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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군 이영 묘소 22-02-04 본문
북한산 둘레길 구름정원길을 걸으면서 가다.
구름 정원길 출발점 바로 옆에 묘가 있다.
묘역 안에 이씨들 묘가 많고 막상 능침부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어서 어느 것이 화의군의 묘인지 알기도 어렵다.
곡장이 있고 석물이 많은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화의군 이영(和義君 李瓔, 1425년 9월 5일 ~ 1489년 이후[1])은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세종(世宗)의 여섯째 아들이며 서장자이다. 어머니는 영빈 강씨(令嬪 姜氏)이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자 서장자이며, 계유정난 당시 수양대군(세조)에 맞선 육종영 중 한 사람이다. 금성대군, 혜빈 양씨 등과 함께 훈신들의 공격을 받고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수차례 탄핵되어 유배되었다.
이후 노비와 전답을 비롯해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자녀들은 천민으로 강등되었으며, 30여년 가까이 유배지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성종대에 방면되었으나 종친의 지위를 박탈당하였다가 중종대에 복권되었다.
1425년(세종 7년) 9월 5일, 세종(世宗)과 당시 궁인이었던 강씨(姜氏, 영빈 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2]
1433년(세종 15년) 1월에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지고, 1436년(세종 1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3] 같은해 10월 8일 사헌부 감찰 박중손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4]
1441년(세조 23년) 8월에는 이복형 임영대군과 공모하여 민간 여인에게 남복을 입혀 궁내로 들이려다가 수문장에게 발각되어 직첩과 과전을 몰수당하였다.[5]
1447년(세종 29년) 7월 복권되었으나, 부인 밀양 박씨의 큰아버지 박대손(朴大孫)의 노비 출신 첩을 빼앗은데 이어 1449년(세종 31년) 조관의 기첩을 빼앗은 사건으로 다시 직첩이 몰수되었다.[6] 이듬 해에 문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복권되었다.
1451년(문종 1년) 2월, 세종의 소상이 끝나자 종신들을 학당에 보내라는 문종의 명으로 학당에 보내졌다. 1454년(단종 2년), 효령대군, 수양대군, 임영대군, 계양군 등과 단종 비 송씨(정순왕후)를 간택하는데 참석하였다.
1455년(단종 3년) 금성대군의 집에 모여 활쏘기 시합을 벌인 일이 훈신들의 눈에 띄면서 이때 이복동생 평원대군의 첩 초요갱과 몰래 간통한 사건이 발각되면서 또다시 고신을 몰수당하고 경기도에 부처되었다가 곧 방면되었다. 초요경은 계양군과도 사통하였다 하여 계양군은 세조의 추궁을 받게된다.
같은 해 세조가 즉위하면서 계양군과 영천위 윤사로 등의 탄핵을 받기 시작하면서, 이후 대간으로부터 금성대군, 혜빈 양씨 등과 결탁해 국가의 기틀을 어지럽혔다는 탄핵을 받고 외방에 부처되었다.
그 뒤 사육신의 거사가 발각되면서 세조가 그를 시험할 요량으로 불러들여 사육신의 처리 문제를 묻는다. 사육신 등의 왕위 복위 거사가 일어났을 때 세조가 화의군에게 묻기를 “성삼문을 파직 처리함이 옳지 않으냐.”는 물음에 화의군은 묵묵부답함으로써 전라도 금산(錦山)에 어머니 강씨와 함께 유배되었다.
1456년(세조 2년) 사면되었지만, 그 해 상왕(단종) 복위사건에 가담해 가산을 적몰당하고 고신을 회수당한 뒤 전라도 금산에 안치되었다.[7] 1457년(세조 3년) 세조는 금산부사에게 유시하여 화의군의 감시를 허술하게 하면 죄를 줄것이고 감사(監司)도 또한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다시 금방을 엄하게 더하라고 하였다.[8]
양녕대군 등이 세조에게 화의군을 처형할 것을 여러 차례 청했으나 세조는 따르지 않았다.[9][10]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단종복위운동을 도모했다가 정보를 입수한 관노의 밀고로 사사되고, 영월에 방출된 단종이 교살되자 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실록에는 금산에서의 방금(防禁)조건이 실록에 전해지고 있다.
금방 조건(禁防條件)
- 난장(欄墻) 밖에 녹각성(鹿角城)을 설치하소서.
- 외문(外門)은 항상 자물쇠로 잠그고 조석거리는 10일에 한 차례씩 주며,
또 담안에 우물을 파서 자급(自給)하게 하고
외인(外人)으로 하여금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소서.- 외인이 왕래하여 교통(交通)하거나 혹 물품을 주는 자가 있으면,
불충(不忠)한 자에 견주어 논단하게 하소서.- 수령(守令)이 불시에 점검하고, 문을 지키는 자가 혹 비위(非違) 사실이 있으면
율문(律文)에 의하여 죄를 과단(科斷)하게 하소서.
1483년(성종 14년) 1월, 화의군의 어머니 영빈 강씨가 병들자 성종은 화의군을 종편하게 하여 서울에 머물게 하였는데, 강씨가 죽자 대신들이 논하여 화의군을 외방에 종편하게 하였다.[12] 같은 해 화의군의 아들 이원은 생계가 곤란함을 호소하여 도움을 받기도 한다.
이영(李瓔)【곧 화의군(和義君)이다.】의 아들 이원(李轅)이 상언하기를,“아비 영(瓔)이 지난 을해년(1455년)에 금산관(錦山官)에 안치된 뒤 은혜를 입어 여러 차례 방면되었지만, 다만 노비와 전산(田産)이 적몰된 나머지 춥고 배고프며 괴로와서 살아갈 수 없으니, 원컨대 가엾게 살펴주소서.” 하니,호조(戶曹)에 명하여 밭을 주도록 하였다.— 《성종실록》 155권,
성종 14년(1483년 명 성화(成化) 19년) 6월 25일 (병술)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1489년(성종 20년) 화의군은 자신의 서자를 종적에 편입시켜줄 것을 호소하였다.[1] 화의군의 행적에 관한 기록은 이 기록이 마지막이기 때문에 적어도 1489년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 세종의 자녀들 중 가장 장수하였고, 제일 마지막에 사망하였다.
《선원록》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가 이후 이름만 오르고 관작이 삭제되었던 것을 1518년(중종 13년) 손자 윤(綸)의 요청으로 관작이 추복되고 자손도 종친록에 추록되었다. 품행은 문란했지만 절의가 있었고,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다.
1791년(정조 15년)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구축하면서 단종조의 충절이 인정되어 정단(正壇)에 배식되었다.
- 화의군 이영 묘역 : 서울특별시의 기념물 제24호
화의군이 여자 노비 3명과의 사이에서 낳은 건리동, 수달, 팽수 등의 서자들과 서손들은 1489년(성종 20년) 5월, 성종의 특명으로 노비 신분에서 면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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