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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호시비 본문
1.서애-학봉 서열 논란에 국학진흥원 `침묵'
최근 안동지역에서는 400년 가까이 후학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여 온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위폐 서열 문제가 두 가문 종손의 합의로 일단락됐다는 소식에 뒷말이 연이어 터져 나오는 등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서원에 위패를 모시는 일을 후학이 아닌 문중 사람들이 논의하는 것은 유교 질서에 어긋날 뿐 아니라 결국 연령, 학식 등에 앞서 벼슬의 높낮이로 사람을 평가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는 것.
그러나 정작 이 문제와 관련해 안동지역에 자리잡은 한국국학진흥원이 ’노코멘트’로 일관해 빈축을 사고 있다.
진흥원측은 최근 학봉-서애의 위패 서열 문제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얘기할 입장이 못 된다”라며 극구 답변을 회피했다.
’그럼 어디에 물어보면 되느냐’는 물음에도 “서울대 규장각 같은데 알아보라”라는 다분히 ’나몰라라’식의 답변이 이어지면서 짧은 문답은 끝이 났다.
국학진흥원측의 답변에는 지역의 두 유력 가문의 일에 끼어들기 싫다는 의도가 역력했다.
명색이 한국학 연구기관이라는 사실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정작 이 문제는 다른 지역의 학자들이 적잖은 우려와 함께 그 타당성을 논하고 있는 실정이다.
도산서원 인근에 자리잡은 한국국학진흥원(1996년 설립)은 한국학 자료의 수집ㆍ보존과 연구 및 보급을 통합적으로 수행하는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을 표방하고 있다.
현재 연구원 12명을 비롯해 30명 가량이 문화관광부와 경상북도, 안동시로부터 매년 수 십억원의 운영비와 사업비를 지원받으면서 연구 및 사업활동을 펼치고 있다.
무엇보다 전국 서원의 3분 1이 모여 있다는 안동지역의 특성에 맞춰 서원 관련 책자를 다수 발간하는 등 서원의 문화와 예법 등과 관련해서는 어느 연구기관보다도 정통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안동지역의 한 서원에 다시 모시기로 했다는 학봉-서애의 위패 서열 문제와 관련해 언급을 회피하는 것은 객관적인 학술연구를 수행하는 공공기관으로서 지나치게 몸을 사리는 것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2.학봉·서애 집안 400년 자존심 대결 본질은?
경북 안동에서 400년 동안 자존심 대결을 벌여 왔던 풍산 류(柳)씨와 의성 김(金)씨 가문의 '병호시비'가 마무리됐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 1607)과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1538~1593)은 조선 선조 때 학자이자 정치가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수제자였다. 모두 경북 안동 출신이었다. 퇴계는 학봉을 보고 "이런 아이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했다. 서애를 보고도 "하늘이 내린 아이"라고 했다. 나이는 학봉이 4세 위였고, 생전 벼슬은 서애(영의정)가 학봉(경상도 관찰사)보다 높았다.
살아 있을 때 나쁘지 않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1620년(광해군 12)부터 이상하게 변했다. 퇴계를 모신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당시 여강서원)에서 두 사람의 위패를 함께 모시기로 했는데 퇴계의 왼쪽인 상석에 누구를 앉히느냐를 두고 논란이 생긴 것이다. 학봉 쪽은 나이 순, 서애 쪽은 벼슬 순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영남학파의 장로 정경세(鄭經世)는 서애의 손을 들어주는 판정을 내렸다.
1805년(순조 5)에 이 문제는 또 다시 불거졌다. 영남 유림들이 서울 문묘에 서애·학봉과 한강 정구(鄭逑), 여헌 장현광(張顯光) 등 네 학자의 신주를 모시게 해 달라고 청원키로 했다. 자손 네명이 함께 상소문을 쓰던 중 나이순으로 쓰자는 합의가 이뤄졌다. 이에 불복한 서애측이 따로 상소를 올렸는데 조정에서는 둘 다 기각해 버렸다. 곧 '3차전'이 벌어졌다. 한강과 여헌 쪽 선비들은 자기들끼리 상소를 올리기로 하고 이를 영남 유림에 통보했다. 안동 유림은 '서애·학봉 사이의 다툼을 그만두는 동시에 한강·여헌파를 규탄해야겠다'고 결심한 뒤 류회문(柳晦文)에게 그 통문을 쓰게 했다.
그런데 이 통문에서 '학봉·서애'의 순으로 글을 썼던 것이 돌이키기 어려운 결과를 낳았다. 서애파는 호계서원에 등을 돌리고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따로 모였고 안동의 유림들은 두 파로 갈라섰다. 두 서원의 앞글자를 따 이를 '병호시비(屛虎是非)'라 부른다. 최근 호계서원의 복원 추진 과정에서 서애와 학봉의 후손들이 만나 '벼슬 순서대로 하기로' 합의한 것은 1620년의 결정을 따른 셈이다.
병호시비를 '양반 가문 사이의 무의미한 체면 싸움'이었던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퇴계의 학문적 정통(正統)을 계승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중앙 정계에서 실각해 지방으로 물러났던 영남 남인은 병파와 호파로 갈라진 뒤 각자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서원과 향교에서 조직적·학술적 역량을 축적해 갔다"며 "이는 위정척사운동과 의병·독립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3.학봉-서애 400년 서열 다툼 종식 `후폭풍'
400년 가까이 후학과 후손들이 치열한 다툼을 벌여 온 학봉 김성일(1538~1593)과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위폐 서열 문제가 최근 두 가문 종손의 합의로 일단락된 것과 관련해 이의가 제기되는 등 논란이 일고 있다.
최근 안동시는 곧 복원작업에 들어갈 호계서원(안동시 임하면)에서 퇴계 이황의 위패를 중심으로 상석인 왼쪽에 누구의 위폐를 모시느냐를 놓고 두 가문의 종손이 모여 서애(류성룡)의 위폐를 상석에 두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호계서원은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직후인 1573년 제자들이 세운 것으로,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인 1610년대부터 수제자 두 사람 중 누구의 위폐를 윗자리에 모실 것인가를 놓고 후학들이 수 백년동안 치열한 신경전을 벌여왔다.
맨 처음 이들의 서열이 정해진 건 1620년대로 당시 서애의 제자이자 대학자였던 우복 정경세(1563~1633)가 벼슬의 높낮이로 정해야 한다면서 서애 류성룡의 손을 들어줬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지금의 국무총리인 영의정으로 활동하면서 국난 극복에 공을 세운 인물이며 학봉 김성일은 임진왜란 때 지금의 도지사급인 경상우도 초유사, 관찰사 등을 맡아 활약하다가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학봉의 후학들은 그러나 자기 스승이 서애보다 나이도 4살 더 많고 학식도 뛰어난 데도 벼슬이 낮다는 이유로 아랫자리에 머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반발했지만 상대적으로 학파의 세력이 약했던 시대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했다.
그 뒤 2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세력간 역학 구도의 변화와 함께 엎치락뒤치락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급기야 1800년대 초에 임금에게 상소까지 올리게 되지만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양측의 대립으로 결국 결론을 내지 못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서애 류성룡의 위패가 호계서원을 떠나 병산서원으로 옮기게 되면서 사실상 두 위패의 불편한 동거는 막을 내렸다.
따라서 최근에 두 가문의 종손이 위패 서열 문제를 논의한 것은 약 200년 만의 일로 400년 전에 촉발된 긴 다툼에 종지부를 찍는 듯 했다.
그러나 종손들의 이 같은 합의가 부적절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면서 이 문제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우선 서원에서 위패를 모시는 것은 학문의 전당에서 행해지는 사제간의 일로 특정 가문이 나설 일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경기문화재연구원 윤여빈 전문위원은 “두 가문의 종손이 무슨 자격으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모르겠다”라며 “수 백년간 갑론을박하며 나름대로 자존심을 지켜 온 양측 유학자들에게는 모욕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성균관 관계자도 “전후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서원에서 위패를 모시는 일을 후학이 아닌 가문 사람들이 논의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현실적으로 두 가문 종손의 합의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결국 벼슬의 높낮이로 사람을 평가하는 결과를 낳은 것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
윤여빈 전문위원은 “이번 합의는 1620년대 우복 선생의 결정을 그대로 따르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결국 관찰사보다 영의정 벼슬이 높다는 이유로 서애를 윗자리에 모시겠다는 얘기밖에 안 된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서원에서 위패의 소목(昭穆:신주 모시는 차례)은 배우는 학생들의 모범이 되는 선생님을 순서대로 모시는 것”이라며 “학덕, 연령, 국가에 대한 공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지 단순히 벼슬 높낮이로 구분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병호시비(서애의 병산서원, 학봉의 호계서원간 시비)라는 이름으로 유학의 본향인 안동지역에서 수 백년간 전개돼 온 이 다툼은 단순히 자존심만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양측의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면서 역사의 한 단면을 장식해 왔다”라며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굳이 지금 와서 서열을 정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학봉(의성 김씨)의 후손인 김모(67.안동시)씨도 “지금껏 두 가문이 각자 두 분을 잘 섬겨왔는데 또다시 서열을 따지게끔 만들 필요가 뭐 있느냐”라며 “후세들에게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음으로 평가된다는 인식을 심어줄까 봐 적잖이 걱정스럽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논란과 관련해 안동시 관계자는 “유림측에서 호계서원 복원을 추진하면서 나름대로 위폐 서열을 정리를 할 필요를 느꼈던 것 같다”라며 “서원 복원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만큼 앞으로 제기되는 문제들은 신중하게 검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4.서애와 학봉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가 신하들과 대화를 나누다 "내가 어떤 임금인가" 물은 일이 있었다. 정이주가 먼저 답했다. "전하는 요순(堯舜)과 같은 분입니다." 그러자 김성일이 말했다. "전하는 요순 같은 명군도 될 수 있지만 걸주(桀紂·중국 고대의 두 폭군)도 될 수 있습니다."
▶임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자 곁에 있던 류성룡이 거들었다. "김성일이 말한 것은 걸주 같은 임금이 되어선 안 된다는 뜻이니 전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표현한 것입니다." 선조는 그제야 얼굴빛을 바꾸고 술상을 가져오라 했다.
▶안동 출신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은 퇴계 이황의 300여 제자 중에서도 우뚝한 두 봉우리였다. 서애보다 네살 많은 학봉은 매사 원칙과 자존심을 지키는 학자 타입이었다. 서애는 화합과 조정 능력이 탁월한 정치 지도자 면모가 강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나자 조정에서 학봉을 탄핵하자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가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낮게 봤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서애는 '징비록'에서 "학봉 역시 전란 조짐을 간파하고 있었다"고 변호했다.
▶같은 스승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지만 두 사람이 죽은 뒤 세상은 둘을 갈라놓았다. 1620년 퇴계를 모시는 호계서원에 제자들도 함께 배향하면서 퇴계를 중심으로 상석인 왼쪽에 학봉과 서애 중 누구의 위패를 모시느냐가 문제가 됐다. 서애 쪽에선 벼슬이 영의정까지 오른 서애를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했고 학봉 쪽에선 나이로 보나 학문으로 보나 학봉이 앞서야 한다고 했다. 오랜 우여곡절 끝에 서애의 위패는 병산서원, 학봉의 위패는 임천서원, 스승인 퇴계의 위패는 도산서원에 모시게 됐다. 1805년 서울 문묘에 서애와 학봉을 모시려 할 때도 양쪽에서 서로 서열이 앞선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조정에서 없던 일로 한 일이 있다.
▶학봉과 서애의 서열 논쟁은 걸출한 선비가 많아 조선의 추로지향(鄒魯之鄕·공자와 맹자의 고장)이라 불리는 안동 유림에서 골치 아픈 난제 중 하나였다. 그 바탕에는 학문을 둘러싼 집안과 제자들의 자존심, 당쟁과 연결된 정치적 입장 차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올해 안에 착수할 호계서원 복원을 계기로 학봉의 의성 김씨 가문과 서애의 풍산 류씨 가문이 위패의 서열에 합의했다고 한다. 퇴계 왼편에 서애, 오른편에 학봉을 모신다는 것이다. 후손들의 400년 만의 화해가 조상들을 더욱 빛나게 할 것이다.
[조용헌 살롱] 좌(左)와 우(右)의 의미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안동의 유림사회에서 400년간 이어져 온 논란이 병호시비(屛虎是非)이다. 서애 류성용과 학봉 김성일의 위패를 어느 쪽에 모실 것이냐를 두고 양쪽 제자들 간에 벌어진 논쟁이다. 위패를 왼쪽에 모실 것이냐, 아니면 오른쪽에 모실 것이냐의 문제였다. 오른쪽보다는 왼쪽이 높은 자리로 여겨졌다. 그래서 양쪽 제자들은 서로 자기의 선생을 왼쪽에 모시려고 애를 썼다. 가운데에는 퇴계가 있고, 그 왼쪽에 학봉의 위패를 모시면 서애 쪽이 반발했고, 왼쪽에 서애의 위패를 모시면 학봉 쪽이 반발했다. 옛날 사람들은 이를 심각한 문제로 생각했다. 왜 옛날 사람들은 왼쪽을 오른쪽보다 위라고 생각하였을까.
만약 조선시대 좌우개념에 비추어 보면 우파보다는 좌파가 더 높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 아닌가? 필자는 그동안 동양학의 원로 선생님들을 만날 때마다 좌(左)와 우(右)의 문제를 질문하곤 하였다. 어느 책에도 이 문제를 시원하게 답변해주는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가들을 역방(歷訪)한 끝에 나름대로 결론을 내렸다. 먼저 좌(左) 자에는 '공(工)'이 들어간다. 우(右) 자에는 '구(口)'가 들어간다. 공(工)은 공부(工夫)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왼쪽 내지 왼손은 공부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반대로 구(口)는 입 구(口)이다. 오른손은 입에 음식을 넣을 때, 즉 밥 먹을 때 사용하는 손이라는 의미가 있다. 한국인들 대부분은 어린 시절에 어른들로부터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잡도록 훈련받는 경우가 많았다. 왼손으로 숟가락을 잡는 아이가 있으면 이를 오른손으로 교정하곤 하였다.
이를 다시 우뇌(右腦)와 좌뇌(左腦) 이론에 대입해 볼 것 같으면, 왼손은 우뇌와 연결된다. 오른손은 좌뇌와 연결된다. 왼손을 많이 쓰면 우뇌가 개발되고, 오른손을 많이 쓰면 좌뇌가 개발된다. 왼쪽이 공부기능이라고 한다면, 이때의 공부는 우뇌 개발을 의미하는 것이 되는가? 우뇌는 창조력과 종합적 사고를 담당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 학봉 종손이 양보를 해서 400년 시비에 종지부를 찍었다. 좌우가 문제가 아니라 호계서원(虎溪書院)을 복원하고, 선비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고 여긴 덕분이다.
鶴峯 金誠一 - 퇴계의 수제자… 임란 때 진주성대첩 이끌어
[종가기행 21] 義城 金氏 - 禮를 지키며 온화하고 검소, 博約 계승
'영남 종손의 표준'
[종가기행 21] 의성 김씨 학봉 김성일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시호는 문충(文忠)
퇴계 선생이 1569년(선조2) 임금과 조정 중신들의 간곡한 청을 뿌리치고 향리인 안동 도산(陶山)으로 돌아가면서 추천한 인재 세 사람이 있다. 동고 이준경, 고봉 기대승, 그리고 학봉 김성일이다.
동고는 2년 연상으로 영의정에 이른 이고, 고봉은 26년 후배로 퇴계의 대표적 제자며, 학봉은 향리의 37년 후배로 수제자다. 함께 추천한 동고와 고봉은 불화로 이듬해 결별했고, 학봉은 22년 뒤인 1591년에 일본 통신부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복명한 일로 곤경에 처했다.
퇴계가 서애를 추천하지 않은 일은 이미 승승장구 하고 있어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에 비해 학봉은 보다 오랫동안 문하에 있었을 뿐 아니라 도학에 더욱 침잠해 쉽사리 벼슬에 나아가려 하지 않은 기질을 지녔다. 죽음을 앞둔 퇴계가 학봉을 추천한 것은 학봉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말해준다.
동아원색대백과사전을 보면 학봉에 대해서 '당파싸움에 급급한 나머지 침략의 우려가 없다고 보고했다'라고 쓰여 있다. 학교에서도 그를 편협한 당파성 때문에 국론을 분열시킨 인물로 가르쳤다. 그러나 1991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간행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왜가 반드시 침입할 것이라는 정사 황윤길의 주장과는 달리 민심이 흉흉할 것을 우려하여 군사를 일으킬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고 상반된 견해를 밝혔다'고 적고 있다.
다소 미흡하지만, 후자가 역사학계의 정설이지 않나 싶다. 임진왜란 최고의 권위 있는 회고록인 징비록(류성룡 저, 국보 제132호)에 보면 저간의 사정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려 깊은 대학자의 고뇌'에서 내린 복명이었다는 해석이다.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물을 읽어보면 학봉이 일본에 통신부사로 가서 벌인 외교가 얼마나 주체적이고 사려 깊은 것이었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학봉이 취한 '위의(威儀)를 갖춘 외교'와 '무력에 굴하지 않는 외교'를 정사와 서장관이 힘을 합해 이루었다면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전란을 겪지 않았을 수 있었다는 일부의 주장도 있다.
학봉 선생의 일생을 알려면 우복 정경세가 지은 신도비를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거의 책 한 권 분량이라 쉽지 않다. 요약한 글로는 동문수학한 한강 정구의 '학봉 묘방석(墓傍石)'에 적은 글이 있다. 묘방석이란 무엇인가? 창석 이준이 지은 글에 답이 있다.
"사순(士純)의 휘는 성일(誠一)이니, 문소(聞韶, 義城의 古號) 김씨이다. 무술년(1538)에 출생하여 계사년(1593)에 졸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년(1592)에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는 정직하고 흔들리지 않음으로 왕의 위엄과 교화를 멀리 전파하였으며, 초유사(招諭使)의 명을 받고는 지성으로 감동하여 한 지역을 막았으니 충성은 사직에 남아 있고 이름은 역사에 실렸다. 일찍이 퇴계 선생의 문하에 올라 심학(心學)의 요체(要諦)를 배웠으며, 덕행과 훈업은 모두 길이 아름답게 빛날 만하다. 만력 기미년(1619)에 한강 정구 씀."
"선생을 장사지낼 때 이상한 돌이 광중(壙中)에서 나왔는데 모양은 큰 북 같고 돌결이 부드러워 조각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굴려서 묘 왼편에 두어 선생의 행적 대강을 새겼는데 정(鄭) 한강(寒岡)이 지은 것이다. 돌이 이곳에 묻힌 것이 아득한 옛날일 텐데 선생을 모실 때 비로소 나와 그 사실을 기록하는 데 쓰였으니 조물주의 의도가 필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 기이한 일이로다.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이준(李埈)이 삼가 적다."
학봉의 시호는 문충공(文忠公)이다. 문자 시호에다 충성 충자를 받았다.
그는 임진왜란을 당하자 몸으로 맞서 싸우다 순국했다. 탁월한 도학자면서 애국 애민을 실천했던 이다. 임란 초기에 초유사의 소임을 맡아 의병(義兵)의 발기와 지원에 크게 기여했고 경상우도 관찰사가 된 뒤로는 관군과 의병을 함께 지휘하여 1592년 10월 임란의 3대대첩 중의 하나인 진주성대첩을 이루었다.
그 이듬해 4월 각 고을을 순시한 뒤 다시 진주성으로 돌아왔는데, 피로와 풍토병이 겹쳐 4월 29일 진주성 공관에서 운명하니 향년 56세였다. 운명할 때에 참모들이 약물을 들이자, "나는 약을 먹고 살 수 없는 몸이다. 제군은 그만 두라"했다.
대소헌 조종도와 죽유 오운이 병문안을 하면서 "명나라 구원병들이 승승장구하여 남하해 이미 서울을 수복했으며, 그래서 모든 왜구들을 도망치게 할 것입니다"라 하자, 선생은 눈을 크게 뜨면서 말했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먼저 죽다니…. 그러나 그것 또한 운명인데 어찌 하겠나. 적들이 물러가면 회복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의 붕당은 누가 혁파할 것인가…." 지공무사(至公無私)한 처사요 심사원려(深思遠慮)한 태도다.
학봉은 타고난 시인이며 참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이다. 그가 남긴 시가 대략 1,500여 편이나 되는데, 다수의 애민시(愛民詩)도 남겼다.
그 대표작이 모별자시(母別子詩)로 60구(句)나 되는 칠언고시(七言古詩) 장편인데 39세(1576, 이조좌랑) 때 썼다. 세상을 버리기 4개월 전인 1592년 12월 24일에 경상우도 감사로서 산청(당시 山陰縣)에서 안동에 있는 부인에게 보낸 마지막 한글 편지의 사연은 절절하다.
"요사이 추위에 모두들 어찌 계신지 궁금하네. 나는 산음 고을에 와서 몸은 무사히 있으나 봄이 되면 도적들이 달려들 것이니 어찌할 줄 모르겠네. 직산(稷山)에 있던 옷은 다 왔으니 추워하고 있는지 염려 마오. 장모 모시고 설 잘 쇠시오. 자식들에게 편지 쓰지 못하였네. 잘 있으라 하오. 감사(監司)라고 해도 음식조차 가까스로 먹고 다니니 아무것도 보내지 못하오. 살아서 다시 보면 그때나 나을까 모르지만 기필하지 못하네. 그리워 말고 편안히 계시오. 끝없어 이만. 섣달 스무나흗날. 석이(버섯의 일종) 두근, 석류 20개, 조기 두 마리 보내오."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문충공의 시호를 받았으며, 안동의 여강서원(廬江書院, 나중에 호계서원으로 바뀌었다 훼철)과 임천서원, 전남 나주의 대곡서원(大谷書院), 경북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경남 진주의 경림서원(慶林書院) 등지에 배향되었다.
문집 10책이 남아 있고,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완역, 발간되었다. 종택 유물전시관에는 보물 제905호(56종 261점)로 지정된 전적과, 보물 제906호(17종 242점)로 지정된 고문서를 비롯해 서산 김흥락 선생의 목판 등이 전시 보관돼 있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114대 종손 김시인(金時寅) 씨 - 후손들 종가 중심으로 화합… 차종손은 지금도 門外拜 실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종가에 대해 할 얘기가 많지만 크게
▲선생의 삶과 학문
▲400년을 이어온 종가 사람들의 구국활동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를 근자에 어떤 작가는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지도층의 사회적 책무)’라는 시각으로 종가를 소개해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필자는 여러 번 종택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사랑채 정면에 걸린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현판은 그렇게 화려하지도 규모가 크지도 않을 뿐더러 글씨 또한 아담하다. ‘박약진전(博約眞詮, 박약의 참된 깨달음)’. 자세히 풀이하면 ‘널리 배우고 예(禮)로써 요약하라는 공자의 말씀을 제대로 깨달음’ 정도의 의미다.
‘박약’은 일반인에게 생소한 말이다. 특히 한글로 표기했을 때는 더욱 그렇다.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인 박약(薄弱)과 헷갈린다. 그래서 1987년에 출범한 사단법인 박약회는 아직까지 정체성에 대해 오해를 받기도 한다.
‘박약’이란 한마디로 유학의 핵심이다. 이를 송나라 주자(朱子, 1130-1200)가 이어받았고, 우리나라에서는 퇴계 이황(1501-1570)이 계승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경북 안동 도산서원(陶山書院)의 동쪽 공부방(東齋) 이름도 박약재(博約齋)이고, 유학의 본질을 배우고 이를 실천하자는 취지로 결성한 모임도 박약회였다.
만약 사회에서 이 단어가 공자로부터 내려오는 학문의 정통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사단법인 박약회에서 그렇게 쓰지도 못했을 것이다. 박약재라는 방 이름도 정암 조광조를 모신 전남 화순의 죽수서원(竹樹書院)에서만 쓰고 있다.
퇴계는 도학 적전(嫡傳)을 이은 분으로서 정암을 존경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학봉 종택에 걸린 ‘박약진전’이란 현판은 학문의 적전을 계승한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필자가 이 현판을 주목한 이유다.
‘박약진전’에 대한 계승 문제에 직접적인 이견을 표시한 글이 있기에 흥미롭게 읽었다. 우복 정경세의 문집 별집에 실린 우산서원(愚山書院,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있었던 서원) 봉안문(奉安文)에서 ‘박약진전’을 언급하고 있다. 이 글을 쓴 이는 서애 류성룡의 후손 학서 류이좌(柳台佐, 하회 북촌 주인으로 서애 6대손. 대사간에 이름)다.
학서는 ‘주자의 심학(心學, 性理學)과 박약진전을 퇴계 선생이 창명(倡明, 창도해서 밝힘)했고 서애 할아버지(厓老)가 이를 전해 도가 실추되지 않게 했으며 이를 선생이 계승했다’고 추앙했다. 여기서 ‘선생’은 서원에 새롭게 배향하는 우복을 말한다. 우복은 서애의 수제자였다. 학서의 견해로 보면, 박약진전은 서애가 이었고 이를 우복이 계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학봉 종가에는 이를 반박하는 아주 든든한 ‘물증(物證)’이 남아 있다. 이는 퇴계병명(退溪屛銘, 題金士純屛銘)이다. 학봉의 도학 연원(淵源)을 계승한 대산 이상정은 이 병명을 “퇴도 노선생(이황)의 병명(屛銘)을 첨부하여 연원을 전해 부탁한 실제를 드러내었으니, 후대 사람들이 이를 잘 읽어 보면 무언가 얻는 바가 있을 것으로, 반드시 마음속에 융합되는 바가 있어 옷자락을 잡고 문하에 나아가서 친히 말씀을 듣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의미를 부여했다.
병명은 모두 80자가4자 대구(對句)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절정은 마지막 구절인 ‘박약양지(博約兩至) 연원정맥(淵源正脈)’. 이 구절로 인해 후일 학봉 종가는 물론 유림사회에서 도학의 적전을 유념한 스승 퇴계의 징표라고 인식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견도 있었고, 이는 학문적 토론과 논쟁으로 길게 이어졌다.
현재 이 글은 퇴계집 권44와 학봉집 부록 권3에 함께 실려 있다. 당시 퇴계 나이 66세, 학봉은 29세였다. 완숙한 학자와 문과 급제를 앞둔(학봉은 31세에 급제) 신진 학자 간의 의미있는 만남이었다.
공경과 정일로서 덕 이룬 인 요순(堯舜)이요 / 堯欽舜一 두려움과 공경으로 덕 닦은 인 우탕(禹湯)이네 / 禹祗湯慄 공손하고 삼감은 마음 지킨 문왕(文王)이요 / 翼翼文心 호호탕탕 드넓음은 법도 지킨 무왕(武王)이네 / 蕩蕩武極 노력하고 조심하라 말한 인 주공(周公)이요 / 周稱乾惕 발분망식 즐겁다 말한 이는 공자(孔子)였네 / 孔云憤樂 자신을 반성하며 조심한 인 증자(曾子)이요 / 曾省戰兢 사욕 잊고 예(禮)를 회복한 인 안자(顔子)였네 / 顔事克復 경계하며 조심하고 혼자 있을 때 삼가서 / 戒懼愼獨 명성으로 지극한 도 이룬 인 자사(子思)요 / 明誠凝道 마음을 보존하여 하늘을 섬기면서 / 操存事天 바른 의로 호연지기 기른 인 맹자(孟子)였네 / 直義養浩 고요함을 주로 하며 욕심 없이 지내면서 / 主靜無欲 맑은 날 바람 비 갠 뒤 달인 염계(濂溪)요 / 光風霽月 풍월을 읊조리며 돌아오는 모습에다 / 吟弄歸來 온화하고 우뚝한 기상 지닌 명도(明道)였네 / 揚休山立 정제된 몸가짐에 엄숙한 품격으로 / 整齊嚴肅 전일을 주로 하여 변동 없은 이 이천(伊川)이요 / 主一無適 박문에다 약례까지 양쪽 모두 지극히 하여 / 博約兩至 연원 정통 이어받은 그 분은 주자(朱子)셨다네 / 淵源正脈
이 병명은 모두 5장의 목판에 앞뒤로 새겨 종택 운장각(雲章閣)에 보관하고 있다. 아쉽게도 퇴계가 손수 쓴 글씨 원본은 단 두 폭 16자만 남아 있을 뿐이다.
영남에서는 이를 탁본해 병풍으로 만들어 제병(祭屛)으로 사용하는 집이 많았다. 그런 유습을 이어받아 종손의 맏며느리(李點淑 여사, 퇴계 宗女)는 3년간 동양자수로 글씨를 새겨 10폭 병풍으로 만들었고, 현재 학봉 선생 불천위 제사 때 사용하고 있다.
'천년불패' 땅에 90여칸 짜리
학봉의 종택은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속칭 ‘검제’에 2,000여 평의 대지에 90여 칸 규모로 자리잡고 있다. 현재 종택에는 14대 종손 김시인(金時寅, 1917년생) 옹이 살고 있다. 종손은 학봉 직손(直孫)이 아니다. 그래서 살던 곳도 검제가 아닌 임동면 지례였다.
13대 종손 김용환(金龍煥, 1887-1946)은 독립운동을 은밀히 도운 사실이 알려져 1995년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그러나 실상을 모르는 이들은 ‘파락호’라고 손가락질했다. 무남독녀 외딸만 두어 후사를 잇지 못하자 촌수가 가까운 이를 두고 100리나 떨어진 곳에 사는 현 종손을 맞았다.
1946년 29세였던 종손은 이미 결혼을 했고, 슬하에 아들 둘을 둔 상태였다. 본가에서 양자를 허락하지 않자 윤번을 정해 7개월여를 빌었다는 이야기는 눈물겨운 미담으로 전해진다.
학봉 종가가 있는 검제를 풍수가들은 ‘천년불패지지(千年不敗之地)’라고 부른다. 1,000년 동안 길이 번성할 터전이라는 것. 달리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 즉 ‘전쟁, 기근, 전염병이 들지 않는 복된 땅’이라고도 말한다.
그런 좋은 터임에도 불구하고 수차례의 양자가 있었고, 13대 종손은 또 자신의 대에 이르러 나라가 망했으며, 남몰래 독립운동 자금을 대느라 살림이 기울었고, 종택까지 처분해야만 했다. 더구나 종손의 중요한 책무 중의 하나인 대를 잇는 일도 이루지 못했다.
10세 때 조부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학봉 11대 종손. 1827-1899) 선생이 왜경들에게 수모를 당하는 모습을 목도하고 ‘복수를 가르치겠다’는 다짐을 했던 그는 문충고택(文忠古宅)이요 박약진전(博約眞詮)인 학봉 종택을 길이 계승할 적임자를 찾기 위해 부심했을 것이다. 결과를 놓고 볼 때 그는 지인지감(知人之感, 사람을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을 지녔다.
현 14대 종손 김시인 옹은 영남 종손의 표준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를 만나면 선비의 ‘기품’이 느껴진다. 늘 온화한 모습에 언소(言笑)가 적다. 생활도 검소하다. 섬돌에 가지런히 놓인 검정고무신이 압권이다.
평소 별로 말씀이 없으신 종손께서 하루는 필자의 외조부(權五德, 1912-1972)에 대해 말했다. “그 어른은 점잖았고, 선비셨어.” 기억으로는 외조부는 송암 권호문 선생의 후손인 관계로 배향한 서원인 청성서원(靑城書院)의 문사를 살폈고, 처가인 창원 황씨(영주 대룡산, 황귀암 집) 집에서 글을 읽어 초년에 이미 선비의 반열에 올랐다. 불행히 일찍 뇌졸중으로 쓰러져 수년간 자리에 누워있다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외조부의 삶을 기억해 필자를 더 가깝게 대한 것이다.
학봉 종가는 종가와 지손들 간의 틈새가 없다. 이미 종손의 증조부 대에서 재산을 정리한 터고 또 남은 토지라 해도 경북 북부 오지인 탓에 안동 도심과는 멀어 재산 때문에 다툴 일이 없었다.
학봉 후손들은 종가를 위하는 마음이 한결같다. 김흥락 선생 장례 때 모인 조문객이 4,000명이었는데, 각기 기정을 위해 가져온 대구포가 고방에 가득했을 정도였다 한다. 그리고 87년 유물전시관 개관식 때, 95년 김흥락 선생과 조부 김용환 옹의 독립훈장 추서 사당 고유 때, 99년 김흥락 선생 100주년 추모와 2000년 11월 기념 강연 때 각각 1,000여명이 전국에서 모였다.
학봉 선생 불천위 제사 때는 100여 명이 참제(參祭)한다. 이때 일정 기준 이상의 성취가 있는 후손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제사에 앞서 사당에 고유하는데, 그러한 의식이 의미도 있으려니와 보기에도 흐뭇하다. 불천위 제사는 더욱 엄숙하게 거행된다. 제상 뒤로 내걸리는 백세청풍(百世淸風)과 중류지주(中流砥柱) 대자 탁본 족자는 선생의 정신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고물(古物)이다.
제사 땐 전국서 100여명 참석
70년대 이전까지 학봉 종가의 사랑방은 과객들로 넘쳐났다. 이는 학봉 종가가 영남 유림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무관하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종손과 종부의 역할이 컸다.
93년에 작고한 종부 한양 조씨(趙畢男 여사, 경북 영양 사도실 출신)의 베푸는 안살림은 유림에서 칭송이 자자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남을 배려하고 봉사하는 삶이었다. 특이하게도 종손 부부는 생년월일이 같다.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차종손 김종길(金鍾吉, 1941년생) 씨는 안동사범, 고려대를 졸업했고 학군1기로 군복무를 마친 뒤 두루넷 사장, TG삼보컴퓨터 부회장을 역임했다. 차종손은 타고난 친화력과 리더십으로 종인들은 물론 유림에서도 명성이 높다. 근자에는 한문과 서도에 진력하여 시 수백 수와 고문진보(古文眞寶)에 나오는 명문 수십 편을 암송해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암송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보다 필자는 다른 장면이 떠올랐다. 한번은 차종손을 따라 종가를 방문했는데, 차종손은 ‘문외배(門外拜)’를 하고 방으로 들어섰다. 예법에 부모에게는 문 밖에서 절을 하게 되어 있는데, 그는 설날 부실한 시골집 문 밖에서 절을 한 후 방안으로 들어선 것이다.
영남에서는 아직도 일부에서나마 문외배를 행하고 있다. 그런데 차종손의 문외배는 생활 그 자체였다. 그러한 정신이 일선에서 은퇴한 뒤 그 어렵다는 한문을 외우게 하고 다시 붓을 잡아 법필(法筆)을 익히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초점은 분명 ‘박약진전’에 맞춰진 느낌이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종가기행 22] 西厓 柳成龍 - 임란 극복 명재상… '징비록'은 日서도 높이 평가
[姓氏의 원류를 찾아서 종가기행 22] 풍산 류씨 서애 류성룡 1542년(중종37)-1607년(선조40)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 봉호는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
서애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기상이 단아했다. 23세 때 생원과 진사시에 합격했고, 25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스승인 퇴계 선생은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라고 평했는데, 21세 때 근사록(近思錄)을 배웠다. 퇴계 문하의 양대 학맥이라 할 수 있는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은 서로를 높여, 학봉은 서애를 '나의 사표(師表)'라 했고, 서애는 학봉에 대해 '내가 미치지 못한다'고 인정했다.
안동 최고(最古)의 역사서인 영가지(永嘉志, 서애 제자 龍巒 權紀 편찬) 권7 인물조(人物條)에 보면 서애에 대해서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고 실천하여 연원정맥(淵源正脈)을 이었다'고 했다. 학봉에 대해서는 '퇴계 선생에게 배워 심학(心學)의 요체를 듣고 견고하고 각려(刻勵)하게 노력하여 조예가 정심(精深)했다.'고 평하고 있다. 미묘한 문제이지만 영가지에서는 무게 중심이 서애 쪽에 두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서울 도심 도로명에 퇴계로가 있고 그곳에서 갈라진 작은 도로에 서애로(西厓路)로 명명된 길이 있어 스승과 제자가 수도 서울에서 길로도 만나고 있다.
서애는 30여 년 동안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친 뒤 51세(선조25, 1592) 때 영의정에 이른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경세가로서의 서애를 생각하는데, 어쩌면 서애는 57세(선조31, 1598) 때 무고(誣告)로 영의정에서 체직된 뒤 삭탈관직까지 당해 58세 2월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9년을 더없이 소중하게 보냈다.
은퇴 정치가보다는 대학자로서의 위상이 빛을 발했다. 임란 때 의병장으로, 그리고 강직한 강관(講官)으로,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 겸 대제학을 지낸 우복 정경세(1563-1633), 부제학에 이른 창석 이준(1560-1635) 등으로 대표되는 서애학파가 본격적으로 형성된 시기이다.
서애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극복한 경세가(經世家)며 구국의 영웅이다. 이점을 살피기에 가장 적합한 책이 손수 이면지에다 쓴 임란 회고록인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이다.
안동에 국보가 4점인데, 그중에 하회마을에 두 점이 있다. 징비록과 하회탈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필자는 이전에 징비록 원본을 금고에서 꺼내 펼쳐본 적이 있다. 그때 느낌은 어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거대한 금고에 들어 있어 안전하지만 습기 문제, 표지의 장첩된 상태, 조잡해 보이는 보관 상자 모두가 불만이었다. 놀라운 점은 이면지에 초서체로 당시로서도 고급지가 아닌 일반 용지에 쓴 책이란 사실이었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혁혁한 공을 세웠음에도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집요한 공격을 당했고 결국 파직된 상태로 가난한 옛 고향 집을 돌아와 썼던 이 조그마한 책이 나라의 시련을 극복할 지혜를 담은 책으로 여전히 생명을 지니고 있다.
누구보다 시대를 앞선 지식인이었던 다산 정약용은 1808년(당시 다산 선생 47세)에 아들에게 여가를 보아 서애집과 징비록 그리고 성호사설(성호 이익 작), 문헌통고를 읽으면서 그 요점을 정리하라는 가르침을 내린다. 다산은 누구보다 서애를 존경하고 사상을 본받고자 했던 이다.
징비록은 정책 분석과 대책이 탁월해 적국에 유출되어서는 안 될 목록에 들어 있었다. 청장관 이덕무가 쓴 글을 보면 이미 징비록은 일본으로 유출되어 출판(청천 신유한의 해유록에 보면 징비록이 일본 대판에서 출판되었다고 기록함, 도쿠가와 막부 시절, 1695년 경 교토에서도 간행)까지 된 것을 걱정하는 장면이 있다. 이를 보면 징비록은 이미 조선 시대에 탁월한 회고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징비록은 일본 사람들에게 보여서는 안 되는 일종의 '비서(秘書)'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본 제국시대(1936년)에 그들은 아주 격조 있는 두 책 영인본 300부 한정판으로 간행했다. 아쉽게도 광복 이후 지금까지 당국도 문중도 아직 격을 갖춘 복제품을 간행한 적이 없다.
다행히도 서애선생기념사업회의 주도로 영역본 징비록이 나왔다. 징비라는 시경의 구절을 어떻게 번역했을까? 적지 않게 궁금했다. "
시경에 '내가 지난 일의 잘못을 경계하여(징) 뒤에 환난이 없도록 조심한다(비)'고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저술한 까닭이다. 이 심오한 책 제목은 '잘못을 고치는 책(The Book of Corrections)이다"라고 한글로 옮겼다. 탁월한 언어 감각이다.
영역판은 호남대학교 최병헌(영문학) 교수가 6년여 노력을 들여 미국 버클리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에서 간행했다. 최 교수는 2003년 4월 4일 출판기념회에서 여러 외국 학자의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최고 책임자가 쓴 자기 반성문인 동시에 향후 최고 지침서요, 위기관리 편람이다. 그【?북한 핵위기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요즘, 우리가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생각한다.
북한의 핵실험은 남의 이야기하듯 적당히 넘길 사안이 아니다. 서애는 전쟁 발발의 징조, 전시(戰時) 중의 각종 대비책, 그리고 명나라와 일본 양국과 강화(講和) 문제 등을 조목조목 적고 있다. 이것을 현대적으로 바꾸어 보면, 현명한 외교와 정확한 국제 정세와 적의 정보 분석, 유사시의 대책, 그리고 확고한 집단 동맹체제(혈맹 관계)의 구축일 것이다.
400여 년 전 서애의 이러한 분석과 대비책 역시 '냉전적 사고'로만 치부하기엔 탁견이다.
서애는 타고난 경세가다. 조정 관료나 정승 중 행정 능력이 탁월한 이가 흔하지 않다. 그러나 서애는 그러한 능력을 지녔다. 실록 서애 졸기에 보면 선조실록과 수정실록 두 편이 비교적 길게 실려 있는데, 공히 시각을 달리하는 부정적인 평이 있다.
그럼에도 선조수정실록에서는 이렇게 소개했다. "경연(經筵)에 출입한 지 25년 만에 상신이 되었으며 계사년에 수상으로서 홀로 경외(京外)의 기무(機務)를 담당하였다. 명나라 장수들의 자문과 계첩(揭帖)이 주야로 폭주하고 여러 도의 보고서들이 이곳저곳으로부터 몰려들었는데도 성룡은 좌우로 수응(酬應)함에 그 민첩하고 빠르기가 흐르는 물과 같았다."
서애는 지인지감(知人之感)이 뛰어났다. 이 점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의 천거와 음해 세력들로부터의 비호를 통해 청사에 빛나는 전공을 세울 수 있게 한 장본인이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이순신에 대해서는 조정 중신은 물론 국왕까지 집요하게 음해하고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그때마다 서애는 간곡하게 그렇지 않다는 점을 설명해 구국의 큰 재목으로 성장할 수 있게 했다.
선조30년 1월 수군 작전 통제권을 두고 국왕과 중신들이 나눈 대화는 오늘날과도 흡사한 점이 있다. 원균과 이순신의 갈등으로 생긴 틈새를 당파 세력들이 비집고 들어섰고 국왕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가볍게 의심을 하면서 일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으로 빠졌다.
이때 서애는 이순신과는 같은 동리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그의 사람됨을 너무나 잘 알며 그래서 자신 있게 만호(萬戶)로, 그리고 수사(水使)로 직접 천거했다. "글을 잘 하는 사람인가?"라는 선조의 물음에 "성품이 굽히기를 좋아하지 않아 제법 취할 만하기 때문에 어느 곳 수령으로 있는 그를 신이 수사로 천거했습니다"라 했다.
서애가 실각한 직후인 같은 해 11월 19일 충무공은 노량해전에서 유탄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또 얼마 뒤인 12월 서애는 삭탈관직 당한다. 문무로 갈린 벼슬길이며 직급과 직위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지만 국난을 몸으로 막고 참소에 너무나 의연했던 두 평생지기의 운명은 부절을 합한 듯 너무나 닮았다.
서애는 또한 청백리였다. 그 면모는 한 장의 고문서에 고스란히 담겨 전한다. 유물전시관인 영모각(永慕閣)에는 선생의 부음이 도성에 전해졌을 때 조정 관료들이 연명으로 부의를 추렴한 문건 한 장이 전시되어 있다.
서애는 삭탈관직된 뒤 고향을 찾았을 때 마땅한 거처조차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더구나 대신의 품격을 유지시켜줄 녹봉조차 받지 못했고 그 무렵 입은 수해로 거처할 곳이 더욱 마땅하지 못했다. 그래서 옮겨 앉은 곳이 강 건너 한적한 서당인 옥연정사였고 징비록 집필을 마친 뒤 죄인을 자처하며 더욱 후미진 학가산 골짜기를 찾아들어 농환재(弄丸齋)라는 초가집 두어 칸을 얽었다. 그때는 세상을 버리기 1년 전의 일이었고 그곳에서 선화했다.
66세(1607년 5월 6일)로 세상을 떠나자 임금은 3일간 조시(朝市, 조회와 시장)를 정지하고 승지를 보내 조문했으며 역대 여러 국왕들은 수차에 걸쳐 예관을 파견해 사당에 치제했다.
서울 옛집이 있던 묵사동(墨寺洞)에서는 도성 각전(各廛)의 백성들이 몰려와 조곡했는데 1,000명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백성들에게 끼쳤던 서애의 공을 짐작하게 한다. 아마도 망한 나라를 구했다는 '산하재조지공(山河再造之功)' 때문이었을 것이다.
묘소는 안동 풍산읍 수동(壽洞)에 있는데(정경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 외 6대손 한산 이씨 대산 이상정이 묘갈명을 씀), 명당으로 이름나 풍수가들의 답사코스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의물(儀物)들은 너무나 조촐하다. 퇴계가 그러하듯 서애 역시 신도비가 없다.
광해군6년(1614) 4월 병산서원에, 광해군12년(1620) 9월 여강서원에, 인조5년(1627) 10월 군위의 남계서원에, 인조9년(1631) 10월 상주의 도남서원에, 인조21년(1643) 10월 예천의 삼강서원에, 숙종15년(1689) 의성의 빙계서원에 각각 위패를 봉안했다.
서수용 박약회 간사 saenae61@hanmail.net · 사진=남정강 한얼보학 연구소 소장
5.안동의 三多, 당신은 아시나요 (안동의 선비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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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이라면 양반·선비·종가를 으레 떠올린다. 이들 모두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유교가 남긴 문화이다. “안동에는 산이 많고, 인재가 많고, 서원이 많다”라는 말이 있다. 안동의 삼다(三多)다. 산다(山多)는 태백산과 소백산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안동의 지형적 특색을, 인다(人多)는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을 비롯하여 뛰어난 유학자를 대거 배출했다는 것을, 원다(院多)는 유교가 성행했음을 말한다.
안동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책은 ‘안동역사문화기행’(푸른역사)이다. 이 책은 삼국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안동문화를 권역·테마 별로 나누어 다양한 사진을 곁들이면서 소개하고 있다. 안동에 대해 더 상세한 지식을 원하는 이들에게 맞는 책은 ‘안동문화의 수수께끼’(지식산업사)이다. 책제목에서 말해주듯이 안동에는 왜 양반이 많고, 고려 공민왕은 왜 안동으로 몽진했으며, 안동에는 왜 전탑(塼塔)과 목조건축물이 많은가 하는, 안동문화의 수수께끼를 시원하게 풀어준다. 안동의 유교문화는 문화재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삶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종가에는 종손(宗孫)과 종부(宗婦)가 종가의 본분을 다하고자 정성을 가다듬어 조상제사를 지내고 낯선 손님을 맞이하면서 전통을 이어 내려오고 있다. 유교전통이 강한 만큼 안동에는 “종가 하나 끼고 돌아가지 않는 골이 없다”고 할 정도로 고색창연한 종가가 많다. 안동의 종가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있는 이들은 ‘안동의 종가’(지식산업사)를 읽으면 된다. 안동대 윤천근 교수의 경쾌하고 맛깔스러운 글과 김복영씨의 한 폭의 그림 같은 사진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마치 종가 대청마루에 앉아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생생함이 전해온다.
1999년 4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안동 하회마을을 다녀갔다. 하회마을은 서애 류성룡을 배출한 풍산류씨 집성촌으로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대표한다. ‘민속마을 하회여행’(밀알)은 하회마을의 역사, 자연경관과 풍수, 종가와 정자, 하회탈춤 등 그야말로 하회마을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안동의 선비문화가 유난히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은 유교를 탐구했던 유학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 정점에 대유(大儒) 퇴계 이황이 우뚝 서 있다. 퇴계 연구자로 정평이 나있는 김종석 박사의 ‘청년을 위한 퇴계 평전’(한국국학진흥원)은 자칫 딱딱해지기 쉬운 유학자 평전을 대중적 글쓰기로 쉽게 풀어내고 있어 부담 없이 접할 수 있다.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일화를 중심으로 퇴계의 인간적 삶과 학문생활을 흥미진진하게 펼쳐내고 있다.
♣병호시비 屛虎是非♣
屛은 屛山書院을 뜻하고 엄마네 조상인 西崖 柳成龍을 모신 書院이다. 虎는 虎溪書院의 약칭인 동시에 우리집 검제측을 말하는 지칭이다. 그러니까 병호시비란걸 쉽게 이야기 하면 엄마네 집과 아빠네 집이 싸웠다는이야기다. 그것도 처음엔 서로 자기 조상의 位牌를 왼쪽에 놓아야 한다며. 엄마네 쪽에선 서애가 영의정을 지냈으니까 당연히 왼쪽이라고 주장하고, 우리집 鶴峰후손은 나이도 네 살이나 위이고 학문적으론 상대가 안된다고 우기며 싸웠다. 1620년에 시작된 분쟁은 250여년이나 끈 셈이다. 그만큼 그때를 살았던 우리들 조상들로선 심각한 문제였다. 시작은 廬江書院에 退溪를 주벽으로 하고 서애와 학봉을 봉안하는 과정에서 발단이 되었다. 그게 1620년, 17세기 초엽이었다. 그뒤 이 여강서원이 숙종 2년(1676)에 왕으로부터 호계서원이란 액자를 하사받아 嗣額 서원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부르길 병호시비 혹은 鶴崖是非, 崖鶴是非라 했다.
알고 보면 검제(金溪)와 河回는 서로 싸울래야 싸울수 없는 사이다. 학봉과 서애는 퇴계를 스승으로 모시고 同門 修學한 사이인데 학봉은"서애는 나의 師表"라고 말했고 서애는"나는 학봉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서로 존경 했다. 또 퇴계는 학봉에게 傳統箴인 屛銘을 써 주었고 서애가 가르침을 받으러 처음 퇴계를 찿아 왔을 때 "이 사람은 하늘이 태어나게 했구나, 他日(훗날) 수립하는바가 반드시 클것이야"라며 극찬을 했다. 더구나 학봉이 通信副使로 일본을 다녀와 倭必不來라고 復命했다가 막상 壬亂이 터저 일본이 처들어오자 위기에 처했다. 이때 학봉을 구해준 사람이 左議政으로 있던 서애다. 또 아랫대로 내려오면서 혼인을 통해 핏줄로도 얽혔다. 하회사는 서애후손은 拙齋 자손인데 그졸제가 검제로 장가를 오셨다. 상주에 가서산 柳袗의 후손을 제하면 모두 검제 外孫들이다. 문제는 학봉이 29살 때 퇴계가 써주었다는 병명을 검제후손들은 首弟子로 인정한거라고 확신했고 학봉계열의 여러학자들도 이를 뒷받침하는 저술을 남겼다. 심지어 柳致 같은 학자는 학봉이 납실(猿谷)이란곳에 거주할 때 병명을 받았다고 그 자리에 병명서원 건립을 추진 하기도 했다. 학봉제자들이 하회를보고 서애는 再造之恩의 영의정을 지냈고 망한 나라를 새로 이르킨 명재상이었음을 기리며 당연히 위패를 왼쪽에 놓으시라고 사양하고 서애 제자들은 그게 무슨 소리냐 나이도 학봉이 네 살 위시고 퇴계로부터 수제자란 인증으로 屛銘까지 받으셨으니까 말할 것 없이 위패를 왼쪽에 놓으시라고 우겼으면 참 아름다운 전설로 내려 올뻔 했다. 그러나 17세기 당시를 산 제자들은 굳이 자기 스승의 위패를 왼쪽에 놓아야 한다며 한치의 양보도 없이 대립했다. 그래서 타협한게 당시 영남남인의 영수인 愚伏 鄭經世의 裁定을 받기로 했다.
우복 정경세(1563-1633)는 서애의 수제자로 大提學과 왕자의 師父를 지낸 당시 영남학파의 제일 어른 이었다. 우복은 서애를 상석인 왼쪽에 모시라고 재정했다. "年齒의 差는 肩隨에 미치지않고 爵位의 차는 絶席에 있다."라며.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나이차 네 살은 별것 아니지만 관직으로 보면 영의정과 관찰사는 비교할수없이 큰것이란 말이다. 이 우복의 재정에 학봉제자들은 불만이 많지만 일단 받아드리므로 1차전은 서애파의 승리로 끝났다. 그뒤 鶴峰,西崖,寒岡,旅軒 4賢의 陞廡 문제로 1805년 2차 시비가 일어나기까지는 18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사이 정치,경제,사회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은변화가 일어났다. 첫째 정치적인 측면에선 老論인 畿湖학파는 湖洛논쟁을 거치면서 정통학맥임을 자처하던 湖論(이 경우 湖論은 병호의 虎論이 아니고 호수 호자를 쓰며 韓元震,尹鳳九등이 주도함)이 사라지고 洛論을 대표 하던 李柬, 李縡, 金元行 계열이 학계와 정계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正祖이후 少論도 배제되면서 노론의 전횡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영남남인은 철저히 권력에서 소외되었으며 屛虎 양측 중에서도 특히 屛論측이 타격을 심하게 받았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15세기부터 영남지역의 농업발달이 학문의 진흥을 가져왔는데 이양법의 보급등 평야지대의 급속한 발전이 산간지역이 많은 영남의 상대적 우위를 잃어가는 현상을 불러왔다.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嫡庶의 차별이 가장 혹심했던 慶尙左道지역에서 노론의 사주를 받은 庶孼들이 조직화 하면서 도전을 시도했다. 이와동시에 노론은 영남을 효과적으로 분열, 무력화하기위한 갖은수단을 다 동원했다. 특히 1728년에 일어났던 李麟佐의 亂 같은걸 노론은 아주 교묘히 이용, 경상 上下道와 南,北人,少論의 싸움을 첨예화 시켰다. 또 영남의 서얼은 물론 신흥노론 세력을 집중적으로 부식하기위해 애를 썼다. 예를들면 1719년 慶州에다가 宋時烈을 모시는 仁山書院(남인들의 서얼세력동원), 尙州에다가는 1702년 宋浚吉을 모신 興巖書院, 1708년에는 金尙容,金尙憲을 배향한 西山書院, 1738년 안동에다가 김상헌서원(남인과 격렬한 싸움을 일으킴)등 많은 서원을 세워 끝없는 공격을 남인에 가하므로 중앙에의 관심을 못돌리게 효과적으로 남인들을 옥죄었다. 이에 따라 사소한 이해관계나 견해차로 날카롭게 대립한 현상들을 묶어 사학자들은 膷戰이라 부른다. <羅巖隋錄>에 나타나는 하회의 겸암.서애파의 시비, 하회와 미동 김씨 사이의 알력, 도산.병산서원 사이의 갈등등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한게 다 이 현상들이다. 그결과 더더욱 생존을위해 관심을 향촌사회의 이해관계에 집착하게 되고 조그마한 문제에도 대립, 갈등을 격화시켰다. 영남남인은 정조때 京南(寒岡 鄭逑, 許眉 , 星湖 李瀷등을 거쳐 丁若鏞, 丁若銓, 權哲 身등 近幾地方에 뻗어난 퇴계학파를 京南이라 부른다)인 樊巖 蔡濟恭을 매개로 정치에 접근할려고 시도한다. 정조도 노론을 견제하기위해 영남남인을 외곽세력으로 키울려고 애썼으나 그의 죽음으로 그시도는 무산되고 노론은 영남남인을 효과적으로 향촌지배세력으로 묶는데 성공한다. 일본인사학자 <槽谷憲一>의 논문에 당시의 남.북인의 정계진출비율을 8.3%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정치는 노론의 완전한 장악이 이루어 졌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러한 노론의 핍박 속에서도 퇴계학파중 학봉파를 대표하는 호론은 세나 학문적 깊이에서 병론을 압도 하게되고 거기에 따라 퇴계의 嫡統을 강하게 주장하며 당연히 우리것이란 인식속에 1805년 2차 병호시비를 맞게 된다! .
文廟란 영어로하면 Shrine 혹은 Pantheon이라고 표현하면 너희들이 이해하기 쉬울까. 이조시대 최고의 祠堂으로 조상이 여기에 모셔진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 이었다. 여기엔 Confucian의 원조인 孔子를 비롯 그 제자70명, 네 聖人을 중심으로 10哲, 宋朝의 6賢, 李朝시대와 중국의 유학자 111명이 配享되어 있다. 1805년 영남유림에서 학봉 金誠一, 서애 柳成龍 한강鄭 逑, 여헌 張顯光등 4賢의 문묘종사를 위해 그 자손 및 제자들이 서울에 모여 청원을 위한 솟장을 쓰면서 누구이름을 먼저쓰느냐는 문제 때문에 또 싸움이 시작 되었다. 학봉파는 나이순서를 주장했고 서애파는 이미 그 문제는 1620년 여강서원에 모실 때 우복 정경세의 재정으로 서애를 상좌에 놓은 전 예가 있다고 대응 했다. 서로 양보 하지않으니까 한강, 여헌파도 학봉이 위라고 虎論을 편들었다. 왜 그러냐 하면 앞에 설명 한데로 학봉파의 數나 학문적 심도가 屛論을 압도한 시점에 와 있는데다가 寒岡, 旅軒 두사람 다 벼슬을 싫어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한 이들이었으니 벼슬을 가볍게본 학봉파에 동조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屛論 측은 노발대발했다. 솟장을 독자적으로 내며 서열이 바뀌었음을 지적 했다. 같은 일을 가지고 두가지 솟장을 받아든 노론정권은 얼시구나 하고 둘다 받아드리지 않았다. 한강과 여헌측에서 보면 어처구니 없는 일이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듬해 11월 대구 伊江書院에 모여 학봉과 서애측을 빼고 자기들만 陞廡 상소를 내기로 결의하고 儒林에 通文을 돌렸다. 이를 접수한 학봉과 서애측은 虎溪書院에 급히 모여 대책을 상의 하며 한강과 여헌측을 규탄하는 통문을 작성했는데 여기서 또 양측이 결정적으로 싸움이 붙었다. 통문을 쓴 사람은 虎論의 柳晦文이었는데 서애파 주장은 처음에 서애,학봉순으로 되어 있었는데 밤중에 학봉,서애로 바꿔치기 했다고 흥분, 병론의 柳亨春이 그 통문을 찟어 버렸다. 학봉파 주장은 처음엔 순서가 드러나지않게 네 선생 이라고 썼는데 모임에서 衆論이 차례로 明記하는게 좋겠다고 협의해서 학봉,서애 순으로 썼다고 했다. 문제는 통문을 찟은게 크게 잘못되었다고 호론측에서 柳亨春에게 文罰을 가했다. 문벌이란 당시로선 선비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제재 방법이었다고 한다. 선비로서 해서는 않될짓을한 사실을 쭉적어서 서원 벽에 걸어놓는 것이었는데 이에 발끈한 병론측은 절교를 선언하고 호계서원을 떠나 버렸다. 역사학자들은 병론이 자발적으로 떠난게 아니고 호론한테 勢에 밀려 축출 당했다고 보고 있다. 그뒤 병론측은 모든 문제를 병산서원에 모여 처리했다. 호론은 호계서원을 독차지했다. 여기서 屛虎란 말이 생겨난거다.
일이 여기 까지 가버린 원인은 앞서 이야기 한데로 정치에선 병론측이 우세하고 학문에선 호론측이 한수위인데 노론의 전횡에 밀려 병론측이 상대적으로 위축 된 반면 호론은 학맥이 점점더 커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병론측에 가담한 가문은 퇴계자손 중에선 上溪, 渼洞 金씨, 우릉골 宣城 李씨, 가일 權씨, 愚山의 晉州 鄭씨등 단출한 반면 虎論측 멤버는 엄청 많다. 내가 조사한 바로는 퇴계후손 으로 下溪, 韓山 李씨, 全州 柳씨,닭실 權씨, 光山 金씨, 高靈 金씨, 靑道 金씨, 載寧 李씨, 固城 李씨, 光州 李씨, 永川 李씨, 산운 李씨, 英陽 南씨, 南平 文씨등 이다. 그러면 퇴계학파는 도데체 어떻게 이루어 져있는지 궁금해 지는데 대게 略述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陶山及門諸賢錄>이란 퇴계제자 명단엔 260여명 이름이 나온다. 여기서 栗谷 李 珥, 高峰 寄大升, 蘇齊 盧守愼, 지제 洪仁祐등 갈라져 나간 이들을 빼고 뒷날 학맥의 師承 관계에 의한 제자를 거느리고 祖師로 된사람은 서애, 학봉, 한강 세사람을 꼽는다. 이3명 외로는 趙 穆 李德弘, 黃俊良, 權文海, 曺好益,, 吳 健, 朴光前, 丁時翰등이 유명한 학자들이다.,
서애파는 鄭經世, 柳袗, 柳元之 ,柳世鳴, 柳後章, 朴遜慶, 鄭宗魯, 柳尋春, 柳疇睦 이런 순으로 학맥이 흘러 내려 가는데 보시다시피 家學으로 전해 내려간다. 정종로는 정경세의 6대 손자이다. 류 진은 서애의 아들이고 류원지는 손자이며 류후장은 류원지의 손자이다. 류심춘은 류 진의 6대손이고 류주목은 류심촌의 손자이다. 또 류 진, 정경세, 정종로, 류심춘, 류주목은 尙州에 살았다. 그외 정도응,辛百源,李 埈, 李 集, 柳 規등도 서애계열 학자들이다.
학봉파는 張興孝, 李玄逸, 李 裁, 李象靖, 南漢朝, 柳致明, 金興洛, 金道和, 李震相, 郭鍾錫, 權相翊 金秉宗, 曺兢燮, 李承熙 朴章鉉, 河謙鎭 李炳憲, 金昌淑, 金 榥, 宋贊植 등이 있다. 특징은 퇴계학을 집대성 했다는 대산 이상정에서 高弟들이 기라성 같이 있으며 병론 학자들도 보인다. 柳尙春, 柳謙祚, 柳泰春, 鄭宗魯, 李源朝도 병론인데 大山에게 배웠다. 그때까지만 해도 병호의 대립이 격화 되지 않았다는 원인도 있고 또 정종로 같은이는 외조부가 호론의 金道和다. 大山 李象靖의 수제자인 柳致明의 大坪約案에 오른이만 550명인데 문과 급제자만 11명, 생원,진사가 34명 나왔지만 屛論 학자는 한사람도 없다 .이때부터 屛虎의 싸움이 치열 했다는 증거 이다. 김흥락의 제자 명단인 輔仁契帖에 오른이만 707명, 金道和 文人錄엔 322명 이나 올라있다. 이러니 虎論이 數에서 압도 했다고 내가 자꾸 쓰는 이유이고 虎論이 퇴계의 학통은 당연히 鶴峰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이다.
寒岡 鄭逑의 학맥은 특이하다. 우선 본인이 퇴계 뿐만 아니라 南溟 曺 植의 문하에도 드나들었다. 또 그의 학맥이 近畿學派의 開山之祖라는 眉瘦 許 穆으로 내려가서 영남이 아닌 서울을 비롯한 근기지방에서 뻗어난다. 그래서 이를 京南이라 부른다. 즉 京은 서울을 뜻하니까 서울 쪽의 남인이란 뜻이다. 또 미수에서 그 유명한 星湖 李 익으로, 거기서 우파는 安順庵 , 黃下廬, 許性薺으로 흐르고 좌파는 권녹암을 거처 정약용, 정약전 등으로 학맥이 흘러 간다. 천주교도 이계열을 타고 이땅에 들어오고 實學도 이줄기에서 꽃피운다. 결국 퇴계학파는 정치에서 노론에 밀려 학문 밖에 할것이 없었다는 여실한 증거다.
자 그럼 제일 치열했던 3차 병호시비는 어떻게 전개 되었나 살펴 보자. 3차는 1812년에 발생한다. 屛論들은 몸만 병산서원으로 갔지 西崖의 位牌는 여전히 호계서원에 모셔져 있는 상태였다. 여기에다 大山 李象靖의 위패를 같이 모시자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물론 호유측이 주도했다. 대산 이상정은 牧隱 李 嗇의 후손으로 원래는 서울 살았는데 고조부인 李弘祚가 광해군때 폐모론이 일어나자 환멸을 느끼고 식솔을 이끌고 외손인 西厓의 연고를 따라 안동으로 내려온 집안이다. 오늘날의 퇴계학이 일본, 미국, 독일, 대만, 심지어 모스코바까지 세계 수십군데에 연구소가 생겨 난데에는 大山의 功이다 . 그만큼 大山의 학문적 깊이나 업적이 크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1812년 禮安鄕校에서 都會를 열고 이상정을 호계서원에 合祀 하자고 결의 했으나 병론측이 극력 반대 무산되고 말았다. 병론측 주장은 호계서원에 위패를 모실곳이 앞이 좁고 뒤가 넓어 또하나의 위패를 추가하기엔 장소가 마땅치 않다는거 였다. 이는 앞에 내세우는 구실이고 대산을 追享 하면서 호론측이 이기회에 鶴峰을 上席에모시겠다는 의도로 해석 했다. 또 대산의 遺稿중 <退溪書節要>의 출판을 둘러 싸고 병론과 대산 제자,후예들과 격렬한 시비가 있었다. 퇴계서절요 본고에 언급된 西厓를 脚註에서 豊原府院君을 豊山府院君으로 誤記했고 謙庵은 각주도 없이 홀대했다는게 병론측이 노한 이유이다, 이의 시정을 대산 제자들이나 자손들이 받아드리지 않았다. 스승이 직접 쓴글을 감히 우리가 손 댈수 없다며. .
특기 할 것은 퇴계학파가 대산에서 확 분화되기 시작한다. 정통파인 유치명 계열에서 보면 이단도 생겨 난 것이다. 대산 제자중 우뚝한 5명을 꼽으라면 첫째가 당연히 정제 유치명이고 성주의 李震相, 칠곡의 張福樞, 창녕의 曺兢燮, 김해의 許 전 이다. 이중 이진상의 <心卽理說>이 퇴계학설에서 벗어 나 있다. 문집을 도산서원에선 반송하고 상주 향교에선 불태우기도 하고 許薰은 이진상의 寒州文集의 교열을 거부했다. 이진상의 제자가 俛宇 郭鍾錫이다. 또 이제자가 심산 김창숙이다. 빠리장서사건이 이 계열에서 일어 났고 내 개인적으론 이진상, 곽종석 계열을 무척 좋아 한다. 그 책들이나 메모가 미국에 있어 이유는 나중에 추가 하마. 우리집은 철저한 유치명 계열이다. 우선 핏줄로도 大山의 高孫女가 내 고조모다. 고조모의 오빠가 유명한 학자 참판 李敦禹다. 또 수정제 柳鼎文의 외손자가 내 고조부다. 수정제라면 19세기 초엽 안동동부학단을 이끌었던 柳範休의 아들로 양대다 큰족적을 남긴학자다. 유명한 일화로 죽어 유림의 만장만 20리 따랐다는 내증조부의 사촌 柯山 金형模가 곽종석이 찿아오니까 설렁줄을 당겨 머슴방에 재워 보냈다는거다. 고종 년간에 유명했던 학자가 면우 곽종석과 艮薺 田 愚 이다. 곽종석은 高宗을 독대까지 하며 나라를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한다고 직언 했다. 간제 전 우는 신기리장수의 아들로 학문을 이르킨 특이한 학자인데 신분 때문인지 현실은 아주 외면하고 나중엔 계화도로 숨어들어가 소위말하는 界化學派를 성립시켰다. 또 서산 김흥락은 우리 종손인데 下人이 <黃遵憲私擬書>와 유길준의 <西遊見聞錄>을 어사가 보내왔다고 아뢰자 아무 대꾸도 안하고 장지문을 닫아 버렸다는거다. 이런 원칙주의 영향으로 뒷날 輔仁契帖에 올린 707인의 제자들 대부분 항일전선에 뛰어들고 해방뒤 건국훈장만 60명 받고 우리집안만 12명이다. 종가재산 18만평 다 팔아 독립자금으로 들어갔다. 상해임정 국무령을지낸 李相龍, 모진 고문 끝에 그 너덜너덜한 시신을 卍海가 거두었다는 一松 金東三장군, 빠리장서사건의 핵심멤버 였던 이중업, 송준필등 다 꼽을려면 한량이 없다 .이렇게 우리집 조상들은 원칙에 살았고 의에 매달렸다. 그럼 이야기가 옆길로 갔는데 다시 점점더 치열하기 시작하는 병호시비로 돌아 가보자.
1812년에 시작된 3차전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호계서원이 훼철 되므로 일단락 짓는데 이 59년간 엄청난 싸움이 벌어졌고 그이후 길게보면 해방을 맞을 때 까지 길고 긴 그림자를 드리운다. 노론정권이 그냥 두고 볼리도 없었다. 大山追享의 여진이 길게 이어진 가운데 1816년 12월말 호계서원안의 위패를 옮겼다고 병론측이 들고 일어났다. 李謙淳의 투서로 발단된 이사건은 그진위는 지금 알길이없다. 병유들은 호계서원으로 달려갔고 서애의 위패가 北壁으로 가있는걸 확인했다고 한다. 병유들은 다음해 1월18일 도회 개최를 儒林에 통지했다. 이에 대해 虎儒들은 강하게 반론을 제기했다. 위패는 원래 북벽에 백수십년간 그 자리에 있던거고 병론측이 대산추향을 방해하기위한 야비한 트집이라고. 虎儒들은 屛儒보다 하루 앞당겨 1월 17일 都會를 열자고 유림에 알렸다. 도회는 양일간 서로 동원 경쟁을하며 1천여명의 선비들이 그좁은 호계서원 계곡을 매웠단다. 서로 논쟁만 있었지 진실은 밝혀진게 없다. 병유들은 경상도 관찰사 金魯敬에게 호소했다. 위패가 옮겨진걸 찿아내 처벌 해달라고. 김노경은 간단하게 위패를 원위치 하라고 판결했다. 호유측이 발끈했다 .병유측 주장이 얼마나 황당한가를 조목조목 따져 관찰사에게 반론을 제기 했다. 노론 관찰사는 남인들이 싸우면 싸울수록 즐거웠다. 이번엔 당신내들 싸움엔 개입하지 않겠다고 번복했다. 병유들은 몇 번 도회를 더열어 복원을 주장했고 호유측은 꼼짝도 안했다. 어쩠던간 魯鄒之鄕으로 불리는 안동 유림의 자존심만 여지없이 구겨나갔다. 병론의 병호시비에 관한 기록인 <廬江誌>에 보면 1817년3월13일 경상도 관찰사 노론의 김노경이 순흥부사, 풍기군수, 창락찰방, 봉화현감을 데리고 도산서원에 나타나 원장 李 淳과 호론의 李泰淳, 李家淳을 노골적으로 공권력을 동원 협박 한다. 이 김노경은 秋史 金正喜의 아버지다. 결국은 병유는 정치력을 동원 호유를 압박했고 호유는 이에맞서 學緣에 근거한 탄탄한 조직력으로 대항 했다. 그럼 우선 호론이 어떻게 조직의 저변 확대를 해갔나를 살펴본 다음 병론이 대원군의 등장과 함께 정계에 혜성같이 나타난 柳厚祚를 통해 한 일들을 더듬어 따라가 보자.
호론은 先賢을 추모하는 사업이나, 선배학자들의 문집을 간행하는 사업, 사당을 건립 하고 정자를 세우는 일은 물론 끊임없는 講會(학술 세미나)를 통해 내부를 결속시켜 나갔다. 柳範休 주도로 金是溫의 景節祠를 건립하는데 몇 년에 걸쳐 온 정력을 경주한다. 김시온은 우리 현조인 靑溪公의 증손자로 원래 金守一의 자손이었으나 손이 없는 金克一집으로 양자를 들어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동서 의병을 조직 맹활약했고 그뒤엔 오로지 經學 연구에 몰두 유림의 존경을 받는 깨끗한 삶을 살다간 師表였다. 1823년3월18일 경절사 낙성에 1000명의 유림이 모였고 모두 다녀간 儒生이 1800명이란 기록이 나온다. 이는 내가보기엔 좋은 단결 훈련 이고 일종의 변형된 정치활동 같다. 이어 1834년엔 경절사에 金學培를 追享하는 운동도 일어 났다. 그는 예조좌랑을 거쳐 經書校正官으로 일했는데 李端夏, 金萬重과 더불어 字學에 일인자로 추앙 받았으며 자기 字 天休를 딴 休體를 남긴 書藝의 대가이기도 하다. 학술적인 측면에선 1827년 유치명이 <대평약안>을 만들면서 定薺學派의 성립과 동시에 활발한 講會등 통해 학문적 깊이를 넓혀 나간다 .강회 기록을 쭉 훌터 보면 우리 직계조상들이나 外祖들의 이름이 수도 없이 나온다. 定薺派는 大坪約案 가입 儒生이 너무늘어 나니까 1839서 1844년까지 등록 중단도 했다가 1845년 다시 등록을 재개한다. 1847년 가을 <大山實記>를 간행하자 또 양측의 충돌이 시작된다. 병론측에서 柳相祚가 앞장 섰는데 특히 그의 아들 柳進翼등 150여명의 병유가 10월15일 모여 8개 항목의 부당성을 지적, 고산서당등 호론계 서원에 통문을 발송한다. 11월28일 상주 道南書院에서도 병론측이 모여 통문을 작성 호론측에 보낸다. 결국 1848년 1월15일 도회를 소집, 병론에선 류진익, 柳厦祚 호론에선 柳致儼, 金邁洙등이 만나 조정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 .2월9일에 다시 시도 했으나 또 실패, 급기야 2월19일엔 병유들이 유치명 집 뜰을 3일간 점거한 끝에 도회를 열어 柳祈睦, 柳進祚등이 대산실기 수정과 서애위패를 원위치로 돌리라고 주장 했으나 柳致明, 李晩慤등이 한마디로 터무니 없음을 지적하고 거절 했다. 그해 12월에 유치명은 자기의 주장을 정리 유림의 여러 학자들에게 돌렸다. 이처럼 유치명 시대에 접어 들어 병호 분쟁은 한없이 치열해졌다. 아울러 호론들은 학봉이 적통이란걸 기정사실화 하기위해 학봉이 29세때 퇴계로 부터 받았다는 屛銘을 천착했다. 大山 李象靖은 <屛銘發揮>를 쓰고 李野淳은 <屛銘圖> 柳致儼은<屛銘發揮圖>를 그렸다. 병명이 무엇이냐하면 퇴계가 1566년 학봉을 위해 堯,舜,禹,湯,文王,武王,周公,孔子,朱熹까지 心學의 道統을 적어 준거다.
이러다가 1863년 대원군이 등장하면서 정세는 확 일변한다. 대원군은 초야에 있을때 영남을 주유했다. 그때 상주 류진의 愚川派 종손인 柳厚祚집에 들러 융숭한 대접을 받고 영남유생들과 교류한다. 의성의 申錫祜집에 들렀다가 의기가 맞아 許交도 하고, 경주 양동 無添堂과 봉화 진양 강씨 집엔 현액도 남겼다. 낙파 류후조는 40세에 司馬試, 61세 文科 급제란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고종3년에 右議政이되고 5년에 左議政이 되었다. 발탁 인사였다. 대원군은 정권은 잡았으나 지지기반이 허약했다. 노론일부, 조대비파, 서얼, 중인층등이 고작이었다. 남인의 협조가 절실했다. 그러나 집권10년간 기록을 보면 判書 이상엔 京南(서울등 근기지역 남인)은 12명 기용했으나 영남남인은 류후조와 星州의 李源祚만 기용했다. 둘다 屛論이었다. 北人은4명 기용했다. 인사를 이렇게 하면서 남인들의 지지는 몹시 갈망했다. 그래서 분열된 京南을 먼저 保合했다. 화해하는걸 그때말로는 보합이라했다. 경남중에서 蔡濟恭손자 蔡東述과 직각 洪殷鎬 사이의 오래된 갈등을 강제조정하고 龍洲 趙 형의 자손(교리 趙濟華)과 愚潭 丁時翰의 자손 사이 멀어졌던 것도 봉합했다. 병호 양측에 대한 보합도 대원군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羅巖隨錄(1870년8월 77쪽)에 나와있는 다음 글을 한번 보자.
"영남의 鄕論은 안동이 宗長이다. 그러나 남인들이 京南들은 蔡(채제공)니 洪(홍양호)이니 하고 영남에선 屛이니 虎니 하니 모두 좋지못한 일이다. 설혹 원수사이라 하더라도 우리집에서부터 혐의를 해소한 뒤라야 모두가 이를 모방 할 것이다. 아직 和協하였다는 보고가 없다. 영남의 병호는 그들이 비록 어렵게 말하나 나는 지극히 간단하다. 지금 경향이 화협하니 이和氣를 맞이하여 임금에게 복이 돌아가게 하고저 한다. 편지가 도착한후에 안동부사는 몸소 해당 서원에 나가 양쪽 사람들을 불러 이편지를 보인뒤 병호시비가 일어나게된 초기의 오고간 文籍들을 모두 모아 올려 보내고 그가운데 서로 걸려 말하지 못한 것은 날을 잡아 和會하여 시비를 가마득한 먼 옛일로 붙여라. 그리고 그뒤부터 다시 好意를 맺으면 이는 人和의 근본이 된다. 인화한 연후에야 가히 元子의 탄생을 바랄수 있다. 금일 이말은 体天行道에서 나온 일이니 여러 선비들에게 曉諭하여 스스로 忠逆이 큼을 헤아리게 하라. 이러한 뜻을 장차 류후조에게 편지 쓸려고 한다. 류후조 역시 내가 원자의 탄생으로서 이말을 하면 뛸 듯이 기뻐 할 것이다. 내가 이일을 거론하는 것은 오랫동안 경영 한 것이다. 한번 발설 한후에 그만 둘수 없음을 잘 알 것이다." 이처럼 대원군은 공권력과 류후조를 통해 병호시비를 다루고 있다. 그럼 洛坡先生文集 卷1에 남아 있는 柳厚祚의 글을 보자.
"1870년 7월 안동부사가 병산서원에 내린 帖紙를 보니 병산.호계서원에 소속된 각 문중 유생들을 이달 27일 호계서원에 모으고 관에서도 그때 참석한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합하께서 어떤 합당한 대책을 시달한 것이 있으리라 짐작됨니다. 1866년 봄 제가 병산.호계 양쪽의 보합한 사실을 알리온봐가 있어서 합하께서도 유념하신 것이 있으시어 沈東臣 안동부사에게 교시까지 있었으나 8월 제가 중국에서 돌아와 보니 아무런 결정이 없었습니다. 들으신바가 무엇이었으며 통촉하신바가 무엇이어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비록 병산서원쪽 사람이오나 保合하는 일에 있어서는 많은 고심을 하였으니 어디까지나 사심이 아닌 公道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위의 글에서 병호의 보합은 대원군과 류후조와 공권력 만에 의해 모두가 화평해야 元子가 탄생한다는 논리로 밀어 붙였음을 알수 있다. 그래서 1870년 8월27일 호계서원 에다가 호유 600명과 병유 400명을 모아 대원군의 지시를 전하면서 안동부사가 보합을 시도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대원군은 크게 노했다. 9월에 류후조와 안동부사에게 다시 보합을 지시하면서 그 구체적인 방안 까지 언급했다. 대원군은 판서 최우형에게도 이러한 사실을 알리며 류후조의 역할에 대해 크게 실망 한다고 말한다. 나암수록 9월22일자 79쪽에 보면 대원군은 보합이 안되는 이유를 병유들이 겉으로는 자기말을 따르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호유를 이기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최판서에 적고있다. 그러나 나는 대원군이 호유와 접촉이 있었나 하고 뒤져 봐도 흔적을 보지 못했다. 오로지 류후조와 공권력만 동원 했다. 그뒤 병호간의 보합은 강권에 의해 겉으로 이룩된걸로 나타난다. 나암수록 12월 기록을 보면 1870년 12월 호론을 대변하는 <大山實記>와 병론의 병호시비 기록인 <廬江誌>를 관정에서 破板했다는게 나온다. 그 다음해 10월 류후조는"명령을 받들어 보합한뒤 별다른 일" 없음을 보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 화해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柳道性의 <石湖集> 묘갈명에 나오는 글을 보면 20년 뒤인 1890년에도 병론을 대표해서 류도성과 호론을 대표하여 김도화가 만나 세가지 안건을 합의하고 饗宴禮를 가졌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이때서야(1890) 병호는 서로 병호시비건에 대해 일체 언급을 금하기로 약조한 것 같다. 내가 문헌에선 찿을수 없었지만 집안에 내려오는 말로는 그렇다고 나를 키워주신 큰집 又泉 金鎬冕 형님 말씀이시다. 대원군에 의해 강제 保合이 성립 된지 20년 지나서야 양측에 의한 자발적인 보합이 이뤄졌다는 말이다. 대원군은 南人을 이용 할려는 욕심만 있었지 얼마나 일은 부실하게 다루었나를 알수있다. 또 철권정치 일변도 였다. 대원군은 1865년 萬東廟 철폐를 시작으로. 1868년엔 전국에 미사액 원사를 철폐했다. 이때 우리선조인 학봉을 모신 臨川書院도 뜯겨 나갔다. 1863년 가을 李啓魯의 청으로 병산서원을 사액 한다는 명이 내리자 임천서원도 사액 서원으로 지정해달라고 청원중 이었다. 사액은커녕 임천서원은 훼철이란 극약 처방을 받자 定薺學派 유생들은 분노로 들끓었다. 1870년11월17일 내 고조부를 비롯 14명의 유생이 상경 疏廳을 차리고 대원군에게 통지했다. 대원군은 대노했다. 그로선 독한 마음먹고 자기 선조인 仁平大君의 서원마져 뜯어놓고 시작한 일이었다. 내고조부는 12월10일 구류되어 21일 함경도 金城으로 유배를 떠났다. 이때 같이 유배를 떠난 학자는 14명으로 李文稷, 柳基鎬, 金養鎭, 李집, 李경在, 權胄煥, 張九鳳, 金耆永, 李炳瀚, 權光夏, 李晩協, 金秀洛, 李찬燾, 그리고 우리고조부 金헌洛등 이다. 이들은 남북으로 흩어져 귀양을 떠났다. 내 고조부는 이듬해 3월19일 解配 되어 금강산과 강릉을 거쳐 귀향 하셨다. 이때 고조부가 남기신 금강산 기행문은 문장이 유려하기로 이름났고 용庵集에 전한다. 이14명은 流配에서 돌아와 <同舟契>란 모임을 만들어 日帝때 까지도 자손들 사이 유대관계가 지속 되었다.
더디어 1871년 전국47개 서원을 제외하고 모든 서원을 철폐했다. 경상도엔 사액 72개서원, 미사액 639개 서원이 있었다. 호계서원도 이때 뜯겼다. 병산서원은 류후조의 로비로 살아남은 기록이 <나암수록>己巳 1-2월, 7쪽에 보면 나온다. 오늘날 그 아름다운 병산서원을 볼수있는걸 우리들은 낙파 류후조에 감사 해야한다. 그러나 병호 양측은 마음속으로 흔쾌한 화합이 이뤄지지 않았기에 丙寅洋擾때 군수원납 이라던가 경북궁 중건, 만인소, 의병활동 등을 통해 사사건건 서로 어깃장을 놓는다. 1866년 일어난 병인양요 뒤 류후조와 신석호, 許元拭등이 앞장서서 영남에다가 원납을 독려 한다. 물론 호론들은 냉담했다. 심지어 병유들도 크게 기여 하지는 못한다. 경제사정이 어렵던 시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경북궁 중건 때도 마찬 가지였다. 황해도나 평안도의 10분의 1도 못 됐다. 그만큼 경제의 축이 대중국 무역을 쥐고있는 서북쪽으로 쏠려 있는 시기 이기도 했다. 대원군은 "경복궁이 중건되면 남인이 發揚 한다"고 류후조를 독려 했다. 그러나 호론들이 류후조에 협조 했다는 자료는 못 보았다. 그럼 萬人疏를 들여다 보자. 우선 만인소가 무엇이냐 하면 영남남인들의 정치활동 이라고 보면 된다. 일반 상소는 성균관 掌議에 의해 謹悉을 받아 승정원을 거쳐 왕에게 올라 가게 되어 있었다. 이 길목마다 노론들이 진을 치고 앉아 방해를 하니까 정권에서 소외된지 오래된 남인들은 근실없이 상소가 가능한 만인소란 형태를 원용했다. 물론 이경우도 노론의 방해가 자심했지만.
1871년 서원훼철반대 만인소가 일어났다. 물론 호유가 이끌었고 10,027명이 서명 했다. 李震相, 柳寅睦, 李晩起, 李寅華 등이 주도 했고 疏首는 鄭民秉이 맡았다. 그러나 남인 관료들과 병유들은 불참했다. 냉담정도가 아니라 적극 저지에 앞장 섰다. 하회,우천의 류씨를 비롯 梅院의 광주 이씨, 경주 良洞 驪江 이씨까지. 이는 자기 조상을 모신 서원은 헐리지 않았기 때문도 있고 문중에 인물이 대원군에 의해 기용 되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류후조의 맞아들 류주목은 선두에 서서 만인소를 막았다. 대원군은 경주의 孫尙駿과 상주의 柳寅睦에게 참봉 자리를 주는등 회유책을 쓰는 한편 같은해 일어난 李弼濟의 난을 침소 봉대 虎儒들을 협박하는데 이용했다. 그러나 이 만인소로 아무도 처벌 받은사람은 없고 대원군은 스스로 남인의 후견자로 자처하며 대원군과 남인은 그래도 한통속이란 선에서 미봉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2년뒤인 1873년 10월25일 동부승지 崔益鉉이 대원군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제기 하므로 정국은 회오리 치기 시작, 고종은 親政을 결심하게 된다. 최익현은 만동묘의 철폐, 서원훼철, 종실의 양자, 남인 李玄逸. 睦來善등의 신원, 청나라 돈의 사용, 군수원납등 대원군의 모든 시책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연이어 대원군세력의 반격도 만만치 않게 벌어 졌지만 결국엔 실각, 楊州 直谷으로 물러났다. 이사건으로 1875년에 일어난게 대원군 奉還 萬人疏 였다. 이번엔 병유가 주동이되고 호유는 불참했다. 우리 의성 김씨나 안동 권씨는 전연 참여한 사람이 없다. 李鉉燮의 <愚軒實記>에 보면 李章浩가 "금번의 상소는 전 영남의 대의인데 대문중에서 전연 불참한 곳에 죄를 밝히지 않을수 없다"고 나온다. 이는 호론측을 가리키고있다. 이 만인소의 앞장은 上溪쪽 퇴계후예가 앞장서고 서애후손중 류후조가 이때는 사직,낙향하여 柳道洙등을 뒤에서 밀었다.. 상계측이 발론단계부터 대원군과 접촉했다. 10월25일 안동 숭보당서 상소 도회를 열었다. 서원훼철과 戶佈문제로 논란은 있었으나 疏首를 상주의 鄭民采로 정하고 11월20일 시작키로 했다. 그러나 행동에 옮기기도 전에 疏首와 李章浩, 李中麟등 주동자가 안동부에 구금된다. 그이후 전국 규모로확산, 류도수등 여러명이 유배도가고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전라도, 함경도 유생도 참여하자 고종은 疏首등을 처형하겠다고 강경책을 들고 나왔다. 다급해진 대원군 은 이듬해 6월22일 비를 무릅쓰고 서울로 돌아와 가까스로 소수등을 처형에서 구해냈다. 그결과 대원군의 재등장을 원하는 상소는 사라졌다고 梅泉野錄 18쪽에 전한다.
그다음 1881년 일어난 斥華 萬人疏는 屛虎의 관점에서 볼수는 없다. 만인소중 가장 많이 알려져있고 또 가장 복잡한 양상을 띠우나 이는 고종과 대원군의 마지막 세력 다툼이라고 볼 때 대원군과 병론 이 합심, 함께 움직인 정치행태는 보이나 호론이 끼어서 어떤 역할을 한 흔적은 별로 안보인다고 나는 추정한다. 다만 끝무렵 전국의 유림이 다 斥倭, 斥洋을 외칠 때 虎論은 누구보다 앞장설 도그마는 갖고 있었지만 서원철패와 戶佈실시의 대원군정책에 대한 반감 때문에 오히려 소극적이 되어 조용히 抗日을 예비했던 시기 같다. 참 복잡했지만 척화 만인소를 이해 하지않고는 병호의 한쪽인 병론을 이해 하는데 갭이 생기니까 그전말을 따라가보자 .시작은 李恒老제자인 재야 노론 金平默이 주도했다. 고종이 親政과 함께 개화정책을 적극 추진한다. 여기에 필수적으로 따르는게 虎論을 뺀 대원군세력과의 충돌이다. 고종은 倭와 洋을 분리, 왜와 국교정상화를 추진한다. 일본의 무력시위로 이 일방적인 정책은 실패 하지만 어쩌던 개항은 이뤄졌다. 이걸 김평묵이 보고 들고 일어난다. 이유는 집권 노론세력 과 아직도 관료화되어 고종 밑에 남아 있는 京南(서울 및 근기 지역 남인)을 견제하기 위해서다. 개화를 반대하며 겨냥은 정권에 남아있는 노론과 남인 이었다. 요란했지만 영남의 남인들은 큰움직임이 없었다. 왜냐하면 병론들도 俸還萬人疏의 여진에서 아직 잠들어 있었다. 한번 만인소를 벌리면 그 경비가 엄청 났다. 그러다가 1880년 김홍집이 가져온 <朝鮮策略>이 고종에 의해 전국에 유포, 조정에 의해 지지를 받자 영남 儒生들이 척사를 외치며 일어났다. 11월26일 안동향교서 都會를 열고 疏首에 李晩孫을 뽑고 金祖永, 金鎭淳, 金錫奎등이 주도했다. 이게 전국으로 확대되어 결국엔 5월15일 고종의 斥邪윤音 발표로 가닥을 잡지만 내막적으론 민씨네와 이최응의 처벌 주장을 빼는 대신 金弘集만 탄핵하는 선에서 타협하므로 상소를 주도했던 측에선 아무도 벌 받은이도 없다. 다만 당시 영중추부사 韓啓元이 영남남인에 협박편지를 보내므로 전과 다르게 京南이 고종의 산하로 관료화되가는 과정을 볼 수 있고 李晩由는 承旨로 발탁, 고종의 회유책도 있었다는걸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원군세력은 크게 고무되었지만 다시 정권을 쥔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는걸 확인 했다. 이 때문에 소위 말하는 安驥泳 사건(李載先 사건이라고 부르기도함)이 발생 했다. 안기영은 대원군사람으로 權鼎鎬, 蔡東述(번암 채재공의 손자) 柳道洙(류후조의 손자벌)등과 친히 지내며 영남만인소 疏儒들과 어울렸다. 실력행사를 어설프게 준비하고 8월21일거사날 까지 잡았으나 고변으로 일망 타진되었다. 이사건으로 병론은 완전 失勢의 길로 접어 든다. 민비측에 의한 대원군세력의 소탕작업에 말려든 것이다. 柳道洙는 길주로 유배됐다.
1895년 乙未사변 발발과 함께 시작된 항일 의병활동에선 군데 군데 병호가 티각거리는 현상을 볼수있으나 퇴계파 전체가 항일이란 大命題엔 이론이 없었다. 여기 세세하게 따져보는 것은 나로선 참 주저 된다 . 아니 시시 콜콜하게 자료를 정리 하다가 사실은 그만 두었다. 어느집이던 항일의 열사는 다 있고 그만큼 퇴계학 자체가 항일전선에 몸을 불태우지 않으면 안될 명제를 내포하고 있으니까, 오히려 나는 항일의 문제를 생각할 때 마다 李朝 후반을 꽉 쥐고 흔들었던 老論의 친일 문제를 더 캐보고 싶은 욕망을 금할 수 없다. 의병들의 노래가락 속에서 尤巖을 야유하는 구절을 발견하고 한없는 서글픔을 느꼈다. 그러나 反日이냐 親日이냐 하는 문제는 또다른 긴 思索을 강요 당한다. 그래서 이걸 잣대로 병호를 분석하는건 뒤로 남겨두고 이 두서없는 내 ESSAY를 여기서 마치자. Dec 17 2003 Gene Kim
<이글을 너희들께 남기는 이유는 내가 하회로 장가를 갔고 너희들은 屛虎 양쪽의 피를 다 받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수진이가 이글을 읽는다면 weird !하고 소리칠게 뻔하다.
다만 내 고조부는 그래도 비교적 병호문제에 대해 균형 감각을 잃지 않을려고 애 쓰신 것 같다.
屛論의 맹장 柳疇睦(낙파 류후조의 맏아들, 낙파보다 먼저 죽었다)이 "옛말에 '名下에 헛된 선비가 없다'하더니 내가 용庵(내 고조부)을 보고서 이말이 거짓이 아님을 더욱 믿게 되었다."라는 말을 남겼다.
또 내 할배는 병론측집에 딸을 둘이나 보냈다. 사실 이 병호시비에 대해선 양측이 전연 더 언급않기로 약조가 되어 있단다. 지금 남아있는 자료는 노론계의 봉화출신 사학자 申奭鎬가 1931년 靑丘學叢에 쓴글이 유일하다.
청구학총이란 청구학회 기관지이다.
조선총독부 관리와 京城帝大 교수들을 주축으로 한국사 歪曲과 渟滯史觀의 전파에 첨병 역할을 한게 이 청구학회인데 홍희, 최남선, 정만조, 이창근, 이능화가 평의원으로 활약했고 이병도, 신석호등 대표적인 정체사관의 사학자들이 위원으로 활약했다.
병호시비도 한민족의 전형적인 분열상 이니까 그들의 연구대상 이었다.
병호양측 자료는 병론을 대변한 여강지 3책과 호론을 대변한 여강전말 4책이 있을 뿐이다. 큰집 又泉 형님은 내게 申奭鎬의 논문을 밑줄 그어가며 주셨다.
낙동대감 柳厚祚의 6대종손 되는 世夏가 내어린 시절 둘도없는 벗이었다.
나하곤 열촌 사이였는데 한학년 아래고 상주서 우리집을 보고 이사와 바로 앞집에 살았다.
그 어른되는 時浣씨도 나중에 김천 고등학교 교장을 지내셨는데 우리 사랑에 살다시피 했다.
10여년전 내가막 미국서 와 어느날 골프 샾에 들렀더니 상주 중학 후배되는 주인 녀석이 세하의 죽음을 알려주었다.
부산 대선소주 회장으로 있다가 암으로 갔는데 골프를 너무 좋아해 친구들이 관속에 치던 골프채를 넣어
주었단다.
우리는 군청 뒷마당을 무대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世夏는 부랑스런 나한테 맞기도 많이 맞았는데 그때 洛坡의 행적을 내가 알았더라면 더 때려 줄걸 그랬지....
<後記 2> 이글을 읽으시고 又泉형님은 龜窩 김굉이 학봉등을 빼고 퇴계에게 대산이 적전이란 주장을 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하셨다.
또 내가 미국있을 때 臨川誌와 金溪誌를 다시 찍어돌리는 문제를 논의 했는데 그때 내 아버님이 臨川誌는 屛虎問題를 담고 있으니까 빼자고 주장하셔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단다.
비록 지금으로 부터 114년전 兩家의 약속이지만 지켜주는게 도리라는 말씀이셨다.
그래서 이 글을 처가쪽엔 장인, 두처남에게 주었는데 전화를 해서 양가 약조를 어기고 써 돌린걸 사과하고 갖고있는 글을 없애라고 부탁했다.
龜窩 김굉의 주장은 1815년 11월 6條疏를 올리며 이상정의 贈職, 贈諡와 사당의 설립을 청하는 글에서 퇴계 이후 1인이란 주장을 했다.
龜窩文集 卷3 疏,辭禮曹參判疏에 나온다.
그러나 척암 김도화의 증조부인 김굉이 1813년 학봉의 묘갈명을 쎴고 또 같은 청계공 후손이란 점에서 학봉과 서애를 의식적으로 폄하한게 아니라 大山을 강조 하다가 보니까 이런 글을 남긴 것 같다.
어째던 큰 틀에서 又泉형님의 지적은 예리하고 또 그렇게 보는게 당연하다고 생각된다. ( Jan 3 2004 )
출처 : http://blog.daum.net/hanyangcho/15712842에서 복사해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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