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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남양주 금선사 24.11.7 본문

Temple tour

남양주 금선사 24.11.7

singingman 2024. 11. 7.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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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에서 우연히 이 절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블로그에 보니  이 절은 대한 불교 일붕 선교종의 사찰로 일붕(一朋) 서경보(徐京保) 스님이 1988년 조계종에서 나와 창건한 불교의 한 종파라고 한다.
김교각 스님 때문에 지장전이 특벌한 절이다.

조경이 아주 잘 된 절 같아서 가게 되었다.
이 절은 신라 왕자 김교각 스님과 인연이 깊은 절인 것 같다.
김교각은 신라 왕자이면서 당나라로 유학 가서 깨달음을 얻고 그곳에서 죽었다.
지장왕이란 별명을 얻을 만큼 중생제도에 힘썼다고 한다.
그래서 혹자는 당나라 사람들이 '고선지는 몰라도 김교각은 안다'고 말한다고 한다.

이 절에도 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특이한 점은 이 절의 조경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이다.
1991년 홍산 스님에 의해 창건되어
현재도 불사가 진행 중이라고 하는데 이 스님은 조경이 전공인가?
지금까지 내가 본 절 가운데 가장 현대적인 감각과 세련미가 넘치는 절이다.

갈 때는 운길산역에 내려서 걸어가고 돌아 올 때는 땡큐58 - 3번 버스 타고 운길산역으로 왔다.
버스타고 오는 사람은 백월리 종점에 내려서 한 20여분 1km 남짓한 길을 걸어 올라가야 금선사에 도착한다.


'물의 정원'길 따라 이렇게 걸어갔다.

https://song419.tistory.com/m/4441

남양주 물의 정원

경의 중앙선 운길산역에 내리면 바로 앞에 이 정원이 있다. 북한강변에 정원을 만들어서 여러 가지 꽃들을 심었다. 지금은 황화코스모스가 거의 다 지고 조금 남아 있다. 강가에 심어진 수양 버

song419.tistory.com


여기서 왼쪽에 있는 산쪽으로 올라간다



백월산금선사라고 적혀있고 그 위에는 불모산무지무득원이라고 적혀 있다.



절로 올라 가는 길





천왕문



천왕문 안에 사천왕이 없고 텅 비어 있다.









조각된 석주도 있고






여긴 뭘까?









이게 새로 만든 천왕문이라고? 이 안에 사천왕이 있다.


다른 사람의 블로그를 보니 삼계 즉, 욕계, 색계, 무색계를 형상화 한 것이라고.
안에 있는 사천왕은 최근에 만들었는지 색상이 아주 깨끗하다.





광목, 다문 천왕



지국,증장 천왕



이 탑 주위에 해자처럼 물을 둘렀다. 향수해를 나타내는 걸까?



올라가는 길







북두칠성이 있으니 칠성각인가?





불상을 이렇게 만들 생각을 히다니 아이디어가 신선하다.



와불 위에 석가모니불이 있다.



사진으로는 이 멋진 공간을 표현할 수 없다. 와서 직접 봐야 한다.





김교각지장왕수법기장이라고 쓰여 있다. 김교각 스님의 법기운을 받는 곳이란 뜻인가?



불교에 정통한 제자에게 물어봤더니 대각금선은 석가모니의 다른 이름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가 대웅전이네.


송나라 휘종이 도교에 심취해 있었을 때 불교를 비하하는 표현으로 석가모니를 신선에 비유해 대각금선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아래는 대각금선 내부.
석가모니불이 없고 보살이 앉아 있다.

김교각 스님일까?

아래는 https://m.blog.naver.com/bestsilk에서 퍼 온 글

"구화산에서 처음 불법을 열고 지장신앙을 펼친 사람이 신라승 김교각이었다. ‘化成寺記’나 ‘宋高僧傳’에 따르면, 그는 신라 성덕왕의 장남으로 태어나 당으로 유학을 떠난 후 승려가 되어 10여년 동안 중국 전역을 헤메다가 구화산에 이르렀다. 최초의 九化山人이 되어 삼발이 솥단지 하나에 白土少米(그 지방에서 나는 하얀 흙에 쌀을 조금 넣어 끓인 죽)로 연명하면서 고행을 하는 김교각 스님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절을 지어주니, 이것이 구화산 최초의 사찰인 구화사이다.

김교각 스님은 앞장서 산을 개간하고 직접 베를 짜서 옷을 지어 입고 수행하면서, 한편으로는 신라에서 가져간 벼와 차를 심어 생활이 어려운 백성들을 돌보았다. 이런 스님을 보고 사람들은 김지장이라 부르며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숭배하였다.

마침내 794년 7월의 마지막날, 스님은 제자들을 불러



      “내가 죽으면 화장하지 말고 돌함에 넣었다가 3년 후에 꺼내보아라. 그리고

      만약 그 때까지 썩지 않았거든 내 몸에 금칠을 하여라”



는 유언을 남기고 가부좌를 한 채 열반하였다.

그 날 ‘산이 울리고 돌들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으며 종을 쳐도 종소리가 울리지 않았다.’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3년이 지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돌함을 열었더니, 김교각 스님은 열반하던 모습 그대로 마치 잠이라도 든 듯하여, 피부는 탄력이 있었고, 뼈에서는 쇳소리가 났다. 이것을 보살의 증거로 보아, 몸에 금칠을 하여 탑에 모시니, 바로 구화산 기원정사의 육신보전(月身殿: 肉身을 모신 전각이란 뜻이지만 고승의 몸에 肉자를 쑬 수 없어 月로 썼다 함)이다.

육신보전은 2층 건물 내부에 7층의 석탑을 세우고, 그 안에 다시 3층 목탑을 세었는데, 그 목탑 안에 금칠을 한 김교각 스님의 등신불을 모셨다.

소식을 들은 당의 숙종황제는 김교각 스님을 지장보살의 현신이라 숭배하여, '화성사'란 편액과 ‘지장이생보인’이란 글자가 새겨진 金印을 내렸으니, 이로써 김교각 스님은 지장왕보살(地藏王菩薩)로 공인을 받은 셈이었다.

이후 明나라의 무화스님이 다시 이곳에서 등신불이 되니 숭정황제는 옥인(玉印)과 백세궁(百歲宮)이란 편액을 내려, 무화스님이 김지장(교각 스님)보살의 보신불이 되었음을 인정하였다.

1991년에는 자명스님이 비구니로서는 처음으로 등신불이 되는 등 구화사에서 9위의 등신불이 탄생하자, 중국은 물론 전세계에서 지장보살의 자비와 원력에 의지하려는 수많은 불자들이 모여들게 되어, 구화산은 중국 유일의 등신불의 고장이자 지장신앙의 본거지가 되었다."



무슨 말인지 누가 해석 좀...







지장전의 이름이 대원본전이다. 지장보살이 지옥의 모든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대원을 세웠기 때문에 그를 대원본존이라 부르고 그래서 전각 이름도 대원본전?




지장전 근처에는 소각장이 있다.



명상길인가?



아래는 대원본전 내부



닷집이 엄청 멋있다.

지장보살과 모세와 바울

지장경에 의하면 지장보살은 성불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지옥의 마지막 중생까지도 다 구원하여 성불하게 한 뒤에야 비로소 자신도 성불하리라는 엄숙한 서원을 세웠다.
그래서 지옥의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기까지 성불을 미루고 있다.
지금도 절에 가면 지장전에 지장보살상이 명부의 무독귀왕이나 염라대왕등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다.
끝없는 자비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출애굽기 32장 31-32절 (개역개정)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자기가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모세의 기도가 있다.

"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아뢰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어 싸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위의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아래 있었을 때 모세가 산에서 오랫동안 내려오지 않자 그들이 금송아지 신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우상 숭배하고 온갖 난잡한 일을 저지른 것을 보고 모세가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비는  기도다.

또 신약에는 바울이 자기 형제와 친척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이 저주를 받더라도 좋다는 기도가 있다.

로마서 9장 1-3절 (개역개정)
"1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내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2 내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위 세 사람은 자신의 행복보다는 타인의 행복을 더 우선한 사람들이다.
이타심이 최고도로 발휘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이들은 불교가 가르치는 자비와 기독교가 가르치는 사랑을 가장 완전하게 실천한 사람들이다.

수행이나 교육으로 가능할까?

모세의 경우는 성품이 온유했다.

민수기 12장 3절에 의하면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온유하다고 해서 내세의 구원까지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모세는 그렇게 했다.

또 모세는 애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사도행전 7장 22절에 의하면
"모세가 애굽 사람의 모든 지혜를 배워 그의 말과 하는 일들이 능하더라."

애굽의 왕자로 자랐으니까 최고의 교육을 받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바와 같이 교육의 힘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희생시킬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자기 형제와 친척들을 위해서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구원받기를 원했다.
여기서 형제와 친척은 이스라엘 백성들, 곧 자기 민족을 가르킨다.
어떻게 이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바울도 모세처럼 당시 최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22장 3절에 의하면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당시 가말리엘은 유대 최고의 학자였고 그에게서 배웠다는 것은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는 뜻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서울대 출신이라는 뜻이다.
또 그가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할 당시의 직책은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지금의 검찰총장 정도의 고위직이었다고 한다.

또 빌립보서 3장 5~6절에 의하면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세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자신이 받은 교육과 자신의 신앙에 따라 철저하게 산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만난 후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자기가 옳다고 믿었던 유대교의 교리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던 바울이 이제는 자기가 만난 예수님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고 복음을 전했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보듯이 자기 민족을 위해 최고의 가치인 내세의 구원까지도 포기하고자 했다.

모세도 호렙산 불붙은 떨기나무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후 변한다.
자기가 도망쳐 나온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시키는 큰 일을 하게 된다.

위 세 사람이 이렇게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수행이나 교육의 영향이 어느 정도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모세와 바울의 삶을 돌아보면 가장 중요한 요인은 이들이 하나님을 만나 변화되었고 진심으로 남을 내 몸같이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을 수 밖에 없다.



금고와 징





단청을 하지 않았다.







삼성각



삼성각 안에 있는 산신, 독성,칠성


백송



약사전 가는 길



약사전



약사전 앞에도 연못처럼 물을 가두었다.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아주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이렇게 잘 활용하고 있다.







이 절 스님은 조경의 대가다





북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초승달 모양의 연못과 주위의 소나무가 아주 잘 어울리는 멋진 풍경이다. 사진으로는 표현이 안 된다.







이런 길을 통해 절의 건물들로 올라간다







이 탑이 삼계를 나타낸다고?



뭔가를 또 만들고 있다.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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