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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파사성 22-01-28 본문

역사 문화 유적지 관광지

여주 파사성 22-01-28

singingman 2023. 5. 14.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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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네 집에 대학 동기 4명이 모여서 함께 가다.

이포보 바로 옆 길가에 10여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는 작은 주차장이 있다.

주차하고 10여분 올라가면 바로 산성에 도착한다.

파사산 자체가 200여m 밖에 되지 않는 나즈막한 산이다.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 사전에 의하면 

파사성은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 산9 번지와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 산43 번지 경계에 있는 해발 230m의 파사산 정상에 위치하며, 6세기 중엽 이후 초축된 테뫼식산성이다. 둘레는 936m이고, 내부 면적은 약 3,966㎡이다. 산정상부와 계곡을 일부 포함하여 부정형에 가까운 형태로 축성되었다. 현재 사적 제251호로 지정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신라의 파사니사금(婆娑尼師今, 재위 80∼112) 때 축성되었기 때문에 파사성이라고 하며, 또는 고대 파사국(婆娑國)의 옛터가 있어 파사성으로 불리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문헌적으로 뚜렷한 근거는 없다.

파사성의 축조와 관련하여 백제의 초축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성벽의 축성방식과 현문구조, 성돌의 치석방법 등으로 미루어 6세기 중엽 이후 한강유역으로 진출한 신라에 의해 초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인 임진왜란 때 수축하였다.

파사성에 대한 문헌기록은 조선 초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때 이미 ‘고산성(故山城)’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선조실록(宣祖實錄)』에는 1595년(선조 28) 3월에 승군총섭(僧軍總攝) 의암(義巖)이 산성을 수축하였다고 기록되었으며, 유성룡(柳成龍)의 『서애집(西厓集)』에도 파사성의 수축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되었다. 이후 파사성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1656) 등 17~19세기의 각종 지리지에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다.

파사성은 1999년부터 2018년까지 모두 8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이를 통해 성벽 및 성 내부시설 등에 대한 전반적인 현황이 파악되었다.

파사성의 성벽은 내·외협축으로 축성되었는데, 초축 성벽과 수축 성벽으로 구분된다. 초축 성벽의 일부 구간에서는 ‘ㄱ’자형과 단면 삼각형의 기단보축 등 2가지 방법의 기단보축이 확인되는데, 이러한 보축방법의 차이는 수축시기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수축성벽은 축조법이 약간씩 달라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성벽의 최고 높이는 약 6.5m이고, 상단 폭은 3.2∼7.2m이며, 하부 폭은 10m 내외이다.

성내 시설물은 문지 2개소, 포루 3개소, 우물지와 수구지, 그리고 곡성지 각 1개소, 추정 건물지 8개소 정도이다. 이 중에서 동문지와 포루 2개소, 곡성지 그리고 몇 개의 건물지가 성벽과 함께 발굴되었다. 동문지는 성으로 들어오는 중요한 통로의 하나로 방형의 옹성(甕城)이 구비된 개방형 문지인데, 기단부에 2회 이상의 수축 흔적이 있다. 포루는 기존에 치(雉)로 알려진 구조물로서 남벽과 북벽에서 조사되었다.

파사성 내부에서는 동벽과 서벽 주변의 건물지가 조사되어 주거지 2기, 구들 23기, 건물지 4기, 저장공 1기 및 축대 등이 확인되었다. 주거지는 청동기시대 장방형주거지와 백제시대 주거지가 1기씩인데, 백제시대 주거지는 한강이 조망되는 구릉의 암반을 파고 수혈식으로 만들어졌다. 구들은 총 23기가 확인되었는데, 방형 혹은 세장방형으로 괴임돌 위에 장방형의 면석을 구들장으로 사용한 구조이다. 건물지는 4기 중에서 2기가 2칸 규모의 소형이고, 1기는 15×5m의 크기이며, 또 다른 1기는 규모가 확인되지 않았다.

파사성에서는 토기류, 자기류, 기와류, 철기류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무문토기와 경질무문토기, 승석타날문토기 등 백제 토기와 삼국시대의 단각고배, 통일신라시대의 원점문토기와 주름무늬병 등이 출토되었다. 자기류는 고려시대 초기의 청자와 조선시대 중기의 백자가 다량 출토되었지만, 분청사기는 소량만 확인되었다. 기와류는 통일신라시대 기와와 조선시대 기와가 많다. 철기류는 화살촉과 소도 철정, 호미 등이 수습되었다.

파사성은 주변지역에 험난한 산지가 없으며, 파사산의 정상부에서는 양평과 여주 일대의 넓은 강안 충적대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따라서 이곳을 통해 남한강 하류나 상류 방향으로 진입하는 외적을 감시하고 견제하기 위한 최적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파사성에서 북쪽으로 약 2㎞ 부근에는 현재 그 터만 전하는 이포(梨浦)나루가 있어 이 지역이 남한강의 수운로에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남한강변의 육상교통로는 충주에서 시작하여 여주-양평-서울로 이어지는 남한강을 따라 형성되었다. 이러한 육상과 하천교통로는 중부내륙지역과 서울, 그리고 황해를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인데, 파사성은 이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파사성은 지정학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의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주 이포보 바로 맞은편에 파사성이 있다.

 

 

 

신라 파사왕 때 쌓은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

 

 

성으로 올라가는 길

 

이포보가 이렇게 보인다.

 

 

 

 

 

성벽보다 좀 아래쪽에도 이런 돌담이 보이는데 이것은 어느 시대의 것일까?

 

 

 

 

 

 

 

 

무너진 성벽도 보인다.

 

 

입구

 

 

이런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 윗부분은 이렇게 복원되었다.

 

여기에 어떤 건물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 복원되지 않은 성벽 부분

 

한강이 잘 내려다 보인다.

 

 

 

 

추읍산이 보인다.

 

 

멀리 용문산도 잘 보이고

 

 

 

 

 

 

재명, 인준, 성수와 함께 가다.

 

 

 

 

성벽에서 바라본 남한강 파노라마

 

 

양평쪽 남한강

 

 

 

 

여기 파사성 정상

 

 

이포보

 

 

 

 

여주 방면

 

 

 

 

 

 

여기서 기와 파편이 많이 발견된 모양이다.

 

 

성벽 안쪽 부분

 

 

 

 

 

 

불에 탄 성문이 있었던 흔적

 

 

 

 

 

 

 

 

이포보 앞 강둑에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크기는 작아도 있을 것은 다 있는 종

 

 

 

 

 

성수네 집으로 돌아와서 불멍하다.

 

 

 

 

 

 

아래는 성수가 찍은 사진들

 

 

 

 

종을 쳐봤더니 소리가 좋다.

 

 

불멍하다가 고구마도 구워먹고

 

 

 

 

문목도 와서 함께 라면으로 저녁을 대신하다.

성수가 점심에는 맛있는 육개장을 사주었다. 그리고 저녁으로 맛있는 김치찌개를 사준다고 했는데 다들 난로 앞 분위기가 좋아서 여기서 저녁을 해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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