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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산군묘 21-07-23 본문
한 때는 왕이었던 남자 연산군의 묘는 광해군의 묘에 비해서는 잘 조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연산군을 위한 변명'이란 책을 쓴 신동준에 의하면 연산군은 그렇게까지 나쁜 폭군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중종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연산군을 사실 이상으로 나쁘게 평가했다는 주장이다.
위키백과에 의하면
연산군묘(燕山君墓)는 조선 제10대 연산군(1495∼1506 재위)과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 愼氏)(1476 ∼ 1537)의 무덤이다.
중종 8년(1513년)에 조성되어, 1991년 10월 25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62호로 지정되었다.
왕 또는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고 하지만 연산군은 그 지위가 군(君)으로 강봉되었기 때문에 묘(墓)라 하였다.
그 후 중종 7년(1512) 12월 부인 신씨가 상소하여 묘를 강화에서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선영(先塋)이며 연산군의 사위와 딸의 무덤이 있는 양주군 해등면 원당리(현 도봉구 방학동)로 이장하기를 청하여, 이듬해(1513) 2월 왕자군(王子君)의 예(禮)로 이장하고 양주군의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묘의 시설은 대군(大君)의 예우로 장례하여 무덤, 곡장(曲墻), 묘비(墓碑) 1쌍, 혼유석(魂遊石) 1쌍, 망주석(望柱石) 1쌍, 장명등(長明燈) 1쌍, 향로석(香爐石) 1좌, 재실(齋室)은 갖추어져 있으나, 병풍석(屛風石), 석양(石羊), 석마(石馬), 사초지(莎草地), 문인석(文人石) 등은 세우지 아니하였다.
연산군의 묘비 앞면에 '연산군지묘(燕山君之墓)'라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무덤이 만들어진 연월인 '정덕팔년이월이십일장(正德八年二月 二十日葬)'이라 새겨져 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축출된 연산군은 모든 왕의 지위를 상실하고 폐왕이 되어서 강화 교동도(현재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귀양을 가게되었고 그 곳에서 31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 당시 연산군이 사망하면서 교동도의 귀양지에 매장되어서 연산군묘가 되었으나 부인 신씨가 중종에게 상소하면서 경기도 양주군 해동면 원당리로 이장하게 되었다.
당시 이 지역은 양주군에서도 다니는 사람이 드물고 민가가 많이 없었던 야산지대로 알려졌으며 연산군의 경우 재위시절 사화를 일으켰던 전적과 더불어서 민생고를 가중시키고 학자들을 붙잡아 귀양을 보내거나 참수를 명령하였고 국고를 탕진하여 연회를 베푸는데 시간을 보냈던 사유로 인하여 사람들의 접근을 멀리하기 위해 사람이 다니기 드물었던 야산지대에 안장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이 곳은 태종의 후궁으로 알려진 의정궁주 조씨의 묘가 있는 곳으로 그 근처에 세종의 차녀인 정의공주의 묘가 있다.
연산군묘 아래 의정궁주의 묘가 함께 안장되어있으며 그 아래로는 연산군의 딸인 휘순공주와 그의 남편이자 연산군 사위인 능양위 구운경의 묘가 있다.
의정궁주는 단종 재위시절인 1454년에 사망했다.(연산군은 1476년생이다.)
그 이후 1960년대에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서 서울특별시 성북구로 편입되어서 성북구 노해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73년에 도봉구의 분리로 현재 도봉구 관할지역이 되었다.
이 지역 일대가 도시화 및 주택가가 들어서게 됨에 따라 주변지역이 많이 변천되었으나 연산군묘는 폭군의 묘이기는 하였지만 국가 사적이었기 때문에 개발에서도 제외되어서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이 주변에는 주택가 및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있다.
또 그 주변지역에 간송 전형필이 서울을 떠나 노해면에서 말년을 보냈던 가옥과 그의 부친과 간송의 묘소가 있다.
역대 조선왕조 임금의 왕릉과는 달리 능이 아닌 묘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조선왕릉들과는 다르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제10대 연산군 · 거창군부인의 연산군묘(燕山君墓)
위치 :서울 도봉구 방학로 17길 46
묘의 형식 :쌍분
묘의 조성 :1454년(단종 2), 1512년(중종 7), 1537년(중종 32)
묘의 구성
연산군묘는 조선 10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소이다.
묘소는 대군묘제로 조성하였다.
쌍분의 형태로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문석인 2쌍,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을 배치하였다.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연산군묘, 오른쪽이 거창군부인묘소로 각 봉분 앞에는 묘표석을 세웠다.
묘소 밑에는 재실이 있다.
같은 묘역 안에는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의 묘소, 연산군의 딸(휘순공주)와 사위(능양위 구문경)의 쌍분이 조성되어 있다.
묘의 역사
1506년(중종 1)에 연산군이 유배지 강화 교동에서 31세로 세상을 떠나, 강화도에 묘소를 조성하였다.
이후 1512년(중종 7)에 거창군부인 신씨가 중종에게 묘소이장을 요청하여 양주 해촌(현 도봉구 방학동)에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 묘소 위쪽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1537년(중종 32)에 거창군부인 신씨가 66세로 세상을 떠나자 연산군묘 왼쪽에 묘를 조성하였다.
- 의정궁주 조씨의 묘소가 연산군묘역에 있는 이유
본래 연산군묘역은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땅이었다.
임영대군은 왕명으로 후사없이 세상을 떠난 두 후궁의 제사를 맡게 되었는데, 한 명은 태조의 후궁 성비 원씨이고, 또 한 명은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이다.
이 후 1449년(세종 31)에 성비 원씨가 세상을 떠나자 먼저 묘를 조성하였고, 1454년(단종 2)에 의정궁주 조씨가 세상을 떠나자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임영대군의 장자 오산군묘가 조성되면서 오산군파에서 묘역을 관리하였다.
1512년(중종 7)에 거창군부인 신씨가 연산군묘의 이장을 요청하여 임영대군의 땅인 현재의 자리에 이장하였다.
임영대군은 거창군부인의 외할아버지로, 임영대군의 첫째사위가 거창군부인의 아버지인 신승선이 된다.
즉, 거창군부인 신씨는 외할아버지인 임영대군의 땅에 연산군묘를 이장한 것이다.
연산군(燕山君) 이야기
연산군(재세 : 1476년 음력 11월 6일 ~ 1506년 음력 11월 6일, 재위 : 1494년 음력 12월 29일 ~ 1506년 음력 9월 2일)은 성종과 폐비 윤씨의 아들로 1476년(성종 7)에 태어났다.
성종에겐 첫 번째 아들이 되는 연산군은 1479년(성종 10)에 생모 윤씨가 폐비되자 정현왕후 윤씨의 손에서 자랐고, 정현왕후를 생모로 알고 자랐다.
1483년(성종 14)에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1494년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 성종의 묘지문을 읽으면서 자신이 정현왕후가 아닌 폐비 윤씨의 소생임을 알고 충격을 받았지만, 왕으로서의 위상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즉위 3년 동안은 별 문제 없이 국정을 운영하였으나, 즉위 4년째인 1498년에 무오사화(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으로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원인이 되어 사림이 피해를 본 사건)로 많은 사람을 죽였고, 다시 1504년에 갑자사화(생모 폐비윤씨의 사사사건을 이용하여 훈구 및 사림파들이 임사홍 중심의 척신파에게 화를 입은 사건)로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무오사화 이 후 정사에 관심을 두지 않아 경연을 폐지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국고가 바닥이 났으며, 잔혹한 형벌로 포악한 성정을 보여 왕으로서의 자질을 잃었다.
결국 1506년에 성희안, 박원종 등의 훈구세력들이 성종의 아들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을 일으켜 성공하게 되자 왕위에서 폐위되었다.
이 후 강화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1506년(중종 1)에 31세로 세상을 떠났다.
거창군부인(居昌郡夫人) 이야기
거창군부인 신씨(재세 : 1476년 음력 11월 29일 ~ 1537년 음력 4월 8일)는 본관이 거창인 거창부원군 신승선과 중모현주 이씨의 딸로 1476년(성종 7)에 태어났다.
1488년(성종 19)에 왕세자빈에 책봉되었고, 1494년에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거창군부인으로 강봉되어 궁 밖 정청궁(貞淸宮)에서 기거하였다. 1537년(중종 32)에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의정궁주(義貞宮主 趙氏) 조씨 이야기
의정궁주 조씨(재세 : ? ~ 1454년 음력 2월 8일)는 본관이 한양인 조뇌의 딸로 태어났다.
1422년(세종 4)에 상왕 태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지만, 곧바로 태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빈으로 책봉되지 못하였다.
이 후 세종은 특별히 의정궁주라는 작호를 내렸고, 1454년(단종 2) 음력 2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연산군의 딸(휘순공주)과 사위(능양위 구문경) 이야기
연산군의 딸 휘순공주는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장녀로 태어나, 휘순공주에 봉작되었다.
501년(연산 7)에 구문경과 결혼하였으며,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작호가 삭탈되었다.
연산군의 사위 능양위 구문경은 본관이 능성인 구수영과 길안현주(세종 아들 영응대군 딸)의 아들로 태어나, 1501년에 능양위가 되었다.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작호가 삭탈되었으며, 반정 이후 구수영이 중종에게 구문경과 휘순공주의 이혼을 주청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조선왕릉 홈피에서 복사해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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