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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최초의 비애의 기억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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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최초의 비애의 기억

singingman 2023. 9. 8.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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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최초로 맛본 비애의 기억은 앞뒤에 아무런 사건도 없이 외따로인 채 다만 풍경만 있다.
엄마 등에 업혀 있었다.
막내라 커서도 어른들에게 잘 업혔으니 다섯 살 때쯤이 아니었을까.
저녁 노을이 유난히 새빨갰다.
하늘이 낭자하게 피를 흘리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을의 풍경도 어둡지도 밝지도 않고 그냥 딴 동네 같았다.
정답던 사람도 모닥불을 통해서 보면 낯설듯이.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는 내 갑작스러운 울음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 또한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건 순수한 비애였다.
그와 유사한 체험은 그 후에도 또 있었다.
바람이 유난히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저녁나절 동무들과 헤어져 홀로 집으로 돌아올 때, 홍시 빛깔의 잔광이 남아 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텃밭머리에서 너울대는 수수이삭을 바라볼 때의 비애를 무엇에 비길까.

  그때만 해도 엄마 등에 업혔을 때하고는 달리 서러움을 적당히 고조시키고 싶어 꾀까지 썼다. 어떡하면 저 수수이삭의 건들댐이 더 슬프고 쓸쓸하게 보일까, 그 적당한 시점을 잡느라 키를 낮춰 보기도 하고 고개를 요리조리 돌려 보기도 하다가 풀숲에 아예 누워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가슴에 고인 슬픔이 눈물이 되어 흐르길 가만히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