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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정릉 21-07-21 본문
위키백과에 의하면
정릉(貞陵)은 조선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으로 원래 정동(貞洞)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었던 것을 태종 9년에 옮겼다.
신덕왕후 강씨는 1356년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의 딸로 태어났다.
태조 원년(1392년) 조선의 개국으로 강씨는 음력 8월 7일 조선의 첫 왕비가 되어 현비(顯妃)에 봉해졌으며, 그 당시 이미 태조와의 사이에서 방번, 방석 두 왕자와 경순공주를 두고 있었다.
태조는 신덕왕후 소생의 왕자이자 자신의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고, 정안군 방원 등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태조 5년(1396년) 음력 8월 13일 신덕왕후가 사망하자 태조는 신덕왕후의 능침을 한양도성 안에, 경복궁 서쪽의 황화방에 조성하고, 왕후의 명복을 비는 원찰로써 1년여의 공사 끝에 동왕 6년(1397년) 170여 간 규모의 흥천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2년 후 정안군 방원이 주도한 무인정사(제1차 왕자의 난)로 신덕왕후 소생의 왕자와 경순공주의 남편으로 태조의 부마였던 이제까지 살해당한다.[1]
정종의 양위로 즉위한 태종은 신덕왕후를 후궁의 지위로 격하시켰다. 태종 8년(1408년) 태조가 사망하고 이듬해에는 정릉을 한양도성 밖 양주 남사아리 경좌 언덕(현재의 서울시 성북구)으로 옮기게 하였으며, 명 사신의 객관을 수리할 부재를 충당하기 위해 정릉의 정자각을 헐고,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없앴다.
동왕 10년(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릉의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게 하기도 하였다.[2]
현종 10년(1669년)에 이르러 송시열의 요청으로 신덕왕후는 태조의 정비(正妃)로 인정되어 종묘에 왕후의 예로써 모셔졌으며, 정릉 역시 복원되었다. 봉분 앞의 장명등은 태조 당대의 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나머지 석물은 모두 현종 때에 신덕왕후가 종묘에 복권되고 능침을 재조성할 때 마련된 것이다.
고종 광무 3년(1899년) 신덕왕후가 신덕고황후로 추존되고 이듬해에 옛 표석을 갈아 대한신덕고황후정릉비를 세웠다.
정릉은 매표소를 지나면 왼편에 재실이 있고 재실에서 나와서 좌회전하면 능이 있다.
정릉貞陵(태조비 신덕황후)
위치 :서울 성북구 아리랑로 19길 116
능의 형식 :단릉
능의 조성 :1409년(태종 9), 1669년(현종 10)
능의 구성
정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두 번째 왕비 신덕고황후 강씨의 능이다.
단릉의 형식으로, 능침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를 배치하였다.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만이 조성당시의 것이며 나머지 석물은 현종 대에 다시 조성하였다.
장명등은 고려시대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의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높다.
능침아래에는 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있고, 일반 조선왕릉과 달리 직선축이 아닌 자연 지형에 맞추어 절선축으로 조성되었다.
진입공간에 금천교의 모습은 우리나라 자연형 석교의 조형기술을 볼 수 있으며 재실 양 옆으로 서 있는 느티나무의 보호수도 살펴 볼만한 가치 있는 역사경관이다.
능의 역사
1396년(태조 5)에 신덕고황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취현방(현 영국대사관 근처)에 정릉을 조성하고,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조성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한 후 태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정릉은 푸대접을 받기 시작하였다.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집을 짓는 것을 허락하였고, 정릉이 도성 안에 있다는 이유로 사을한산(현 정릉)으로 천장하였다.
이 후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과 난간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하도록 하였다.
민묘나 다름없었던 정릉은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에 왕릉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 이야기
신덕고황후 강씨(재세 : ?년 ~ 1396년 음력 8월 13일)는 본관이 곡산인 상산부원군 강윤성과 진산부부인 강씨의 딸로 태어났다.
강씨집안은 고려의 권문세가로서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향처(鄕妻,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와 경처(京妻, 서울에서 결혼한 부인)를 두는 고려의 풍습에 따라 신덕고황후는 태조의 경처가 되어 2남(무안대군 방번, 의안대군 방석) 1녀(경순공주)를 낳았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의 향처 한씨가 이미 조선 개국 전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신덕고황후가 조선 최초로 왕비(현비)로 책봉되었다.
태조 재위 시절 자신의 둘째아들(의안대군 방석)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등 지지기반을 닦았으나 이는 후에 왕자의 난의 씨앗이 되었다.
1396년(태조 5)에 이득분의 사저에서 세상을 떠났고, 1899년(광무 3)에 신덕고황후로 추존되었다.
태조는 신덕고황후를 극진히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그들이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계기에 대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의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매우 말라 우물을 찾았다고 한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아리따운 그 고을의 처자에게 물을 청하였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을 띄워 그에게 건네주었다.
태조가 버들잎을 띄운 이유를 묻자 처자는 “갈증이 심하여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태조는 그녀의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하여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정릉의 원찰인 흥천사에 왔다.
흥천사는 공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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