회를 세운 조덕삼 장로는 아들과 손자까지 3대째 장로로 섬긴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오래전에 대전신학대학교에서 ‘이자익목사기념관 현판식’이 있었다. 그 행사에 조덕삼 장로의 손자 조세형장로(국회의원)와 이자익 목사의 손자 이규완장로(고분자학 박사)가 만났다. 이규완 장로가 조세형 장로에게 허리를 굽혀 “옛날에 우리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참 잘 만났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주인을 잘못 만났더라면 지금의 저희들도 없고 우리 할아버지도 안계셨을 것입니다.”라고 정중히 인사했다고 한다.
예기에 나오는 남녀 7세 부동석은 원래 의미는 7살이 넘으면 남녀가 같은 자리에 앉지도 못한다는 것이 아니고 같은 이불을 덮을 수 없다는 의미라는 주장도 있다.
성리학이 너무 경직화되니까 조선 사회는 위선적인 사회로 변한 것 같은 느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