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한국 외대를 졸업하고 중동을 연구한 사람이다. 이슬람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려고 많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예를 들면 꾸란의 구절들 가운데 서로 상반되는 내용들에 관해 학자들의 견해를 자세히 실었다. 이슬람이 폭력적이라는 세간의 시선에 대해서도 완전히 무시하지 않고 그런 면과 한편 관용적이고 평화적인 면도 설명했다.
마드라사는 모든 학문을 아우르는 종합 대학이 아니다. 종교학과 법학을 가르치고 울라마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기관 이었다. 통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울라마의 사회적 영향력이 필요했던 통치자들은 마드라사를 세우고 운영자금과 생활비를 지원해 울라마의 지지를 끌어내고자 했다. 니잠 알물커가 니자미야 마드라사를 세운 것도 바로 이러한 목적에서 울라마에 대한 지원을 제도화하기 위해서였다.
반대로 중세 이슬람권에서 철학자나 자연 과학자를 양성하고 지원하기 위한 체계적인 제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유력자 개인의 후원에 의존해야 했다. 한정된 자원이 법학과 종교학에 집중되면서 철학과 자연과학은 소외되었다. 실제로 마드라사가 가장 처음 등장했던 이슬람권 동부에서 가장 먼저 과학저술이 감소하기 시작했다는 점은 마드라사의 제도화가 이슬람권 과학의 쇠퇴와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국가의 지원이 법학과 종교학을 가르치는 마드라사에 집중되고 울라마가 통치자와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고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외부의 지원을 받지도 못하고 후학을 양성할 제도적 기반도 없던 자연 과학이 여전히 활력을 유지했다면 그것이 더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토비 E. 하프가 지적하듯이 이슬람권에서는 학자들 사이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토론, 연구, 의견 교환이 일어날 수 있는 제도적 영역이 나타나지 못했고 결국 놀라운 과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근대적 과학이 꼭 발달하지 못했다. 이란 이유에서 압둘라티프 티바위는 마드라사의 등장과 제도화가 철학과 형이 상학에 대한 전통주의적 종교학의 승리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 승리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었다. 이슬람권 내부의 수백 년에 걸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변화가 맞물리면서 나타난 결과였다.
아부 알 후사인 알리 이븐 알잣자르라는 학자는 1576년에 쓴 책에서 거대한 소뿔 위에 있는 세개가 한 뿔에서 다른 쪽 뿔로 옮겨질 때 지진이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에서 이처럼 공통적으로 40이라는 숫자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로렌스 콘라드는 중동 및 고대 그리스 문화권에서 숫자 40이 전통적으로 완성과 성숙을 의미하는 수로 여겨졌다고 설명한다. 까마득한 과거부터 중동 지역에서 존재하던 숫자 40에 관한 이러한 관념이 먼저 유대교에 영향을 미치고 이후 기독교를 거쳐 이슬람에까지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성경과 꾸란에서 나타난 40일과 40년의 언급은 아마도 실제 기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아닌 신학적, 상징적 의미를 내포한 서술에 가까울 것이다.
무함마드가 역사적인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설도 있다.
아랍어로 무슬림은 신에게 복종하는 자, 이슬람은 신에 대한 복종을 의미한다.
우마르가 꾸란 이외의 다른 책은 필요하지 않다고 선언하며 파괴한 것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도서관이라는 설도 있다.
이슬람은 다수파인 순니파와 소수파인 시아파가 있다. 이란은 시아파가 득세하고 있고 다른 나라들에서는 대체로 순니파가 큰 힘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