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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장릉 21-12-30 본문
주천 사는 이화섭 선생님 댁을 방문하고 들르다.
조선 왕릉 마지막 남은 곳을 마침내 가게 되었다.
오래 전에 다녀 온 적이 있긴 하지만 아마 그때는 왕릉이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기 전이었던 것 같다.
단종의 장릉은 다른 능과 좀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
정자각에서 능이 많이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정자각은 산 아래 있고 능은 산 위에 있어서 정자각에서는 능분이 보이지도 않는다.
아마 처음에 능을 조성할 당시에는 여기 정자각이 없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장릉은
장릉이라는 능호는 조선왕릉 중에 총 세 군데에서 사용되고 있다. 다만 '장'에 해당하는 부분의 한자는 모두 다르다.
-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莊陵): 조선의 6대 임금 단종을 모신 단릉. 이 왕릉은 장중할 장(莊)자를 사용한다.
단종의 장릉은 조선왕조 재위 임금 중에서는 유일하게 수도권이 아닌 곳에 있는 능이다.
당시 서슬퍼런 세조의 눈을 피해 암장했던 만큼 단종의 무덤은 아무도 그 소재지를 몰랐다.
*. 일화
단종이 복권되지 않은 시절, 장릉은 봉분도 없어 그냥 평평한 맨땅이었기에 다른 땅과 구분이 가지 않았고 풀도 무성한 자리였다.
엄흥도는 중인 출신의 지방 아전으로 세조의 눈을 피해 단종의 장사를 지낸 일로 후대에 높게 평가를 받게 된다.
이 외에도 다른 왕릉과 달리 장릉에는 관련된 일화가 상당히 많은 편인데 아무래도 비극적인 단종의 생애와 수도에서도 먼 곳에 방치되어 민간층에서 관리되었던 점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박충원(朴忠元, 1507년 윤1월 16일~ 1581년 2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초(仲初), 호는 낙촌(駱村)·정관재(靜觀齋)[1],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박광영(朴光榮)의 손자이자 박계현(朴啓賢)의 아버지이다.
일찍이 외숙부 기준(奇遵)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28년(중종 23) 생원시(生員試)에 장원으로, 진사시(進士試)에 부장원으로 합격했으며, 1531년(중종 26) 문과에 급제했다.[1]
1533년(중종 28) 주서(注書)로서 무과 실시 방법에 대해 아뢰었으며[2], 이듬해 봉교(奉敎), 전적(典籍), 정언(正言), 또 그 이듬해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쳤다.[1]
1536년(중종 31) 4월 다시 정언으로 임명되었다가 11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옮겼으며, 12월 병이 있던 임억령(林億齡) 대신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다.[2]
이듬해 병조정랑(兵曹正郞),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쳤으며, 조부 박광영(朴光榮)의 상을 당하자 고인인 아버지 박조(朴藻)를 대신해 상복을 입었다.
상을 마친 후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을 거쳤다가 1541년(중종 36) 영월군수(寧越郡守)로 나갔다.
당시 3명의 군수가 연이어 죽어서 민심이 흉흉했는데, 박충원이 제문을 지어 단종(端宗)의 묘에 제사를 지낸 후 사람을 시켜 지키니, 5년 동안 재직하면서 탈이 없었다고 한다.
1545년(명종 즉위년) 임기를 마치기 전에 소환되어 원접사 정사룡(鄭士龍)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직강(直講),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사성(司成)을 거쳤다.
이듬해 외직인 성천부사(成川府使)로 임명되었으나 사직했으며, 중시(重試)에 뽑혀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승진했다가 우통례(右通禮)·교서관판교(校書館判校)로 옮겼다.[1]
1548년(명종 3) 2월 좌통례(左通禮)로서 경상우도(慶尙右道)에 파견되어 백성을 구휼했으며, 9월 영의정(領議政) 홍언필(洪彦弼)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는 교서(敎書)를 지었다.
1550년(명종 5) 1월 동부승지(同副承旨), 4월 우부승지(右副承旨), 윤6월 대사성(大司成)을 거쳤다가 7월 다시 우부승지로 임명되었다.[3]
같은 해 어머니의 상을 당해 여묘(廬墓)살이를 했으며, 상을 마친 후인 1553년(명종 8) 대사성, 황해도도관찰사(黃海道都觀察使), 이듬해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쳤다.[1]
1556년(명종 11) 세 번째로 우부승지로 임명되었으며, 1558년(명종 13) 4월 좌승지(左承旨)로서 의주목(義州牧)의 기근이 심함을 아뢰었다.
5월 도승지(都承旨), 8월 5일 우윤(右尹), 8월 15일 병조참판(兵曹參判)를 거쳤으며[3], 이후 밀원군(密原君)으로 봉해졌다.[1]
1560년(명종 15) 7월 예조참판(禮曹參判), 8월 대사헌(大司憲)을 거쳤다가 이듬해 전라도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로 나갔는데, 1562년(명종 17) 4월 옥구현(沃溝縣)의 공물을 견감(蠲減)해 줄 것을 청해 3분의 2를 감면받게 했다.
8월 좌윤(左尹), 10월 우윤, 이듬해 청홍도도관찰사(淸洪道都觀察), 또 그 이듬해 2월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3월 병조참판, 9월 대사헌을 거쳤다가 10월 특지(特旨)로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임명되었다.
1565년(명종 20) 1월 왕명으로 홍섬(洪暹)·윤춘년(尹春年)과 함께 성균관(成均館)에서 제술 시험을 주관했으며, 12월 호조판서(戶曹判書), 이듬해 1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쳤다.
4월 민기(閔箕)와 함께 새 대제학(大提學) 후보로 정해졌는데, 박충원이 양관(兩館)[4]의 대제학으로 간택되었다.
1567년(명종 22) 1월 4일 예조판서(禮曹判書), 1월 18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쳤으며, 5월 원접사로서 명의 사신을 접대했다.[3]
10월 예조판서를 거쳐 1569년(선조 2) 윤6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옮겼으나[5], 7월 대사헌 백인걸(白仁傑)이 자신을 탄핵하려 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6]
이듬해 예조판서, 또 그 이듬해 1월 이조판서, 6월 우찬성(右贊成), 12월 우참찬(右參贊), 1572년(선조 5) 11월 형조판서, 12월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쳤다.[5]
1576년(선조 9) 7월 다시 이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홍문관과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다. 이때 왕이 탄핵을 윤허하지 않았지만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6]
이듬해 9월 왕이 문묘(文廟)를 배알할 때 호가(扈駕)했는데, 병으로 집에 돌아갔으며, 이후 여생을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1581년(선조 14) 향년 75세로 졸했으며[1], 1758년(영조 34) 문경(文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7]
《박충원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다. 1989년 10월 23일 고양시의 향토유적 제26호로 지정되었다.
가족 관계
- 증조 - 박미(朴楣, 1433년 ~ 1491년) : 예조참의(禮曹參議)
김경임이 쓴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라는 책에 의하면 이 장판옥에 단종을 위해 희생된 236인의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하지만 아래 설명에는 268인을 모셨다고 되어 있다. 그 가운데 순절한 왕자와 섭정승, 사육신등 32인의 관작과 시호를 적은 사판을 '충신지위'라 하고 안평대군을 제일 앞에 적었다.
아래 사판을 확인해보면 알 수 있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참 많다.
노량진 사육신 묘에는 김문기의 허묘가 있는데 과연 그가 거기에 있어도 되는지 의문이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명단
"안평대군 장소공 용"이 제일 앞에 적혀 있다.
영천 - 한식 제사 때 이 우물을 사용했다고
정여각 내부에 있는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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