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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권 이덕일 저 김영사 2010년 1판 27쇄 278쪽 ~05.2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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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1권 이덕일 저 김영사 2010년 1판 27쇄 278쪽 ~05.24

singingman 2025. 5. 24.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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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다.
이승훈은 다산의 자형이다.
정약현의 처남은 한국 천주교의 개국 성조라 불리는 광암 이벽이었고,
약현의 딸 명련의 남편은 유명한 백서 사건의 주인공 황사영이었다.
약황의 누이는 남인영수 채제공의 서자 최홍근에게 시집가 파란을 겪는다.  사형당하거나 귀양가고 또는 노비로 전락하는 것이 이들의 운명이었다.
역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형제자매 모두가 이런 운명에 처해진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그만큼 남다른 형제들이고 남다른 시대였다.

정약용은 정조 14년 (1790년) 2월 우상 채제공이 주관한 권점에서 김이교, 윤지눌 등과 함께 뽑혔다.
뒤 이어 치러지는 한림소시에 급제하면 예문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한 대간의 사정으로 법칙을 어겼다라고 나서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채제공과 정약용, 윤지눌 등이 모두 남인인 것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
일단 대간의 탄핵을 받으면 혐의가 사실이든 아니든 사퇴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에 정약용과 다른 권점자들 모두 한림 소시를 거부했다.
정조는 격노했다.
노론에서 장악하고 있는 대간의 탄핵 때문에 그만둔다면 앞으로 어떤 벼슬도 사흘을 못 넘기리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정조는 반드시 입궐에 시험을 보라는 엄한 교시를 내렸다.
정약용 등이 입궐하자 정조는 액예 (궁중 잡무를 맡은 하인)에게 오지동이를 가져다주게 했다.
답안을 내지 않으면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날씨는 춥고 밤이 깊어 할 수 없이 답안을 냈는데 정조는 답안을 채점해 정약용과 김이교를 뽑았다.
숙배하고 물러난 정약용은 새벽에 상소문을 올려 사퇴했다.
정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그는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자 정조는 정약용을 해미로 귀양보냈다.
10여일 귀양살이를 했다.

정약용이 태학생으로 있던 정조 9 년 (1785)봄 형조의  금리들은 명례방(서울 명동)을 지나다가 우연히 이상한 집회를 목격했다.
중인 김범우의 집으로 여러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렸다.
금리들은 노름 현장으로 의심해서 들이닥쳤다.
집안에서는 이상한 의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양반 한 명이 중앙에 앉아서 무언가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가 바로 이벽이었다.
중인 집에 있는 양반은 이벽뿐이 아니었다. 이승훈과 권일신, 권상학 부자, 그리고 정약전, 정약종 형제도 있었다.
금리들은 현장에서 천주교 서적과 화상들을 압수해 형조에 바쳤다.
이것이 조선 천주교인의 실체가 정부기관에 의해 최초로 발각된 이른바 을사추조 적발 사건이었다.

이기경은 동문수학한 친구였으나 천주교 문제로 다산과 완전히 결별하고 적이 된다.
이가환은 대단한 천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