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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8·15에 못 다한 말ㅡ이 치욕의 장, 무지인가 무관심인가? 본문
조 형 균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 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 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 지로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
(시편 137편)
분해서 찢어버리고 싶은 조국의 치욕의 역사를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칠까?
모교에 돌아온 지 얼마 아니 되어 역사교사가 된 것을 후회한 함석헌은 그 기막힌 겨레의 놓여있는 상황 속에서 깊은 고민과 기도와 사색 끝에 정금과 같이 단련되어 나온 고난사관을 10여 인의 신앙동지들 앞에서 이야기한 책『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서문에, 그 때 그 심정을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했다.
“그 때는 우리가 우리의 거문고를 바빌론 시냇가 언덕 위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 놓던 때” 라고.
아! 그때 그 일들
바빌론에 잡혀간 이스라엘은 우리를 사로잡은 자, 우리를 황폐케 한 자가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불러서 자기들을 기쁘게 해 달라고 하지만 어찌 그럴 수 있으랴,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을 지로다……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 지로다” 하면서 이렇게 노래했건만, 그때 그 시절에 우리의 자화상은 어땠을까?
우리는 어떤 노래를 어떻게 부르고 있었을까?
우선 그 실태를 생각나는 대로 적어 보기로 하자.
〔1〕우선, 팔도강산 누구에게나 친숙했던, 우리의 동심이 담뿍 담긴 노래 ‘달아달아 밝은 달아’로 시작해 보기로 하자.
♬“달아달아 밝은 달아 /
이태백이 놀든 달아 /
저기 저기 저 달 속에 /
계수나무 박혔으니 /
옥도끼로 찍어내고 /
금도끼로 다듬어서 /
초가삼간 집을 짓고 /
양친 부모 모셔다 가 /
천년만년 살고지고 /
천년만년 살고지고"
이 노래는 우리 어린이들의 소박한 정서가 그대로 배어 있는 전통 3박자의 노래곡조로 되어 있음은 독자들은 누구나 잘 알며 지금도 그 노래 말을 떠올리기만 하면 아마 저절로 입 속에서 흥얼거림이 나올 터이다.
그런데 내가 초등학교 4~5학년쯤 되었을까?
하루는 누이동생이 학교에서 돌아오더니 신바람이 나서 그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는 2/4박자의 다음과 같은 곡조였다. 그 노래를 가르친 담임선생은 키가 훤칠하게 크고 눈망울이 큰 한국 분이었는데 미술에 소질이 있어 교내 학예회 때에는 무대 배경 그림을 도맡아 그리던 선생님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그분이 ‘달아달아’ 노래를 왜 그렇게 가르쳤을까?
전통민요 곡조가 너무도 얌전하고 순해 빠져서 씩씩하게 기를 북돋아주려는 마음에서 그랬을까?
그럼 그 곡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해방 이듬해 가을, 대학에 들어간 필자는 뜻밖에도 신입생 환영회에서 그 노래곡조를 다시 듣게 되었다.
여흥 순서 막바지에 학장 되시는 D모 교수님을 거의 강제하다시피 하여 단 위에다 모셨는데 그 분 입에서 나온 것이다.
그분은 도쿄대 출신으로 꽤 연만하셨는데 식물 분류학에서는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권위자라는 소문이었다.
“내가 뭐 노래를 알아야지”, “이거나 부를 수밖에” 하시더니, ♬“학도야 학도야 청년학도야…” 하시는데 그 곡조가 어딘지 내 귀에 낯익은 곡이 아닌가?
‘학도가’ㅡ 그것은 우리나라 개화기에 청운의 꿈을 품고 시간을 아끼며 면학에 힘쓰던 젊은이들 사이에서 애창되던 노래다. 박찬호 저『한국 가요사(1895-1945)』에 의하면 이 노래는 1910년 이전의 노래로서 작사자와 작곡자 미상의 ‘창가(唱歌)’라고 되어 있다. 그 가사 전체는 다음과 같다.
1. 학도야 학도야 청년 학도야 壁上의 卦鍾을 들어 보아라
少年은 易老에 學難成하니 一寸光陰도 不可輕일세
2. 청산 속에 묻힌 玉도 갈아야만 光彩나고
落落長松 큰 나무도 깎아야만 동량되네
3. 공부하는 청년들아 너의 직분 잊지 마라
새벽달은 넘어 가고 東天朝日 비쳐 온다
좋은 노래다. 그럼 작자는 미상이라고 치자.
노래 곡조는?
여러 해 전 필자는 일본에 신간선이 개통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오사까에서 그것을 타고 도쿄역 가까이에 오고 있을 때였다.
그런데 종점이 가까워지자 음악이 흘러나오는데 바로 그 노래의 제4단 부분이 흘러나오고 있지 않은가?
결국 이 노래 곡조는 바로 메이지 개화기에 일본이 처음으로 철도를 부설하여 신바시(新橋)역에서 요꼬하마(橫濱) 방향으로 개통되었을 때 지은 노래라는 것이다.
이 노래의 정식 명칭은 ‘철도창가-東海道編’이고 가사는 신바시에서 고오베(神戶)까지 도중의 중요 경치와 역들을 묘사하는 4행시 66절이나 되는 지리교육용 노래라는 이야기다.
작사자는 大和田建樹, 작곡자는 多 梅稚이다.
1900년 5월에 제정된 ‘지리교육 철도창가 제1집’이며, 그 후 제5집까지 나왔다.
그런데 경북 안동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는 나의 친구 한 사람은 그 곡조를 듣더니 더 기막힌 이야기가 나왔다.
안동에서 성경학교에 다니시던 어머니에게서 배운 노래인데 신구약 성경을 창세기에서 묵시록까지 외우도록 그 곡조에 붙여서 ♬“창세기 출애굽기…”하고 불렀다지 않는가.
앞서의 그 ‘철도창가’가 지리학습용으로 가사를 지은 것이라면 그 아이디어를 살려서 66권 성경 이름 암송용으로 쓰는 것도 좋은 착상이라고 일단은 밝은(?) 마음으로 확실한 증거 자료를 찾아보니 과연 ‘복음성가’(후술)라는 책 35장에 ‘신구약 성경 목록가’라는 것이 버젓이 실려 있지 않은가?
바로 그 곡조로.
아니 그런데!
그날 우연한 기회에 일본의 친지와 전화통화가 되었는데 물어보았더니, 상대방 하는 말이 자기네도 중학생 때 그 철도가 곡조로 된 가사로 성경 이름 암송노래를 배워 지금도 잘 써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의 미숀 학교 출신이다.
이렇게 까지 철저히...하면서 뒷맛이 씁쓸했다.
〔2〕고당(古堂) 조만식 선생은 오산학교 교장으로 3.1운동에 앞장서 옥살이를 하신 분이요,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여 옥중 순교한 주기철(朱基徹) 목사님이 시무한 평양 산정현(山亭峴)교회의 장로로서 신사참배에 항거하여 교회 문에 대못을 쳐 폐문 자폭의 길을 택한 분임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평소에 조선물산장려회, 관서체육회, 을지문덕장군묘 수보회 등을 이끄셨으며, 일제 말 이른바 당국의 학병 권유 연설 압력을 피하여 고향인 강서군(江西郡) 반석면 반일리 내동(조씨 집성촌)에 피신해 계시다 해방을 맞았다.
공산당의 회유에 끝까지 항거, 고려호텔에 감금당하다 6·25 때 (50년 10월) 피살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당선생의 물산장려운동과 관련된 일화가 참 많지만 무릎 위로 올라가는 짤막한 그리고 옷고름 없는 단추 두루마기는 그분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 있었다.
물산장려운동 노래를 들어보기로 하자.
물산장려운동 노래
1. 산에서 구리 나고 바다에 고기, 들에서 쌀이 나고 면화도 난다
먹고 남고 입고 남고 쓰고도 남을, 물건을 낳아주는 삼천리강산
물건을 낳아주는 삼천리강산
2. 조선의 동포들아 이천만민아, 두 팔 걷고 두 발 걷고 나아오너라
우리가 우리를 우리 되도록,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
우리가 만들어서 우리가 쓰자
여기 2절의 “우리가 우리를 우리 되도록”은 바로 씨의 자주 독립정신을 말하는 기가 막힌 표현이 아니더냐.
그런데 이 노래의 곡조는 어떻게 되었는가?
아뿔싸!
그만 아깝게도 당시 불패를 자랑하던 일본 해군의 ‘군함 마취’ 즉 군함행진곡(鳥山 啓 작사, 瀨戶口 藤吉 작곡, 1897년경 작, 1910 개작) 이 아니던가?
옥의 티라면 옥의 티다.
고당 선생님이 이것을 아셨을까?
주위에 보좌하는 청년들(?)에게 문제가 있다면 있었을 게다.
아니,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너희는 그렇게 부르느냐, 우린 이렇게 부른다”는 일종의 저항 심리의 나타남으로 그랬을까? 그럼, 저들의 노래가사를 우선 보자.
1절에,
“지킴이나 공격이나 검은 쇳덩이 /
떠-있는 성-이여 믿음직하다 /
떠-있는 저 성은 해 뜨는 근본- /
황국의 사방을 지킬 지니라 /
참쇠로- 된- 저- 배 해 뜨는 나라에 /
맞서는 나-라를 공격할지라”,
이렇게 되어 있으니...쯧쯧
〔3〕해방이 되었다.
이제부터 치욕의 장은 더 심각하게 제 얼굴에 침 뱉기로 시작된다.
왜냐하면 이제 압제자는 물러갔고 핑계 댈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더 심각하게’란 무슨 말인가, 그 치욕스런 일이 바로 야하웨 신을 섬긴다는 기독교계의 이마빼기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 사연은 이렇다.
해방 후 언제인가, 하루는 누군가가 집으로 돌아오더니 부흥회 참석의 감격담을 이야기하는데, 어떤 일제 때 경찰 출신이 해방이 되자 과거를 뉘우치고 회개하여 아예 부흥사가 됐는데 노래까지 지어서 소개하는 것을 함께 불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곡조는 바로 전에 잠깐 내 귀에 스쳐 지나가 알고 있는 청일전쟁 때 일본 해군의 노래가 아니더냐?
나는 얼른 못 들을 걸 들었다는 심정으로 귓가에서 지워버리고 말았다.
허유(許由)가 천하를 물려주겠다는 요(堯) 임금의 말을 듣고는 더러운 말을 들었다며 얼른 강가에 나가 자기 귀를 씻었다는 이야기 모양으로…. 그런데 하필이면 그 망령된 곡조가 함 선생님 소천되신 후 처음이요 마지막으로 모인 하기 수양회 자리에서 튀어나올 줄이야!
그 수양회는 89년 8월 11일에서 14일까지 3박 4일의 일정으로 불광동에 있는 기독교 수양관에서 있었다.
‘씨을 생각한다’ 라는 주제의 그 모임은 함 선생님을 추모하는 뜻의 모임이었고 그래서 일본에서도 여러 분이 참석하였다. 8·15가 목전에 와있는 때라 13일엔가 식사 후 잠간의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나는 8·15를 회상하면서 노래 하나를 소개하게 되었다.
♬“잊으랴 잊을소냐 /
해방의 이 날- /
삼천만 가슴마다 /
넘치 는 기쁨- /
이제는- 한 맘으로- /
힘을 합하야- /
이보다 더 좋은 날- /
다가-오도록-”
그 작사자는 지금 알 길이 없으나 작곡자는 일제 때 ‘바위고개’를 지은 이흥렬 씨였다.
해방 1주년 기념식은 배재중학 운동장에서 열렸으며, 이 노래를 배재중학 합창단이 처음 불러 소개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도 뜻이 깊은 노래다.
우리는 낙제생이다.
막간을 이용해서 이 노래를 소개한 것은 당시 전체 진행책임을 맡은 처지였으므로 8·15를 앞두고 조금이라도 수양회를 뜻있게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진행자인 나에게 아무 사전 양해도 없이 한 친구가 앞으로 불쑥 튀어 나오더니 아까 그 일제 때 경찰출신 부흥강사가 지었다는 청일전쟁 곡조 노래를 신나게 청승맞게까지 하며 불러제끼는 것이 아닌가?
아뿔싸!
나는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가 없는 것을 억지로 참고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 참가자만 없었다면 당장에 한마디 했겠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꾹 참고 억지로 그 자리를 얼버무렸다.
그리고 다음 프로그램도 다 끝나기 전에 얼른 자리를 떠서 침실로 들어와 눈을 감고 누어 버렸다.
자고 있는 척하면서.
그러자 얼마 후에 같은 방을 쓰고 있는 나보다 나이 많은 일본인 두 사람이 들어오더니 자기네끼리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게 어찌된 일이지요? 엄청난 일이 벌어졌군요.” 나는 그날 밤을 한 잠도 못 자고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 친구가 불러제낀 노래란 지금 내 손에 빌려온 두 개의 부흥회용 복음성가라는 것에 모두 나와 있다.
하나는 1979년 11월 30일 초판 발행하고 81년 현재 20판을 찍어 낸 책으로 발행 및 편집인 김성혜, 발행처 영산출판사, 주소는 서울 여의도 우체국 사서함 7호로 되어 있다.
거기 제5장에 ‘부럽지 않네’라는 제목의 곡이 바로 그 것인데 그 것을 지어서 퍼뜨린 사람은 경찰출신이라니까 그렇담 김O대라는 사람일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것은 추측일 뿐 왜냐하면 이 찬송가 곡조 책에 의례히 있어야 할 악보 맨 위의 좌우는 완전히 비어있기 때문이다. 이 노래집은 총 371장으로 되어 있으며 앞서 말한 ‘신구약 성경 목록가’는 바로 이 책 35장에 들어 있다.(악보게재 생략)
또 한 권은 ‘새로운 복음성가’라는 것으로 1997년 3월 20일 발행, 편집 겸 발행인은 안양선이고 발행처는 ‘새로운 출판사’로 되어 있다.
총550장으로 된 이 책의 제40장이 바로 그 노래인데(다름쪽) 그 밖에도 50장 ‘허사가’가 같은 곡조이고, 88장 ‘요일가’라는 것은 바로 학도가 곡조다.(14쪽)
‘신구약 성경목록가’는 이 책에는 278장 ‘창세기 출애굽기’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다.
이 노래는 요새 어린이 주일학교에서도 부르고 있다고 한다.
청일전쟁 노래 곡조의 경우 두 책에 나와 있는 것을 서로 비교해 보니 곡조 자체는 후자(제40장)의 것이 비교적 원곡과 가깝고 먼저 책의 것(제5장)은 그새 또 좀 와전 변질된 것으로 보인다.
‘용감한 수병’이라는 일본 노래
1895년에 지은 이 노래는 사사끼·노부쯔나(佐佐木信綱)가 가사를 짓고 오꾸·요시노리(奧好義)가 작곡한 노래로서, 1894~95년 청일전쟁에 대승한 일본 국민들이 신바람 나게 부르던 일종의 국민가요 애창곡이다.
그 노래의 사연은 이렇다.
그 당시 황해 해전이라 불리는 해전이 두 개가 있었다.
하나는 풍도(豊島) 앞바다에서 있었던 일본 해군의 청국 군함 기습사건이요(1894년 7월 25일), 또 하나가 바로 약 두 달 후에 있은 해전으로서 일명 압록강 해전이라고도 한다.
1894년 9월 17일, 대청제국과 대일본제국과의 일대 함대간 해전인데 여순항을 본거로 한 청국의 북양합대(北洋艦隊) 총사령관 정여창(丁汝昌)과 일본 연합함대 총사령관 이또·스께유끼(伊東祐亨) 중장 간의 해전이었다.
定遠(7335톤)이라는 기함을 포함한 12척의 청국 함대 vs. 기함 松島(4278톤)가 이끄는 11척의 일본함대가 맞붙은 이 해전은 장비 면에서는 청이 우세하였으나 기동력은 오히려 배가 작은 일본측이 우세하였다 한다.
청군의 기함 정원의 30 센티 거포가 불을 뿜자 송도 갑판 위에 명중 작렬하였다.
혈전이었다.
이 해전에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3등 수병 미우라(三浦虎次郞)가 제 몸의 부상도 잊은 채 근처에 부함장 무까이야마(向山) 소장이 보이자 “각하! 적함 定遠은 가라앉았습니까?” 하고 온 힘을 다해 부르짖더라는 것이다.
부함장이 감격해 눈시울을 붉히며 “아직 가라앉진 않았지만 무력화 됐다!” 하고 알려 주자 그제야 안심하였다는 듯이 숨을 거두더라는 것이다.
♬“연기도 안보이고 구름도 없고 /
바람도 일지 않고 파도도 없네 /
거-울과 같-은 황해-는- /
흐리기 시-작한다 순-식간에”로 시작되는 이 가사는 총 10절로 되어 이 해전 전체의 스토리를 묘사하고 있다.
5, 6, 7절에 그 대화 내용이 묘사되고 8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직 그대롭니까 적함 정원은? /
그 말 한 마디는 짧을지라도 /
황국을 생각하는 온 국민의 /
마음에 길이길이 쓰여지리라” 신바람 나는 온 국민 애창의 전승가인 것이다.
우리를 식민지화하는 서곡인 이 노래가 하필이면 찬송가로 둔갑하여 해방된 자유 천지 조국에서 불려져 79년 이후만도 20판은 찍었으니 기막힌 일이 아닌가?
이것이 이 민족 이 겨레의 자화상인 것이다!
해방이라니, 그럼 무엇에 언제 묶였다가 풀려났다는 거냐?
이들 청일전쟁의 전승에 의한 우리 겨레의 노예화, 그 해전의 노래를 야하웨(야훼)의 노래로 부르다니!
아, 무지의 향연이여!
종살이가 그렇게도 미련이었나?!
청일전쟁이란 도대체 무엇이더냐?
1894년 7월 25일, 인천만의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해군이 기습공격을 감행하기 이틀 전인 7월 23일, 보병 혼성 제9여단을 주력부대로 한 약8,000명이 인천항을 기습 상륙하여 새벽에 경복궁을 공격 강점하고 국왕을 연금함으로써 시작된 것이 청일전쟁인 것이다.
이 전쟁은 일본의 한반도뿐 아니라 아시아 침략의 신호탄이었던 것이며, 그 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망까지 일본의 ‘50년 전쟁’의 시작인 것이다. (『씨마당』제23호, 졸저 ‘청일전쟁과 경복궁 점령’, ‘98년 8월호 참조)
그 전쟁의 제해권 장악 성공이 바로 이 ‘용감한 수병’의 해전인 것이다.
그럼, 이 ‘부럽지 않네’를 한 번이라도 부르지 않은 한국의 개신교인은 몇이나 될까?
차라리 이렇게 묻는 것이 세기가 빠를는지도 모르겠다.
여의도만 해도 50만 신도, 거기서 20판을 찍었다니!
이 노래가 방방곡곡에 펴져나가 전성기를 이룬 것은 80년대였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지금은 썰물이라 별로 부르지 않는데 그것은 무슨 자각이 생겨서가 아니라 요사이는 째즈 풍, 락 풍이 밀려 왔기 때문이란다.
그놈의 술집 유흥가의 키보든가 무언가가 북과 징 등과 함께 교회로 들어와 거룩한 야하웨의 노래를 부르려 하다니!
그리고 헤헤 좋다고 바라보는 삯군들의 행태여! 필자는 저 곡조를 떠올릴 때 마다, 그날 밤 일본인들의 주고 받던 말, “엄청난 일이 벌어졌군요…” 하던 소리가 아직도 귓전에 생생해 떠나질 않는다.
치욕을 모르는 이 겨레여!
거룩을 모르는 이 백성이여!
〔4〕어처구니 없는 콜사인 뮤직
새벽의 적막을 뚫고, 자유 대한의 신성한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어느 라디오 방송국의 콜싸인 뮤직, 방송 개시의 전주곡.
그런데 그것을 들을 때마다 필자는 아찔아찔, 불쾌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분노가 치밀었었다.
그 곡은 바로 일제 말기 ‘흥아(興亞) 행진곡’이라는 노래 곡조를 거의 그대로 표절한 곡이었기 때문이다.
꼬랑지만 살짝 달리한 그 곡, 그야말로 표절의 꼬리라도 감추듯이 말이다.
야비해도 이렇게까지, 더러워도 이렇게 더러울 수가 있을까?
몇 년을 그 전파가 온 우주를 향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퍼져 나가더니 어느 날 갑자기 뚝 그쳤다.
박정희 시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누가 표절임을 제보했거나, 아니면 스스로 무슨 기회에 그 방송국 자체에서 알게 됐거나 둘 중에 하나로 보인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이다.
그 곡은 이렇다.
실은 이 원곡을 손에 넣을 수가 없어서 벌써부터 쓰고 싶었던 이 글을 이제야 발표하게 되었다.
우선 그 알량한 노래말부터 소개해 보자.
‘흥아행진곡’, 작사 이마사와(今澤)·후끼꼬, 작곡 후꾸이·후미히꼬(福井文彦), 5행시 4절로 된 이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저들의 그럴듯한 침략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배어 있는 노래다.
♬“이제는 세-기-의 새-벽노-을- /
풍영(豊榮) 솟아 오르-는- /
욱-일 (旭日)-의- /
사-해(四海)에 찬란히 빛나-니 /
흥아의 사-명 두- 어깨에 /
짊어지고 섰도다- /
5억의 백성” 이것이 1절의 가사 내용이다.
그럼 그 원곡과 표절곡은? 독자들의 편의를 위하여 부득이 일본의 흥아행진곡 원본(좌)과 그 치욕의 표절곡(우)을 함께 싣기로 한다.
내가 듣던 그 콜사인 뮤직의 기억을 더듬어서.
여기서 표절곡은 그 꼬리 부분을 슬쩍 슬쩍 손질을 하였다.
원곡 꼬랑지가 올라가면 내려가고, 내려가면 올라가는 식으로.
위 악보 첫 단의 마지막 두 소절과 제2단 3소절과 4소절 시작부분을 눈 여겨 비교해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제3단도.
멀쩡하게 눈뜨고 속은 방송국의 치욕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그러느냐?
이는 그 방송국뿐 아니라 해방 조국의 한겨레 전체가 모욕을 당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도 동족에 의하여!
우리는 대동아공영권 같은 데 미련 없는 백성이다.
옛날 같으면 종로 네거리 인경 옆에 효O감이 아닌가?
이 글을 마감하며
정확히 따져서 불과 34년 하고 몇 달 동안의 종살이, 그런데 이렇게 치욕을 치욕인줄 조차 모르고 이렇게까지 허술하고, 허약하다니!
우리는 정말 종살이의 사슬을 끊은 민족인가?
민족의 예언자 함석헌은 한국 사람은 생각이 깊지 못하고 끝까지 파고 들 줄 모르는 게 험이라고 늘 탄식하셨다.
생각이 왜 옅으냐?
도시 종교가 건성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지만 역사와 현실을 너무도 예리하게 관찰하셨기에 모교에 돌아와 역사교사가 되신 것을 후회하시기까지 하셨다.
역사책을 찢어버리고 싶은 이 치욕의 역사를, 사슬에 묶였으나 그것을 끊고 나와야 할 앞길이 청청한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이것을 가르칠꼬 하면서.
그래 “버드나무 가지에 수금을 걸어 놓고” 몇몇 신앙동지들과 무릎을 맞대고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강의하셨다. 2000년을 나라 잃고 떠돌면서도 자기를 잃지 않은 이스라엘ㅡ 엄마, 아빠하고 입을 떼기 시작하자 신명기 6장 4절 이하를 먼저 가르쳐 외우게 하는 그들에 비해, 같은 야하웨를 섬긴다는 우리의 아이덴티티는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야하웨는 오직 하나인 야하웨 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야하웨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 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짐에 앉았을 때에 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 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 깥문에 기록할지니라.”
무서운 말 아닌가? 외견상은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두 겨레의 행보는 어찌 이다지도 다른고?
이 글을 준비하면서 가장 가슴 아픈 것은 해방 62주년, 지금 자라나는 금 쪽 같은 어린이 들 조차도 못난 어른들 덕분에 “우리를 사로잡은 자의 노래 가락”인줄도 모른 채 ‘신구약 성경 목록가’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려서, 나보다 하나 윗반 교실에서 부르는 노래 소리를 귓가에 들었지만, 나는 한 번도 그 노래를 배워서 불러보지 못했던,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나의 초등학교 첫 노래시간은
♬ “흰 바탕에 붉게 /
둥근 원을 물들여 /
아 아름다워라 /
일본의 깃발은” 으로 내 고막이 오염될 수밖에 없었던 나.
아직도 판치는 일제 잔재들을 말끔히 소탕하지 못한 못난 어른이 된 것을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 때 그 바람결에 들은 윗반 언니들의 노래를 기억을 더듬어 채보하여 선물한다.
♬ “초당 앞에- 금잔디는- /
따뜻한 햇빛 받-아- /
제가 혼자- 자-라난다-”
생각할수록 의미 심장한 노래 아닌가.
그래서 아마 1년 아래인 우리반에서는 이미 안 가르쳐주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주일학교가 파할 때마다 다 같이 일어서서 씩씩하게 부르던 교가, 신의주 제일교회 유년주일학교 교가도 함께 기억을 더듬어 어린이들에게 소개하고 싶다.
6, 7, 8세 때 부르던 노래다.
♬“압록강 흐-름 길-이 본받아- /
구름같이 모이는 우리 동무 들- /
죄악의 이 세상을 싸워 이기리- /
우리들은 제일의 어 린이로다- /
제일주일학-교- /
영원무궁 토록 만-만-세-”
조선조 때 소외되고 후진 변방이었지만 일찍이 기독교가 들어와 그것이 나라 잃은 백성들의 혼을 깨워주고 큰 위안과 버팀목이 되었던 한국의 갈릴리 그 곳.
주일학교 교장 선생님이 이 어린 심령들이 우상(평안신사)에 절하지 않도록 지켜달라고 눈물 흘리며 기도하시던 음성이 지금도 귓전에 생생하다.
제1교회에서 제5교회까지 발전해가던 그 고장 신의주.
제일교회는 70~80년 전인데도 취주악단을 가지고 있던 교회였다.
지금은 모두 어찌 되었을까?
이 글을 쓰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그럼 우리의 자화상은 어떤가?
얼마 전 ‘씨사상 연구회’에서 박모라는 이름의 여러 모로 생소한 인상을 주는 발표자가 질의응답 시간에 니또베·이나조(新渡戶稻造, 1862-1933)와 오까꾸라·덴신(岡倉天心, 1863-1913)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열심히 자기방어에 급급하고 있었다.
니또베는 누구이며 오까꾸라는 누구인가?
생각하건대 DNA속에 일본민족 우월의식이 꽈 차있는 것 같은 느낌의 사람이 니또베요, 그는 우리와의 관한한 적지 않이 악연의 사람이다.
그는 일본이 노일전쟁에 승리하자 “한국 처분의 문제”라는 글을 쓰는가 하면, 이또·히로부미의 초청으로 한국시찰 후 몇 편의 글을 썼는데 “저들은 20세기 또는 10세기의 인간도 아니며 1세기의 백성도 아닌 감이 있다.
저들은 실로 유사이전에 속한다”고 하는 식의 사람이다.
오까꾸라는 한술 더 뜬다.
『일본의 눈뜸』이라는 영문 저서에서 그는 “조선의 시조 단군은 일본의 시조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아들”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펴는가 하면, 조선은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원정으로 3세기에서 8세기까지 500년 동안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조선은 말하자면 일본의 ‘고유 속방(original province)'이라고 할 곳이다.
따라서 노일전쟁 후 조선을 식민지화한 것은 침략이 아니라 옛 영토를 다시 찾은 것뿐이라고 그럴 듯하게 늘어놓아 당시의 무지한 미국인들을 계몽시킨(?) 자인 것이다.
적어도 씨사상연구회는 어떤 자리인가?
거기서 감히 그런 자의 이름이 튀어나오는데도 사회자나 참석자나 아무도 반론의 제기나 양해 설명 코멘트 한 마디 없이 경청(?)하고 있음을 보고 착잡한 심정으로 자리를 떴다.
우리는 타임캡슐 속에 들어있는 민족인가?
세월은 속절없이 자꾸만 가는데 우리의 슬픈 노래는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것일까?
캡슐을 깨고 나와야 한다.
올바른 역사인식과 청산, 무지와 불감증의 극복, 이것이야말로 8·15를 맞는 우리의 책무요 과제가 아닐까?
이 글을 초함에 있어 나의 기억의 옛 노래들을 듣고 채보에 수고해 준 한 젊은 엄마의 열성과 도움이 없었다면 아마 이 슬픈 증언은 또다시 햇빛을 보지 못하고 영영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여기 깊은 고마움을 표하여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싶다. (07.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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