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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사람
겸재 정선 본문
https://m.cafe.naver.com/ca-fe/web/cafes/antimaker/articles/229674에서 복사한 글

1. 겸재 정선의 그림과 사천 이병연의 시의 만남
- '조선 최고의 브로맨스' 겸재와 사천의 필살 '콜라보'

사천 이병연과 겸재 정선의 콜라보 작품인 <경교명승첩> 중 ‘목멱조돈’. 겸재가 양천현감으로 부임한 뒤 첫봄에 바라본 남산(목멱산)의 해돋이(朝暾) 광경을 그렸디. 사천은 ‘새벽 빛 한강에 떠오르니 언덕들 낚시배에 가린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리라’고 읊었다.|간송미술관 소장
“자네와 나는 합쳐야 왕망천이 될텐데(爾我合爲王輞天)
그림 날고 시(詩) 떨어지니 양편이 다 허둥대네.(畵飛詩墜兩翩翩)
돌아가는 나귀 벌써 멀어졌지만 아직까지는 보이는구나.(歸驢己遠猶堪望)
강서에 지는 저 노을 원망스레 바라보네.(초愴江西落照川)”
얼핏 보아도 단순한 남녀의 이별시가 아닌 것 같다.
시에 등장하는 왕망천은 당나라 대시인이자 문인화의 창시자인 왕유(699~759)를 가리킨다. 소동파(1037~1101)는 시와 그림이 모두 능한 왕유를 일컬어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 즉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畵 畵中有詩)”고 극찬했다. 그러고보면 인용한 시는 ‘그림과 시’와 관련된 뭔가 심상치 않은 두 사람과 관계된 내용을 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못말리는 브로맨스
그렇다. 이 시가 언급하는 자네와 나는 겸재 정선(자네)과 사천 이병연(나)이다.
이병연(1671~1751)은 소동파의 표현대로 ‘겸재 자네의 그림과 나(사천 이병연)의 시를 합쳐야 비로소 완전체로 거듭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헤어질 판이니 어찌 슬프지 않겠냐는 것이다. 대체 겸재 정선이 얼마나 멀리 떠났기에 사천 이병연이 저토록 ‘강서에 지는 노을을 원망스럽게 바라본다. 운운’하며 슬퍼하는 것일까. 실상은 반전 그 자체다.
두 사람이 헤어진 것은 1740년이었다. 이병연의 나이는 69살, 정선(1676~1759)의 나이는 64살이었다. 양천 현감에 제수된 정선이 임지로 떠나는 길이었다. 양천이 어디냐. 지금의 서울 양천구이다. 교통이 불편한 조선시대였으니 ‘멀다’ 느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해도 고작 ‘양천 현감’으로 떠나는데 뭘 그리 ‘이별이 원망스럽네. 어쩌네’ 하고 호들갑을 떨었을까.
두 사람의 특별한 ‘브로맨스’를 모른다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5살 터울의 불알친구
두 사람은 시쳇말로 불알친구였다.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서울 서촌에서 나고 자랐다. 사실 서촌은 조선후기에도 권문세가들이 모여살면서 이른바 경화세족(京華世族)을 이루고 있었다. ‘경화’는 ‘번화한 서울’을 뜻하며 ‘세족’은 ‘여러 대에 걸쳐 자리잡은 가문’을 뜻한다.
그 중 노론계 인사들인 김창협·감창흡·김창업 형제가 중심인물이 되어 형성한 문인집단이 있었다. 겸재와 사천도 이 동네에서 김창흡(1653~1722)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경화세족들과 교유하며 지냈다. 이병연이 정선보다 5살 위였지만 평생지기로 지냈다.
아닌게 아니라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5살 차이는 그냥 동무로 지냈던 것 같다. 이항복(1556~1618)과 이덕형(1561~1613)이 대표적이다. 이덕형이 5살 어리지만 이항복과 역사에 길이 빛날 ‘오성과 한음’ 일화를 남기지 않았던가.


<경교명승첩> 중의 ‘행호관어(杏湖觀漁)’.
초여름 행주산성 부근에서 웅어(갈대고기)를 잡는 어부의 모습을 그렸다.
사천이 붙인 시 또한 생생하고 역동적이다. ‘늦봄에는 복어국, 초여름엔 웅어회, 복사꽃 가득 떠내려 올 때 행호 저편에 그물치기 바쁘구나.’ |간송미술관 소장
■시는 사천, 그림은 겸재
겸재의 화명(畵名)은 언급할 필요가 없다. 18세기 인물들의 이야기를 모은 이규상(1727~1799)의 <병세재언록>을 보라.
“정겸재(정선)은 그림의 거장이다. 생동감이 넘치고 원기가 있었으며 붓놀림은 거친듯 해도 화폭 가득찬 그림이라 해도 한 점의 붓 흔적이나 먹자국도 없었다.”
이규상은 “겸재의 그림은 당대 으뜸이었고 원기 뿐 아니라 그 원숙함도 당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절친 사천의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만약 사천이 다시 태어난다면 무척 억울해 했을 것이다.
사천 이병연은 ‘시의 천재’, ‘시의 화신(化身)’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예를들어 앞서 인용한 <병세재언록>은 겸재 정선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뒤 슬쩍 사천 이병연 이야기를 끼워놓는다.
“당시에 시로는 이사천, 그림으로는 정겸재 아니면 쳐주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머리털 한 올, 수염 한 터럭까지도 모두 시(詩)다
목은 이색의 후손인 사천은 당대의 ‘훈남 시인’이었다. “큰 키에 수염이 훌륭했으며 용모가 둥실하고 위엄이 있었다”는게 <병세재언록>의 인물평이다.
“여느 시인의 시와 달랐다. 이병연은 시에 관한한 천성을 타고났으며, 무게가 있고, 시구(詩句) 또한 기이하고 웅장했다. 우리나라에 시의 거장이 여럿 있으나 삼연 김창흡 이후에는 사천(이병연) 한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 이름이 넘쳐 흘러 어린아이들이나 종들조차 ‘이삼척시’라 했다. 삼척은 이병연이 고을살이 한 곳이다.”
코흘리개 어린아이나 무지랭이 천민들까지 ‘사천 이병연의 시’를 알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병연을 둘러싼 당대의 평론은 눈이 부실 정도로 극찬 일색이다. 실학자 이덕무는 이병연의 시 몇 편을 소개하면서 “영조 임금이 즉위한 뒤 50년 이래 시인이라면 마땅히 사천 이병연을 쳐야 한다”고 극찬했다.
“중국 문사들은 이병연의 시를 보고는 ‘당·송대의 작품을 능가한다’고 극찬했다.” (<청장관전서> ‘청비록’)
문인 이우신(1670~1744)은 “이병연의 시골(詩骨·시인의 골격)은 흠 하나 없는 옥과 같아서 머리 털 한 올 수염 한 터럭(一髮一毛摠是詩)이 모두 시”라고 극찬했다.
그야말로 이병연의 몸 그 자체가 한 편의 시(詩)라는 말이다. 시의 화신(化身)이라는 얘기가 아닌가. 이우신의 다음 표현이 걸작이다.
“시를 탐해 고질병이 되었다고 비웃지 마라.(寞笑耽詩成痼癖) 그대 보면 나도 모르게 콧수염 뜯으며 시를 읊나니(對君不覺動吟자)….” (<사원수창록>)


사천의 시 500편을 모은 ‘사천시초’. 사천 이병연은 시의 화신으로 일컬어질만큼 천재시인이었다. 평생 1만3000~3만수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시를 지을때는 수염을 쥐어뜯는 버릇이 있어서 시를 다 짓고나면 수염이 다 뜯겨져 나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
■시 짓느라 콧수염이 남아나지 않았다
이병연과 함께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콧수염을 뜯게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사천은 ‘시(詩) 덕후’였다. 별다른 일이 없으면 새벽에 여러 수를 지었다. 사천이 지은 시가 1만3000수가 넘었다.” (<병세재언록>)
그러나 사천의 족인(族人)인 이윤영(1714~1759)과 안석경(1718~1774) 등은 “사천이 지은 시가 3만수가 넘는다는 사실을 직접 확인했다”고 했다.(이윤영의 <단릉유고>, 안석경의 <삽교만록> 등)
1만3000수든 3만수든 지독한 다작시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많은 시를 짓기만 했을 뿐 선집은 <사천시초> 딱 1책(2권)에 담긴 시 500여 수 뿐이다.
그런데 시를 지을 때의 버릇이 독특했다. 아니 치열했다고 표현해야 옳겠다. 신정하(1680~1715)의 평가가 흥미롭다.
“시를 지을 때 심사숙고하고 끈질기게 훑어보았다. 시 한 구절을 만들 때마다 반드시 수염 서너 터럭을 만지작거려 잘라내고서야 그만 두었다. 이병연의 시는 빼어났지만 수난을 당한 수염은 길지 않았다. 일찍이 문을 닫은채 수십일 동안 시를 짓느라 끙끙 댔는데, 드디어 문밖으로 나온 얼굴을 보니 수염이 짧아져 있었다. 사람들은 의당 그러려니 하고는 ‘웬 일이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저 상자에 그가 짓은 시가 가득 쌓였으리라 여길 뿐이었다.” (<서암집>)
시의 천재가 수염이 다 뽑힐 정도로 치열하게 시를 지었다니 그렇게 나온 시가 얼마나 빼어났겠는가. 그래서 나온 세간의 평가가 ‘그림은 겸재(정선), 시에는 사천(이병연)’이다.
그야말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두사람이다. 당대 저명문사들의 논평은 한결같다. ‘좌사천(이병연의 호). 우겸재(정선의 호)’라는 것이다. 김창업(1658~1721)과 조현명(1691~1752)의 시를 보라.
“정선의 그림과 이병연의 시, 금강산이 있고부터 이런 기이함은 없었네.” (김창업의 <노가재집>)
“이병연의 아름다운 시와 정선의 그림, 좌우에서 맞아주며 주인노릇하네.” (조현명의 <귀록집>)
■친구와 함께 금강산 여행
“겸재 자네, 금강산 한번 구경하지. 내가 마침 여기(금화) 있으니까….”
1712년 당시 금강산 길목인 강원도 금화현감이었던 사천 이병연은 겸재에게 ‘금강산 구경’을 제안했다. 겸재는 이미 1년 전(1711년) 스승인 김창흡 등과 함께 금강산을 다녀온 바 있었다. 그러나 천하명산 금강산 여행이라면 언제고 불감청이언정고소원이었다.
겸재는 여행 뒤 금강산의 모습을 30여폭의 그림에 담아 이병연에게 준다. 이병연은 두 사람의 스승인 김창흡의 제(題·품평)를 받고, 조유수와 이하곤, 신정하 등에게도 시를 붙이게 해서 <해악전신첩>을 꾸민다. 조선판 ‘콜라보 화첩’이었으니 이것이 바로 <해악전신첩>이다. 이 화첩은 전해지지는 않지만 여러 문집에서 화첩에 붙인 시들을 찾아볼 수 있다.
■‘씩 웃더니 내 손에서 붓을 빼앗아 그림 그리더라’
금강산 여행 도중 겸재가 비로봉을 그릴 때를 묘사한 사천의 시는 ‘금강산 콜라보 작품’ 가운데서도 으뜸이다.

겸재와 사천의 ‘시화환상간’.
두 노인(사천과 겸재)이 소나무 아래서 완성한 작품을 보는 그림이다.
‘내 시와 그대의 그림을 서로 바꿔보면 둘 사이에 누가 남고 모자라는지 어찌 값어치를 매길 수 있겠는가.(我詩君畵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라는 사천의 글이 있다.
글의 오른쪽 위에는 ‘천금물전’, 즉 천금을 주어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는 다짐도장을 찍어놓았다
“나의 벗 정선은 주머니에 그림 그릴 붓이 없어 때때로 그림 그리는 흥취가 솟으면 내 손에서 붓을 빼앗아가네.
금강산에 들어와 쓸어내리듯 휘두른 붓질이 더욱 방자해져서(揮灑太放恣) 백옥같은 만이천봉 하나하나 점찍어 그리고(一一遭點毁) 놀랍도록 꿈틀거리는 구룡폭 어지러운 비바람 일어나네….”
이 대목은 겸재의 그림그리는 필법이 ‘일필휘쇄(一筆揮灑)’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번에 거침없이 쓸어버리듯 휘두른 빠른 붓질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정선이 문득 한번 웃더니 먹만으로 젖은 듯 그려내니 신이 전하듯 더욱 기이하고 뛰어나 옅은 구름이 달을 가린 듯 하네. 흥이 다하자 붓을 던지고 일어서니 산과 더불어 가볍게 희롱하였구나. 나를 보고 가져가라 하니 관아의 창 가운데 놓아두었네.”
두사람, 얼마나 허물없는 사이인가. 사천의 시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금강산 여행 도중 내 친구 정선이 비로봉을 보자 문득 그림을 그리고 싶어 조바심을 냈다. 그런데 마침 붓이 없었다. 정선이 씩 웃더니 내(이병연) 손에서 붓을 빼앗아 일필휘쇄로 쓱쓱 비로봉을 그린 뒤 ‘자 이 그림을 가져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이 그림을 금화현청에 걸어두었다.”
흥취가 나면 남의 붓을 빼앗아 그냥 단 한번의 붓질로 쓰윽 그린 정선과, 이 모습을 마치 현장중계하듯 멋들어진 시로 전한 이병연의 글솜씨 모두 대단하다.
■헤어지면 날개잃은 새가 된다
두 사람 ‘콜라보’의 백미는 <경교명승첩>이다. 이 글의 첫머리에 인용한 ‘이별시’와 깊은 관련이 있다.
1740년 겸재가 양천 현감으로 출사할 때의 나이는 64살이었다. 이병연의 나이는 69살이었다. 최고의 의료서비스를 받은 조선 임금들의 평균수명조차 47살 언저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두사람 다 엄청 장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나이에 헤어진다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랬으니 ‘자네와 나는 떨어져 살 수 없고…, 자네가 떠나는 강물에 지는 노을을 원망스레 바라본다’고 안타까워 한 것이다. 고작 엎어지면 코닿을 양천의 현감으로 떠난 친구를 배웅하면서 웬 호들갑이냐고 핀잔을 줄 개재는 아니다. 찬찬히 살펴봤듯이 두 사람의 브로맨스는 단순한 우정의 단계를 넘어서지 않던가.
세간의 평가처럼 ‘좌사천 우겸재’였고, ‘시 속에 그림있고(詩中有畵·사천) 그림 속에 시있으니(畵中有詩·겸재)’ 두사람의 헤어짐은 곧 사천의 표현대로 ‘날개 잃은 새’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이 들었다.

겸재가 양천현감으로 발병받아 떠난 후 ‘시와 그림을 바꿔보자’(詩畵換相看)는 두사람의 약속이 실행되었음을 알려주는 사천의 편지.
‘나와 겸재 사이에 시와 그림을 주고받기로 햇는데 약속대로 왕복을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간송미술관 소장
■“그대의 그림과 내 시를 교환하자”
하여 두 사람은 몸은 떨어졌지만 작품으로는 하나가 되기로 약속했다. 시(이병연)와 그림(정선)을 주고받아 ‘시화첩’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겸재가 양천현감으로 떠난 지 1년 뒤인 1741년에 쓴 편지를 보면 저간의 사정이 잘 나와있다.
“나와 겸재 사이에 시와 그림을 주고받자는 약속을 했는데, 약속대로 왕복을 시작한다.(與鄭謙齋 有詩去畵來之約).”
그러면서 두 사람의 작품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자부심도 마음껏 피력한다.
“내 시와 그대의 그림을 서로 바꿔보면 둘 사이에 누가 남고 모자라는지 어찌 값어치를 매길 수 있겠는가.(我詩君畵換相看 輕重何言論價間) 시는 간장에서 나오고, 그림은 손을 휘둘러 그리니 어느 것이 쉽고 어려운지 모르겠구려.(詩出肝腸畵揮手 不知雖易更雖難)”
여기서 나온 표현이 그 유명한 겸재와 사천의 ‘시화환상간(詩畵換相看)’, 즉 ‘시와 그림을 바꿔 본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인 것이다. 말그대로 서울과 서울 근교 한강 일대 이름다운 경치를 화첩으로 꾸몄다. 남한강 상류에서 시작해서 배를 타고 유람하면서 양천 10경을 비롯한 한강 주변의 명승을 그리고(겸재), 이 그림에 붙인 시(사천)를 담았다.
■“천금을 주어도 팔지 말자”
그 중에 두 노인(사천과 겸재)이 소나무 아래서 완성한 작품을 보는 그림(‘시화환상간’)이 있다. 사천의 ‘자네의 그림과 나의 시를 바꾸자’는 편지글이 겸재의 필치로 적힌 그림인데, 그 옆에 ‘천금물전(千金勿傳)’이라는 도장을 떡하니 찍어놓았다. “천금을 준다 해도 남에게 넘기지 말라”는 다짐 도장이다.

겸재의 대표작인 ‘인왕제색도’. 몇몇 미술사학자들은 겸재가 임종을 앞둔 평생지기 사천(이병연)을 위해 그린 작품이라고 해석한다. 이 그림은 소나기 내린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린 것인데, 1751년 윤 5월 29일 이병연이 세상을 떠나기 4일전에 그렸다고 주장한다.
60년 지기 노년의 득의작이 아닌가. 두사람이 합작으로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경교명승첩> 만큼은 ‘누가 천금을 준다 해도 절대 넘기지 말자(千金勿傳)’고 굳게 다짐하고 있다. ‘우정은 결코 돈으로 바꿀 수 없다’면서 피로 맹세한 브로맨스 같다.
■누가 시인이고 누가 화가인지…
두 사람의 ‘콜라보’를 지켜본 제자 박사해(1711~?)는 사천·겸재 두 스승을 어찌 표현할 지 몰라 그냥 ‘이로시화(二老詩畵·두 노인의 시화 그림)’라 했다.
“그림이라 말하자니 곧 시가 있고, 시라고 말하자니 곧 그림이 있는지라. 그런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할 수 없다. 그래서 그저 ‘이로시화’라 했다.”
박사해의 다음 표현이 걸작이다. “생각해보니 ‘이로시화’라는 표현도 뭔가 잘못된 것 같다”고 자책한다.
“이로(二老)라는 표현도 잘못됐다. 시(詩)를 그림(畵)보다 앞세운게 아닌가. 이 또한 잘못된 평가다.”
그러면서 두 스승의 작품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다.
“소리울림은 적적하고 고요한데 글의 꾸밈과 생각이 그윽하고 묘한 것은 겸재 노인의 ‘그림시’요, 쇠와 돌이 쨍그렁하듯 그대로 핍진한 것은 사천 선생의 ‘시그림’이다.… 사천선생께서 바라보면 겸재노인의 그림이 바로 시이고, 겸재노인께서 살펴보면 사천선생의 시가 바로 그림이다.”
박사해는 마지막으로 선언한다.
“나는 두 노인 중에 어느 분이 시인이고 어느 분이 화가인지 정말 모르겠다. 그래서 두 분을 시화주인(詩畵主人)‘이라 불러야 한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누가 시인이고, 화가인지 모르겠다? 마치 “내가 나비가 된 것일까. 나비가 내가 된 것일까”를 외친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연상하게 된다. 시인(사천)이 변해 화가(겸재)가 되었는지, 화가(겸재)가 변해 시인(사천)이 되었는지

1751년 윤 5월 25일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오늘의 날씨’. <승정원일기>를 보면 19일부터 24일까지 매일 비가 내렸다고 했다.
장마철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25일은 ‘조우석청’, 즉 아침까지 비가 내렸다가(雨) 오후에 개었다(晴)고 되어있다. 사천 이병연이 사망한 날짜는 4일 뒤인 29일이었다.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겸재가 ‘인왕제색(仁王霽色)’, 즉 비 온 뒤(霽)의 인왕산 풍경을 그린 점에 착안했다. 즉 6일간 지루하게 내리던 비가 그친 5월25일 오후에 겸재가 특유의 일필휘쇄법으로 인왕제색도를 그렸다는 것이다. 사경을 헤매고 있는 평생지기 사천을 위해 그렸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확증은 없다
■이병연의 죽음과 ‘인왕제색도’의 비밀
두 사람의 브로맨스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겸재 작품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인왕제색도’를 둘러싼 논쟁도 흥미진진하다.
겸재의 75살 작품인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국보 제216호)’는 한여름 소나기가 내린 뒤의 인왕산 풍경을 그린 것이다. 그런데 미술사학자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등은 이 그림을 겸재가 위독한 지경에 빠진 절친 사천의 임박한 죽음을 애도하려고 그린 작품이라고 해석했다.
물론 ‘인왕제색도’에는 사천 이병연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이 그림을 이병연과 결부시키는 것인가. 최완수는 이병연이 사망한 날짜(1751년 5월 29일)와 정선이 ‘인왕제색도’에 써놓은 제발(신미윤월하완·辛未閏月下浣)’을 주목한다.
정선의 생전 시기에 윤5월이 들어있는 신미년 간지는 1751년이다. ‘하완’은 하순을 일컫는다. 그러니까 겸재가 ‘인왕제색도’를 그린 것은 ‘1751년 윤 5월 하순’(신미윤월하완)이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영조실록>에는 “이병연이 1751년(영조 27년) 윤 5월 29일 사망했다”는 부음기사가 실린다.
‘1751년 윤 5월 하순과 윤 5월 29일’이라면 어떤가 무슨 연관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승정원일기 날씨 기사의 단서
미술사학자인 오주석은 당시의 <승정원일기>를 들춰보았다. 국왕 비서실이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승정원일기>에는 매일 매일의 날씨가 실려있다. 당연하다. 지금도 일기를 쓸 때 맨먼저 기록하는 것이 ‘오늘의 날씨’ 아닌가. 오주석은 그걸 주목한 것이다. 과연 흥미로운 대목이 보였다. <승정원일기> 1751년 윤 5월19일부터 24일까지 ‘날씨란’에는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는 뜻인 ‘우(雨)’라 적혀있었다.
윤5월 하순이면 양력 6월 하순이므로 장마철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랬으니 6일 동안이나 지루한 장맛비가 내렸던 것이리라. 그런데 25일자 <승정원일기>를 보면 달라진다.
‘조우석청(朝雨夕晴)’이라 적혀있다. 지금도 익숙한 날씨정보, 즉 ‘아침까치 비가 내린 뒤 오후에 갰다’는 뜻이다. 오주석은 무릎을 쳤을 것이다.
겸재는 6일간이나 장맛비가 내린 뒤 맑게 갠 1751년 윤 5월 25일 오후에 이 인왕제색도를 그린 것이 아닐까. 오주석은 <인왕제색도>의 오른쪽에 그려진 기와집을 육상궁(지금의 청와대 옆 칠궁) 뒷담쪽에 있던 이병연의 집이라 추정했다.
그렇다면 맑게 개어가는 인왕산의 모습이 병이 위중했던 절친의 쾌차를 기원하는 겸재의 안타까운 심정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겸재의 특기가 무엇인가.
붓을 들어 한번에 휘몰아치며 그리는 일필휘쇄법으로 유명하지 않은가. 그렇게 한번의 붓질로 완성한 그림을 죽음을 앞둔 평생지기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병연은 끝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채 4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인왕제색도>가 겸재가 죽음을 앞둔 친구 이병연을 위해 그린 것이라 주장하는 이들은 그림의 오른쪽 밑 부분의 집을 이병연의 집이라 해석한다. 그러나 이병연의 집은 육상궁(현재 칠궁) 곁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기와집 뒤편의 언덕을 인왕산 자락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인왕산과 육상궁의 거리는 그림에서 표현된 것보다 멀다. 이병연의 집을 그렸다는 해석은 다소 억측일 수 있다
■인왕제색도는 임종을 앞둔 친구를 위한 그림인가
물론 최완수·오주석 등의 추론은 ‘억측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지나치게 겸재를 존경하는 일부 미술사학자들의 집착에 빚은 치명적인 오류라는 것이다.
즉 겸재가 죽어가던 친구를 위해 그린 매우 특별한 작품이라면 ‘인왕제색도’의 제발에 당연히 이병연을 언급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장진성 서울대 교수는 “그러나 ‘인왕제색도’에는 이병연의 ‘이’자도 없다. 또 오주석 등이 주장한 그림 오른쪽의 기와집도 이병연의 집을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림 구도상 육상궁(칠궁) 옆에 있었다는 이병연의 집과, ‘인왕제색도’의 그림 구도와는 너무도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또한 일리있는 해석이다.
사실이든, 혹은 지나친 애정이 빚어낸 오류이든 사천과 겸재의 지독한 브로맨스가 아니었다면 나올 수 없는 스토리텔링이다. 최근 문화재청은 겸재와 사천 등 두 벗의 콜라보 작품인 ‘경교명승첩’을 비롯하여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겸재 작품 건을 보물로 지정예고했다.
보물지정을 계기로 ‘시 속의 그림(詩中有畵), 그림 속의 시(畵中有詩)’ 속에 살았던 겸재와 사천 등 두 친구의 멋진 브로맨스도 기억하기를 바란다.
<참고자료>
엄소연, ‘우정의 내러티브로서의 정선의 <경교명승첩>’, <예술과 미디어> 14권 1호, 한국영상미디어협회, 2015
장진성, ‘정선의 그림 수요 대응 및 작화방식’. <동악미술사학> 제11호, 2011년
‘애정의 오류-정선에 대한 평가와 서술의 문제’, <미술사논단> 제33호, 한국미술연구소, 2011
안대회,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 소명출판사, 2005
박미나, ‘18세기 금강산 시와 그림의 관련 양상 연구’, 경기대석사논문, 1998
윤진영, ‘조선후기 서촌의 명소와 진경산수화의 재조명’, <서울학 연구> 50권 50호, 서울학연구소, 2013
최완수, <겸재 정선>, 현암사 2009
오주석,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솔 1999
[출처] : 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 :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 경향신문
2. '일필휘쇄' 겸재 정선의 졸작 열전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의 ‘내연산삼용추도’(內延三龍湫圖).
내연산 삼용추의 장관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겸재는…조선중화사상이 팽배하던 시기에 태어나 조선성리학을 전공한 사대부로…조선고유색을 현양한 진경문화를 주도한…진경산수화법의 창시자요 대성자였다.”
겸재 정선(1676~1759)의 연구자인 최완수는 “민족적 자부심과 자존심을 잃지 않게 한 겸재야말로 마땅히 화성(畵聖)으로 추앙해야 할 인물”로 꼽았다.
왜 이런 평을 내렸을까. 정선이 활약하던 시기, 조선은 한낱 오랑캐로 치부하던 청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있었다. 정통 주자학을 신봉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사라진 중국 문명의 전통이 조선에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여겼다. 이것이 조선중화주의이다.
겸재야말로 중국풍을 답습하던 전대 화가들의 관념산수에서 벗어나 금강산과 한양 등 조선의 강산을 직접 답사한 뒤 사실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진경산수화의 새 영역을 개척한 위대한 화가라는 찬사가 줄을 이었다. 조선중화주의를 바탕으로 ‘한국적’ ‘민족적’ 산수화풍을 창시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치 위인전을 읽는 듯한 표현이 눈에 띈다. ‘마땅히 화성으로 추앙해야 할 인물’로 꼽고 있으니 말이다. 겸재는 그렇게 무오류의 화성일까.
너무 일방적인 극찬은 아닐까. 지나친 신봉이 오히려 겸재의 진정한 가치를 흐리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겸재가 밀려드는 그림 주문 때문에 대충대충 그린 작품이 적지 않다면 어떨까. 아니 그것도 여의치 않을 경우 아예 아들이나 혹은 제자까지 대필화가로 고용했다면 어떨까.
■겸재의 두 얼굴, 두 그림
과연 그런 그림들이 있었다. 장진성 서울대 교수(고고미술사학과)의 논문(‘정선의 그림 수요 대응 및 작화방식’, <동악미술사학> 제로이터11호, 2011년)을 보면 흥미로운 분석이 나온다.

우선 삼성미술관 리움의 ‘내연산삼용추도’와 국립중앙박물관의 ‘내연산삼용추도’를 비교해보라.
겸재는 58살이던 1733~1735년 사이 경북 청하(포항) 현감을 지낸 바 있다. 이 무렵 그 지역 명산인 내연산의 폭포를 몇 점 그렸다. 그런데 리움 소장 그림과 박물관 소장 그림의 질이 사뭇 다르다.
리움의 ‘내연산삼용추도’는 산 정상에서 폭포수가 떨어져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고 있다. 겸재 특유의 힘차면서도 율동적인 필획이 등장한다. 쓸어내리듯 휘두른 빠른 붓질로 표현된 암산은 거대한 기세로 화면을 압도한다.
길게 쪼개지며 내려오는 절벽의 바위결을 시원하게 묘사하고 상중하 삼용추의 폭포 길이를 급격하게 줄여가며 세찬 흐름을 표현했다. 화면 전체에 남아 있는 빠른 붓질의 흔적은 겸재가 얼마나 붓을 빨리 움직여 묘사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국립중앙박물관의 ‘내연산삼용추도’의 그림은 어쩐지 겸재답지 않다. 반복적이고 형식적인 필법으로 내연산을 묘사하고 있다. 폭포의 장관을 전혀 느낄 수도 없을 정도로 진부하기 이를 데 없다. 몇 번의 형식적인 붓질로 폭포에서 내려온 계곡물을 표현하고 있다. 암산과 소나무 역시 반복적인 형태와 조악한 필묵법을 보여준다.
비단 ‘내연산삼용추도’뿐이 아니다. 간송미술관에는 겸재가 그린 ‘정양사’ 그림이 두 점 있는데 작품의 질이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겸재 작품이 맞나
금강산 정양사는 유서 깊은 절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금강산의 주인이라는 담무갈, 즉 법기보살을 친견하고 창건한 절이다. 담무갈은 1만2000명의 보살을 데리고 항상 금강산에서 설법하고 있다는 보살이다. 금강산 일만이천봉이란 표현이 여기서 나왔다. 정양사는 바로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명당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잘 그린 정선의 ‘정양사’를 보면 정양사 일대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시(俯瞰視) 기법으로 포착했다. 마치 드론으로 사진을 찍는 듯한 느낌이다. 정양사 경내의 건축물과 주변의 토산, 원경의 암봉들이 안정된 구도 속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간송미술관 소장의 ‘정양사’ 그림을 보세요. 반복적이고 형식적인 미점(米点·붓을 옆으로 뉘어서 횡으로 찍는 점법. 송나라 화가 미불이 창안했다 해서 미점이라 한다)으로 토산을 그렸습니다. 경내 건축물은 또 어떻습니까. 잘 그린 앞의 그림에 견줘 매우 소략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장진성 교수)
이 두 작품뿐이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내연산삼용추도’.
이 역시 겸재의 작품이지만 다소 반복적이고 진부한 필법으로 내연산을 묘사했다
간송미술관의 <신묘년풍악도첩> 중 ‘총석정’과 개인소장의 ‘총석정’ 또한 같은 겸재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차이가 난다.
간송미술관 소장 ‘총석정’은 묘사적이고 사실적인 화풍에서 속필을 사용한 표현주의적 화풍으로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개인 소장의 ‘총석정’은 거칠고 빠른 붓질로 총석정과 주변 경관을 그렸다. 묘사적인 화풍에서 매너리즘화한 화풍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간송미술관의 ‘만폭동’과 왜관수도원 소장의 ‘만폭동’ 또한 확연한 차이를 보여준다. 이 밖에도 고려대박물관 소장의 ‘목멱산(남산)’ 또한 겸재의 그림답지 않은 조악한 그림이라는 것이다. 개인소장의 ‘비로봉’ 역시 마찬가지다.
장진성 교수는 “겸재 정선이 부여한 제목, 즉 ‘비로봉’ 글씨가 없었다면 그제 동네 뒷산을 그렸을 법한 평범한 그림”이리고 평했다. 일반적인 산수화 같다는 것이다. 현장감과 사실성이 결여됐으므로 비로봉의 지형적인 사실성을 찾아볼 수 없는 작품이다.
■한번에 쓸어내리듯 그리는 일필휘쇄
아니 ‘추앙받아야 할 화성(畵聖)’의 작품인데, 대충 그렸거나 심지어는 대필작가에게 맡긴 그림이 존재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 후기 화단의 ‘3재(齋)’로 일컬어지는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의 ‘겸재평’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즉 풍속화·인물화에 능통한 조영석은 겸재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만약 만리강산의 풍경을 한번에 쓸어내리듯 휘두른 빠른 붓질(一筆揮灑)로 그려낼 경우 필력의 웅혼함, 기세의 유동은 내(조영석)가 자네(정선)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이네. 그러나 가느다란 털, 머리카락 한 올을 한 치의 틈 없이 정교하게 그리는 데는 자네가 나에게 조금은 양보해야 할 것일세.” (심재의 <송천필담>)
무슨 말인가. 겸재는 그야말로 일필휘쇄, 즉 한번에 쓸어내리듯 재빠른 붓놀림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 조영석은 한마디로 “자네가 빨리 그리기는 하지만 정교한 면에서는 나를 능가하지 못한다”고 평한 것이다.
이런 평은 겸재(1676~1759)의 평생 절친인 이병연(1671~1751)의 평가에서도 볼 수 있다. 즉 1712년 겸재는 당시 강원도 김화(금화) 현감이던 이병연의 초대로 금강산을 유람한 뒤 <해악전신첩>을 제작했다. 이때 안개 속 비로봉을 그리는 겸재의 모습을 본 이병연의 평가글이 남아 있다.
“내 친구 정선은 주머니에 그림 그리는 붓이 없어/
때때로 그림 그리는 흥취가 나면 내 손에서 붓을 빼앗아 갔네./
금강산에 들어와 쓸어내리듯 휘두른 붓질이 더욱 방자해져서/
백옥 같은 만이천봉 하나하나 점찍어 그리고/
놀랍도록 꿈틀거리는 구룡폭 어지러운 비바람 일어나게 그리네.”

정양사(正陽寺)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

간송미술관 소장의 ‘정양사’ 두 작품.
장진성 교수는 “왼쪽 ‘정양사’는 정양사 일대의 경관을 하늘에서 조망한 부감시를 써서 포착한 작품이지만 오른쪽 ‘정양사’는 반복적이고 형식적인 미점을 썼다”고 평했다
■더욱 방자해진 붓놀림
이 대목에서 눈에 띄는 것은 ‘더욱 방자해진 쓸어내리듯한 붓질’(揮灑太放恣)이라는 표현이다. 또 이병연의 이어지는 평은 겸재의 스타일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정선이 문득 한번 웃더니 먹만으로 젖은 듯 그려내니/
전신이 더욱 기이하고 뛰어나 옅은 구름이 달을 가린 듯하네./
나를 보고 또 가지고 가라하니 관아의 창 가운데 놓아두었네.”
이병연의 글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겸재가 한번 씩 웃더니 내(이병연) 손에서 붓을 빼앗아 일필휘쇄로 쓱쓱 비로봉을 그린 뒤 ‘자 이 그림을 가져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비단 이 그림뿐이 아니다.
이른바 겸재의 ‘일필휘쇄’ 이야기는 이곳저곳에서 나온다.
조선 후기 문인 신돈복(1692~1779)의 야담집 <학산한언>에는 어떤 역관이 연행(燕行)을 떠나며 겸재에게 그림을 부탁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잠시 휘쇄법을 사용해서(暫加揮灑) 파도가 소용돌이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돛단배 그림 한 폭 그려주시면….”
또 조영석이 겸재에게 ‘절강추도도’를 부탁했는데, 그 또한 “순식간에 붓을 휘둘러 거친 파도가 이는 가을 강 풍경 그림을 그렸다”는 것이다.(조영석의 <관아재고>)
■밀려드는 그림 주문량
여기서 말하는 겸재의 ‘휘쇄법’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조선 후기의 문인 이규상(1727~1799)의 인물평에 그 단서가 나와 있다.
“정선의 그림은 생동하여 원기가 있었다. 그러나 붓놀림은 거친 기운을 띠었다. 화폭 가득한 그림이라 할지라도 한 점의 붓 흔적과 먹 자국도 없었다. 일국의 그림 요구에 응하여 종이와 비단에 붓을 쓸어내리 듯 휘둘러 그린 것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할 정도였다.” (이규상의 <병세재언록>)

개인소장의 ‘비로봉’.
겸재의 비사실적이고 태만한 필법의 전형적인 그림이라는 장진성 교수의 평이다
장진성 교수가 주목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휘쇄법’은 겸재 정선의 일관된 그림 제작 기법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리 큰 화폭에 그림을 그릴 때도 ‘한 점의 붓 흔적과 먹 자국조차 남지 않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겸재 정선의 그림은 ‘원기(元氣)는 가득하지만 조악한 기운 또한 띤다’는 것이다. 이는 칭찬일 수도, 비판일 수도 있는 평이다.
또 하나 겸재에게는 늘 그림 주문이 쇄도했다. “제발 작품 하나 그려달라”는 폭발적인 요구에 겸재는 특유의 일필휘쇄법으로 썩썩 그려주었던 것이다.
오죽했으면 “(주문이) 삼대밭처럼 많았고, 겸재가 사용한 붓이 무덤을 이룰 정도” (조영석)였다.
문제는 제 아무리 일필휘쇄의 겸재였다 해도 밀려드는 주문량을 감당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아들이, 대필작가가 대신 그렸다?
조선 후기 문인 권섭(1671~1759)의 <옥소고>는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한다.
“어찌 이 노인(정선)이 피곤하여 아들에게 대신 그리게 하였는가. 아니면 붓 가는 대로 쓸어내리듯 휘둘러 그릴 때 혹은 득의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그런 것인가.”
이 무슨 말인가. 권섭은 정선의 화첩을 본 뒤 “이 그림은 분명 정선이 아니라 그 아들이 대필한 것”이라 추정했다.
만약 정선의 그림이 맞다면 어떨까. 정선 특유의 휘쇄법에 따라 그린 그림 중에는 잘 그린 득의작도 있지만, 더러는 태작(태作)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권섭은 정선의 그림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평하고 있다. 빨리는 그리지만 잘 그린 작품도 있고, 못 그린 작품도 있다는 식이다.

고려대박물관 소장의 ‘목멱산’.
밀려드는 그림주문 탓에 형식적인 그림을 그려준 것 같다는 평이다
만약 밀려드는 주문에 부응하려고 대필을 시켰다면 누구에게 맡겼을까. 권섭의 언급대로 아들을 시켰거나 제자인 마성린(1727~1798년 무렵)이었을 것이다
표암 강세황(1713~1791)도 약간은 비판적인 평을 내놓는다.
“정선은 마음대로 쓸어내리듯 휘둘러 붓을 사용했는데, 바위의 기세와 산봉우리의 형상을 막론하고 한결같이 열마준법(어지러이 죽죽 내리 그리는 기법)을 어지러이 써서 대상을 묘사했다.”
강세황은 정선이 금강산의 거대한 산세와 기암절봉의 형상이 일률적인 열마준을 처리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한마디로 진경산수의 사실성이 완전히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정선의 휘쇄법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하나는 비록 대상을 정교하게 그리지는 못하지만 필력이 웅건하고 거대한 기세를 보여주는 신속한 필묵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밀려드는 주문을 감당하려고 거칠고 빠른 붓질로 그린 기법 또한 휘쇄법을 뜻하기도 한다.
장진성 교수는 이렇게 정리한다.
“겸재 정선은 초기에 묘사에 충실한 진경산수화를 그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신묘년풍악도첩>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밀려드는 주문에 부응하려고 ‘휘쇄법’을 사용해 표현주의적인 화풍을 구사하게 됐다. 그러나 그 후 주문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 표현주의적 휘쇄법조차 점차 매너리즘화하여 결국 형식적인 필묵법으로 변하게 됐다.”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겸재 정선의 득의작으로 꼽은 ‘인왕제색도’.
비 온 뒤의 인왕산 모습을 그렸다.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중국에서 열린 ‘겸재 그림’의 즉석 경매
그럴 이유가 있었다. 당대 정선의 그림 수요는 사실 엄청났다. 그림값도 대단했다. 신돈복(1692~1779)의 야담집인 <학산한언>을 보면 겸재의 그림이 중국에서도 불티나듯 팔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컨대 겸재의 절친인 이병연은 1500권에 달하는 중국 서적을 소장하고 있었다. 이병연은 중국 연경(베이징)의 그림가게에서 손바닥만 한 겸재의 그림조차도 고가로 매매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연경에 사신으로 가는 사람이 있으면 겸재가 보내준 그림을 중개해서 생긴 돈으로 중국서적을 대량으로 사들였던 것이다.
<학산한언>은 겸재의 그림이 중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를 아주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즉 어느날 한 중인 집안에서 겸재에게 “그림 좀 하나 부탁한다”면서 비단치마를 가지고 왔다. 말하자면 그림 의뢰였다.
그러나 비단치마에는 얼룩이 묻어 있었다. 겸재는 이 얼룩을 지우버리고는 비단치마 세 폭 중 한 폭에 ‘금강산전도’를, 다른 두 폭에는 ‘해금강도’를 그렸다.
주문한 그림을 받은 중인은 ‘금강산도’는 집안의 가보로 삼았고, ‘해금강도’ 한 폭은 중국 연경으로 떠나는 사신 편에 들려보냈다. 중인의 의뢰를 받은 사신단은 이 그림을 연경의 그림가게에 가져갔다. 그림가게에서 즉석 경매가 이뤄졌다. 경매가가 계속 치솟았다.
마침내 중국 쓰촨성(四川省) 청성산에서 온 승려가 은 100냥을 불렀다. 그 승려는 그 정도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액수일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난징에서 온 선비가 조용히 ‘120냥!’을 불렀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승려는 ‘130냥!’을 불러 그림을 손에 넣었다. 그런 다음 그림을 불에 태워버리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승려는 실제 그림값으로 50냥만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간송미술관 소장의 <해악전신첩> 중 ‘불정대’ 그림.
쓸어버리듯 휘둘러 빠르게 그리는 정선 휘쇄법의 전형을 보여준다.
■겸재 그림 1폭 가격은 청나라 궁정화가 1년 연봉
이 일화에서 보듯 겸재의 그림은 당대 중국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쓰촨성 승려와 난징의 선비까지 매혹시켰음을 알 수 있다.또 연경에서 겸재의 부채그림이 공양에 쓰는 향 50매 가격에 팔렸다. 이 때문에 연경을 드나드는 역관들은 겸재의 그림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우리(신돈복) 동네에 사는 사람이 이병연에게서 ‘금강산화첩’을 사들일 때 엽전 30냥과, 좋은 말 한 마리(40냥 가치) 등 총 70냥을 지불했다.” (<학산한언>)
종합해보면 겸재의 그림은 국내에서는 70냥, 중국에서는 은 130냥 가치로 매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돈은 과연 얼마의 가치였을까.
■겸재의 득의작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하경산수도’.
안정된 구도와 치밀한 구성, 웅장한 화면 등 많은 시간과 공력이 들어간 겸재의 작품이다
겸재는 밀려드는 그림 주문 때문에 평생 바쁜 나날을 보냈다. 사대부 문인 및 관료들의 요청에 부응해야 했고, 연경을 오가는 역관 및 중인들을 통해 중국 판매용 그림을 그려줘야 했다. 어떤 경우엔 폭주하는 주문 수요를 맞추느라 특유의 일필휘쇄법으로 휙휙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관아재 조영석의 품평이 흥미롭다.
“겸재는 ‘금강제화첩’을 그릴 때 싫증나면 마치 붓을 곱게 세워 쓸어버리듯 대충대충 그리는 필법을 사용했고, 그림 요청이 쇄도할 경우 적당적당 편의적으로 그렸다.”
물론 겸재의 이름에 걸맞은 득의작도 여러 편이었다. 예컨대 표암 강세황은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를 겸재의 득의작이라 극찬했다.
강세황은 “안개에 쌓여 있는 아름답고 무성한 여름 산 경치가 일품”이라고 평가한 뒤 “정선 중년의 최고의 득의작이며 보배로 삼을 만한 작품”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세웠다. 이 작품은 특유의 일필휘쇄법으로 쓱쓱 그린 작품이 아니다. 안정된 구도와 치밀한 구성, 웅장한 화면 등 많은 시간과 공력을 투입한 작품이다.
미술사학자 고유섭(1905~1944)은 겸재를 둘러싼 평가가 너무 과장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인왕제색도’만큼은 득의작이라 꼽을 수 있다”고 했다.
“문자 그대로 겸재의 본색이라 할 수 있는 창윤(蒼潤·푸르고 촉촉함)한 맛과 장건한 맛과 웅혼한 맛과 호한(浩汗·넓고 큼)한 맛과 임리(淋리·힘이 넘침)한 맛이 나타난 득의작이다. 내 소견으로는 아마 그 많은 유작이 이 한 작품을 위한 전주곡이었고, 또는 후렴곡이었던 것 같다.” (고유섭의 <조선미술사>)
■겸재가 조선 중화주의를 생각이나 했을까
금석 박준원(1739~1807)은 “조선을 방문한 중국인들이 조선의 산천을 구경하고 나서야 겸재가 신품(神品)을 남겼음을 알게 된다”고 전했을 정도였다.
또 ‘금강전도’의 제시를 보면 “굳이 금강산을 직접 답사하지 않고 베갯머리에 누워서 감상해도 좋을 정도로 금강산의 모습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했다”는 평도 있다.
밀려드는 주문에 더러 진부하고 형식적인 그림을 그리기는 했어도 마음을 다잡게 되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작품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겸재는 80여세가 되어도 여러 겹의 두꺼운 안경을 쓰고 촛불 아래에서 세밀한 그림을 그렸다. 터럭만큼도 실수가 없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연암 박지원은 생의 황혼기에도 작품활동에 몰두하는 노화가의 모습을 생생한 필치로 전하고 있다.
흔히 어떤 인물을 평할 때 ‘추앙해야 할 위인’ ‘범접할 수 없는 성인’으로 규정해버린다면 그 인물은 신격화되고 만다. 겸재 정선이야말로 그렇다. 장진성 교수는 그것을 ‘애정의 오류’라 표현한다. 위인전식의 연구는 외려 겸재의 참모습을 볼 수 없게 만드는 우를 범할 수 있다.
“평생 그림에만 몰두했다는 겸재가 무슨 조선중화주의를 생각했겠습니까. 그럴 겨를이 없었을 겁니다. 겸재는 죽기 전까지 매일 그림을 그려야 했던 인기화가였으니까요.” (장진성 교수)
<참고자료>
장진성, ‘정선의 그림 수요 대응 및 작화방식’. <동악미술사학> 제11호, 2011년
‘애정의 오류-정선에 대한 평가와 서술의 문제’, <미술사논단> 제33호, 한국미술연구소, 2011
신돈복, <국역 학산한언 1>, 김동욱 옮김, 보고사, 2006
최완수, <겸재 정선>, 현암사 2009
박은순, ‘사의와 진경의 경계를 넘어서:겸재 정선 신고’, <겸재 정선>, 겸재 정선기념관, 2009
[출처] : 이기환 경향신문 논설위원 :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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