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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경의 중앙선 운길산역에 내리면 바로 앞에 이 정원이 있다. 북한강변에 정원을 만들어서 여러 가지 꽃들을 심었다. 지금은 황화코스모스가 거의 다 지고 조금 남아 있다. 강가에 심어진 수양 버들이 강물과 아주 잘 어울린다. 몇 년 전에 운길산역에서 춘천까지 걸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여기가 아주 아름다웠던 기억이 있다. 오늘은 남양주군 화도읍 백월리에 있는 금선사라는 절까지 약 10km를 걸어갔다. 제 2 외곽고속도로
조집사님 부부와 함께 가다.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에 있는 이 수목원은 2021년에 open했다. 브로셔에 의하면 이름에 걸맞게 밤나무가 자생하고 면적은 34.15ha로 산을 자연 그대로 살려 길을 내었고 1,300여종 이상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입장료, 주차비 다 무료다. 규모가 아주 크고 산 꼭대기에 전망대를 잘 만들어서 여기서는 임진강이 아주 멋지게 잘 보인다. 산꼭대기까지 길도 잘 만들어서 거의 등산 수준으로 올라갔다가 올 수도 있다. 봄에 꽃 필 때 꼭 다시 한번 가야겠다. 오늘 아침에 자월도를 가기로 해서 조집사님과 함께 인천항에 갔는데 오후에 일기가 나빠서 배가 못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자월도를 못 가고 집에 와서 두 부부가 꿩 대신 닭이라고 수목원을 갔다가 심학산 아래 가서 만두 먹고 돌..
양지에 있는 총신 신대원 캠퍼스 안에 우리 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인 이 교회를 합동측 황해 노회가 복원했다. 한옥으로 되어 있고 팔작 기와지붕이다. 우리 교회 2남 선교회원들과 함께 가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소래교회 또는 솔내교회(松川-, 송천교회)는 한국에서 선교사가 들어오기도 전에 조선인들 스스로 세운 최초의 교회로 1883년 황해도 장연군에 세워졌다. 평안도 의주 출신의 서상륜은 인삼장사로 청나라를 왕래했다. 그곳에서 병이 나서 죽을 위기를 만나지만 서양 의료 선교사를 만나 병을 고치고 영국 선교사 존 로스 목사를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경번역을 도왔다. 서상륜은 그의 동생 서경조와 함께 황해도 장연군 송천리 소래마을의 한 초가집에서 1883년 5월 16일 처음으로 스스로 개신교 교회를 세웠다..
우리 교회 2남 선교회에서 함께 가다. 용인 양지에 있다. 미리 예약하고 가면 가이드로 부터 해설도 들을 수 있고 20분짜리 순교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볼수 있다. 홈피에 의하면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재단법인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에 의해 1989년 11월 18일에 개관되었습니다.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조선 후기와 일제 강점기, 그리고 6.25전쟁기에 하나님의 말씀과 교회를 지키기 위해 생명을 드린 순교자들의 신앙을 기리고, 한국 기독교 200주년의 비전을 정립하기 위해 세계 및 한국 기독교 순교역사와 한국 기독교 순교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은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을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성지로 가꾸고 보존하기 위해 2005년부터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교회에 관리와 운..
아내와 둘이 가다. 연천군 중면 임진강변에 이 공원이 있다. 주차장은 무료고 동네 주민들이 음식과 농산물을 판매한다. 주민의 말을 들어보니 10.9일쯤이 절정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댑싸리 색깔이 좀 옅어졌다. 백일홍도 지고 있지만 둘 다 아직은 볼 만하다. 천천히 사진 찍으면서 돌아도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옛날 돌무지 무덤이 있고 여름에 가면 연지가 있어서 연꽃도 볼 수 있겠다.
내 피끓는 청춘 3년을 보낸 산정 호수를 우리 선교회원들과 함께 가다. 77년 후반부터 80년 초반까지 여기는 내 나와바리(?)였다. 아침에 기상하면 호수 아래까지 매일 아침 구보를 했고 전투 체육의 날에는 종종 이 호수 주위의 산에서 체육 활동을 하기도 했다. 어떤 지휘관을 만났을 때는 한겨울에 아침 구보 하면서 얼음을 깨고 냉수 마찰을 하기도 했다. 봄 가을이면 산정 호수로 몰려드는 관광 버스들을 보면서 자유의 소중함을 느끼기도 했다. 남들은 군대 생활한 곳 방향으로는 오줌도 안 싼다는데 나는 속이 없어서인지 지금도 여기가 좋다. 어떤 전직 대통령은 군대 생활 3년을 썩었다고 말해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 나는 이 기간이 결코 썩은 기간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때까지 몰랐던 사회를 볼 수 있는 ..
우리 남선교회 회원과 부부동반해서 16명이 함께 가다. 도착하니 비가 와서 좀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잠시 후 개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 생태경관 단지는 비둘기낭 근처에 최근에 y자형 출렁 다리를 또 만들어서 관광지를 확장했다. 한탄강 geo park를 더 확대 개방했다고 할 수 있다. 생태경관 단지와 비둘기낭을 둘러본 후 산정 호수로 가다. 도착하자마자 다들 배가 고파서 점심부터 먹고 산정 호수를 한 바퀴 돌다. 산정호수는 77년부터 80년 까지 내 나와바리였다. 남들은 군대생활 했던 쪽으로 오줌도 안 싼다는데 나는 속이 없어서 그런지 지금도 산정호수가 좋다. 대통령을 지낸 어느 분은 군대 생활 3년을 썩었다고 말해서 구설수에 올랐던 적도 있지만 나는 내 인생에서 군대 3년이 결코 썩은 3년이 아니었다. ..
10층 조집사님 부부와 우리 부부가 함께 가다. 강화 부근당은 교동도에 있다. 부근당이란 이름을 가진 곳은 전국에 여러 곳이 있다. 다른 곳에서는 부군당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으며 한문으로는 여러 가지로 표현된다. 부군(府君), 부근(府根), 부근(府群), 부근(付根), 부강(富降), 부군(符君)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곳은 미나리(芹)를 나타내는 부근(扶芹)으로 쓰고 있다. 종묘, 사직, 선농단 등 국가 제의에 미나리김치(芹菹)를 제물로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왕에게도 진상했던 강화도의 특산물인 미나리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하는 분들도 있다.『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본조 풍속에 도하 관부들에는 으레 수호신을 모신 한 작은 숲을 두고 그 사당에 지전(紙錢 : 종이돈)을 걸고 부군이라 일컫는..
오래된 고성이다. 여기 성이나 모스크들은 다 상인들이 점령하고 있다. 성 안에는 박물관이 있어서 이곳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성위에서 내려다 보는 부하라 올드 시티가 아주 멋지다. 아래는 박물관 전시물들
미나렛은 모스크와 함께 지어진 높은 탑이다. 이곳에 무아진이 올라가서 아잔을 외친다. 노래처럼 들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보통 아래와 같은 내용을 외친다. "알라는 위대하시도다. 알라는 위대하시도다. 나는 알라 이외에 다른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음을 선언한다. 무함마드는 알라의 예언자이시다. 기도하러 오라. 구원받으러 오라. 알라는 가장 위대하시다. 알라 이외에 다른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는 실크로드 시대에 대상들이 멀리서 이 높은 탑에서 나오는 불빛을 보고 밤에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등대와 같은 역할을 했다. 밤에 본 미나렛 미나렛 주위에는 모스크와 신학교인 마드라사가 함께 있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를 대표하는 광장이다. 네이버 지식 백과에 의하면 '레기'는 모래, '스탄'은 광장의 뜻으로 레기스탄은 ‘모래 광장’을 뜻한다. 북쪽을 흐르는 운하 주변에 있는 모래땅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마르칸트의 중심지로 이곳에서 알현식, 사열식, 각종 모임 둥이 열렸다. 티무르 때는 대규모 시장이 있었고 울루그 베그 때는 마드라사(Madrasa, 이슬람교 교육기관)가 세워졌다. 현재와 같은 모습은 샤이바니 왕조 때 갖춰졌다. 중앙에 티라카리 마드라사, 오른쪽에 셰르도르 마드라사, 왼쪽에 울루그 베그 마드라사가 세워져 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50숨짜리 지폐에 이곳 광장이 그려져 있으며, 국가적인 대규모 경축행사나 명절, 기념일 행사가 열린다. 겨울을 제외하고 매주 목, 토, 일요일 밤..
티무르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웅으로 징기스칸의 후예로 자처하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티무르는 전쟁에서 포로를 남기지 않을만큼 잔인하게 사람들을 죽였지만 15~16세기에 중앙 아시아에서 찬란한 이슬람 문화를 꽃피웠다. 그는 학교를 다니지 않았지만 해박한 역사지식을 갖고 있었고 학문의 유용성과 문화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티무르는 아래 참고 https://namu.wiki/w/%ED%8B%B0%EB%AC%B4%EB%A5%B4 티무르티무르 제국 의 건국자. 상세 티무르는 차가타이 칸국 의 몽골 계 바를라스 부 출신의 인물로, 역사 학계에서는namu.wiki
위키백과에 의하면 비비하눔 모스크(페르시아어: مسجد بی بی خانم; 우즈베크어: Bibi-Xonum machiti)는 14세기 티무르 제국의 통치자였던 아미르 티무르의 아내 이름을 딴 모스크로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 위치해 있다. 총 외벽을 살펴보면 167m, 너비로는 109m에 달한다. 주 건물의 둥근 지붕 높이는 40m, 입장로의 높이는 35m이다. 궁정 한가운데에 있는 대리석에는 꾸란이 쓰여져 있다. 티무르 왕이 1399년 인도 원정을 다녀온 후 새로운 수도였던 사마르칸트에 사원을 세울 것을 즉시 명령한다. 모스크는 인도 원정 동안 수집해 온 호화로운 원석을 사용했다. 90마리의 코끼리를 잡아와서 사역에 이용했다고 전해지는데 1399년~1404년 사이에 완전히 건설된 것으로 추측된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울루그 벡은 미르자 무함마드 타라가이 빈 샤루흐 울루그 벡(1392년 8월 31일 술타니야에서 태어나 1449년 8월 31일 죽음. 재위 1447년~1449년; 우즈베크어: Mirzo Muhammad ibn Shohruh ibn Temur Ulug'bek Ko'ragon; 페르시아어: میرزا محمد طارق بن شاہرخ الغبیگ), 속칭 울루그 벡 혹은 울루그 베그는 티무르 왕조의 군주였다. 그는 테무르의 4남, 샤 루흐의 맏아들이다. 울루그 벡이라는 명칭은 별명으로, 대략 ‘위대한 통치자’라 옮길 수 있는데, 이 칭호는 그의 할아버지 테무르가 가졌던 칭호들 중 하나였던 ‘아미리 카비르’(Amīr-e Kabīr)를 투르크어로 옮긴 것이다. 그는 티무르 제국의 문화계의 황..
사마르칸트 여행 중 이곳에 구약 성경에 나오는 다니엘의 무덤이 있다고 해서 들르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찾아보니 세계 여리 곳에 다니엘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곳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원래 이란의 수사에 있는 다니엘의 무덤에서 시신을 옮겨왔다고 주장한다 그만큼 다니엘이 무슬림들에게도 존경받고 인기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영묘 안에 있는 다니엘의 관이 엄청 길다. 18m 정도라고 한다. 관이 이렇게 큰 이유는 다니엘의 정강이뼈가 자라나서 길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정도면 전설을 만드는 수준이 괜찮은 건가? 위키 백과에 의하면 오늘날 다니엘의 무덤이 있는 도시는 바빌론, 이라크의 키르쿠크, 무크다디야, 이란의 수사와 말라미르,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등 6개 도시이다. 가장 유명한 곳..
이 박물관에는 고구려 사절들이 그려진 벽화가 있다. 아래는 전시물들 아래는 영상자료 유골이 아래와 같이 담겨 있었다. 아래는 위키백과의 내용이다. https://youtu.be/mBTQEf9aILk 1965년 사마르칸트 동북쪽에 위치한 아프라시압 도성터에서 도로 설치를 위한 사전 발굴조사를 하던 중 상부가 잘려나간 벽화 하나가 발견되었는데 전체 발굴 조사 후 드러난 벽화의 모습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7세기 번영했던 소그디아나의 모습을 각 11미터씩 4개 벽면에 나눠 그린 총 44미터 길이의 초대형 벽화였기 때문이다. 소그드 시대의 종교, 의례, 정치, 외교, 문화, 신화 등을 담은 이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던 7세기 소그드 시대를 연구하는 데 있어 더없이 소중한 자료가 되었다..
성수 부부와 함께 가다. 남명은 조선 시대의 고집 센 선비를 연상시킨다. 남명은 1501년에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나서 5~6세경에 문과에 급제한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와서 20년간 살았다. 20세 때 생원시,진사시,문과 초시에 모두 합격했다. 이후 과거는 포기하고 성리대전을 읽다가 안연처럼 사림으로 살기로 결심한다. 1528년에 부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28세에 성운의 친형인 성우와 함께 지리산을 유람했다. 30세인 1530년에 처가가 있는 김해로 가서 처가의 도움으로 신어산 밑에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침잠했다. 45세인 1548년에 모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김해로 가지 않고 고향 삼가에 계부당.뇌룡정이란 집을 짓고 살았다. 61세 되던 해에 삼가에서 현재의 산청군 시천면 사리로 들어가서 산천재를 짓고 ..
산천재에서 1.7km 떨어진 곳에 남명 조식의 서원이 있다. 다음 백과 사전에 의하면 1576년(선조 9)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식(曺植)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09년(광해군 1) ‘德川(덕천)’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그 뒤 최영경(崔永慶)을 추가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0년(고종 7)에 훼철되었다가 1920년대 지방유림이 복원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숭덕사(崇德祠)·경의당(敬義堂)·동재(東齋)·서재(西齋)·신문(神門)·대문(大門)·세심정(洗心亭)·산천재(山天齋)·상실(橡室)·장판각(藏板閣)·별묘(別廟)·문루(門樓)·재실(齋室)·고사(庫舍) 등이 있고, 신도비(神道碑)도 있다. 숭덕사는 3칸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