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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검단산 22-01-22 본문

등산/좋은 산

하남 검단산 22-01-22

singingman 2023. 5. 14.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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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생님과 창호씨와 함께 가다.

2009년에 검단산과 그 옆에 있는 용마산을 다녀온 적이 있다.

검단산 주차장에 주차하고 왼편 유길준 묘가 있는 능선으로 올라가서 오른편 현충탑 계곡길로 내려오다.

아직 눈이 좀 남아있다.

정상 부근에서 바라보는 두물머리 쪽 풍경이 아주 좋다.

길도 잘 정비되어 있고 토요일이어서 그런지 등산객들도 아주 많다.

팔당쪽에서 올라오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 하남쪽 등산로로 사람들이 몰릴 수 밖에 없다.

북한산처럼 등산로가 많은 것이 아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가 올라간 길 아니면 내려온 길을 이용할 수 밖에 없다.

전체 거리는 7.7km이고 시간은 3시간 15분 정도 걸렸다.

 

 

주차장에 차가 많아서 한 대 나오면 들어가고 한다. 주차장도 따로 있는 건 아니고 동네 길옆에 한줄로 세우는 주차장이다. 하루 종일 2,000원

 

 

주차장 입구 바로 옆에 등산로가 있다.

 

 

 

 

 

여기 화장실도 있다.

 

 

등산로 초입

 

 

처음에는 완만하고 잘 정비된 길을 간다.

 

 

 

 

 

 

 

 

 

 

 

다음 백과에 의하면 유길준은

"오랫동안 신장병으로 고생하다가 1914년 9월 30일 집에서 죽었다.

임종시 아들과 조카 등에게 〈신약성서〉를 읽게 했으며, 나라 잃은 설움에 죄책감을 느껴 유족들에게 자기는 아무런 공을 이룩한 것이 없으니 죽게 되면 묘비를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길준 가족 묘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했지만 두 부인과 함께 하나의 무덤에 누웠네.

위키 백과에 의하면 유길준은

개화기 조선 정치가. 본관은 기계, 호는 구당(矩堂), 서울특별시 출신이다. 갑오개혁의 중심이 된 개화파인 동시에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의 주동자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원래는 일제에 호의적이었지만 일제가 조선을 집어삼키려 하자 을사조약 한일 병합 조약을 반대했고 일제의 남작 작위도 거절해 박영효 등처럼 이름을 더럽히지는 않았다.
 

15세부터 박규수 문하에서 김옥균, 박영효, 김윤식 등과 함께 공부했다. 1881년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조사 시찰단(신사 유람단)에 참가해 근대 시기 '최초의 조선인 일본 유학생'이 되어 일본의 유명한 문명 개화론자 후쿠자와 유키치의 후원 아래 게이오 의숙에서 공부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학업을 접고 1883년 귀국해서 박영효와 함께 한성순보를 발간하다가 서양 사절단인 보빙사의 일원으로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등과 함께 미국으로 파견되었다.[1] 이 때 유길준은 보빙사 임무가 끝난 뒤에도 미국에 남아 매사추세츠 주의 거버너스아카데미에서 유학길을 밟아 '최초의 조선인 미국 유학생'이 되었다. 조선 정부가 출발할 때부터 합법적으로 인정한 케이스는 아니고 보빙사 수장이던 민영익의 허가 아래 국비 유학생으로 눌러앉았다. 유길준은 최초의 유학생이기는 했지만 2년여 만에 귀국해 졸업은 하지 못했다. '최초의 조선인 미국 대학 졸업생'은 1891년 학사 학위를 취득한 같은 보빙사 수원 출신이던 변수.[2]

그러나 낯선 땅에 이방인 홀로 있으니 후원에도 불구하고 생활고나 냉대 등 이래저래 고생은 좀 한 것으로 보이고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학업을 중단하고 미국을 떠나 대서양을 건너 1년간 유럽 각국을 돌아다니다 1885년 12월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김옥균 등 갑신정변 주동자들과의 친분 탓에 체포되어[3] 죽을뻔한 것을 한규설 등의 도움으로 겨우 모면하고[4] 한규설의 식객으로 수 년간을 연금 상태로 지내게 된다. 1885년에서 1887년까지 이어진 영국 거문도 점령 사건 당시에는 '조선 중립화론'도 조심스레 발표해보지만 큰 반향없이 무시당했다.[5] 이 때 유길준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처럼 서구권 정보에 대한 <서유견문> 같은 책들을 1885년부터 집필해 모아놨다가 10년 후인 을미개혁 때 출판하게 된다.

갑오개혁이 시작되던 1894년 비로소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여 내무부를 맡으며 갑오개혁의 이론적 기초를 담당하는 등 개혁파의 큰 손으로 활동하였다. 1895년 친일 성향이 강했던 을미개혁 때는 대대적인 반발에도 불구하고 단발령을 밀어붙였다가[6] 수많은 유림들이 유길준을 비토하게 만든다. 1896년 아관파천이 일어나고 고종에 의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의 을미사적(김홍집[7], 유길준, 정병하, 조희연)으로 지목되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일본으로 망명하게 된다. 다만 을미사변 당시 유길준이 협력했다는 것은 윤치호의 기록에 근거한 것으로 심증 수준이지만 여러 정황상 유길준이 의심받는 것 또한 사실. 유길준 본인은 흥선대원군이 을미사변을 꾸민 것으로 편지 등을 통해 증언하고 있는데 지금도 여러 의견이 갈리는 부분.

1902년 일본 유학생 중 게이오의숙을 거쳐 일본 육군사관학교 11기생으로 입교한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일심회(一心會)'와 연결해 의친왕을 왕으로 옹립하려는 쿠데타[8]를 기도하기도 했으나 실패하였으며 다른 조선인 유학생들은 다 끔살되었다. 이 일은 국제 분쟁으로 비화되어 유길준은 일본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인 오가사와라 섬에 4년간 유배를 당한다. 1907년 고종 폐위 후에는 귀국해 흥사단 부단장, 한성부민회장을 역임하였는데 귀국 이후에도 '근대화의 스승'이라며 일제에 호의적인 입장은 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보통 이런 테크를 탄 경우에는 대부분 을사조약 이후에는 소극적이건 적극적이건 친일로 전향해서 '대일본 제국 반자이'를 외치기 마련이지만 유길준은 의외로 일진회의 '한일 합방론'을 정면으로 반대하였으며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이 조선을 병합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반대하였다. 조선으로 귀국한 이후 '병자 수호 조교 이후로 일본은 꾸준히 조선의 독립국 직위를 유지시키려 하였지만 조선이 잘못해서 보호국이 된 것'이라며 을사조약을 두둔하는 듯한 주장을 하기도 했는데 어쩌면 망해가는 조선에 대한 자조섞인 디스였을지도 모른다. 1910년 국권 상실 후에는 일제의 남작 작위도 거부한다. 그러나 이와는 다르게 이토 히로부미의 암살 직후 '민간인 사죄단'을 이끌기도 하고 <친일파 99인>에 따르면 본인이 작위는 거절했으나 고종 순종의 권유라면서 은사금 일부는 받았다고도 한다.

1914년 향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유길준의 가족들은 대부분 친일파였는데 동생 유성준과 첫째 아들 유만겸 중추원 참의직을 지낸 거물급 친일파에 속하고 둘째 아들 유억겸은 그래도 '합법적 공간'에서 신간회 등의 독립운동을 했었지만 1938년 '흥업 구락부 사건'을 전후해 친일파로 변절했다. 하지만 유억겸은 광복 후 연희대학교(오늘날 연세대학교) 총장, 문교부(오늘날 교육부) 장관 등을 역임하여 그런 사실들은 덜 알려진 편이다. 유각경은 그의 조카이다.

유길준의 사상 중 하나로는 조선의 실정에 맞춘 개화를 해야 한다는 일명 '실상개화(實狀開化)'가 있다. 기존의 상고주의 사관에 반대해 문명은 미개화 - 반개화 - 개화의 단계를 거쳐 꾸준히 진보한다는 '문명 진보 사관'을 제시하였다. 서재필과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본 것이 인상적이었던지 '군민공치'를 주장하면서 상공업 진흥, 근대적 조세와 화폐, 근대 교육에 앞장섰다.


다만 입헌군주국을 주장하면서도 군주권의 존재에 대한 생각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유길준에 대한 평가는 보수적 근왕주의 개혁가에서 급진적 사회 변혁가까지 널을 뛰는 편이다. 이런 평가는 서유견문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사실 이런 모순성이야말로 당시 개화파 지식인들의 시대적 특징이자 현실적 한계였다고 볼 수도 있다. 속내야 어찌됐든 밖으로는 입 1번 잘못 놀렸다가는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는 판국이니 말이다.

 

노동야학회 고문 유길준 씨 고문의 말씀: "여보(이보시오), 나라 위하여 일하오. 또, 사람은 배워야 합니다."
노동자의 대답: "네. 고맙소. 그리하리다"

본인이 쓴 '노동야학독본'의 한 장면이다.

유길준의 저서로는 서유견문, 구당시초, 대한문전, 노동야학독본, 조선문전 등이 있다. 이 중에서 서유견문은 최초의 한글 조사를 사용한 국한문 혼용 도서로만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단순한 서구 여행기가 아니라 서구의 근대 모습을 보고 우리 체질에 맞는 근대화 방안을 정치, 경제, 법률, 교육, 문화 등 다방면에서 구체적으로 제시한 방략서로 지금 봐도 배울 점이 있을 수 있는 양서이다. 다만 지나치게 서양에 경도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9] 허나 알고보면 유길준이 온전한 서구주의자는 아니었는데 상인의 대도에서도 개화의 등급을 논하면서 개화가 온전한 나라는 지금까지 없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개화는 실상과 허상으로 구분되며 개화는 자신의 처지를 잘 헤아려 행해야 한다고 했다. 개화는 남의 것을 취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아름다운 것을 보전하는 것이며 무조건 서양의 것이라고 행하는 것은 개화의 변질, 왜곡이라고 비판했다.

내용 외적으로 보면 이 책을 통한 저자의 목적 또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일단 책이 나온 다음 고종에게 바쳐서 정책화를 시도했지만 당연히 실패.[10] 이후 조선에서는 금서가 되었고 일본에서 찍었는데 그 책들도 판매용이나 배포용은 아니고 갑오개혁과 갑신정변에 대한 자신의 정책 홍보용으로 사용되었다. 일본에서 출판되었다는 점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기존 종속 체제인 청나라에 대한 사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하지만 서양과 일본의 제국주의 시스템에 대해서는 입을 닫아서 이후 영향을 받은 갑오개혁에서 독립협회로 이어지는 초기 개화파들의 방향성을 그대로 규정해버렸다.

유길준이 항상 입던 검은 정복과 유길준의 작위 사퇴서는 고려대학교 100주년 기념관에 있는데, 심지어는 유길준이 쓰던 틀니도 그곳에 있다. 왠지 쓸데없는 짓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역사적 인물이 사용하던 물건 혹은 신체 일부는 누군가에게는 인기있는 수집품이자 문화재이기도 하다.[11]

위의 글을 보면 그는 신사 유람단과 보빙사의 단원으로 일본과 미국을 다녀왔고 두 나라에서 유학도 했다고 한다.

미국 있을 때 유럽도 다녀와서 '서유견문'을 남겼다.

 

 

 

 

 

유길준 부모님 묘소

 

 

 

 

 

 

 

 

 

 

 

능선에 올라왔다.

 

 

능선에 올라서자 맞 이 계단이 보여서 낙담할 수 있다.

이런 계단길이 상당히 많다.

 

 

 

 

 

 

 

 

 

 

 

 

정상 가기 전에 이 정자가 있다.

 

 

정자 앞에서 바라본 두물머리 방면

 

 

 

 

 

 

 

 

 

 

 

 

 

 

등산객이 이렇게 많다.

 

 

 

 

 

 

 

 

 

 

 

인증 사진 찍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줄을 한참 서야 했다.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정상표지석만 찍을 수가 없었다.

 

 

 

 

 

 

 

 

제일 왼쪽이 북한강이고 다음이 남한강 그리고 오른쪽은 두물머리앞, 아래는 팔당댐

 

 

예봉산 운길산 방향

 

 

 

 

 

나중에 한참 기다려서 독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정상에서 현충탑 쪽으로 내려오는 길은 미끄럽다. 정상 바로 아래가 한깔딱하는 길이다. 이쪽으로 올라오는 길이 대체로 완만하지만 정상 바로 아래 300~400m 정도가 아주 된비알이다.

 

 

가파른 구간만 내려오면 다음부터는 끝까지 편안한 길이다.

 

 

중간에 막걸리 파는 곳이 몇군데 있다.

 

 

 

 

 

백제와 관련이 있고 조선 시대에도 왕이 제사를 지냈다고...

 

 

 

 

 

 

 

 

 

 

 

 

 

 

 

 

 

 

 

 

현충탑

 

 

 

 

 

 

 

 

산 아랫부분에는 데크길이 길게 조성되어 있다.

 

 

 

 

 

 

주차장의 모습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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