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 평화누리길 경기 구간 완주
- 오블완
- 단양 구담봉
- 미시령 성인대
- 평화누리길 4코스
-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 해파랑길 20코스
- #평화누리길 2코스 #평화누리길 1코스 #평화누리길 1~2코스
- 앙코르와트
- #건봉사 #고성 건봉사
- #윤두서 자화상 #공재 윤두서 자화상 #공재 자화상
- #대흥사 #해남 대흥사
- 성인대
- #강화 나들길 18코스 #강화 나들길 18코스 왕골 공예마을 가는 길
- 평화누리길 7코스
- 해파랑길 48코스
- 김포 문수산
- #조선 중기 정치와 정책(인조~현종 시기)
- #조선 국왕의 일생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엮음 글항아리
- 평화누리길 3코스
- #붕당의 발생 #붕당의 형성 #붕당의 시작
- #강화나들길 3코스
- 정서진 #정서진 라이딩
- 해파랑길 8코스
- 티스토리챌린지
- 명동 성당 미사
- 김포 한재당
- #북한산 문수봉 #북한산 승가봉 능선
- 군위 팔공산
- 북한산 만포면옥
- Today
- Total
목록역사 문화 유적지 관광지 (191)
노래하는 사람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buWmc3/btsdhzWH6Vm/W6AVcPBbj4vgSm67edc7Hk/img.jpg)
성균관 스캔들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문묘는 유교권 나라들에는 여러 곳에 있지만 우리 나라에는 조선 시대 국립대학 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에 있는 것이 가장 규모도 크고 역사성도 깊을 것 같아서 가게 되었다. 혜화역에서 내려서 성균관 대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문묘가 있다. 신삼문은 잠겨 있어서 담장을 따라 안으로 더 들어가니 명륜당 들어가는 옆문이 열려 있다. 지방의 향교나 서원에 비해서 조선의 국립대학답게 규모가 아주 크다. 성균관은 현위치에 1398년에 건립되었다. 강명관의 '노비와 쇠고기'란 책에 의하면 성균관은 반촌에 사는 반인들 즉 노비들의 희생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물론 국가가 일정부분 보조해 주기도 했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 국가나 성균관이나 다 노비들을 착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s3y6r/btsddtI9dYG/ihfLels4kpDIYkIez9X3Sk/img.jpg)
친구 승구가 아주 좋아하는 곳이라고 가자고 해서 가다. 청보리밭과 유채밭이 아주 넓은 밭에 펼쳐져 있다. 학원(鶴苑)농장은 다른 사람의 글을 보니 현재 진영호씨가 운영하고 있고 전 국무총리였던 진의종씨와 어머니 이학 여사가 1960년대 초에 이곳 야산에 10여만평을 개발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충용이라고 아래는 승구가 찍은 사진들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cwiET5/btsdemJtHjl/fpAsgvAt5j94M7DHsgDi8K/img.jpg)
다음 백과에 의하면 고려시대까지 무송(茂松)과 장사(長沙)의 두 고을이었던 것을 효과적인 왜구의 방비를 위하여 1417년(태종 17) 합하여 두 고을 첫자를 떼어 무장이라 하고 성과 관아를 새로 마련하였다고 한다. 전라도의 여러 고을에서 장정과 승려 2만수천명이 동원되어 둘레 1,470척(尺), 높이 7척의 성벽을 쌓고, 성 위에 높이 1척짜리 여장(女墻 : 성위에 낮게 쌓은 담) 471개를 만들고,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을 갖춘 남문과 동·북문을 세웠다. 성벽 밖으로는 둘레 2,127척의 해자(垓字 : 성 밖으로 둘러 판 못)를 파서 견고히 하고, 병마사가 현감을 겸직하는 진(鎭)을 베풀었던 곳이다. 이후 성은 더욱 넓혀 축조되었던 듯하니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bEjd79/btsdelw12op/kCzkNrzgFiB9LxoNdswcVK/img.jpg)
다음 백과에 의하면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1965년 4월 1일 사적으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가4~6m, 면적은 50,172평으로 동, 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의 치성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과 2지 4천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진되고 성곽과 공북루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부터 옛 모습대로 복원해 오고 있다. 성벽 위를 한바퀴 도는 데는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성 안의 각종 건물들은 성벽에서 멀지 않으니 내려와서 바로 갈 수 있다. 옥바깥에 있는 형틀 당시 객사들을 보면 좌우에 익헌들을 함께 두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게 ..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dLgw20/btsda1tziDI/0KFOT8RwqwFlkoaE3Y8nJK/img.jpg)
나주목의 객사 건물로 매월 1일과 15일에 국왕에 대한 예를 올리고 외국 사신이나 정부 고관의 행차가 있을 때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성종 6~10년(1475~1479)사이에 나주목사로 재직한 이 유인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4칸, 팔각지붕의 320.66m²(97평) 건물로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그 규모가 가장 웅장하다. 일제 강점기 이후 군청 건물로 사용해오면서 원형이 파괴되어 1976년에서1977년 사이 완전해체 복원하였다. 광주 민주화 운동때는 이곳이나주의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5.18 당시 시위의 집결 장소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좌우에 익헌을 둔 큰 규모의 건물이다. 금성관은 우익헌은 5칸이고 좌익헌은 6칸인 비대..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6v9H0/btsdeHmg2Fe/vObfqwY1dc8kFBOZQ9l9b1/img.jpg)
나주 향교는 1407년(태종 7)에 창건되었다. 강릉향교, 장수향교와 함께 우리 나라 3대 향교로 불릴만큼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이 세 향교 가운데도 가장 큰 향교라고 한다. 나주 향교는 대성전이 앞에 있다. 공자 아버지의 위패를 봉안하는 계성사가 있는 향교는 대성전이 앞에 있다고 하는 설과 산지형은 명륜당이 앞에 있고 평지형은 대성전이 앞에 있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호남지방의 향교 중 계성사가 있었던 곳으로는 나주향교 이외에 전주향교와 함평향교 등이 있다고 한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는 점은 비슷하다. 임진왜란으로 성균관이 불타고 다시 지을 때 나주 향교를 참..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bhpMFc/btscRqGKsj2/91RIWgmnc4v2I7mNMohu5k/img.png)
북한산 산영루는 경치 좋은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많은 조선 시대 문인들이 다녀가고 시를 남겼다. 전쟁통에 불타고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복원했다. 추사와 다산이 시를 남겼다. 산영루 바윗길 끊어지니 위태로운 난간이 보이고 마주한 겨드랑이는 냉랭하여 날개 깃털이 돋을 듯 암자 열 곳서 성긴 종소리, 가을빛 저물게 하고 만 산 줄기서 노란 나뭇일, 물소리를 차게 하네 숲속에 말 매어두고 농담을 하고 있는데 구름 속에서 만난 스님이 정중한 얼굴로 너그러운 대접을 하네 해가 지자 안개가 푸른 물을 감싸는데 간이 부엌에선 벌써 술상과 밥상 나온다고 알려오네 (다산 정약용, 1794년, 당시 33세) 산영루 하나하나 붉은 숲속에 굽이 도는 계곡이 다시 산줄기를 끊었다. 먼 종소리 가라앉는 빗속에 잦아들고 가늘..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rRMos/btscxcgR4b1/ykETjMkfxckDAbypYWdEv1/img.jpg)
남원 여행길에 들르다.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곳이고 이 집은 이 소설이 드라마로 방영된 후 그 인기를 몰아 만들어졌다. 문학 작품 하나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 지 알 수 있는 집이다. 지자체들이 스토리 텔링을 잘 하면 세익스피어로 영국이 먹고 살듯이 우리라고 안 될 이유가 없지. 이 소설이 1987~1989년까지 드라마로 방영되자 이 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한 공무원의 아이디어로 토지의 무대가 된 이 집들이 1997~1998년 사이에 지어져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최참판댁 아래에는 토지에 나오는 인물들의 집을 만들어 두었다. 드라마는 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당시 드라마 세트장을 재현한 건가? 임이네는 월선이네 국밥집에서 일하면서 월선의 돈을 훔쳐서 베개 속에 숨겼다가 불이..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dckoMq/btscmLEJdPY/B7LKGXDZrYOEa4J2hW0gf0/img.jpg)
남원 여행길에 들르다. 운조루는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국가민속문화재 제8호. 1776년(영조 52) 삼수부사와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柳爾胄)가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 집터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금환낙지(金環落地)라 하여 예로부터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사랑채는 4칸의 몸채에 뒤쪽으로 꺾여 이어진 2칸의 날개가 달려 있다. 몸채 왼쪽 끝의 1칸은 내루형(內樓形)으로 기둥 밖으로 난간이 둘러져 있다. 이 사랑채의 구성은 궁전 침전에서와 같이 완전한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여기에 일반 대청이 연립하여 있다. 또, 사랑채에는 보통 큰 부엌이 없는 법인데,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더구나 본 사랑채와 직교한 누마루가 또 있어, 전체 살림을 한눈에 관찰하도록 되어 있어 특이하다...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cTtOwt/btsbVbiBJt5/vKlHKJtzr8jMiez85QGP00/img.jpg)
성수네와 친구들이 함께 가다. 미국 목회를 접고 들어온 태수 부부가 함께 해서 더 의미가 있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는 비자림은 448,165㎡의 면적에 500∼800년생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밀집하여 자생되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7∼14m, 직경은 50∼110㎝ 그리고 수관폭은 10∼15m에 이르는 거목들이 군집한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비자나무 숲이다. 옛부터 비자나무 열매인 비자는 구충제로 많이 쓰여졌고, 나무는 재질이 좋아 고급가구나 바둑판을 만드는데 사용되어 왔다. 비자림은 나도풍란, 풍란, 콩짜개란, 흑난초, 비자란 등 희귀한 난과식물의 자생지이기도 하다. 녹음이 짙은 울창한 비자나무 숲속의 삼림욕은 혈관을 유연하게 하고 정신적, 신체적 피로회복과 인체의 리듬을..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XiaKZ/btsbUpaj6KM/d5dkH1nfN9xKc9XT9hSEH1/img.png)
학교 선생님들이 제주 연수를 갔다가 들르다. 6년 후에 갔다왔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서 사진만 올린다.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bGbVLG/btsbTuPZvc9/L5Xk8bjXdB5emHDZBd9P10/img.jpg)
조선 철종(재위 1849∼1863)의 외숙인 염보길이 살던 집이다. 철종 4년(1853)에 지은 이 건물은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두고 H자형 배치를 취하고 있었으나, 행랑채 일부가 헐려 지금은 ㄷ자 모양의 몸채만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가 一자형으로 연결되어 있고 안(안채)과 밖(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담장으로 간단히 분리하였다. 규모는 작으나 예스럽고 우아한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건물이다. 나무 위키에 의하면 철종은 조선의 제25대 임금이자 대한제국의 추존 황제. 묘호는 철종(哲宗), (추존된) 시호는 '장황제(章皇帝)', 휘는 원범(元範)이었으나 왕이 된 후 항렬자를 맞추기 위해 변(昪)으로 개명[5], 자는 도승(道升). 국왕이 되기 전까지 어린 시절을 강화도에서 나무꾼으로 보낸 것으로 유명..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nVovi/btsbk2tOjXE/Vp8J6fdZFavUzJkWJFAeRk/img.jpg)
한탄강 물윗길을 걷고 집으로 오는 길에 들르다. 철원 향교는 위키백과에 의하면 철원향교는 태봉국 시절 왕건의 사저 자리(現 月下里)에 설립하였다 하나 건조년대는 미상이다. 조선 선조 원년(서기 1568년) 유림들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임진왜란(서기 1595년)의 병화로 소실되었다. 그 후 인조 15년(서기 1637년) 유림들이 재건하였으며 일제치하에서는 군수 유흥종(柳興鍾)이 대성전과 명륜당 등을 중축하였는데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 재산이 몰수돼 고아원으로 활용하던 중에 6·25전란으로 소실되었다. 1945년 수복 후 일시 포충사(褒忠祠)로 옮겨 모셔졌다가 유림들의 협조와 정부보조로 화지리로 이전하여 관리하다가 원위치 복원계획(종전 월하초교 부지)에 따라 2004년 12월에 포충사로 임시 이전하였다. 200..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lk1G9/btsar4FsuM1/AuGII3STf9me5NpOhWqTjK/img.jpg)
아내 회갑 기념으로 여수 해남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들르다. 오래전에 선생님들과 들른 적이 있었지만 오늘은 아내와 성수네와 함께 들르다. 우키 백과에 의하면 순천 낙안읍성(順天 樂安邑城)은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읍성이다. 1983년 6월 14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02호로 지정되었다. 1908년까지 존속하였던 낙안군의 중심지였다. 임경업 장군이 쌓았다고 전해지는 성곽과 내부 마을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다. 해마다 5월에는 낙안민속문화축제, 10월에는 남도음식축제가 열린다. 전통 한옥들이 있으며 현재 실제 주민들이 거주 중이다. 현재 대한민국 세계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되어 있다.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7Eth0/btsayVuGLOQ/hDdYnqnYQaxnRQdt7bsEdK/img.jpg)
성수 부부와 함께 가다.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이 이 녹우당에 있다고 해서 가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가 보니 원본은 보관상의 이유로 전시관에 전시되어 있지 않고 따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영인본이 전시되고 있다. 실망감이 컸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다른 그림들과 유물들을 둘러보고 녹우당 집으로 가봤더니 여기도 코로나 때문인지 아니면 원래 집 안은 개방하지 않는지 몰라도 대문이 잠겨 있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녹우당의 넓이가 대략 4,000평이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저택이다.(14,268 제곱미터라고 나와 있다.) 고산 집안이 당시 호남 3대 부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고 하니 이 정도 규모의 저택을 소유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윤선도가 어떻게 이런 부자가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더니 아래는 문화일보 ..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cA4Jol/btr9SlaZPX3/bKymApBik8tcGZoqTmK8W0/img.png)
윤교감 부부와 함께 가다. 온수리 성공회 성당에 주차하고 온수리 감리교회 앞으로 난 길로 올라가다. 산성을 한바퀴 돌고 전등사를 들렀다가 원점회귀하다. 산에서 만난 강화 주민의 말에 의하면 이 산성을 한바퀴 도는 데는 1시간이면 된다고 한다. 우리는 부부가 함께 가고 또 놀멍쉬멍 하다 보니 두시간도 더 걸렸다. 산성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고 강화 주변이 잘 보여서 경치도 아주 좋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정족산성은 일명 삼랑성이라고도 불리우는 이 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길이는 2,300m에 달하며 자연활석을 이용하여 축조된 성이다. 성 내에는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에 창건된 유서 깊은 전등사가 있으며 고려 고종 46년(1259)에는 이 성안에 궁궐(이궁)..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rFVz3/btr91AjZjcb/kUTNFBMW8U8CYm8OaqJIwk/img.jpg)
제주 여행 마지막 날 전에도 한번 와 본 적이 있는 이 곶자왈을 들르다. 지난번에는 절반만 돌았는데 오늘은 크게 한바퀴 다 돌았다. 곶자왈은 제주 방언으로 덩쿨이나 숲이 무성한 지역을 말한다. 제주의 원시 자연숲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와 성수는 테우리길 - 한수기길 - 오찬이길로 전체를 한바퀴 돌았고 다른 사람들은 가운데 있는 빌레길로 나왔다. 가시낭길은 가지 않았다.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nnp4V/btr9C4eEvOR/UAYqPxAwh4OXwX6PPPupv0/img.png)
아침 10시경 호수공원을 한바퀴 돌려고 자전거를 타고 나갔다. 시간도 많고 해서 한강으로 나갔다가 정서진까지 가게 되었다. 도상 거리는 편도 33km로 나온다. 숙련된 사람이라면 3시간이면 충분할 거리를 7시간이나 걸려서 왕복했다. 갑자기 먼 거리를 탔더니 오는 길에 무릎이 아파서 혼났다. 지금도 무릎이 아프다. 계단을 내려가기 힘들다. 경인운하를 따라 길이 잘 만들어져 있어서 가다보니 끝까지 가게 되었다. 처음으로 먼 거리를 탔다.
![](http://i1.daumcdn.net/thumb/C150x150.fwebp.q85/?fname=https://blog.kakaocdn.net/dn/cstyYz/btr9n55NDFO/pRKJLXfeRk2skM6u0BGsp0/img.jpg)
강화 나들길 1코스에 연미정이 있다. 그래서 가게 되었다. 연미정은 다음 백과에 의하면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 월곶리는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서 물길의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갑곶(甲串)의 앞을 지나 인천쪽으로 흐르는데, 그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이곳은 강화십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자리로서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연미정에 오르면 북으로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자는 높다란 주초석(柱礎石)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자 양쪽에는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