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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파주 소령원 21-09-01 본문
소령원 숲속이라는 음식점 가는 길에 들르다.
전에도 이 음식점 지나가면서 본 적은 있는데 오늘도 가봤더니 원 입구에 있는 문이 굳게 잠겨 있다.
제삿날에는 문을 열겠지만 평소에는 이렇게 잠겨 있다고 음식점 사장이 말했다.
파주 소령원(坡州 昭寧園)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조선 19대 숙종(재위 1674∼1720)의 후궁이며 21대 영조(재위 1724∼1776)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무덤이다.
1991년 10월 25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58호 소령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1]되었다.
숙빈 최씨는 최효원의 딸이며 숙종 44년(1718)에 49세로 죽었다.
효심이 지극했던 영조는 최씨의 무덤 근처에다 막을 짓고 무덤을 받들었으며, 친필 비(碑)와 비각을 4곳에 세웠다.
위패는 조선시대 역대왕이나 추존된 왕의 생모인 7명의 후궁을 모신 칠궁(七宮)중 육상궁에 모셨다.
무덤 주변에는 여러 석물들이 있으며 정자각이 있다.
1718년(숙종 44년)에 숙빈 최씨가 사망하여 처음 숙빈묘를 조성하였고, 1744년(영조 20년)에 묘의 이름을 소령묘라고 고쳤다.
1753년(영조 29년)에 왕의 사친 추존 제도가 성립된 후에 원으로 격상되었다.
숙빈 최씨의 일생은 보잘 것 없는 궁중 나인이 승은을 입어 비빈의 지위에 올랐다는 입지전적인 일화와 함께 아들 연잉군이 온갖 고난을 딛고 보위에 올라 조선의 최장수 임금으로 재임했고,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사건을 거쳐 조선의 황금기인 정조시대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오늘날까지 많은 조명을 받고 있다.
당대에 막강한 서인의 후원으로 국모가 된 인현왕후 민씨, 갑부인 역관 장형의 서녀로서 남인의 지지를 받아 중전의 지위에까지 올랐던 희빈 장씨에 비해 숙빈 최씨에게는 궐 안팎으로 이렇다 할 배경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최씨는 자신의 소박한 품성과 미덕만으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성공했고, 그것은 영조로부터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까지 자신의 혈통으로 왕위가 계승되는 영구적인 승리로 이어졌다.
그런 면에서 최씨는 신데렐라 같은 여인일 수 있지만, 아들 영조에게는 누구보다도 아픈 삶을 살았던 비운의 어머니였다. 숙종 사후 살얼음판 같은 경종 시대를 극복하고 영조가 보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면에는 평소 자중자애하면서 죽을 때까지 숙종에게 정성을 다했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심모원려가 자리하고 있다.
경신대기근, 졸지에 고아가 되다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淑嬪 崔氏)는 1670년(현종 11년) 11월 6일, 서울 여경방 서학동에서 최효원의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海州)로 증조할아버지 최말정은 정3품 통정대부의 품계를 받았지만 조부 최태일은 학생, 곧 등과하지 않은 선비였다.
아버지 최효원은 행충무위부사과(行忠武衛副司果)란 벼슬을 지낸 무관 출신이었다. 충무위는 조선시대 5위의 하나로 후위에 속해 있던 정규군 부대이고 부사과는 종6품의 무관직으로 정2품 위장에 이은 부장급이다. 그런 최씨가 7세 때 생각시로 궁궐에 들어간 것은 부모와의 조기 사별, 혹은 당시 조선 팔도를 휩쓸었던 경신대기근의 여파로 추측된다.
최효원은 1638년(인조 16년) 2월 23일에 태어나 35세 때인 1672년(현종 13년)에 세상을 떠났다. 최씨가 세 살 때의 일이다. 또 어머니 남양 홍씨는 1639년(인조 17년) 10월 17일에 태어나 1673년(현종 14년) 12월 18일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최씨는 네 살 때부터 형제들과 함께 고아가 된 것이다.
오빠 최후는 훗날 벼슬이 만호(萬戶)에 이르렀는데 순흥 안씨인 통정대부 안준영의 딸과 혼인했다. 만호는 조선시대 정4품 외관직 무관이다. 실록에서는 그의 집을 만호댁으로 칭하고 있다. 언니 최씨는 부사 서전과 혼인했다.
실록과 정황, 무수리 설을 일축하다
영조는 재위 내내 정적들로부터 어머니의 신분과 관련된 마타도어에 시달렸다. 그래서 《통감강목》에 나오는 ‘이모비야(爾母婢也)’, 곧 ‘네 어미는 종이다.’란 문장을 극도로 싫어했다. 한데 오늘날까지도 숙빈 최씨는 궁궐에서 물이나 길어 나르는 천한 무수리 출신이라는 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숙빈 최씨의 전력에 관하여 신뢰할 만한 내용은 김용숙의 《조선조 궁중풍속 연구》에 담겨있다. 고종의 후궁 광화당 이씨와 삼축당 김씨는 고종으로부터 선대의 숙빈이 침방나인 출신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연잉군이 어머니 최씨에게 침방에 있을 때 무슨 일이 제일 어려웠냐고 묻자 중누비, 오목누비, 납작누비가 다 어렵지만 세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었다고 대답했고, 효심이 깊었던 영조는 그때부터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숙빈 최씨는 1676년(숙종 2년) 7세의 나이로 입궁했다. 보통 궁녀들은 어린 시절 생각시로 입궁하게 되는데 지밀나인은 4~5세, 침방과 수방은 7~8세, 나머지는 13~14세 때 선발되었다. 주로 가난한 평민 출신이나 부모를 일찍 잃은 고아들이 대상이었다. 생각시들은 견습 나인으로서 전문적인 교육을 거친 다음 15세가 되면 관례를 치르고 정식 나인으로 독립했다. 그러므로 숙빈 최씨가 침방나인을 거쳤다면 7세 때 궁에 들어와 인현왕후 폐출 1년 전쯤 내전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정식 나인이 되면 항아님이라 불리고 내명부의 하급 품계를 받는다. 그때부터 단체 생활에서 벗어나 궐내에 독립된 방이 주어지고 각방서리라 하여 밥짓고 빨래하는 하녀를 둘 수 있다. 그러므로 최씨가 인현왕후를 위해 몰래 음식을 차리고 방에서 기도를 드렸다면 무수리가 아니라 나인 신분임에 분명하다. 무수리는 출퇴근하는 잡부로서 궁중에 자신의 방을 가질 수도 없을 뿐더러 한밤중에 불을 켜놓고 기복 행위를 한다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일 최씨가 무수리 출신이라면 인현왕후가 폐서인된 이후 나인에서 잠시 무수리로 전락했을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정사에는 어디에도 숙빈 최씨가 무수리였다는 기록이 없다. 그녀가 실제 무수리였다 해도 임금의 생모를 일컬어 나인들의 시중을 드는 미천한 무수리로 기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인 최씨, 승은을 입다
1689년(숙종 15년) 5월, 숙종은 인현왕후 민씨가 투기를 일삼았다는 빌미로 폐출한 다음 중전과 가까웠던 귀인 김씨 역시 폐서인하여 사가로 내쫓아 버렸다. 이듬해인 1690년(숙종 16년) 6월에는 원자 이균을 세자로 책봉하고, 10월에는 희빈 장씨를 중전으로 책봉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역사에 숙빈 최씨가 등장한다. 이문정의 《수문록(隨聞錄)》에는 숙종과 최씨의 조우 장면이 드라마틱하게 그려져 있다.
어느 날 밤 숙종은 지팡이를 짚고 궁궐 안을 거닐다가 불빛이 새어나오는 궁녀의 방을 엿보았다. 그 안에서는 한 나인이 성찬을 차려놓고 상 아래에서 손을 모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임금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까닭을 물었다. 깜짝 놀란 나인이 부복하고 대답했다.
“저는 중전마마의 시녀였는데 평소 분에 넘친 총애를 받았습니다. 내일이 그분의 탄신일인데 서궁에 유폐된 처지라 수라는커녕 조석으로 거친 음식이 고작일 것입니다. 내일은 또 누가 그분을 대접하겠습니까. 그 일을 생각하니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당신께서 좋아하는 음식을 마련했지만 바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소녀의 방에 진설하고 정성이라도 전해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숙종은 비로소 폐비 민씨의 생일이 내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궁에서 쫓겨난 지 4년째 되던 해의 일이었다. 희빈 장씨에 대한 총애와 서인에 대한 반감이 어우러지면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돌이켜보니 너무 지나쳤다. 문득 숙종은 인현왕후가 그리워졌다. 또 잊지 않고 옛 주인을 섬기는 나인의 정성이 가상했다.그때부터 숙종은 그녀를 가까이했다.
기실 이런 상황이 낭만적으로 보이기도 하겠지만 최씨가 궁궐 안에서 폐비 민씨를 위해 정성을 드린 행위는 지극히 순진하고 위험한 짓이었다. 그런데 전화위복으로 숙종의 눈에 띄어 승은까지 입게 되었으니, 행운도 이만저만한 행운이 아니었다.
어쨌든 위와 같은 정황으로 미루어 본다면 중궁전 나인이었던 최씨는 20세 때인 1689년(숙종 15년) 5월 기사환국으로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되면서 궁에 남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692년(숙종 18년) 4월 22일 밤, 23세의 최씨는 인생의 대전환점을 맞이했던 것이다.
중전 장씨에게 미움을 받다
그 무렵 중전 장씨의 앞날은 탄탄대로였다. 숙종의 총애는 변함없었고 아들 이균은 세자로서 차기 국왕을 예약해두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등장한 최씨의 존재는 장씨의 심사를 뒤틀리게 했다.
그녀의 나이 33세, 숙종을 홀렸던 경국지색의 미모도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었다. 장미꽃은 꽃잎이 지고 나면 가시만 남는 법이다. 《수문록》에서는 중전 장씨가 회임한 어린 최씨를 잡아다 심하게 매질한 뒤 독 안에 가두었다가 숙종에게 들켜버린 일화를 전하고 있다.
숙종은 베개에 기대어 잠깐 조는 사이에 꿈을 꾸었다. 신룡이 나타나 땅 속에서 나오려고 하다가 나오지 못하고 가까스로 머리 뿔을 드러낸 채 울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잠에서 깨어난 숙종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중전의 침방으로 가서 두루 살펴보았지만 이상한 것이 없었다. 문득 담장 밑을 보니 큰 독이 엎어져 있는 것을 보고 장씨에게 물었다.
“저 독은 어찌하여 엎어져 있느냐?”
“빈 독은 본래 뒤집어 놓습니다.”
기이한 느낌이 든 숙종은 내관에게 명해 독을 바로 세우게 했다. 그러자 그 안에서 결박당한 여인이 나타났다. 깜짝 놀라 살펴보니 지난 밤 가까이 한 나인이었다. 그녀는 온몸이 피에 젖어 있었는데 곧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았다. 왕은 급히 밧줄을 풀어주고 약물을 입에 흘려 넣은 다음 미음을 먹였다. 한식경이 지난 뒤에야 그녀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왕은 그녀를 정침에 딸린 방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구호하게 했다. 그 덕분에 최씨는 회생했고 뱃속의 아이도 무사했다.
이런 야사의 진위야 어쨌든 간에 중전 장씨는 자신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인현왕후 민씨가 보여주었던 국모로서의 교양과 덕성을 갖추지 못했다. 게다가 500명이 넘는 내명부 여인들을 승복시킬 만한 리더십도 없었다. 그 때문에 임금은 차츰 그녀를 멀리하게 되었고, 젊고 순종적인 최씨에게 더욱 마음이 쏠렸다.
익을수록 고개 숙이다
1693년(숙종 19년) 숙종은 최씨가 회임했음을 알고 종4품 숙원(淑媛)의 첩지를 내렸다. 입궁한 지 17년 만에 후궁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그해 10월 6일 최씨는 첫째 아들 영수를 낳았지만 안타깝게도 2달 만에 죽고 말았다.
그 무렵 권토중래를 노리던 서인들은 남인들이 후원하는 중전 장씨를 비하하는 참요를 지어 장안에 퍼뜨렸고,김만중은 한글소설 《사씨남정기》를 지어 간접적으로 장씨를 공격했다. 이런 서인들의 책동에 대하여 남인들은 나름대로 대응책을 모색했지만 승부의 열쇠를 쥔 숙종의 마음이 장씨로부터 숙원 최씨에게 옮겨갔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 무렵, 숙종은 숙원 최씨의 마음씀씀이에 반해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를 찾았다. 《수문록》에 따르면, 어느 날 숙종이 농으로 “너를 중전의 자리에 앉히겠다.”고 말한 다음 잠이 들었다. 그러다 곁이 허전해서 깨어 보니 최씨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하고 밖을 내다보니 최씨가 눈 위에 엎드린 채 기절해 있었다. 깜짝 놀란 숙종이 재빨리 안아다가 몸을 녹여 준 뒤 이유를 물어보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천녀는 전하의 말씀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그와 같은 최씨의 처신은 숙종에게 커다란 안정감을 주었다. 아름답지만 가시가 잔뜩 박혀 있는 중전 장씨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최씨는 다른 후궁들에게도 항상 겸손한 태도를 취했고, 자신을 모시는 궁녀들에게 다정하게 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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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가 복위된 1694년(숙종 20년) 6월 2일 숙종은 재차 회임한 숙원 최씨에게 종2품 숙의(淑儀)의 첩지를 내렸다. 그해 9월 20일 최씨는 창덕궁 보경당에서 둘째 아들 연잉군 이금을 낳았다. 숙종은 몹시 기뻐하며 아기에게 ‘양성헌(養性軒)’이란 호를 내리고 친히 수결까지 해 주었다. 또 호산청에서 최씨의 출산을 도운 환관과 의관들에게 내구마를 상으로 주었다. 이는 다른 후궁들이 출산하면 어주를 내리던 것과는 격이 다른 포상이었다. 1695년(숙종 21년) 6월 8일, 숙종은 최씨를 종1품 귀인(貴人)으로 승격시켰다. 1698년(숙종 24년) 7월 7일 최씨는 셋째 아들을 낳았지만 사흘 만에 숨이 끊어졌다.
1699년(숙종 25년) 10월 23일, 숙종은 그녀를 내명부 최고의 품계인 정1품 빈(嬪)으로 승격시켰다. 입궐한 지 20년 만에 맞이한 경사였다. 그때 최씨는 만호 직위에 있던 오라버니 최후를 퇴임시킴으로써 구설수를 피해갔다. 권모와 궤계가 난무하던 시절이라 자칫하면 연잉군이 당쟁의 표적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연잉군에 대한 교육은 철저했다.
그 덕에 연잉군은 겨우 걸음마를 배웠을 때도 숙종에게 나아가면 반드시 무릎을 모아 앉았고, 물러가라는 명 없이는 하루해가 다 가더라도 어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그때 숙빈 최씨는 연잉군이 오래 꿇어앉느라 발이 굽을까 염려하여 넓은 버선을 만들어서 힘줄과 뼈를 펼 수 있게 해주었다.
명철보신의 삶을 갈무리하다
1701년(숙종 27년) 8월 인현왕후 민씨가 세상을 떠나자 숙빈 최씨는 그 동안 희빈 장씨가 행해왔던 흉측한 저주의식을 숙종에게 낱낱이 고했다. 이에 분개한 숙종은 내관들에게 취선당 일대를 수색하여 저주의 실체를 확인한 다음 장씨 일문을 척살하고 희빈 장씨까지 사사했다. 이른 바 무고의 옥이었다. 이어서 숙종은 향후 후궁이 왕비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법을 고쳐버렸다.
그 후 숙종의 빈 마음을 채워준 사람은 숙빈 최씨였지만 그녀는 새로운 법제에 따라 중전이 될 수 없었다. 1702년(숙종 28년) 숙종은 세 번째 계비로 소론인 경은부원군 김주신의 딸 인원왕후 김씨를 맞이했다. 최씨로서야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았겠지만 새로운 중전에게 예를 다했으므로 두 여인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후 서인 내부의 정쟁에서 승리한 노론은 희빈 장씨의 소생인 세자가 즉위할 경우 과거 연산군처럼 생모의 복수에 나설 것을 우려하여 연잉군으로 세자를 교체하고자 했다. 그 첫걸음으로 노론은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청하여 관철시켰다. 그 과정에서 자칫 실수라도 하게 되면 빌미를 잡아 끌어내릴 요량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숙빈 최씨는 일체의 정쟁에 간여하지 않고 현모양처로서의 본분을 지켰다.
연잉군 이금은 1703년(숙종 29년) 관례를 치른 다음 이듬해인 1704년(숙종 30년) 11세의 나이로 진사 서종제의 딸과 혼인했다. 후궁의 아들이나 딸이 혼인을 하면 궐 밖에 기거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숙종은 호조에 명해 저택을 새로 구입하게 했지만 연잉군을 곁에 두고자 했으므로 차일피일 출합이 미루어졌다.
일찍이 숙종은 숙빈 최씨의 사제로 과거 광해군의 잠저였던 이현궁을 하사했는데 신료들로부터 후궁이 쓰기에 너무 호화롭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러자 숙종은 1711년(숙종 37년) 이현궁을 환수하고 추후에 연잉군의 사가인 창의궁에서 함께 살라고 명했다. 최씨가 주변의 손가락질을 받지 않게 하려는 세심한 배려였다.
1712년(숙종 38년) 2월 12일, 19세가 된 연잉군은 궁궐에서 나와 창의궁으로 들어갔다. 혼인한 지 8년 만의 독립이었다. 그때부터 연잉군은 훗날 왕세제로 책봉될 때까지 10여 년을 잠저에 머물면서 일반 백성과 어울렸다. 훗날 영조가 서민들의 삶을 잘 어루만져줄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경험 때문이었다.
숙빈 최씨는 예정대로 아들과 함께 창의궁에 살면서 종종 입궐하여 숙종을 모셨다. 최씨는 1716년(숙종 42년)부터 깊은 병을 앓았는데, 궁 밖으로 나오면 왕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겨서 조금만 차도가 있어도 곧바로 대궐로 들어갔다.
그 후 최씨는 숙종 말기 연잉군을 세자로 추대하려는 노론과 경종을 보위하려는 소론 간의 치열한 갈등을 지켜보면서 조용히 말년을 보냈다. 숙종은 그녀의 병세가 위중해지자 궁궐 출입을 금하고 사제에서 요양하도록 했다. 하지만 숙빈 최씨는 결국 병을 이기지 못하고 숙종이 죽기 2년 전인 1718년(숙종 44년) 3월 9일 창의궁 서별실 동익각에서 4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국법과 효성 사이
어머니 숙빈 최씨의 상례를 치르며 연잉군은 부왕 숙종과 은밀한 갈등을 겪었다. 본래 후궁 소생의 왕자들은 모두 중궁전 왕비의 아들로 입적된다. 그러므로 숙빈 최씨는 연잉군의 사친(私親), 즉 생모일 뿐이었다. 그런 까닭에 연잉군은 조심스럽게 상례 절차를 지켰지만 몇 가지 실수를 저질러 숙종의 질책을 받았다.
첫째, 발상 때 머리를 풀어헤치는 피발(披髮)을 한 점이었다. 이는 왕자가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둘째 생모를 위해 최복(衰服)을 입은 점이다. 최복이란 왕세자가 입는 거친 생포로 만든 상복이다. 왕실의 예법에 의하면 왕자는 생모의 상례에 최복을 입을 수 없었던 것이다.
관리들의 비협조도 그를 괴롭혔다. 최씨의 시신을 입관하는 날 관재가 들어왔는데 재질이 형편없었다. 화가 난 연잉군이 여러 차례 퇴짜를 놓았지만 고쳐지지 않았다. 결국 장례를 담당하는 귀후서의 담당자들을 잡아 가둔 뒤에야 제대로 된 관재가 납품되었다. 연잉군은 그때 인심의 모질고 사나움이 참으로 통탄스럽다며 분개해 마지않았다.
그 와중에 아픔이 배가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상중이던 4월 8일 새벽 연잉군의 어린 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머니에 이어 딸까지 잃은 연잉군의 심사는 통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연잉군의 심사를 더욱 참혹하게 긁은 것이 묘지 문제였다.
최초에 장지를 석관동 묵장산으로 정했는데 숙종이 왕릉 터로 표를 해둔 곳이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양주 신원리에 묘터를 잡았는데 산주인이 거부해서 쓸 수가 없었다.
수소문 끝에 경기도 광주의 세동에 터를 잡았지만 명선공주와 명혜공주의 묘소 경내라는 이유로 불허되었다 이어서 양재동에 장지를 잡고 산 주인과 매매 계약까지 맺었는데, 숙종은 또 다시 그곳에서 태종의 헌릉이 보인다는 이유로 재가해주지 않았다.
생전에 숙빈 최씨가 아무리 왕의 총애를 받았을지라도 정해진 예법과 절차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그로 인해 연잉군이 겪은 마음고생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렇듯 수차례의 실패 끝에 연잉군은 지관 목호룡과 김원명 등의 도움을 받아 경기도 양주군 고령동 옹장리를 장지로 확정했다. 그렇게 해서 숙빈 최씨의 유해가 묻힌 곳이 소령원이다. 소령원은 옛날에 한 지관이 ‘금계가 울며 활개를 치니 왕기가 옹장리에 서려 있구나.’라고 읊었다는 명당이었다. 당시에 그려진 〈소령원도〉와 〈소령원화소정계도〉, 〈묘산도〉 등 네 종은 현재 보물 제15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후 고단한 경종 시대를 거쳐 보위에 오른 영조는 제일 먼저 어머니 숙빈 최씨에 대한 추숭을 서둘렀다. 영조는 숙종의 정비인 인원왕후 김씨의 아들로 입적되어 즉위했으므로 국법에 따라 생모 최씨의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국조오례의》에 국왕의 사친(私親, 친족)에 대한 제사는 국가 의례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1724년(영조 즉위년) 국상에 따른 조정의 공식 애도 기간인 공제(公除)가 끝난 뒤 이진검의 주청에 따라 숙빈 최씨의 사당을 세우기로 하고 한양 북부 순화방에 있는 청릉군의 아들 이언형의 집을 구입했다. 오늘날 청와대가 있는 바로 그 자리다. 경복궁 북쪽 산기슭 아래 숙빈의 사당인 숙빈묘가 완성된 것은 1725년(영조 1년) 12월 23일이었다. 영조는 또 양주 고령에 있는 숙빈 최씨의 묘소 입구에 신도비를 세웠다. 비석은 귀부의 길이만 468cm에 높이는 104cm에 달할 만큼 거대한 것이었다.
1734년(영조 10년) 2월 18일, 영조는 외할아버지 최효원을 영의정으로, 외할머니 남양홍씨를 정경부인으로 추증했다. 그해 6월 25일에는 숙빈 최씨의 사당과 무덤의 호를 높여 묘호를 ‘육상(毓祥)’이라 하고, 묘호는 ‘소령(昭寧)’이라 했다. 1753년(영조 29년) 6월 25일, 영조는 숙빈 최씨에게 ‘화경(和敬)’이란 시호를 올린 다음 묘(廟)는 궁(宮)으로, 묘(墓)는 원(園)으로 하는 새로운 궁원제도를 성사시켰다. 이에 따라 숙빈 최씨 묘인 소령묘는 ‘소령원’으로, 사당인 육상묘는 ‘육상궁’으로 승격되었다.(다음 백과 한국사 인물 열전에서 복사해 옴. 숙빈 최씨 - Daum 백과)
아래의 사진들은 문이 잠겨 있어서 들어가보지 못하고 조선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 묘 소령원 (daum.net)에서 복사해 온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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