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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서삼릉 21-07-28 본문
서삼릉(西三陵)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희릉, 효릉, 예릉의 세 능(三陵)이다.
1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서삼릉(西三陵)은 희릉(禧陵), 효릉(孝陵), 예릉(睿陵)의 3기의 능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종 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이 처음 들어선 이후 인종과 인종비 인성왕후의 무덤 효릉, 철종과 철종비 철인왕후의 무덤인 예릉이 조성되면서 3릉이 한양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삼릉'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삼릉에는 3기의 왕릉 이외에도 3기의 원과 1묘,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7기, 태실54기가 자리 잡고 있다. 166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죽자 소현세자를 이곳에 안장하고 소현묘(昭顯廟)라고 칭하였으나 1870(고종 7)에는 소경원(昭慶園)으로 개호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조선왕실의 태실, 왕자묘, 후궁묘, 공·옹주묘가 현재의 위치로 집결되었으며, 해방 이후에 명종 후궁 경빈 이씨의 묘 외 6기의 묘를 옮겨왔다. 1944년에는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묘인 효창원(孝昌園)이, 1949년에는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장남 의소세손의 묘 의령원(懿寧園)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1969년에는 성종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가 서삼릉으로 옮겨왔다.
서삼릉 능역에는 의친왕과 의친왕의 모친 덕수 장씨의 묘도 있었으나 1996년 의친왕묘가, 2009년엔 귀인 장씨(의친왕의 모친)의 묘가 서삼릉에서 홍유릉 경역으로 천장하여 서삼릉은 현재의 3릉 3원 1묘 및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7기, 태실 54기의 구성을 이루게 되었다.
- 희릉(禧陵)은 조선 제11대 왕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능이다.
- 효릉(孝陵)은 조선 제12대 왕 인종(仁宗)과 정비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의 능이다.
- 예릉(睿陵)은 조선 제25대 왕 철종(哲宗)과 정비 철인왕후(哲仁王后) 김씨의 능이다.
- 회묘(懷墓)는 폐비 윤씨의 묘이다.
- 소경원(昭慶園)은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의 원이다.
- 의령원(懿寧園)은 사도세자의 장남 의소세손의 원이다.
- 효창원(孝昌園)은 정조의 장남 문효세자의 원이다. 1786년(정조 10년) 고양 율목동(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 효창묘(孝昌墓)를 조성하였는데, 1870년(고종 7년) 효창원(孝昌園)으로 격상하였고,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5년 5월에 현 위치로 이장하였다.[2]
- 후궁묘의 빈·귀인 묘역에 조선 제22대 왕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 원빈 홍씨, 화빈 윤씨를 포함한 후궁의 묘 16기가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옮겨온 곳이다. 비공개 지역으로 사전에 공개제한지역 출입신청을 해야 관람할 수 있다.[3]
효릉과 소경원, 후궁묘역은 비공개 지대이다.
(아래는 조선왕을 홈페이지에서 복사해 왔다.)
1.희릉禧陵(중종비 장경왕후)
위치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능의 형식 :단릉
능의 조성 :1537년(중종 32)
능의 구성
희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두 번째 왕비 장경왕후 윤씨의 단릉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무석인은 큼직한 이목구비와 당당하고 위엄 있는 자세로 칼을 쥐고 있으며 갑옷의 조각 수법을 보면 작고 섬세한 문양들을 촘촘히 새기고 있다.
문석인 역시 큼직한 체구에 맞게 홀 역시 크게 묘사되어 있으며 두 손을 노출시켜 맞잡고 있다.
소매의 안쪽으로 작은 소매가 한 번 더 돌아가는 이중 소매를 보여 주고 있다.
능의 역사
1515년(중종 10)에 장경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종의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
러나 1537년(중종 32)에 희릉 조성 당시에서 문제점이 있다는 김안로의 주장에 따라,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였다.
이후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자 중종의 능을 희릉 서쪽 언덕(현 철종 예릉)에 조성하면서 동원이강릉 형식으로 취하고 능호를 정릉(靖陵)이라 하였으나, 1562년(명종 17)에 중종의 능을 현 서울 강남구로 천장하면서 다시 희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장경왕후(章敬王后) 이야기
장경왕후 윤씨(재세 : 1491년 음력 7월 6일 ~ 1515년 음력 3월 2일)는 본관이 파평인 파원부원군 윤여필과 순천부부인 박씨의 딸로 호현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중종 1년(1506)에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 내명부 종2품)로 책봉되었다가, 중종의 첫 번째 왕비가 폐위되면서 이듬해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중종 사이에서 효혜공주와 인종을 낳았으며, 1515년(중종 10)에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경복궁 동궁별전에서 25세로 세상을 떠났다.
2.예릉睿陵(철종과 철인황후)
위치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능의 형식 :쌍릉
능의 조성 :1863년(고종 1), 1878년(고종 15)
능의 구성
예릉은 조선 25대 철종장황제와 철인장황후 김씨의 능이다.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철종장황제, 오른쪽이 철인장황후의 능이다.
예릉은 『국조오례의』와 『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한 마지막 조선왕릉의 형태로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예릉의 문무석인과 석마, 장명등, 석양과 석호 일부는 중종의 구 정릉(靖陵)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으로, 정릉(靖陵)을 서울 강남으로 천장할 때 석물을 묻었다가 다시 꺼내 사용하였다.
장명등은 문석인 가운데가 아닌 능침 앞쪽으로 배치한 것이 특이한데, 이는 조선시대 유일한 배치방법이다.
능의 역사
1863년(철종 14)에 철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64년에 고양 희릉(禧陵) 서쪽 언덕인 구 정릉(靖陵) 자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이후 철인장황후 김씨가 1878년(고종 15)에 세상을 떠나자 예릉에 쌍릉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 이야기
철종장황제(재세 : 1831년 음력 6월 17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 재위 : 1849년 음력 6월 9일 ~ 1863년 음력 12월 8일)은 장조(사도세자)의 손자인 전계대원군과 용성부대부인 염씨의 아들로 1831년(순조 31)에 경행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철종의 할아버지는 은언군으로 장조(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은언군은 정조 즉위 후 역모 사건에 휘말려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1801년(순조 1)에 신유박해사건 때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사사되었다.
이후 순조는 1830년(순조 30)에 은언군의 가족을 방면하였고, 은언군의 아들 전계대원군이 1831년(순조 31)에 철종을 낳았으나, 헌종 즉위 후에 역모사건으로 다시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계속 강화도에서 생활하였다가 1849년에 헌종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순원숙황후의 명으로 순조의 양자로 입적되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처음에는 순원숙황후의 수렴청정을 받아 국정을 운영하였고, 1851년(철종 2)부터 친정(親政)하였다.
헌종 대에부터 시작된 삼정(三政 : 전정, 군정, 환곡)의 문란이 극에 달해 진주민란을 비롯한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삼정이정청(三政釐政廳)이라는 특별 기구를 설치하여 삼정의 문란을 수습하기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안동 김씨의 세도로 인해 국정을 바로 잡지 못하였다.
그 후 1863년(철종 14)에 창덕궁 대조전에서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철종장황제로 추존되었다.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이야기
철인장황후 김씨(재세 : 1837년 음력 3월 23일 ~ 1878년 음력 5월 12일)는 본관이 안동인 영은부원군 김문근과 흥양부부인 민씨의 딸로 1837년(헌종 3)에 순화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851년(철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858년(철종 9)에 원자를 낳았으나 일찍 죽는 비운을 겪었다.
철인장황후는 안동 김씨 출신의 왕비였지만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고, 말수가 적고 성품이 온화하였다고 한다.
철종이 세상을 떠나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명순대비(明純大妃)가 되었으며, 1878년(고종 15)에 창경궁 양화당에서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908년(융희 2)에 철인장황후로 추존되었다.
3. 의령원懿寧園(의소세손)
위치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원의 형식 :단분
원의 조성 :1752년(영조 28), 1870년(고종 7),1949년
원의 구성
의령원은 조선 21대 영조의 손자이자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첫째 아들인 의소세손의 원이다.
의령원은 처음 조선시대에 세손의 묘소 형식에 맞게 조성하여 정자각, 표석,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1949년에 서삼릉으로 이장하면서 원침에 있는 석물과 표석만 옮겨오게 되었다.
표석의 전면과 후면의 글씨는 영조의 친필이다.
원의 역사
1752년(영조 28)에 의소세손이 세상을 떠나자 안현(鞍峴) 남쪽 기슭(현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묘를 조성하였다.
묘소의 이름은 의소묘(懿昭墓)로 하였다가 1870년(고종 7)에 원의 이름을 의령원(懿寧園)으로 격상하였다.
이 후 1949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의소세손(懿昭世孫) 이야기
의소세손(재세 : 1750년 음력 8월 27일 ~ 1752년 음력 3월 4일)은 추존 장조(사도세자)와 헌경의황후(혜경궁) 홍씨의 첫째 아들로 1750년(영조 26)에 태어났다.
1751년(영조 27)에 왕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1752년(영조 28)에 창경궁 통명전에서 3세로 세상을 떠났다.
4.효창원孝昌園(문효세자)
위치 :경기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원의 형식 :단분
원의 조성 :1786년(정조 10), 1870년(고종 7), 1944년
원의 구성
효창원은 조선 22대 정조의 첫째 아들인 문효세자의 원이다.
효창원은 처음 조선시대에 세자의 묘제 형식에 맞게 조성하여 정자각, 비각,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1944년에 서삼릉으로 이장하면서 원침에 있는 석물과 신도비, 표석만 옮겨오게 되었다. 신도비는 입구에 세웠다.
원의 역사
1786년(정조 10)에 문효세자가 세상을 떠나자 고양 율목동(栗木洞)(현 서울 용산구 효창공원)에 묘를 조성하였다.
묘소의 이름은 효창묘(孝昌墓)로 하였다가 1870년(고종 7)에 원의 이름을 효창원(孝昌園)으로 격상하였다.
이후 1944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문효세자(文孝世子) 이야기
문효세자(재세 : 1782년 음력 9월 7일 ~ 1786년 음력 5월 11일)는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로 1782년(정조 6)에 태어났다.
1784년(정조 8)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2년 뒤인 1786년(정조 10)에 홍역이 발병하여 창덕궁 별당에서 5세로 세상을 떠났다.
처음 시호는 온효(溫孝)라 하였다가, 최종으로 시호를 문효(文孝)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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