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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리 동구릉 20-05-23 본문

궁,능,원,묘

구리 동구릉 20-05-23

singingman 2023. 3. 30.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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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집사님 부부와 함께 가다.

 

다음 백과 사전에 의하면

사적 제193호이다.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하였으며, 1855년 수릉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건원릉은 태조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인 태종의 명을 받아 서울 가까운 곳에서 능지를 물색하다가 검교참찬의정부사 김인귀의 추천으로 하륜이 택정했다고 전한다. 광대한 숲에는 건원릉을 비롯해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 제23대 순조의 세자인 익종과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이 자리하고 있다. 

9릉 17위(位)의 왕과 왕비를 안장했다. 사적 제193호. 1408년 태조의 왕릉이 자리하고 건원릉이라 이름한 뒤, 1855년(철종 6) 익종(翼宗)의 능인 수릉이 9번째로 조성되어 동구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동오릉·동칠릉 등으로 부른 사실이 실록에 전해진다. 건원릉은 태조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인 태종의 명을 받아 서울 가까운 곳에서 능지를 물색하다가 검교참찬의정부사 김인귀(金仁貴)의 추천으로 하륜이 나가 살펴보고 택정했다고 전한다. 다른 능도 역시 길지를 물색하다가 이곳을 택한 것인데, 당시 풍수지리설에 따라 유수한 지세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59만여 평을 헤아리는 광대한 숲에는 건원릉을 비롯해 제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인 목릉,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능인 숭릉,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능인 휘릉, 제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능인 혜릉, 제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능인 원릉, 제24대 헌종과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 제23대 순조의 세자인 익종과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 등 9개의 능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이 너무 많아서 둘로 나누어 올린다.

목릉, 현릉, 수릉은 아래에 따로 올렸다.

 

 

입구에 있는 시비

 

 

조선왕릉은 모두 세계 문화 유산이다.

 

 

 

 

 

동구릉 입구

 

 

동구릉 전체 모습

 

 

 

 

 

능 입구에 세호를 양각한 기둥을 여러 개 배열해 두었다.

 

 

 

 

 

입구에 있는 이 홍살문에는 홍살이 아주 많다.

 

 

 

 

 

 

 

 

들어가는 입구에 각시붓꽃이 예쁘게 피었다.

 

 

 

 

 

숲길도 잘 조성되어 있어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숲길도 잘 조성되어 있어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래는 숭릉 구역이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제18대 현종(1641~1674)과 명성왕후 김 씨(1642~1683)의 능이다. 현종은 효종의 맏아들로 1641년 봉림대군(효종)이 선양에 볼모로 가 있을 때 태어났다.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것이다. 1644년 귀국했고 봉림대군이 세자에 책봉됨에 따라 1649년 왕세손으로 책봉되었다가 1659년 19세에 효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특이한 점은 조선 역대 왕들 중 유일하게 후궁을 한 명도 두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종이 재위한 15년간 조선은 북벌 운동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문화적 중화주의라는 방향으로 무게 중심을 옮겼다. 청의 국력이 점점 강성해지면서 북벌 운동이 군사적, 정치적으로 무모해졌기 때문이다.

외침과 내란은 없었지만 전염병과 기근이 계속되어 백성들이 고통 받자 정부는 경제 재건에 공을 들였다. 재정 부족을 메꾸기 위해 영직첩각주1) 과 공명첩각주2) 을 대량으로 발급했는데, 이는 이후 정부 재정을 보충하는 정책으로 보편화되며 조선 사회의 신분제 해체에 기여했다.

현종은 전란에 많은 사람이 죽었으므로 호구 증가를 위해 양민이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사찰에 있는 동자들도 환속했다. 또한 대동법을 실시하고 관개 시설을 만들어 수리 면적을 늘렸다. 함경도 산악 지대에 장진별장(長津別將)을 두어 개척을 시도했고, 두만강 안에 출몰하는 여진족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북변의 여러 관청을 승격하는 등 실속 있는 국방 정책을 견지했다. 나름대로 조선의 실정을 감안한 것이었지만 격심한 당쟁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과단성 있게 실시하지는 못했다.

한편 1666년에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일어난다. 네덜란드 국적의 동인도 회사 무역선 스페르베르(Sperwer)호가 대만 해협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 중 비바람을 동반한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1653년 8월 제주 남쪽 해안에 좌초해 산산조각이 난 후 침몰했다. 이 배에 승선했던 68명 중 서기인 하멜을 포함한 34명만 살았다.

하멜 일행은 그 후 10개월가량 제주에 억류된 뒤 1654년 5월 강진 해남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서울에서 2년여를 체류했고, 1656년 3월에 전라도로 다시 유배된 후 1663년 여수 좌수영, 순천, 남원 등 세 곳으로 분리 이송되었다. 이 중 여수 좌수영에 유배된 하멜을 포함한 8명은 1666년 9월 밤 미리 준비한 소형 어선을 타고 일본으로 탈출했다.

한국에서 14년 동안 억류된 뒤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하멜은 네덜란드에 귀환해 그동안의 난파 과정을 담은 『하멜 표류기』를 출간했다. 『하멜 표류기』를 통해 하멜은 한국을 유럽에 최초로 소개한 역사적 인물이 된다. 하멜이 병영에 억류되어 있을 동안 보곤 했던 은행나무는 아직도 강진에 살아 있고 현재 네덜란드에서 건립한 기념관도 인근에 세워져 있다.

현종의 비 명성왕후는 청풍 김씨 김우명의 딸로 효종 2년(1651) 세자빈에 책봉되어 가례를 치렀고, 1659년 현종이 즉위하면서 왕비에 책립되었다. 1674년 현종이 사망하고 아들인 숙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다.

명성왕후와 그의 아버지 김우명은 서인 편으로 당파적 입장을 숨기지 않고 궁내에 있는 남인 세력 추방에 관여했으며 특히 숙종의 여인 장옥정(훗날 장희빈)을 궐 밖으로 내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명성왕후는 친정의 배경과 과격한 성격이 겹쳐 거친 처사가 많았고 조정의 정무까지 간여해 비판받기도 했다.

혹자는 현종이 후궁을 두지 않은 이유는 명성왕후의 사나운 성격 때문이라고 하지만 현종이 명성왕후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주장 또한 힘을 받는다. 왕비가 아무리 시샘한다고 해도 후궁을 두는 것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명성왕후에 대해서는 왕대비가 된 후 사망하기까지 악평이 주를 이룬다.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는 그녀의 죽음과도 연관된다. 숙종이 원인 모를 병에 걸리자 그녀는 왕대비임에도 무당을 찾는다. 무당은 숙종이 병에 걸린 이유는 삼재가 들었기 때문으로 어머니가 아들을 대신해 삿갓을 쓰고 홑치마만 입고 벌을 서야 한다고 한다. 그녀는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로서 무당의 주문대로 물벼락을 맞는 벌을 선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감기에 걸렸고 결국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동구릉 입구에서 숭릉과 혜릉은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먼저 혜릉이 보이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숭릉이 보인다. 남쪽이 저습해 진입로 등이 쉽게 물난리를 겪는 등 진입 부분이 지형적으로 취약하지만 능역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홍살문 옆에 배위가 있고 참도가 시작되는데 숭릉은 홍살문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서부터 참도가 시작된다. 배위도 참도가 시작되는 옆에 위치한다. 숭릉 정자각은 조선 왕릉 중 유일한 팔작지붕 정자각으로 정전 5칸, 배위청 3칸이다. 보통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숭릉은 익랑이 붙어 규모가 큰 것이 특징이며 공포는 정전이 일출목각주3) 이익공각주4) , 배위청이 이익공이다.

창건된 1674년의 형태를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고 17세기 정자각의 다양한 유형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사례로 평가되어 보물 제1742호로 지정되었다. 건원릉과 목릉의 정자각도 2011년 12월 역사적, 예술적 가치가 큰 곳으로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모두 동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숭릉은 쌍릉으로 조영되어 왕릉과 왕비 능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연결되었고 능침 앞에 혼유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난간석에는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 신을 글자로 새겼다. 석물은 민폐를 덜기 위해 1년 전 현종이 자신의 아버지 능을 여주로 천장하면서 묻어놓았던(현 동구릉 원릉터) 것을 이용했다. 이때 신하들이 "아버지가 먹다 남은 음식으로 아들의 제사를 하지 않는다"라며 반대 상소를 했으나 송시열과 유생 등의 변론에 따라 어린 숙종은 그대로 행할 것을 명했다.

장명등, 망주석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새겨 놓았고 문·무인석은 옷 주름을 비롯해 얼굴의 이목구비가 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숭릉이 남다른 것은 예감이 3개라는 점이다. 또한 능침을 지키는 석호의 꼬리가 배 아래에 양각으로 조각되어 생동감을 준다. 비각 안의 능표에 각인된 비문에는 '朝鮮國顯宗大王崇陵明聖王后附左(조선국 현종대왕 숭릉 명성왕후 부좌)'라 적혀 있다.

현종 사후 조선 왕조에서 특이한 일이 벌어진다. 왕이 사망하면 곧바로 실록 편찬에 들어가는데 이 작업이 선대와는 달리 지지부진해 숙종의 독촉을 받고 비로소 숙종 3년(1677)에 완성된다. 그런데 『현종실록』 편찬에는 현종 말년 이후 숙종 초년에 걸쳐 득세한 남인 측이 많이 참여해 서인 측은 불만이 많았다. 1680년 서인이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자 서인 중심의 실록개수청이 설치되었고 1683년에 『현종개수실록』 28권이 완성되었다.

조선 시대의 수정 실록은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이 있는데 개수각주5) 실록은 『현종실록』이 유일하다. 당쟁의 결과 부득이 수정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현종개수실록』에 대한 평가가 고깝지 않은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1. 숭릉崇陵(현종과 명성왕후)

 

위치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쌍릉

능의 조성 :1674년(숙종 즉위), 1684년(숙종 10)

능의 구성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형식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였으며 능침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1좌씩 놓여 있다.
그 밖의 석양, 석호, 망주석, 문무석인, 석마 등은 일반적인 조선왕릉의 형태로 배치되었다.

숭릉의 석물은 효종의 구 영릉(寧陵)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영릉(寧陵)이 여주로 천장될 때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사용하였다.
망주석에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위쪽에는 ‘세호’라고 불리는 작은 동물 조각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다.

능침 아래에 있는 정자각은 조선왕릉 40기 중 유일하게 남은 팔작지붕 정자각이며, 보물 제1742호로 지정되었다.

 

능의 역사

1674년(현종 15)에 현종이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숭릉을 조성할 때 8도의 승군 2,650명을 징발하여 능을 공사하였다. 숭릉의 혈을 파기 위해 겉흙을 걷어냈을 때 부도를 세우려 했던 흔적이 나왔으나, 깊이가 3척밖에 되지 않아 지맥을 손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광중 밖이기 때문에 그대로 진행하였다.

숭릉 조성 후 9년이 지난 1683년(숙종 9)에 명성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 그 다음 해 숭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현종(顯宗) 이야기

현종(재세 : 1641년 음력 2월 4일 ~ 1674년 음력 8월 18일, 재위 : 1659년 음력 5월 9일 ~ 1674년 음력 8월 18일)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아들로 1641년(인조 19)에 청나라 심양 관사에서 태어난 조선 역대 임금 중에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1645년(인조 23)에 인조의 세자인 소현세자가 급서하고 아버지 봉림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는 동시에 원손이 되었고, 1648년(인조 26)에 왕세손이 되었다.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세자가 된 후 1659년에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에 함경도 산악지대를 개척하고,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된 북벌정책을 중단시켰으며, 호남 지방에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동철활자 10만 자를 주조시켰으며, 천문 관측과 역법 연구를 위하여 혼천의를 다시 제작하게 하는 등 다양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두 차례의 예송논쟁으로 붕당의 싸움이 치열하기도 하였다.

1647년(현종 15)에 창덕궁 재려에서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종은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고 사려가 깊었다.

청나라 심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보다 먼저 본국으로 먼저 돌아왔는데,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때마다 하루 빨리 아버지인 효종이 돌아오기를 기도하였다.

새로 맛있는 음식을 대할 때, 효종이 있는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면 바로 보내게 하고 나서야 맛을 볼 정도로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컸다고 한다.

어린 현종이 어진 인정을 베푸는 대상은 부모뿐만이 아니었다. 한번은 그의 할아버지인 인조가 방물(方物)을 받다가 표범 가죽의 품질이 나빠서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다.

이 때 현종의 나이 7세였는데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아마도 사람이 많이 다칠 듯합니다.”하니, 인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돌려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하루는 궁중에서 나오다가 추위에 얼고 굶주린 궐문 밖 군졸을 보고는, 탄식하며 옷과 식량을 제대할 때까지 제공해주라고 명령하고서야 자리를 떴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어린 현종의 이러한 효성과 자애로움은 할아버지인 인조에게 큰 신임을 안겨주었다.

 

명성왕후(明聖王后) 이야기

명성왕후 김씨(재세 : 1642년 음력 5월 17일 ~ 1683년 음력 12월 5일)는 본관이 청풍인 청풍부원군 김우명과 덕은부부인 송씨의 딸로 1634년(인조 12)에 장통방(현 서울 종로2가 관철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651년(효종 2)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현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현종 사이에 1남(숙종) 3녀(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를 낳았다.

명성왕후는 지능이 뛰어나고 성격이 과격했다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궁중의 일을 다스림에 있어서 거친 처사가 많았고 공공연히 조정의 정무에까지 간여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 후 1683년(숙종 9)에 창덕궁 저승전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종의 재위 기간 동안 일어난 붕당정치의 여파로 숙종 재위 시의 조정은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제 2차 예송논쟁으로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게 되고,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세 아들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이 남인과 가까이 지내자 서인들은 더욱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던 중 명성왕후와 그녀의 아버지 김우명은 복창군, 복평군, 복선군이 궁녀들과 불륜의 관계를 맺었다고 주장하며 그들을 단죄해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하였다.

이 사건을 홍수(紅袖 : 궁녀)의 변이라고 한다. 이 주장에 놀란 숙종은 세 사람을 금부에 가두고 심문하였으나, 이들이 죄가 없다는 주장이 대세가 되고, 오히려 김우명에게 무고죄를 적용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조정에서는 한밤중에 이 문제를 둘러싸고 회의가 열렸는데, 갑자기 정청에서 여인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휘장 뒤에서 대비인 명성왕후가 우는 소리였다.

“홍수의 변은 내간의 일이라 과인이 알 수 없다고 생각하여 어머니께서 복평 형제의 간통사건을 설명해주려고 나오신 것이오.”

숙종은 어머니인 명성왕후를 위해 둘러댔지만 수렴청정을 하지 않는 대비가 정청에 나타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로 인해 남인들의 상소가 빗발쳤으며, 명성왕후는 큰 망신을 당하게 되었다.

그녀의 과격한 성격의 단면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숭릉 정자각은 보수 공사중이다.

이 정자각은 다른 정자각들이 맞배지붕인데 비하여 유일하게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아래 사진은 다른 사람의 것을 가지고 왔다. 

 

 

팔작지붕이고 양 옆에 익랑이 있나?

 

 

 

 

 

 

 

 

원래는 연꽃이 피었을 연지에 지금은 부들이 가득하다.

 

 

 

 

아래는 혜릉 구역이다.

 

한국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후기 제20대 경종과 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 왕비릉. 

왕후는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심호(沈浩)의 딸로, 1696년(숙종 22) 11세로 세자빈에 책봉되었으나 1718년 소생 없이 죽었다. 1722년(경종 2)에 능으로 봉하였다.

능제(陵制)는 인현왕후(仁顯王后)의 능인 명릉(明陵)의 제도를 따라 문무석(文武石)을 비롯한 모든 석물(石物)이 등신대(等身大 : 사람 몸만큼의 크기) 정도로 왜소화되고 있으나, 무신의 얼굴이 당대의 유행과는 달리 고래의 형식을 따르고 있음이 특징이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令) 1인과 참봉 1인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2. 혜릉惠陵(경종비 단의왕후)

 

위치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단릉

능의 조성 :1718년(숙종 44)

능의 구성

혜릉은 조선 20대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처음 왕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이전의 순회세자묘(순창원)와 소현세자묘(소경원)의 예를 참조하여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단의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 하였고, 1722년(경종 2)에 능의 형식에 맞게 무석인, 난간석, 망주석 등 석물을 추가로 제작하였다.

능침의 석물은 명릉(明陵) 이후의 양식을 그대로 따라 작게 조각하였다.
장명등은 현재 망실되어 터만 남아있고, 정자각은 광복 후 한국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95년에 새로 복원하였다.

 

능의 역사

1718년(숙종 44)에 단의왕후 심씨가 왕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인 숭릉 왼쪽 산줄기에 묘를 조성하였다.

1720년에 경종이 즉위하자 왕후로 추존되어, 능호를 혜릉(惠陵)이라 하였다.

 

단의왕후(端懿王后) 이야기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재세 : 1686년 음력 5월 21일 ~ 1718년 음력 2월 7일)는 본관이 청송인 청은부원군 심호와 영원부부인 박씨의 딸로 1686년(숙종 12)에 회현동(현 서울 회현동) 우사에서 태어났다.

단의왕후가 5세 때이던 어느 여름날, 아버지 심호가 술에 취해 낮잠을 자면서 딸에게 부채를 들고 파리를 쫓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저녁때가 되도록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그래서 심호는 그 딸을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항상 가인들에게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

또한 그녀는 천성이 간소한 것을 좋아하여 남이 좋은 옷을 입더라도 부러워하지 않았으며, 좋은 것이 생기더라도 반드시 여러 동생들에게 모두 나누어주는 등 물건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고 한다.

1696년(숙종 22)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는데, 실록에는 하루 종일 단정하게 앉아서 잠시라도 함부로 기대거나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시녀들이 궁궐 구경하기를 청해도 따르지 않고 『소학(小學)』을 읽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타고난 의젓함과 총명함으로 궁궐의 어른들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 데 손색이 없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1718년(숙종 44)에 창덕궁 장춘헌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경종 사이에는 소생이 없으며, 1720년에 경종이 즉위하자 단의왕후로 추존되었다.

 

 

 

 

 

 

 

 

 

 

 

 

 

 

 

 

 

 

 

 

 

 

 

 

 

 

 

 

 

 

 

 

 

 

 

 

 

 

 

 

 

 

 

 

 

 

 

 

 

 

 

 

아래는 경릉 구역이다.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후기 제24대 헌종과 왕비 효현왕후 김씨, 계비인 효정왕후 홍씨의 능. 왕릉·왕비릉. 사적. 

사적 제193호인 동구릉의 하나이다. 원래 목릉(穆陵)의 옛 자리로서, 효현왕후상 때 정하여 능의 이름을 경릉이라 하였다.

상설(象說)의 제도는 영조가 제정한 국조상례보편제도(國朝喪禮補編制度)를 따랐다. 세 능은 난간을 터서 연결하고 뒤로 곡장(曲墻 : 굽은 담장)을 둘렀으며, 각 능 앞에 혼유석(魂遊石)만 마련하였을 뿐, 모든 제도가 단릉과 마찬가지이다. 장명등(長明燈)은 사각옥형식(四角屋形式)이고, 망주석의 세호(細虎)는 완연하며, 우승형(右昇形)·좌강형(左降形)을 이루고 있다.

이 능은 왕·왕비·계비를 같은 곳에 모신 쌍릉제도를 변형시킨 삼연릉(三連陵)의 형식을 취한 것이 특색이다. 문무석(文武石)은 18세기 이래의 석인양식(石人樣式)의 특징을 잘 나타냈다.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직장(直長) 1인과 참봉을 두어 관리하였다.

 

3. 경릉景陵(헌종과 효현황후·효정황후)

 

위치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삼연릉

능의 조성 :1843년(헌종 9), 1849년(철종 즉위), 1904년(광무 7)

능의 구성

경릉은 조선 24대 헌종성황제와 첫 번째 왕비 효현성황후 김씨와 두 번째 왕비 효정성황후 홍씨의 능이다.

경릉은 세 개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三連陵)의 형태로 조선왕릉 중 유일하다.

정자각 앞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헌종, 가운데가 효현성황후, 오른쪽이 효정성황후의 능이다.

세 봉분은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난간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 봉분 앞에는 혼유석을 따로 설치하였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었으며, 비각에는 한 개의 표석이 있다.

표석은 대한제국 선포 후 황제 추존으로 바꾼 표석으로, 전면에는 ‘대한 헌종성황제 경릉 효현성황후 부좌 효정성황후 부좌’라 써있다.

 

능의 역사

처음 경릉자리는 선조의 목릉(穆陵)이 있던 자리였는데, 1630년(인조 8)에 목릉에 물길이 있고 풍수상 불길하다는 심명세의 상소로 목릉천장을 확정하고 구릉을 파고 현궁을 열어 보니 물기가 없어 그의 불길론은 해소되었다.

이 후 헌종의 첫 번째 왕비 효현성황후 김씨가 1843년(헌종 9)에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처음 능을 조성하였다.

6년 뒤인 1849년에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13곳의 택지를 간심한 끝에 ‘십전대길지(十全大吉地)’의 명당이라고 주장한 효현성황후의 경릉 오른쪽에 능을 조성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4년(광무 8)에 헌종의 두 번째 왕비 효정성황후 홍씨가 세상을 떠나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 이야기

헌종(재세 : 1827년 음력 7월 18일 ~ 1849년 음력 6월 6일, 재위 : 1834년 음력 11월 18일 ~ 1849년 음력 6월 6일)은 추존 문조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아들로 1827년(순조 27)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태어났다.

1830년(순조 30)에 왕세손으로 책봉되고, 1834년에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8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으므로 할머니인 순원숙황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헌종 연간은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도정치가 서로 대립하여 두 차례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으며 , 삼정(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으로 백성들이 큰 부담을 안고 살아가던 시기였다.

또 천주교 탄압(기해박해)으로 인해 외국 군함이 처음으로 조선 근해에 나타나 민심이 흉흉했다. 친정 후에는 『동문휘고』, 『열성지장』, 『동국사략』, 『삼조보감』등을 완성하였으며, 각 도에 제언을 수축하게 하는 등의 치적을 쌓았다.

그 후 1849년(헌종 15)에 창덕궁 중희당에서 2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08년(융희 2)에 헌종성황제로 추존되었다.
1837년(헌종 3)에 효현성황후를 왕비로 맞이하였으나, 6년 뒤에 소생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 후 두 번째 왕비를 맞아들이기 위하여 스스로 간택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왕이 간택에 직접 참여한 유일한 예였다.

헌종은 김씨 여인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간택의 최종 결정권은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에게 있었고, 김씨 여인이 아닌 홍재룡의 딸 효정성황후가 최종 간택되어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에 헌종은 3년을 고심한 끝에 왕비가 후사를 생산할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로 대왕대비의 허락을 받아 삼간택에서 낙선한 김씨를 후궁으로 간택하였다.

헌종은 경빈 김씨를 위하여 1847년(헌종 13) 창덕궁 서쪽에 별궁인 낙선재를 지어주기까지 하였다.

예술을 사랑한 헌종은 경빈 김씨와 함께 이 별궁에서 고금 명가의 유필을 벗 삼아 지내기를 좋아하였다.

낙선재에 여러 차례 불려 들어갔던 조선 후기 서화가 소치 허유(許維)의 기록에는 낙선재는 헌종이 평상시 거처하는 곳이며, 추사 김정희의 글씨로 쓰여진 현판이 가득하다는 등의 묘사가 잘 드러나 있다.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 이야기

헌종의 첫 번째 왕비 효현성황후 김씨(재세 : 1828년 음력 3월 14일 ~ 1843년 8월 25일)는 본관이 안동인 영흥부원군 김조근과 한성부부인 이씨의 딸로 1828년(순조 28)에 안국방(현 서울 안국) 외가사저에서 태어났다.

1837년(헌종 3)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헌종 사이에 후사를 낳지 못하였다. 1843년(헌종 9년)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16세로 세상을 떠났다.

1908년(융희 2)에 효현성황후로 추존되었다.

 

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 이야기

헌종의 두 번째 왕비 효정성황후 홍씨(재세 : 1831년 음력 1월 22일 ~ 1904년 양력 1월 2일)는 본관이 남양인 익풍부원군 홍재룡과 연창부부인 안씨의 딸로 1831년(순조 31)에 함열현(현 전북 익산) 관사에서 태어났다.

1843년에 헌종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년 뒤에 헌종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헌종이 세상을 떠나고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헌대비가 되고, 1859년(철종 10)에 왕대비가 되었다.

이 후 왕실의 어른으로 지내다가 1897년(광무 1)에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최초의 태후가 되었다.

헌종 사이에 소생을 낳지 못하였으며, 1904년(광무 7년) 양력 1월 2일에 경운궁 수인당에서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08년(융희 2)에 효정성황후로 추존되었다.

 

 

 

 

 

 

 

 

 

 

 

 

 

 

 

 

 

 

 

 

 

 

 

 

 

 

능에 올라갈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의 사진을 가져왔다.

오른쪽부터 헌종, 효헌왕후, 효정왕후의 능이다.

 

 

 

 

 

아래는 원릉 구역이다.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후기 제21대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 왕릉·왕비릉. 사적. 

사적 제193호. 1776년에 능호를 정하였다. 왕과 왕비의 능을 쌍릉으로 나란히 두었고, 각각 혼유석(魂遊石) 1좌(座)를 앞에 놓았으며, 난간 중간에 사각옥형(四角屋形)의 장명등을 세웠고, 공간은 화문(花文)으로 장식하였다. 망주석의 세호(細虎)를 우주상행(右柱上行)·좌주하행(左柱下行)으로 새겼으며, 석상들은 왜소하다.

영조가 숙종의 교령(敎令)을 근거로 능제도(陵制度)를 정비하여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을 펴낸 관계로 이 능의 석물제도(石物制度)는 숙종ㆍ영조연간에 정비된 『국조상례보편』의 표본과 같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별검(別檢, 종8품) 1원과 참봉(參奉, 종9품) 1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4. 원릉元陵(영조와 정순왕후)

 

위치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쌍릉

능의 조성 :1776년(정조 즉위), 1805년(순조 5)

능의 구성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쌍릉의 형태이며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영조, 오른쪽(동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 혼유석 1좌씩 배치되었다.

망주석 기단부에 조각된 꽃무늬가 세련되고 화려하며 오른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위를 향하고 있고, 왼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장명등은 사각옥개형의 장명등으로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 부분을 제외하고 상, 중, 하대석 부분은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영조의 원릉을 시작으로 중계와 하계 사이의 단을 없애고 문석인과 무석인을 한 단에 같이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의 비각에는 총 3기의 표석이 건립되었다.

1비는 1776년 영조 승하 후에 세운 영종대왕 표석, 2비는 영조 추존 후 세운 영조대왕 표석, 3비는 1805년(순조 5)에 세운 정순왕후 표석이다.

 

능의 역사

이곳은 원래 효종의 구 영릉(寧陵)자리였다.

영릉을 조성한 이후 석물에 틈이 생기는 등 여러 문제점이 발견되어 지속적으로 수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그간 봉심(왕명을 받들어 능침을 보살피는 일)을 소홀히 한 관리들을 벌하기도 하였다.

1673년(현종 14) 천릉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과정에서 확인한 결과 재궁과 외재궁에는 흠이 없었다.
이후 1776년(영조 52)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자, 건원릉 서쪽 두 번째 산줄기인 구 영릉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영조는 1757년(영조 33)에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능 자리를 미리 만들어 쌍릉으로 조성하기를 원하였지만, 손자인 정조가 현재의 자리에 모셨다.

그 후 정순왕후 김씨가 1805년(순조 5)에 세상을 떠나자, 원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영조(英祖) 이야기

영조(재세 : 1694년 음력 9월 13일 ~ 1776년 음력 3월 5일, 재위 : 1724년 음력 8월 30일 ~ 1776년 음력 3월 5일)는 숙종과 숙빈 최씨의 아들로 1694년(숙종 20)에 창덕궁 보경당에서 태어났다.

1699년(숙종 25)에 연잉군에 봉해지고, 경종이 즉위한 후에 왕세제에 책봉되었다. 당시 왕세제 책봉을 주장하는 노론과 시기상조론을 들어 반대한 소론 간의 정쟁이 극심했으며, 영조 자신도 이 소용돌이에 휘말려 경종을 시해하려는 시도에 가담했다는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이런 치열한 경쟁과 우여곡절 끝에 1724년에 경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및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즉위와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고, 균형 있는 인재 등용을 통하여 탕평세력을 구축하였다.

영조는 탕평 정치로 조정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여러 가지 폐단을 고치는 개혁 조치를 단행했다.

특히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어온 군역을 감소한 균역법을 시행하고, 노비 신공을 혁파하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하였다.

또 청계천 건설과 여러 사치풍조를 금지하고 법제도를 개편하여, 『속오례의』, 『국조상례보편』 등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붕당정치의 폐단으로 즉위 초에 경종 독살설에 휘말려 옥사가 일어났고, 1762년(영조 38)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벌열의 움직임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는 등, 붕당정치의 혼란을 완전히 잠재우지는 못하였다.

조선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긴 53년의 기간을 재위한 영조는 1776년에 경희궁 집경당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조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하루는 영조가 미복 차림으로 궁을 나와 산책하던 중에 시골의 나무꾼이 향나무를 팔고 있는 것을 보았다. 영조가 향나무를 어디서 캐온 것이냐고 물으니, 무식한 나무꾼은 제 앞의 임금을 몰라보고, 나라님의 모후를 모신 소령릉이 있는 고령 양주산에서 캐온 나무라고 설명해주었다.

나무꾼은 능과 원을 구별하지 못하여 능이라고 부른 것이지만, 오랜 세월 어머니의 묘를 능으로 꾸며드리고 싶었던 영조는 나무꾼의 ‘소령릉’ 소리에 감격하였다.

그리하여 나무꾼이 팔던 향나무를 비싼 값에 쳐주고, 그를 소령원 참봉에 제수하였다고 한다.

영조는 강하고 결단력 있는 군주였으나, 내면으로는 정통성에 대한 콤플렉스와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 정쟁에 휘말려 아들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연 등 큰 아픔을 평생 삭여야 했다.

 

정순왕후(貞純王后) 이야기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재세 : 1745년 음력 11월 10일 ~ 1805년 음력 1월 12일)는 본관이 경주인 오흥부원군 김한구와 원풍부부인 원씨의 딸로 1745년(영조 21)에 여주 사저에서 태어났다.

1757년 영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에 1759년(영조 35)에 15세의 나이로 영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왕비가 된 정순왕후의 대담하고 당찬 성격을 나타내는 일화는 왕비 간택 때에서부터 전해진다. 간택 시 영조가 왕비 후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고 대답했지만, 정순왕후는 인심이 가장 깊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가 무엇이냐는 물음에는 보릿고개라는 인상적인 답을 하였다고 전한다.

왕비로 간택된 후에는 상궁이 옷의 치수를 재기 위하여 잠시 돌아서 달라고 하자 단호한 어조로 “네가 돌아서면 되지 않느냐.”고 추상같이 꾸짖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왕비의 체통을 지킬 줄 아는 당찬 여인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00년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11세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스스로를 여주(女主, 女君)라 칭하고 실질적인 국왕의 권위를 갖고 모든 권한을 행사하였다. 과감하게 국정을 주도하여 조정의 주요 신하들로부터 개인별 충성서약을 받았으며, 정조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이었던 시파인물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다음해에는 천주교 탄압을 일으켜 정약용 등의 남인들을 축출하고,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질서를 부정하였다.

1804년에 수렴청정을 거두었으며, 1805년(순조 5)에 창덕궁 경복전에서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래는 휘릉 구역이다.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후기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 왕비릉. 사적. 

사적 제193호.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조창원(趙昌遠)의 딸로, 1688년(숙종 14) 64세로 죽었다. 휘릉은 숭릉(崇陵: 현종릉)보다 불과 4년 뒤에 조영하여 능석물(陵石物)의 제조 및 기법이 거의 같으나, 무석(武石)의 경우 목이 가슴에 파묻히고 눈과 코가 크고 입술이 두꺼운 괴이한 용모로 만들어져 있음이 다르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令) 1인과 참봉 1인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5. 휘릉徽陵(인조비 장렬왕후)

 

위치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단릉

능의 조성 :1688년(숙종 14)

능의 구성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단릉 형식으로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아담한 크기에 다리가 짧아 배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이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5개로 배치하였다.

조선 전기 왕릉(건원릉~헌릉)의 고석은 모두 5개였다가 세종의 영릉 이후에는 4개로 줄었는데, 휘릉에 와서 다시 초기의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이는 건원릉의 예를 잠깐 따른 것으로, 휘릉 이후의 왕릉에는 다시 고석을 4개씩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홍살문 등이 배치되었다.

휘릉 정자각은 다른 왕릉의 정자각과 달리 정전의 양 옆에 익랑을 추가하여 웅장함을 더하였다.

 

능의 역사

1688년(숙종 14)에 장렬왕후 조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장렬왕후(莊烈王后) 이야기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재세 : 1624년 음력 11월 7일 ~ 1688년 음력 8월 26일)는 본관이 양주인 한원부원군 조창원과 완산부부인 최씨의 딸로 1624년(인조 2)에 직산현(충남 천안) 관아에서 태어났다.

1635년에 인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1638년(인조 16)에 인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 1

649년에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자의왕대비가 되었으며, 효종, 현종, 숙종 대에까지 살아 왕실의 어른으로 지냈다.

그 후 1688년(숙종 14)에 창경궁 내반원에서 65세로 세상을 떠났다.
어린 나이에 인조의 두 번째 왕비로 간택된 장렬왕후는 인조가 세상을 떠난 후 자의왕대비라는 호칭으로 효종, 현종, 숙종 대에까지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본의 아니게 복제와 예송의 대상이 되어 서인과 남인의 붕당 싸움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성리학에 근거한 상례에 따르면 장자(맏아들)의 상에는 부모가 3년복을 입고, 차자 이하의 상에는 기년복(1년)을 입도록 되어 있다.

1659년(효종 10)에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왕대비가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할 것인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대립하게 된다.

이 사건을 제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이라고 하는데, 이 때 서인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아들이기 때문에 기년복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효종이 인조의 장자는 아니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자의 대우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대립한 것이다.

이 논쟁은 결국 장자와 차자의 구별 없이 기년복을 입게 한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르는 것으로 결말지어졌고, 이로 인해 기년복을 주장했던 서인이 승리하여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 후 15년 뒤인 1674년(현종 15)에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이 논쟁이 다시 불거졌다.

이를 제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서인은 인선왕후가 인조의 둘째며느리이기 때문에 대공복(9개월)을 주장했고, 남인은 왕비였기 때문에 첫째며느리의 대우로 하여 기년복(1년)을 주장했다.

이 때 현종은 남인의 주장을 채택하여 서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남인 정권이 세력을 잡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정자각에 익랑이 붙어 있다.

 

 

 

 

 

 

 

 

 

 

 

 

 

 

 

 

아래는 건원릉 구역이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건원릉(健元陵)은 조선의 제1대 왕인 태조의 능묘이다. 사적 제193호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한다. 건원릉은 조선 3대 군주 태종 8년인 1408년 9월 9일에 조성되었다.[1]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유해를 안장한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이며 조선왕조 개국 이래 처음으로 초대 조선의 국왕이 승하하여 유해가 안장된 능이 되었다. 이전까지는 고려왕조의 왕릉인 고려 왕릉이 있으며 경기도 고양시와 강원도 삼척시에 있는 공양왕릉이 마지막에 조성되어 유해가 안장된 고려 왕릉이다. 

 

1408년 5월 24일에 태조는 향년 74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조선 최초의 왕이었던 태조를 영면하기 위한 왕릉을 조성하는 국사인만큼 태종은 지관들과 풍수지리에 대해 잘 아는 대신들로 하여금 한양 주변 100리 이내의 좋은 명당 자리를 찾도록 하였다. 그러다 검교 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 김인귀로부터 양주 검암(현 구리시 검암산 자락)에 좋은 자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하륜이 천거하였고, 태종은 박자청으로 하여금 이곳에 산릉을 조성하게 하였다.[2] 산릉을 조성하는 데는 대략 6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3] 또한, 이 때 서운관에서 능실을 석실로 만들자는 상서를 올려 예종 때까지는 조선왕릉의 능실은 석실로 만들게 되었다.[4] 같은 해 9월 9일 영구를 안장한 이후 건원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후에 8기의 능이 추가로 조성됨에 따라 오늘날의 동구릉을 형성하게 되었다.

 

건원릉은 조선의 초대 왕이었던 태조의 왕릉이었던만큼 많은 신경을 썼다. 조선 초기 왕릉의 기본 양식은 고려의 왕릉에서 따온 것이 많았는데, 이 중 가장 잘 정비되어 있었던 공민왕의 현정릉 양식을 따랐다. 다만, 세부적으로는 석물의 배치와 장명 등의 조형이 약간의 변화를 보였고, 봉분 주위의 곡장을 두르는 양식이 조선시대에 새로 추가되었다. 왕릉 주변의 석물 조형은 남송 말기의 형식을 도입하였다고 한다. 이 외에 석호와 석양의 배치, 장명등, 난간석주는 조선시대에 와서 새로 변하였고, 이러한 양식은 국조오례의를 통해 정비될 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또한 건원릉의 원찰로 개경사를 만들어 조계종에 소속시켰다는 기록이 있지만, 오늘날에는 절의 흔적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5] [6] 

 

푸른 잔디가 있는 여느 왕릉들과는 달리 태조의 건원릉의 봉분에는 억새 봉분이 형성되어 있다. 야사에서는 태조가 본래 신덕왕후가 있는 정릉에 같이 묻히기를 바랐는데, 당시 태종은 정릉 주변의 백 보 밖까지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하였을 정도로 신덕왕후를 미워하였다. 그런 아들이 태조의 뜻을 들어줄리는 만무하다 생각하였고, 태종에게 조상들이 묻혀 있는 함흥 땅에 묻어달라 유언하였다. 하지만, 태종은 초대 왕이었던 태조를 한양과는 멀리 떨어진 함흥에 묻는다면, 제사를 지낼 때 문제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였고, 그렇다고 유언을 거스를 수는 없다 생각하였기에 함흥에서 가져 온 흙과 억새를 덮은 봉분을 통해 타협점을 찾았다는 것이다.[7]

 

6. 건원릉健元陵(태조)

 

위치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단릉

능의 조성 :1408년(태종 8)

능의 구성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고려 공민왕의 현릉(玄陵)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왕릉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처럼 잔디가 아닌 억새풀을 덮었는데, 『인조실록』에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청완(靑薍, 억새)을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능침에는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는데, 병풍석에는 십이지신과 영저(금강저) 및 영탁(방울) 등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밖을 향하고 있는 형상으로 수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고 양 옆으로는 망주석이 한 개씩 서있다.

중계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으며 가운데에는 정중석이 있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보물 제1741호), 비각, 수복방, 수라간, 홍살문, 판위 등이 배치되어 있고, 비각 안에는 태조가 세상을 떠나고 태종대에 세운 신도비(보물 제1803호)와 대한제국 선포 후 태조고황제로 추존된 능표석이 세워져 있다.

 

능의 역사

1408년(태종 8) 5월 24일에 태조가 세상을 떠나자 6월 28일에 지금의 구리시인 양주 검암산에 능지를 정하였다.

7월 말을 기하여 산릉 공사를 시작한 후 9월 9일에 발인하였다.

산릉공사를 위하여 충청도에서 3,500명, 황해도에서 2,000명, 강원도에서 500명 등 총 6,000명의 군정을 징발하였다. 태조는 생전에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하여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본인의 자리(신후지지)를 미리 마련해두었으나 태종은 태조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태조(太祖) 이야기

태조(재세 : 1335년 음력 10월 11일 ~ 1408년 음력 5월 24일, 재위 : 1392년 음력 7월 16일 ~ 1398년 음력 9월 5일)는 추존 환조와 의혜왕후 최씨의 아들로 1335년(고려 충숙왕 복위 4)에 화령부 사저에서 태어났다.

태조는 고려 공민왕대에 쌍성총관부를 함락시켜 벼슬길에 올랐고, 1361년(공민왕 10)에 홍건적의 침입 시 공을 세워 공민왕의 총애를 받았다.

우왕 즉위 후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땅을 지배하겠다는 통보를 보내오자, 고려 조정은 요동을 정벌하여 이를 견제하고자 했고, 최영 중심의 찬성파와 이성계 중심의 반대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최영의 주장에 따라 1388년(고려 우왕 14) 요동정벌이 단행되었는데, 이성계는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반대파를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하였다.

이 후 정권을 잡아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였으나, 신진사대부의 추대로 1392년 음력 7월 16일에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에 국호를 조선이라 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천도하였으며, 새 왕조의 기반을 튼튼히 다지는데 몰두하였다.

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한 사대정책을 썼고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내세웠으며,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제 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으로 아들들의 권력 다툼을 보게 되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정종(定宗)에게 양위하였다.

태종 즉위 후엔 태상왕이 되었으며, 만년에는 불도에 정진하였다.

1408년(태종 8)에 창덕궁 광연루 별전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태조고황제로 추존되었다.

 

 

 

 

 

 

 

 

 

 

 

 

 

 

 

 

 

 

 

 

 

 

 

 

 

 

 

 

건원릉은 정자각에서 능으로 돌아가는 돌다리가 공중에 떠 있다.

 

건원릉은 고향 함흥의 억새를 가져와서 봉분을 덮었다고 해서 지금도 억새가 덮여 있다. blog.daum.net/mt0047/586 에서 복사해 왔다.

 

 

 

 

 

 

 

 

 

 

 

 

 

 

 

 

 

 

 

 

 

 

 

 

 

 

 

 

 

 

 

 

 

 

 

 

 

아래는 목릉 구역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조선시대 제14대 선조와 왕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 왕릉·왕비릉. 사적. 

사적 제193호. 원래 지금의 목릉(穆基)의 터는 의인왕후의 유릉(裕基)의 터로 택정(擇定)되었던 것을 건원릉(健元陵) 서강(西岡)에 있던 목릉이 물기가 차고 불길하다는 상소가 있어 1630년(인조 8)유릉 곁에 옮기고 목릉으로 합칭하였다.

왕릉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전통적인 병풍석(屛風石)을 두른 양식이며, 두 왕비릉은 난간만 둘렀다.

임진왜란 뒤의 어려운 사정 때문에 목릉의 석인(石人)은 열악(劣惡)하여 조선왕릉 문무석(文武石) 중 가장 졸작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별검(別檢, 종8품) 1원과 참봉(參奉, 종9품) 1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7. 목릉穆陵(선조와 의인왕후·인목왕후)

 

위치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동원이강릉

능의 조성 :1600년(선조 33), 1630년(인조 8), 1632년(인조 10)

능의 구성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와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같은 능역 안에 각각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선조, 가운데 언덕이 의인왕후, 오른쪽 언덕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능은 기본적인 왕릉상설에 맞게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석양 및 석호가 배치되어 있다.

의인왕후의 능과 인목왕후의 능은 병풍석만 생략했을 뿐 상설은 선조의 능과 같다.

특히 의인왕후 능침의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다만, 의인왕후의 능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처음 조성한 능이었기 때문에 석물들의 조각미가 다소 떨어지지만,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자각은 원래 의인왕후의 능 앞에 있었다.

그러다가 1630년(인조 8)에 선조의 능이 천장되면서 기존의 목릉 정자각을 이건(移建)하게 되자 의인왕후 능 앞에 있던 정자각은 헐었다.

이 후 인목왕후의 능이 조성되면서 치우친 정자각을 다시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이건이 번거롭다하여 신로만 정자각에 접하도록 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따라서 현재 목릉의 정자각은 선조의 능을 향하여 있으면서 신로는 세 능으로 모두 뻗어 있다. 목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다포식 공포로 지어진 건물로 보물 제1743호로 지정되었다.

 

능의 역사

목릉은 처음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가 정유재란이 끝난 직후인 1600년(선조 33)에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유릉(裕陵)이라는 능호로 조성되었다.

이 후 선조가 1608년에 세상을 떠나자, 건원릉 서쪽 산줄기(현 헌종의 경릉)에 목릉이라는 능호로 조성하였다가 1630년(인조 8)에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현 위치로 옮기고 의인왕후의 유릉(裕陵)과 목릉의 능호를 합하여 목릉이라 하였다.

1632년(인조 10)에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처음 혜릉(惠陵)이라는 능호를 정하였다가 목릉과 능역을 합치자는 의논으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선조(宣祖) 이야기

선조(재세 : 1552년 음력 11월 11일 ~ 1608년 음력 2월 1일, 재위 : 1567년 음력 7월 3일 ~ 1608년 음력 2월 1일)는 중종의 아들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셋째 아들로 1552년(명종 7)에 인달방(현 서울 사직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바르고 용모가 빼어나 순회세자(명종의 아들)를 잃고 후사가 없었던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처음에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1567년(명종 22)에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인순왕후의 명으로(명종의 양자 입적)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인순왕후의 수렴청정을 8개월 동안 받았다.

명종은 아들 순회세자를 잃고 자식 잃은 슬픔을 달래려고 여러 왕손들을 궁궐에 자주 불러,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곤 했다.

그 중에서도 선조(당시 하성군)를 유난히 아껴 그를 따로 불러 학문을 시험해보기도 하고, 한윤명, 정지연 등을 따로 뽑아 그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하루는 명종이 여러 왕손들을 궁중에서 가르칠 때 익선관을 벗어 왕손들에게 주며 써보라고 하였다.

“너희들의 머리가 큰가 작은가를 알려고 한다.”

명종은 이렇게 말하며 여러 왕손들에게 익선관을 써보게 하였다. 다른 왕손들은 돌아가면서 익선관을 써보았지만, 제일 나이가 어린 선조는 머리를 숙여 사양하였다

“이것을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겠습니까?” 선조는 이렇게 아뢴 뒤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어전에 도로 가져다 놓았다.

이를 본 명종은 매우 기특하게 여기며, 그에게 왕위를 전해줄 뜻을 정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선조는 즉위 초에 매일 경연에 나가 토론하고, 밤늦도록 독서에 열중하였다.

훈구세력의 힘을 억제하고 이황, 이이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썼다.

『유선록』, 『근사록』, 『심경』, 『소학』, 『삼강행실』등을 편찬케 하여 유학을 장려하는 한편,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 등을 신원하고, 그들에게 화를 입힌 훈구세력의 관직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했다.

그러나 명종 말년부터 일어난 붕당정치의 시작으로 정여립의 모반사건과 세자책봉 문제로 옥사가 일어났으며, 국력이 쇠약해져 국방대책을 세우지 못하던 중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에 이어서 정유재란이 일어나 두 차례에 걸친 7년 동안 전쟁을 치르며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다.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그 후 1608년(선조 41)에 경운궁 석어당에서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인왕후(懿仁王后) 이야기

선조의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재세 : 1555년 음력 4월 15일 ~ 1600년 음력 6월 27일)는 본관이 반남인 반성부원군 박응순과 완산부부인 이씨의 딸로 1555년(명종 10)에 태어나, 1569년(선조 2)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품이 온화하였으며 침착하고 자애로운 면모를 지녔으나, 슬하에 자식이 없어 후궁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폈다.

특히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남달리 총애하여 친아들처럼 대해주었고, 훗날 왕세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후원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해군과 함께 피난길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종결된 후 1600년(선조 33)에 황화방 별궁(경운궁)에서 46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인왕후의 국장은 임진왜란 이후에 치른 첫 번째 국장이었다. 원래 왕과 왕비의 산릉으로 결정된 자리에 일반묘지나 민가가 있으면 강제로 옮겨야 했다.

하지만 이때에는 전쟁 이후의 수습상황단계였기 때문에 묘를 옮기거나 철거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의 이유로 의인왕후의 산릉자리는 5개월 동안 정하지 못하였다가 겨우 포천 신평에 장지를 정하고 산릉공사를 하였다.

하지만 불길론이 일어나면서 공사를 중단하고, 건원릉 동쪽으로 장지를 다시 정하였다.

세상을 떠난 지 7개월이 지난 1600년(선조 33) 음력 12월 22일에 장사하면서 겨우 국장을 종료하였다.
선조 때 유학자들의 글에는 “전국 방방곡곡에 왕비의 원찰이 아닌 곳이 없다.”는 통탄의 목소리가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의인왕후가 이름 난 기도처마다 자신의 원찰을 설치하고, 아이를 낳기를 발원했기 때문이었다.

왕후는 전국의 명산대찰에 원찰을 설치하고 부처님께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빌고 또 빌었다.

건봉사, 법주사 등 여러 사지(寺誌)에는 의인왕후가 보시한 기록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자식을 절실하게 바랬던 이유로 불교에 의지하여 평생 불경과 염주를 가까이 하고 살았으며 궁중의 여인들은 그녀를 ‘살아있는 관세음보살’이라 불렀다.

의인왕후는 어린 나이에 어미를 잃은 임해군과 광해군을 친자식처럼 돌보았다.

선조실록에는 “의인왕후가 후궁들의 자식을 지나치게 예뻐하여 선조가 장난삼아 질책하면 아이들은 왕후에게로 도망가 숨곤 했는데, 이때마다 왕후는 곧 치마폭을 당겨 그들을 가려주곤 했다.”는 일화가 등장한다.

이는 의인왕후가 자신의 배로 나은 자식은 아니었을지언정 선조의 모든 자식들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사랑해주었음을 알려준다.

 

인목왕후(仁穆王后) 이야기

선조의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재세 : 1584년 음력 11월 14일 ~ 1632년 음력 6월 28일)는 본관이 연안인 연흥부원군 김제남과 광산부부인 노씨의 딸로 1584년(선조 17)에 반송방(서울 아현동 일대) 사저에서 태어났다.

1600년에 선조의 첫 번째 왕비가 세상을 떠나자 2년 뒤인 1602년(선조 35)에 선조의 두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낳았다.

당시 소북정권의 유영경(柳永慶)은 적통론에 입각하여 적자인 영창대군을 왕위에 추대하려 하였으나,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소북정권이 물러나고 대북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광해군 즉위 후 왕대비가 되었으나, 1613년(광해 5)에 계축옥사로 친정아버지와 영창대군이 연루되어 처형당하는 일을 겪었다.

광해군일기에는 인목왕후의 죄악이 열거되어 있는데 의인왕후의 유릉(裕陵)을 저주한 죄, 영창대군으로 하여금 역모를 꾀한 죄 등의 대목이 나와 있다.

결국 1618년(광해 10)에 대비의 호칭을 삭탈하고 서궁이라 칭하여 경운궁에 유폐되었다.

이 후 1623년에 서인세력이 광해군을 폐위하고 선조의 손자 능양군을 옹립한 인조반정이 성공하자 다시 대왕대비의 지위에 올랐다.

인목왕후는 그 후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장(長)의 위치에 처하면서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금강산 유점사에 친필로 쓴 『보문경(普門經)』의 일부가 전하고, 인목왕후필적첩이 남아 있다.

1632년(인조 10)에 인경궁 흠명전에서 48세로 세상을 떠났다.
인목왕후 폐비사건을 시작으로 인목왕후의 일대기를 그린 글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 글을 『계축일기』라고 한다.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과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둘러싼 붕당을 사실적으로 서술하였다.

이 기사문은 인조반정 뒤 왕후의 측근 나인이 썼다고 전해진다. 그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 윗전(인목왕후)이 애통해하며 대군(영창대군)을 내보내지 못하고 시간을 끌자 금부 하인들이 밀고 들어와 대군을 업고 나갔다.

그 후 한 달 만에 대군 아기는 강화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런데 미리 알려 주지도 않고 늦도록 안부 전하는 사람도 찾아오지 않으므로 윗전께서는 수상히 여기시고 근심하시는 것이었다.

"어째서 오늘은 여지껏 안부도 알려오지 않는고? 필시 무슨 까닭이 있도다.

아무든지 높은 데 올라가 궁 밖 길의 동정이나 살피고 오너라."

명령을 받고 한 사람이 전에 침실로 썼던 다락 근처에 올라가 바라보니 사람들이 돈의문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성 위로 올라가 굽어보니 화살을 차고 창과 칼을 가진 사람이 수없이 많고 말을 탄 사람도 많았다.

이제 죽이려나 보다 하고 내려와 바깥사람들이 길 닦는 곳이 있기에 거기 가서 물어 보고서야 대군을 강화로 옮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주관적 관점에서 쓰였으나, 조선 중기의 궁중에서 전개되는 풍속 및 생활상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당시 치열한 붕당의 이면을 이해하는데 보조 자료가 된다.

 

 

 

 

 

 

 

 

 

 

 

 

 

목릉의 정자각은 유일하게 공포가 다포형식으로 지어졌다.

 

 

 

 

 

 

 

 

 

 

 

 

 

 

 

 

 

 

 

 

 

 

 

능에 각시붓꽃들이 피어 있다.

 

 

 

 

 

 

 

 

 

 

 

 

 

 

 

 

 

목릉에 있는 인목왕후릉은 봉분 아래 목책이 없어서 올라가도 된다.

 

 

그래서 능의 구조와 석물들을 자세히 볼 수 있다.

 

 

 

 

 

경주 신라 고분에서 보는 석인들을 닮았다.

 

 

 

 

 

 

 

 

 

 

 

 

 

 

 

 

 

여기 혼유석에는 받침돌인 鼓石이 4개다.

 

 

장명등의 굵기가 상당하다.

 

 

무석인의 얼굴이 아주 재미있게 조각되었다.

 

 

문석인도 웃고 있는 얼굴이다.

 

 

능을 바라보았을 때 오른쪽 망주석의 세호가 올라가고 왼편의 세호가 내려오는 것 같다.

 

 

석양들 가운데 꼬리를 말고 앉아 있는 석호가 아주 재미있게 묘사되었다.

 

 

 

 

 

 

 

 

인목 왕후릉에서 바라 본 선조릉

 

 

 

 

 

파노라마로 본 목릉

 

 

 

 

 

정자각 중 유일하게 공포가 다포 형식이라고 해서 다시 보러 왔더니 그렇다.

 

 

예쁜 새가 보여서

 

 

 

 

 

 

 

아래는 현릉 구역이다.

 

한국 정통 풍수지리연구원에 의하면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62 <東九陵 소재>

사 적 : 제 193 호

顯陵의 특징
: 문종(이향(李珦):1414-1452, 재위 2년)과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1418-1441)의 현릉은 홍살문(紅--門)부터 모든 부속시설은 하나씩만 설치되어 있고 좌우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封墳)을 따로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종의 릉은 웅장하게 봉분에 병풍석(屛風石)까지 두르고 있지만, 현덕왕후릉은 다소 치우쳐 보입니다.
그 이유는 본래 현덕왕후가 세자빈 때(1441년: 세종23년) 단종(端宗)을 출산하고 승하해서 문종(文宗) 즉위년[1450년]에 현덕왕후로 추숭되어 소릉(昭陵)으로 명명되었다가 단종 즉위년[1452년]에 문종과 합장(合葬)되면서 합장릉으로 현릉(顯陵)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조(世祖) 3년[1457년]에 현덕왕후의 집안이 동생이 단종의 복위사건에 연루되어 현덕왕후의 능이 파헤쳐져 세가로 옮겨졌다가 중종(中宗) 8년[1513년]에 복위되어 다시 동원이강릉의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8. 현릉顯陵(문종과 현덕왕후)

 

위치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동원이강릉

능의 조성 :1452년(단종 즉위), 1512년(중종 7)

능의 구성

현릉은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현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문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현릉의 능제는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랐다.

문종의 능 병풍석의 무늬는 이전의 영저와 영탁대신 구름무늬로 바뀌었고, 혼유석 받침대인 고석의 수량도 4개로 줄었다.

능침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를 배치하였고, 중계에는 문석인과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현덕왕후의 능침은 문종의 능침과 같은 상설로 조성하였으나 병풍석을 생략하였다.

현릉 이후부터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임금의 치적이 국사(실록)에 실리기 때문에 굳이 세울 필요가 없다는 논의 때문이었다.

 

능의 역사

1452년(문종 2)에 문종이 세상을 떠나자 수양대군(세조), 황보인, 김종서, 정인지 등의 대신을 비롯하여 풍수지관이 현지를 답사하고 건원릉 남동쪽에 현릉을 조성하였다.

처음 문종은 세종의 구 영릉(서울 내곡동 헌릉 서쪽) 근처에 묻히기를 원하였으나 자리가 좋지 않아 현재의 자리로 정하였다.

현덕왕후 권씨는 문종이 세상을 떠나기 11년 전에 왕세자빈 신분으로 1441년(세종 23)에 먼저 세상을 떠나, 안산의 소릉(昭陵)에 모셔졌었다.

이후 세조 즉위 후 단종 복위 사건에 친정 어머니와 남동생이 연루되는 바람에 폐위되었다가, 1512년(중종 7)에 복위되어 다음 해인 1513년(중종 8)에 문종의 현릉 동쪽 언덕으로 사후 72년만에 왕의 곁으로 능을 천장하였다.

이 때 두 능 사이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유 없이 저절로 말라 죽어 두 능 사이를 가리지 않게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문종(文宗) 이야기

문종(재세 : 1414년 음력 10월 3일 ~ 1452년 음력 5월 14일, 재위 : 1450년 음력 2월 23일 ~ 1452년 음력 5월 14일)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첫째 아들로 1414년(태종 14)에 사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세종이 즉위하자 1421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세종재위 말년에 부왕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기 시작하였다. 대리청정기간에 문무 관리를 고르게 등용하고 언로를 자유롭게 열어 민정파악에 힘쓰는 등 나라의 안정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문종은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말이 적고, 학문을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문종은 천문에 능통하였으며, 측우기도 발명하였다.

1450년에 조선 최초로 적장승계의 원칙에 따라 세종을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내에는 『동국병감(東國兵鑑)』이 출간되었고, 『고려사(高麗史)』 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등이 편찬되었다.

한편 병제(兵制)를 정비하여 3군의 12사를 5사로 줄인 반면, 병력을 증대시키고 각 병종을 5사에 배분하였다.

그러나 1452년(문종 2)에 경복궁 천추전에서 39세로 세상을 떠났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성현의 수필집 『용재총화(용齋叢話)』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실려 있다.

문종이 세자로 있을 때 귤을 나무 소반에 담아서 집현전에 보낸 일이 있었다.

집현전의 학사들이 귤을 다 먹자 문종은 즉석에서 시를 짓고 이를 소반 위에 썼다. 향나무의 향기는 코에만 향기롭고 / 기름진 고기는 입에만 달구나 / 가장 사랑스런 동정의 귤은 / 코에도 향기롭고 입에도 달구나.

이를 본 집현전 학사들이 그 유려한 글씨와 문장에 감탄하여 이를 다투어 베끼고자 하였다.

하지만 대궐에서 빨리 소반을 돌려보내라고 성화를 하는 통에 다 베껴 쓰지 못한 집현전 학자들이 소반을 붙들고 차마 놓지 못하였다고 한다.

 

현덕왕후(顯德王后) 이야기

현덕왕후 권씨(제세 : 1418년 음력 3월 12일 ~ 1441년 음력 7월 24일)는 본관이 안동인 화산부원군 권전과 해령부부인 최씨의 딸로 1418년(태종 18)에 홍주(충남 홍성) 합덕현 사저에서 태어났다.

1431년(세종 13)에 세자 후궁으로 승휘(承徽)가 되었고, 양원(良媛)을 거쳐, 1437년(세종 19)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문종은 세자시절 1427년(세종 9)에 김오문의 딸을 왕세자빈(휘빈)으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휘빈 김씨는 문종의 사랑을 얻기 위해 은밀한 술법을 쓰다가 발각되어 폐위되었다.

그 후 1429년(세종 11)에 봉여의 딸을 왕세자빈(순빈)으로 맞이하였다.

하지만 순빈 봉씨도 문종과의 잦은 갈등과 동성애 스캔들에 휘말려 폐위되었다.

그 후 세종은 세자후궁 중에서 왕세자빈을 간택하려 하였는데, 이미 자식이 있고 후궁의 서열 중에 가장 높은 권씨를 의리상 왕세자빈으로 올려야 한다는 뜻을 밝혀 권씨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현덕왕후는 1441년(세종 23)에 원손(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다음날에 경복궁 자선당에서 24세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 경기도 안산에 왕세자빈묘의 형태로 조성하였고, 문종이 즉위하자 현덕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소릉(昭陵)이라 하였다.

그러나 세조 즉위 후 단종복위 사건에 어머니 최씨와 남동생 권자신이 연루되어 체형되면서, 현덕왕후 역시 폐위되어 종묘에 신주가 철거되고, 능이 파헤쳐지는 수난을 당하였다.

그 후 여러 차례 복위론이 있었으나 무산되었다가, 1512년(중종 7)에 종묘 문종실에 홀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민망하다는 명분으로 폐위된 지 56년 만에 복위되어 종묘에 신주를 부묘하고, 능을 현재의 현릉 좌측 언덕으로 천장하게 되었다.

 

홍살문에 정자각으로 가는 향로가 직선이 아니다.

 

 

 

 

 

 

 

 

 

 

 

 

수라간과 수복방은 새로 지은 건물이 많다.

 

 

 

 

 

 

 

 

 

 

 

 

 

 

 

 

 

 

 

 

 

 

 

 

 

 

 

현릉은 동원 이강릉이다.

 

 

 

 

 

 

 

 

아래는 수릉 구역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조선 제23대 왕 순조의 원자 문조(文祖 : 孝明世子의 追尊)와 비 신정왕후(神貞王后) 조씨의 능. 

사적 제193호. 처음 효명세자가 죽자 의릉(懿陵 : 경종릉) 좌강(左岡)에 안장하고 연경(延慶)으로 묘호를 삼았다가 추존 후 수릉으로 승격하고, 1846년(헌종 12) 풍수지리학상 불길하다 하여 양주 용마봉(龍馬峰) 아래로 옮겼다가 다시 1855년(철종 6)건원릉(健元陵 : 태조릉) 좌강에 옮겨와 묘호를 정하였다. 1890년(고종 27)신정왕후가 죽자 이곳에 합장하였다.

능 상설제도(象設制度)와 배치는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을 따르고 있으나 능삼계(陵三階)는 중계와 하계가 합하여 이계로 생략되었고, 문관은 금관을 쓰고 세밀히 조각한 조복을 입고 있는 것이 특이한 점이다. 이 능을 보호하기 위하여 영(令) 1원과 참봉 1원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9. 수릉綏陵(추존 문조와 신정황후)

위치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능의 형식 :합장릉

능의 조성 :1855년(철종 6), 1890년(고종 27)

능의 구성

수릉은 추존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능이다.

수릉은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보통의 합장릉은 혼유석을 각각 2좌씩 놓았으나 조선 후기부터 조성된 합장릉은 혼유석을 1좌로 줄여서 조성하였다.

문석인은 기존의 복두관복 대신 금관조복으로 조각하였다.
일반적으로 왕릉은 우상좌하(右上左下)의 형태로 왕이 오른쪽, 왕비가 왼쪽에 모셔지는 것이 원칙이나 수릉은 왕이 왼쪽, 왕비가 오른쪽에 모셔져있다.

이는 세상을 떠날 때의 신분차이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능침 아래에 있는 비각에는 총 2개의 표석이 있는데, 1비는 익종대왕과 신정왕후의 표석이고 2비는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의 표석이다.

 

능의 역사

문조는 처음 효명세자의 신분으로 1830년(순조 20)에 세상을 떠나, 경종의 의릉(懿陵) 왼편에 연경묘(延慶墓)라는 이름으로 묘를 조성하였다.

18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翼宗)으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수릉(綏陵)이라 하였으며, 1846년(헌종 12)에 풍수상 불길하다 하여 양주 용마봉(현 광진구 용마산)으로 천장하였다.

러다가 1855년(철종 6)에 다시 천장론이 거론되어 현재의 동구릉에 마지막으로 조성되었다.

이후 1890년(고종 27)에 신정익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수릉에 합장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이야기

추존황제 문조(재세 : 1809년 음력 8월 9일 ~ 1830년 음력 5월 6일)는 순조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아들로 1809년(순조 9)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났다.

1812년(순조 12)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827년(순조 27)에 부왕을 대신하여 대리청정을 시작하였다.

왕세자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에 달한 시기였으나 대리청정을 통해 강인한 군주의 모습을 보였다.

특정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동안 소외되어 있던 인재들을 고루 등용하였으며, 백성을 위하는 선정을 펼쳤다.

또한 실학파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와 교류하며 견문을 넓히고, 타문화 수용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였다.

예악진흥을 위해 궁중연회에 쓰이던 춤과 노래인 정재(呈才)를 발전시켜 손수 악장, 치사, 전문 등을 직접 지었고, 춘앵전을 편곡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30년(순조 30)에 창덕궁 희정당에서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 시호를 효명세자(孝明世子)라 하였다.

이 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대왕으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문조익황제로 추존되었다.

남녘 못에 잠긴 용이 있으니 / 구름을 일으키고 연기와 안개를 토하더라 / 이 용이 조화가 많으니 / 능히 사해의 물을 옮기리로다.

위의 「잠룡(潛龍)」이라는 시는 문조가 세자 시절에 지은 것이다.

자신을 물속에 잠긴 용으로 표현한 것이 앞으로 강력한 군주로서 조선을 이끌어 나아갈 포부를 밝힌 듯하다.

실제로 문조는 대리청정을 하며 왕권을 강화하고,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한 결단력 있는 정책을 펼치는 등 세도정치에 시달린 아버지 순조의 희망이었다.

한편 문조는 자주 궁궐 밖을 미행하였는데, 어느 날 북촌 자하동을 지나다가 글을 읽는 낭랑한 목소리에 끌려 한 집에 당도하였다고 한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규수였다.

세자는 그 자리에서 박규수의 할아버지 박지원이 지은 『열하일기』를 함께 보는 등 그와 밤새 이야기를 나누고 훗날 박규수를 등용할 것을 굳게 약속하고는 궁궐로 돌아왔다.

그러나 문조는 결국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22살의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서로 교유하며 문명을 떨친 둘 사이의 약속은 결국 훗날 부인인 신정익황후에 의해 실현되었다.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이야기

신정익황후 조씨(재세 : 1808년 음력 12월 6일 ~ 1890년 음력 4월 17일)는 본관이 풍양인 풍은부원군 조만영과 덕안부부인 송씨의 딸로 1808년(순조 8)에 두포 쌍호정 사저에서 태어났다.

1819년(순조 19)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었으며, 1827년에 헌종을 낳았다. 효부라는 칭찬을 듣던 왕세자빈은 불행히도 1830년에 남편 효명세자를 잃었다.

이후 1834년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57년(철종 8)에 순조의 왕비 순원숙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에 철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종친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고종)을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에 올렸으며,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렴청정을 실시하여 흥선대원군과 함께 정국을 주도했다.

수렴청정 기간에 흥선대원군과 함께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 등의 개혁을 실시하였고, 국가가 여러 재난에 시달리자 눈물을 흘리며 죽지 않은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

그 후 1866년(고종 3)에 수렴청정을 거두고 왕실 최고의 어른으로 살다가 1890년(고종 27)에 경복궁 흥복전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신정익황후로 추존되었다.
문조(효명세자)가 일찍 승하함으로 인해 왕비로서의 영화도 누려보지 못하고, 안동김씨의 세도에 눌려 지내던 신정익황후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과 함께 손잡고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후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의 권력을 거머쥐었다.

꽃문양 담으로 유명한 경복궁의 자경전은 흥선대원군이 신정익황후를 위해 1867년 경복궁 중건 당시 지은 건물이다.

또 현재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에는 신정익황후의 40세 생신을 축하하는 잔치모습을 그린 8폭 병풍이 소장되어 있다.

8폭 중 7폭은 전각, 나무, 산수를 채색하여 그렸고, 마지막 폭은 도총관, 조기영 등 9명의 관등과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도화서의 일류급 화원들이 그린 작품으로 추정된다.

1847년(헌종 13) 정월 초하루 창덕궁 인정전 앞뜰에서 거행된 잔치에는 400여 명이 참석했는데, 관직에 따라 서로 다른 관복을 입은 문무백관과 행사에 참여하는 인물 그리고 창검을 들고 도열해 있는 군관들의 모습을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해 당시 궁중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아래는 동구릉 역사 문화관 전시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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