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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유일한 상속자였던 아들 이준의 분재기 본문
유성운의 역사정치]㉗ "너희들은 하지 마라"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자력으로 학문을 하였는데, 문장(文章)이 일찍 성취되었고… 오로지 성리(性理)의 학문에 전념하다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읽고는 그것을 좋아하여 한결같이 그 교훈대로 따랐다… 빈약(貧約)을 편안하게 여기고 담박(淡泊)을 좋아했으며 이끗이나 형세,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3년 12월 1일)
조선 성리학의 거두로 평가받는 퇴계 이황의 졸기(卒記)입니다. 그가 사망하자 사관(史官)이 인물평을 실록에 남긴 것을 보면 이황이 당대에 얼마나 높은 위치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죠. 졸기를 보면 이황의 생애가 대략 상상이 되지 않나요?
“빈약(가난하고 검소함)을 편안하게 여기고 분분한 영화 따위는 뜬구름 보듯 하였다”고 하니 한 겨울에도 냉랑한 방 안에서 허름한 옷차림이나마 의관을 정제한 채 경전을 읽는 딸깍발이 선비 같지는 않았을까요.
하지만 이 기록대로만 이황의 이미지를 연상했다면 오판이 됩니다. 왜냐하면 이황은 자산 규모가 꽤나 컸던 지역 유지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본인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부를 쌓은 사례였죠.
조선 선비들은 재산 증식에 관심 없었다?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조선 사대부들은 이재(利財)를 쌓는 것을 죄악시했습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구분에서도 상인을 가장 아래에 놓았던 이유입니다. 부를 쌓고 이재를 중요시하면 인간의 본성을 잃고 도리를 어지럽힌다며 상공업의 발달을 억눌렀습니다.
이황도 성학십도 통해 세속의 이익에 대해 경계할 것을 주문했습니다. "부동심(不動心)에 이르러야 부귀(富貴)가 마음을 음탕하게 하지 못하고, 빈천(貧賤)이 마음을 바꾸게 하지 못하여 도가 밝아지고 덕이 세워진다."
그렇다고 이들이 재산 증식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건 결코 아닙니다. 자신들이 억누른 상공업에 투자하거나 이를 운영할 수는 없으니 눈을 돌린 것은 노비(奴婢)와 전답(田畓)이었습니다. 그렇다면 500년 전에 살았던 이황의 재산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열쇠는 ‘분재기(分財記)’입니다. 조선 시대에 소위 ‘뼈대 있는 가문’에서는 대부분 분재기를 남겼습니다. 분재기는 자녀들에게 재산을 물려준 기록인데요. 향후 유산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는 일을 막기 위해서 작성됐죠.
현재 이황이 남긴 분재기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황의 유일한 상속자였던 아들 이준의 분재기가 남아있어 대략적인 추정이 가능합니다. 이준이 자녀들에게 분재기를 남긴 것은 1586년인데, 이황이 죽은 1570년으로부터 불과 16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계에선 이준이 남긴 분재기에 기록된 재산 내역이 이황이 남긴 재산 규모와 거의 같을 것으로 봅니다.
30만평의 땅을 소유한 성리학의 거두 퇴계 이황
그러면 이준의 분재기를 볼까요. 아래 표는 이수건 영남대 명예교수의 연구 자료를 토대로 이준의 분재기를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일단 토지부터 보겠습니다. 두락(斗落)이라는 단위가 지금의 면적 단위와는 달라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안 될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에서 공부했던 20년 전만 해도 조선의 토지 면적은 가늠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예를 들어 대동법에 따르면 세금으로 토지 1결(結) 당 쌀 12두(斗)를 거뒀다고 하는데 ‘1결’이 어느 정도의 크기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결’이라는 단위가 지금처럼 면적이 아니라 당시엔 곡식의 수확량이나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됐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것만 정확히 알아내면 바로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동안 연구들이 축적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근접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영훈 서울대 명예교수가 경북 안동과 고령 일대의 각종 데이터를 통해 추정한 바에 따르면 이 지역의 밭 1두락은 119.2평, 논 1두락은 105.8평입니다. 이황이 소유한 토지도 영천, 의령 등 경북에 있었으니, 큰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이를 적용하면 이황이 남긴 땅은 약 36만 3542평 정도 입니다.
다음엔 노비를 보겠습니다. 이황의 손자녀들이 나누어 가진 노비는 367명(노 203명, 비 164명)인데 이 가운데 88명(노 44명, 비 44명)은 이황의 손자녀들이 결혼 때 받은 노비와 그 자식입니다. 또한 33명(노 20명, 비 13명)은 이황의 아들 이준이 처가에서 받은 것인데 이를 감안하면 이황은 대략 250~300명 안팎의 노비를 보유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생계 걱정 없이 학문에만 전념했던 지방 지주들의 재산이 평균 전답 300~500두락, 노비 100여명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전답 3000두락에 노비 250여명 가까이 거느린 이황은 꽤 잘 사는 축에 속했던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여담이지만 표를 보면 다섯 자녀에 대한 재산 상속이 거의 고르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만 하더라도 균분 상속이 큰 흐름이었습니다.)
노비는 양인과 결혼 시켜라"
앞서 말했듯이 이황은 재산 증식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가 아들에게 남긴 각종 서찰을 보면 그가 재산을 모으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노비 규모를 늘리는 데 적지 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노비는 토지보다 더 가치 있는 재산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이죠. 개간을 통해 전답으로 바꿀 수 있는 황무지가 곳곳에 흩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노비를 많이 갖고 있다면 토지는 늘리기가 수월했던 거죠.
이황이 아들에게 남긴 서찰을 보면 그가 자신의 노비들을 양인(良人)과 결혼시키려고 무척 애썼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범금(范金)과 범운(范雲) 등을 불러다가 믿을만한 양인 중에 부모가 있어 생업을 의탁할 수 있는 자를 골라 시집을 보내고, 죽동에 와서 살게 한다면 더욱 좋겠다.“ (도산전서(陶山全書)中)
이황이 노비들을 양인(百姓)들과 적극적으로 맺어주려고 했던 까닭은 당시 노비와 양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은 모두 노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일천즉천’(一賤卽賤〮부모 중 한 명만 천인이면 자식도 천인)이라고 합니다. 노비끼리 결혼시키는 것보다 이처럼 양천교혼(良賤交婚)을 시키면 노비를 손쉽게 늘릴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 중기의 사대부들은 노비들이 양인과 결혼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예를 들어 17세기 경상도 재령이씨 가문의 기록을 보면 자식을 많이 둔 노비가 아들을 모두 양인과 결혼시키자 그 공을 높게 평가해 노역에서 풀어주는 한편 상속 대상에서도 제외해 줍니다.
그렇다면 노비는 어느 정도의 재산 가치를 갖고 있었을까요. 이황이 죽고 10여년이 지난 1593년의 한 기록을 보면 28세 여성 노비는 목면 25필이었습니다. 당시가 임진왜란 중이라 노비의 가격이 폭락했었음을 고려하면 이황 당대에는 더 높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20~30대 장정을 구입할 경우엔 소 한 마리 외에도 목면이나 곡식을 더 얹어줘야 했습니다.
이황은 노비들이 소유하고 있던 토지를 구입하기도 했는데, 간혹 강제력을 동원하기도 했습니다. ”내가 연동(連同)에게 절대 방매(放賣)하지 말라고 지시해 놓았으니 너도 이에 따라 가르쳐주는 것이 좋겠다. 부득이 방매한다면 내년에 가서 네가 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은 그렇게 할 만한 형편이 아니니 어쩌겠느냐.” 연동은 이황이 소유한 영천 토지에 거주하던 노비였는데 이황은 그가 토지를 팔려고 하자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막은 다음 꼭 팔아야 한다면 이황 집안에게 팔도록 강권했던 것이죠.
이황은 목화 농사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곡식보다 수익성이 좋고 재산 가치도 높았기 때문이죠. 목화로 만든 면포는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도록 해주는 옷감의 원료이면서 동시에 화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농장을 관리했던 아들에게 수시로 편지를 보내 목화에 대해 상세하게 언급하곤 했습니다.
“목화 파종하는 일은 물이 불어서 분전(糞田)을 하지 못했다. 모레쯤 할 계획이다…목화는 요긴히 써야 할 곳이 있으니 먼저 딴 것을 지금 가는 사람에게 모두 부쳐 보내거라.” (도산전서(陶山全書)中)
또한 이들은 재산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많은 애를 썼습니다. 비슷한 수준의 가문끼리 혼인 관계를 맺은 것도 부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컸습니다. 이황만 하더라도 2차례 결혼 과정에서 전처와 후처가 처가에서 가져온 영천(382두락), 풍산(148두락), 의령(687.5두락)의 토지 덕분에 가산을 크게 늘릴 수 있었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황의 재산 증식은 아주 특별한 사례는 아니었습니다. 조선 중기 정계에 진출해 '도학 정치'를 주창했던 조광조 등 사림들은 대부분 지방에 이같은 물질적 기반이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생계에 대한 걱정을 덜고 안정적인 학문-정치 활동이 가능했던 것이죠.
한 가지 첨언하면 이황은 생전에 자신이 늘 넉넉치 않다고 여겼으며, 가뭄이나 흉년이 들 때면 경제적 곤궁함을 토로한 적도 많았습니다. 중상층 이상의 재산을 소유했던 그의 이런 '결핍' 의식은 재산 증식의 당위성과 원동력을 제공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너희는 꼭 ‘인 서울’을 지켜라”
조선의 학자들은 가문의 위세를 지키기 위해 재산 증식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조선 후기엔 서울 거주의 중요성도 두드러집니다. 이황이 살던 16세기만 해도 지방에서 열심히 공부해 입신양명이 가능했지만 후기로 갈수록 서울 거주 여부가 출세의 관건이 됐기 때문입니다.
이는 ‘경제 민주화’와 ‘토지 공개념’의 선구자인 정약용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토지를 국유화 한 뒤 ‘우물 정(井)’자로 나누어 균등하게 분배하는 정전제를 주장했죠. 그는 전남 해남에서 18년간 귀양살이를 하며 아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는데, 자식에게만큼은 뉘앙스가 다소 달라집니다.
변변히 물려줄 토지도 없다는 점을 미안하게 여기는 그는 아들에게 학문 정진을 당부하면서 강조하는 것이 ‘인 서울’입니다. 폐족이 된 가문의 형편 때문에 당분간 과거를 볼 수 없지만 어렵더라도 서울 생활을 고수해야 하며 서울이 어렵더라도 10리 밖을 벗어나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합니다.
“혹여 벼슬에서 물러나더라도 한양(漢陽) 근처에서 살며 안목을 떨어뜨리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사대부 집안의 법도이다…내가 지금은 죄인이 되어 너희를 시골에 숨어 살게 했지만, 앞으로 반드시 한양의 십 리 안에서 지내게 하겠다…분노와 고통을 참지 못하고 먼 시골로 가버린다면 어리석고 천한 백성으로 일생을 끝마칠 뿐이다.” 각종 개혁적 주장을 펼친 그도 자녀의 장래와 성공을 고민하는 '아버지'였던 것이죠.
최근 여권 인사들의 ‘사다리 걷어차기’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서울 부동산 문제를 언급하다가 “모두 강남에 살 필요는 없다. 내가 강남에 살기에 드리는 말씀”이라고 발언해 많은 비판을 받았죠.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사법시험 폐지를 옹호하며 “모두가 용이 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개천에서 붕어, 개구리, 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해 빈축을 샀습니다.
소위 '금수저' 집안 출신으로 강남에서 시가 20억원이 넘는 아파트에 거주하는 장 실장이나 조 수석이 입에 담기엔 부적절하다는 이유였습니다. 또, ‘어용 지식인’을 자처한 유시민 작가도 “외고와 자사고를 폐지해야 한다”며 “제 딸이 외고를 다닐 때 어떠냐고 물어보자 ‘보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는데, 졸업하니까 ‘외고를 없애야 해’라고 말하더라”고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자기 딸은 외고를 보내놓고 이제와서 폐지하자는 건 이중적 태도’란 반응이 쏟아졌습니다.
자신들이 누리는 위치에 도달하는 ‘사다리’를 “필요 없다”, “별 거 없다”며 치워 버리는 것이나 조선 지도층이 백성들의 이재(利財) 축적은 막아 버리고, 자신들은 노비와 토지로 재산을 불려 나간 것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혹시나 일반 국민들을 ‘교화 대상’인 백성으로 내려다보는 것은 아닐까요.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김건태 이황의 가산경영과 치산이재(治産理財), 이수건 퇴계 이황 가문의 재산 유래와 그 소유형태, 문숙자 退溪學派의 經濟的 基盤-財産 形成과 所有 規模를 중심으로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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