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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 다산 유배지 탐방 22-02-15 본문

역사 문화 유적지 관광지

강진 다산 유배지 탐방 22-02-15

singingman 2023. 5. 15.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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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많은 조명을 받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는 1762년(영조 38년)에 태어나서 1836년(헌종 2년)까지 74년을 살았습니다.

 

자는 미용(美鏞). 호는 다산(茶山)·사암(俟菴)·여유당(與猶堂)·채산(菜山)등이고  남인 가문 출신으로, 정조(正祖) 연간에 문신으로 지냈고, 청년기에 접했던 천주교, 서학(西學)으로 인해 장기간 유배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글은 그의 유배지와 관련해서 쓸려고 합니다.

1800년에 정조가 갑자기 서거하자 다산은 끈 떨어진 연이 되었습니다.

이미 남인들의 힘은 약해져 있었던 데다 정순 왕후가 천주교 금지령을 내리면서 다산은 여러 가지 모함에 빠지게 됩니다.

그의 형 약종은 신앙을 지키다 순교합니다.

자신과 형 약전은 각각 흑산도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다산의 집안에 천주교 지도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승훈은 다산의 누이의 남편 즉, 자형입니다.

다산의 이복 맏형 약현의 부인(다산의 형수)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한국천주교의 개국성조로 일컬어지는 이벽이라는 인물입니다.

이렇게 집안에 천주교 지도자들이 많이 있다보니 자연히 사건이 터질 때마다 다산이 연루됩니다.

지금도 천주교와 역사학자들 사이에 다산이 신앙을 져버렸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다산이 최초로 유배를 간 곳은 해미읍입니다.

 

1790년 예문관 검열에 임명한 정조의 명을 정치적 음해가 있었다며 두 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려 거부한 다산은 3월 7일 서산 해미현으로 유배를 당합니다.

다산이 명을 받아 동작 나루, 과천, 수원, 진위를 거쳐 서산 해미현에 도착한 것은 3월 13일입니다.
유배온 죄인이긴 하지만 왕의 총애를 받는 다산을 지방관이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짧은 유배기간 동안 다산은 해미읍성도 둘러보고 현감의 안내로 평소 존경하던 약천 남구만(1629~1711) 선생의 옛집을 둘러보고 사당을 방문하여 예를 갖추었습니다.
또 태안현감 유회(1739~?)와 함께 개심사를 들러 하루밤 자고 오기도 합니다.
그러니 다산의 해미 유배는 이름만 유배지 사실은 유람하고 잘 놀다 온 기간입니다.

조선 시대에 유배는 죄인을 벌주기 위한 방법이긴 하지만 왕이 아끼는 신하를 정적들로부터 지켜주는 한 방법이 되기도 했습니다.
3월 22일 해배되어 한양으로 올라갑니다.
그러니 다산의 첫번째 유배는 열흘만에 끝납니다.

 

두번째 유배지는 지금의 포항시 장기입니다.

다산은 1801년 1월 19일에 터진 신유박해 사건에 연루되어 1801년 2월 27일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습니다.

다산은 그 다음날 유배 길을 떠나 3월 9일 장기에 도착하여 마현리 구석골 성선봉(成善封)의 집을 배소로 지정받았습니다.

다산은 황사영 백서사건 연루 의혹으로 그해 10월 20일 다시 서울로 압송되기까지 7개월 10일(220일)동안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했습니다.

다산은 틈나는 대로 해돋이를 구경하거나 신창리 앞바다에 나가 어부들이 고기 잡는 걸 구경하기도 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농사 짓는 것을 지켜보기도 하고 바닷가에서는 해녀들의 물질을 구경했으며, 오징어와 물고기를 보고 험한 정계에 뛰어 들어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간신히 모숨을 부지해 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신의 처지를 우화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장기천을 따라 신창리 바다쪽으로 녹음벽수의 장기숲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다산은 그 숲길을 걸으면서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시를 통해 표출하기도 했습니다.

 

1801년 음력 9월 29일에 백서(帛書) 사건으로 황사영이 체포됩니다.

황사영은 다산의 큰형 정약현의 사위입니다.

어떻게든지 다산을 죽이려던 벽파들은 이 사건을 구실로 다산과 둘째 형 약전을 귀양지에서 불러와 의금부 옥에 가두고 혹독한 심문을 합니니다. 

아무런 관련 증거가 나오지 않아서 무죄석방을 해야 하지만 노론 벽파의 강력한 주장으로 다시 유배형을 받습니다. 

 

마지막 세번째 유배가 결정됩니다.

이번 유배지는 다산은 강진, 형 약전은 흑산도입니다. 

음력 11월 9일 형제는 유배길을 함께 떠납니다.

11월 21일 형제는 나주 율정(栗亭, 밤남정)에 있는 주막집에 하루밤을 머뭅니다. 

비록 유배길이었지만 너무나도 사랑하고 아끼는 형제는 10여일 행복했습니다.

이 후 형제는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산이 강진에 도착했던 날은 1801년(순조 1) 음력 11월 22일 또는 23일이었습니다.
다산은 초라한 주막 방 한 칸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때 동문안에서 주막을 하고 있던 주모가 다산을 거둡니다.
그러면서 방의 이름을 「사의재(四宜齋)」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집 이름을 정한 날은 1803년(순조 3) 12월 10일입니다.

이날은 마침 동짓날이니 다음해가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다산은 집 이름을 짓고는 왜 그렇게 이름 지었는지 기록으로 남겨놓았습니다. 

 

「사의재기(四宜齋記)」

 

사의재(四宜齋)라는 것은 내가 강진(康津)에 귀양가 살 때 거처하던 집이다.

생각은 마땅히 담백해야 하니 담백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맑게 해야 하고, 외모는 마땅히 장엄해야 하니 장엄하지 않은 바가 있으면 그것을 빨리 단정히 해야 하고, 말은 마땅히 적어야 하니 적지 않은 바가 있으면 빨리 그쳐야 하고, 움직임은 마땅히 무거워야 하니 무겁지 않음이 있으면 빨리 더디게 해야 한다.

이에 그 방에 이름을 붙여 ‘사의재(四宜齋)’라고 한다. 마땅하다[宜]라는 것은 의롭다[義]라는 것이니, 의로 제어함을 이른다. 연령이 많아짐을 생각할 때 뜻한 바 학업이 무너져 버린 것이 슬퍼진다. 스스로 반성하기를 바랄 뿐이다.

이때는 가경(嘉慶 청 인종(淸仁宗)의 연호) 8년 (1803, 순조 3) 겨울 12월 신축일 초열흘임. 동짓날[南至日]이니, 갑자년(1804, 순조 4)이 시작되는 날이다. 이날《주역(周易)》건괘(乾卦)를 읽었다

 

다산은 이 사의재에 4년 가까이 있었습니다.

두 번째 거처로 보은산방(寶恩山房 : 고성사)에 머물렀습니다.

44세 때(1805) 겨울, 큰아들 학연이 이곳에 찾아와 머물렀고, 다산은 큰아들에게 주역과 예기를 가르쳤습니다.

45세 때(1806) 가을, 9개월 만에 다시 목리(牧里) 이학래(李鶴來, 이청으로도 불립니다.) 집으로 옮겼습니다.

이 집에 어디에 있었는지 조사해 보았지만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지금은 읍내 목리에 이학래길이라는 이름을 가진 길이 남아 있습니다.

1808년 봄 다산초당으로 옮기게 될 때까지 약 1년 반 동안 머물렀습니다.

이후 1818년에 유배가 풀릴 때까지 10년간을 여기서 생활하면서 저술활동과 제자들을 키우는 일에 몰두합니다.

1814년에 공식적으로는 다산은 해배가 되지만 노론 벽파들이 그의 해배를 발표하지 않아서 억울하게 4년을 더 유배생활 하게 됩니다.

 

다산이 머물던 집 사의재를 복원했습니다.

 

 

사의재 옆 주막입니다

오래 전에 이 주막을 방문했을 때 방안에 다산이 쓴 '애절양' 시가 벽에 붙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산이 이 주막에 머무르고 있을 때 쓴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의재 (gangjin.go.kr)
절양(絶陽)이란 말은 남자의 양물 즉, 생식기를 자른다는 뜻입니다. 

다산의 형 약전의 흑산도 유배를 다룬 영화 '자산어보'에 이 시가 실감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애절양(哀絶陽)이란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蘆田少婦哭聲長 (노전소부곡성장)

哭向縣門號穹蒼 (곡향현문호궁창)

夫征不復尙可有 (부정부복상가유) 

自古未聞男絶陽 (자고미문남절양)

노전 마을 젊은 아낙 울음소리 그치지 않네.

관아 향해 슬피울며 하늘에 호소하네 .

남정네 전장에 나가 못 오는 일 있다지만

남자 성기 잘랐단 말 자고로 못 들었네.

舅喪已縞兒未燥 (구상기호아미조)

三代名簽在軍保 (삼대명첨재군보)

薄言往愬虎守閽 (박언왕소호수혼)

里正咆哮牛去皁 (이정포효우거조)

磨刀入房血滿席 (마도입방혈만석)

自恨生兒遭窘厄 (자한생아조군액)

시아비 상복 막 벗고, 태어난 아기는 탯물도 마르지 않았는데

삼대의 이름이 다 군보(軍保)에 실리다니

달려가 호소해도 범 같은 문지기 가로막고

이정은 호통 치며 외양간 소까지 몰아가네.

칼 갈아 방에 들더니 선혈이 낭자해라.스스로 부르짖길,

"아이 낳은 죄로구나!".

蠶室淫刑豈有辜 (잠실음형기유고)

閩囝去勢良亦慽 (민건거세양역척)

生生之理天所予 (생생지리천소여)

乾道成男坤道女 (건도성남곤도녀)

騙馬豶豕猶云悲 (선마분시유운비)

況乃生民思繼序 (황내생민사계서)

누에 치던 방에서 불알까는 형벌도 억울한데

민나라 자식의 거세도 진실로 또한 슬픈 것이거늘

자식 낳고 사는 건 하늘이 주신 이치여서

하늘 닮아 아들 되고 땅 닮아 딸이 되지

말 돼지 거세하는 것도 가엾다 이르는데

대 이어갈 생민들이야 말을 더해 무엇하리요

豪家終歲奏管絃 (호가종세진관현)

粒米寸帛無所捐 (입미촌백무소연)

均吾赤子何厚薄 (균오적자하후박)

客窓重誦鳲鳩篇 (객창중송시구편)

부호들은 일년내내 풍류나 즐기면서

쌀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거늘

다 같은 백성인데 왜 이리 차별일까.

객창에서 거듭 거듭 ‘시구편’을 읊조리네.

​위의 시가 지어진 시대 배경은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는 정순왕후의 대리청정을 받던 시절입니다.

황구첨정(黃口簽丁), 백골징포(白骨徵布)등 가렴주구(苛斂誅求)가 극심해지자 백성들은 살던 곳을 떠나 유리하고 있던 시절을 눈물나게 표현한 시입니다.

 

 

 

다산이 두번째로 머물던 고성사에 있는 보은산방입니다.

이곳에서도 아들과 제자들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다산이 10년 가까이 머물렀던 다산초당입니다.

이곳은 그의 외가 친척인 윤단의 산정(山亭)이었습니다.

다산의 어머니가 공재 윤두서의 손녀입니다.

그러니까 다산은 공재의 외증손자가 됩니다.

해남 윤씨들은 당시 그 지역의 명문가였고 특히 공재의 증조부인 윤선도 시절부터 이미 이 지역의 대부호였습니다.

1808년 47세 되던 해 봄에 귤동의 초가로 옮깁니다.

지금은 초당이 아니고 와당으로 복원했습니다.

 

 

다산초당 옆에 있는 정자 천일각

 

 

이곳에서 제자들도 키우고 저술활동도 했습니다.

다산의 글씨를 집자했습니다.

 

 

 

추사의 글씨 - 보배로운 정다산의 산방

 

 

다산 동암

 

 

초당 옆에 연지를 파서 잉어도 키우고 연못 가운데는 석가산도 만들었습니다.

 

 

다산초당 현판

 

 

서암인 다성각

 

 

서암 현판

다산이 직접 새겼다는 설이 있습니다.

 

 

 

차 달이는 부뚜막으로 사용하던 다조

 

 

연못에 잉어를 키우면서 관찰했습니다.

이곳에서 다산은 고개 너머 있는 백련사의 혜장스님과 자주 만나게 됩니다.

혜장은 다산보다 10살 아래였지만 유학 경전에도 밝은 뛰어난 학자였습니다.

( 혜장(惠藏) (baekryunsa.net))

정민교수의 글에 의하면

1805년 봄에 34살의 나이로 백련사의 주지로 왔습니다.

그러니까 아직 다산이 다산초당으로 오기 전의 일입니다.

혜장은 주역에 조예가 깊었고 승려였지만 주량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1805년 4월 17일 다산이 촌로들과 함께 백련사로 놀러가서 혜장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다산은 자기 신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다산의 눈에 혜장은 제 기운을 못 이겨 펄펄 나는 범과 같아 보였습니다.

다산이 산을 떠나고 난 후 늦게야 그가 다산인 것을 전해 들은 혜장은 부리나케 산을 뛰어 내려가서 다산을 만나 합장하고 하루밤을 산에서 보낼 것을 청합니다.

이후 혜장이 마흔 남짓한 나이에 죽을 때까지 두사람은 교우하게 됩니다.

다산은 그에게 아암(兒菴)이란 호도 지어줍니다.

아이처럼 고분고분해지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혜장은 나중에 다산에게 우리 나라 다도의 시조라고도 할 수 있는 어린 초의 선사도 소개하게 되고 초의 선사는 다산의 영향으로 뛰어난 스님이 됩니다.

두륜산 대흥사에 가면 초의 선사의 동상을 볼 수 있습니다.

 

 

두륜산 대흥사에 있는 초의 선사 상

 

 

다산 초당 뒤 만덕산에 핀 동백꽃

 

 

지금은 계단을 만들어 걷기 쉽게 만들었지만 다산은 이 길을 넘어서 초당과 백련사를 오갔을 것입니다.

 

 

초당과 백련사 사이이 있는 오솔길

 

 

 

강진 촌로들의 전언에 따르면, 다산이 초당에 머물 때 음식을 수발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다산과의 사이에 ‘홍임’이라는 딸을 두었습니다.

홍임 어미는 다산이 해배된 뒤 경기도 능내로 다산을 찾아갔지만 홍씨부인에게 내침을 당해 다시 강진으로 내려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임형택 교수가 발굴한 한시 ‘남당사(南塘詞)’는 다산 소실의 이야기다.)

일각에서는 다산의 부인 홍씨가 홍임 어미의 소식을 듣고 경고의 뜻으로 시집올 때 가져온 분홍 치마(하피)를 유배지로 보냈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다산은 부인의 의중을 아는지 모르는지 색이 바랜 치마를 잘라 편지지로 사용했습니다.

두 아들에게 준 편지에는 폐족의 자손으로 취해야 할 몸가짐, 교제법, 공부법 등을 담았습니다.

하피첩에 큰 글씨로 쓴 ‘경직의방(敬直義方:경으로써 마음을 바로잡고, 의로써 일처리를 올곧게 한다)’은 자식에게 준 교훈이자 다산의 좌우명입니다.

다산은 하피첩을 쓴 뒤 8년 지나 1818년에 해배됐고, 고향에서 18년을 더 살고 1836년 74세까지 살았습니다.

홍씨부인과는 60년을 해로했습니다.

 

다산 초당 뒤에 있는 백련사에는 혜장스님이 살았습니다.

 

 

 

강진 백련사 대웅전

 

 

백련사에는 아름다운 배롱나무가 여러 그루 있습니다.

특히 만경루 앞에 있는 이 배롱나무가 꽃이 피었을 때는 장관을 이룹니다.

 

 

 

만경루 앞 배롱나무

 

 

응진전 앞 배롱나무

 

 

삼성각 앞 배롱나무

 

 

원교 이광사의 필체입니다. 두륜산 대흥사에도 있습니다.

 

 

 

백련사에는 동백숲이 우거져 있습니다.

고창 선운사에서 보던 동백숲을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홍매가 피었습니다.

 

 

 

 

 

 

절 뒤에 동백 숲이 방화림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매화가 막 피기 시작합니다.

 

 

백련사에서 내려다 본 마량만

 

 

백련사 옆에 조성된 차밭.

이 산에 차나무가 많아서 다산이라는 호도 생겼다고 합니다.

 

 

* 참고자료

정약용의 애절양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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