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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휘(避諱) 본문

참고자료

피휘(避諱)

singingman 2025. 1. 7.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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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귀한 인물이나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이런 제도를 피휘(避諱)라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관습이 기독교에서도 나타납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소리 내어 부르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름을 글로 쓸 때도 특별한 경외심을 가지고 독특한 방법으로 기록했습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는 펜이나 잉크가 따로 있기도 했습니다.
구약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는 원래 모음이 없었습니다.
모음은 후대에 마소라 학자들이 만듭니다.
하지만 교육받은 서기관들이나 성경 필사자들은 자음만 가지고도 읽고 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히브리어로 하나님의 이름은 יהוה(yahwe)입니다.
이 글자를 당시 사람들은 속으로는 히브리어 발음에 따라 야웨,  야훼, 여호아흐 등으로 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입 밖으로 소리를 내기는 주님이란 뜻의 아도나이(אדני, "주님")나 엘로힘(אלהים, "하나님)"이라고 읽었습니다.
감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이름을 비천한 인간이 함부로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해서 그랬습니다.
성경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출애굽기 20:7)

모세가 호랩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יהוה라고 하시면서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고 하셨습니다.

후에 유대인들은 이 지극히 존귀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특별한 경외심을 가지고 부르게 됩니다.
초기의 기록자들이나 필사자들은 이 이름을 명확하게 알고 불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랫동안 발음하지 않게 되고 수십 년간의  전쟁 포로기간등을 거치면서 이 이름을 읽는 방법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원래 히브리어에는 모음이 없었기 때문에 자음만 가지고 정확히 읽을 수 없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경에도 여호와 혹은 야훼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야웨(혹은, 야훼)에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문법 케텝과 케레 참조)

유교의 영향권에 있던 한, 중, 일 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이런 피휘 제도를 사용했습니다.
조선의 예를 들면 왕이나 세자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글로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왕실이 아닌 사대부들도 본명보다는 호를 즐겨 사용했습니다.
어릴 때는 부모가 지어 주는 아명을 사용했고 좀 자라면 자신이 직접 짓거나 친구들이 지어주는 호를 사용했습니다.  
본명(휘, 諱) 외에도 성인이 되었을 때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자(字)를 쓰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조선 시대 학자 퇴계 이황의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본명은 황(滉)이었습니다.

호는 자기가 살던 동네 이름이나 지형 지물에서 따 오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퇴계는 자기 동네의 개천인 토계를 퇴계로 바꾸어 사용했고 삼봉 정도전은 도담 삼봉에서 따 왔으며 삼연 김창흡은 삼부연 폭포에서 따 왔습니다.

친구들간이나 동료들 간에는 호를 가장 많이 사용했고 그것도 필요에 따라 여러 개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김정희는 추사 외에도 완당(阮堂), 시암(詩庵), 노초(老草) 등 여러 호를 사용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말할 때 예의를 갖추어서 말해야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남에게 말해야 할 때는 특별한 방법으로 말합니다.
만약 내 아들이 나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할 때는 제 부친은 성 철자 훈자를 쓰십니다.
혹은 성을 알고 있을 때는 성은 생략하고 철자 훈자를 쓰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쓰지 않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왕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의 이름을 지을 때는 가능하면 외자를 사용했습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된 우리나라 왕들의 이름은 거의 외자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이름은 일반인들은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한자에서 가져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모르고 실수로라도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미리 예방합니다.
세종대왕의 이름은 "도(祹)"이고 정조대왕의 이름은 "산(祘)"입니다.
위에서 보듯이 자주 사용하지 않는 한자를 이름으로 사용했습니다.

고종 황제는 원래 왕위 계승권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원래 이름은 재황(載晃)이었습니다.
나중에 희(㷩)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공문서나 중요한 서류에 왕의 이름 글자를 꼭 사용해야 할 경우에는 같은 뜻의 다른 한자를 사용했습니다.
이미 어떤 문서에 사용되어 있으면 이 글자를 지우고 다른 글자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위의 성경과 조선 사회의 예에서 보듯이 존귀한 사람이나 신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거나 쓰지 않는 것은 당시 그 대상에 대한 존경심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위의 관습과는 아주 다른 가르침이 나옵니다.
비록 하나님을 대놓고 바로 יהוה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너무 친근하고 가까운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로마서 8장 15절을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The Spirit you received does not make you slaves, so that you live in fear again; rather, the Spirit you received brought about your adoption to sonship.
And by him we cry, 'Abba, Father.")

위의 기록을 보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호칭인 아빠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된 헬라어에서도 어린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아빠(Αββα)라고 부릅니다.
어른들이 사용하는 아버지라는 뜻의 파테르(πατήρ)라는 단어도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이런 기록은 갈라디아서 4장 6절과 마가복음 14장 36절에도 나옵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자기들은 감히 이름도 함부로 부르거나 쓰지 못하는 데 예수라는 젊은이는 경망스럽게 아빠라고 부르고 더 나아가서 그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라고 주장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엄하고 무서운 분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한없이 자비롭고 사랑이 많은 아버지였기 때문에 아빠라고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다가 드디어는 자기가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개역개정)
"I and the Father are one."
(NIV)
(요한복음 10장 30절)

또 요한복음 8: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라고 말했습니다.

이러니 신성모독도 이 정도면 당시 유대인 지도자들로서는 더 이상 예수를 살려 둘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유대인 지도자들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불렀다는 것이 사형을 언도할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습니다.

아래의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이 사형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마 26:63-66, 개역한글]
63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64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65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저가 참람한 말을 하였으니 어찌 더 증인을 요구하리오 보라 너희가 지금 이 참람한 말을 들었도다
66 생각이 어떠하뇨 대답하여 가로되 저는 사형에 해당하니라 하고

이제 정리해 보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은 감히 이름도 부르기 어려운 위대하고 경외해야 하는 분이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예수님은 자기 아버지라고 하고, 또 자기가 하나님과 하나라고 말하니까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신성모독죄를 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하나님은 예수님께 무한히 자비롭고 사랑이 넘치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른 것뿐입니다. (갑자기 홍길동 생각이 나네요.)
유교적 관습에 젖은 우리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다소 엄하고 어려운 대상일지 몰라도, 예수님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아빠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자비롭고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이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을 너무 쉽게 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근래의 어떤 ccm에서는 하나님을 향해 2인칭 당신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아래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ccm 가사입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있는곳에
나의 마음이 있기를 원해요
아버지 당신의 눈물이 고인곳에
나의 눈물이 고이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바라보는 영혼에게
나의 두눈이 향하길 원해요
아버지 당신이 울고있는 어두운 땅에
나의 두발이 향하길 원해요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알아
내 모든뜻 아버지의 뜻이 될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알아
내 모든삶 당신의 삶 되기를 X2
나의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알아
내 모든뜻 아버지의 뜻이 될수 있기를
나의 온 몸이 아버지의 마음알아
내 모든삶 당신의 삶 되기를
내 모든삶 당신의 삶 되기를

위의 노래에서 당신이 3인칭으로 사용되었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2인칭이라면 하나님을 우리 인간이 당신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way maker라는 영어 노래에서 하나님을 you라고 노래했는데 그 가사를 우리 말로 당신이라고 번역해도 될까요?
문화적인 차이의 문제라고 할 수도 있지만 우리 말의 어감과 높임말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우리와 동급으로 부르는 당신이라는 표현이 적절할까요?

아래는 way maker 번역 가사입니다.

Way maker (길을 만드시는 주)


You are here Moving in our midst  
(당신은 우리 가운데 운행하십니다)

I worship you, I worship you  
(나 예배합니다)

You are here Working in this place  
(당신은 여기, 이 장소에서 일하십니다)

I worship you I, worship you  
(나 경배합니다)

(반복)

Way maker Miracle worker Promise keeper Light in the darkness  
(길을 만드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분, 어둠속을 밝히는 빛)

My God That is who you are  
(나의 하나님 그것이 당신입니다)

Way maker Miracle worker Promise keeper Light in the darkness  
(길을 만드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분, 어둠속을 밝히는 빛)

My God That is who you are  
(나의 하나님 그것이 당신입니다)

You are here Touching every heart  
(모든 마음을 만지는 당신이 여기 함께 합니다)

I worship you, I worship you  
(나 예배합니다)

You are here Healing every heart  
(모든 영혼을 치유하는 당신이 여기 계십니다)

I worship you, I worship you  
(나 경배합니다)

You are here Turning lives around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당신이 여기 함께 합니다)

I worship you, I worship you  
(나 예배합니다)

You are here Mending every heart  
(우리 마음을 고치시는 당신이 여기 함께 합니다)

I worship you, I worship you  
(나 경배합니다)


Way maker Miracle worker Promise keeper Light in the darkness  
(길을 만드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분, 어둠속을 밝히는 빛)

My God That is who you are  
(나의 하나님 그것이 당신입니다)

Way maker Miracle worker Promise keeper Light in the darkness  
(길을 만드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분, 어둠속을 밝히는 빛)

My God That is who you are  
(나의 하나님 그것이 당신입니다)


You wipe away all tears
(당신은 모든 눈물을 닦아주고)

You mend the broken heart You’re the answer to it all  
(상처받은 마음을 고쳐주는 당신은 모든것에 대한 답입니다)

Jesus
(예수님)

You wipe away all tears  
(당신은 모든 눈물을 닦아주고)

You mend the broken heart You’re the answer to it all (to it all)  
(상처받은 마음을 고쳐주는 당신은 모든것에 대한 답입니다)

Jesus
(예수님)


Way maker Miracle worker Promise keeper Light in the darkness  
(길을 만드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분, 어둠속을 밝히는 빛)

My God That is who you are  
(나의 하나님 그것이 당신입니다)

Way maker Miracle worker Promise keeper Light in the darkness  
(길을 만드시고 기적을 행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분, 어둠속을 밝히는 빛)

My God That is who you are  
(나의 하나님 그것이 당신입니다)

You are here Touching every life
(모든 삶을 감동시키는 당신이 여기 계십니다)

I worship you, I worship you  
(나 예배합니다)

You are here Meeting every need  
(모든 필요를 충족하는 당신이 여기 계십니다)

I worship you I worship you
(나 경배합니다)

[Way Maker - Leeland]

하나님을 너무 어려워해서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친밀감이 너무 심해서 하나님을 당신이라고 동급이나 혹은 낮춰 부르는 것도 문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