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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월 장릉 21-12-30 본문

궁,능,원,묘

영월 장릉 21-12-30

singingman 2023. 5. 1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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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천 사는 이화섭 선생님 댁을 방문하고 들르다.
조선 왕릉 마지막 남은 곳을 마침내 가게 되었다.
오래 전에 다녀 온 적이 있긴 하지만 아마 그때는 왕릉이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기 전이었던 것 같다.
단종의 장릉은 다른 능과 좀 다른 특이한 점이 있다.
정자각에서 능이 많이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정자각은 산 아래 있고 능은 산 위에 있어서 정자각에서는 능분이 보이지도 않는다.
아마 처음에 능을 조성할 당시에는 여기 정자각이 없어서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위키 백과에 의하면 장릉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있는 왕릉.
이전에는 노산군 묘(墓)로 불려왔다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이 추존복위됨에 따라 노산군 묘에서 장릉으로 승격되었다.
1970년 사적 제196호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열린 제55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장릉이라는 능호는 조선왕릉 중에 총 세 군데에서 사용되고 있다. 다만 '장'에 해당하는 부분의 한자는 모두 다르다.

  • 경기도 김포에 있는 장릉(章陵): 조선의 추존왕 원종(인조의 생부)과 추존왕비 인헌왕후(인조의 생모)를 모신 쌍릉. 이 왕릉은 글 장(章)자를 사용한다.
  •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장릉(長陵): 조선 16대 임금 인조와 그의 첫 번째 왕비인 인열왕후를 모신 합장릉. 이 왕릉은 길 장(長)자를 사용한다.
  • 강원도 영월에 있는 장릉(莊陵): 조선의 6대 임금 단종을 모신 단릉. 이 왕릉은 장중할 장(莊)자를 사용한다.

단종의 장릉은 조선왕조 재위 임금 중에서는 유일하게 수도권이 아닌 곳에 있는 능이다. 
이는 아래의 복잡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숙부인 세조에 의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단종이 영월에서 죽게 되고 시신이 영월 동강에 버려지면서 지역 호장(戶長)인 엄흥도가 동강에서 그의 시신을 운구하여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暗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슬퍼런 세조의 눈을 피해 암장했던 만큼 단종의 무덤은 아무도 그 소재지를 몰랐다.
그 후 1541년 중종 때, 노산군의 무덤을 찾으라는 명을 받고 수소문했으나 찾을 수 없어 난감해하던 차에 영월군수 박충원이 처음 발견하여 묘소를 정비하게 되었고, 1580년 주변에 비석들이 세워지기는 했으나 이 당시까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상태여서 묘(墓)라는 칭호를 유지해왔다가 1698년 숙종이 단종을 복위시킴에 따라 무덤도 능으로 격상되고 장릉이라 이름하였다.
이때, 단종의 시신을 모셨던 엄흥도에게는 공조판서가 추증되었다. 왕릉 공사를 담당하는 부서가 공조였던 것을 감안한 셈.
주변에는 상석과 망주석이 있으며 문인석, 석마(石馬) 등도 갖추었고 능 아래쪽에는 엄흥도의 장려비와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여러 비석들이 있으며, 장릉 입구에 단종의 행적을 기리는 단종역사관이 있다. 
사육신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단종을 위해서 죽은 인물들을 정조 대에 배향한 배식단도 존재한다. 특이점으로는 무인석이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단종이 무신 세력을 등에 업은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했기 때문이라 한다.
장릉 주변 동강에 단종이 유배되어 지냈던 청령포가 있다. 대부분 장릉과 청령포를 묶어서 관람한다.

*. 일화

단종이 죽고 동네 호장이었던 엄흥도가 밤중에 몰래 아들들을 데리고 가서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인근 산에 올랐다.[3] 그러나 급하게 일어난 일인데다가 날씨조차도 눈보라가 쳐서[4] 맨 땅을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산 속에 앉아있던 노루 한 마리가 일행을 보고 놀라서 달아났는데 노루가 앉았던 그 자리에는 눈이 녹아서 맨 땅이 드러나 있었다.
이를 보고 엄흥도 일행은 천우신조라 여겨 그곳에 단종의 시신을 매장한 후, 식솔을 거느리고 자취를 감추었다.
후에 단종이 정식으로 복권되어 왕릉을 이장하기 위해 지관을 조정에서 내려보냈는데 그들이 살펴보니 단종이 묻힌 그 자리가 이미 천하의 명당이었기에 이장하지 않고 묘제만 고쳤다고 한다.

단종이 복권되지 않은 시절, 장릉은 봉분도 없어 그냥 평평한 맨땅이었기에 다른 땅과 구분이 가지 않았고 풀도 무성한 자리였다.
그러나 그 지역 사람들 중에 그 자리를 밟거나 지나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심지어는 어린아이들도 그 주변에서 놀 때, 그 자리를 향해서 돌을 던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소재지가 알려지지 않았다고는 해도 인근 백성들은 암암리에 알고 있었고 이를 관에 고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야기.
비슷한 이야기로 단종의 시신과 엄흥도의 식솔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관에서 엄흥도 일가의 행방을 수색했는데 사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숨은 곳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관에 고하지 않아서 찾지 못했다고 전한다.

엄흥도는 중인 출신의 지방 아전으로 세조의 눈을 피해 단종의 장사를 지낸 일로 후대에 높게 평가를 받게 된다.
단종이 복위되기 전인 선조 때 이미 그 자손은 노산군의 묘역을 관리하는 대신 병역을 면제받는 특권을 누렸고 후에 정조가 단종의 충신들을 정리하여 등급을 결정할 때, 단종 복위운동과 관련하여 죽은 이들 바로 다음으로 엄흥도를 놓았는데 아무리 절의를 다했다 하더라도 직접적으로 단종과 관련되어 죽은 것이 아닌 이상은 사육신들과 동급으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원칙에서 유일하게 예외이자 심지어는 생육신들보다도 더 위였으며, 고종 때에는 아예 정승급의 관직을 추증한다.
죽은 이의 장례를 매우 중히 여겼던 조선 시대에 누구나 억울함을 알지만 감히 장사지낼 생각을 못했던 단종의 시신을 목숨걸고 수습한 공을 높이 산 것이다.

이 외에도 다른 왕릉과 달리 장릉에는 관련된 일화가 상당히 많은 편인데 아무래도 비극적인 단종의 생애와 수도에서도 먼 곳에 방치되어 민간층에서 관리되었던 점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덕분인지 조선왕조의 다른 장릉들과는 달리 가장 존재감이 큰 장릉이기도 하다.

 
이수광(1954년 충북 제천 출생)이 지은 '조선의 방외지사'라는 책에 보면 16세기 조선 명종 때 이봉의 딸 이원(호는 옥봉)이 장릉을 보고 지은 시가 있다.
이 여인은 일찍 남편을 여의고 조원이라는 사람의 첩이 되어 남편이 삼척 부사가 되어 가는 길에 장릉을 보고 시를 지었다.
 
영월 가는 길
 
닷새 걸리는 영월을 사흘 만에 넘었네
구름 속의 노산군의 능을 보니 애통한 노래도 끊기네
첩의 몸도 조선 왕실의 손녀
두견새 울음소리를 차마 듣기 어렵구나
 
 
이때까지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복원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인 정순왕후의 능인 사릉에서 가져온 소나무라고

 

매표소

 

 

 

위키 백과에 의하면

박충원(朴忠元, 1507년 윤1월 16일~ 1581년 2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초(仲初), 호는 낙촌(駱村)·정관재(靜觀齋)[1],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박광영(朴光榮)의 손자이자 박계현(朴啓賢)의 아버지이다.

일찍이 외숙부 기준(奇遵)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528년(중종 23) 생원시(生員試)에 장원으로, 진사시(進士試)에 부장원으로 합격했으며, 1531년(중종 26) 문과에 급제했다.[1]

1533년(중종 28) 주서(注書)로서 무과 실시 방법에 대해 아뢰었으며[2], 이듬해 봉교(奉敎), 전적(典籍), 정언(正言), 또 그 이듬해 이조좌랑(吏曹佐郞)을 거쳤다.[1]

1536년(중종 31) 4월 다시 정언으로 임명되었다가 11월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옮겼으며, 12월 병이 있던 임억령(林億齡) 대신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임명되었다.[2]

이듬해 병조정랑(兵曹正郞),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쳤으며, 조부 박광영(朴光榮)의 상을 당하자 고인인 아버지 박조(朴藻)를 대신해 상복을 입었다.

상을 마친 후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을 거쳤다가 1541년(중종 36) 영월군수(寧越郡守)로 나갔다.

당시 3명의 군수가 연이어 죽어서 민심이 흉흉했는데, 박충원이 제문을 지어 단종(端宗)의 묘에 제사를 지낸 후 사람을 시켜 지키니, 5년 동안 재직하면서 탈이 없었다고 한다.

1545년(명종 즉위년) 임기를 마치기 전에 소환되어 원접사 정사룡(鄭士龍)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직강(直講),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사성(司成)을 거쳤다.

이듬해 외직인 성천부사(成川府使)로 임명되었으나 사직했으며, 중시(重試)에 뽑혀 예빈시정(禮賓寺正)으로 승진했다가 우통례(右通禮)·교서관판교(校書館判校)로 옮겼다.[1]

1548년(명종 3) 2월 좌통례(左通禮)로서 경상우도(慶尙右道)에 파견되어 백성을 구휼했으며, 9월 영의정(領議政) 홍언필(洪彦弼)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는 교서(敎書)를 지었다.

1550년(명종 5) 1월 동부승지(同副承旨), 4월 우부승지(右副承旨), 윤6월 대사성(大司成)을 거쳤다가 7월 다시 우부승지로 임명되었다.[3]

같은 해 어머니의 상을 당해 여묘(廬墓)살이를 했으며, 상을 마친 후인 1553년(명종 8) 대사성, 황해도도관찰사(黃海道都觀察使), 이듬해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쳤다.[1]

1556년(명종 11) 세 번째로 우부승지로 임명되었으며, 1558년(명종 13) 4월 좌승지(左承旨)로서 의주목(義州牧)의 기근이 심함을 아뢰었다.

5월 도승지(都承旨), 8월 5일 우윤(右尹), 8월 15일 병조참판(兵曹參判)를 거쳤으며[3], 이후 밀원군(密原君)으로 봉해졌다.[1]

1560년(명종 15) 7월 예조참판(禮曹參判), 8월 대사헌(大司憲)을 거쳤다가 이듬해 전라도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로 나갔는데, 1562년(명종 17) 4월 옥구현(沃溝縣)의 공물을 견감(蠲減)해 줄 것을 청해 3분의 2를 감면받게 했다.

8월 좌윤(左尹), 10월 우윤, 이듬해 청홍도도관찰사(淸洪道都觀察), 또 그 이듬해 2월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3월 병조참판, 9월 대사헌을 거쳤다가 10월 특지(特旨)로 형조판서(刑曹判書)로 임명되었다.

1565년(명종 20) 1월 왕명으로 홍섬(洪暹)·윤춘년(尹春年)과 함께 성균관(成均館)에서 제술 시험을 주관했으며, 12월 호조판서(戶曹判書), 이듬해 1월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쳤다.

4월 민기(閔箕)와 함께 새 대제학(大提學) 후보로 정해졌는데, 박충원이 양관(兩館)[4]의 대제학으로 간택되었다.

1567년(명종 22) 1월 4일 예조판서(禮曹判書), 1월 18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거쳤으며, 5월 원접사로서 명의 사신을 접대했다.[3]

10월 예조판서를 거쳐 1569년(선조 2) 윤6월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옮겼으나[5], 7월 대사헌 백인걸(白仁傑)이 자신을 탄핵하려 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6]

이듬해 예조판서, 또 그 이듬해 1월 이조판서, 6월 우찬성(右贊成), 12월 우참찬(右參贊), 1572년(선조 5) 11월 형조판서, 12월 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쳤다.[5]

1576년(선조 9) 7월 다시 이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홍문관과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다. 이때 왕이 탄핵을 윤허하지 않았지만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6]

이듬해 9월 왕이 문묘(文廟)를 배알할 때 호가(扈駕)했는데, 병으로 집에 돌아갔으며, 이후 여생을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1581년(선조 14) 향년 75세로 졸했으며[1], 1758년(영조 34) 문경(文景)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7]

박충원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다. 1989년 10월 23일 고양시의 향토유적 제26호로 지정되었다.

가족 관계

  • 증조 - 박미(朴楣, 1433년 ~ 1491년) : 예조참의(禮曹參議)
    • 조부 - 박광영(朴光榮, 1463년 ~ 1537년) : 경주부윤(慶州府尹), 밀성군(密城君)
      • 아버지 - 박조(朴藻, 1482년 ~ 1521년)[8] :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 어머니 - 부응교(副應敎), 증 이조참판(吏曹參判) 기찬(奇襸, 1424년 ~ ?)의 딸[8]
        • 동생 - 박효원(朴孝元, 1511년 ~ ?)[8] :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
        • 부인 - 첨정(僉正) 이인수(李麟壽)의 딸[8]
          • 장남 - 박계현(朴啓賢, 1524년 ~ 1580년)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 차남 - 박응현(朴應賢)[1] : 전함사별제(典艦司別提)
          • 3남 - 박용현(朴用賢)[1] :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
          • 4남 - 박호현(朴好賢, 1550년 ~ ?)[1] : 생원(生員), 박안행(朴安行, 1578년 ~ 1656년)의 아버지
          • 첫째 사위 - 이원성(李元成)[1] :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이정규(李廷圭, 1587년 ~ 1643년)의 조부
          • 둘째 사위 - 윤의로(尹毅老)[1]
          • 셋째 사위 - 신사정(申士楨)[1] : 주부(主簿)

 

 

 

 

 

 

 

 

 

 

 

 

 

 

 

 

 

 

 

 

 

 

 

능에 올라가는 길이 두 곳이 있다. 여기와 정자각 앞에도 올라가는 길이 또 있다.

 

 

능이 산 위에 있다.

 

 

조선 왕릉은 대부분 주변에 소나무가 잘 자라 있다.

 

 

 

 

다른 왕릉에 비해 어쩐지 약간 덜 화려해 보인다..

 

 

병풍석등은 없지만 곡장도 있고 여러 석물들은 대부분 있다.

 

 

 

 

 

정자각 앞에서 올라가는 길

 

 

 
 
 

 
 
 

 김경임이 쓴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라는 책에 의하면 이 장판옥에 단종을 위해 희생된 236인의 위패를 모셨다고 한다. 하지만 아래 설명에는 268인을 모셨다고 되어 있다. 그 가운데 순절한 왕자와 섭정승, 사육신등 32인의 관작과 시호를 적은 사판을 '충신지위'라 하고 안평대군을 제일 앞에 적었다.
아래 사판을 확인해보면 알 수 있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참 많다.
노량진 사육신 묘에는 김문기의 허묘가 있는데 과연 그가 거기에 있어도 되는지 의문이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의 명단
 "안평대군 장소공 용"이 제일 앞에 적혀 있다.
 
 

 
 
 

 
 
 

다른 왕릉에는 이런 배식단이 없다.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 많다 보니 이들을 모두 추모하고 배식해야 해서 이런 단이 특별히 마련된 것 같다. 사진 제일 오른편의 배식단이 충신 32인을 위한 배식단이다.


 
 
 

홍살문

 
 

장릉 판위

 
 

 
 
 

전면 2칸 측면 1칸의 수복실 - 방과 부엌이 하나씩인 것 같다.

 
 
 

단종비각

 
 

 

 
 
 

영천 - 한식 제사 때 이 우물을 사용했다고

 
 
 

정자각

 
 

 

옆에서 본 정자각

 
 
 

지붕 위에 치미만 보이고 다른 잡상이 없다.

 
 

 
 
 

이 정자각에서는 봉분이 보이지 않는다.

 
 

귀신이 올라갈 때 밟고 올라가라고 돌다리와 계단을 한 단 더 놓았다.

 
 

능침이 가파른 산비탈 위에 있다. 곡장과 석인이 약간 보인다.

 
 

예감?

 
 

 
 
 

 
 
 

 

 
 
 

 
 
 

왕릉 올라가는 길

 
 

 
 
 

목숨을 걸고 왕명을 거역하면서까지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정여각

 
 
 

 
 
 

정여각 내부에 있는 현판

 
 
 

 
 
 

장릉 재실

 
 

재실 출입문에 있는 홍살문

 
 

 
 
 

 

 
 

단종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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