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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남명 유적지를 찾아왔다. 산천재는 그가 61세에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72세에 죽을 때까지 평생 살았던 곳이다. 지리산을 너무 좋아해서 천왕봉을 직접 올라가기도 하고 12차례나 지리산을 유산했던 그는 여기서 천왕봉을 바라보면서 평생을 살았다. 그는 실천적인 학풍을 가졌고 그 덕분에 그의 제자들에게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들이 많이 나왔다. 그의 시대에 4대 사화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산림에 은거하면서 제자를 기르고 조정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정치 일선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주자학 일변도였던 당시의 상황과는 달리 개방적이어서 여러 학문을 두루 연구하였다. 조식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
결혼 40주년 기념 여행으로 성수 부부와 함께 산청 남명 유적지에 왔다. 이곳에 남명 기념관과 산천재, 남명 사당, 남명 묘소, 덕천 서원등이 다 모여 있다. 그가 가지고 다니던 성성자라는 방울이 생각난다. 항상 깨어 있기를. 기념관 뒷산에 남명의 묘가 있다. 그가 쓴 여러 글들이 돌에 새겨져 있다 옆에 남명의 사당이 있는데도 몰라서 못 갔다.
수원 화성을 한 바퀴 돌 때 코로나로 인해 행궁을 개방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우무길 선생님 퇴임식 가면서 가게 되었다. 수원은 삼성이 먹여살린다고 하지만 정조도 한몫하는 것 같다. 우리 나라 행궁 가운데 가장 크고 잘 복원되었다. 의궤가 잘 남아 있어서 복원도 순조롭게 되고 있다고 한다. 일제 시대에 철저히 훼손했지만 거의 다 복원되어 가고 있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25 (남창동)에 위치해 있는 행궁으로, 사적 제478호로 지정받았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가 세운 수원화성 내부에 있는 행궁으로, 건립 당시에는 건물 21동, 576칸 규모로 지어졌다. 주로 조선의 국왕이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정조 이외에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 행궁을..
해파랑길 걸을 때 여기를 실수로 놓쳤는지 힘들어서 안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한 바퀴 돌았다. 전체 길이는 2.9km라고 하며 한 바퀴 도는 데 40분 정도 걸린다. 석호다. 호수에서 유황 냄새가 많이 나고 죽은 고기들이 많이 보인다. 물가에 거품도 많이 있고 한 것을 보니 별로 깨끗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곳을 국가.지방 정원으로 추진할려고 하니 우선 깨끗하게 만들고 잘 정비하면 좋겠다. 해파랑길과 강릉 바우길이 겹친다.
양양 여행 중 들르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거무튀튀하고 날카롭게 각진 바위가 마치 힘센 수소를 연상케하며, 코끼리바위 등 자연 형성된 신기하고 기괴한 바위들로 가득하다. 소돌바위는 일억 오천만년 쥬라기시대에 바다 속에 있다가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지상에 솟은 바위로 먼 옛날 노부부가 백일 기도 후 아들은 얻은 후로 자식이 없는 부부들이 기도를 하면 소원을 성취한다는 전설이 있어 신혼 부부들이 즐겨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윤선생님 부부와 함께 적성에 가서 오랜만에 한우로 점심을 배불리 먹고 소화도 시킬겸해서 가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임진강이 옛날에는 호로하(瓠瀘河)라고 불렸기 때문에 호로하에 있는 오래된 보루라는 뜻으로 호로고루라고 불리게 되었다. 토축이 주된 성벽의 구성방식이지만 일부구간에는 외면에 석축으로 보강한 곳도 있다. 또한 토축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토축 가운데에 석축으로 심주를 둔 방법을 택하였다. 성 내부는 평탄한 지대로 감시초소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주혈건물지와 고구려 때의 생활의 흔적, 그리고 고려시대의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고구려의 연화문 와당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 장군총에서 나오는 와당부터 평양성에서 나오는 와당과 닮은 것이 많아서 호로고루의 중심적 운영연대는 역시 5세기대의 고구..
광화문 광장에 빛초롱 축제를 한다. 낮에 보니까 빛은 모르겠고 조형물만 본다. 손자들과 보러 가야 할 것 같다.
일부러 시간 내서 갔지만 출입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냥 담장을 한바퀴 돌면서 밖에서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명륜당 앞에는 동재,서재가 있고 대성전 앞에는 동무, 서무가 있다. 그리고 진사청도 옆에 따로 마련되어 있다. 바로 옆에 중남미 문화원이 담장을 이웃하고 있다.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조선 숙종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유학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서 창건되었다. 1537년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장지가 향교가 원래 있던 서삼릉으로 정해지자, 향교는 대자동의 고읍마을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2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재건되었다. 담장은 1970년에 보수되었고, 명륜당은 1975년에 다시 건립되었다. 1983년..
아내가 가보고 싶다고 해서 문목 부부와 함께 가다. 이찬수 목사님이 시무하는 분당 우리 교회가 자은 것이라고 한다. 이름은 가평 우리 마을이지만 청평댐에서 청평 유원지로 올라가면 오른쪽 산골짜기에 있다. 어느 권사님이 이 땅을 기부하고 쁘띠 프랑스를 설계한 장로님이 이곳을 설계했다고 들었다.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쉼이 필요한 지친 사람들에게 아주 필요 적절한 공간인 것 같다. 입구에 '하나님의 조건 없는 환대'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지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고 회복의 기회를 줄 수 있는 곳으로 보인다. 도서관도 있고 숙소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카페와 식당도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작은 chapel도 있다. 청평댐으로 인해 생긴 바다같은 한강을 내려다 보고 있어서 경치도 아주 좋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다녀온 적이 있다. 아내와 둘이 가다. 입장료는 성인 3,000원이고 경로는 무료다. 북한이 조강 건너 1.2km 앞에 보인다. 시설 투자는 많이 했지만 북한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 외에는 별로 특이한 것은 없다. 차 타고 들어갈 수 있고 해병들이 검문한다. 신분증 필수
용흥궁 앞에서 김상용의 순절비를 보다가 그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도 알게 되었다. 충렬사라는 이름의 사당은 전국에 수십개가 있다. 김상용은 인조 때 청나라가 쳐들어오자 종묘의 신주와 세자빈과 원손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왔다. 당시 강화도 수비를 맡은 검찰사 김경징이 싸울 준비는 안하고 청군이 강화도로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방심해서 술에 빠져 넋놓고 있다가 청군이 조선군의 수비를 뚫고 상륙하자 도주해 버려 강화성이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성이 함락되자 김상용은 남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했다. 그리고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등 왕족들, 고위 관료들 상당수가 포로가 되었고 청나라로 끌려가기도 했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주전파의 우두머리였던 청음 김상헌의 형이고 김상헌의 손자가 김수항이다..
일주일간 이석증으로 어지러워서 잘 못 움직이다가 이제 좀 나아져서 혼자 가다. 일산 호수공원에 비해서 나무가 아직 덜 자랐지만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다. 여름에는 그늘이 부족해서 좀 힘들긴 하겠다. 하지만 습지를 잘 활용했고 물길을 따라 양쪽으로 잘 가꾼 노력이 돋보인다. 전체를 다 돌려면 일산 호수공원보다 더 시간이 많이 걸리겠다. 전에 운정역에서 내려서 이 호수공원에 들어왔다가 금촌역까지 걸어간 적이 있긴 하지만 운동하기에 좋은 곳이다. 잉어들이 놀고 있다. 자전거와 보행자가 함께 사용하는 길 분수쑈
10층 조집사님 부부와 함께 가다. 오늘 연천에는 폭염경보가 내렸지만 지난 주에 이미 약속해 두었기 때문에 10시에 만나서 함께 출발하다. 재인폭포에 얽힌 설화를 살펴보면 이 폭포 협곡 위에서 줄타는 어떤 광대(재인)에게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 이 부인에게 흑심을 품은 고을 원님이 재인이 줄을 타고 있는데 사람을 시켜서 줄을 끊어 버렸다. 재인은 골짜기에 떨어져 죽고 원님은 그 부인을 범했다. 억울하고 원통한 부인이 그 원님의 코를 물어뜯고 자결했다. 그래서 이 폭포의 이름은 재인 폭포가 되었고 부인이 살던 동네는 원님의 코를 물었다고 해서 '코문 이'가 사는 동네라고 해서 코문이 - 코문리 - 현재의 고문리가 되었다고 한다. 재인 폭포를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숭의전을 들러 고려 태조 왕건을 만나..
광화문 광장이 단장을 마치고 새로이 개장 했다고 해서 가다. 서울역에서부터 광화문까지 내가 젊었을 때인 80년대 초반에는 데모로 시끄러웠던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광화문 광장 주변에는 데모가 끊이지 않고 있다. 80년대에는 민주화를 위한 데모였는데 지금은 노조가 하는 데모나 반정권 시위가 많은 것 같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에서 발생하는 데모가 많은 것 같기도 하다. 광화문 광장은 말끔하게 단장하고 시민들이 쉴 수 있는 숲지대와 분수 그리고 물이 흐르는 수로도 만들었다. 바닥에는 조선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년대별 사건들도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은 이 두분이 우리 나라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육조의 관청이 있었던 자리는 지금은 도로 때문에 복원이 불가능한..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강아(江娥) 파주 파산 서원에 갔다가 서원 입구 길가에서 아래 사진의 간판을 보았습니다. 파산 서원은 우계 성혼의 서원이고 송강과 그는 친구 사이입니다. 율곡과 송강은 동갑이고 우계는 한 살 위인 1535년 생입니다. 구봉 송익필도 파주 사람으로 이들은 다 친하게 지냈습니다. 누이가 인종의 후비였던 송강은 젊은 시절에는 청렴하고 올곧은 선비였던 것 같지만 후기로 가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세대는 학교 다닐 때 그가 쓴 관동별곡이나 사미인곡 등으로 인해 정철을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가로서의 송강은 그리 훌륭한 인물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죽하면 서인의 영수였던 그를 '동인 백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렀겠습니까? 그는 뇌물사건에도 연루되었고 옥사를..
교동도는 강화도의 부속섬으로 예전에는 강화도에서 배를 타고 건너갔지만 지금은 교동대교가 놓여서 자동차로도 쉽게 건너갈 수 있습니다. 백제 관미성이 어쩌면 교동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이 391년에 백제로부터 이 땅을 빼앗은 기록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교동도에는 화개산을 중심으로 산 아래 교동 향교가 있고 연산군 유배지도 있습니다.교동 읍성문도 남아 있고 연산군의 사당으로 추정되는 부근당이 있습니다. 화개산은 최근에 관광지로 만드는 작업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교동향교는 1127년 고려 시대에 세워진 우리 나라 최초의 향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궁벽한 곳에 우리 나라 최초의 향교가 세워졌다는 것은 그만큼 교동도 사람들의 교육열이 높았다..
철원군청이 있는 지포리에서 용화 저수지로 올라가다 보면 터널이 하나 있고 바로 앞 왼편에 삼부연 폭포가 있습니다. 저는 군에 있을 때 이곳 용화동 op에서 파견생활을 했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보이는 철원군청에서 삼부연 폭포를 지나면 앞에 있는 저수지가 용화 저수지 입니다. 이 삼부연 폭포는 그래서 군에 있을 때 종종 지나다니기도 하고 분대원들과 함께 놀기도 한 폭포입니다 여름철 비 온 후의 폭포는 그야말로 장관을 이룹니다. 조선 시대 서울에 사는 선비들이 금강산 유람을 갈 때 이곳을 종종 지나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선도 삼부연 폭포를 그림으로 남겼습니다. 이 폭포를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은 아주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의 호가 삼연인 것도 이 폭포 이름인 삼부연(三釜淵)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
국보 제317호인 조선 태조 이성계의 어진(御眞, 임금의 초상화)인 〈조선태조어진〉을 봉안한 곳이며, 영정을 실제로 모신 정전 건물은 보물 제1578호다. 경기전 권역은 1991년 사적 제339호로 지정받았다.1410년(태종 10년)에 전주, 평양, 경주, 개성, 영흥에 태조의 어진을 모시는 '어용전(御容殿)'을 세웠는데, 1442년(세종 24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集慶殿)', 평양은 '영숭전(永崇殿)'[2]으로 이름을 고쳤다.[3]'경기(慶基)'라는 이름은 조선의 국성(國姓)인 전주 이씨의 발상지이므로 '경사스러움(慶)이 터잡은(基) 곳'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이 경기전을 제외한 4곳은 모두 불탔고 정유재란 때 이 경기전마저 소실되었다. 그 후 광해군 때 경기전만..
천지연 폭포를 보고 바로 옆에 있는 정방 폭포로 오다. 입구 무료 주차장에 주차하고 계단을 내려가면 바로 폭포다. 계단 내려가다가 보는 소나무가 일품이다. 입장료 2,000원이지만 지공거사는 무료. 바로 옆에 서복 전시관과 서복 불로초 공원이 있다. 진시황때 불로초를 찾아 동쪽으로 간 사신들을 모티브로 만든 것 같고 중국인 관광객들 때문에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정방폭포(正房瀑布)는 대한민국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중심가에서 1.5km 동남쪽에 있는 폭포이다. 2008년 8월 8일 대한민국의 명승 제43호로 지정되었다. 한라산 남쪽 사면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애이리내의 남쪽 하단에 발달한 폭포이다. 폭포수가 바다로 떨어지는 동양 유일의 해안 폭포로, 세계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