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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진관사 15-10-22 2015-10-22 20:44:07 본문
우리 부부와 윤선생님 부부가 저녁 먹으러 가다가 잠깐 들르다.
수백번 온 북한산 산행 가운데 가장 많이 간 길 가운데 하나가 아마도 진관사 뒤 비봉 올라가는 코스였을것이다.
그러니 진관사도 수십번은 들어왔을테고 하지만 이렇게 사진으로 남기는 것은 참 오랜만의 일이다.
이 절은 아마도 고려시대 절일 것 같다고 홈피에 적혀있고 지금은 비구니 스님이 주지인 것 같다.
그러니까 비구니 절이라는 이야기다.
진관사 홈페이지에 의하면
"진관사(津寬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직할사찰로, 동쪽의 불암사, 남쪽의 삼막사, 북쪽의 승가사와 함께 서쪽의 진관사로 예로부터 서울 근교의 4대 명찰(名刹)로 손꼽힌 이름난 사찰이며, 거란의 침입을 막아내고 국력을 수호한 고려 제8대 현종(顯宗)이 1011년(顯宗 2년)에 진관대사(津寬大師)를 위해 창건했으며, 6.25 당시 폭격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복구된 고찰로 전해집니다.
또한 '신라시대 고찰'이란 설과 조선 후기 승려 성능(聖能)이 찬술한 「북한지(北漢志)」에서는 원효대사가 진관대사와 더불어 삼천사와 함께 세웠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전해 내려오는 연기설화(緣起說話)에 의하면 고려 제5대 경종(景宗;975~981) 때로 거슬러 올라가 981년(景宗 6)에 경종이 죽고, 성종(成宗)을 거쳐 경종의 왕비인 헌애왕후(獻哀王后;964~1029)는 그의 아들 송(誦)이 왕위에 올라 목종(穆宗)이 되었을 때 천추태후(千秋太后; 獻哀王后)가 되어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됩니다.
또한 태후는 성종년간에 김치양(金致陽)과 정을 통해 몰래 사생아를 낳게 되었고 마침내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정쟁(政爭) 가운데 목종에게 아들이 없어 헌애왕후의 동생 헌정왕후(獻貞王后)와 태조(太祖)의 아들인 욱(郁, 安宗)의 사이에서 난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이 왕위 계승자로 봉해집니다.
이를 기회로 태후는 자신의 사생아를 옹립하기 위해 목종에게 참소하여 대량원군을 숭경사(崇慶寺)에 가두고 죽임을 꾀합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대량원군을 다시 진관대사(津寬大師)가 혼자서 수도하는 삼각산(三角山)의 한 암자로 축출하게 됩니다.
대량원군의 신변이 위험함을 느낀 진관대사는 산문 밖에 망보는 사람을 배치하는가 하면 본존불을 안치한 수미단 밑에 땅굴을 파고는 그 안에 12세인 대량원군을 피신시켜 자객으로부터 화를 면하게 하였습니다. 대량원군은 이곳에서 3년을 보내게 되는데, 1009년 강조가 군사를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왕순을 왕위에 옹립하니 대량원군 순이 제8대 현종(顯宗)으로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대량원군은 재생의 은덕에 대해 고개 숙여 감사하고, 진관대사와 눈물로 작별하면서 자신이 거처하던 땅굴을 신혈(神穴)이라 하고 절 이름을 신혈사(神穴寺)로 바꾸기를 청했습니다.
그 후 왕위에 오른 현종은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신혈사(神穴寺) 인근의 평탄한 터에 진관대사의 만년을 위해 크게 절을 세우게 하고, 진관대사의 이름을 따서 진관사(津寬寺)라 명하였으며, 그 후 마을 이름도 진관동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진관사의 창건 불사는 1011년 가을에 시작해 만 1년 동안 공사하여 1012년 가을에 준공을 보았습니다.
당시 대웅전이 사방 10칸, 동,서 승당이 각 30칸, 청풍당(淸風堂)과 명월요(明月寮)가 각 10칸, 제운루, 정재소, 일주문, 해탈문, 종각, 창고 등 상당한 규모로 건립되었습니다. 또한 불상과 장엄구, 일상도구 등 사찰에 필요한 일체의 모든 것을 현종이 지원하였습니다. 현종은 이 진관사에 최고의 정성을 모아 불사를 이룩한 것입니다. 그리고 완공 그해 10월에 낙경법회(落慶法會)를 연 후 진관대사를 국사로까지 책봉하였습니다.
고려시대 이래로 역대 왕들의 왕래가 빈번했던 진관사는 조선시대에 수도를 서울로 옮기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수륙재(水陸齋)의 근본도량으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는데, 권근(權近)이 지은『수륙사조성기(水陸社造成記)』에 그 전모가 전해집니다.
1397년(太祖 6) 정월에 태조는 내신 이득분(李得芬)과 조선(祖禪)스님에게 조상의 명복을 빌고 나라일로 죽어 제사조차 받지 못하는 굶주린 영혼을 위해 수륙사(水陸社)를 설치할 것을 명하게 됩니다. 이에 이득분과 상충달(尙忠達), 지상(志祥)스님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답사한 결과 수륙재를 열기에 가장 적합 곳으로 진관사를 선정하게 됩니다.
수륙사 건립은 조선을 건국하면서 전쟁에서 죽어간 고려왕실의 영혼을 기리는 목적에서였으며, 내면적으로는 불안정한 국민정서의 동요를 막고 조선왕실의 안정을 꾀할 목적도 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후 태조는 진관사에 수륙재(水陸齋)를 개설하도록 공사를 지시하고 절에도 행차하였으며, 1397년 9월 낙성식에도 참여하였습니다.
이에 고려시대 역대 왕들의 지원을 받던 진관사는 조선왕조의 국가적 수륙재(水陸齋)가 개설되는 사찰로서 다시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당시 진관사에 조영된 시설물은 모두 59칸으로, 상,중,하단의 삼단을 기본구조로, 중,하단에 행랑이 연이어 들어서 있는 왕실사찰로서의 위엄과 규모를 갖추게 됩니다.
이후 불교를 배척하던 태종 역시 1413년(太宗 13)에 진관사에서 성녕대군(誠寧大君)을 위한 수륙재를 열고 향과 제교서(祭敎書)를 내렸으며, 수륙재위전(水陸齋位田) 100결을 하사하여 재를 계속하게 하였습니다.
따라서 절에서는 매년 1월 또는 2월 15일에 수륙재가 열려 조선왕실의 명실상부한 수륙도량으로서 인정받게 되었으며, 국찰(國刹)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세종 때에는 1421년(世宗 3)에 태종 내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재를 올린 이후부터 왕실의 각종 재를 봉행하는 사찰로 국가에서 정례화시켰습니다. 그리고 세종은 1442년(世宗 24)에 진관사에 집현전 학사들을 위한 독서당을 세우고 성삼문, 신숙주, 박팽년 등과 같은 선비들을 학업에 몰두하도록 하였습니다.
독서당 건립 후 진관사에서는 학사들과의 교류가 빈번해지면서 왕실과 사대부, 그리고 서민들까지 애용하는 전국민의 사찰로 확대되었습니다.
또 1452년(文宗 2)에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지는데, 1463년(世祖 9)의 화재로 일부가람이 소실되어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 후 1470년(成宗 1)에 벽운(碧雲)스님이 다시 중건하고, 1854년(哲宗 5)과 1858년에 중수되었으며, 1879년(高宗 16)에는 당두화상(堂頭和尙) 경운(慶雲)대선사가 큰방 34칸을 지어 국찰로서의 대가람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근대에는 1908년에 송암(松庵)선사가 경내에 오층석탑을 조성하였으며, 1910년에는 경운(慶雲)선사에 의해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대웅전 삼존상을 개금하고, 아울러 명부전의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시왕탱화 등을 개금ㆍ보수하였습니다. 또한 독성전과 칠성각을 신축하고, 자신이 소유했던 토지를 사찰에 무상으로 돌려 '백련결사염불회' 의 자원으로 쓰게 함으로써 근대 진관사 중창주로서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근대기의 열성적인 노력으로 일신한 진관사는 1950년 한국전쟁 때 나한전 등 3동만을 남기고 모두 소실되었습니다.
이에 폐허만 있던 진관사는 1963년 비구니 최진관(崔眞觀)스님이 발원하여 건물을 차례로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게 됩니다.
진관(眞觀) 스님은 1965년에 현재의 대웅전(大雄殿)을 신축하고, 1966년에 삼존불(三尊佛) 을 조성하였으며, 1967년에 후불탱(後佛幀) 및 신중탱(神衆幀) 을 조성하여 진관사 주법당(主法堂)을 여법(如法)하게 일신하였습니다. 또 1968년에는 명부전(冥府殿)을 비롯하여 1969년에 지장보살과 시왕상을 조성하였으며, 1970년에는 일주문과 동별당을 신축하고, 1972년에 나가원(那迦院) 을 신축, 1974년에 범종(梵鐘) 조성, 1975년 동정각(動靜閣) 신축 등 진관스님의 불사로 옛 가람(伽藍)의 자취를 찾는 여법한 가람(伽藍)이 복원되었습니다.
또한 진관스님은 부처님의 자비사상과 중생구제의 원력을 사회복지와 포교 활동을 통하여 실현하고자 1996년에 진관사 부설 포교당인 보현정사와 코끼리유치원을 신축하였으며, 2007년 9월에 사회복지법인 진관무위원을 설립하여 지역사회 복지증진을 위한 또 다른 장을 열었습니다."
단종실록 단종 1년 6월 21일자에 의하면 진관사 주지 각돈이 군기감의 계집종 연비가 흥천사에 있을 때 몰래 간통하여 계집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국가에서 각돈을 신임하여 진관수륙사를 짓도록 하였으나 정욕을 자행하여 거리낌 없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최근에는 템플 스테이한다고 개울 건너편에 많은 건물을 지었고 절도 새로이 개보수 신축등을 많이 했다.
지금도 진입로 부분에 계속 도로공사와 단장을 하고 있다.
진관사의 주법당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 팔작지붕의 다포계 단층건물로
정면 13.6m, 측면 8m의 크기이다.
기단의 초석만 원래의 것이고 건물은 1965년에 중창주인 진관스님이 신축한 것으로,
장방형의 화강암 기단 위로 원형초석을 두고 그 위로 두리기둥을 세워 다포를 받친 모습이다.
다포는 용두와 어우러져 한껏 주법당의 위엄을 보이며,
팔작지붕 위에 깔린 청기와는 뒤의 삼각산을 배경으로 한껏 조화를 이룬다.
대웅전의 외부는 삼면에 외벽화를 장엄한 모습으로,
외벽은 심우도와 비천으로 단청되어 있으며, 어간에는 편액과 주련 6기가 걸려 있다.
건축창호의 살짜임새는 앞면 양칸은 빗살이며 중앙에만 솟을빗살꽃살로 짜여져 있고
용머리를 중앙문 양쪽에 조각하여 대웅전을 수호하고 있다.
건물 내부는 중앙 감실형 불단 위로 1966년에 조성된 석가모니불, 미륵보살,
제화갈라보살의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을 모시고,
그 뒤로 1967년에 금어(金魚) 일섭(日燮)스님이 조성한 삼신불후불탱화(三身佛後佛幀畵)를
봉안하였는데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고
그 왼쪽에 노사나불을, 그 오른쪽에 석가여래를 배치하였다.
노사나불과 석가여래의 아래에는 각각 한 명의 천왕이 있어 전체적으로
두 명의 천왕이 삼신불을 호위하는 구도를보여주고 있다.
또 삼존불의 우측 벽에는 1990년에 금어(金魚) 수산(樹山) 임석환(林石煥)이
조성한 오여래탱화(五如來幀畵)를 두고 좌측 벽에는 1967년에 조성된 신중탱화(神衆幀畵)와
1934년에 화경(和璟)스님이 그린 현왕탱화(現王幀畵)를 봉안하였다.
현왕탱의 구도는 단순한데, 중앙에 현왕(염라대왕)을 두고 그 아래에 판관(判官)과
녹사(錄事)가 마주한 모습이다.
전체적인 색감은 적색과 황색이 주조를 이루며, 크기는 가로 63.5㎝, 세로 96㎝이다.
이외 불구(佛具)로는 1966년에 조성된 높이 93㎝, 구경 57㎝의 범종이 있으며,
후불벽 뒤로 괘불궤(掛佛櫃)와괘불(掛佛)이 있다. 출처: 진관사홈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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