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 월 | 화 | 수 | 목 | 금 | 토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 성인대
- #윤두서 자화상 #공재 윤두서 자화상 #공재 자화상
- 김포 문수산
- #강화나들길 3코스
- 미시령 성인대
- #강화 나들길 18코스 #강화 나들길 18코스 왕골 공예마을 가는 길
- #건봉사 #고성 건봉사
- 김포 한재당
- 평화누리길 7코스
- 명동 성당 미사
- 해파랑길 48코스
- #평화누리길 2코스 #평화누리길 1코스 #평화누리길 1~2코스
- 정서진 #정서진 라이딩
- 평화누리길 3코스
- #붕당의 발생 #붕당의 형성 #붕당의 시작
- 해파랑길 8코스
- 고성 왕곡 마을 #왕곡 마을
- 해파랑길 20코스
- 단양 구담봉
- 평화누리길 4코스
- 지족불욕 지지불태 가이장구(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 #앙코르 왓 #앙코르 톰 #씨엠립 여행
- #조선 국왕의 일생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 엮음 글항아리
- 북한산 만포면옥
- #대흥사 #해남 대흥사
- #북한산 문수봉 #북한산 승가봉 능선
- 군위 팔공산
- #조선 중기 정치와 정책(인조~현종 시기)
- 앙코르와트
- 평화누리길 경기 구간 완주
- Today
- Total
목록역사 문화 유적지 관광지 (182)
노래하는 사람
다산 초당은 그의 외가 친척인 윤단의 산정(山亭)이었습니다. 다산의 어머니가 공재 윤두서의 손녀입니다. 그러니까 다산은 공재의 외증손자가 됩니다. 해남 윤씨들은 당시 그 지역의 명문가였고 특히 공재의 증조부인 윤선도 시절부터 이미 이 지역의 대부호였습니다. 1808년 47세 되던 해 봄에 귤동의 초가로 옮깁니다. 지금은 초당이 아니고 와당으로 복원했습니다. 다산은 이곳 강진에서 1표 2서를 비롯한 500여권의 저술을 하였습니다. 백련사에 주차하고 다산초당으로 넘어갑니다. 황칠나무가 많이 있습니다. 황칠나무를 보면 양승구가 생각납니다. 이 연지는 다산이 직접 파고 석가산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연지에 잉어를 키우면서 관찰했다고 합니다. 누가 초당에 걸려 있는 아래의 이 주련들을 좀 해석해 주면 좋겠는데...
달마고도 갔다가 강진에서 자고 아침 먹기 전에 사의재를 들르다. 다산은 고성사 보은산방과 이학래의 집, 다산 초당으로 가기 전에 여기서 4년 가까이 지냅니다. 사의재는 '네 가지 마땅히 해야 할 방'이란 뜻. 맑은 정신 (생각은 마땅히 맑게) 엄숙한 용모 (용모는 마땅히 엄숙 하게) 과묵한 말씨 (말은 마땅히 과묵 하게) 신중한 행동 (행동은 마땅히 중후 하게) 사의재 주변에 한옥 체험관을 만들어서 숙박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예약을 하려고 홈피에 들어가 봤더니 이미 3월까지 꽉 찼다.
성수네 집에 대학 동기 4명이 모여서 함께 가다. 이포보 바로 옆 길가에 10여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는 작은 주차장이 있다. 주차하고 10여분 올라가면 바로 산성에 도착한다. 파사산 자체가 200여m 밖에 되지 않는 나즈막한 산이다.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파사성은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 산9 번지와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 산43 번지 경계에 있는 해발 230m의 파사산 정상에 위치하며, 6세기 중엽 이후 초축된 테뫼식산성이다. 둘레는 936m이고, 내부 면적은 약 3,966㎡이다. 산정상부와 계곡을 일부 포함하여 부정형에 가까운 형태로 축성되었다. 현재 사적 제251호로 지정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파사니사금(婆娑尼師今, 재위 80∼112) 때 축성되었기 때문에 파사성이라고 하며, 또..
평화누리길을 걸을 때 온 적이 있지만 그때는 여름이어서 역고드름을 볼 수 없었다. 한탄강 주상절리길을 걷고 돌아오는 길에 들르다. 겨울이어서 역고드름을 많이 볼 수 있다. 네비에 역고드름이라고 치면 바로 갈 수 있고 대중 교통은 불편하지만 신탄리역에서 걸어올 수는 있다. 하지만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걷기에 좀 먼 길이다. 바로 앞에 작은 무료 주차장도 있다.
철원 평야를 두루 다 볼 수 있는 낮은 산이다. 높이가 362m 라고 한다. 산 아래 주차하고 20분이면 올라갈 수 있다. 남북한을 다 조망할 수 있다. 군사적으로 요충지인 것을 올라와 보면 병법을 전혀 모르는 사람도 알 수 있다.
남한 산성 아래 이 행궁이 있다. 다른 행궁과의 큰 차이점은 이 행궁에는 종묘와 사직이 있다는 점이다. 유사시 정궁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란 뜻이다. 인조가 여기에 피신와 있다가 삼전도로 나가서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땅에 찧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한 치욕의 장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수도권 사람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어 있다.
양평 가는 길에 들르다. 다산에 대한 책들을 읽으면서 여기 가보고 싶었다. 강진과 해남에 있는 유배지는 둘러본 적이 있지만 정작 생가가 있는 마재는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이곳에는 다산 기념관과 여유당 실학 박물관 그리고 그의 부부 묘도 있다. 정조가 오래 살았으면 다산의 인생도 활짝 폈을텐데 갑자기 죽는 바람에 그의 바람막이가 없어져서 오랜 세월을 해남 다산 초당등에서 지내야 했다. 실학자로서의 다산뿐만 아니라 경학자로서의 다산도 다시 한번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해남에서 유배 생활 할 때 홍임이란 딸을 얻었다. 다산초당에 있을 때 자기를 도와주고 시중들던 여인에게서 난 딸로 추정된다.
우현기 선생님과 함께 가다. 오래 전 아이들이 어렸을 때 데리고 온 적이 있었고 얼마 전 강화나들길 걸을 때 들른 적이 있었지만 그 때는 코로나로 개방을 하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니 2,30년만에 다시 오는 것이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갑곶돈대는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대는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 한탄했다..
아들 내외가 내시경 검사한다고 계산동 가는 길에 들르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부평도호부관아(富平都護府官衙)는 인천광역시 계양구, 인천부평초등학교에 있는 관아건물이다. 1982년 3월 2일 인천광역시의 유형문화재 제2호 부평도호부청사로 지정되었다가, 2019년 10월 7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관아건물 중 하나로 부평부읍지에 의하면 중심업무를 보던 동헌, 관리나 외국사신이 묵던 숙박시설인 객사, 죄를 다스리던 포도청 등 수많은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에 초등학교를 세우면서 현재 건물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을 헐어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원래 ㄱ자형이었으나 1968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ㅡ자형으로 개조한 것이다. 이 건물은 예전 형태로 보아 동헌이나 현감의 살림채였던 내아로 추측한다. ..
성균관 스캔들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문묘는 유교권 나라들에는 여러 곳에 있지만 우리 나라에는 조선 시대 국립대학 이라고 할 수 있는 성균관에 있는 것이 가장 규모도 크고 역사성도 깊을 것 같아서 가게 되었다. 혜화역에서 내려서 성균관 대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문묘가 있다. 신삼문은 잠겨 있어서 담장을 따라 안으로 더 들어가니 명륜당 들어가는 옆문이 열려 있다. 지방의 향교나 서원에 비해서 조선의 국립대학답게 규모가 아주 크다. 성균관은 현위치에 1398년에 건립되었다. 강명관의 '노비와 쇠고기'란 책에 의하면 성균관은 반촌에 사는 반인들 즉 노비들의 희생에 의해서 운영되었다. 물론 국가가 일정부분 보조해 주기도 했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 국가나 성균관이나 다 노비들을 착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그들..
친구 승구가 아주 좋아하는 곳이라고 가자고 해서 가다. 청보리밭과 유채밭이 아주 넓은 밭에 펼쳐져 있다. 학원(鶴苑)농장은 다른 사람의 글을 보니 현재 진영호씨가 운영하고 있고 전 국무총리였던 진의종씨와 어머니 이학 여사가 1960년대 초에 이곳 야산에 10여만평을 개발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충용이라고 아래는 승구가 찍은 사진들
다음 백과에 의하면 고려시대까지 무송(茂松)과 장사(長沙)의 두 고을이었던 것을 효과적인 왜구의 방비를 위하여 1417년(태종 17) 합하여 두 고을 첫자를 떼어 무장이라 하고 성과 관아를 새로 마련하였다고 한다. 전라도의 여러 고을에서 장정과 승려 2만수천명이 동원되어 둘레 1,470척(尺), 높이 7척의 성벽을 쌓고, 성 위에 높이 1척짜리 여장(女墻 : 성위에 낮게 쌓은 담) 471개를 만들고,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적으로부터 방어하는 작은 성)을 갖춘 남문과 동·북문을 세웠다. 성벽 밖으로는 둘레 2,127척의 해자(垓字 : 성 밖으로 둘러 판 못)를 파서 견고히 하고, 병마사가 현감을 겸직하는 진(鎭)을 베풀었던 곳이다. 이후 성은 더욱 넓혀 축조되었던 듯하니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다음 백과에 의하면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1965년 4월 1일 사적으로 지정된 이 성의 둘레는 1,684m 높이가4~6m, 면적은 50,172평으로 동, 서, 북문과 3개소의 옹성 6개의 치성을 비롯하여 성 밖의 해자 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동의 관아건물과 2지 4천이 있었으나 전화로 소진되고 성곽과 공북루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부터 옛 모습대로 복원해 오고 있다. 성벽 위를 한바퀴 도는 데는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성 안의 각종 건물들은 성벽에서 멀지 않으니 내려와서 바로 갈 수 있다. 옥바깥에 있는 형틀 당시 객사들을 보면 좌우에 익헌들을 함께 두어서 더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게 ..
나주목의 객사 건물로 매월 1일과 15일에 국왕에 대한 예를 올리고 외국 사신이나 정부 고관의 행차가 있을 때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성종 6~10년(1475~1479)사이에 나주목사로 재직한 이 유인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정면 5칸, 측면 4칸, 팔각지붕의 320.66m²(97평) 건물로 전국의 객사 건물 중 그 규모가 가장 웅장하다. 일제 강점기 이후 군청 건물로 사용해오면서 원형이 파괴되어 1976년에서1977년 사이 완전해체 복원하였다. 광주 민주화 운동때는 이곳이나주의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5.18 당시 시위의 집결 장소로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좌우에 익헌을 둔 큰 규모의 건물이다. 금성관은 우익헌은 5칸이고 좌익헌은 6칸인 비대..
나주 향교는 1407년(태종 7)에 창건되었다. 강릉향교, 장수향교와 함께 우리 나라 3대 향교로 불릴만큼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이 세 향교 가운데도 가장 큰 향교라고 한다. 나주 향교는 대성전이 앞에 있다. 공자 아버지의 위패를 봉안하는 계성사가 있는 향교는 대성전이 앞에 있다고 하는 설과 산지형은 명륜당이 앞에 있고 평지형은 대성전이 앞에 있다는 설이 있는데 어느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호남지방의 향교 중 계성사가 있었던 곳으로는 나주향교 이외에 전주향교와 함평향교 등이 있다고 한다. 이 향교의 대성전은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우리 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는 점은 비슷하다. 임진왜란으로 성균관이 불타고 다시 지을 때 나주 향교를 참..
북한산 산영루는 경치 좋은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많은 조선 시대 문인들이 다녀가고 시를 남겼다. 전쟁통에 불타고 없어진 것을 근래에 다시 복원했다. 추사와 다산이 시를 남겼다. 산영루 바윗길 끊어지니 위태로운 난간이 보이고 마주한 겨드랑이는 냉랭하여 날개 깃털이 돋을 듯 암자 열 곳서 성긴 종소리, 가을빛 저물게 하고 만 산 줄기서 노란 나뭇일, 물소리를 차게 하네 숲속에 말 매어두고 농담을 하고 있는데 구름 속에서 만난 스님이 정중한 얼굴로 너그러운 대접을 하네 해가 지자 안개가 푸른 물을 감싸는데 간이 부엌에선 벌써 술상과 밥상 나온다고 알려오네 (다산 정약용, 1794년, 당시 33세) 산영루 하나하나 붉은 숲속에 굽이 도는 계곡이 다시 산줄기를 끊었다. 먼 종소리 가라앉는 빗속에 잦아들고 가늘..
남원 여행길에 들르다.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곳이고 이 집은 이 소설이 드라마로 방영된 후 그 인기를 몰아 만들어졌다. 문학 작품 하나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 지 알 수 있는 집이다. 지자체들이 스토리 텔링을 잘 하면 세익스피어로 영국이 먹고 살듯이 우리라고 안 될 이유가 없지. 이 소설이 1987~1989년까지 드라마로 방영되자 이 곳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한 공무원의 아이디어로 토지의 무대가 된 이 집들이 1997~1998년 사이에 지어져서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최참판댁 아래에는 토지에 나오는 인물들의 집을 만들어 두었다. 드라마는 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당시 드라마 세트장을 재현한 건가? 임이네는 월선이네 국밥집에서 일하면서 월선의 돈을 훔쳐서 베개 속에 숨겼다가 불이..
남원 여행길에 들르다. 운조루는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국가민속문화재 제8호. 1776년(영조 52) 삼수부사와 낙안군수를 지낸 유이주(柳爾胄)가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 집터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금환낙지(金環落地)라 하여 예로부터 명당자리로 불려왔다. 사랑채는 4칸의 몸채에 뒤쪽으로 꺾여 이어진 2칸의 날개가 달려 있다. 몸채 왼쪽 끝의 1칸은 내루형(內樓形)으로 기둥 밖으로 난간이 둘러져 있다. 이 사랑채의 구성은 궁전 침전에서와 같이 완전한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여기에 일반 대청이 연립하여 있다. 또, 사랑채에는 보통 큰 부엌이 없는 법인데,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다. 더구나 본 사랑채와 직교한 누마루가 또 있어, 전체 살림을 한눈에 관찰하도록 되어 있어 특이하다...
성수네와 친구들이 함께 가다. 미국 목회를 접고 들어온 태수 부부가 함께 해서 더 의미가 있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하고 있는 비자림은 448,165㎡의 면적에 500∼800년생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밀집하여 자생되고 있다. 나무의 높이는 7∼14m, 직경은 50∼110㎝ 그리고 수관폭은 10∼15m에 이르는 거목들이 군집한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비자나무 숲이다. 옛부터 비자나무 열매인 비자는 구충제로 많이 쓰여졌고, 나무는 재질이 좋아 고급가구나 바둑판을 만드는데 사용되어 왔다. 비자림은 나도풍란, 풍란, 콩짜개란, 흑난초, 비자란 등 희귀한 난과식물의 자생지이기도 하다. 녹음이 짙은 울창한 비자나무 숲속의 삼림욕은 혈관을 유연하게 하고 정신적, 신체적 피로회복과 인체의 리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