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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다윗왕과 태조 이성계의 역린삶/참고자료2022-04-15 본문
역린(逆鱗)이란 일반적으로 왕의 노여움을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 말의 출처를 보면 한비자 세난편에 나오는 말로
"용이란 짐승은 잘 친해지기만 하면 올라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목 아래에 직경 한 자쯤 되는 역린(逆鱗)이 있어 만약 그것을 건드리면 반드시 사람을 죽이고 만다. 임금 또한 역린이 있다. 유세하는 사람이 임금의 역린만 건드리지 않는다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비바람을 몰고 오는 능력을 가진 용도 역린이 있습니다.
이 역린을 잘못 건드리면 용이 죽기 때문에 역린을 건드린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과 조선의 왕 이성계에게는 아들에 의한 반역이라는 용의 목에 거꾸로 돋아난 역린과 같은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이 두사람의 생애와 아들들에 의한 반역을 살펴보면서 깨달음을 얻고자 합니다.
1. 왕이 되기 전 다윗과 이성계의 상황
구약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다윗은 이새의 아들로 젊은 시절에는 아버지의 양을 돌보던 목동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에게 어느날 선지자 사무엘이 찾아와서 왕이 될 것이라고 말하고 당시의 관례에 따라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이 정신병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신하들의 추천으로 왕궁에 들어가 수금을 연주해서 사울왕의 정신병을 고치기도 합니다.
다윗은 뛰어난 수금 연주자였을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 시편에 기록된 많은 시들을 지었습니다.
또 스스로 자기를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삼하23:1)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뛰어난 음악가라는 말이지요.
당시 이스라엘은 불레셋과 전쟁을 벌였는데 이 전쟁에서 다윗은 적장 골리앗을 죽이는 대단한 일을 해서 백성들의 인기를 얻게 됩니다.
이후에도 여러 전장에서 수많은 무공을 세웁니다.
뛰어난 군사전략가란 말이지요.
하지만 이로 인해 사울왕의 견제를 받게 되고 살해의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사울이 그를 죽이려고 하자 광야로 도망가서 숨기도 하고 이웃 나라로 망명을 하기도 합니다.
도피 생활 중에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두번이나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은 왕을 죽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죽이지 않습니다.
광야에서의 도피 생활이 다윗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쟁에서 사울이 그 아들 요나단과 함께 죽은 후에 다윗은 왕으로 등극하게 됩니다.
* * * * * * *
이성계는 고려의 무장이었습니다.
용비어천가에 따르면 해동육룡의 첫번째 용인 이안사는 원나라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명나라가 떠오르면서 원나라의 힘은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그 틈을 타 공민왕은 반원 정책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공민왕의 정책에 적극 협조해서 고려의 벼슬을 얻게 되었고 이성계도 아버지를 따라 고려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위화도 회군으로 세력이 커진 이성계는 친명세력들과 함께 우왕과 최영을 몰아내고 권력을 쥐게 됩니다.
그후 왕으로 등극하고 나라 이름도 조선으로 바꿉니다.
2. 압살롬과 방원
다윗은 여러 아내들에게서 자녀들을 얻었습니다.
다윗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인 암논이 이복누이인 다말을 강간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동복 남매인 압살롬은 이 사실을 알고도 바로 복수하지 않고 때를 기다립니다.
2년 후 양털 깎는 축제에 형제들을 초청합니다.
이때 참석한 암논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자신은 외할아버지가 있는 그술로 도망가 3년을 지냅니다.
아들을 그리워하는 다윗의 마음을 알아차린 신하 요압의 기지로 압살롬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다윗은 압살롬의 얼굴을 보려하지 않습니다.
2년이나 예루살렘에 살았지만 아버지나 요압도 자기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요압의 밭에 불을 지르자 화가 나서 달려 온 요압에게 아버지를 만나게 해달라고 해서 겨우 아버지의 용서를 받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벌써 압살롬은 반역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압살롬은 아주 잘 생긴 사람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 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 (삼하14:25)"
백성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착실히 준비한 후 옛 수도이며 자기의 고향인 헤브론으로 가서 반란을 준비하고 아버지의 신하들까지 초청해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때 압살롬에게 온 인물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습니다.
그는 다윗의 오른팔과 같은 유능한 참모였습니다.
그도 다윗을 배반하고 압살롬에게로 왔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빼앗은 그 아내 밧세바의 할아버지였습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밧세바를 빼앗은 것이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로 간 원인이 되었을까요?
아히도벨의 조언에 따라 압살롬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니 다윗과 남은 신하들은 그를 따르는 백성들을 데리고 도망을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히도벨은 압살롬에게 이런 조언도 합니다.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이르되 왕의 아버지가 남겨 두어 왕궁을 지키게 한 후궁들과 더불어 동침하소서 그리하면 왕께서 왕의 아버지가 미워하는 바 됨을 온 이스라엘이 들으리니 왕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의 힘이 더욱 강하여지리이다 하니라 (삼하16:21)"
이런 아히도벨의 조언은 다윗에게는 말할 수 없는 모욕이고 압살롬에게는 아버지의 여자들을 범하라고 하는 것이니까 이런 불효가 없습니다.
하지만 압살롬은 아히도벨의 조언에 따라 옥상에 장막을 치고 온 이스라엘 무리들이 보는 가운데 백주대낮에 왕궁을 지키라고 남겨둔 왕의 후궁들과 동침하는 패륜을 저지릅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몰래 데려와 동침하고 충직한 신하 우리야를 전장에 내 보내 죽이라는 밀지를 전했지만 압살롬은 만인이 보는 가운데 이런 일을 행합니다.
다윗은 자기의 잘못을 이렇게도 벌받는 것 같습니다.
다윗에게 남은 신하들 가운데는 오랜 친구인 아비아달과 대제사장 사독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도 사울의 살해 위험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광야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다윗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가 고생을 하게 됩니다.
다행히 다윗이 압살롬의 진영에 심어 둔 참모 후새의 도움으로 안전을 확보한 다윗은 마하나임으로 왕실 군대를 불러모아 전쟁에 대비합니다.
다윗의 뛰어난 장군 요압은 왕을 성에 남겨두고 압살롬과 싸우러 전장으로 떠납니다.
이때 다윗은 요압에게 압살롬이 반역을 하긴 했지만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배신한 아들이지만 아버지인 다윗은 아들을 걱정합니다.
하지만 요압은 다윗의 부탁을 져버리고 압살롬을 죽입니다.
이렇게 압살롬의 반역이 진압되자 다윗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이후 요압이 월권을 많이 하지만 당장은 어찌할 수 없었던 다윗은 죽기 전에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합니다.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결국 요압은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요압이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한 이유는 솔로몬의 형
아도니야의 반란 때 그가 아도니야 편에 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도니야는 다윗이 늙고 힘이 없어지자 왕위를 노리게 됩니다.
그래서 에느로겔 근방 소헬렛 바위 곁에서 왕자들과 신하들을 초청하여 왕이 되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요압은 솔로몬의 편에 서지 않고 아도니야의 편에 섭니다.
하지만 다윗이 솔로몬을 기혼으로 보내 왕으로 선포하고 백성들도 그를 지지하게 됩니다.
그러자 아도니야는 솔로몬에게 살려달라고 빕니다.
이때 솔로몬은 선한 사람이면 죽지 않을 것이고 악한 것이 보이면 죽으리라고 말합니다.
이후 아도니야는 어리석게도 아버지 다윗의 노후에 그를 보살피던 수넴 여인 아비삭을 자기 아내로 달라고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에게 청을 넣습니다.
아도니야의 어머니는 학깃입니다.
어머니로부터 이 부탁을 전해들은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왕권에 대한 야심을 눈치채고 그를 죽입니다.
* * * * * * *
태조 이성계의 아들 방원은 무인의 기질이 강하지만 고려 시대에 이미 진사과와 문과에도 합격한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성계가 방원이 과거에 합격하자 무인 집안에서 문과에 합격한 아들이 나타났다고 자랑하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조선을 개국할 때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런데 그는 개국 공신에도 들지 못하고 세자 책봉에서도 밀려났습니다.
태조에게는 전 왕비 한씨(韓氏) 소생의 여섯 아들과 계비 강씨(康氏) 소생의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태조 즉위 초의 세자 책봉에서 태조는 막내 방석을 세자로 세웁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방원은 강씨의 두 아들과 그를 지지하는 신하들을 죽이게 됩니다.
이때 조선 개국의 최대 공신인 정도전도 죽게 됩니다.
이상이 1차 왕자의 난입니다.
방석이 죽고 세자로 추대되지만 대의 명분을 위해 형 방과에게 양보해서 방과가 왕으로 즉위합니다.
이가 조선의 제 2대 왕 정종입니다.
그 후 형 방간이 왕위를 노리다가 방원에게 제거당하는 사건이 2차 왕자의 난입니다.
그 후 1400년에 형 정종의 양위를 받아 방원은 조선의 제 3대 왕 태종이 됩니다.
방원에게 실권을 빼앗긴 태조는 서울을 떠나 함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아버지가 함흥으로 떠나자 방원은 명분을 위해 다시 아버지를 서울로 모셔오기 위해 신하들을 보내지만 보내는 신하들은 돌아오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깁니다.
이 무렵 발생한 조사의의 난과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태조가 방원을 죽이려고 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요압 장군에게 압살롬을 살려달라고 부탁하는 다윗과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돌아오니, 태종이 교외에 나가서 친히 맞이하면서 성대히 장막을 설치하였다. 하륜 등이 아뢰기를, "상왕의 노여움이 아직 다 풀어지지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로 기둥을 만들었다. 양전이 서로 만나자, 태조가 바라보고 노한 얼굴빛으로 동궁에 백우전을 힘껏 당겨서 쏘았다. 태종이 급히 차일 기둥 뒤에 몸을 가려 화살이 기둥에 맞았다. 태조가 웃으면서 노기를 풀고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고 옥새를 주면서 이르기를, "네가 갖고 싶어하는것이 이것이니 이제 가지고 가라." 하였다. 태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다가 받았다. 마침내 잔치를 열고 태종이 잔을 받들어 헌수하려할때 하륜 등이 몰래 아뢰기를 "친히 하지 말고 내시에게 주어 드리시오." 하므로, 태종이 또 그 말대로 하여 내시가 잔을 올렸다. 태조가 다 마시고 웃으면서 소매 속에서 쇠방망이를 꺼내 놓으면서 이르기를, "모두가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였다."
- 연려실기술 1권 태조조 고사본말 축수편 -
3. 아히도벨과 정도전
다윗과 태조에게는 뛰어난 참모들이 있었으니 아히도벨과 정도전입니다.
아히도벨은 얼마나 뛰어났던지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에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사람이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은 것이라 아히도벨의 모든 계략은 다윗에게나 압살롬에게나 그와 같이 여겨졌더라 (삼하16:23)"
이렇게 뛰어난 참모가 배반하고 압살롬에게로 가버렸으니 다윗의 충격이 아주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뛰어난 그의 계획도 하나님이 방해하니 물거품이 됩니다.
압살롬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고 다윗은 도망을 간 직후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다윗이 신하들도 부족하고 힘이 없는 오늘 밤에 당장 추격해서 다윗을 죽이자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압살롬의 무리에 심어둔 후새의 의견은 다윗이 워낙 뛰어난 군사 전략가이고 그 신하들도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 추격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자고 말합니다.
아히도벨의 계략이 당연히 옳은 것이었지만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삼하17:14)"
자기의 계략이 채택되지 않자 아히도벨은 고향으로 돌아가 목매어 자살함으로 생애를 마칩니다.
아히도벨의 죽음을 보면 우리야의 죽음 이후 아히도벨이 계획적으로 다윗을 도우면서 복수할 기회를 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자 다윗의 심복이었으면서도 압살롬의 편에 섰고 압살롬이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고 후새의 의견을 받아들이자 고향으로 내려가 집안을 정리하고 자살한 것을 보면 더 이상 어떻게 다윗에게 복수할 방법이 없자 스스로 실망해서 목숨을 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또 다른 생각은 자기의 계략을 받아들이지 않은 압살롬을 보면서 압살롬이 패할 것을 예견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히도벨은 결국 다윗에게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생각입니다.
* * * * * * *
삼봉 정도전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결정적인 영향력과 도움을 준 참모입니다.
다윗에게 아히도벨이 중요한 참모였던 것 못지않게 삼봉도 이성계에게 중요한 인물이었습니다.
건국 과정에서 부터 나라의 법제를 만들고(조선경국전) 수도를 결정, 설계하고 왕궁의 건축과 정치 시스템을 만드는 것까지 거의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가 왕세자를 방석으로 정할 마음이 있는 것을 눈치채고 방원과 경쟁관계가 됩니다.
당시 왕자들은 사병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없애서 중앙군으로 포함시키려고 했습니다.
방원은 세자로도 책봉이 되지 못했는데 사병까지 빼앗기면 완전히 세력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삼봉을 제거할 마음을 먹고 준비를 합니다.
삼봉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챘겠지만 방원이 그렇게 빨리 거사를 일으킬 줄은 몰랐던 것 같습니다.
1차 왕자의 난 때 삼봉도 제거됩니다.
남은의 애첩 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방원의 부하들에게 남은, 심효생등과 함께 죽임을 당합니다.
이날의 급박한 상황을 실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승자의 입장에서 기록한 내용이니 아래 글의 사실여부는 읽는 사람이 판단할 일입니다.
"정도전 등이 밤낮으로 송현에 있는 남은의 첩의 집에 모여서 서로 비밀히 모의하니 정안군 이방원의 부인이 여종 소근을 불러 빨리 대궐에서 집으로 오라 했다. 정도전 일파의 흉한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미 대군들의 사병을 혁파한 뒤지만 부인이 몰래 숨겨둔 무기가 있어 정안군을 따르는 자들을 소집했다. 이숙번과 익안군, 상당군, 회안군 부자도 또한 말을 타고 따랐으며 이거이, 조영무, 신극례, 서익, 문익, 심귀령 등도 함께했다.
그때 정도전과 남은 등은 송현에서 등불을 밝히고 모여 앉아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화살 세 발을 신호로 소근이 불을 지르고 이웃집 세 곳도 함께 불을 질렀다. 이에 정도전은 도망하여 숨었으나, 심효생, 이근, 장지화 등은 모두 참살당했다.
이웃집 민부라는 전판사가 정도전이 자기 집으로 들어왔다고 고하자 정안군이 그를 잡아오게 했다. 정도전은 자그마한 칼을 쥐고 걸음을 걷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 소근 등이 꾸짖어 칼을 버리게 하니, 도전이 칼을 던지고 문밖에 나왔다. 정도전은 "공이 나를 살린 적이 있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주오"라고 사정했지만 정안군은 그를 목 베게 했다.
정도전에게는 아들 네 명이 있었는데, 정유와 정영은 변고가 났다는 말을 듣고 급함을 구원하러 가다가 유병(遊兵)에게 살해되고, 정담은 자기 집에서 목을 찔러 죽었다."
삼봉은 죽기 직전에 이런 절명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절박한 순간에 이런 시를 남겼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조심하고 조심하여 공력을 다해 살면서 책 속에 담긴 성현의 말씀 저버리지 않았네. 삼십 년 긴 세월 고난 속에 쌓아놓은 사업 송현방 정자 한잔 술에 그만 허사가 되었네. - 정도전, "
이렇게 허무하게 정도전은 권력의 정점에서 갑자기 생을 마칩니다.
아히도벨이 집으로 돌아가 정리하고 자살한 것과는 최후가 많이 다릅니다.
* * * * * *
다윗과 이성계의 공통점과 다른 점을 살펴 보겠습니다.
다윗은 죽기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솔로몬에게 제거해야 할 사람들을 알려줍니다.
요압과 시므이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게 두지 말고 피가운데 내려가게 하라고 유언을 남깁니다.
다윗의 유언을 실천한 덕분에 솔로몬의 나라는 견고해집니다.
"솔로몬이 그의 아버지 다윗의 왕위에 앉으니 그의 나라가 심히 견고하니라.(왕상 2:13)"
태조는 아들에게 왕권을 빼앗겼지만 그의 아들 태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전에 미리 왕권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외척들인 민씨 형제들과 세종의 처가인 심온을 제거합니다.
그래서 세종은 평생 왕권에 위협을 느끼지 않고 정치에 온 힘을 기울여 한글도 창제하고 성군으로 남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유혈 혁명으로 왕권을 차지했지만 정적들을 미리 제거해 준 아버지 덕분에 아들 세종은 비교적 안정된 통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
이성계는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았고 조선 왕조 내내 이이졌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유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모세가 전해 준 야훼의 율법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후손들에게도 야훼의 율법을 잘 지키라고 명했습니다.
하지만 아들과 후대의 왕들은 다읫의 명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후대의 왕들이 야훼를 섬기지 않고 이방신을 섬길 때마다 이스라엘은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
이성계는 방원이 왕이 되고 난 후에도 그를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광야로 피난 가서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 있는 상황에서도 요압이 압살롬과 싸우러 나갈 때 아들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부탁합니다.
아들에 대한 사랑이 달라서일까요?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이 울부짖는 모습이 눈에 보이듯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삼하18:33)"
◇◇◇◇◇
이성계에게 1,2차 왕자의 난이 있었던 것처럼 다윗에게도 1,2차 왕자의 난이 있었습니다.
1차 왕자의 난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압살롬의 반역이었고 2차 왕자의 난은 아도니야가 아버지 다윗의 허락도 없이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공포한 사건입니다.
다윗이 이 소식을 접하고 재빨리 솔로몬에게 양위했기 때문에 일단락되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아도니야는 왕위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못하다가 솔로몬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어머니인 밧세바에게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이르되 당신도 아시는 바이거니와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권이 돌아가 내 아우의 것이 되었음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음이니이다 (왕상2:15)"
다윗은 아도니야에게 왕권을 물려주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도 아도니야가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솔로몬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버지의 여자였던 아비삭을 자기에게 달라고 한 것은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솔로몬의 대답은 아래와 같습니다.
"여호와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되 아도니야가 이런 말을 하였은즉 그의 생명을 잃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심이 마땅하니이다 (왕상2:23)"
결국 아도니야는 적절치 못한 언행으로 목숨을 잃게 됩니다.
◇◇◇◇◇
다윗의 일생을 살펴보면 사울왕과 아들 압살롬에 의한 죽음의 공포와 수많은 전쟁에서 느꼈을 죽음의 공포가 느껴집니다.
젊은 시절 다윗은 집안에서도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왕이 될 아들이 있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갔을 때 이새는 다른 아들들은 다 불렀지만 다윗은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만큼 집안에서도 무시당하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울의 정신병을 치료하러 사울의 궁에 들어갔을 때도 사울이 수금을 연주하고 있는 그를 두번이나 창으로 죽이려고 했습니다.
정신병이 도질 때마다 다윗은 수금을 연주하면서도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것 같습니다.
사울의 사위가 된 후에도 침상에 누워있는 그를 죽이려고도 했습니다.
이후 사울을 피해 광야로 나갔을 때는 또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광야는 거친 자연의 힘 앞에 인간의 연약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나라 가드로 망명했을 때의 다윗은 또 어떠했겠습니까.
오죽하면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면서" 미친 사람처럼 행동했겠습니까?(삼상 21:13)
이 장면을 보면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포로로 잡혀 있었을 때 의심을 피하고 살아남기 위해 부차의 대변을 맛보면서까지 굴욕을 참고 와신상담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압살롬의 반역 때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배신당하는 심정이 어땠을까요?
늙고 힘 없이 누워 있는데 아도니야가 또 허락도 없이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 선포했을 때 그리고 달려온 밧세바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윗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이런 수많은 어려움과 생명의 위험 가운데 다윗의 신앙은 굳건해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산성, 구원의 뿔, 반석, 요새, 나를 지키시는 자등으로 부릅니다.
이 모든 말들은 다윗의 생생한 경험에서 나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련을 통해서 사람은 단련되고 강해진다고 합니다만
다윗같은 시련을 견디고도 분노하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기가 쉽지 않지요.
태조 이성계도 젊은 시절 원나라나 홍건적, 왜구들과의 싸움으로 생명의 위험을 느낀 적이 많습니다.
방원의 반란으로 사랑하는 아들들과 심복을 잃고 노여움과 실망감을 겪고 여기 저기 떠돌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오기는 하지만 마음 속에 치솟는 분노를 쉽게 누를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노년에는 그래도 기록들을 보면 다 내려놓고 어느 정도 마음을 안정시킨 것 같은 기록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주자학의 가르침이 자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었을까요?
귄력을 잡는 것도 어렵지만 유지하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권력은 나눌 수 없는 것이고 지키기 위해서는 피를 나눈 형제도 죽여야 할 만큼 무섭고 잔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오늘도 이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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