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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양주 회암사 21-09-18 본문
고의원에 갔다가 근처에 있어서 가게 되었다.
전부터 회암사 이야기를 책에서도 많이 본 것 같고 또 최근에 지공선사 때문에 더 관심이 있었다.
회암사지에서 500m정도 올라가면 절이 있다.
절까지 차가 올라갈 수도 있다.
나는 일주문 앞에 주차하고 걸어서 올라갔다.
천보산 정상도 이 절에서 700m만 올라가면 된다고 적혀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우왕 4) 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
그러나 지공이 창건하기 전에도 1174년(명종 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온 적이 있으며, 보우(普愚)가 1313년(충선왕 5)에 회암사에서 광지(廣智)에게 출가한 바 있어 이미 12세기에 존재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의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로, 조선의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수도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효령대군(孝寧大君)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1424년(세종 6)의 기록을 보면 이 절에는 250명의 승려가 있었고, 경내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1472년(성종 3)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정현조(鄭顯祖)에게 명하여 중창하였으며,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 재흥정책을 펼 때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신(儒臣)들에 의해 나라의 정책이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1565년(명종 20) 사월 초파일에 보우(普雨)가 잡혀 가고 절은 불태워짐으로써 폐허화되었다.
1821년(순조 21) 지공·나옹·무학의 부도와 탑비가 고의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정에서 1828년에 다시 중수하였으며,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는 사호를 계승하였다. 1922년에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새로 보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했으며 지공·나옹·무학의 진영을 모셨다.
1976년에는 호선(昊禪)이 큰 법당과 삼성각·영성각(影聖閣) 등을 중건하였다. 회암사의 정문이었던 일주문(一柱門)으로 들어서면 대웅전이 있었던 곳으로, 주춧돌의 수가 532개나 된다.
이 법당터 옆에는 사찰의 화장실 자리가 있고, 오른편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석물(石物)이 남아 있는데, 길이 12자, 너비 9자, 두께 1자, 깊이 3자이며, 이 옆에는 역시 화강암으로 만든 맷돌과 기름틀이 있다. 또한 본당 뒤에는 사방 6자의 떡안반이 있다.
이 사지는 현재 서울의 중앙여자고등학교 소유로서 안내판만 있을 뿐이고, 여기서 500m쯤 올라가서 산길이 끝나는 지점에 현재의 회암사가 있다.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387호인 회암사지선각왕사비(檜巖寺址禪覺王師碑)와 보물 제388호인 회암사지부도, 보물 제389호인 회암사지쌍사자석등(檜巖寺址雙獅子石燈), 경기도 유형문화재로는 제49호인 지공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0호인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1호인 무학대사비(無學大師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52호인 회암사지부도탑이 있다.
옛 절터는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2000년 현재 대규모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 회암사에 얽힌 추문이 있다.
단종실록 단종 1년 6월 21일자에 의하면 서울 진관사 주지인 각돈이 흥천사에 있는 종인 연비와 간통하여 딸을 낳았다. 또 회암사에 와서는 양주교도 자리에 있는 윤심의 기생첩과 눈이 맞았다. 각돈은 윤심에게 거금을 주고 그 기생첩을 달라고 해서 연신내 부근에 집을 사소 기생첩을 이사시켰다.
각돈은 나중에 다른 간통사건에 휘말려서 사형을 당했다.
지금의 회암사 올라가기 전 오른편에 회암사지가 있다.
회암사지는 지금까지 내가 본 우리 나라 사찰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인 것 같다.
제일 아래 입구에서부터 8단으로 된 평지 가람이다.
지공선사
지공선사는 인도의 高僧으로 마가다(magahda)국 만왕의 셋째 왕자로 태어나 8세에 출가하여 19세에 중국 원나라로 들어갔고, 1326년 고려에 들어왔다.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天寶山)에 있는 회암사는 1328년(충숙왕15)에 지공선사(指空禪師)가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을 창건하였고, 1374,1376년에 그의 제자인 나옹(懶翁)선사가 중건하였다.
나옹선사
나옹선사는 고려 충목왕 4년 원나라로 건너가 12년간 불법을 수학하고 돌아와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고, 조선조에 들어와 태조의 왕사가 되었습니다.
나옹과 무학(無學1327~1405)은 원나라에 유학 할 때 같이 공부했고 그 인연으로 무학이 나옹의 의발(衣鉢)을 이어 받았다고 합니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혜근(惠勤 혹은 慧勤)이라고도 한다. 속성(俗姓)은 아씨(牙氏). 초명은 원혜(元惠). 호는 나옹·강월헌(江月軒). 나옹화상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설화의 주인공으로도 많이 나온다. 아버지는 선관서령(膳官署令) 서구(瑞具)이며,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공덕산 묘적암(妙寂庵)의 요연(了然)에게 출가했다. 그뒤 여러 사찰을 순력하다가 1344년(충혜왕 5)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4년간 좌선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1347년(충목왕 3) 원나라로 건너가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에게 배우고, 다시 자선사(慈禪寺)로 가서 처림(處林)의 법을 받았다. 그뒤 명주(溟州) 보타락가산(補陀洛伽山)의 관음보살을 참례하고, 육왕사(育王寺)에서 석가모니상을 예배했다. 1352년에는 복룡산(伏龍山)의 천암장(千巖長)을 찾았다. 1355년 연경으로 돌아가 원나라 순제(順帝)의 명으로 광제사(廣濟寺) 주지가 되었다. 이듬해 10월 개당법회(開堂法會)를 여니 순제는 금란가사(金襴袈裟)와 상아불자를 하사했다. 순제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다시 법원사로 지공을 찾아가 그의 부촉을 받고 1358년(공민왕 7) 귀국했다. 귀국 후 평양·동해 등지로 다니며 설법하다가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거했으나, 공민왕의 간곡한 청으로 1361년 상경하여 내전에서 설법하고 신광사(神光寺)의 주지가 되었다. 그뒤 공부선(功夫選)을 관장했으며, 1361년부터 용문산·원적산·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왕사에 봉해지고 대조계종사 선교도총섭 근수본지중흥조 풍복국우세보제존자(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의 호를 받았다. 그뒤 송광사(松廣寺)에 있다가 다시 회암사 주지가 되어 절을 중수하고 교화활동을 펴자 사람들이 본업을 잊고 몰려들어 길이 메워질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1376년(우왕 2)에는 문수회(文殊會)를 열어 크게 법명을 떨쳤다. 왕명에 의해 밀성(密城:밀양) 영원사(瑩源寺)로 옮기던 중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했다. 보우와 함께 고려말의 위대한 고승으로 일컬어지며, 조선 불교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림과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노래를 많이 지어 문집인 〈나옹집〉에 보존하고 있다. 그의 노래 가운데 특색 있는 것은 〈나옹삼가 懶翁三歌〉로 통칭된 〈백납가 百納歌〉·〈고루가 枯髏歌·〈영주가 靈珠歌〉의 3편이다. 누더기, 해골 같은 몸, 보배스러운 구슬을 노래하고 삶에 집착하지 말고 불성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 주제이다.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있고, 비석과 부도가 회암사에 남아 있다. 저서로 〈나옹화상어록〉 1권과 〈가송 歌頌〉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선각(禪覺)이다.
함허당은 다음 백과에 의하면
조선 초기 배불정책과 배불론 속에서 불교의 정법과 이치를 밝힘으로써 불교를 지켜내고자 애썼다. 함허화상(涵虛和尙)으로 알려져 있다. 속성은 유씨(劉氏). 호는 득통(得通). 당호는 함허(涵虛). 아버지는 전객시사(典客寺事) 청(聽)이고, 어머니는 방씨(方氏)이다. 21세 때 성균관에서 같이 공부하던 벗의 죽음을 보고 세상의 무상함과 몸의 허망함을 느껴 1396년(태조 5) 출가했다. 1397년 회암사(檜巖寺)에 가서 무학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이로써 지공(指空)·나옹·무학의 법통을 이었다. 이후 여러 산으로 돌아다니며 수행에 전념했고, 1404년(태종 4) 다시 회암사로 돌아와 수행한 끝에 크게 깨달았다. 그뒤 1406년부터 공덕산(功德山) 대승사(大乘寺)에서 4년간 〈반야경 般若經〉을 가르치는 등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1414년에는 평산(平山)의 자모산(慈母山) 연봉사(烟峯寺)의 작은 방에 함허당(涵虛堂)이라 이름붙이고 머물면서 〈금강경오가해 金剛經五家解〉를 강의하고, 〈금강경오가해설의 金剛經五家解說誼〉를 저술했다. 선가(禪家)의 법통을 이었으면서도 스승인 무학과는 달리 교에 대한 저술을 많이 남겼으며 사상도 교학적인 경향이 강했다. 유교의 배불론에 대한 호불의 입장에서, 불교가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라는 유학자들의 비판을 반박했다. 선사상이 현실과 일상적인 생활을 수용하는 것
이라는 입장을 취하면서, 최치원이 주장했던 불교·유교·도교의 삼교일치설을 더욱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문수(文秀)·학미(學眉)·달명(達明)·지생(智生)·해수(海修)·도연(道然)·윤오(允悟) 등의 제자가 있다. 저서로는 〈원각경소 圓覺經疏〉 3권, 〈금강경오가해설의〉 2권 1책, 〈영가집설의 永嘉集說誼〉, 〈현정론 顯正論〉 1권, 〈윤관 綸貫〉 1권, 〈함허화상어록〉 1권 등이 있다. 그밖에 〈반야참문 般若懺文〉 1권이 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기화(己和, 1376년 ~ 1431년)는 조선 전기의 승려이다.[1] 속성은 유(劉)씨이며, 본관은 충주이다. 호는 함허(涵虛), 득통(得通), 무준(無準)이다.[1]
21세 때 관악산 의상암에 들어가 승려가 되고, 이듬해 회암사의 자초대사로부터 법요를 닦은 뒤 전국의 명산을 주유하고 돌아와 수도에 전념하였다.[1]
이때부터 공덕산의 대승사, 천마산의 관음굴, 불회사 등지에서 강설하고자 모산 연봉사 등에서 3년간 수도하였다.[1]
세종 2년(1420) 45세 때 오대산에 들어가 여러 성인들에게 공양하고 월정사에 있을 때 왕명에 의해서 대자어찰에 머물다가 4년 이후 이를 사퇴하고 길상산, 공덕산 등 여러 산을 편력하였다.[1]
가평 운악사, 현등사에 머문 때는 세종 9년(1427)이었는데, 그는 현등사에서 3년간을 머물다가 세종 13년(1431)에 회양산에 이르러 봉암사를 중수하고 그곳에서 58세로 열반하였다.[1]
기화의 사상은 다음과 같다. 우선 그는 오도송(悟道頌)에서 "그 자리에 가 눈을 드니 10방(十方)에 푸른 하늘이요, 무(無)속에 길이 있으니 서방극락이로다(臨行擧目 十方碧落 無中有路 西方極樂)"라고 하였고, 또 "감연공적(湛然空寂)하니 본래는 1물(一物)도 없고, 신령한 빛이 빛나니 10방을 환히 통한다. 다시 몸과 마음이 있어 저 생사(生死)를 받을리 없으니, 거래왕복함에 마음에 거리낌이 없도다(湛然空寂 本無一物 靈光赫之 洞撤十方 更無身心 受彼生死 去來往復 心無墨)"라고 읊어 자기의 선풍(禪風)을 드러낸 시문을 여러 편 남겼다.[1]
한편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책(崇儒抑佛策)을 이론적으로 비판한 《현정론(顯正論)》속에, "불교인이 목표로 하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情)을 버리고 성(性)을 빛나게 할 뿐이니, 정(情)이 성(性)에서 나옴은 마치 구름이 장공(長空)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고 정을 버리고 성을 빛냄은 마치 구름이 걷혀 청명한 하늘이 나타남과 같다" 라고 말하여 불교는 청풍(淸風)과 같아 감정의 구름을 깨끗이 제거하고 맑은 심성의 하늘을 나타내게 한다고 하였다.[1] 또한 억불책을 개탄하되 "불교는 비유컨대 청풍이 뜬 구름을 쓸어 버리는 것과 같다. 또렷하게 보기를 소망하면서도 청풍을 싫어함은 이상한 일이다"고 하였다.[1]
나아가서 그는 불교의 윤리와 유교의 윤리를 조화시키려 하여 유가(儒家)에서는 5상(五常)을 가지고 도추(道樞: 참과 거짓, 옳고 그름의 상대적인 대립을 넘어선 절대적인 도의 경지)로 삼지만, 불가(佛家)의 5계(五戒)가 바로 그 5상(五常)이라고 말하고, 유가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는 불교에 의해서 수도해야만 된다고 강조하였다.[1]
또 유가에서 불교의 윤회전생설을 비난하는데 대하여 천당과 지옥이 설사 없다 하더라도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천당을 흠모하여 선(善)을 행하고 지옥을 싫어하여 악을 멈추면 천당지옥설은 민중을 교화하는데 큰 이익이 있다고 대답하고 있다.[1]
그는 결론적으로 유 · 불 · 선 3교는 근본은 같은 것이니 서로 배척 대립하기보다는 상호보충 종합됨으로써 화합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여 "유 · 불 · 선 3가의 말한 바는 은연중에 서로 맞춰져 하나가 되는 관계에 있으니 한 입에서 나온 것과 같다" 라고 하였다.[1]
무학대사는 위키백과에 의하면
무학(無學: 1327년 10월 5일(음력 9월 20일)~1405년 10월 3일(음력 9월 11일)[1])은 고려 말기~조선 초기의 승려이다.[2] 속성은 박이고 이름은 자초(自超)이며, 법명은 무학(無學) · 계월헌(溪月軒)이다.[2][3] 조선 태조에 의해 왕사가 되었으며, 한양천도를 도왔다.
생애 초반[편집]
무학은 1327년 경상도 합천에서 태어났다. 무학의 부모는 몽골 원 제국 간섭기 고려 시대, 왜구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온 하층민 출신인데 갈대로 삿갓을 만들어 팔았고, 이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무학 선사의 어린 시절 기록 등은 남아있지 않다. 어린 시절의 그가 또래에 비해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등 지나치게 못생겨서 내다 버렸으나 학들이 와서 아이를 감싸므로 그의 부모는 그가 특별한 아이라 생각하여 도로 데려왔다 한다.
출가와 승려 생활[편집]
1344년 18세에 송광사에 들어가 소지 선사 밑에서 승려가 되었다. 이후 용문산(龍門山)의 혜명 국사로부터 불법을 전수받고[4], 묘향산의 금강굴에서 수도하였다.[2] 1353년(공민왕 2년)에 원나라의 연경에 유학하여 인도의 지공(指空)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았다.[2] 원나라에 있는 동안 오대산(五臺山) 등 중국의 각지를 순례하였다.[2] 나옹 혜근을 만나 서산(西山) 영암사(靈巖寺)에서 수년을 머물다가 1356년(공민왕 5년)에 고려로 돌아왔다.[2]
1364년 나옹은 회암사를 중건하고 무학을 불러 수좌승으로 삼았다. 나옹이 사망한 뒤에는 무학은 전국을 돌며 수행하였는데, 이 때 이성계와 처음 만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5]
역성혁명에 동참[편집]
무학은 일찍이 이성계의 꿈을 해몽하여 석왕사(釋王寺)를 짓게 해준 인연으로 이성계의 우우(優遇)를 받았으며, 상지술(相地術)에 밝았다고 한다.[3] 연려실기술에는 무학의 해몽과 한양 천도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으나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미흡한 점이 많다.[6]
1392년(조선 태조 1년) 조선 개국 후 왕사가 되고 묘엄존자(妙嚴尊者)의 호를 받았으며 회암사(會巖寺)에 있었다.[2][3] 개국 직후부터 태조는 도읍지를 옮기려 했다. 수도를 옮기려는 태조 이성계를 따라 계룡산 및 한양을 돌아다니며 땅의 모양을 보고 도읍을 정하는 것에 의견을 내었다.
(계룡산에 올라) 지세(地勢)를 두루 관람하고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으니, 자초는 대답하였다.“능히 알 수 없습니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3권 태조 2년 계유 2월 11일의 기사
(남경의 옛 궁궐터에서) 임금이 또 왕사(王師) 자초(自超)에게 물었다.“어떠냐?”자초가 대답하였다.“여기는 사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니, 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이에 도평의사사에 명하여 경상·전라·충청·강원·풍해·경기좌·우도의 민정(民丁)을 선발하여 성쌓는 공사를 하게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6권 태조 3년 갑술 8월 13일의 기사
수도 이전[편집]
두 번째 새 도읍 후보지는 한양이었다. 왕사 무학대사가 어명을 받고 새 도읍지를 둘러보기 시작했다.[7] 무학은 삼각산에 이어 목멱산(木覓山, 지금의 서울 남산)에 올랐다. 이곳이 적당하다고 쾌재를 부르는 순간, 한 노인이 소를 타고 지나가다가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이놈의 소! 미련하기가 무학과 꼭 같구나. 바른 길을 버리고 굽은 길을 찾아가다니, 이럇!' 무학은 노인을 쫓아가 길지를 알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노인은 '여기서 서쪽으로 십리를 더 가면 알 일이다.[7]'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무학은 그대로 태조에게 길지를 보고하였다.
무학이 노인의 말을 쫓아 가보니, 그 곳은 바로 고려의 남경 터였다. 다시 삼각산을 거쳐 백악산 밑에 도착한 무학은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과 남산으로 좌우 용호(龍虎)를 삼는 이곳을 궁궐터로 정하고 태조에게 아뢰었다.[7] 태조는 무학의 말을 듣고 그 길지로 향하고 그곳을 궁궐터로 정하였다.
그런데 무학의 의견에 정도전이 반대하고 나섰다. '예로부터 제왕은 모두 남면하여 나라를 다스려왔고, 동향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7]'라며 반대하였다. 정도전의 건의에 따라 다시 잡은 자리가 북악산 밑, 경복궁 자리였다. 본래 무학이 잡은 자리는 종로의 필운동 근처였다.[7]
백성의 생활이 채 안정되기도 전에 큰 역사를 벌임은 옳지 않다는 천도 반대론을 물리치고 1394년(태조 3년) 8월 태조는 마침내 천도를 명령했다.[7] 10월 태조는 각 관청당 2명씩만 남겨두고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개경을 출발, 한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새 수도의 이름을 한성부로 고쳤다. 12월부터 본격적인 역사에 들어갔다.[7]
태조는 무학을 매우 신임하였다. 1393년 회암사에 역질이 돌자 무학의 건강을 염려하여 광명사로 옮기도록 하였고[8] 1397년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탑을 회암사 북쪽에 세워주었다.[3] 또한 태조 자신도 왕위를 물려준 뒤 회암사에서 지내기도 하였다.[9]
그 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사이가 소원해진 태조와 태종 부자의 화해를 위해 여러번 함흥과 한성을 오갔다. 그러나 그의 노력에도 태조의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무학은 조선 태종 2년(1401) 회암사 감주(監主)가 되었으나, 이듬해에 사직하였고, 금강산 금장암에 들어가서 여생을 마쳤다(1405).[3] 사망 후 태종의 명으로 무학대사비가 건립되었다.[10]
- 왕십리의 유래: 무학이 조선의 새 도읍을 정하러 돌아다니다가 왕십리에 이르러 이 터가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한 노인이 소를 꾸짖으며 "꼭 무학처럼 정도(正道)로 가지 않고 굽은 길을 가려느냐?"라고 꾸짖어 서방으로 십리를 더 가 경복궁의 터를 정하였다는 전설이 있다.[11]
- 선바위 : 서울의 성곽을 쌓을 때 정도전과 무학은 선바위를 성곽 안으로 넣을지 밖으로 둘지 다투었는데 다음 날 눈이 왔다가 녹은 자리를 보고 성곽을 쌓게 되었고 결국 선바위는 성곽 밖에 놓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12]
1748년(영조 24년) 함경도 출신의 승지 위창조(魏昌祖)가 함경도 내에 있는 이성계 일가의 무덤을 조사한 '북로릉전지(北路陵殿志)'를 임금에게 바쳤다. 여기에 이자춘(이성계의 아버지)의 장지에 관한 일화가 나온다. 1360년(공민왕 9년)에 부친이 죽자 이성계는 명당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데 사제 사이의 두 승려가 명당을 두고 대화한다. 스승이 동산(東山)을 가리키며 “여기에 왕이 날 땅이 있는데 너도 아느냐?”라고 묻자 제자가 “세 갈래 중에서 가운데 낙맥(落脈)인 짧은 산기슭이 정혈(正穴)인 듯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스승은 “네가 자세히 알지 못하는구나. 사람에게 비유하면 두 손을 쓰지만 오른손이 긴요하듯이 오른편 산기슭이 진혈(眞穴)이다”고 교정해 주었다. 가동(家僮)에게 이 대화 내용을 들은 이성계는 말을 달려 뒤쫓아 함관령(咸關嶺) 밑에서 두 승려를 만났다. 이성계가 절을 하면서 간청해 ‘왕이 날’ 장지를 얻었다는 전설이다.[13]
'북로릉전지'보다 150여 년 전에 문신 차천호가 편찬한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전설이 더 자세히 기록됐다. 이성계가 두 승려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장지를 가르쳐 달라고 애걸하자 두 승려는 산에 지팡이를 꽂고 말했다. “첫째 혈에는 왕후(王侯·임금)의 조짐이 있고 둘째 혈은 장상(將相)의 자리이니 하나를 택하시오.” 이성계가 첫째 혈을 택하자 노승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라고 탓했다. 이성계가 “사람의 일이란 상(上)을 얻으려 하면 겨우 하(下)를 얻게 되는 법”이라고 변명했더니 두 승려는 웃으며 “원대로 하시오”라고 말하고 가버렸는데, 노승이 나옹(懶翁)이고 젊은 승려가 무학이라는 전설이다. 부친 장지를 다룬 이런 일화는 이성계가 만 25세 때부터 반역을 꿈꾸었다는 전설이다.
이성계와 무학이 언제부터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이 이성계의 꿈을 풀어 주면서 왕이 될 운명이라고 한 이야기가 두 사람이 급속도)로 가까워진 듯하다. 이성계가 고려 말에 홍건적과 왜구를 물리치면서 명성을 날리던 중 어느 날 밤 닭이 우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이 너무도 신기해서 친구인 무학을 찾아가 꿈을 이야기했더니 무학이 큰 절을 하면서 이제 왕이 되겠습니다라고 한 이유는 닭이 ‘꼬끼오’하고 우는데 꼬는 한자로 고(高)이고 까는 한자로 귀(貴)이고 요는 한자로 위(位)인데 이 세 마디 말을 합치면 고귀위(高貴位)인데 이는 높고 귀한 자리로 바로 왕을 뜻한다고 해석한다. 이성계는 이 꿈을 이용해 자신의 왕업을 생각하고 실천하였으며 결국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을 세웠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원동력을 제공한 사람이 무학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무학의 지위는 더욱 높아졌다. 무학은 단순히 왕과 가까운 권승(權僧)이 아니라서인지 1328년([[고려 충숙왕|충숙왕 15년)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 규모 사찰로 중창하였던 회암사(檜巖寺)는 지공과 나옹과 무학까지 여말선초 최고 선승으로 다루는데, 이런 무학은 선승으로서 풍수지리에도 해박해 서울 도성 위치를 설정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13][14]
나옹선사 청산은 나를 보고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聊無愛而無憎兮 (료무애이무증혜) 사랑도 벗어 놓고 미움도 벗어 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2연
靑山兮要我以無語 (청산혜요아이무어)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蒼空兮要我以無垢 (창공혜요아이무구)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聊無怒而無惜兮 (료무노이무석혜) 성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 놓고
如水如風而終我 (여수여풍이종아)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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