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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

singingman 2025. 3. 17.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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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실

 

조선 시대에는 태(胎), 즉 아기의 태반을 매우 신성하고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이는 유교적 가치관과 천명(天命), 혈통의 중요성, 생명의 근원으로, 그리고 왕실에서는 왕권의 정통성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유교는 효(孝)를 아주 중시합니다.

효의 방법 가운데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소중하게 잘 보존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내목은 잘라도 내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吾頭可斷此髮不可斷 오두가단 차발불가단)"고 반발했습니다.

이런 생각은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감히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요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서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님을 드러내드리는 것이 효도의 마침이다."

에서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위의 글은 효경에 나오는 문장으로 효를 중시하는 유교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글입니다.

머리털 하나도 감히 훼상하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면 혈통의 중요성을 가지고 있고 생명의 근원으로 생각한 태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왕실에서는 왕자나 공주들의 태를 소중하게 모셔 태실을 조성했습니다.

일제가 이 태실들을 훼손해서 서삼릉 지역 한 곳에 모두 모았습니다.

층청남도 서산에 있는 명종 태실처럼 원래의 위치에 있는 태실도 있긴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태실은 이곳 서삼릉에 집단적으로 모여 있습니다.

그 가운데 성종의 태실을 살펴보면

 

"경기도 광주시에는 태전동(胎田洞)이라는 지명이 있는데, 해당 지명은 성종의 태실이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성종의 태실은 본래 경기도 광주시 태전동 265-1번지로, 지금도 태봉산이 남아 있다.

하지만 현재 성종의 태실 흔적은 찾을 수가 없는데, 이유는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왕직(李王職)에서는 태실의 훼손과 관리의 어려움을 이유로 전국에 흩어져 있던 태실을 한 곳으로 모으는 조치를 취했는데, 이렇게 한 곳으로 모여 조성된 태실이 바로 서삼릉 태실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성종의 태실은 1928년에 이봉되어 임시로 경성 수창동 이왕직 봉상시 내 봉안실로 옮겨졌다가 최종적으로 1930년 4월 15일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또한 태실이 옮겨간 후 남아 있던 태실 석물은 이내 창경궁으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유는 전문기사를 시켜 연구를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현재 태봉산에서 성종의 태실은 흔적도 찾아 볼 수가 없으며, 지명과 마을의 유래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곳에 성종의 태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이다."

(newstower.co.kr)

 

서삼릉에 있는 성종의 태실 비석

 

 

창경궁에 있는 성종 태실 석물

 

 

오석은 왕과 황제 황태자의 태실이고 오른쪽 화강암은 왕자와 공주의 태실이다.

 

 

태항아리 재현품

 

 

 

 

 

왕자와 공주의 태실

 

 

왕과 황제 황태자의 태실

 

 

 

 

 

지워진 부분은 일본의 연호인 소화였을 것으로 추정.

 

 

 

 

 

서삼릉 태실은 관람 제한지역으로 지정되어 미리 예약한 사람들만 관람이 가능합니다.

이곳에 가보면 태실을 공동묘지처럼 만들고 그것도 문화 해설사의 설명에 의하면 날 일(日)자 모양으로 조성했습니다.

일제가 어떤 의도로 이렇게 했는지 짐작이 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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