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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대 미인과 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같지 않다)- 복사해 온 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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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대 미인과 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같지 않다)- 복사해 온 글

singingman 2022. 12. 5.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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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고대 중국의 4대 미인은 양귀비, 초선, 서시, 왕소군을 꼽았다 먼저 양귀비는 시아버지와 폐륜를 저지른 여인이나 그 아름다움에 꽃들도

부끄러워 했다하여 수화(羞花) 양귀비라 했고, 초선은 삼국지에서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시키기 위한 미인계에 등장하는 인물로 그 아름다음에 달도

구름에 얼굴을 가렸다 하여 패월(闭月) 초선이라 하였고, 서시는 와신상담의 고사에 등장하는 인물로 경국지색이라는 사자성어를 낳게한 장본인으로

그 아름다움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은 잊고 가라앉았다하여 침어(沉鱼) 서시 라 하였으며, 왕소군은 모연수라는 화공의 농간에 오량케인 흉노족에

정략결혼을 한 비운의 여인으로 그 아름다움에 날아가던 기러기가 날개 짓을 멈추고 떨어졌다고 낙안(落雁) 왕소군이라 했다. 해서,

침어낙안지용(沉鱼落雁之容) 폐월수화지모(闭月羞花之貌) 라는 표현은 미녀에게 붙치는 최고의 찬사이다. 오늘은 그 중 낙안(落雁) 왕소군의 얘기다

한(漢)나라 원제(元帝)는 건소(建昭) 원년에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를 내렸는데, 이에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 입궁한 궁녀들이

수천명이였고, 이때 왕소군(본명 왕장(王嬙))도 18세에 궁녀으로 선발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의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기에 원제는 일일이 궁녀들의 신상을 알 수 없어 화공들을 시켜 각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화첩을 만들고 그 화첩을 보며 미녀들을 간택 해

잠자리로 불러 들였다. 당시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리던 화공 중에 모연수(毛延壽)라는 물욕에 어두운 화공이 있었는데 자신에게 뇌물을 바치는

궁녀들의 초상화는 아름답게 그려주고 뇌물을 바치지 않은 궁녀들은 추하게 초상화를 그려 화첩을 만들었다, 낙안(落雁) 왕소군은 집안이 미천한

출신이라 뇌물을 바칠 형편이 되지 않아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이에 당연히 모연수(毛延壽)는 왕소군의 초상화는 볼품없이 그렸을 뿐 아니라 없는

점까지 얼굴에 그려 넣었다 한다, 해서 왕소군은 절세의 미인임에도 입궁한지 5년이 지나도록 황제의 얼굴도 한번 볼 수 없었다 한편 원제

경녕(竟寧) 원년(BC33), 국경 변방에서 한나라를 괴롭히던 흉노의 호한야(呼韓邪) 가 혼인 화친을 원 한다며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왔다. 호한야는 값진 공물들을 가지고 와서 원제에게 공손하게 문안을 올리며 황제의 사위가 되겠다고 제안 하엿다. 이에 크게 기뻐한 원제는

호한야를 환대했다. 그리고 원제는 그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긍녀들을 불러와 크게 연회를 베풀고 궁녀들에게 술을 권하게 했다. 이때 왕소군도

시중드는 궁녀의 무리들에 끼게 되는데 호한야는 긍녀들의 아름다운 자태에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그중에서 절세의 미인을 발견하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이제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데려 간다면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해 호한야의 제의를

수락하였다. 그러자 호한야는 망설이지 않고 왕소군을 지목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처음 대면한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한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연회가 끝난 후 원제는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린

화첩을 다시 대조해 보았다. 그리고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것을 발견한 원제는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고. 결국

뇌물을 탐해 거짓 조상화를 그린 모연수는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 토록 하였다. 원제는 호한야에게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밤을 함께 보냈다. 그리고 3일 후, 왕소군은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고 호한야를 따라 먼 오랑케 나라인 흉노로 떠나야 했다 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한서(漢書)의 원제기(元帝紀)〉와 흉노전(匈奴傳),

그리고 후한서(後漢書) 남흉노전(南匈奴傳)등에 기록되 있다 하며 이후 이런 비련의 왕소군의 이야기는 민간에 의한 전승으로 전해지고, 설화,

시가 소설 회곡 등으로 재창조 되었으며, 이태백과 백거이, 동방규 왕안석과 구양수 등 많은 시인들에 의해 시로 쓰여지는 등 중국 문학 소재에

많이 등장 하였다 그 중에서 당나라 시인 동방규의 4절로 된 한시 소군원(昭君怨) 3절을 보자 胡地無花草 ( 호지무화초 ) 오랑캐 땅에는 꽃이

없으니 春來不似春 ( 춘래불사춘 ) 봄이 와도 봄같지 않네 自然衣帶緩 ( 자연의대완 ) 자연히 의대가 헐거워져도 非是爲腰身 ( 비시위요신 )

허리 맵시를 위한 것은 아니네 모연수(毛延壽)의 농간에 억울하게 고향을 떠나 머나먼 북방 오랑케의 나라 흉노로 가게된 왕소군은 고향이 그리워

허리띠가 헐거워질 만큼 야위어갔으니 봄이 와도 봄 같지 않다는 왕소군의 슬픔을 노래한 시다 이제 긴 서론을 접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위의 시

2연의 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같지 않네)을 끄집어 내려 서론이 길었다 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은 이 시에서 유래된 말이다. 뜰에

나와 검부쟁이를 조금 걷어내자 떼떼아떼(미니수선화)는 어느새 새싹을 밀어 올렸고 작년에 옮겨심은 꽂무릇은 푸른 빛이 싱싱하니 동구밖에 어디쯤에

머물러 있을 줄 알았는데 봄은 어느새 우리집 뜰 안까지 와 있다 겨우 천천히 걸을수 있을 뿐 힘든 일은 할 수 없는 내 무릎 탓으로 논과

들에는 많은 사람들은 밭을 장만하고 올해 작물들을 심을 준비를 하는데 나는 밭들이 돌볼수 없어 묵정밭으로 버려둬 풀만 무성하고 짓다만 닭장은

잡풀속에 뼈대만 서있다 밭과 뜰을 둘러 보니 춘래불사춘이다 어디 그 뿐인가 한 갑자를 훌쩍 넘어 살았으니 몸은 어디 하나 예전만한 곳이 없다

내 인생의 봄은 이제 영영 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인 듯 하다. 심란한 오후다.

[출처] 중국 4대미인|작성자 운향 김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