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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헌인릉 21-07-22 본문
위키백과에 의하면
헌인릉(獻仁陵, 사적 194호)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조선조 왕릉이다. 이 곳에는 조선 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인 헌릉, 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능인 인릉이 있다. 1
970년 5월 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94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태종과 세종이 합장된 왕릉이었으나 7대 임금이자 세종의 둘째 아들인 세조가 세종의 능을 이장하자는 추진에 따라 예종 1년 현재의 경기도 여주로 이장하여서 태종의 능만 남았다가 후에 23대 임금인 순조가 안장되면서 현재의 헌인릉이 되었다.
헌릉
헌릉(獻陵)은 태종과 원경왕후를 같은 언덕에 봉분을 달리하여 안장한 쌍릉으로 두 봉분 모두 아래 부분을 병풍석(屛風石)을 둘러 세웠으며, 그 밖으로 각 봉분에 12간의 난간석으로 서로 연결하였다.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4쌍, 상석(床石) 2좌, 망주석(望柱石) 1쌍을 3면의 곡장(曲墻)으로 감싸 안으며 봉분 위의 한 층이 이루어졌다.
그 아래로 한 단 낮추어 중간 층에는 문인석(文人石) 2쌍, 마석(馬石) 2쌍, 팔각형 명등석(明燈石) 2좌가 각 무덤에 설치되었고, 그 한 단 아래에 무인석(武人石), 마석 각 4좌가 아래 층을 이루고 있다.
웅장한 규모로 조선 왕릉중에 가장 크다고 전해진다. 특히 세종의 효심을 읽을 수 있는 배려가 곳곳에 숨어 있다.
승하 후 세종의 묘역도 유언대로 한동안 이곳 지역에 조성되어 있었다.
이렇듯이 헌릉의 석물은 고려시대 현릉·정릉(玄陵·正陵), 조선시대의 후릉(厚陵)과 같은 형태지만 망주석 이외는 각각 하나씩을 더 갖추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셋째 아들이었던 세종은 부친의 능지에 각별한 정성을 보였으며 난간석을 만들만큼 부모님의 화해를 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죽어서도 부모곁에 묻히기를 바랄만큼 애틋한 사랑을 갖고 있었다.
승하하여 18년간 이곳 헌릉의 서쪽편에 모셨다가 예종(睿宗) 원년(1469년)에 지금 경기도 여주의 영릉으로 모셨다.
헌릉에는 쌍봉으로 있는 봉분 언덕 아래에 정자각(丁字閣), 2기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碑閣),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紅箭門)이 있다.
문화재청은 2013년 7월 16일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를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로 지정했다.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보물 제1805호)’는 조선 태조의 다섯 째 아들로 조선왕조 국기를 튼튼히 다졌던 제3대 임금 태종 이방원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비문을 새겨 세운 것으로 1422년(조선 세종 4년)에 세웠다.
이 신도비는 태종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일대기를 담아 세운 비이다.
비문은 변계량(1369~1430)이 지었다.
인릉
인릉은 순조와 순원왕후를 같은 언덕에 합장한 봉분으로서 무덤 아래에 병풍석은 없이 12간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그 주위로 양석과 마석 각 2쌍, 상석 1좌, 망주석 1쌍을 3면의 곡장으로 에워쌌다.
한 단 아래에 문인석과 마석 1쌍, 명등석 1좌를 설치하고, 그 아래에 무인석과 마석 각 1쌍을 배치하였다.
문인석과 무인석의 조각은 사실적으로 새겨져 섬세하고 아름답다.
무덤 언덕 아래에 정자각, 2기의 비석이 있는 비각, 그리고 입구에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 남쪽 도로변에 있는 재실은 당초에는 능역 안에 있었으나, 그 중간 부분이 6·25 이후 농지로 개간되어 서로 떨어져 위치하게 되었다.
1.인릉仁陵(순조와 순원황후)
위치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6-10
능의 형식 :합장릉
능의 조성 :1856년(철종 7), 1857년(철종 8)
능의 구성
인릉은 조선 23대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능이다.
인릉은 같은 봉분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의 형식이다.
우왕좌비(右王左妃)의 형식에 따라 앞에서 봤을 때 왼쪽에 순조, 오른쪽에 순원숙황후를 모셨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비각안에는 두 기의 능표석이 있는데 1기는 조선시대에 세운 조선국 표석(조선국 순조대왕 인릉 순원왕후 부좌‘朝鮮國 純祖大王 仁陵 純元王后 ?左’)이고, 1기는 대한제국시대에 세운 황제국 표석(대한 순조숙황제 인릉 순원숙황후 부좌‘大韓 純祖肅皇帝 仁陵 純元肅皇后 ?左‘)이다.
능침에는 『국조상례보편』의 제도를 따라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렀다.
인릉은 원래 파주에 있었다가 1856년(철종 7)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였는데, 천장 후에 편찬한 『인릉천봉산릉도감의궤』에는 능침 석물을 다시 사용 한 기록이 있다.
다시 사용한 석물은 1469년(예종 1)에 세종의 영릉(英陵)을 천장하고 묻은 구 영릉(英陵) 석물과 1537년(중종 32)에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을 천장하고 묻은 구 희릉(禧陵) 석물이다. 따라서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등 대부분의 석물은 구 영릉과 구 희릉의 석물을 다시 사용 하였고, 일부 석양과 망주석, 석마는 새로 제작하였다.
이는 왕릉 천장으로 드는 국고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치한 것이다.
능의 역사
1834년(순조 34)에 순조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835년(헌종 1)에 파주 교하의 인조 장릉(長陵) 근처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풍수지리상 불길론이 제기되면서 1855년(철종 6)부터 본격적인 천장 논의를 하여 다음해인 1856년(철종 7)에 헌릉 서쪽 언덕인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였다.
그 후 1857년(철종 8)에 순원숙황후가 세상을 떠나자, 인릉에 합장으로 능을 조성하였다.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이야기
순조(재세 : 1790년 음력 6월 18일 ~ 1834년 음력 11월 13일, 재위 : 1800년 음력 7월 4일 ~ 1834년 음력 11월 13일)는 정조와 유비(綏妃) 박씨의 아들로 1790년(정조 14)에 창경궁 집복헌에서 태어났다. 1800년(정조 24)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같은 해 6월에 정조가 세상을 떠나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이 시기에 정순왕후를 비롯한 벽파와 시파가 대립하는 시기였고, 이는 천주교 박해로 이어졌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라고 불리는 대규모 천주교 탄압이 벌어져 정약용 등이 유배당하고 1년 사이에 300명의 교인이 학살당했다.
이 후 경주 김씨의 세도가 잠깐 있었다가,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고 순조가 친정(親政)을 하면서 세도가 약화되었다.
그러나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금 순원숙황후의 아버지인 김조순에게 돌아가고, 이때부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조정의 요직은 외척 중심으로 독점되었고, 척신들 사이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더불어 수해와 전염병 등으로 민심이 피폐해지자 홍경래의 난(1811년) 등 민란이 일어나고 사회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순조는 세도정치를 견제하기 위해 아들 효명세자(문조)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여 수습하려 하였으나 효명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무산되고 말았다.
재위기간 중 『만기요람』, 『홍제전서』등을 간행하였다.
그 후 1834년(순조 34)에 경희궁 회상전에서 45세로 세상을 떠나, 묘호를 순종(純宗)이라 하였다가 1857년(철종 8)에 묘호를 순조로 추존하였고,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순조숙황제로 추존되었다.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이야기
순원숙황후 김씨(재세 : 1789년 음력 5월 15일 ~ 1857년 음력 8월 4일)는 본관이 안동인 영안부원군 김조순과 청양부부인 심씨의 딸로 1789년(정조 13)에 한성부 양생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순원숙황후는 1800년(정조 24)에 있었던 왕세자빈 간택에서,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김조순의 딸, 서기수의 딸, 박종만의 딸, 신집의 딸, 윤수만의 딸이 두 번째 간택에 선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김조순에게 “처음 가마에서 나왔을 때 윗전 어른들이 여러 처자들 중에서도 특별히 그를 가리키면서 저게 뉘집 처자냐고 물으시고 이어 앞으로 오게 하여 한 번 보시고는 상하 모두가 진심으로 좋아하면서, 그런 처자는 처음 보았다고들 하였다.
이 모두가 하늘이 명하신 일이고 하늘에 계신 영령께서 주신 일이며 청음(淸陰, 김상헌), 문곡(文谷, 김수항), 몽와(夢窩, 김창집), 죽취(竹醉, 김제겸)가 쌓아올린 경사인 것이다.
경은 이제 나라의 원구(元舅)로서 처지가 전과는 달라졌으니 앞으로 더욱 자중해야 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글을 하사한 기록이 나와 있다.
이렇게 왕세자빈 간택이 거의 확실시 된 상황에서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외척 김관주 등의 방해로 삼간택에서 탈락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1802년(순조 2) 10월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영조의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서 물러나면서, 순원숙황후의 집안이었던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세도의 틀을 마련하였으나 조정과 사회는 불안정하였다.
1834년(순조 34)에 손자 헌종이 8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하였고, 인척 김조근의 딸을 왕비(효현성황후)로 간택시켰다.
이후 헌종이 세상을 떠나고 장조(사도세자)의 손자인 전계대원군의 아들 원범을 양자로 삼아 왕위를 잇게 하였다.
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인척 김문근의 딸을 왕비(철인장황후)로 간택시켜 세도정권의 절정기를 맞게 하였다.
조선의 왕비 중 최초로 2대를 걸쳐 수렴청정을 한 순원숙황후는 1857년(철종 8)에 창덕궁 양심합에서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대한제국 선포 후 1899년(광무 3)에 고종의 직계 5대 조상 추존으로 순원숙황후로 추존되었다. .
2.헌릉獻陵(태종과 원경왕후)
위치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36-10
능의 형식 :쌍릉
능의 조성 :1420년(세종 2), 1422년(세종 4)
능의 구성
헌릉은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다.
헌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태종,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능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능제이다.
전체적으로 넓은 능역과 확트인 전경, 정자각 중심의 제향공간과 능침공간 사이의 높이 차이 등 조선 전기의 왕릉의 위엄성을 잘 드러내주는 요소를 갖추고 있다.
능침은 모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으며, 병풍석의 면석에는 십이지신상과 영저와 영탁을 새겼다.
문무석인은 각 2쌍씩, 석마, 석양, 석호는 각각 4쌍식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 제도를 계승한 것으로, 조선왕릉 중에서 2배로 석물이 많아 완벽한 쌍릉의 형식을 띄고 있다.
그 밖에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은 5개로 조선 전기의 상설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 정자각, 신도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각에는 1422년(세종 4)에 세운 신도비(보물 제1804호)와 1695년(숙종 21)에 임진왜란으로 손상된 신도비 옆에 증설하여 세운 신도비가 있다.
정자각 북서측에는 소전대가 있는데, 이는 제향 후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조선 전기 태조고황제의 건원릉, 신덕고황후의 정릉, 태종의 헌릉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다.
능의 역사
1420년(세종 2)에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가 왕대비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광주 대모산에 먼저 능을 조성하였다. 원경왕후의 능을 조성할 때 태종은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만들었다.
이후 1422년(세종 4)에 태종이 태상왕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원경왕후의 능 서쪽에 능을 조성하였다.
태종(太宗) 이야기
태종(재세 : 1367년 음력 5월 16일 ~ 1422년 음력 5월 10일, 재위 : 1400년 음력 11월 13일 ~ 1418년 음력 8월 8일)은 태조와 신의고황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로 1367년(고려 공민왕 16)에 함흥 귀주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383년(고려 우왕 9)에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이 되었는데, 조선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한 왕이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왕자로서 정안군에 책봉되었다.
태종은 아버지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지만, 신덕고황후와 정도전 등과 대립하여 왕세자 책봉에서 탈락하였다. 이 과정에서 신덕고황후의 소생인 방석이 왕세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고, 더불어 정도전이 재상 중심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왕자의 사병을 혁파하려 하자, 수세에 몰린 태종은 1398년(태조 7)에 정변을 일으키게 되었다.
(제 1차 왕자의 난, 무인정사) 태종은 신의고황후 소생의 왕자들과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을 제거하고, 왕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도 살해한다.
이 사건을 통해 태조는 둘째아들인 영안군 방과을 왕세자로 책봉하는 교지를 내렸고, 태조가 상왕으로 물러나자 왕세자 방과는 왕위에 올랐다.(정종)
그로부터 2년 후 신의고황후의 소생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불공평한 논공행상으로 태종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가 태종의 넷째 형 회안군 방간으로 하여금 난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이로 인해 회안군과 태종은 개경 시가지에서 무력 충돌을 하게 되었다.(제 2차 왕자의 난, 박포의 난) 이 사건으로 태종이 승리하고, 박포는 사형에 처했으며, 회안군은 유배됨으로써 진정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지위가 더욱 확고해진 태종은 그 해 2월 왕세자로 책봉되고, 11월에 왕위에 올랐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창덕궁을 지었으며, 1405년(태종 5)에 개경에서 한양으로 다시 천도를 하였다.
재위기간동안 중앙제도와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사병을 폐지하여 군사권을 장악,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여 조세 징수와 군역 부과에 활용하는 호패법을 실시하였다.
정치적으로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외척 세력을 견제하는 등 강력한 왕권강화를 이룩하여 조선 왕조의 기반을 닦는데 많은 치적을 남겼다.
1418년(태종 18)에는 장자 양녕대군을 왕세자에서 폐위한 후, 셋째 아들 충녕대군(세종)을 왕세자로 삼았으며, 2개월 뒤에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으로서 군사권을 잡고 여생을 보냈다.
그 후 1422년(세종 4)에 연화방 신궁(창경궁)에서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원경왕후(元敬王后) 이야기
원경왕후 민씨(재세 : 1365년 음력 7월 11일 ~ 1420년 음력 7월 10일)는 본관이 여흥인 여흥부원군 민제와 삼한국대부인 송씨의 딸로 1365년(고려 공민왕 14)에 송경 철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1382년(고려 우왕 8)에 태종과 혼인하고, 조선 개국 후 정녕옹주(靖寧翁主)에 책봉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에서 태종이 정도전 등의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득세할 수 있었던 데에는 원경왕후의 도움이 컸다.
난이 일어나기 열흘 전, 정도전 일파는 왕자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였다.
이 때 사병을 거느린 왕자들은 병사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무기와 군장비를 모두 내놓았어야 했다. 그
러나 원경왕후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얼마간의 사병과 무기를 친정집에 숨겨두었다.
1398년 음력 8월 26일, 당시 태조의 병환이 깊어 왕자들은 근정전 문 밖 서쪽 행랑에 모여 숙직을 하고 있었다.
원경왕후는 집사를 보내 자신이 갑자기 복통이 심하다는 핑계를 들어 태종을 불러내었다.
그 후 태종은 집에 와서 갑옷을 입고 난을 준비하였고, 원경왕후는 친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편, 숨겨둔 사병과 무기를 풀어 태종에게 내주었다.
이로 인해 제1차 왕자의 난은 성공하였고, 태종은 왕위 계승을 위한 수순을 한 차례 밟게 되었다.
이후 원경왕후는 1400년(정종 2)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태종이 즉위하자 왕비(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태종 즉위 후 태종과의 불화가 그치지 않았다.
태종은 권력의 분산과 왕권 강화를 위하여 친족배척의 정책을 쓰는 한편 후궁을 늘려나갔는데, 원경왕후는 이에 크게 불만을 품게 되었다.
특히 태종은 외척세력 견제를 위하여 원경왕후의 남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와 민무휼, 민무회 형제를 제거하면서 원경왕후와의 불화가 극심해졌다.
1418년(태종 18)에 태종이 태상왕으로 물러나고 세종이 왕위에 오르자 후덕왕대비가 되었으며, 1420년(세종 2)에 수강궁 별전에서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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