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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 & Article

찬송생활 길라잡이

singingman 2022. 10. 31.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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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찬송하며 산다.

찬송은 존경하고 칭찬하는 행위이다. 즉 하나님을 존경하고 칭찬하는 것이 찬송이다.

찬송은 선택사항이 아니고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사항이다.

성경에서 찬양하라는 명령은 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이 기록되어 있다.

마지못해 하는 찬송이 아니고 감사와 기쁨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찬송이다.

하지만 간혹 언제 무엇을 어떻게 찬송해야할지 모를 때가 있다.

이 문제에 관해서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알아봄으로 도움을 얻고자 한다.

 

1. 왜 찬송해야 하는가?

시편 22:3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신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찬양 중에 거하신다는 말씀이다.

이사야서 43:21절은 왜 우리가 찬송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이유가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기 위해 지으셨다고 하셨으니 당연히 찬송해야 한다.

 

또 신약 에베소서 1장 5~6절에는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 목적이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았고 그의 자녀가 된 우리가 창조주이시고 아버지이신 그분을 찬송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뜻이다.

 

 

2. 언제 찬송해야 하는가?

성경에는 찬송의 시기를 특별히 정해놓지 않았다.

하지만 성경의 흐름을 보면 찬송은 언제나 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편 146:2절을 보면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하고 있고

 

시편 150:6에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라고 한다.

히브리서 13:15에는 우리 삶 가운데서 항상 찬송할 것을 권하고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위의 글들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언제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말하고 있다.

 

또 야고보서 5:13은 어떤 경우에 찬송해야 할지 가르치고 있다.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라고 한다. 즉 우리가 즐거울 때 찬송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도저히 찬송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찬송하라고 한다. 또 역경 가운데서도 찬송하라는 그 명령에 순종했더니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역사를 보여주는 기록도 많이 있다.

 

역대하 20장 에는 유다가 모압과 암몬 연합군의 공격을 받는 위태로운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20~21절을 보면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라는 기록이 있다.

모압과 암몬자손들이 유다를 치러 온 전쟁 상황에서 여호사밧은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고 하면서도 찬송하는 사람들을 세워서 하나님을 찬송한다.

결과는 하나님께서 싸워주셔서 승리한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혀서도 찬송했다.

 

사도행전 16장 25절에는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는 기록이 있다. 그 결과 26절을 보면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라는 기록이 나온다. 즉 찬송의 결과로 이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혹 기도의 결과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뒷부분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자기들을 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 같지는 않다. 매인 것이 다 풀렸는데도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간수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시편 119:164에는 다윗이 대적들에게서 핍박을 당하고 어려운 가운데 있었지만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라고 한다.

주위에서 원수들이 다윗의 생명까지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하루 일곱번씩 주를 찬양하겠다는 표현은 구약적인 표현으로 본다면 하루 종일 찬양하겠다는 뜻이다.

 

즐거운 상황에서 찬송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도저히 찬송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찬송하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또 상황과 절기에 맞는 찬송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교회력에 따라 찬송을 선곡하고 노래한다면 그 교회력이 가진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고 체험할 수도 있다. 부활절에 성탄절 찬송을 부르는 것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을 줄 수도 있다.

찬송은 우리가 세상 살아가는 동안 교회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천국에 가서도 계속할 일이다.

우리가 예배중에 하는 헌금이나 설교는 아마 천국에서는 없겠지만 찬송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계속될 중요한 일이다.

 

3.무엇을 혹은 무엇으로 찬송할 것인가?

출애굽기 15:1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고 난 후에 부르는 노래가 기록되어 있다.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애굽군대의 추격을 피해 홍해를 육지처럼 건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찬송한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를 것을 기대하고 찬송한다.

17절을 보면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라고 함으로 앞으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찬송하기도 한다.

이 모세의 노래는 요한  계시록 15장 3절에 의하면 천국에서도 불리는 노래다.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한 후에 한 찬양은 한 개인의 차원이 아니고 국가적 차원의 찬송이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인 찬송인지 알 수 있다. 최고의 음악가들과 제사장들이 모든 악기들을 다 동원해서 잘 조직되고 훈련된 전문가들과 함께 찬송한다.

역대하 5장을 보면 그 규모의 거대함과 잘 조직된 찬양대의 모습에 위압감을 느낄 정도다. 역대하 5장 12~14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제단 동쪽에 서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또 나팔 부는 제사장 백이십 명이 함께 서 있다가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고 한다.

성전에 구름이 가득 찼다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하신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고 그로 인해 두려워진 제사장이 감히 섬기는 일을 감당할 수도 없었다는 기록이다.

성전을 완공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솔로몬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함께 감사의 찬송을 드린다.

위의 기록들은 한 개인이 아니고 민족전체가 혹은 대규모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나 기적적인 도움에 감사해서 찬송한 기록이다.

 

예배시간이나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찬송할 때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찬송하는 것이 좋다. 피아노 반주만이 아니라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더 있다면 다른 악기들도 동원해서 찬양하는 것이 좋다는 말이다. 오늘날 큰 교회에서 예배시간에 오케스트라가 함께 연주하는 것도 성전봉헌식에서의 기록에 비춰보면 사실 그리 큰 규모도 아니다.

 

개인적인 찬송의 기록들도 많이 있다.

누가복음 2장28~32절의 기록에는 시므온이 어린아기인 예수님을 만나고 찬송하는 기록이 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예수를 만난 사람은 찬송할 수밖에 없다.

 

또 누가복음 1장 46절 이하에는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고 찬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감히 상상할 수 도 없는 큰 복을 받은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송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구원의 큰 일을 찬송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찬송을 불러야 할까?

수많은 찬송들이 있지만 선택해서 부를 필요가 있다.

에베소서 5장 19절은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 구절을 구약의 시편과 교회에서 공인된 찬송가와 새로운 창작 성가들을 말한다고 설명한다.

시편과 교회에서 공인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새로운 창작 성가들 가운데는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사용에 곤란을 겪는 경우도 가끔 있다.

선율이나 리듬이 교회에서 쓰기에는 너무 세속적인 느낌을 주거나 미신적이거나 불신앙적인 것을 연상하게 하는 음악들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악한 세력들은 할 수만 있으면 교회안에서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울려고 하고 음악은 그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음악은 사람들에게 일부 로큰롤 음악처럼 타락한 퇴폐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좋은 찬송가처럼 선한 영향도 줄 수 있다.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큰 위안과 힘을 얻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루터가 종교개혁에 성공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당시에 불리던 찬송가의 힘이라는 견해도 있다. 혁명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노래로 사람들에게 용기를 가지게 만들고 새로운 생각을 고취시키기도 한다.

그러므로 요즘 교회에서 많이 불리는 CCM(Contemporary Church Msic)들은 교회음악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서 잘 선별해서 사용해야한다. 복음성가 혹은 성가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교묘하게 위장된 New Age 음악들도 교회 안에 들어오고 있다. 뉴 에이지 음악이 무조건 다 나쁜 것은 아니지만 New Age Electronic Computer Music을 하는 전자 음악인들은 '자연, 우주, 생명의 소중한 가치에 대한 찬양도 하지만 인간의 신의 역할, 절망, 죽음, 심지어는 사탄을 찬양하는 듯한 메시지를 담아 뉴 에이지의 음악 범주를 확대시키기도 했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97049 참조)

 

개인적인 찬송은 자신의 신앙고백이 되는 것이 좋다. 그러려면 자기의 문화적 환경에 익숙한 것이 좋다. 요즘 10대들이 주일예배에서 어른들이 부르는 찬송가의 노래들을 잘 부르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여러 원인들이 있겠지만 선호의 문제이다. 현재 우리 찬송가에 실려있는 노래들은 한 두세기 이전의 서양문화적 배경을 가진 노래들이 많다. 이런 음악적 특징들이 그들의 문화적 배경과 맞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즉 요즘 10대들이 즐겨하는 음악들은 빠른 템포와 당김음이 많고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가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에 비해 찬송가의 노래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쁘거나 우월하고 열등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호 불호의 문제다. 젊은이들이 자기의 신앙고백을 담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어야 한다.

또 한편으로는 정 반대의 경우도 있다. 교회에서 예배시작 전에 경배와 찬양팀이 인도하는 많은 찬송들이 너무 많은 당김음들과 복잡한 리듬을 가지고 있어서 나이 많은 교인들이 도저히 함께 부르기에 벅찬 노래들도 많이 있다. 젊은이들과 장년층이 예배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찬송을 만들거나 선곡하는 것이 필요하다.

음악은 옷과 같다. 시대와 절기 또는 문화에 맞게 부르는 것이 좋다. 성경은 일점 일획도 변해서는 안 되지만 음악의 표현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 좋다.

 

외국의 민요나 세속곡을 교회음악으로 바꾸어 사용하는 콘트라팍타(Conterafacta)의 경우에는 그 음악이 교회의 정신이나 분위기에 적합한지 잘 파악하고 사용해야 한다.

찬송은 자신의 주관적인 표현이 전혀 안 들어갈 수는 없지만 여러 명이 함께 부를 때는 작곡가의 의도를 존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또 교회에서 노래할 때 반주악기 소리가 너무 커서 나이 든 교인들이 힘들어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젊은이들은 큰 소리에 익숙해서(너무 익숙해서 청각신경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젊은이들도 상당수 있다고 한다.)별로 힘들어하지 않지만 나이 든 어른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이 있기 때문에 소리의 크기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4. 어떻게 찬송할 것인가?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찬송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구약 사무엘하 6:14절을 보면 다윗이 언약궤를 오벧에돔의 집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길 때에 많은 사람들과 함께 제사와 찬송을 하고 악기를 연주한다. 이 때 다윗은 기뻐서 춤을 추게 되는데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대충 한 것이 아니고 다윗이 자기의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표현이다. 이 춤을 출 때 얼마나 힘을 쏟았든지 사무엘하 6:20절의 미갈의 표현을 빌리면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하였다. 다윗이 살던 시대의 하의는 오늘날과 같은 바지가 아니고 치마와 같은 형태였기 때문에 심하게 춤을 추면 하체가 드러날 수도 있었다. 다윗의 춤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나무라지 않고 오히려 비난하는 미갈이 벌을 받게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때 힘을 다해 찬송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에는 새 노래로 찬송하라는 표현이 많이 나온다.

시편 96:1절에는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라는 표현이 있다.

새 노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새로 작곡된 노래를 뜻하는 것일까?

새롭게 작곡된 노래를 뜻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불러온 노래라도 은혜받아서 새로운 사람이 되면 지금까지 부르던 찬송이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이고 올바른 신앙고백이 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새사람이 되면 지금까지 항상 부르던 찬송도 새노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새사람으로 거듭나서 노래하라고 말한다.

 

개인의 신앙생활이 병들지 않고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지를 측정할 수 있는 방법가운데 하나가 그 입술에 찬송이 있느냐의 여부로 알 수도 있다. 물론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사는 생활도 꼭 필요하고 중요하지만 우리가 찬송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기쁨을 누리며 산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잘 준비해서 찬송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하다. 일상생활에서 혼자 콧노래 부르듯이 하는 찬송은 스스로 좋아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남이 이해하고 못하고가 문제가 되지 않지만 교인들 앞에서 특별 찬송을 할 때에는 충분히 준비해서 찬송해야 한다. 물론 잘 훈련되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은 비교적 적은 연습으로도 사람들이 보기에 훌륭한 연주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가 하나님보시기에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준비해야한다. 준비하지 않고 엉터리로 찬송하면서 “찬송 가사에 은혜 받으시기 바랍니다.”하는 찬송은 자칫 찬송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소홀히 생각할 위험이 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정성스러운 찬송을 기뻐 받으신다. 시편 33편 3절에는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공교히 연주할찌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개역개정판에는 “새 노래로 그를 노래하며 즐거운 소리로 아름답게 연주할지어다.”라고 번역되어 있다. N.I.V 번역판 영어성경에는 “Sing to him a new song; play skillfu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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