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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 25.05.07 본문
서울 둘레길 걸으면서 11코스에 포함되어 있어서.
고려-거란 전쟁의 마지막을 고려의 승리로 장식해준 구국영웅으로 유명한 고려시대의 명신 인헌공 강감찬이 탄생했다고 알려진 곳이다.
별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낙성대(落星垈)이다.
서울특별시 관악구 봉천동에 있다. 사실 낙성대는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도 있었는데, 개경에 있었던 강감찬의 집을 가리켜 '낙성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한 개경 낙성대는 본 문서에서 설명하는 서울의 낙성대와는 반대로 강감찬이 사망할 때 별이 떨어진 곳이라고 한다. 다만 이 유적은 고려의 유적이 아니다.
내부는 강감찬의 사당인 안국사와 공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공원 가운데에 강감찬 동상이 있다.
예전과는 달리 재정비되어 꽤나 갈만한 곳으로 변했다.
낙성대로 올라가는 큰 길에는 강감찬의 일생을 그린 벽화가 그려져 있다.

홍살문

강감찬 장군 동상



외삼문


삼층석탑
강감찬이 거란을 막은 업적을 사람들이 기리기 위해 강감찬의 집터인 낙성대에 쌓은 석탑이다. 13세기에 쌓은 것으로 추정하며, 원래는 낙성대에 있던 것을 1973~1974년에 낙성대공원을 만들면서 공원 내 안국사로 옮겨왔다.



한국 민족의 역사상 수많은 영웅들 중에서도 고려일대를 통하여 가장 뛰어난 이는 실로 강감찬 장군이시다. 그는 일찍 고려 정종 3년, 서기 948년에 금주, 지금 봉천동에서 태조의 건국공신 궁진의 아들로 태어나니 때는 바야흐로 중원 대륙 동몽고 지대에 사나운 유목민들인 거란이 일어나 고려와 맞선 어려운 시대이었다. 거란군이 성종 12년, 서기 993년에 처음 침구해 왔을 때에는 재상 서희의 능란한 외교로써 물리쳤었고 그로부터 17년 뒤 현종 1년, 서기 1010년 겨울에 그들이 다시 4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칩입하므로 고려에서도 강조 장군이 30만 명을 이끌고 나가 싸웠으나 패전하자 조정에서는 항복할 것을 의논했을 때 오직 예부시랑 강감찬이 왕을 피난케 하고 항전할 것을 역설하여 적을 물리치니 때에 그의 나이 64세였다. 그는 본시 문관 출신으로서, 학문과 지략이 탁월한 위에 문무를 겸비한 이라 왕의 특별한 신임을 받아오다가, 현종 9년, 서기 1018년 그의 나이 71세 되던 해에 재상을 겸한 채 서경유수가 되어 평안도로 내려가니, 압록강 동쪽 의주, 선천, 용천, 철산, 곽산, 귀성 등 여섯 고을의 성을 지키며 거란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함이었다. 그러자 거란 장수 소배압 10만 명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 오므로 강감찬이 상원수, 강민첨이 부원수가 되어, 안주로부터 의주까지에 20만 명을 풀어 진을 치고, 또 기병 1만2천 명을 뽑아 산골짜기에 매복시킨 다음, 굵은 밧줄로 소가죽을 꿰어 동쪽 냇물을 가로막았다가, 적들이 오자 갑자기 물을 터서 적군을 크게 패했더니, 이듬해 정월, 적들은 또다시 다른 길로 송경 가까이 쳐들어 왔다가 쫓겨가며 귀성 고을을 지나가게 되었다. 때는 3월, 곳은 귀성의 동쪽 들판, 그날따라 풍우는 남쪽에서 몰아오고, 깃발은 바람결에 북쪽을 향하는지라, 장군은 기세를 타고 적군을 여지없이 무찌르니 석천을 건너 반령에 이르는 사이 적들의 시체는 들을 덮었고, 말과 낙타와 갑주와 온갖 병기들조차 수없이 노획하니, 이야말로 고려일대를 통해 가장 이름난 승첩이었다.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우봉 영파역에 이르자, 왕은 비단 장막을 치고 풍악을 잡히며 개선장군을 환영하면서, 71세 노장군의 백발에 금꽃 여덟 가지를 꽂아주며, 왼손으로 손목을 잡고 바른손으로는 술잔을 권했으며, 함께 도성으로 들어오자, 국민의 환호성은 천지를 진동했었고, 왕은 그에게 영광스런 공신호를 내려주었다. 장군은 73세에 조정에서 물러나 성 밖 동쪽 마을에 조용히 은거하며 낙도교거집과 구선집을 저술했으며, 현종 22년, 서기 1031년 8월에 세상을 여의니 84세요, 인헌이라 시호하고, 현종 묘정에 배향했었다. 그로부터 9백여 년이 지나는 동안 역사는 흘러갔건만, 민족의 영웅이 끼친 큰 공적이야 잊을 길이 없으므로, 여기 장군의 유적지에 사적비를 세워, 자손 만대에 전하여 우리 민족의 영광과 긍지를 삼으려 한다.
서기 1974년 6월 10일
노산 이은장 짓고
일중 김충현 쓰고
서울특별시장 양택식 세움

내삼문

사당인 안국사

강감찬 장군

거란과의 전쟁을 그림으로 그렸나?


사당 뒷편

사당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모습
아래는 기념관 내부




낙성대 공원
안국사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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