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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사릉 21-07-21 본문
위키백과에 의하면
남양주 사릉(南楊州 思陵)은 조선 제6대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산 65-1에 위치하고 있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09호로 지정되었다.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부인 정순왕후(1440∼1521)의 무덤이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왕후는 왕실을 떠나 작은 집을 지어 평생 흰옷만 입으며 고기와 생선은 먹지 않았다고 한다.
왕후가 후사(後嗣) 없이 승하(昇遐)함에 부왕(夫王) 단종(端宗)의 누이 경혜공주(敬惠公主)의 시가(媤家)인 해주정씨가(鄭氏家)의 묘역에 장례하였으며, 봉사(奉祀)도 정씨가에서 하여왔다.
숙종 24년(1698)에 단종이 왕으로 복위 되면서 정순왕후라 봉해졌고 왕후의 무덤을 사릉이라 했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하지 않았고, 무덤 앞에 상석과 양석, 둘레돌이 있으며 그 밖으로 3면을 낮은 담으로 쌓았다.
단종의 무덤이 장릉으로 봉해졌을 때에도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고, 동물모양의 돌만 세웠는데 이는 왕릉으로 봉해진 것에 대한 예에 따른 것이다.
사각지붕 모양의 장명등은 장릉과 같은 것으로 숙종대의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사릉思陵(단종비 정순왕후)
위치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
능의 형식 :단릉
능의 조성 :1521년(중종 16), 1698년(숙종 24)
능의 구성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다.
정순왕후 송씨는 군부인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처음에는 대군부인의 예로 묘소를 조성하였다.
그 후 1698년(숙종 24)에 정순왕후로 복위되어 묘소를 능제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석양과 석호를 하나씩 줄였으며, 무석인을 생략하였다.
문석인과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은 정종의 후릉(厚陵)의 능제에 따라 작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정자각, 비각을 설치하였다.
정자각은 다른 왕릉에 비해 아담한 모습이고, 정자각으로 연결되는 향로와 어로는 중간에 끊어져 있다.
사릉은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있어서 많은 전통 수종의 식물들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능의 역사
정순왕후 송씨는 1521년(중종 16)에 군부인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묘소는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시댁인 해주 정씨의 선산(양주 군장리)에 조성하여 복위 전까지 해주 정씨 집안에서 제사를 지냈다.
1698년(숙종 24)에 정순왕후로 복위되어 신주를 종묘에 모셨고,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하였다.
정순왕후(定順王后) 이야기
정순왕후 송씨(재세 : 1440년 음력 3월 12일 ~ 1521년 음력 6월 4일)는 본관이 여산인 여량부원군 송현수와 여흥부부인 민씨의 딸로 1440년(세종 22)에 전북 정읍 태인(현 정읍시)에서 태어났다.
1454년(단종 2)에 타고난 성품과 검소의 미덕을 인정받아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다음 해인 1455년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선위하고 상왕이 되자 의덕왕대비로 책봉되었다.
1457년(세조 3)에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면서 사육신을 비롯한 단종 측근세력들이 제거되자,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 유배되고, 정순왕후는 군부인으로 강등되어 현재의 동대문 밖 정업원에서 생활하였다.
뒤쪽 산봉우리(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비통한 마음으로 단종을 그리워하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 후 1521년(중종 16)에 82세로 세상을 떠났고, 1698년(숙종 24)에 정순왕후로 복위되었다.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었다가 18세에 단종과 이별하고, 부인으로 강등되어 평생을 혼자 살아가야했던 불운한 인물로 왕후의 비극에 얽힌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단종은 1457년(세조 3)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도 복위사건으로 인해 영월로 유배되어 억울한 죽음을 맞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동쪽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렸으며 온 마을 여인들이 땅을 한 번 치고 가슴을 한 번 치는 동정곡을 했다고 전한다.
그 뒤부터 이 봉우리는 왕후가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하여 동망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한경지략』에 의하면 영도교 부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금남의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왕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 때 마다 왕후에게 채소를 가져다주다가 궁에서 말리자 왕후가 거처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장을 열어 주변을 혼잡하게 하고, 계속해서 몰래 왕후에게 채소를 전해주려는 여인들의 꾀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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