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윤두서 자화상 #공재 윤두서 자화상 #공재 자화상
- #평화누리길 2코스 #평화누리길 1코스 #평화누리길 1~2코스
- #조선 중기 정치와 정책(인조~현종 시기)
- 해파랑길 8코스
- 해파랑길 48코스
- 단양 구담봉
- #건봉사 #고성 건봉사
- 평화누리길 3코스
- 군위 팔공산
- 평화누리길 4코스
- 평화누리길 7코스
-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 고성 왕곡 마을 #왕곡 마을
- 앙코르와트
- 명동 성당 미사
- 해파랑길 20코스
- #강화 나들길 18코스 #강화 나들길 18코스 왕골 공예마을 가는 길
- 성인대
- #강화나들길 3코스
- 김포 문수산
- #붕당의 발생 #붕당의 형성 #붕당의 시작
- 미시령 성인대
- 평화누리길 경기 구간 완주
- #대흥사 #해남 대흥사
- 김포 한재당
- #북한산 문수봉 #북한산 승가봉 능선
- #앙코르 왓 #앙코르 톰 #씨엠립 여행
- #조선 국왕의 일생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엮음 글항아리
- 정서진 #정서진 라이딩
- 북한산 만포면옥
- Today
- Total
목록역사 문화 유적지 관광지 (182)
노래하는 사람
오래된 고성이다. 여기 성이나 모스크들은 다 상인들이 점령하고 있다. 성 안에는 박물관이 있어서 이곳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성위에서 내려다 보는 부하라 올드 시티가 아주 멋지다. 아래는 박물관 전시물들
미나렛은 모스크와 함께 지어진 높은 탑이다. 이곳에 무아진이 올라가서 아잔을 외친다. 노래처럼 들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아래와 같은 내용을 외친다. "알라는 위대하시도다. 알라는 위대하시도다. 나는 알라 이외에 다른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음을 선언한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이시다. 기도하러 오라. 구원받으러 오라.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 알라 이외에 다른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는 실크로드 시대에 대상들이 멀리서 이 높은 탑에서 나오는 불빛을 보고 밤에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밤에 본 미나렛 미나렛 주위에는 모스크와 신학교인 마드라사가 함께 있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를 대표하는 광장이다. 네이버 지식 백과에 의하면 '레기'는 모래, '스탄'은 광장의 뜻으로 레기스탄은 ‘모래 광장’을 뜻한다. 북쪽을 흐르는 운하 주변에 있는 모래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마르칸트의 중심지로 이곳에서 알현식, 사열식, 각종 모임 둥이 열렸다. 티무르 때는 대규모 시장이 있었고 울루그 베그 때는 마드라사(Madrasa, 이슬람교 교육기관)가 세워졌다. 현재와 같은 모습은 샤이바니 왕조 때 갖춰졌다. 중앙에 티라카리 마드라사, 오른쪽에 셰르도르 마드라사, 왼쪽에 울루그 베그 마드라사가 세워져 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50숨짜리 지폐에 이곳 광장이 그려져 있으며, 국가적인 대규모 경축행사나 명절, 기념일 행사가 열린다. 겨울을 제외하고 매주 목, 토, 일요일 밤..
티무르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웅으로 징기스칸의 후예로 자처하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티무르는 전쟁에서 포로를 남기지 않을만큼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였지만 15~16세기에 중앙 아시아에서 찬란한 이슬람 문화를 꽃피웠다. 그는 학교를 다니지 않았지만 해박한 역사지식을 갖고 있었고 학문의 유용성과 문화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티무르는 아래 참고 https://namu.wiki/w/%ED%8B%B0%EB%AC%B4%EB%A5%B4 티무르티무르 제국 의 건국자. 상세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국 의 몽골 계 바를라스 부 출신의 인물로, 역사 학계에서는namu.wiki
위키백과에 의하면 비비하눔 모스크(페르시아어: مسجد بی بی خانم; 우즈베크어: Bibi-Xonum machiti)는 14세기 티무르 제국의 통치자였던 아미르 티무르의 아내 이름을 딴 모스크로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 위치해 있다. 총 외벽을 살펴보면 167m, 너비로는 109m에 달한다. 주 건물의 둥근 지붕 높이는 40m, 입장로의 높이는 35m이다. 궁정 한가운데에 있는 대리석에는 꾸란이 쓰여져 있다. 티무르 왕이 1399년 인도 원정을 다녀온 후 새로운 수도였던 사마르칸트에 사원을 세울 것을 즉시 명령한다. 모스크는 인도 원정 동안 수집해 온 호화로운 원석을 사용했다. 90마리의 코끼리를 잡아와서 사역에 이용했다고 전해지는데 1399년~1404년 사이에 완전히 건설된 것으로 추측된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울루그 벡은 미르자 무함마드 타라가이 빈 샤루흐 울루그 벡(1392년 8월 31일 술타니야에서 태어나 1449년 8월 31일 죽음. 재위 1447년~1449년; 우즈베크어: Mirzo Muhammad ibn Shohruh ibn Temur Ulug'bek Ko'ragon; 페르시아어: میرزا محمد طارق بن شاہرخ الغبیگ), 속칭 울루그 벡 혹은 울루그 베그는 티무르 왕조의 군주였다. 그는 테무르의 4남, 샤 루흐의 맏아들이다. 울루그 벡이라는 명칭은 별명으로, 대략 ‘위대한 통치자’라 옮길 수 있는데, 이 칭호는 그의 할아버지 테무르가 가졌던 칭호들 중 하나였던 ‘아미리 카비르’(Amīr-e Kabīr)를 투르크어로 옮긴 것이다. 그는 티무르 제국의 문화계의 황..
사마르칸트 여행 중 이곳에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의 무덤이 있다고 해서 들르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찾아보니 세계 여리 곳에 다니엘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곳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원래 이란의 수사에 있는 다니엘의 무덤에서 시신을 옮겨왔다고 주장한다 그만큼 다니엘이 무슬림들에게도 존경받고 인기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영묘 안에 있는 다니엘의 관이 엄청 길다. 18m 정도라고 한다. 관이 이렇게 큰 이유는 다니엘의 정강이뼈가 자라나서 길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전설을 만드는 수준이 괜찮은 건가? 위키 백과에 의하면 오늘날 다니엘의 무덤이 있는 도시는 바빌론, 이라크의 키르쿠크, 무크다디야, 이란의 수사와 말라미르,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등 6개 도시이다. 가장 유명한 곳..
이 박물관에는 고구려 사절들이 그려진 벽화가 있다. 아래는 전시물들 아래는 영상자료 유골이 아래와 같이 담겨 있었다. 아래는 위키백과의 내용이다. https://youtu.be/mBTQEf9aILk 1965년 사마르칸트 동북쪽에 위치한 아프라시압 도성터에서 도로 설치를 위한 사전 발굴조사를 하던 중 상부가 잘려나간 벽화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전체 발굴 조사 후 드러난 벽화의 모습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7세기 번영했던 소그디아나의 모습을 각 11미터씩 4개 벽면에 나눠 그린 총 44미터 길이의 초대형 벽화였기 때문이다. 소그드 시대의 종교, 의례, 정치, 외교, 문화, 신화 등을 담은 이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던 7세기 소그드 시대를 연구하는 데 있어 더없이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성수 부부와 함께 가다. 남명은 조선 시대의 고집 센 선비를 연상시킨다. 남명은 1501년에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나서 5~6세경에 문과에 급제한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와서 20년간 살았다. 20세 때 생원시,진사시,문과 초시에 모두 합격했다. 이후 과거는 포기하고 성리대전을 읽다가 안연처럼 사림으로 살기로 결심한다. 1528년에 부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28세에 성운의 친형인 성우와 함께 지리산을 유람했다. 30세인 1530년에 처가가 있는 김해로 가서 처가의 도움으로 신어산 밑에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침잠했다. 45세인 1548년에 모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김해로 가지 않고 고향 삼가에 계부당.뇌룡정이란 집을 짓고 살았다. 61세 되던 해에 삼가에서 현재의 산청군 시천면 사리로 들어가서 산천재를 짓고 ..
산천재에서 1.7km 떨어진 곳에 남명 조식의 서원이 있다. 다음 백과 사전에 의하면 1576년(선조 9)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식(曺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9년(광해군 1) ‘德川(덕천)’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그 뒤 최영경(崔永慶)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에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 지방유림이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숭덕사(崇德祠)·경의당(敬義堂)·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대문(大門)·세심정(洗心亭)·산천재(山天齋)·상실(橡室)·장판각(藏板閣)·별묘(別廟)·문루(門樓)·재실(齋室)·고사(庫舍) 등이 있고, 신도비(神道碑)도 있다. 숭덕사는 3칸으..
남명 유적지를 찾아왔다. 산천재는 그가 61세에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72세에 죽을 때까지 평생 살았던 곳이다. 지리산을 너무 좋아해서 천왕봉을 직접 올라가기도 하고 12차례나 지리산을 유산했던 그는 여기서 천왕봉을 바라보면서 평생을 살았다. 그는 실천적인 학풍을 가졌고 그 덕분에 그의 제자들에게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들이 많이 나왔다. 그의 시대에 4대 사화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산림에 은거하면서 제자를 기르고 조정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정치 일선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주자학 일변도였던 당시의 상황과는 달리 개방적이어서 여러 학문을 두루 연구하였다. 조식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
결혼 40주년 기념 여행으로 성수 부부와 함께 산청 남명 유적지에 왔다. 이곳에 남명 기념관과 산천재, 남명 사당, 남명 묘소, 덕천 서원등이 다 모여 있다. 그가 가지고 다니던 성성자라는 방울이 생각난다. 항상 깨어 있기를. 기념관 뒷산에 남명의 묘가 있다. 그가 쓴 여러 글들이 돌에 새겨져 있다 옆에 남명의 사당이 있는데도 몰라서 못 갔다.
수원 화성을 한 바퀴 돌 때 코로나로 인해 행궁을 개방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우무길 선생님 퇴임식 가면서 가게 되었다. 수원은 삼성이 먹여살린다고 하지만 정조도 한몫하는 것 같다. 우리 나라 행궁 가운데 가장 크고 잘 복원되었다. 의궤가 잘 남아 있어서 복원도 순조롭게 되고 있다고 한다. 일제 시대에 철저히 훼손했지만 거의 다 복원되어 가고 있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25 (남창동)에 위치해 있는 행궁으로, 사적 제478호로 지정받았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가 세운 수원화성 내부에 있는 행궁으로, 건립 당시에는 건물 21동, 576칸 규모로 지어졌다. 주로 조선의 국왕이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정조 이외에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 행궁을..
해파랑길 걸을 때 여기를 실수로 놓쳤는지 힘들어서 안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한 바퀴 돌았다. 전체 길이는 2.9km라고 하며 한 바퀴 도는 데 40분 정도 걸린다. 석호다. 호수에서 유황 냄새가 많이 나고 죽은 고기들이 많이 보인다. 물가에 거품도 많이 있고 한 것을 보니 별로 깨끗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곳을 국가.지방 정원으로 추진할려고 하니 우선 깨끗하게 만들고 잘 정비하면 좋겠다. 해파랑길과 강릉 바우길이 겹친다.
양양 여행 중 들르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거무튀튀하고 날카롭게 각진 바위가 마치 힘센 수소를 연상케하며, 코끼리바위 등 자연 형성된 신기하고 기괴한 바위들로 가득하다. 소돌바위는 일억 오천만년 쥬라기시대에 바다 속에 있다가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지상에 솟은 바위로 먼 옛날 노부부가 백일 기도 후 아들은 얻은 후로 자식이 없는 부부들이 기도를 하면 소원을 성취한다는 전설이 있어 신혼 부부들이 즐겨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윤선생님 부부와 함께 적성에 가서 오랜만에 한우로 점심을 배불리 먹고 소화도 시킬겸해서 가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임진강이 옛날에는 호로하(瓠瀘河)라고 불렸기 때문에 호로하에 있는 오래된 보루라는 뜻으로 호로고루라고 불리게 되었다. 토축이 주된 성벽의 구성방식이지만 일부구간에는 외면에 석축으로 보강한 곳도 있다. 또한 토축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토축 가운데에 석축으로 심주를 둔 방법을 택하였다. 성 내부는 평탄한 지대로 감시초소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주혈건물지와 고구려 때의 생활의 흔적, 그리고 고려시대의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고구려의 연화문 와당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 장군총에서 나오는 와당부터 평양성에서 나오는 와당과 닮은 것이 많아서 호로고루의 중심적 운영연대는 역시 5세기대의 고구..
광화문 광장에 빛초롱 축제를 한다. 낮에 보니까 빛은 모르겠고 조형물만 본다. 손자들과 보러 가야 할 것 같다.
일부러 시간 내서 갔지만 출입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냥 담장을 한바퀴 돌면서 밖에서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명륜당 앞에는 동재,서재가 있고 대성전 앞에는 동무, 서무가 있다. 그리고 진사청도 옆에 따로 마련되어 있다. 바로 옆에 중남미 문화원이 담장을 이웃하고 있다.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조선 숙종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유학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서 창건되었다. 1537년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장지가 향교가 원래 있던 서삼릉으로 정해지자, 향교는 대자동의 고읍마을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2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재건되었다. 담장은 1970년에 보수되었고, 명륜당은 1975년에 다시 건립되었다. 198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