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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은 누구인가? 본문
아래의 글은
http://blog.daum.net/osh48/3341657에서 복사해왔다.
혜정법사慧净法师는 1950년 대만의 남시南市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서당에서 교육을 받아 중국의 전통문화에 대해 깊이 기초를 닦았다. 성년이 된 이후로는 불교에 귀의하여 즐겨 경을 독송하고 염불하기를 좋아했다.1977년 불광산의 성운星雲대사에게 출가했는데, 법명은 심엄心严, 별호는 혜정이라 했다.
1985년 봄에 성운대사에게 청하여 홀로 자주산自住山에 가서 3년간 수행했다. 이때 염불을 위주로 하였으며, ?인광대사문초印光大师文钞?를 읽고 정토에 관한 글을 저술했다. 또한 일본의 법연대사가 쓴 ?선택본원염불집选择本愿念佛集?을 연구함으로써, 정토법문은 마땅히 선도대사의 가르침이 가장 순수하고 바르다는 것을 알았다.
1988년 가을부터는 일본 교토京都에 있는 오오타니 대학大谷大學으로 유학하여 선도대사 계열의 정토사상을 연구하였다. 1993년 여름에 타이완으로 돌아와 선도대사의 정토법문을 펴기 시작했으며, 수차례 홍콩, 마카오, 중국과 뉴질랜드 등지에서 홍법하였다.2003년 이후로 타이베이 상산象山의 수행 지구에서 주석했는데, 이후로 상산은 하루 종일 염불하는 ‘미타촌彌陀村’이 되어갔으며 대만 내에서 ‘정토종 선도류’의 총본산이 되었다.
혜정법사의 인품은 순박하고 인정이 두터우며, 꾸밈이 없고 검소하며, 하루 종일 염불을 그치지 않고 계속하시는 스님이시다. 그분은 자신의 전 생애를 정토법문에 투신했는데, 그러한 인품의 특성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사람들에게 비할 바 없이 큰 감화력을 주고 있다.혜정법사의 저술은 ?선도대사전집?, ?법연상인전집?, ?염불감응록? 등 20여 가지의 책이 있는데, 근본 종지는 모두 선도대사께서 가르치는, 아미타불의 구제하심을 믿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것이다. 또한 혜정법사는 2013년 두 차례나 한국에 초청받아 와서 한국의 정토염불행자들을 위한 법문을 해주었다
아미타불은 어떤 부처님이신가?
혜정慧淨 법사
2006년 10월 하문廈門에서의 법문 / 원왕생願往生 번역
여러 법사님들과 연우님들, 나무아미타불!
저는 대만에서 왔으며, 어릴 때부터 대만에서 태어나고 자랐기에 역시 민남어(闽南话: 복건성 남부와 광동성 동부 및 대만에서 쓰는 방언)로 말합니다. 이곳 하문 지방은 제가 일찍이 와보고 싶어 했던 곳입니다. 왜냐하면 저의 선조들이 복건 장주漳州와 하문 일대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오늘 선조들이 뿌리내렸던 고향에 돌아올 수 있게 되어 기쁨과 슬픔이 교차하는 것이, 몹시 감회가 깊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절반 이상의 사람들은 모두 민남어를 알아들을 수 있기에, 오늘 우리들은 서로 간에 친밀하고 느긋하며 자유롭고 활기찬 방식으로 우리들의 공통 관심사인 불법을 논의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불법은 매우 광대하여 이른바 팔만사천법문, 심지어 한량없는 법문이 있습니다. 법문이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제대로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불법이 중국에 전해진 뒤에 조사님들은 이를 여덟 가지 큰 종파(八大宗派)로 귀결시키고자 했습니다. 이 팔대 종파 가운데 예로부터 지금까지 가장 보편화되어 있고, 오래토록 쇠퇴하지 않으며, 세월이 흐를수록 늘 새로워지는 것이 바로 정토법문입니다.
정토법문, 다시 말해 정토종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법문입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불교의 교리를 모른다 하더라도 한 구절 ‘아미타불’ 은 누구나 다 알고 있고, 출가인과 마주치면 ‘아미타불’하고 부를 줄도 알며, 설령 불교 교리를 전혀 모르는 비불교도라 해도 불교를 배우는 사람이나 출가 대중을 만나면 모두 ‘아미타불’을 떠올리게 됩니다. 여기서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은 불교 안팎의 모든 사람들이 익숙할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미타불은 어떠한 부처님이십니까? (이에 대해) 오늘 저는 사(事: 현실)와 이(理: 이치)의 두 방면으로 구별하여 설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미타불은 본원本願을 성취하신 부처님이시다.
2. 아미타불은 중생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이시다.
3. 아미타불은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 부처님이시다.
4. 아미타불은 임종 때 맞이하러 오시는 부처님이시다.
1, 아미타불은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다
아미타불이 나무아미타불이 되신 까닭은 그 부처님의 본원本願 때문입니다. 만약 아미타불께서 본원이 없으셨다면 이처럼 위대한, 능히 우리들을 구제하실 수 있는 부처님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한 분 한 분의 부처님들이 성불하신 까닭은 각 부처님마다의 본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미타불의 본원은 다른 모든 부처님들과는 차별이 있으시니, 이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에게는 없는 것이자 시방의 모든 부처님들을 뛰어넘는 본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뒤에, 당신의 본원에 의하여 성취하신 큰 힘은 특별히 수승하고 광대하며 넓고 깊다는 것입니다.
‘본원’은 ‘총원總願’과 ‘별원別願’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본원에서의 ‘본本’ 역시 ‘인본(因本: 인지因地의 본원)’과 ‘근본(根本: 주요한 본원)’의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본원’이란 두 글자부터 먼저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한 분 한 분의 부처님은 성불하시기 전에 모두가 반드시 먼저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발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불문의 제자들은 매일 부처님 앞에서 ‘참회문懺悔文’을 읽으면서 자기의 죄업을 참회함과 동시에 보리심을 발發합니다. 발보리심發菩提心이란 사실상 바로 이 사홍서원이라는 게송을 소리 내어 읽는 것입니다.
“가없는 중생을 제도하길 서원합니다. 다함없는 번뇌를 끊기를 서원합니다. 한량없는 법문을 배우기를 서원합니다. 위없는 불도를 이루기를 서원합니다(眾生無邊誓願度, 煩惱無盡誓願斷, 法門無量誓願學, 佛道無上誓願成).” 이것은 모든 부처님들이 똑같이 발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홍서원’은 ‘총원’에 속하며, 한 분 한 분의 보살님과 부처님에게 다 통합니다.
그러나 ‘별원’에 있어서는 각자 같지가 않습니다. 예컨대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500가지 원願을 발하셨고, 약사불께는 12가지 원이 있으시고, 아미타불께는 48대원이 있으신 것 등입니다. ?무량수경? 중에 아미타불께서 “나는 세상을 초월하는 원을 세우리라(我建超世願)”고 말씀하신 뜻은, 아미타불의 그 당시 발원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발원을 뛰어넘고 시방의 모든 부처님에게는 없는 원이라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불께서 아미타불을 소개하실 때에도 “모든 부처님을 뛰어넘는 발원(發願逾諸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아미타불께서 발하신 48원은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의 원을 초월하는 원이라는 것입니다. ?무량수경?에는 아미타불께서 발원하신 시간이 얼마나 오래되었다고 나옵니까? 경에서 (석가모니불께서) 말씀하시길 “5겁 동안이나 충분하게 불국토를 장엄하고 청정하게 할 행을 사유하여 선택하셨느니라(具足五劫, 思惟攝取, 莊嚴佛國, 清淨之行)”고 하셨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어떻게 하면 아주 간단하고 쉽게 시방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시방중생들이 한 번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빨리 성불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을 상세하게 고려하시고 계획하셨는데,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아미타불께서는 5겁이나 되는 기나긴 시간 동안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주도면밀하게 사유하셨던 것입니다.
발원을 한 뒤에, 만약 계속하여 공덕을 쌓기 위해 육도만행六度萬行도 닦고 널리 무량한 법문을 배우지 않는다면 이런 발원은 헛된 발원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미타불께서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공덕을 쌓으셨겠습니까? 경(?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불가사의한 조재영겁의 세월 동안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고 심으셨다(於不可思議兆載永劫, 積植菩薩無量德行)”고 하셨습니다. 불가사의한 조재영겁이라는 그렇게 기나긴 시간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공덕을 쌓으신 것입니다.
‘조兆’와 ‘재載’라는 이 두 가지 숫자는 모두 매우 큰 숫자입니다. ‘조’는 그런대로 우리들이 상상할 수 있지만 ‘재’에
이르면, 중국의 숫자 중에서 ‘재’보다 더 큰 숫자는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조재’ 이외에 또한 ‘영永’이 있는데, 이 숫자라면 더욱 깁니다. ‘영’은 영원하다는 것으로 시간을 초월합니다. ‘겁劫’은 천문학적인 숫자이지만 그래도 헤아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불가사의한 조재영겁’에서 ‘불가사의’라는 네 글자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른바 ‘불가사의’는 말할 수도 없고 일컬을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이처럼 오랜 시간 동안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으시고 나서 비로소 당신이 세우신 48대원을 완성할 수 있으셨는데, 모든 원 하나 하나가 진실로 원만하게 구족했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이러한 48대원을 완성하시기 위하여 그렇게 기나긴 시간을 거치셨는데, 이 기나긴 시간 동안 다른 부처님들은 인지因地에서부터 수행을 시작하여 불과를 증득하시고, 다시 과지果地에서 되돌아와 널리 중생을 제도하시고는 열반에 드셨지만, 아미타불께서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수행을 하고 계셨고 여전히 중생을 위하여 공덕을 쌓고 계셨습니다.
왜 48대원을 그렇게 긴 시간 동안이나 사유하셨을까요? 왜 48대원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그렇게 긴 시간(수행)이 필요하셨을까요? 이것은 48대원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근본 원’을 철저하게 성취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인지因地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인지에서 세운 48대원은 하나하나의 원이 모두 인지의 본원이지만, 그 가운데 가장 근본이 되는 원이 있으니, 바로 제18원입니다. 무엇 때문에 정토법문에서 아미타불의 본원을 말할 때엔 전부 제18원을 지목하는 걸까요? 왜냐하면 48원 가운데에 만약 제18원이 없다면 48원은 귀하고 수승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며, 오직 제18원이 있어야 비로소 아미타불의 48원의 귀중함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제18원은 시방세계 중생들을 구제해야 할 원입니다. 시방세계 중생의 범위는 한없이 넓어 이른바 ‘십법계十法界’의 중생이 있습니다. ‘십법계’는 사성법계(四聖法界: 불‧보살‧연각‧성문)와 여섯 가지 범부법계(凡夫法界: 천도‧아수라도‧인도‧지옥‧아귀‧축생)를 포함합니다.
사성법계는 이미 범부를 초월하여 성인의 경지에 들어(超凡入聖)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생사윤회를 하지 않는 성자들이며, 다른 여섯 가지 법계는 아직도 육도 가운데서 생사윤회를 하고 있는 범부들입니다. 이 십법계 가운데서 불법계를 제외한 나머지 구법계의 유정들은 모두가 다 아미타불의 구제의 대상이니, 이것이 바로 제18원이 구제하는 시방세계 중생입니다.
제18원은 정토법문의 근본입니다. 단지 아미타불의 본원일 뿐만 아니라,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의 본마음(本懷)이기도 하며, 심지어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권장하시고 칭찬하시고 호념하시는 원이기도 합니다.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미래 세상에 불도가 멸하고 경전이 다 없어진다 해도, 나는 자비한 마음으로 가엽게 여겨 특별히 이 경전만은 백 년 동안 세상에 더 머물게 할 것이니, 그 중생들 가운데 이 경전을 만나는 이는 원하는 바에 따라서 모두 구제받을 수 있을 것이다(當來之世 經道滅盡 我以慈悲哀湣 特留此經 止住百歲 其有眾生 值斯經者 隨意所願 皆可得度).”
석가모니부처님의 이 말씀은, 제18원의 아미타불의 구제 법문이 영원히 우주 가운데 보존되어, 설령 앞전의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다음의 부처님께서 아직 인간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법문이 영원히 세상에 널리 퍼질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18원은 모두 서른여섯 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서른여섯 글자를 여러분들이 외울 수 있으면 되도록 외우십시오.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 이 법문의 근본으로 가히 아미타불의 생명이요, 또한 우리들의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18원이 있었기 때문에 법장비구가 아미타불이 되실 수 있었으며, 제18원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금생에 생사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합장하시기 바랍니다. 제18원의 서른여섯 글자를, 우리들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한 번 독송하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제가 부처가 될 적에 시방세계 중생이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며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불러서 만약 왕생하지 못한다면 정각을 취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역죄를 범하는 사람이나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은 제외합니다(設我得佛 十方眾生 至心信樂 欲生我國 乃至十念 若不生者 不取正覺 唯除五逆 誹謗正法).”
합장을 푸십시오.
이 서른여섯 글자는 아미타불께서 당신 자신이 품고 계신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신(自我發露) 중요한 내용으로서, 당신의 성불은 시방세계 중생을 구제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므로,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여 한결같이 ‘나무아미타불’이란 만덕홍명을 부르기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이 중생이 금생에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하시겠다는 내용입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라도, 아미타불께서 그 중생을 극락세계로 왕생토록 하지 못한다면 아미타불께서는 성불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만약 왕생하지 못하는 중생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당신의 능력이 아직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았고, 아직 성불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모든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도록 충분한 능력을 갖출 때까지 더욱더 수행을 해야 하고, 더욱더 공덕을 쌓아야만 비로소 성불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다른 부처님이 된다는 것은 그나마 쉬운 편입니다. 삼대아승지겁이면 충분하니까요. 이른바 “삼대아승지겁 동안 복과 지혜를 닦고, 백겁 동안 상호를 장엄한다(三祇修福慧 百劫種相好)”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아미타불이라 하는 이 부처님께서 조재영겁의 시간을 거치면서 보살의 무량한 공덕을 쌓아 비로소 성불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께서 보편적이면서도 간편하고 쉽게 모든 중생을 구제하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반드시 이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구제 대상은 ‘시방세계의 중생’입니다. 우리들 사바세계에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貪嗔痴)이 특별히 왕성하고 강하며, 죄업이 유난히 깊고 무거운 범부들도 전부 아미타불께서 구제해야 할 대상입니다. 시방세계 중생에는 성인과 범부가 포함되어 있고, 범부에는 선인과 악인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리고 아비지옥의 중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아미타불의 구제는 분별이 없고 평등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성인과 범부, 선인과 악인, 출가자와 재가자, 수행을 잘하는 자나 못하는 자나, 마음이 청정한 자나 청정하지 못한 자나 관계없이 모두가 다 아미타불께서 구제해야 하는 대상입니다. 어느 중생이든 극락에 왕생하기를 원하고,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념하기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반드시 그를 왕생하도록 해주십니다.
그렇다면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구제하시는 조건은 무엇일까요?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구제하시는 조건은 매우 간단합니다. 바로 제18원에서 말씀하신,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며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면(至心信樂 欲生我國 乃至十念)”이니, 이렇게만 하면 곧바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至心信樂)”에서 “지극한 마음(至心)”은 바로 경건하고 정성스런 마음이며 진실한 마음입니다. 우리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마음은 진실되고 정성스러워야 합니다. 입으로는 왕생해야 한다고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도리어 왕생할 생각이 없거나, 혹은 장래에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 복을 누리기를 바란다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지극한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이 “지극한 마음”에는 “기쁘게 믿고(信樂)”가 포함되어 있고, “극락세계에 왕생하고자 하는(欲生極樂世界)” 마음이 포함되어 있으며,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불러서(乃至十念)”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모두 진실한 마음(眞心)이 필요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만약 진실한 마음이 없다면 바로 겉치레의 호의일 뿐이니. 그렇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고 존재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삼계육도의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이 중요한 큰일에 어떻게 진실한 마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간단히 말해,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해주시는 조건은 바로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며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至心信樂 欲生我國 乃至十念)” 것입니다. “지극한 마음”이란 이 두 글자는 “기쁘게 믿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고자 바라며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관통하고 있습니다. “기쁘게 믿고(信樂)”는 바로 ‘믿음(信)’이고, “나의 나라에 왕생하기를 바라며”는 바로 극락왕생을 원하는 ‘발원(願)’이며,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 염불은 바로 ‘수행(行)’입니다. 그러므로 “기쁘게 믿고”는 바로 “기쁘게 믿고 왕생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여기에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더하면 바로 ‘신信‧원願‧행行’(삼자량)이 됩니다. 여기서 제18원은 신‧원‧행을 다 갖추고 있으며, “지극한 마음”은 신‧원‧행을 관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지극한 마음”란 곧 진실한 마음眞心이니, 우리들이 극락세계가 있음을 믿고 아미타불이 계심을 믿는다는 것은, 반드시 진심으로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극락세계가 있고 아미타불이 계신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스스로 그다지 확신하지 못하고 마음속으로 의문을 품는다면 그것은 “지극한 마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극락세계가 있음을 믿고, 아미타불께서 계신다는 것을 믿으며,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극락세계가 우리의 마지막 종착점임을 믿는 것이니, 이것을 모두 진정으로 믿어야 합니다. 아미타불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며 “너는 나의 극락세계로 왕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우리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바로 “나는 극락세계에 왕생할 것을 발원한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제하여 극락세계로 데려가신다는 것은 진심이니, 우리가 극락세계로 왕생하려는 발원도 진심이어야 하며, 남을 따라서 단지 회향게만 읽어선 안 됩니다.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름(乃至十念)”이란 바로 지금 이후로 우리에게 하루의 시간이 있으면 하루 동안 염불하고, 이틀의 시간이 있으면 이틀 동안 염불하며, 이레의 시간이 있으면 이레 동안 염불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렛날에 수명이 다하면 바로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만약 수명이 연장되어 여드렛날이 되면 여드렛날 동안 염불하며, 만약 8년 혹은 80년을 더 산다면 한평생 동안 오로지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만을 불러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법문을 빌려 (정토로) 회향할 필요가 없이, 염불을 하는 즉시 왕생의 공덕이 모두 갖추어지게 됩니다.
제18원에서는 믿음과 발원과 수행(신信‧원願‧행行)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믿음(信)’이 바로 “지극한 마음으로 기쁘게 믿는(至心信樂)” 것이라면, “나의 나라에 왕생하기를 바라며(欲生我國)”는 무엇일까요? 아미타부처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들이 당신의 구제를 받아 극락세계로 갈 수 있도록 매순간 우리들을 부르면서 우리들에게 부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미타불께서 “나의 나라에 왕생하기를 바라며(欲生我國)”라고 말씀하신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중생들의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바로 “저 나라에 왕생하기를 원하는(願生彼國)” 것인데, 서방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하여 아미타불의 부름과 구제에 따르는 것이 곧 ‘발원(願)’입니다. ‘수행(行)’은 “내지 열 번만이라도 내 이름을 부름(乃至十念)”으로, 지금 이후로 오직 한마음으로 나무아미타불만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 비록 우리와 구제의 조건을 맺으셨다 해도, 이 구제의 조건은 사실 거의 조건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고 받아들여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발원하고, 그 뒤로는 우리에게 얼마간의 시간이 남아 있으면 얼마간의 시간 동안만 염불을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염불할 때에는 번뇌가 있건 없건, 망상잡념이 있건 없건 관계없이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우리에게 단지 이와 같은 조건만을 정해주셨기 때문에, 비록 조건이 있다 해도 거의 조건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돈을 지불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어떠한 손실도 없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가장 간단한 것이어서, 우리가 말만 할 줄 알면 염불도 할 수 있습니다. 단지 말을 하듯이 염불을 하라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염불하고 극락왕생을 원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간단하고 쉽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닐뿐더러 밑질 것도 없습니다. 특히 우리가 염불하는 시간에는 비교적 망상잡념 등의 번뇌가 없으니, 이러한 염불은 우리를 더욱 홀가분하게 해줍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중들: 그렇습니다.)
만약 번뇌가 생길 때나 혹은 몸이 아프고 마음이 매우 답답할 때, 염불을 하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마음이 평온해지게 됩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아미타불께서 이 한 구절 부처님 명호를 부르라고 하신 것은 우리에게 오직 이로움만 있을 뿐 해로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대중들: 그렇습니다.)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것은 극락을 그리워하고 왕생을 원하는 일종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 자체는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많은 시간과 금전이 필요 없을 뿐만 아니라 노력을 들일 필요도 없고, 동시에 본전을 까먹거나 손해를 볼 일도 없습니다. 극락왕생은 오직 백 가지 이익만이 있을 뿐, 손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기를 하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비록 극락세계가 있음을 그다지 믿지 못하고 극락세계가 있음을 확신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나는 여전히 극락왕생을 원할 것입니다. 왜냐고요? 만약 진짜로 생사윤회가 없고 극락세계가 없다고 해도 본전을 잃거나 손해를 보는 어떠한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약 생사윤회가 있고 극락세계가 있다면 공짜로 이득을 본 게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그 이익은 계산할 방법이 없는, 우주에서 가장 큰 선근과 가장 큰 복덕을 전부 얻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진짜로 극락세계가 있다면 우리는 극락세계에 왕생함으로써 틀림없이 삼계육도의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게 되고,
틀림없이 성불을 하게 되며, 틀림없이 부처님과 같은 무량한 수명‧무량한 광명‧무량한 지혜‧무량한 자비를 갖게 되고, 아미타불과 같은 48대원을 갖추고서 타방세계‧시방세계‧무량세계에 분신으로 가서 널리 중생구제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하나의 왕생을 원하는 마음으로 큰 이익을 얻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비록 우리들이 범부여서 마음의 힘이 매우 약하고 어리석고 번뇌가 깊고 무거울지라도, 우리들이 단지 극락세계에 왕생하려는 이 하나의 발원만 있다면 이 원은 바로 큰 원(大願)입니다. 왜일까요? 왜냐하면 이 하나의 원이 능히 우리를 왕생하여 성불케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원이 없다면 우리들은 계속 육도에 윤회할 것이고, 만약 이 원이 없다면 가장 큰 선근과 가장 큰 복덕을 잃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자면, 우리들이 아미타불의 구제를 믿는 이 하나의 믿음은 ‘큰 믿음(大信)’이고 불가사의한 믿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미타불께 불가사의한 공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의외로 믿고 받아들일 수 있으니, 이 믿음이야말로 어찌 불가사의한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곳 하문의) 맞은편 기슭에 금문(金門, 금문현이란 섬)이 있고, 금문을 지나면 대만台灣이란 섬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비록 우리가 가본 적도 없고 두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우리는 금문과 대만이 있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물론 이런 믿음도 진정한 믿음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믿음이 소중합니까? 이런 믿음에는 아무런 소중함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믿거나 말거나, 우리가 생사윤회에서 해탈하는 것에 대해 증가(도움)되는 것도 아니고 감소(방해)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믿음은 단지 범부의 세속적인 믿음일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아미타불의 구제가 있음을 믿고 극락세계라는 돌아갈 곳이 있음을 믿는다면, 비록 같은 믿음이라 해도 내용이 다르므로 그 가치도 따라서 다르게 됩니다. 아미타불의 구제가 있음을 믿고 극락세계라는 돌아갈 곳이 있음을 믿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삼계육도의 윤회를 벗어나게 할 수 있으며 끝내는 우리를 성불하게 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 어찌 더할 나위 없이 높은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행’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단지 입을 벌리고 명호를 부르거나 마음속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이와 같은 행이 바로 ‘큰 행(大行)’이어서, 우리가 오계를 지키고 십선을 닦는 공덕보다 훨씬 큽니다. 왜냐하면 오계를 지키면 우리를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고, 십선을 지키면 우리를 천상에 태어나게 할 뿐이지만, 오계와 십선의 인因과 과果는 다 여전히 거짓이고 뒤바뀐 전도顚倒이며 새어남이 있는 유루有漏이며 청정치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담란대사께서) ?왕생론주往生論注?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인간과 천상의 모든 선과 모든 과보는 원인이든 결과이든, 모두 전도된 것이고 모두 허망하고 거짓된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하지 못한 공덕이라고 부른다(人天諸善 人天果報 若因若果 皆是顛倒 皆是虛偽 是故名不實功德).”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육도윤회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은 청정한 것이고, 진실한 것이며, 위없이 큰 이익이 있는 불가사의한 공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더러운 마음과 깨끗하지 못한 입으로 청정하고 진실하며 지극히 높고 위없는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은 큰 행과 다름없기에 유루가 아닙니다. 이 말을 다들 알아들으시겠습니까?
(대중들: 네!)
그런 까닭에 정토법문을 “이행도(易行道: 행하기 쉬운 길)”라 부르는 것입니다. 이행도에서 이른바 ‘이(易: 쉬움)’란 바꿔 말해 다음과 같습니다.
(1) 천이淺易: 이해하기 쉽고 복잡하지 않습니다. 이행도의 이치는 굉장히 간단명료하여, 심오하거나 어렵지 않고 한 번 들으면 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2) 간이簡易: 단지 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바로 왕생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추게 되고, 왕생의 자량(資糧: 밑천)을 즉각 완성하여 백 퍼센트 확실하게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됩니다. 경전을 많이 독송해야 하거나, 성지순례를 하면서 참회를 해야 하거나, 경전을 깊이 이해해야 하거나, 다라니나 주문을 많이 독송한 공덕을 통하여 왕생할 필요도 없습니다. 염불을 시작하는 때부터 임종 때까지 모두 다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이면 됩니다.
(3) 용이容易: 늙었거나 젊었거나,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를 가리지 않고, 경전을 깊이 이해하거나 못하거나에 관계없이 사람마다 모두 다 실천할 수 있어야 비로소 쉽다(容易)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할 수는 있지만, 그 가운데 일부분의 사람들은 실천할 수가 없다면 이행도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른바 ‘이행도’란 사람마다, 즉 어르신이나 어린아이나, 지혜가 있거나 없거나, 수행을 잘하거나 못하거나, 학문이 있거나 없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에 관계없이 모두가 다 실천할 수 있으며 모두가 다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이행도’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법문을 배워서 성불을 하려 한다면 전부 ‘난행도(難行道: 가기 어려운 길)’인데, 이 난행도의 어려운 정도는 가히 ‘하늘에 오르는 것과 같은 어려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매우 쉬워서, 여러분들 모두가 다 해낼 수 있습니다.
(4) 안이安易: 이 법문을 닦기 시작하면 매우 편안하고 즐겁고 자재하여, 전혀 괴로움이 없습니다. 자력적인 ‘난행도’와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런 까닭에 용수보살께서는 불교의 모든 법문을 두 가지 법문으로 요약하셨는데 하나는 ‘난행도’이고, 하나는 ‘이행도’입니다. ‘이행도’는 바로 아미타불의 제18원에 의한 구제를 가리킵니다. 이 ‘이행도’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종파와 다른 모든 법문의 수행은 전부 ‘난행도’에 속합니다.
우리가 난행도와 이행도의 차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용수보살께서는 하나의 비유를 들어 설명해주셨습니다. 용수보살이 말씀하시길 ‘난행도’는 ‘걸어서 가는 것’과 같고, ‘이행도’는 ‘배를 타고 가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또 걸어서 가는 것은 괴로운 일이고, 배를 타고 가는 것은 편안하고 즐거운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옛날에는 교통수단으로 배를 타거나 소달구지나 마차를 타는 수밖에 없었으므로, 오늘날 비행기나 기차나 버스가 있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천리만리나 되는 먼 지방에 가야 하는데, 만약 두 다리로 걸어서 간다면 몸이 건강하지 못한 사람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의 경우에는 갈 방법이 없습니다. 설사 신체가 건강하고, 심지어 세계에서 달리기를 제일 잘하는 유명한 선수라 해도 반드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재를 넘어서 먼 길을 고생고생하며 가야 할 뿐만 아니라 또 도처에서 도적을 만날 수도 있고, 굶주림과 추위와 피로로 인해 삼분의 일도 못 가서
전부 쓰러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자력수행으로써 삼계육도의 생사윤회를 벗어나 마침내 성불의 경계에 도달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아미타불의 구제에 의지한다면 매우 편안하고 즐겁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행도’는 바로 편안하고 즐거운 법문(安樂法門)이요, 편안하고 쉬운 법문(安易法門)입니다.
어째서 염불이 ‘이행도’일까요? 이는 전적으로 염불 그 자체에 아미타부처님의 본원에 의한 크나큰 힘의 가피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미타불께서 세우신 원이, ‘중생들이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기를 원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반드시 그를 왕생하도록 하신다’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까닭에 아미타불께서는 조재영겁(兆載永劫: 셀 수 없이 긴 세월)이란 세월 동안 지속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는 공덕을 쌓으셨고, 우리가 극락세계에서 빨리 성불할 수 있는 공덕을 쌓으셨으며, 우리가 세세생생 동안 지어온 빚(업보)을 갚아주시기 위해 필요한 공덕을 쌓으신 것입니다.
이러한 공덕을 모두 원만히 성취하신 다음에 비로소 그분은 성불하셨으며, 비로소 나무아미타불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에는 자연히 아미타불께서 조재영겁 동안 닦으신 만행萬行과 만선萬善과 만덕萬德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한량없는 백천 다라니의 공덕이 모두 이 한 구절 명호 안에 털끝만치도 빠짐없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명호를 일러 ‘만덕홍명(萬德洪名: 만 가지 덕이 깃든 위대한 명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만덕홍명에서 ‘만萬’은 숫자상의 백, 천, 만 할 때의 만이 아니라, ‘구족함‧완전 원만함(完滿)‧초월함’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왕생하고 성불하는 공덕이 이 명호 안에 완전 원만하고 온전하게 구족되어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육도윤회를 초월하여 일단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바로 삼현(三賢: 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回向의 단계에 있는 보살)과 십성(十聖: 십지十地의 단계에 있는 보살)의 단계를 초월하여 신속히 성불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의 본원이 성취됨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우리들이 왕생할 수 있는 공덕이 완성된 것입니다. 따라서 아미타불의 성불은 무엇을 성취하신 것입니까? 바로 우리들의 왕생을 성취하신 것입니다. 만약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들이 왕생할 수 있는 공덕자량(조건,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미타불께서 이미 성불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부를 수 있는 이 한 구절 명호가 있게 된 것이고, 염불만 하면 즉시 우리가 왕생할 수 있는 공덕자량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이쯤에서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어떠한 부처님이십니까? 바로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십니다! 이 말의 뜻은, 아미타불께서 이미 본원을 성취하셨고, 그 다음 다시 당신께서 성취하신 본원의 공덕을 전부 우리에게 보내주시고 회향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까닭은, 우리의 왕생을 위하여 성불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공덕도 동시에 모두 우리의 공덕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과지(果地: 묘각의 지위)의 깨달음을 인지(因地: 수행의 지위)의 마음으로 삼으니, 원인은 결과의 바다에 갖추어져 있고, 결과는 원인의 근원과 통하네(以果地覺 爲因地心, 因該果海 果徹因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뜻은, 아미타불께서 과지에서 성취하신 부처님 공덕으로써 우리와 같이 인지에 있는 범부가 왕생하고 성불하는 공덕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미타불의 정각正覺은 우리 중생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원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 중생이 왕생할 수 있는 원인은 아미타불의 정각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의 성불은 바로 우리의 왕생이며, 우리의 왕생은 바로 아미타불의 성불입니다. 만약 우리가 왕생하지 못한다면 아미타불은 성불하지 않으셨을 것이고, 아미타불께서 이미 성불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단지 염불만 하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왕생은 아미타불의 성불과 하나로 묶여 있어 영원히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법문은 ‘결과로부터 원인으로 향하는(從果向因)’ 법문이지,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향하는(從因向果)’ 법문이 아닙니다.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향함’이란 바로 범부로부터 줄곧 수행하여 십신十信‧십주十住‧십행十行‧십회향十廻向‧십지十地를 거치고, 그런 다음에야 성불에 이르는 것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한 단계 한 단계씩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법문은 ‘과지의 깨달음을 인지의 마음으로 삼은’ 것으로, 아미타불께서 이미 성불하신 공덕을 우리가 왕생하여 성불하는 자량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신‧십주‧십행‧십회향‧십지와 같은 여러 가지 수행을 거칠 필요 없이 곧바로 단계를 초월하여 왕생 성불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이행도’를 일러 가로로 초월하는 ‘횡초橫超’ 법문이라고도 부르는 것입니다. 예컨대 타이베이에 101빌딩(대만 타이베이에 있는 금융센터)이란 건물이 있는데, 만약 매 층마다 모두 걸어서 올라간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며, 걸어가는 데 매우 고생할 것입니다. 하지만 만약 직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매우 빨라, 순식간에 101빌딩의 옥상에 도달할 것입니다.
정토법문이 ‘이행도’이며 ‘횡초법문’이라 불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역시 아미타불의 본원에 있습니다! 만약 아미타불의 본원이 성취되지 않았다면 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지지 못했을 것이지만, 한 번 본원이 성취되고 나서는 모두가 갖추어지게 되어, 우리가 왕생할 수 있고 성불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부처님마다 성불은 다 아주 어려운 일을 해내신 것이기에 매우 귀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들과 반드시 직접적인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부처님들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제18원과 같은 원을 세우지 않으셨으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조재영겁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보살의 무량한 덕행을 쌓으시고 비로소 성불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미타불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아미타불의 성불은 바로 우리 중생의 왕생에 입각한 것이며, 우리의 왕생을 위해 그분의 생명을 담보로 내기를 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왕생케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분의 부처로서의 생명이 있는 것이며, 우리의 왕생이 없다면 그분의 부처로서의 생명도 없는 것이기에, 그분의 성불은 바로 우리를 위하여 성불하신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께서는 어떠한 부처님이신가?’에 대한 첫 번째 답은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신 것입니다.
2. 아미타불은 중생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이다
방금 말씀드렸듯이, 아미타불의 성불은 시방중생을 구제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시방중생들이 구제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성불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시방중생들이 만약 “우리가 정말 구제될 수 있을까? 언제부터 구제될 수 있을까?”라고 묻는다면,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셨는지, 언제 성불하셨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만약 아미타불께서 아직 성불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부를(稱念) 수 있는 부처님의 명호가 없을 것이고, 또 우리가 왕생하여 성불할 극락세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제가 묻겠습니다.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셨습니까, 못하셨습니까?
(대중들: 성불하셨습니다.)
성불하신 지는 얼마나 오래되셨습니까?
(대중들: 10겁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10겁이 지났습니다. 10겁 동안 아미타불께서는 밤낮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지켜보시며,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10겁의 세월 동안 아미타불께서는 무얼 해오셨습니까? 오로지 우리 시방중생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모든 착하거나 악한 범부들아! 너희들은 어서 나의 극락세계로 왕생하여라. 내가 여기서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
아미타불께서는 줄곧 우리를 부르고 계시며, 심지어 우리에게 합장하시며 부탁하고 계십니다. ‘시방의 중생들은 모두 나의 외아들인데, 지금 삼계육도를 떠돌며 고통스럽게 윤회하고 있으니, 부모인 나로서는 견딜 수가 없구나. 아들들아! 너희들이 제발 속히 돌아오기를 부탁한다. 돌아오기만 하면 안락함을 얻을 수가 있단다. 너희가 돌아오는 데 필요한 양식(자량)을 나는 이미 모두 준비해 놓았다.
너희가 돌아오는 데 필요한 비용과 도구들 역시 내가 일찌감치 너희를 위해 알맞게 마련해 놓았다. 너희가 단지 차에 올라타기만 하면(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기만 하면) 필요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다 있기에 네가 평안하게 극락 고향으로 돌아올 수가 있단다.’ 이와 같이 아미타불께서는 10겁 이래로 줄곧 우리를 향해 외치면서 부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시방중생들을 매우 쉽게 구제할 수 있는 부처님이 되기 위해 어떻게 발원하셨습니까? 그 내용은 모두 48원 속에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시방중생들을 아주 수월하고 안전하고 자유롭게 극락세계에 왕생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것도 역시 48원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미타불의 48원은 각각의 원 하나하나가 전부 시방중생을 구제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만약 그 중 하나의 원이라도 시방중생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 원은 의미가 없는 것이기에, 아미타불께서는 차라리 이 원을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은 시방중생을 구제하시는 부처님이십니다.
아미타불께서 중생을 구제하시는 데에는 어떠한 조건도 정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굳이 조건이 있다고 말한다면 바로 당신이 단지 ‘왕생을 발원하고, 명호를 부르는’ 것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극락세계가 아무리 청정하고 장엄하며, 아미타불께서 아무리 대자대비하시고 원력이 넓고 크시다 해도,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아미타불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고, 계속해서 영원히 육도 안을 윤회하며 헤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먼저 반드시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다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불러야’ 합니다. 이렇게만 하면 됩니다. 이런 사람은 모두 백 퍼센트 반드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의 발원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선도대사(善導大師, 613~681)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중생이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면 반드시 왕생한다(衆生稱念 必得往生).”
시방중생들이, 즉 성인, 범부, 선인, 악인, 재가자, 출가자, 수행을 할 줄 아는 사람, 수행을 할 줄 모르는 사람, 지혜가 있는 사람, 지혜가 없는 사람에 관계없이 그들이 단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른다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아미타불의 본원이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입니다. 선도대사께서는 “저 부처님은 지금 현재 성불하시어 극락세계에 계시나니, 마땅히 본래 서원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라!(彼佛今現 在世成佛 當知本誓 重願不虛)”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미타불께서 세우신 이 본래 서원은 허망하고 거짓된 원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는 이미 성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미타불의 본원은 하나하나가 모두 중생을 위한 원입니다. 그러기에 단지 우리가 구원받기를 바라면서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우리는 아미타불의 구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이 한 구절 아미타불 명호는 마치 큰 원력의 배와도 같습니다. 우리 중생들은 이 육도라는 고통의 바다에서 부침하며 허우적거리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극락에 왕생하기를 원하여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바로 아미타불의 큰 원력의 배 위에 올라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미타불의 큰 원력의 배 위에 올라탄 사람은 때가 되기만 하면(세상에서의 수명이 다 되면) 곧바로 피안(저 언덕)에 도착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현재 비록 우리의 수명이 다하지는 않았고, 아직도 육도의 고통바다 속에 있지만, 다시는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아미타불의 큰 원력의 배를 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당신이 아무리 호화로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넌다 하더라도 모두 위험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이 거대한 원력의 배는 영원히 위험에 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배는 아미타불께서 직접 만드시고 아미타불께서 직접 운전하시며 승무원들도 모두 극락세계의 보살님들이기 때문에, 반드시 피안에 도달할 수 있으며 어떠한 위험도 만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전적으로 아미타불의 구제에 맡긴다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가 단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왕생의 업인(業因: 결과를 위한 원인으로써의 행위)은 이미 성취된 것이어서, 이미 더 이상 육도를 윤회하는 범부가 아니며, 이미 극락세계 성중聖衆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은 이해하시겠습니까?
(대중: 이해합니다.)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대중: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왕생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께 달려 있습니다. 마치 먹지도, 입지도 못하고 머물 곳도 없이 음식을 구걸하려고 밖으로 돌아다니던 한 아이가, 어느 날 그가 본래 국왕의 유일한 아들이며 태자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이때부터 그는 바로 의젓하고 화려하고 귀한 신분이 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 유랑하는 거지가 아니라, 한 왕의 아래이자 만인의 위에 있는 태자인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인광대사(印光大师, 1861~1940. 정토종 제13대 조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생사를 벗어나려는 마음(生死心)이 간절하고, 한 생각의 의혹도 일어나지 않는 마음으로 믿을 수 있다면, 비록 아직 사바를 벗어나지 못했더라도 이미 사바에 오래 머물 나그네가 아니며, 극락에 아직 왕생하지 못했더라도 이미 극락의 귀한 손님이니라.”
그러므로 왕생을 원하는 우리의 마음이 변치 않고, 다른 수행을 섞지 않으며, 오롯하게 염불만 한다면 임종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고, 나중을 기다릴 필요도 없이 지금부터 우리는 이미 극락세계의 성중이며, 이미 더 이상 육도를 윤회하는 범부가 아닙니다.
3. 아미타불은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 부처님이시다.
‘나무아미타불’이란 이 한 구절 명호를 ‘광명 명호(光明名號)’라고도 부르는데, 아미타불께서는 곧 한량없는 광명의 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아미타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부처님의 광명은 한량이 없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는 데 장애가 없는 까닭에 아미타라 하시느니라.”
이 말씀의 뜻은, 이 부처님께서는 한량없는 광명을 갖추고 계시는데, 그분의 한량없는 광명은 온 우주를 남김없이 비출 뿐만 아니라, 그분의 광명은 어떠한 장애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형상이 있는 해‧달‧별‧산‧강‧대지의 장애도 받지 않고, 또한 형상이 없는 우리 중생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탐진치貪瞋癡), 그리고 우리가 세세생생 동안 지어온 갖가지 죄업들의 장애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아미타불의 광명은 언제 어디서나 다 손쉽고도 빠르게 우리 곁으로 와서 우리를 보호하고 구제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을 또한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光明攝取)’ 부처님이라고도 부릅니다. 여기서 ‘광명’이란 아미타불의 불광佛光을 가리키며, ‘거두어주심’이란 아미타불께서는 지금부터 줄곧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으시며 우리를 지켜봐주시고 우리를 보호해주시며 기다려주시다가, 임종 때가 되면 우리를 영접하러 오시어 극락세계로 데려가신다는 뜻입니다.
아미타불께서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 것은 마치 무엇과 같을까요? 우리가 밤에 잠잘 때 모기가 우리를 물려고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모기장 안에 있으면 모기는 우리를 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삼계육도 안을 윤회할 때에는 어떤 모기가 우리를 물려고 할까요? 원수와 채권자라는 모기가 있어 우리를 물려고 하며 우리에게 빚을 독촉합니다. 또 천마天魔와 외도外道라는 큰 모기가 있어 우리가 육도의 윤회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단지 염불만 한다면 영원히 아미타불의 광명이라는 모기장 안에 있게 되어, 큰 모기든 작은 모기든 모두 우리를 물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이 컵과도 같아서, 컵 속에 담긴 물은 밖으로 흐르지 않고 항상 이 컵 안에 있습니다. 염불하는 사람도 영원히 아미타불의 광명이란 컵 안에 있어 다시는 삼계육도에 윤회하지 않으며, 또한 갖가지 업력業力의 장애도 받지 않습니다. 이분이 바로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 부처님입니다.
그러므로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인은, 그가 부처님을 믿고 염불하기 시작하는 그때부터 한평생이 다할 때까지 아미타불의 광명이 거두어주시는 가호 가운데 있게 되어 아미타불의 보호를 받고, 원수나 채권자의 방해를 받지 않고, 천마나 외도의 방해도 받지 않으며, 또한 재난의 상해도 받지 않습니다.
이는 아미타불의 명호가 지니고 있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작용과 기능이어서, 따로 기도를 하며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불을 붙이면 불은 자연히 타오르게 되고, 물을 따르면 물은 자연히 아래로 흐르게 되는 것과 같은 자연적인 기능이어서, 원리를 안다거나 기도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현세의 이익으로 보더라도 염불은 재난과 어려움들을 소멸할 수 있고, 복과 수명을 늘리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몸에는 다 광명이 있는데, 그 광명의 크기는 그 사람의 염원과 복덕에 따라 다릅니다. 우리가 착한 생각만 일으켜도 상서롭고 좋은 빛이 매우 커지고, 악한 생각을 일으키면 혼탁하고 나쁜 빛이 나타나게 됩니다. 복덕이 크면 광명도 크고, 복덕이 작으면 광명도 작습니다. 만약 부모에게 효순하고 스승을 받들어 모시며 삼보를 공경하는 사람이라면 광명은 더욱 맑고 깨끗하고 많을 것이며, 더 나아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를 수 있다면 광명은 바로 온 우주에 두루 가득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큰 광명이 생기는 것일까요?
아미타불의 광명은 한량없는 광명인데, 아미타불께서 당신이 지니신 모든 공덕을 이 한 구절 명호로 변화시켜서 우리 중생들에게 회향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구절 명호에는 아미타불께서 지니신 모든 광명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 범부가 미약한 마음으로 이 광명 명호를 부르더라도 곧바로 아미타불의 명호와 결합되고, 아미타불의 광명과 결합하게 되니, 어찌 우리 몸의 광명이 아미타불의 한량없는 광명을 따라 한량없이 큰 우주에 가득하지 않겠습니까!
이는 마치 한 방울의 물이 비록 단 한 방울이지만, 큰 바다에 떨어뜨리면 큰 바다와 융합되어 하나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염불하는 사람의 몸에는 모두 부처님의 광명이 나오는 것입니다.예전에 법사님 한 분이 미국에 홍법을 하러 가셨습니다. 그분께서 대중을 이끌고 법당에서 염불을 하고 있었는데, 염불이 막 끝나는 시간에 어떤 미국인 한 분이 그 법사님을 찬탄하며 말했습니다.
“스님! 스님! 저는 신통력을 배우는 사람입니다. 제가 법당에서 염불하고 계시는 대중들을 보았는데,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염불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몸에서 나는 광명이 매우 커서, 그 크기가 지구를 감쌀 만큼 그렇게 큰 광명이었습니다. 그다지 경건하지도 정성스럽지도 않게 단지 입만 벌름거리며 염불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그 광명이 아주 작아서 단지 입가에만 들락거릴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수승한 광경을 목격하였기 때문에 저도 불교를 배우고자 합니다.”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염불하는 사람은 40리나 되는 광명이 몸을 비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40리가 매우 크다고 생각하겠지만, 우주와 비교하면 지구는 매우 작은 것이며, 지구와 비교하면 40리는 더욱 작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염불할 때 그에게서 나오는 광명은 지구를 감쌀 수 있습니다.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이 입이 깨끗합니까? 입을 열면 냄새가 고약합니다. 그렇지만 단지 우리가 한 번 입을 벌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하면 광명이 나옵니다. 우리가 단지 입을 벌려 염불하기만 하면 아미타불께서는 우리의 몸으로 드나드시며 광명을 놓으십니다. 비록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귀신이나 불보살님들은 모두 광명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염불만 하면 귀신이 우리를 방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가 다른 사람과 맺힌 원한이 있다 해도, 염불을 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맺힌 원한도 풀 수 있으며, 지금 이후로 다시는 당신에게 빚을 독촉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염불을 하는 관계로 말미암아 상대방을 제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염불을 할 때에는 어느새 귀신과 중음신이 제도되며, 우리가 염불을 하기 때문에 조상님들도 제도되고, 자손들도 보호받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염불이야말로 참으로 가장 간단하고도 가장 뛰어난 법문인 것입니다!
염불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부처님 명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 중요성은 우리의 생명과도 같아서 이 부처님 명호가 있으면 우리의 생명이 있는 것이요, 이 부처님 명호가 없으면 우리의 생명도 역시 없는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 부처님 명호가 없으면 사람이 죽은 뒤에는 곧바로 염라대왕의 처소로 가서 심판을 받게 되는데, 그러면 매우 비참해지기 때문입니다.
4. 아미타불은 임종 때 맞이하러 오시는 부처님이시다
염불을 하는 사람은 염불하는 그때부터 아미타불께서 그분의 한량없는 광명으로 끊임없이 보호해주시고 돌봐주시며 잠시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임종에 이르렀을 때 몸을 나투시어 우리를 극락세계로 영접해주십니다. ?아미타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사람이 목숨을 마치는 때가 오면 아미타불께서는 여러 거룩한 무리들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투시므로, 이 사람은 목숨을 마칠 때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곧바로 아미타불의 극락국토로 왕생하게 되느니라.”
이제 막 목숨을 마치려는 사람은, 만약 그가 평소에 아미타불을 부르지 않았다면, 보통은 일단 숨이 끊어지고 나서 자기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허둥대며 두려워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두고 떠나야 하고, 이 세상에서 일으켜 세운 모든 사업과 재산을 두고 떠나야 하며, 이런 환경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매우 아쉬워할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는 원친채주(冤親債主: 원한 맺힌 사람들이나 채권자)들이 나타나 빚을 독촉할 것이며, 흑무상黑無常과 백무상白無常이란 저승사자가 쇠사슬로 가지고 나타나 그 사람을 묶어서 염라대왕 앞에 데려가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니, 마음속으로 매우 고통스럽고 긴장되며 두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염불하는 사람은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 직접 오시어 우리를 보호해주시고 영접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임종이 다가와 막 숨이 끊어지려 하지만 아직 숨이 붙어 있을 때 아미타불께서 먼저 몸을 나투시게 되는데, 그 사람은 분명하게 아미타불을 뵐 수 있습니다. 그때에 그는 매우 기뻐하며 아미타불을 따라가서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됩니다.
우리가 오직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며 오로지 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한다면, 왕생할 시간이 됐을 때 아미타불께서는 우리를 맞이하러 오십니다. 지금부터 줄곧 임종 때까지 아미타불께서는 일분일초, 일찰나도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잊어버리지 않으시며, 싫어하여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임종하는) 그 시간에 혼미하거나 깨어 있거나에 상관없이 아미타불께서는 한결같이 우리를 영접하러 오십니다.
왜냐하면 혼미한 것은 단지 감각기관이 혼미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부인들이 볼 때는 혼미한 사람은 염불도 할 수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고 귀로 들을 수도 없고 손발을 움직일 수도 없을 거라고 여기겠지만, 그 사람의 마음은 오히려 맑고 또렷합니다.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염불할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미타불께서 그 사람을 영접하러 오실 때에는 그 사람과 아미타불, 아미타불과 그 사람은 서로가 아주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생 동안 단지 염불만 책임지고 하면 됩니다. 그리고 왕생하는 일은(이는 아미타불의 소관이시므로) 아미타불께서 당연히 완전하고 완벽하게 책임지시고 우리를 극락세계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만약 어떤 염불행자가 임종할 때에 병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부처님의 명호를 입으로 소리 내어 부르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는 위안이 있어서, ‘때가 되면 아미타불께서 영접하러 오신다’라고 생각하므로 이 염불인은 목숨이 마칠 때에 이르러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황하여 불안해하지도 않으며, 단지 조용히 아미타불께서 맞이하러 오시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편안하고 홀가분하고 자유롭게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아미타불께서 맞이하러 오시기만을 기다리면 됩니다. 아무튼, 아미타불께서 맞이하러 오신다는(내영來迎) 사실은 염불하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위안과 희망이 가득하게 해줍니다.
어떤 사람은 “만약 내가 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부처님 명호를 입으로 소리 내어 부르지 못하면 어떡하지?” 하며 걱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드릴 것입니다. “괜찮습니다.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의 상황을 아미타불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아미타불께는 대신통력과 대원력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자비와 대지혜로써 이 사람에게 어떠한 업장이 있으며, 어떠한 임종을 맞이하게 될 것이며, 염불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혼미할 것인지 깨어있을 것인지에 대해 모두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구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며, 때가 되면 반드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실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사실이 참으로 귀중합니까, 귀중하지 않습니까?
(대중들: 참으로 귀중합니다!)
그런 까닭에 단지 우리들이 평상시에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갖고 있고, 또 이 마음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고 진실하며, 지금 이후로 더 이상 잡수(雜修: 염불 외에 다른 수행을 섞음)나 잡념(雜念: 다른 불보살님의 명호를 부름)을 하지 않고, 오로지 한마디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만 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임종 때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됩니다. 임종할 때 의식이 혼미한가 혼미하지 않은가에 상관없고, 또한 임종할 때 병으로 몸이 아파 염불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와도 관계없이 말입니다. 우리는 단지 평상시에 염불만 책임지고 하면 됩니다.
임종 때 만약 병으로 몸이 아파 염불을 할 수 없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마음속으로 아미타불께서 우리를 구하러 오시기만을 고요히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는 광명으로 거두어주시는 부처님이시고, 임종 때 맞이하러 오시는 부처님이시므로, 때가 되면 그분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영접하러 오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염불하는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안온하고 위안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와 같은 이유로 이 염불법문을 ‘이행도易行道’라고도 부르는데, 쉬운 법문이며 안락한 법문이라는 뜻입니다. 이 법문이 아니라면 중생들은 영원히 고통 속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만약 아미타불께서 광명으로 우리를 거두어주시지 않고, 임종 때 우리를 영접하러 오시지 않는다면, 설사 우리가 지금 염불을 한다 해도 마음속은 불안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할 겁니다. ‘끔찍하구나! 내가 지금 열심히 염불을 하고 있지만, 임종 때 만약 질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염불을 못하면 어떡하지? 만약 정신이 혼미하면 어떡하나?’ 하고 말이죠. 하지만 사실 이런 걱정들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께서는 모든 시간과 모든 곳에 늘 계시며 대신통이 있으시기에, 그분께서는 당신의 상황을 다 아시고는 때맞추어 당신을 보호하시고 영접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 정토법문은 어떠한 조건도 없는 법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원하고 오로지 나무아미타불만을 부르며, 다른 잡다한 수행을 하지 않고 완전히 아미타불께 의지하기만 한다면, 만약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반드시 왕생할 수 있습니다.
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법문에 의문점이 있으시다면 마음 놓고 질문해주시기 바랍니다.
5. 질문과 대답
질문: 두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입니다. 수행에는 믿음과 발원과 수행(信願行)이 구족되어야 하는데, 법사님께서는 법문하실 때 아미타불의 본원만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수행으로서의 행(신원행 가운데 행)이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해야지만 왕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만약 단지 발원만 있고, 행의 정도(수준)를 강조하지 않는다면, 이는 일본의 본원법문(정토진종淨土眞宗 등에서 주창하는 염불법문)과 혼동되지 않겠습니까? 삼매(三摩地)에 들고, 깨끗한 마음이 끊이지 않게 이어지고(淨念相續), 한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一心不亂) 경지에 들도록 수행해야지 비로소 왕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답변: 당신이 말한 그런 조건은 없습니다. 단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만 부르면 됩니다. 왜 ‘나무아미타불’이 ‘만덕홍명萬德洪名’이라 불릴까요? 그 이유는, 시방중생이 왕생하는 데 필요한 공덕과 자량이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 가운데 이미 다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로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 역시 마음 내키는 대로 멋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시간이 있으면 얼마만큼의 시간 동안 염불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시방중생들의 근기는 모두 한결같지 않아, 어떤 사람은 시간이 비교적 많고, 어떤 사람은 시간이 비교적 적기 때문에 시간이 많은 사람은 염불을 많이 하시고, 시간이 적은 사람은 염불을 적게 하시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수양이 비교적 좋은 편이고 성격도 비교적 좋은 편이며 마음도 비교적 평온한 편이어서, 염불할 때 당연히 마음에 비교적 잡념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성품이 비교적 억세고 습기(習氣: 쌓여온 습관의 힘)도 비교적 무겁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염불할 때는 망상과 잡념이 여전히 매우 많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것들은 모두 상관없습니다. 그가 염불만 하면 됩니다. 중생들에게 이러한 상황이 있다는 것을 아미타불께서 다 알고 계시니까요.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되, 걸을 때나 머물 때나 앉을 때나 누울 때에 시간의 길고 짧음을 따지지 않고, 순간순간 (염불을) 잊지 않는 것을 정정업(正定業)이라 부르나니, 저 부처님의 원력을 따르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염불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가든지 머물든지 앉아 있든지 누워 있든지, 당신이 어느 곳에 가든, 어느 시간 때든, 무슨 볼일을 보든 간에 모두 염불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이 바로 염불행자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시다고 했을 때, 무엇을 ‘대자大慈’라고 부릅니까? 조건 없이 사랑하는 마음을 ‘대자’라고 부릅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불께서는 제18원 속에서 단지 “내지십념乃至十念”만을 말씀하셨을 뿐, 반드시 어떤 기준을 구비해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어떤 기준이 있다면, 어떤 사람은 왕생할 수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왕생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 법문은 일본의 (정토진종에서 말하는) 정토법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이 본원법문은 아미타불의 제18원의 법문입니다. 제18원에서 무엇을 말씀하셨습니까? ‘염불’을 말씀하신 것뿐입니다. 선도대사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본원을 살펴보니, 그 뜻은 중생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있다(望佛本願 意在眾生 一向專稱 彌陀佛名).”
이 제18원을 (선도대사께서) ‘본원本願’이라 부르셨기 때문에, ‘본원칭명本願稱名’은 선도대사님에 의해 전해진 것입니다.
‘본원’의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아미타불께서 성불을 하신 목적은 어디에 있을까요? 일체중생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왕생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본원을 살펴보니, 뜻은 중생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미타불이라는 만덕홍명을 칭념하는 것이 바로 본원에서 말씀하신 것이며, 또한 본원에서 말씀하시는 유일한 수행입니다.
방금 우리는 ‘본원칭명’이 선도대사님에 의해 전해진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이는 선도대사 개인의 독창적인 견해가 아니라, 용수보살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용수보살께서는 ?십주비바사론? 「이행품易行品」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은 이와 같으시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를 생각하여 명호를 부르며(稱名) 스스로 귀의하면, 곧 필정(必定: 불퇴전)에 들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 그러므로 항상 마땅히 억념(憶念: 굳게 기억하고 염불)해야 한다(阿彌陀佛本願如是 若人念我 稱名自歸 即入必定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是故常應憶念).”
용수보살께서는 이 문장의 말씀 속에서 ‘본원本願’이란 두 글자를 직접 지적하여 분명하게 밝히셨고, ‘칭명(稱名: 명호를 부르는 염불)’이란 두 글자도 분명하게 지적하며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제18원’이 바로 ‘본원’이며, ‘제18원’이 곧 ‘칭명염불’입니다.
“본원은 이와 같으시다(本願如是)”라고 했는데, 아미타불의 본원은 어떤 것일까요? “만약 어떤 사람이(若人)”는 시방중생을 가리키는데, 성인과 범부를, 범부 가운데서도 선인과 악인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를 생각하고(念我)”에서 생각(念)은 의업(意業: 생각으로 짓는 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명호를 부르며(稱名)”는 구업(口業: 입으로 짓는 업)으로,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稱念) 것입니다.
“스스로 귀의하면(自歸)”이란 아미타불의 원에 수순하고 아미타불의 구제에 귀순하는 것입니다. 나 같은 범부의 죄악의 생명과 생사의 생명, 그리고 윤회의 생명을 아미타불의 청정하신 생명과 영원한 생명, 윤회하지 않는 생명 속으로 완전히 귀의하여 들어가는 것인데, 이것을 일러 ‘스스로 귀의하면(自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극락왕생을 원하는 것을 곧 ‘스스로 귀의하면(自歸)’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원칭명’도 역시 용수보살께서 말씀하신 것이라는 근거가 아주 뚜렷하고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본원’은 용수보살님이 독창적으로 만든 것일까요? 이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이는 석가모니불께서 ?무량수경?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무량수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 부처님 본래 세우신 원력
그 명호 듣고 왕생 원하면
모두 다 저 나라에 이르러
저절로 불퇴전에 오르리라.”
(其佛本願力 聞名欲往生 皆悉到彼國 自致不退轉)
“저 부처님(其佛)”은 아미타불을 가리키며, “본래 세우신 원력(本願力)”은 제18원의 능력을 가리킵니다. 제18원에서는 기타의 삼학三學과 육바라밀을 말씀하시지 않고 “그 명호 듣고 왕생 원하면(聞名欲往生)”만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무아미타불이란 이 한 구절 명호를 듣고서 극락왕생을 발원하여, 이때부터 오로지 나무아미불만 부르면 “모두 다 저 나라에 이르게(皆悉到彼國)”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다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으며, 또한 왕생하는 그 순간부터 자연히 불퇴전의 지위에 있게 된다는 말씀이십니다. 그러므로 ?무량수경?에서 ‘본원’을 말씀하셨고, 용수보살께서는 이를 계승하셨으며, 선도대사께서 다시 널리 전하시면서 확정지으신 것이기 때문에, 본원은 일본의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본원입니다.
본원의 조건은 오직 ‘칭명염불’일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도대사께서 말씀하신 “부처님 본원을 살펴보니, 그 뜻은 중생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있다”에는 공부가 하나로 모아진 공부성편(功夫成片)이나, 자나 깨나 같은 경지인 몽매일여(夢寐一如)를 요구하는 말씀이 없습니다.
만약에 이런 조건이 필요하다면 묻고 싶습니다. ‘아미타불께서 누구를 구제하시겠다는 겁니까? 만약 이와 같다면 아미타불의 자비는 큰 것입니까, 작은 것입니까? 조건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미타경?에서 말씀하신 “일심불란(一心不亂: 한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음)”은 예로부터 모두 잘못 해석되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 선도대사님의 해석을 보지 못했고, 모두 천태종의 사상으로 해석하거나 또는 선종의 사상으로 해석하였으며, 정토의 사상으로 해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모두 잘못 해석되어왔던 것입니다.
?아미타경? 가운데 다음의 세 단락은 예로부터 오랫동안 오해되어 왔습니다.
1. “적은 선근과 복덕의 인연으로는 저 나라에 왕생할 수 없느니라(不可以少善根 福德因緣 得生彼國).”
2.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불에 대한 말씀을 듣고는, 명호를 굳게 지니고서 하루나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동안 한마음이 흐트러지지 아니하면(若有善男子 善女人 聞說阿彌陀佛 執持名號 若一日 若二日 若三日 若四日 若五日 若六日 若七日 一心不亂).”
3. “그 사람이 목숨이 마치려고 할 때에 아미타불께서 여러 거룩한 무리와 함께 그의 앞에 나타나시므로, 이 사람은 목숨이 마칠 때에 마음이 전도되지 않고 곧바로 왕생하게 되느니라(其人臨命終時 阿彌陀佛 與諸聖眾 現在其前 是人終時 心不顛倒 即得往生).”
정토법문에 대한 대부분의 해석은 송나라 이후에 이루어졌는데, 특히 북송(北宋, 960~1127) 때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모두 천태종의 사상을 가지고 이 몇 단락을 해석했기 때문에 “일심불란”에 대한 해석이 다 그렇게 정확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선도대사님의 저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선도대사님의 저작들은 한국과 일본에 전해져 유통된 반면, 중국에서는 당나라(618~907) 말 이후로 전해지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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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청나라(1644~1911)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중국에 다시 되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중국인들은 선도대사님의 저작을 볼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모두 일반 성도문聖道門의 교리를 사용하여 “일심불란”을 해석해왔습니다. “일심불란”을 가지고 선정에서의 일심, (수행)능력에서의 일심으로 생각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행도’의 원칙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가는 안락한 법문인 ‘이행도’가 아닌 해석들이 당연히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선도대사께서 정토법문을 어떻게 해석하셨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선도대사께서는 (?원생정토법사찬願生淨土法事讚?에서) “극락은 무위열반계이다(極樂無為涅槃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시기를, 극락세계는 보토報土의 경계이고, 열반의 경계이며, 이 경계에 들어가기만 하면 아미타불과 같은 열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극락은 무위열반계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어서 “인연에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왕생하지 못할까 두렵다(隨緣雜善恐難生)”고 하셨습니다. 일체의 다른 법문은 모두 ‘인연에 따르는 잡다한 선’입니다. 오늘 현교顯教를 만나면 현교의 법문을 배우고, 밀교를 만나면 밀교의 법문을 배우며, 천태교를 만나면 천태교의 법문을 닦아서 극락왕생에 회향하고, 선종을 만나면 선종의 법문을 닦아서 극락왕생에 회향하며,
어떤 법문을 만나면 어떤 법문을 닦고 그 법문을 닦은 공덕을 극락왕생에 회향하는데, 이것을 ‘인연에 따르는 잡다한 선(隨緣雜善)’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방식의 ‘인연에 따르는’ 수행이 바로 ‘잡다한 선’이며, 바로 “적은 선근과 적은 복덕(少善根少福德)”입니다. 그래서 “인연에 따르는 잡다한 선으로는 왕생하지 못할까 두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연에 따르는 잡다한 선’은 모두 ‘적은 선근과 적은 복덕’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많은 선근과 많은 복덕(多善根多福德)”일까요? 선도대사께서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래께서 핵심 법문을 선택하셨으니, 아미타불을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고 가르치셨다(故使如來選要法 教念彌陀專複专).”
다시 말해 우리가 단지 “나무아미타불”을 칭념하기만 하면 당신에게 수행공부가 있든 없든, 마음이 청정하든 청정하지 못하든,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다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미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는 것에 부합했으며, ‘일심불란一心不亂’의 조건에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명호를 굳게 지니고서, 한마음 흐트러지지 아니함(執持名號, 一心不亂)”이란 바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데 전념하고 또 전념하라(稱念彌陀專復專)”는 뜻입니다.
이른바 ‘일심불란一心不亂’에서 ‘일一’은 곧 둘이 아님이요, 둘이 아님은 곧 ‘오로지(專, 전적으로)’이며, ‘불란不亂’은 난잡하지 않고 잡다하게 섞이지 않음이니 역시 ‘오로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른 잡다한 수행을 하지 않고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른다면, 이것이 바로 ‘일심불란’입니다. 그것은 견사혹(見思惑: 견혹과 사혹)을 조복시키거나 끊는 것과 같은, (자력)공부에 있어서의 일심불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참으로 그러하다면 우리들은 모두 왕생할 수가 없으며, 아미타불께서는 시방중생을 구제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자聖者들만 구제하시려는 것이 돼버립니다. 왜냐하면 (자력)공부에 있어서의 ‘일심불란’이란 ‘이치적인 일심(理一心)’이거나 아니면 ‘현실적인 일심(事一心)’인데, 그렇다면 이미 그는 삼계 밖의 근본무명根本無明을 깨트렸거나 삼계 내의 견사번뇌(惑)를 끊은 성인聖人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정토법문을 배우는 데 있어 만약 확실하게 안심할 수 있고, 확실하게 왕생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먼저 아미타불의 제18원에 담긴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제18원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정토를 배운다면 자칫 어긋날 수 있어 우리들이 안심할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일심불란’의 수행에 대해 우리는 이와 같이 이해해야 합니다.
저는 출가자의 신분이므로, 출가자의 신분으로 오로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재가자의 신분이니, 재가자의 신분으로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입니다. 저는 비록 출가했지만 아직도 여전히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탐진치)의 번뇌가 강성하고, 업장이 깊고 무거우며, 망상과 잡념이 분분하게 많은 범부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몸과 마음으로 오로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고 있습니다.
재가 불자님들 가운데 만약 번뇌가 적고 업장도 깊지 않아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기만 해도 마음이 매우 청정한 분이 계신다면 여러분들은 이러한 근기의 몸과 마음으로 오로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시면 됩니다. 사람마다 모두 자신의 근기로 오로지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른다면 여러분은 모두 평등하게 왕생할 수 있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당신이 착한 사람이라 해도 아미타불의 원력의 배 위에 타고 있고, 당신이 악한 사람이라 해도 역시 원력의 배 위에 타고 있어서, 당신이 성인이든 범부든,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관계없이 똑같이 다 원력의 배 위에 타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왕생은 이 한 구절 만덕홍명萬德洪名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들의 신분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극락세계에 왕생하고 난 뒤에는 모두가 이전의 신분을 버리게 되고, 모두가 아미타불께 의지하여 피안으로 오르게 되며, 무위열반의 경계에 들어가 함께 성불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이 사바세계에는 남성과 여성의 차별이 있고, 지혜와 학문의 높고 낮은 차별이 있으며, 선악의 업장이 많고 적은 차별이 있지만, 극락세계에 가는 데는 이러한 것들에 의지해 왕생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이 한 구절 아미타불의 명호만 있다면 설사 재가자라도 좋고, 수행을 할 줄 몰라도 좋고, 마음이 청정하지 못해도 좋으며, 사혹이 있어도 좋고, 견혹이 있어도 좋으며, 또는 한 품의 무명조차 조금도 제거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모두가 똑같이 평등하게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성불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선도대사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이거나 천인이거나, 선하거나 악하거나 모두 왕생할 수 있으며, 그곳에 이르면 아무 차별이 없이 모두가 가지런히 불퇴전에 오른다(人天善惡 皆得往生 到彼無殊 齊同不退).”
?아미타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극락국토에 왕생하는 중생은 모두 아비발치(불퇴전)이며, 그 가운데는 일생보처도 많이 있느니라(極樂國土 眾生生者 皆是阿鞞跋致 其中多有 一生補處).”
그러므로 우리들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면 모든 사람이 불퇴전의 계위에 오르게 되며, 또한 모두가 다 일생보처(다음번에 부처 될 후보)의 신분을 갖게 됩니다. 이 법문이 가장 귀중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도 역시 아미타불의 본원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아미타불께서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 아니셨다면 이렇게 귀중한 법문도 없었을 것입니다.
본원에는 ‘인본의 원(因本之願)’과 ‘근본의 원(根本之願)’이 있습니다. 아미타불의 48대원 가운데 오직 제18원만이 근본의 원이며, 나머지는 모두 인본의 원입니다. 아미타불께서는 제11원에서 “무릇 극락세계에 왕생한 사람은 모두 불퇴전이며, 뿐만 아니라 반드시 멸도(滅度, 열반)에 이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만 하면 퇴전할 리가 없으며, 반드시 멸도에 이르게 됩니다. 제21원에서는 “32상과 80가지 수형호가 완전히 구족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22원에서는 “당신이 일생보처가 되게 하고, 뿐만 아니라 다른 불국토에 가서 널리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왕생과 우리들의 성불은 모두 아미타불의 본원에 달려 있습니다. 48원이든 제18원이든 모두가 다 잘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미타불께서 성불하신 것은 본원이 있었기 때문에 성불하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며, 또한 본원을 성취하신 부처님이시기 때문에 귀한 부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질문: 두 번째 질문입니다. 현재 국내(중국)의 도량에서는 대부분 정토법문을 선양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법문들은 계속 쇠퇴하고 있습니다. 만약 강력하게 유식이나 천태 등 다른 종파들을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불교가 더욱더 쇠약해지지 않겠습니까? 또한 종(宗: 선종)에도 정통하고 교(敎: 경전 내용을 근거로 하는 모든 종파의 가르침과 수행, 교종)에도 정통한 도량들이 더욱더 적어지지 않겠습니까? 이 외에 불법을 연구하는 데 있어 ?무량수경?이나 ?아미타경?뿐만 아니라, 다른 경전들도 반드시 읽고 공부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답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목적은 바로 널리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함이셨는데, 널리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면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신 목적이 달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 중생이 불교를 공부하지만 극락세계에 왕생하지 못하고, 죽은 뒤에도 여전히 계속 윤회하게 된다면, 설사 선종(宗)과 교종(敎)에도 통달하고 경전들에 깊이 파고들어 팔만사천법문을 다 통달한다고 해도, 그것은 석가모니부처님의 목적이 아니며 또한 우리가 불교를 배우는 목적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일단 한 번 윤회하게 되면 이생에서 배운 것들이 다음 생에서 반드시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우리는 업력에 따라 윤회하게 되는데, 만약 지옥에 떨어진다면 오직 고통만 받게 됩니다. 몸과 마음으로 온통 고통만 받기 때문에 과거에 공부한 것들을 다시 돌이켜 생각할 여력이 없습니다. 예컨대 만약 돼지의 태에 들게 된다면 바로 돼지의 습성과 성질과 어리석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불교를 배우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정토법문 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극락세계에 왕생하는 것입니다. 스스로도 이 법문을 배울 뿐만 아니라, 우리와 인연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이 법문을 배울 수 있도록 권유해야 합니다. 이 법문을 배울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큰 지혜이며, 장차 이 법문을 널리 전파할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대자대비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 법문을 배울 수 있으면 여러분은 바로 큰 선근과 큰 복덕을 지닌 것입니다.
모든 경전은 법이 소멸되는 시대(滅法時代)가 이르면 전부 다 소멸되지만, 오직 이 정토법문을 선양하는 ?무량수경?만은 소멸되지 않습니다. 이 경전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든 경전이 모두 소멸되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경전과 논서의 목적은 우리를 해탈케 하는 것이므로, 우리가 만약 해탈할 수 있다면 모든 경전과 논서의 목적이 달성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에 깊이 들어가지 못할 것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오직 왕생하지 못할 것을 걱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일단 왕생하기만 한다면 경전에 깊이 들어가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삼명육통(三明六通: 세 가지 지혜와 여섯 가지 신통)과 무수한(百千) 다라니가 당장에 모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저에 대해 말씀드리면, 젊었을 때는 상당히 많은 경전을 외웠는데, 지금은 나이가 많아서 기억력이 쇠퇴하여 그 경문들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세세생생 동안 제가 출가를 해본 적이 없다가 금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출가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고승으로 지냈을 때는 경전을 깊이 연구했던 적도 있었을 것이고, 모든 선한 일들도 다 해봤을 것입니다. 그리고 천상에도 태어나 봤을 텐데, 사천왕천‧도리천‧아마천‧도솔천에도 다녀왔으며, 색계천과 무색계천에도 다 다녀왔을 것입니다.
모든 법문도 다 공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극락세계에 왕생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범부입니다. 그리고 제가 사람을 죽인 적도 있었는데, 세세생생 동안 저에게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며, 저에게 상해를 입은 중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며, 저에게 도둑맞고, 강도당하고, 욕먹고, 모욕을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비지옥에 떨어졌던 적도 있었고, 도산지옥에 오른 적도 있었으며, 화탕지옥에 내려간 적도 있었고, 축생과 아귀가 되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차이는, 오직 극락세계에만 왕생한 적이 없다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이전에 출가하신 적이 있었나요?
(대중들: 있었습니다.)
고승으로 지낸 적은 있었나요?
(대중들: 있었습니다.)
일찍이 선정에 들 수 있었기에 오신통을 갖춘 적이 있었습니까?
(대중들: 모두 있었습니다.)
사람을 죽인 적이 있습니까?
(대중들: 있습니다.)
우리들은 어릴 적부터 고기를 먹은 적이 있습니까?
(대중들: 있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도 간접적인 살생인데, 하물며 직접적인 살생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세세생생 동안 모두 오계五戒를 범한 적이 있었고, 십악十惡의 업을 지었던 적도 있었으며, 천상에도, 지옥에도 모두 다녀왔습니다. ?정법염처경正法念處經?에서는 “천상에서부터 지옥에 떨어지고, 지옥에서부터 천상에 오른다”고 말씀하셨고, ?열반경?에서는 “비록 다시 범천의 몸을 얻거나 심지어 비상비비상천의 몸을 얻는다 해도, 목숨을 마치면 다시 삼악도 가운데로 떨어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색계천에 태어날 수 있으려면 선정의 경지가 상당히 높아야 합니다. 그런 선정이 있으면 신통력도 생기게 되는데 담벼락도 장애 없이 출입할 수 있으며, 과거와 미래도 알 수 있고, 또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타심통他心通도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목숨을 마치고 복이 다하면 장차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으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무색계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색계천에서 가장 장수하는 수명이 팔만 사천 겁인데, 그동안 매우 깊은 선정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죽으면 여전히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귀한 국왕이 되어 금과 옥으로 장식된 옷을 입더라도, 그가 바다 속에 빠질 때는 거지 한 사람이 바다 속에 빠지는 것과 다를 바 없어서, 둘 다 똑같이 죽고 맙니다. 이 말의 의미는, 만약 삼계육도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운명은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출가자든 재가자든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생사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어야 비로소 궁극적인 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러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법문은 배울 필요가 없으며 널리 전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도 여전히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염불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여전히 최선을 다해 인륜의 도리를 지키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삿된 생각을 방지하고 진실된 마음을 가지고, 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며, 또한 다른 교리들도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우선시되는 것이 있고 부차적인 것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먼저 이 정토 교리를 이해하고 난 다음에 한 구절 명호를 마음속에 굳게 지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저 생사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다른 것들은 각자의 인연과 능력에 따라서 하시라는 겁니다. 이와 같이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일들도 물론 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유감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때가 되면 이러한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나이가 들었을 때, 만약 정신이 맑고 귀와 눈이 밝다면 그건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명이 긴 사람일수록 대부분 치매에 걸리게 됩니다.
우리들의 아뢰야식 안에는 3장 12부의 경전이 조금도 빠짐없이 모두 저장되어 있기에, 극락세계에 이르러 아미타불을 뵙게 되면 모두 열리어 완전하게 갖추어지게 됩니다. 마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새벽별을 보시기 전에는 범부였지만, 한 번 새벽별을 보자마자 단박에 삼명육통과 백천 다라니를 갖추시어 즉시에 천상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제일의 부처님이 되신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가 왕생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해야 하며, 우리가 널리 중생을 제도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다만 성불하지 못할까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왕생하면 반드시 성불하게 되어 있고, 성불하면 틀림없이 널리 중생을 제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튼, 모든 것은 먼저 왕생하고 나서 보자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무상(無常: 죽음)이 시시각각으로 우리 곁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외출했다가 자동차에 부딪쳐 죽을 수도 있고, 비행기를 타다가 비행기 사고를 당할 수도 있으며, 차를 타다가 자동차 사고를 당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로지 이 정토법문을 배워야만 비로소 진정으로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상無常에 대한 관찰이 매우 깊은 사람이라야 착실하게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상에 대한 관찰이 깊을수록 그 사람이 열심히 정진하도록 동기부여가 되고, 그 사람이 현생에서 해탈할 수 있는 법문을 찾을 수 있도록 자극을 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무상에 대한 깊은 관찰이 없다면, 그는 노력을 하지 않고 느긋하게 이리저리 찾아 헤매면서 하루하루를 허비하다가, 정말 무상(죽음)이 닥쳐왔을 때는 이미 늦어버리게 됩니다.
질문: 만약 오로지 아미타불만 부르고, 다른 법문은 모두 배우지도 묻지도 않는다면 아마 이제부터 정토종만 남게 될 것이고, 시간이 더 지나면 말법의 시기가 매우 빨리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토염불에만) 치우쳐 집착하지 말고 마땅히 중용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더군다나 다른 보살들도 모두 많은 법문을 다 닦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답변: 이 문제에 대해 방금 모두 답변을 드렸던 것 같습니다.
문수보살께는 한 수의 발원게(願偈)가 있는데, 이 게송에서 문수보살님은 당신의 심정을 그대로 다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하오니, 제가 목숨이 마칠 때
모든 장애 다 사라지고
눈앞에서 직접 아미타부처님 뵈옵고
곧바로 극락세계로 왕생하여지이다.”
원아임종시願我臨終時 진제제장애盡除諸障碍
면견아미타面見阿彌陀 즉생안락찰卽生安樂刹
이것이 문수보살님의 발원입니다. 문수보살님은 법조(法照: 정토종 제4조, 당나라 때 오회염불을 창시)대사에게도 오로지 아미타불을 불러서 극락세계에 왕생하라고 권유하셨습니다. 그럼 보현보살님의 발원은 무엇일까요? 보살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하오니, 제가 목숨이 마치려 할 때
일체의 모든 장애 다 사라지고
눈앞에서 직접 저 아미타부처님 뵈옵고
곧바로 극락세계로 왕생하여지이다.”
원아임욕명종시願我臨欲命終時
진제일체제장애盡除一切諸障碍
면견피불아미타面見彼佛阿彌陀
즉득왕생안락찰卽得往生安樂刹
아울러 보현보살님은 화엄회상華嚴會上의 41위位 법신보살들을 인도하여 극락으로 왕생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아미타부처님 앞에서는 문수보살과 보현보살께서도 모두 스스로를 하품하생의 범부로 생각하시고, 임종 때에 모든 장애가 사라져 아무 탈 없이 순조롭게 극락에 왕생할 수 있기를 바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앙을 없애고 어려움을 면할 수 있는 공덕 또한 이 한 구절 아미타불 명호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재앙을 없애고 수명을 늘이게 해주시는 약사여래불의 불호의 능력도 이 나무아미타불이란 만덕홍명萬德洪名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여섯 자의 위대한 명호(洪名)는 바로 아가타약(불사약)이며, 만병통치약이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한다면, 오직 ‘나무아미타불’이란 한 부처님의 명호만 부르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미타불을 부르면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는 약속이나 하신 듯이 일제히 우리를 찬탄하시고, 우리를 기억하여 보호(護念)하시며, 우리를 칭찬해주십니다. 그러니 이 법문을 선택한 것은 사실 매우 지혜로운 선택인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정토법문을 배운 뒤에는 더 이상 또다시 관세음보살님이나 대세지보살님의 명호를 부를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지 아미타불만 부르면 관세음보살님이나 대세지보살님께서는 아주 기뻐하시면서 당신의 벗이 되어주시고 형제가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보살님은) 마치 그림자가 항상 형체를 따르는 것처럼 당신을 보호하십니다. 그 이유는, 당신이 부르는 부처님은 바로 그분들이 머리 위에 모시고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관세음보살님의 목적은 바로 고난에 빠진 중생을 인도하시어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하시는 것이며, 그런 다음 극락세계로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관세음보살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내가 무척 피곤하구나! 그대가 아직도 윤회하고 있고 아직도 고난 속에 있으니, 내가 세세생생토록 거듭거듭 그대를 고난에서 건져야 하니 말이다. 하지만 만약 그대가 지금 이생에서 나무아미타불을 부른다면 내가 홀가분할 수 있겠구나!” 이것이 바로 관세음보살님의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법문과 이 부처님과 이 보살님의 목적을 알고서, 문자에만 의지하여 뜻을 이해하려 하지 않아야만 비로소 샛길로 빠지지 않게 됩니다.
출처 / 연지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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