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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사마르칸트 여행 중 이곳에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의 무덤이 있다고 해서 들르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찾아보니 세계 여리 곳에 다니엘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곳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원래 이란의 수사에 있는 다니엘의 무덤에서 시신을 옮겨왔다고 주장한다 그만큼 다니엘이 무슬림들에게도 존경받고 인기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영묘 안에 있는 다니엘의 관이 엄청 길다. 18m 정도라고 한다. 관이 이렇게 큰 이유는 다니엘의 정강이뼈가 자라나서 길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전설을 만드는 수준이 괜찮은 건가? 위키 백과에 의하면 오늘날 다니엘의 무덤이 있는 도시는 바빌론, 이라크의 키르쿠크, 무크다디야, 이란의 수사와 말라미르,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등 6개 도시이다. 가장 유명한 곳..

이 박물관에는 고구려 사절들이 그려진 벽화가 있다. 아래는 전시물들 아래는 영상자료 유골이 아래와 같이 담겨 있었다. 아래는 위키백과의 내용이다. https://youtu.be/mBTQEf9aILk 1965년 사마르칸트 동북쪽에 위치한 아프라시압 도성터에서 도로 설치를 위한 사전 발굴조사를 하던 중 상부가 잘려나간 벽화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전체 발굴 조사 후 드러난 벽화의 모습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7세기 번영했던 소그디아나의 모습을 각 11미터씩 4개 벽면에 나눠 그린 총 44미터 길이의 초대형 벽화였기 때문이다. 소그드 시대의 종교, 의례, 정치, 외교, 문화, 신화 등을 담은 이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던 7세기 소그드 시대를 연구하는 데 있어 더없이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성수 부부와 함께 가다. 남명은 조선 시대의 고집 센 선비를 연상시킨다. 남명은 1501년에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나서 5~6세경에 문과에 급제한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와서 20년간 살았다. 20세 때 생원시,진사시,문과 초시에 모두 합격했다. 이후 과거는 포기하고 성리대전을 읽다가 안연처럼 사림으로 살기로 결심한다. 1528년에 부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28세에 성운의 친형인 성우와 함께 지리산을 유람했다. 30세인 1530년에 처가가 있는 김해로 가서 처가의 도움으로 신어산 밑에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침잠했다. 45세인 1548년에 모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김해로 가지 않고 고향 삼가에 계부당.뇌룡정이란 집을 짓고 살았다. 61세 되던 해에 삼가에서 현재의 산청군 시천면 사리로 들어가서 산천재를 짓고 ..

산천재에서 1.7km 떨어진 곳에 남명 조식의 서원이 있다. 다음 백과 사전에 의하면 1576년(선조 9)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식(曺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9년(광해군 1) ‘德川(덕천)’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그 뒤 최영경(崔永慶)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에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 지방유림이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숭덕사(崇德祠)·경의당(敬義堂)·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대문(大門)·세심정(洗心亭)·산천재(山天齋)·상실(橡室)·장판각(藏板閣)·별묘(別廟)·문루(門樓)·재실(齋室)·고사(庫舍) 등이 있고, 신도비(神道碑)도 있다. 숭덕사는 3칸으..

남명 유적지를 찾아왔다. 산천재는 그가 61세에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72세에 죽을 때까지 평생 살았던 곳이다. 지리산을 너무 좋아해서 천왕봉을 직접 올라가기도 하고 12차례나 지리산을 유산했던 그는 여기서 천왕봉을 바라보면서 평생을 살았다. 그는 실천적인 학풍을 가졌고 그 덕분에 그의 제자들에게서 임진왜란 때 의병장들이 많이 나왔다. 그의 시대에 4대 사화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산림에 은거하면서 제자를 기르고 조정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정치 일선에는 나가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주자학 일변도였던 당시의 상황과는 달리 개방적이어서 여러 학문을 두루 연구하였다. 조식 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

결혼 40주년 기념 여행으로 성수 부부와 함께 산청 남명 유적지에 왔다. 이곳에 남명 기념관과 산천재, 남명 사당, 남명 묘소, 덕천 서원등이 다 모여 있다. 그가 가지고 다니던 성성자라는 방울이 생각난다. 항상 깨어 있기를. 기념관 뒷산에 남명의 묘가 있다. 그가 쓴 여러 글들이 돌에 새겨져 있다 옆에 남명의 사당이 있는데도 몰라서 못 갔다.

수원 화성을 한 바퀴 돌 때 코로나로 인해 행궁을 개방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우무길 선생님 퇴임식 가면서 가게 되었다. 수원은 삼성이 먹여살린다고 하지만 정조도 한몫하는 것 같다. 우리 나라 행궁 가운데 가장 크고 잘 복원되었다. 의궤가 잘 남아 있어서 복원도 순조롭게 되고 있다고 한다. 일제 시대에 철저히 훼손했지만 거의 다 복원되어 가고 있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정조로 825 (남창동)에 위치해 있는 행궁으로, 사적 제478호로 지정받았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가 세운 수원화성 내부에 있는 행궁으로, 건립 당시에는 건물 21동, 576칸 규모로 지어졌다. 주로 조선의 국왕이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정조 이외에도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화성 행궁을..

해파랑길 걸을 때 여기를 실수로 놓쳤는지 힘들어서 안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한 바퀴 돌았다. 전체 길이는 2.9km라고 하며 한 바퀴 도는 데 40분 정도 걸린다. 석호다. 호수에서 유황 냄새가 많이 나고 죽은 고기들이 많이 보인다. 물가에 거품도 많이 있고 한 것을 보니 별로 깨끗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곳을 국가.지방 정원으로 추진할려고 하니 우선 깨끗하게 만들고 잘 정비하면 좋겠다. 해파랑길과 강릉 바우길이 겹친다.

양양 여행 중 들르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거무튀튀하고 날카롭게 각진 바위가 마치 힘센 수소를 연상케하며, 코끼리바위 등 자연 형성된 신기하고 기괴한 바위들로 가득하다. 소돌바위는 일억 오천만년 쥬라기시대에 바다 속에 있다가 지각변동으로 인하여 지상에 솟은 바위로 먼 옛날 노부부가 백일 기도 후 아들은 얻은 후로 자식이 없는 부부들이 기도를 하면 소원을 성취한다는 전설이 있어 신혼 부부들이 즐겨찾는 곳으로 유명하다.

윤선생님 부부와 함께 적성에 가서 오랜만에 한우로 점심을 배불리 먹고 소화도 시킬겸해서 가다. 나무위키에 의하면 임진강이 옛날에는 호로하(瓠瀘河)라고 불렸기 때문에 호로하에 있는 오래된 보루라는 뜻으로 호로고루라고 불리게 되었다. 토축이 주된 성벽의 구성방식이지만 일부구간에는 외면에 석축으로 보강한 곳도 있다. 또한 토축이라고 하지만 정확하게는 토축 가운데에 석축으로 심주를 둔 방법을 택하였다. 성 내부는 평탄한 지대로 감시초소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주혈건물지와 고구려 때의 생활의 흔적, 그리고 고려시대의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특히 고구려의 연화문 와당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는데, 장군총에서 나오는 와당부터 평양성에서 나오는 와당과 닮은 것이 많아서 호로고루의 중심적 운영연대는 역시 5세기대의 고구..

광화문 광장에 빛초롱 축제를 한다. 낮에 보니까 빛은 모르겠고 조형물만 본다. 손자들과 보러 가야 할 것 같다.

일부러 시간 내서 갔지만 출입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냥 담장을 한바퀴 돌면서 밖에서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다. 명륜당 앞에는 동재,서재가 있고 대성전 앞에는 동무, 서무가 있다. 그리고 진사청도 옆에 따로 마련되어 있다. 바로 옆에 중남미 문화원이 담장을 이웃하고 있다.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조선 숙종 때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의 유학교육과 지방민의 교화를 위해서 창건되었다. 1537년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의 장지가 향교가 원래 있던 서삼릉으로 정해지자, 향교는 대자동의 고읍마을로 이전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162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재건되었다. 담장은 1970년에 보수되었고, 명륜당은 1975년에 다시 건립되었다. 1983년..

아내가 가보고 싶다고 해서 문목 부부와 함께 가다. 이찬수 목사님이 시무하는 분당 우리 교회가 자은 것이라고 한다. 이름은 가평 우리 마을이지만 청평댐에서 청평 유원지로 올라가면 오른쪽 산골짜기에 있다. 어느 권사님이 이 땅을 기부하고 쁘띠 프랑스를 설계한 장로님이 이곳을 설계했다고 들었다. 아기자기하고 예쁘다. 쉼이 필요한 지친 사람들에게 아주 필요 적절한 공간인 것 같다. 입구에 '하나님의 조건 없는 환대'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지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고 회복의 기회를 줄 수 있는 곳으로 보인다. 도서관도 있고 숙소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카페와 식당도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작은 chapel도 있다. 청평댐으로 인해 생긴 바다같은 한강을 내려다 보고 있어서 경치도 아주 좋다.

아버지 살아계실 때 다녀온 적이 있다. 아내와 둘이 가다. 입장료는 성인 3,000원이고 경로는 무료다. 북한이 조강 건너 1.2km 앞에 보인다. 시설 투자는 많이 했지만 북한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는 것 외에는 별로 특이한 것은 없다. 차 타고 들어갈 수 있고 해병들이 검문한다. 신분증 필수

용흥궁 앞에서 김상용의 순절비를 보다가 그의 위패를 모신 충렬사도 알게 되었다. 충렬사라는 이름의 사당은 전국에 수십개가 있다. 김상용은 인조 때 청나라가 쳐들어오자 종묘의 신주와 세자빈과 원손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을 왔다. 당시 강화도 수비를 맡은 검찰사 김경징이 싸울 준비는 안하고 청군이 강화도로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 믿고 방심해서 술에 빠져 넋놓고 있다가 청군이 조선군의 수비를 뚫고 상륙하자 도주해 버려 강화성이 스스로 무너져 버렸다. 성이 함락되자 김상용은 남문루에 있던 화약에 불을 지르고 순절했다. 그리고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등 왕족들, 고위 관료들 상당수가 포로가 되었고 청나라로 끌려가기도 했다. 김상용은 병자호란 때 주전파의 우두머리였던 청음 김상헌의 형이고 김상헌의 손자가 김수항이다..

일주일간 이석증으로 어지러워서 잘 못 움직이다가 이제 좀 나아져서 혼자 가다. 일산 호수공원에 비해서 나무가 아직 덜 자랐지만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다. 여름에는 그늘이 부족해서 좀 힘들긴 하겠다. 하지만 습지를 잘 활용했고 물길을 따라 양쪽으로 잘 가꾼 노력이 돋보인다. 전체를 다 돌려면 일산 호수공원보다 더 시간이 많이 걸리겠다. 전에 운정역에서 내려서 이 호수공원에 들어왔다가 금촌역까지 걸어간 적이 있긴 하지만 운동하기에 좋은 곳이다. 잉어들이 놀고 있다. 자전거와 보행자가 함께 사용하는 길 분수쑈

10층 조집사님 부부와 함께 가다. 오늘 연천에는 폭염경보가 내렸지만 지난 주에 이미 약속해 두었기 때문에 10시에 만나서 함께 출발하다. 재인폭포에 얽힌 설화를 살펴보면 이 폭포 협곡 위에서 줄타는 어떤 광대(재인)에게 아름다운 부인이 있었다. 이 부인에게 흑심을 품은 고을 원님이 재인이 줄을 타고 있는데 사람을 시켜서 줄을 끊어 버렸다. 재인은 골짜기에 떨어져 죽고 원님은 그 부인을 범했다. 억울하고 원통한 부인이 그 원님의 코를 물어뜯고 자결했다. 그래서 이 폭포의 이름은 재인 폭포가 되었고 부인이 살던 동네는 원님의 코를 물었다고 해서 '코문 이'가 사는 동네라고 해서 코문이 - 코문리 - 현재의 고문리가 되었다고 한다. 재인 폭포를 나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숭의전을 들러 고려 태조 왕건을 만나..

광화문 광장이 단장을 마치고 새로이 개장 했다고 해서 가다. 서울역에서부터 광화문까지 내가 젊었을 때인 80년대 초반에는 데모로 시끄러웠던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도 광화문 광장 주변에는 데모가 끊이지 않고 있다. 80년대에는 민주화를 위한 데모였는데 지금은 노조가 하는 데모나 반정권 시위가 많은 것 같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에서 발생하는 데모가 많은 것 같기도 하다. 광화문 광장은 말끔하게 단장하고 시민들이 쉴 수 있는 숲지대와 분수 그리고 물이 흐르는 수로도 만들었다. 바닥에는 조선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는 년대별 사건들도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은 이 두분이 우리 나라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육조의 관청이 있었던 자리는 지금은 도로 때문에 복원이 불가능한..

송강(松江) 정철(鄭澈)과 강아(江娥) 파주 파산 서원에 갔다가 서원 입구 길가에서 아래 사진의 간판을 보았습니다. 파산 서원은 우계 성혼의 서원이고 송강과 그는 친구 사이입니다. 율곡과 송강은 동갑이고 우계는 한 살 위인 1535년 생입니다. 구봉 송익필도 파주 사람으로 이들은 다 친하게 지냈습니다. 누이가 인종의 후비였던 송강은 젊은 시절에는 청렴하고 올곧은 선비였던 것 같지만 후기로 가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 세대는 학교 다닐 때 그가 쓴 관동별곡이나 사미인곡 등으로 인해 정철을 가사문학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가로서의 송강은 그리 훌륭한 인물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죽하면 서인의 영수였던 그를 '동인 백정'이라는 별명으로 불렀겠습니까? 그는 뇌물사건에도 연루되었고 옥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