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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별 음악 감상 본문
1. 르네상스 음악(1400~1600년)
르네상스의 정신은 이미 14세기의 아르스 노바에도 나타나 있으나, 특히 플랑드르 악파로 통하여 죠스캥 데 푸레의 음악에서 뚜렷한 형태를 취하여 나타났다. 플랑드르 악파의 작곡가들은 전유럽에 걸쳐 활약하였고, 그들의 성악 폴리포니의 작곡법은 르네상스 음악의 중심적 양식이 되었다. 그러나 이 대위법적인 복잡한 기법은 르네상스 음악에서는 단순한 기교를 위한 기교가 아니라 보다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감정표현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16세기에는 음악의 중심이 점차로 이탈리아로 옮겨져, 여기서 르네상스 정신은 수많은 꽃을 피우기에 이르렀다. 미사, 모테토를 비롯하여 각종의 세속 합창곡이 번성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오르간이나 류트 등의 기악음악도 놀라운 발전을 하였다. 이 기악은 바로크 이후의 음악에서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16세기 말에는 각종 극음악이 시도되었는데, 이들은 17세기 바로크 음악의 성립과 발전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플랑드르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음악의 영향 아래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의 음악도 각각 독자적인 발전을 보였다. 일반적으로 말하여 르네상스 음악은 플랑드르 악파의 폴리포니에서 볼 수 있는 북방적이며 고딕적인 요소와 이탈리아의 마드리갈 등에서 볼 수 있는 남방적·라틴적 요소와의 결합에서 성숙하였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작곡가로 오케겜, 죠스깽 데 프레, 올란도 디 라소, 몬테베르디,팔레스트리나등이 있다.
오케겜(1430~1497년)
네덜란드의 작곡가. 동부 플랑드르 출신. 제2 네덜란드학파의 지도자. 소년시절에 앵베르 대성당의 소년가수로 있었고, 1453년부터 프랑스 왕 샤를르 7세의 궁내성당에 근무, 1459년 투르의 생 마르탱 대수도원 경리담당으로 있었다. 1461년부터 루이 11세 궁내 성당 악장, 1465년에는 그 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15개의 미사곡, 7개의 경문가곡(經文歌曲) 등 50여곡을 남겼다. 대위법과 전칙곡(典則曲)에 능숙했으며, 그로 말미암아 미사곡이 경문가곡보다 예술적 우위를 차지하게 되고, 대위법에서 음향적 균형도 잡히게 되었다. 그는 또한 후일 다성악(多聲樂)에서 절대적 중요성을 지닌 모방의 수법을 창시하였다.
죠스깽 데 프레(1440~1521년)
조스캥 데 프레(Josquin Des Prez, 1440~1521)는 벨기에와 프랑스의 국경 지방에서 태어난 것 이외에는 초기 생애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젊은 시절에 밀라노 대성당의 가수로 음악활동을 시작해서 1473년에는 로마의 바티칸 성가대에서 노래하였고, 만년에는 프랑스의 루이 12세의 궁정에서 가수로도 일하였다. 플랑드르 악파인 조스캥은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당시에도 전 유럽에 널리 알려졌다. 조스캥 음악의 위한 점은 무엇보다도 가사와 음악의 혼합을 통하여 르네상스 음악의 인본주의 정신을 실현한 데에 있다. 가사의 의미를 음악에 부합시키기 위하여 그가 추구한 음악기법은 동시대 작곡가들에게 모델이 되었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예술성 높은 음악의 출발점이 되었다. 조스캥의 천재적 음악성은 여러 문인과 음악가들에 의해서 추앙을 받았다. 그의 죽음에 부쳐서 빈더스(Theronimus Vindert)는 "O mors inevitablis (오, 피할 수 없는 죽음이여)"라는 비문을 세웠고, 공베르(Gombert)는 <비가>를 작곡하였다. 글라레안(Glarean)과 루터(Martin Luther)도 조스캥을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전하고 있다. 마르틴 루터는 "다른 작곡가들은 음표의 지배를 받지만 조스캥은 음표를 지배한다."고 말할 정도로 조스캥을 칭송하였다. 당시의 무명 작곡가들 중에는 조스캥의 이름을 도용하여 작품을 출판한 것이 많아서 조스캥의 정확한 작품 수는 알기 어려우나,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18곡의 미사, 6개의 독립적인 미사 악장, 95곡의 모테트, 68곡의 세속음악 등이 현존한다.
조스캥이 남긴 대부분의 작품들은 50세 이후의 작품들이며 초기 작품들은 상당수가 유실되었다. 조스캥은 네덜란드 악파의 전통적인 음악양식을 계승하였지만 르네상스의 새로운 양식을 개척한 작곡가이다. 그의 음악에는 중세의 모든 음악기법과 르네상스의 진보적인 음악기법이 공존하고 있다. 조스캥은 오케겜이 사용한 차용 선율의 변형, 장식기법, 카논의 사용, 최종 종지에서의 화성진행, 다악장의 통일성 등을 그의 작품에도 반영시켰으며 오브레히트의 모방기법, 차용한 정선율이나 다른 음악재료들의 인용 · 조합 등을 더욱 확대하였다. 이러한 음악기법과 양식들은 15세기 후반의 플랑드르 악파와 16세기의 성숙된 르네상스 음악의 일반적 음악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조스캥의 세속음악
조스캥의 세속음악은 대부분이 샹송들이다. 60편 이상의 샹송 중에는 3성부와 4성부 곡이 제일 많고, 나머지는 5성부 혹은 6성부 곡이다. 샹송은 윗성부가 중심이 되는 칸틸레나(cantilena) 양식보다는 각 성부가 대화하듯이 이루어지는 모방양식과, 반복이 자주 사용되는 르네상스의 다성부 합창형식으로 되어 있다. 4성부 샹송인 는 2중 카논이 사용되었고, 5성의 에는 카논과 부분적인 모방이 혼합되어 있다. 조스캥의 샹송도 독일어 가사로 된 것과 가사가 없는 기악곡 형태가 있다. 루터파의 모테트 는 조스캥의 독일어 가사로 된 샹송 의 선율을 차용하여 작곡된 것이다. 샹송 이외의 세속음악으로는 몇 편의 프로톨라(frottola)와 발라드가 남아 있으나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조스캥의 미사 음악
조스캥의 미사에는 그의 독창적인 창작기법이 다양하게 나타나 있다. 18곡의 미사 가운데 1곡을 제외하고는 모두 4성부로 작곡하였는데 대부분 차용해 온 음악재료를 이용하였다. 정선율은 다른 작곡가의 샹송, 세속선율, 성가, 기존하는 모테트, 기타 작품들의 선율 등 다양한 출처에서 차용되었다. 조스캥의 미사는 그의 선배 작곡가들인 뒤파이, 오케겜, 오브레히트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미사 는 뒤파이의 창작기법처럼 미사의 정선율을 세속선율에서 차용해 왔을 뿐만 아니라 각 악장에 동일한 선율동기를 붙여서 통일감을 이루게 하는 기법을 사용하였거, 은 오케겜처럼 카논 기법을 광범위하게 사용하였다. 카논구조로 작곡된 는 미사 작품명의 모음들을 뽑아서 re-ut-re-ut-re-fa-mi-re의 선율동기를 만들었고 이것을 작품에 사용하였다.이론가 차를리노(Gioseffo Zarlino, 1517~1590)가 이와 같은 기법을 'Soggetto cavato vocali di queste parde(단어의 모음에서 따온 주제)'라고 했으며 흔히 간략하게 '소제토 카바토(soggetto cavato)'라고 한다.
세속선율을 이용한 또다른 작품들로는 2편의 가 있고 샹송 의 선율을 차용해서 만든 가 있다. 는 원래의 샹송에서 3개의 성부를 차용한 패러디 미사이다. 페러디 기법을 사용한 또다른 작품으로는 와 가 있다. 는 모테트를 패러디로 사용한 최초의 미사로 알려지고 있다. 는 베네딕투스(Benedictus)가 생략되어 있어서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is)라고 할 수 있다.
모테트
조스캥의 모테트는 다른 작품 형식들보다 진보적이다. 모테트에서 조스캥은 무엇보다도 가사와 음악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이를 위해서 가사 선택으 폭을 넓혔고 음악적 소재도 다양하게 취급하였다. 시편을 모테트의 가사로 옮기거나 기존하는 성가를 차용하는 방법 등은 기본적으로 미사에 사용한 방법과 같으나 언제나 수정과 장식을 해서 사용했다. 조스캥의 모테트는 이전의 작곡가들에 비해 보다 많은 변형과 모방이 사용되고 있다. 모방되는 선율은 원래의 선율이 끝나는 모방 지점(point of imitation)에서 시작되고 중복되기 때문에 명확한 구분없이 자연스럽게 선율은 지속된다. 조스캥은 종지나 박자, 빠르기 등을 변화시켜서 모테트를 몇 개의 큰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그 대부분은 3부분 형식이 되었고, 첫째 부분은 셋째 부분과 비슷하게 써서 둘째 부분과 대조를 이루게 하였다.
조스캥은 가사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상행하는 음계나 하행하는 음계를 가사에 따라 구분해서 사용하였다. 예를 들면, '하늘'과 같은 가사에는 상행하는 음계를, '땅'과 같은 가사에는 하행하는 음계를 썼다. 이러한 기법을 '가사 화법(word painting 또는 text painting')이라 하고, 이러한 기법을 이용한 양식을 시각음악(Augen-musik)이라고 한다. 모테트 의 비극적인 대사, "무덤 속까지 내려가서 울며"에서 선율이 하강하면서 화성도 Bb에서 Gb으로 하강하는 음향묘사와, 오케겜의 죽음에 부친 조스캥의 <애도가(Lament)>에서 표현되 음향묘사들은 Augen-musik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5성부의 에서는 오스티나토(ostinato)기법을 사용하고 있고, 4성부의 에서는 카논과 시창기법(solmization)에 의한 음절을 사용하고 있다. 는 부활절 시퀀스의 성가와 두 곡의 샹송을 결합하여 만든 작품이다.
올란도 디 라소(1532~1594)
벨기에의 음악가이다.
비상한 다작가로 그의 작품은 성악곡이 중심이나 오늘날에도 2천곡 이상이 남아 있다. 미사, 모테트 등의 종교곡, 리트, 샹송과 같은 세속곡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였으며, 특히 그 폴리포닉한 모테토트는 기법과 내용에서 그 시대의 정점이었다. 프랑스 국경에서 가까운 몽에서 태어나, 성가대원을 거친 뒤 이탈리아로 가서 1564년에 뮌헨의 궁정악장으로 초빙되어 정주하다가 아쉬움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Palestrina, Giovani Pierluigi da(1526?∼1594).
이탈리아의 가톨릭 교회음악 작곡가. 로마악파의 거두. 팔레스트리나 태생. 고향 성당의 성가대장 겸 오르간 주자가 되고, 1551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내의 카펠라 율리아의 소년 성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554년 교황 율리오 3세에게 미사곡집을 바친 것이 인연이 되어 이듬해 교황청 악부 성가대원으로 임명, 그러나 1555년 교황 바오로 4세(재위 : 1555∼1559)에 의해 결혼했다는 이유로 지위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곧 라테란 성당 성가대장으로 취임, 1561년 산타마리아 마조레 성당의 성가대장이 되었다. 1571년 카펠라 율리아의 성가대장으로 임명되는 동시에 ‘교황청 악부 전속작곡가’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받았다. 1589년 상처를 하자, 이듬해 부유한 과부와 재혼, 그 재산으로 자기 작품을 속속 출판하였다. 그가 죽을 때까지 출판한 곡은 미사곡을 포함한 320곡이었다. 그가 늑막염으로 죽자 무덤이 성 베드로 대성당 내에 마련되었다.
그의 작품 스타일은, 초기의 것에는 네덜란드 악파적인 기교적 다성곡(多聲曲)이 많지만, 후기에 가까워지면서 그 기교는 간소화되고 동음음악적인 처리가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관능적인 반음계적 진행이나 자극적인 선율의 비약은 가급적 피하고, 불협화음마저 최소한도로 제한해서 종교적 청순성을 유지했으며, 곡보다도 가사에 생동감을 불어넣으려고 힘썼다. 이것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논의된 교회음악 본연의 자세에 합치되어 있고, 로마악파의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도 이 스타일은 계승되었다.
2. 바로크 음악(1,600~1,750년)
1600~1750년경을 풍미하던 웅장하고 극적이며 활력 있는 예술정신으로 대표되는 바로크 시대 서양 음악의 특징.
17세기가 시작되면서 새로운 기법들이 성악 음악 분야에서 급속도로 발전했다. 종교 음악과 세속 음악, 성악 음악과 기악 음악 사이의 구별이 명료해졌고, 장조와 단조의 조성 음악 체계가 서양 음악의 중심 원리로 작용되었다. 피렌체 귀족층에서 처음 시작된 오페라는 로마·베네치아·나폴리 등으로 옮겨가면서 대중의 취향을 흡수하고 극적인 볼거리 등을 덧붙이며 발전해나갔다. 나폴리 오페라 양식은 이후 100년 동안 유럽을 휩쓸었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작곡가로 스카를라티가 있다. 나폴리 오페라의 영향으로 칸타타 형식이 확립되었는데 세속 성악곡이던 칸타타는 종교 음악으로 흡수되어 독일에서는 교회 예배용으로 쓰였다. 기악 음악의 새로운 형태로 소나타와 협주곡이 등장하였다. 바로크 음악의 절정은 독일의 두 작곡가 바흐와 헨델의 작품에서 이루어졌다. 헨델은 오라토리오와 세속 칸타타를 많이 작곡했으며, 바흐는 수난곡 등 종교 음악과 교육용 음악을 많이 작곡하였다.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는 독일의 작곡가이자 오르가니스트이다.
교회 성기사와 오케스트라, 듀오 악기를 위한 종교적이거나 세속적인 음악을 창작했고, 그의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종말과 궁극적인 성숙을 동시에 가져왔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최후에 위치하는 대가로서, 일반적인 작품은 영국음악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위에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양식을 채택하고 그것들을 융합하여 독자적 개성적인 음악을 창조하였다. 종교적 작품은 기존 구교 음악과 차별화하여 새로운 음악을 통해 개신교회 예배에 기여하고자 노력하였다.
바흐의 집안은 200년에 걸쳐서 50명 이상의 음악가를 배출한 일대 음악가계였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은 대대로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경건한 신자들이었고, 교회음악가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그들의 일에 강한 장인(匠人)적인 긍지를 품고 있었다. 이 '신앙'과 '장인기질(匠人氣質)'은 요한 제바스티안에게도 계승되어서, 마치 2개의 정선율(定旋律)과 같이 그의 일생을 관통하게 된다. 제바스티안 이전에도 17세기 초엽 이래 많은 유명한 작곡가를 배출했고, 일족의 중심지이었던 중부독일의 튀링겐 지방에서는 '바흐'가 '거리의 악사'를 가리키는 용어로 쓰였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제바스티안의 큰할아버지 하인리히 바흐(1615-1692), 그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1642-1703)와 요한 미하엘 바흐(1648-94)는 음악사(史)에도 이름을 남긴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바흐는 사후 고전주의 음악사의 흐름에 밀려 완전히 잊혀졌으나 1802년 독일의 음악사학자인 포르켈이 바흐에 대한 최초의 연구서인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Über Johann Sebastian Bachs Leben, Kunst und Kunstwerke"(1802)를 발표함으로써 전 유럽적 바흐 광풍을 몰고 오게 하였으며 또한 사후 바흐에 대한 재평가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하였다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 (1685~1759)
후기 바로크 시대 독일 태생 영국의 작곡가.
오라토리오 <메시아>와 <수상음악><왕궁의 불꽃놀이> 등으로 잘 알려진 작곡가이다. 살아 있는 동안 영국에서 대예술가로서의 위상을 인정받았던 헨델은 인간으로서나 예술가로서 평생 동안 그 명성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다른 음악가들과는 다른 독특한 존재였다.
마을 성가대 지휘자에게서 건반악기 연주와 작곡을 배웠는데 베를린에서 재능을 인정받았고, 함부르크에서 첫 오페라를 연주했다. 곧 그는 이탈리아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런던에서는 영국의 국왕과 귀족의 환대를 받았다. 그는 오라토리오와 대규모 합창곡을 영국의 대중적인 음악 형식으로 만들었다.
아버지 게오르크 헨델은 성공한 외과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루터교 목사의 딸이었다. 헨델이 음악에 재능을 보이자 가족은 그의 재능을 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할레에서 훌륭한 세속 음악과 교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며 아버지가 작센-바이센펠스 공작의 궁정 외과의로 있었던 바이센펠스 근처 궁정에서 연주되는 음악도 들을 수 있었다. 할레에서 그는 리프라우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이자 그 마을 성가대의 지휘자였던 작곡가 F.W. 차호프의 제자가 되어 그에게 건반악기 연주법과 작곡을 배웠으며 다른 선생에게 오보에와 바이올린도 배웠다. 당시 그가 작곡한 오보에 소나타가 지금도 남아 있다. 1696년 베를린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그의 재능은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와 선제후비 조피 샤를로테의 주목을 받았다. 헨델이 11세 때 아버지가 죽었지만 그에 대한 교육은 지속되었으며 1702년에는 법학도로서 할레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 들어간 그는 음악 경험을 넓히고 생활비의 일부분을 충당하기 위해 할레에 있는 개혁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으며, 행운의 기회가 그를 기다리고 있는 북쪽의 함부르크로 갈 때까지 1년 동안을 그곳에서 봉사했다
함부르크와 이탈리아에서의 활동
함부르크에서 헨델은 오페라 관현악단에 바이올린 연주자로 들어갔다. 함부르크 오페라단 감독의 권유로 하프시코드 연주자의 역할도 맡았으며 1705년에는 첫 오페라인 〈알미라 Almira〉의 초연을 관장했다. 이 작품의 성공으로 그는 더 많은 작품들을 위촉받았는데, 그때 작곡된 〈네로 Nero〉(1705)·〈플로린도 Florindo〉·〈다프네 Daphne〉(1706)는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이 당시 이탈리아는 유럽 음악의 중심지였으며 돈을 벌어 성공하려는 야심만만한 작곡가들은 이탈리아로 가서 공부했다. 헨델의 이탈리아 대장정은 큰 성공을 거두어 음악적 표현 및 사회적 혜택을 누렸다. 그는 피렌체·로마·나폴리·베네치아에 머물렀는데, 그 체류기간은 각각 달랐다. 피렌체에서 작곡가 알레산드로 스카를라티를 만났으며 1707년에는 그곳에서 첫번째 이탈리아어 오페라인 〈로드리고 Rodrigo〉를 작곡했다. 〈로드리고〉의 공연으로 헨델은 로마에 있는 중요한 예술 후원자로부터 격찬을 받았는데 그에 대한 답례로 그는 로마로 가서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당시에 작곡된 그의 작품 가운데는 이탈리아어로 된 독주 칸타타(성악 음악), 2중주, 규모가 큰 칸타타 〈Il trionfo del tempo e del disinganno〉(1708), 라틴어 교회음악과 오라토리오 〈부활 La Resurrezione〉이 있다.
로마에서 나폴리로 건너간 헨델은 그곳에서 세레나타(극적 칸타타) 〈Aci, Galatea e Polifemo〉(1708. 6)와 흥미로운 프랑스어 노래들, 스페인 혹은 포르투갈 출신인 돈나 라우라와의 연애에서 비롯된 〈스페인 칸타타 Cantata Spagnuola(No se enmenderá jamás)〉를 작곡했다. 1709년 12월 26일에는 오페라 〈아그리피나 Agrippina〉를 베네치아에서 초연했는데 그 초연은 획기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탈리아에 오기 전에 헨델은 독일에서 명성을 떨쳤지만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을 완전히 습득함으로써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의 친구인 아고스티노 스테파니(교황의 순회 대사이며 그때까지 하노버 궁정의 음악감독이었음)를 통하여 하노버의 공작 에르네스트 아우구스투스를 만났는데 그는 헨델에게 스테파니의 직위를 제의했다. 헨델은 그 제안을 받아들여 공식적으로는 1716년까지 하노버의 음악감독으로 있었지만 거의 그 자리를 비웠다. 1710년초에 하노버에 도착해서 그해 가을 런던으로 건너갔다.
영국에서의 활동
1711년초에 오페라 〈리날도 Rinaldo〉가 런던에서 공연되어 큰 호응을 얻자 헨델은 영국에서 지속적인 인기를 누리며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1년 후 선제후로부터 잠시 동안의 체류를 허락받은 그는 런던으로 돌아와 〈충실한 양치기 Il Pastor fido〉·〈테세오 Teseo〉를 공연했다. 1713년에는 〈여왕의 생일을 위한 송가 Ode for the Queen's Birthday〉와 위트레흐트 평화조약을 축하하는 〈위트레흐트 테 데움 Utrecht Te Deum〉·〈유빌라테 Jubilate〉를 작곡하여 왕실의 총애를 얻었으며 앤 여왕으로부터 매년 200파운드를 받았다. 영국의 귀족과 지식인들로부터 한 사람의 인간 음악가로서 인정받고 존경받았던 헨델로서는 서둘러 하노버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1714년에 여왕이 죽고 선제후 조지 루이스가 영국의 국왕 조지 1세가 되자 더욱더 그러했다. 10월 26일에 국왕과 그의 가족은 왕실 부속 예배당에서 헨델의 음악을 들었다. 그 무렵 헨델은 국왕이 된 선제후의 충복으로 하노버를 다시 방문했다. 독일에 있는 동안 그는 함부르크에도 들렀는데 1715년에는 그곳에서 〈리날도〉가 공연되었으며 바르톨트 하인리히 브로케스의 작품에 곡을 붙인 〈수난곡 Passion〉(1716)은 1717년 이후 계속 연주되었다. 그는 독일의 다른 도시에도 머물렀다.
1718년에 헨델은 섄도스 공작의 음악감독이 되었는데 섄도스 공작의 궁전이 있는 캐넌스는 런던에서 조금 북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곳에서 헨델은 시인인 존 게이의 〈Acis and Galatea〉(〈Aci, Galatea, e Polifemo〉와는 다른 작품)에 곡을 붙인 〈섄도스 앤섬 Chandos Anthems〉과 〈하먼과 모데케이 Haman and Mordecai〉를 작곡했다. 이것은 헨델의 마지막 작품으로(영국의 풍자 시인인 알렉산더 포프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쓴 가사와 프랑스의 극작가 장 라신의 〈에스더 Esther〉에서 가져온 가사에 의함), 영국 오라토리오 의 실질적인 시발점이 되었다. 확실한 입지를 갖게 된 헨델은 브룩가에 집을 샀는데 이 집은 그의 남은 여생 동안 안식처가 되었다. 1726년 헨델은 영국 국민이 되었고, 이로 인해 왕실 부속 예배당의 작곡가가 될 수 있었다. 이 직위에 있으면서 많은 음악을 작곡했는데 그 가운데는 1727년에 작곡한 〈조지 2세의 대관식 앤섬 Coronation Anthems for George Ⅱ〉과 1737에 작곡한 〈캐롤라인 여왕의 장례식 앤섬 Funeral Anthem for Queen Caroline〉이 있다.
1720~28년 킹스 시어터에서는 왕립 음악 아카데미에 의해 오페라들이 상연되었는데 이곳의 음악감독이었던 헨델은 공연되는 오페라의 대부분을 작곡해야 할 의무를 지녔다. 비록 그 오페라에 나오는 노래들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정작 그 오페라들은 천차만별의 성공을 누렸다. 존 게이의 풍자적인 〈거지 오페라 Beggar's Opera〉가 센세이션을 일으킨 후 1728년부터 이탈리아 오페라의 미래가 점점 불확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헨델은 계속해서 이탈리아 오페라를 최고의 음악형식이라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수지맞는 사업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이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1729년 다시 한번 유럽 대륙을 방문했다. 그가 데리고 있던 몇몇 인기 있는 이탈리아 가수들의 변덕과 불확실한 대중들의 기호에도 불구하고 헨델은 1741년까지 계속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그때까지 40여 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오페라는 런던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쇠퇴기를 맞았는데 대중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윤리관을 가진 가수들이 저속한 가사로 노래하는 이 오락 형식을 영국인들이 용납하지 못한 것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오페라가 쇠퇴하게 되자 오라토리오가 점점 인기를 끌게 되었다.
그후 음악감독, 흥행사, 작곡가, 하프시코드와 오르간 연주의 대가로서, 시대 조류에 민감한 교사로서 전력을 다했으며 1737년에는 뇌일혈로 추정되는 가벼운 발작을 일으키면서 몹시 앓았다. 엑스라샤펠에서 회복된 후에는 여왕의 죽음으로 슬픔을 맞았다. 여왕의 장례식을 위해 독일의 코랄 선율을 사용하여 작곡한 우울한 앤섬은 12월 17일에 대중들 앞에서 연주되었으며 1주 후에는 왕실 예배당에서 왕족들을 위해 사적으로 연주되었다. 그후 헨델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그의 가장 매력적인 희극 오페라의 하나인 〈세르세 Serse〉가 제작되었고 오르간 협주곡 작품 4가 출판되었으며 보다 소규모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사울 Saul〉과 〈이집트의 이스라엘인 Israel in Egypt〉을 작곡했다. 그리고 죽은 음악가들을 위한 기금(지금의 왕립음악가협회) 설립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그가 이탈리아 오페라로부터 이탈한 사실은 1739, 1740년에 영국의 시인 존 드라이든의 〈성녀 세실리아 축일을 위한 송시 Ode for St. Cecilia's Day〉, 존 밀턴의 〈쾌활한 사람 L'Allegro〉·〈사색하는 사람 Il Penseroso〉 등에서 영어 가사를 사용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1740년에 헨델은 합주 협주곡 작품 6과 2번째의 오르간 협주곡들을 출판했다. 그 한 해 동안 오페라의 쇠퇴에 따른 반응으로 노선 변경을 심각하게 고려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로 인해 낙담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전환기에 아일랜드의 총독 데번셔 공작으로부터 더블린 자선기관을 위한 음악을 맡아달라는 초청을 받은 헨델은 침체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과연 그답게 부진을 털어버린 그는 창작에 몰두하여 8월 22일부터 9월 14일 사이에 예약된 오라토리오 〈메시아〉의 초고를 완성했다. 1개월 뒤에는 〈메시아〉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 작곡된 〈삼손 Samson〉이 이미 사보사의 손에 넘겨졌다. 11월에 몇몇 연주자들을 동반하고 체스터를 가는 도중에 더블린에 들른 헨델은 그곳 성당 음악가들의 도움을 얻어 사적으로 〈메시아〉를 시연했다. 12월 23일 더블린에서 예약 연주회를 시작했으며 1742년 4월 13일에는 〈메시아〉가 초연되었다. 이 공연은 청중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으며 6월 3일에 재공연되었다. 여름 동안 아일랜드에 머물면서 헨델은 〈숲의 음악 Forest Music〉을 포함한 소품들의 모음곡을 재편집했다.
다음 3년 동안의 작품들로는 오라토리오 〈요셉과 그의 형제들 Joseph and His Brethren〉(1744 초연)·〈Belshazzar〉(1745), 세속 오라토리오 〈세밀 Semele〉(1743)·〈허큘리스 Hercules〉(1745),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중 데팅겐 전투에서 거둔 프랑스군에 대한 영국군의 승리를 기념하는 〈데팅겐 테 데움 Dettingen Te Deum〉(1743) 등이 있다. 그러나 1745년에는 건강이 더 나빠졌는데 그와 동시대인 한 사람은 그가 〈알렉산더의 향연 Alexander's Feast〉의 공연에서 "하프시코드는 연주하지 않고 풀이 죽어 창백하고 어두운 안색"을 보였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메시아〉 이후 10년간은 헨델의 경력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오라토리오와 대규모 합창곡을 영국의 가장 대중적인 음악 형식으로 만들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사회적인 의미를 갖는다. 1740년대 중반에 '방종'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위대한 오라토리오는 도덕적 타락이 점점 커져가는 데 대한 일종의 보호벽이라는 생각이 퍼져갔다. 이러한 정의감은 1749년 이후 〈메시아〉가 특히 기아 양육원과 결부되면서 확산되었다. 그 병원의 후원자이면서 1750년부터 총재직에 있었던 헨델은 1754년까지 이곳 부속 교회에서의 〈메시아〉 연주를 감독했다.
말년
헨델의 자비심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관심은 영국인들로 하여금 그에게 깊은 애정을 품도록 했다. 심지어 그의 음악은 국민적 인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그러한 분위기를 감지하는 그의 능력은 〈왕궁의 불꽃놀이〉에 가장 잘 나타나 있는데 이 작품에서 그는 1749년에 있었던 슐레지엔 전쟁의 종전을 상징하고 있다. 복스홀 가든에서 있었던 리허설에는 1만 2,000명의 군중이 운집했다. 1750년 여름 마지막으로 독일을 방문한 헨델은 네덜란드에서의 마차 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었다. 회복한 그는 마지막 오라토리오 〈입다 Jephtha〉를 작곡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왔다. 이 작품을 쓰는 동안(1751년 2월 13일 악보를 적으면서) 그의 눈에 문제가 생겨 눈 수술을 받았다. 완전히 눈이 멀지는 않았지만 말년의 작품 창작에 있어 심각한 지장을 받았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입다〉는 1752년 2월 26일 런던의 코벤트 가든 극장(그곳에서 오라토리오가 자주 연주됨)에서 연주되었다. 그때부터 계속 사순절 오라토리오 시즌은 열렬히 환영받았다. 헨델은 연주에 참여하여 때로는 오르간으로 협주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는 사실상 영국 국민들에게 널리 존경받는 명사가 되었다. 헨델은 죽을 때까지 음악 활동에 대한 관심을 멈추지 않았다. 1759년 4월 20일 그가 죽자 위대한 작곡가이며 한 인간으로서 세인의 존경을 받았던 위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3,000명의 군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의 시인 묘역에 묻혔다.
비발디 (Antonio Lucio Vivaldi 1678~1741)
이탈리아의 작곡가, 바이올린의 거장.
비발디는 후기 바로크 시대 기악음악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작곡가의 한 사람이다. 가장 잘 알려진 비발디의 협주곡은 <사계>라는 제목이 붙은 표제적 성격의 작품이다. 아주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고, 교회 관현악단에 들어가 베네치아 음악의 위대한 전통을 접하면서 성장했다. 1703년 사제 서품을 받은 직후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되었고, 이 학교의 연주회를 위해 수백 곡의 협주곡을 작곡했다. 그의 협주곡 가운데 450여 곡 이상이 오늘날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오페라는 몇 곡인지 분명하게 알려지지 않아 50곡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비발디가 살아 있는 동안 출판된 작품들은 그의 명성을 온 유럽에 전파했으며 다음 세대의 작곡가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가장 널리 연주되는 바로크 작곡가의 한 사람이며 많은 실내 관현악단들이 선호하는 작곡가이다.
초기생애
어린시절 고향인 브레시아를 떠나 베네치아로 왔던 아버지 조반 바티스타 비발디는 이발사 였는데, 뛰어난 아마추어 바이올린 연주자로 연주실력이 뛰어나 산마르코 성당 관현악단의 정규단원이 되었다. 1678년 3월 4일 태어난 안토니오 비발디는 너무나 허약했기 때문에 산파는 그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즉시 세례를 받도록 했다. 비발디의 음악적 재능은 아주 어려서부터 나타났다. 그는 곧 아버지를 대신해서 교회 관현악단에 들어갔으며 베네치아 음악의 위대한 전통을 접하면서 성장했다. 비발디가 성직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로 결정하자 관습에 따라 사제를 보좌함으로써 소명을 준비했고 그동안 음악공부를 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따라서 1703년 3월 23일 사제 서품을 받은 직후 오스페달레 델라 피에타의 바이올린 교사로 임명되었다. 일반적으로 음악원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오스페달레는 주로 여자 아이들을 위한 고아원이었다. 이 학교는 몇몇 뛰어난 베네치아의 음악가들을 고용하고 있는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재능있는 원생들을 훈련시켰으며 공공 기부금과 정규적인 일요 연주회의 수익금으로 운영되었는데, 비발디는 이 연주회를 위해 수백 곡의 협주곡을 작곡했다. 비발디가 지휘하는 오스페달레 성가대와 관현악단이 연주하는 그의 음악은 곧 베네치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외국인 방문객들까지도 베네치아에 오면 비발디 연주회에 참석하는 것을 관례로 여기게 되었다.
12개의 트리오 소나타(작품 1)와 소나타들(작품 2)은 베네치아에서 출판되었고, 12개의 협주곡(작품 3)과 독주 바이올린(또는 2대 이상의 바이올린) 및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화성의 영감 L'estro armonico〉은 뛰어난 음악 출판업자인 에스티엔 로제에 의해 암스테르담에서 이미 출판된 상태였다. 이 작품들에서 비발디는 볼로냐의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주세페 토렐리의 정교한 기법을 받아들이고 있다. 비발디가 시도한 관현악의 리토르넬로 와 독주 부분의 과감한 병치는 독주자의 기교적 과시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색인 : 리토르넬로). 그의 협주곡 가운데 450여 곡 이상이 오늘날 잘 알려져 있거나 최소한 추적할 수 있는것들 가운데는 독주 바이올린 협주곡 220곡, 바순 협주곡 37곡, 첼로를 위한 협주곡 27곡, 2대의 바이올린 협주곡 25곡, 오보에 협주곡 11곡, 플루트 협주곡 10곡이 포함되어 있다. 3대 이상의 악기를 위한 협주곡 32곡은 앞의 범주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따로 독자적인 영역을 이루고 있다.
초기 오페라
비발디는 초기에 오페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한 듯한데 이는 당시 사제로서는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 오페라 구조의 기초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곧 그는 극장 지배인들로부터 의뢰를 받게 되었다. 1715년 요한 프리드리히 아르만트 폰 우펜바흐(뒤에 프랑크푸르트의 시장이 됨)가 이탈리아를 방문했을 때 그는 비발디를 일컬어 '기업가'라 했는데 이는 비발디가 오페라 흥행사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작곡한 오페라가 몇 곡인지 이제껏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때 그가 작곡한 오페라가 50곡에 달할 것으로 여겨졌었고 비록 3번째 작품에 관해서만 실제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 발견된 편지에서 비발디는 그가 작곡한 94곡의 오페라를 언급하고 있다. 이 숫자 안에는 같은 오페라를 다시 쓴 것이나 개작도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으며 그 가운데 13곡은 한 작품을 구성하는 일련의 기악곡들로 출판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협주곡과 소나타와는 달리 비발디의 오페라는 1번도 성공적으로 재공연된 적이 없었다. 기껏해야 비평에서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비발디는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 성악 음악을 쓸 수 있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 작품들의 음악적 가치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만(가사에 나타나는 말하는 듯한 속성을 강조하는) 과장된 레치타티보는 극적 흐름을 방해하고 있으며 진부한 대본은 오늘날의 청중들에게는 호소력을 갖지 못하고 있다.
종교음악 역시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1714년 이미 오스페달레의 소녀들이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비발디의 오라토리오 〈모이세스 데우스 파라오니스 Moyses Deus pharaonis〉를 연주했으며 2년 후에는 그의 걸작인 〈승리한 유디타 Juditha triumphans〉를 불렀다. 비발디의 많은 종교 음악 가운데 독창과 합창 부분이 교대로 등장하는 7성부 〈성모 찬가 Magnificat〉와 11개의 개별적인 부분들로 작곡된 〈영광송 Gloria〉이 있다. 다소 느슨하고 단순한 화성 구조를 갖는 협주곡들과는 대조적으로 그의 종교 음악은 전통적인 베네치아 다성음악의 절대적인 통제를 보여주고 있다(→ 색인 : 교회음악).
비발디가 오스페달레에 부임한 처음 10년 동안 관리자측과 비발디의 관계는 극히 좋았는데 그것은 오스페달레의 이름을 널리 알린 데 대한 그의 업적을 생각한다면 그리 놀라운 것도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고 오페라 공연과 다른 곳에서의 지휘 등의 일로 자주 자리를 비우게 되자 그에 대한 불평이 일기 시작했는데 사실 어떤 때는 몇 년 동안 베네치아에 없는 경우도 있었다. 비발디는 오스페달레측과 그가 자리를 비울 경우 1개월에 2곡의 협주곡을 작곡해주기로 계약했지만 관리자측에서는 그가 직접 그 작품들을 지도해주기를 원했다. 결국 교회 당국은 그의 모든 활동들을 너무나 세속적인 것으로 판단해서 반대하기 시작했다. 사제 서품을 받자마자 그는 어려서부터 앓아온 심장 질환(협심증) 때문에 미사에서 강론하는 것도 중단했다. 그는 또한 만토바에 체류했을 당시의 제자 안나 지로의 불륜 관계로 비난받았다. 소프라노 가수였던 그녀는 비발디의 많은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았으며 자매가 함께 비발디가 병상에 있을 때 그의 집에서 그를 간호했다. 1737년 페라라에서 오페라를 제작하고 있을 때 교황의 대사로부터 중단하라는 명을 받았다. 이때문에 경제적인 손실을 입었지만 그에게는 경제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충격을 안겨준 결정적인 일격이었고 그후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그의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되었다.
침체기
비발디는 이 충격으로부터 회복하지 못했는데 이는 무엇보다도 청중들이 그의 음악에 싫증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739년 프랑스 학자 샤를 드 브로스가 베네치아를 방문했을 때 비발디의 인기가 떨어진 것을 발견하고는 놀랐다.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에 실망한 비발디는 빈으로 갔지만 불행하게도 1729년 트리에스테에서 만났던 후원자 카를 6세는 그가 도착한 후 곧 죽었으며 오스트리아는 계속되는 전쟁의 와중에 휩쓸렸다. 그러나 빈은 작품을 위해서는 가장 이상적인 곳이었다. 비발디는 그곳에서 죽었으며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비발디가 살아 있는 동안 출판된 작품들은 그의 명성을 온 유럽에 전파했으며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를 비롯한 다음 세대의 작곡가들에게 본보기가 되었다. 계속해서 그의 후계자들은 또다른 양식을 발전시켰으며 비발디가 죽자 곧 그의 음악적 명성은 쇠퇴했다. 19세기 중엽 새로운 바흐판을 위해 작업하던 학자들은 '비발디의 12개의 협주곡, 바흐 곡 편곡'이라고 적힌 헌사가 포함된 필사본을 찾았는데 이 발견으로 비발디 음악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대두되었다. 그는 가장 널리 연주되는 바로크 작곡가의 한 사람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창설된 많은 실내 관현악단들이 특히 선호하는 작곡가가 되었다.
현존하거나 추적할 수 있는 850여 곡에 달하는 비발디의 작품 가운데 96곡의 협주곡과 42곡의 소나타만이 그의 생전에 출판되었다. 출판된 작품수와 그가 작곡한 전체 작품수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 몇몇 작품들을 따로 소장하는 거장들의 관례를 생각한다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3. 고전주의 음악 (1,750~1,820))
낭만적인 바로크 시대 이후 기악 음악이 중요하게 대두되었던 고전주의 시대 서양 음악의 특징.
바로크 시대의 낭만적이고 극적인 음악이 18세기로 들어와 프랑스 로코코의 아기자기하고 장식적인 음악과 독일의 감정과다 양식을 낳았으며 곧 균형감 있고 고요한 고전주의 음악에 흡수되었다. 기악 음악이 성악 음악보다 중요해지면서 리듬 유형은 좀 더 규칙적이고 단순해졌다. 짧은 주제를 규칙적으로 반복 변주하며 클라이막스를 향해 악곡을 쌓아나가는 기법이 발전하였다. 18세기 중반 만하임 악파는 교향곡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실험하여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 등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18세기 중반에 나폴리 오페라의 정형화되고 인위적인 양식을 풍자한 희가극이 출현하였다. 독일의 희가극인 징슈필은 이탈리아 양식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모차르트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와 <마술피리> 등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하이든 (Franz Joseph Haydn 1732~1809)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18세기 중엽 고전주의 양식의 발전에 큰 역할을 했고, 특히 현악 4중주와 교향곡 형식의 확립에 기여했다.
하이든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였는데, 사촌이자 성가대 지휘자이던 요한 마티아스 프랑크가 하이든을 자신의 집에 두고 교육시켰다. 장크트슈테판 대성당의 성가대 단원으로 기숙하면서 독학으로 음악을 공부했다. 하이든은 여러 후견인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음악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빈에서 모차르트와의 우정이 시작되었고, 곧 유럽 전역에 알려졌다. 헨델, 베토벤 등 많은 음악가들과의 교류가 그에게 음악적 영감을 불어넣었다.
초기생애
가난한 부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레바퀴를 만드는 목수였고 어머니는 결혼전 마을 지주의 요리사였다. 하이든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음악적 재능을 보였고, 부모는 그의 교육에 고심했다. 이러한 고민은 사촌이자 근처 마을인 하인부르크의 학교 교장이며 성가대 지휘자이던 요한 마티아스 프랑크가 하이든을 자신의 집에 두고 교육시킴으로써 해결되었다. 6세도 채 되지 않아 집을 떠난 하이든은 그후 몇 번에 걸친 짧은 방문을 제외하고 다시 고향을 찾지 않았다. 소년 하이든은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여러 악기의 연주법을 익혔고, 음악에 대한 유익한 기초 지식을 쌓았다. 그러나 음악을 제외한 하인부르크에서의 생활은 전보다 더 개선된 것이 없었다. 사촌은 가난했고 늘어나는 식구들을 부양하기에는 봉급이 모자랐다. 하이든은 소년에게 필요한 사랑과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에게는 '음식보다는 매'가 더 많이 주어졌다. 그러나 강한 인내심과 낙천적인 성품을 가졌기 때문에 이러한 역경을 잘 헤쳐나갔다.
하이든의 삶은 8세가 되면서 극적으로 변했다. 하인부르크 방문중에 소년 하이든을 본 빈의 장크트슈테판 대성당의 음악감독 게오르크 로이터가 그를 오스트리아 수도 최고의 교회인 장크트슈테판 대성당의 성가대 단원으로 발탁한 것이었다. 그의 부모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적어도 음악교육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또한 성가대 부속학교에 기숙하면 가족의 재정적인 부담도 줄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1740년 그는 기대감에 부풀어 빈으로 갔다. 9년간 장크트슈테판 대성당 부속학교에서 성가대원으로 있으면서 음악 실제에 관한 지식을 쌓았다. 그러나 음악이론(작곡법)에 대해서는 거의 교육받을 수 없었으며, 하인부르크에서의 생활 패턴이 그대로 재현되는 듯했다. 이곳에서 그는 성가대원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열심히 일을 해야 했고, 식사 문제도 거의 개선된 것이 없었다. 점차 그의 목소리가 변성되어갔고, 목소리가 완전히 변하자 성가대측에서는 그를 더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성가대감독은 그가 우연히 한 농담을 구실로 그를 성가대 학교에서 쫓아냈다. 3벌의 낡은 내의와 낡은 코트 1벌이 그가 가진 모든 재산이었다. 당시 17세였던 하이든은 모든 것을 혼자서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처음 한동안은 동료 음악가의 다락방에 머물면서 춤곡·소야곡 등을 연주하거나 주일 예배에 오르간을 연주하면서, 또는 헐값으로 레슨을 해주는 등 기회 있을 때마다 음악에 관계된 일을 하면서 '비참한' 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이든은 이러한 일들과 병행해서 카를 필리프 에마누엘 바흐 등의 작품이나 중요한 음악이론서들을 열심히 독학으로 연구했다. 그러던 하이든에게 또 한번 행운이 찾아왔다. 당대 성공적인 이탈리아 작곡가이자 성악 선생이던 니콜로 포르포라의 눈에 들게 된 것이었다. 포르포라는 그를 성악 레슨의 반주자로 채용했고 개인 비서 일을 시켰으며, 이에 대한 대가로 작품을 교정해주었다.
인내와 노력으로 그의 실력은 나날이 늘었고, 마침내 그는 귀족 제자들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며, 이들에 의해 오스트리아의 귀족이자 음악 애호가인 카를 요제프 폰 퓌른베르크에 소개되었다. 하이든은 이 귀족의 저택에서 악기 연주자로서 주로 실내악을 연주했다. 이곳에서 쓴 초기 현악 4중주들을 시작으로 그는 일생 동안 80여 곡의 현악 4중주를 작곡하면서 이 음악형식을 발전시켰다. 1758년 하이든은 퓌른베르크의 추천을 통해 최초로 정규적인 자리를 얻었는데, 그것은 보헤미아의 백작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폰 모르친의 개인 악단을 위해 곡을 써주는 일과 개인 음악교사로서의 일이었다. 막시밀리안 폰 모르친은 대부분 보헤미아 서쪽 부근 루카베츠 지방의 전원 저택에서 살았는데, 이곳에서 하이든이 거느린 악단은 16명 정도의 연주자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악단을 위해 하이든은 첫번째 교향곡을 썼는데, 이 작품은 아직 기존의 음악적 관습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신선하고 충격적인 선율의 면모를 통해 미래의 대가 하이든의 작품들을 예견했다.
에스테르하지가의 후원
모르친은 경제적 부담으로 악단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이 때문에 하이든이 실제로 그의 집에 머문 것은 잠깐이었다. 하이든은 얼마 안 있어 팔 온톨 에스테르하지 후작 밑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후작이 모르친의 집에서 연주된 하이든의 작품들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귀족 중에서도 부유하고 영향력 있던 가문 출신이었던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음악과 미술에 대한 후원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던 사람이었다.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빈에서 48km 정도 떨어진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정규적으로 정선된 연주자들로 구성된 악단의 연주를 감상했다. 이 악단의 감독이 나이가 들어 병이 들자 에스테르하지 후작은 아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하이든을 부감독으로 임명했다. 1761년 5월 1일 체결된 계약서에는 하이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세부사항들이 자세히 적혀 있다. 늙은 음악감독은 주로 교회음악에 관여했고, 반면 하이든은 이 악단을 지휘하고 가수들을 매일 연습시키는 일, 필요한 대부분의 곡들을 작곡하는 일, 음악 사서, 악기 보관책, 음악 관계자들의 총관리자 역할 등을 맡았다. 하이든은 이러한 임무들을 잘 수행해나갔고, 시간을 쪼개어 건반악기를 위한 곡을 작곡하거나 음악 채보자의 일을 감독하기도 했다. 관리자로서 그는 기술적으로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훌륭한 솜씨를 보였다. 특히 음악 관계 종사자들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보호하는 데 능력을 발휘했고, 유머 감각과 친밀함을 통해 다른 관리나 고용주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연주자들은 하이든을 '파파'라 부르며 그를 따랐다.
1766년 파울 안톤 에스테르하지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동생 미클로슈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새로운 주인이 되었고,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의 궁정에서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하이든은 이 궁정 소속 합주단의 음악적인 수준을 높이고, 연주자와 가수를 선발해 전체 규모를 늘리려는 야심에 찬 계획을 벌였으며, 이것은 새로운 주인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열성적이고 감각 있는 음악 애호가인 새로운 주인은 하이든이 쓴 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음미할 줄 알았고, 그의 음악이 발전하고 성숙할 만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는 거의 30여 년에 걸쳐 미클로슈 에스테르하지 후작 밑에서 일하면서 바쁘면서도 보람찬 생활을 보냈다. 하이든은 사냥과 낚시 등 야외 활동을 좋아했다. 순회공연을 통해 외부 세계로부터의 고립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고, 저명한 작가, 음악가들의 작품을 에스테르하지 궁정에 가져올 수도 있었다. 또한 그는 후작을 수행하여 빈을 자주 방문했다.
모차르트와의 긴밀한 우정이 싹트게 된 것도 빈 방문이 계기가 되었다. 모차르트는 하이든보다 24세나 어렸지만 이것이 두 사람 사이의 우정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에 고무되었다. 모차르트는 하이든으로부터 현악 4중주 쓰는 법을 배운 것에 감사하면서 '경애하는 친구'에게 6곡의 현악 4중주를 헌정했다. 하이든 역시 젊은 친구인 모차르트에게 받은 음악적인 충격을 표현했다. 성숙한 하이든이었지만 그는 자기 방식만을 고집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새로운 생각에 대해 융통성 있게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보였다. 모차르트와는 달리 하이든은 일생 동안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하이든의 작품들은 전유럽에서 연주되었고, 오스트리아·독일·네덜란드·프랑스·영국 등지에서 악보로 출판되었다. 그는 유럽의 많은 음악 애호가들로부터 공식적인 후원을 받았다. 그 예로 1796년 스페인의 카디스에서는 성 금요일 예배를 위한 〈7가지 마지막 말씀 The Seven Last Words〉, 나폴리 왕은 리라 오르가니차타와 허디거디를 위한 곡들을 위촉했다. 교향곡 82~87번에 해당하는 '파리 교향곡'들은 파리로부터 위촉받은 곡들이다.
하이든은 음악가로서는 성공했지만 개인으로서는 성공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 그를 사랑한 한 소녀가 수녀원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녀의 부모는 하이든으로 하여금 수녀원에 들어간 딸의 언니와 결혼하도록 종용했다. 당시 하이든은 모르친 백작의 저택에서 일자리를 얻게 된 즈음이었다. 결혼생활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고, 자식도 없었다. 아내는 2세 연상으로 싸움을 좋아했고 고집이 세었다. 음악에 대한 이해도 없었으며, 따라서 남편의 작품에 대해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하이든의 자필 악보를 불을 지필 때 사용하는 기름종이로 사용할 정도였다. 그결과 하이든은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수년 동안 후작의 저택에 고용된 젊은 이탈리아 출신 메조소프라노 가수 루이지아 풀첼리와 사랑에 빠졌다.
영국 시절
1790년 미클로슈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죽고 아들인 온톨 에스테르하지 후작이 새로운 주인이 되어 궁정 음악가들을 대부분 해고시켰지만, 하이든만은 그대로 남게 했고, 월급도 주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떤 의무도 주어지지 않았고, 마음내키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다. 하이든은 에스테르하지가 궁정에 오랫동안 머무는 동안 새로운 방식의 삶을 모색했다. 하이든이 시간적인 자유를 얻게 되자 2곳으로부터 제의가 들어왔다. 하나는 나폴리 궁정을 방문해 달라는 나폴리 왕으로부터의 제의였고, 또 하나는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연주회 매니저인 요한 페터 잘로몬의 제의였다. 잘로몬은 영국에서 건너와 하이든에게 자신이 주최하는 런던에서의 일련의 연주회를 위해 6곡의 새로운 교향곡과 20곡의 소품 작곡과 지휘를 매우 좋은 조건으로 위촉했다. 영국으로부터는 잘로몬의 이러한 제의와 더불어 킹스 시어터를 위해 새로운 이탈리아 오페라 1편을 작곡해주는 대가로 300파운드를 지불하겠다는 제의도 들어왔다. 하이든은 이탈리아 쪽의 제의보다는 영국 쪽의 제의에 더 솔깃했다. 하이든은 영국에 가면 잘 훈련된 대규모 관현악단과 일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번창했던 음악도시인 런던에서 살며, 독립된 생활이 보장되는 것이었다.
모차르트를 포함한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런던을 향해 떠났다. 하이든은 이전까지 한번도 오스트리아를 떠난 적이 없었다. 1791년 새해 첫날 영국에 도착했고, 18개월 지난 뒤 그 결과는 아주 긍정적인 것이었다. 여러 가지 신선한 인상들과 저명 음악가들과의 만남, 그에게로 향한 존경의 눈빛 등으로, 하이든의 창작 작업은 빛날 수 있었다. 2번에 걸쳐 이루어진 런던 방문중에 쓰여진 교향곡들은 그의 관현악 작품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 교향곡들은 관현악 편성의 기교적 경지, 형식의 능숙한 처리, 자유롭게 흘러 영감에 가득 차 있는 선율선, 유머 감각 등으로 영국 청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이 인기는 '놀람', '시계', '군대', '큰북 연타' 등과 같이 작품에 붙여진 별명들에서도 반영된다. 하이든이 직접 지휘하는 모습은 위대한 영국의 음악사가인 찰스 버니의 말대로 "자리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기 충격과도 같은 감동을 주었고, 가히 열광적이라 할 만한 열정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킹스 시어터를 위해 작곡한 오페라는 공연 허가를 받지 못했지만, 하이든은 재정적인 손실을 당하지 않았고 정신적으로도 그다지 당황하지 않은 듯했다(→ 색인 : 런던 교향곡).
영국에서 하이든은 왕실에서뿐만 아니라 여러 저명한 인사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1791년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명예음악박사학위를 받았고, 웨일스의 후작과 요크의 공작을 위해 연주회를 열었다. 하이든의 일기에는 그가 '영광스러운 접대를 받은' 여러 방문들과 그곳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성들에 대한 언급이 씌어 있다. 60세가 된 하이든의 얼굴은 천연두로 얽혀 있었고 코는 매부리에다가 짧은 다리를 가졌지만, 많은 여성들로부터 존경과 숭배를 받았다.
그러던 중 에스테르하지가에서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리는 황제 프란츠 2세 대관식에 하이든이 수행해줄 것을 원했고, 1792년 6월 하이든은 런던을 떠나 독일로 향했다. 여행중 그는 본에 들려 22세의 베토벤을 소개받았고, 이를 인연으로 베토벤은 빈으로 거주지를 옮겨 하이든에게 레슨을 받기도 했다. 7월 29일 하이든은 빈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영국에서 벌어들인 돈으로 좋은 집을 살 수 있었다. 굼펜도르프의 외곽지역에 자리잡은 이 집은 오늘날 그대로 보존되어 하이든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이든이 빈에 머문 것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이었다. 영국의 숭배자들은 하이든에게 빨리 런던을 다시 방문해줄 것을 요청했고, 1794년 1월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1795년 8월 15일까지 머물렀다. 왕실의 여러 사람들이 그가 계속 영국에 머물도록 노력을 했지만 하이든은 이를 거절했다. 그가 영국 체류를 거절한 것은 에스테르하지가의 새로운 주인이 된 미클로슈 2세가 하이든이 감독으로 있던 이전의 관현악단을 원상태로 다시 부활시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이든은 미클로슈 2세의 새로운 제의에 끌려 계약을 체결했다. 새로 하이든에게 주어진 일은 전처럼 힘겨운 일이 아니었다. 겨울 동안에는 빈에서 보내도 된다는 조건이 하이든의 결정에 강한 동기를 작용했다. 하이든은 런던의 많은 친구들을 떠나야 했지만, 영국 체류시기를 결실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짐꾸러미에는 768쪽에 달하는 악보로 가득 찼고, 창작작업에 대한 충분한 보수와 음악적 자극을 받은 것에 대해 만족해했다.
에스테르하지가에서 보낸 만년의 빈 시절
1791년 하이든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서 열린 헨델 추모음악회에 참석하고는 헨델의 위대한 오라토리오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하이든은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고자 적당한 대본을 구했는데,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대본은 헨델을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하이든은 빈에 정착하여 다시 에스테르하지 후작을 위한 일을 시작하면서,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The Creation〉의 작업에 들어갔다. 원래 존 밀턴이 지은 서사시 〈실락원 Paradise Lost〉과 성서의 〈창세기〉에 기초한 이 작품의 대본은 고트프리트 판 슈비텐 남작에 의해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오라토리오 작곡은 하이든의 적성에 잘 맞는 작업이었다. 하이든은 신앙심이 투철했고 전생애를 통해 로마 가톨릭 교회를 위한 아름다운 라틴어 미사곡들을 썼다. 독일어 가사에 의한 〈천지창조〉 작곡을 통해서는 신에 대한 하이든의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고 음악을 통해 그를 그토록 기쁘게 했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했다. 이 작품을 작곡하던 기간은 그의 생애 전체를 볼 때 어떤 시절보다도 행복했다. 하이든은 신앙심으로 고양되었고 신과의 영적인 교감을 가졌다. 1798년 4월 오라토리오 〈천지창조〉가 한 후작의 궁정에서 초연되었고 사람들로부터 커다란 반응을 얻었다. 얼마 안 가서 공개연주회가 열렸고 반응도 전과 마찬가지로 대단했다. 그후 〈천지창조〉는 계속해서 대성공을 거두면서 연주되었고, 하이든 자신의 요청에 따라 자선연주회도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성공으로 하이든은 또다른 오라토리오 〈사계 The Seasons〉를 쓰기 시작해 1801년에 완성했다. 제임스 톰슨(1700~48)이 대본을 썼으며 역시 고트프리드 판 슈비텐이 번역했다. 하이든은 대본의 덕분으로 대자연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광경들을 음악으로 잘 표현할 수 있었다. 이 작품 역시 궁정과 공개연주회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궁정연주회에서는 오스트리아 여황제가 직접 소프라노 솔로를 맡아 불렀다. 만년의 하이든이 작곡한 또다른 작품으로는 미클로슈 에스테르하지 2세를 위해 작곡한 6곡의 미사곡을 들 수 있는데 이 작품들은 18세기의 대표적 미사곡으로 꼽힌다. 그밖에 현악 4중주들을 연속적으로 작곡했고, 1797년에는 오스트리아를 위해 감동적인 노래 〈신이여 황제 프란츠를 보호하소서 Gott erhalte Franz den Kaiser〉를 작곡했다. 이 노래는 이후 1세기가 넘도록 오스트리아 제국의 국가로, 또한 독일의 애국적 노래 〈독일, 가장 뛰어난 독일 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로 사용되었고, 오늘날 영어권 나라의 프로테스탄트 찬송가에서도 여러 가지 제목으로 들을 수 있다. 하이든은 이 노래를 아주 좋아하여 그의 현악 4중주 3번 〈황제 Emperor〉 작품76의 변주곡의 주제로도 사용했다.
만년에 하이든은 유럽의 여러 곳으로부터 존경의 표시를 받았다. 사실 그의 명성으로 볼 때 놀랄 만한 일이 못되며, 하이든 스스로도 이에 대해 흡족스럽게 생각했다. 스톡홀름·암스테르담·상트페테르부르크·파리 등에서는 그를 음악협회 명예회원으로 추대했고, 파리는 〈천지창조〉의 초연 후에 금메달로 그를 기념했다. 오스트리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출생지인 로라우에서는 하이든이 보는 가운데 기념비가 세워졌고, 빈에서는 그에게 금으로 된 공로 훈장을 수여했다. 특히 인상적인 사건은 1808년 그의 76회 생일을 기념하는 빈 축하 연주회였다. 연주회에서는 명연주자들에 의해 〈천지창조〉가 연주되었고, 병져 누워 있던 하이든이 직접 참석했다. 그는 팔걸이 의자에 앉은 채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연주회장에 들어와 귀족들이 앉는 곳에 함께 앉았다. 그를 기념하는 시가 낭송되었고, 박수갈채가 연주회장을 뒤흔들었다. 그가 자리를 떠나려 하자 왕년의 제자 베토벤이 무릎을 꿇고 스승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이것은 최후로 참석한 공개연주회였다. 이후로 빈의 상황은 힘이 없는 노령의 하이든이 연주회에 참석하기에는 너무 열악했다. 오스트리아와 빈은 1809년 나폴레옹 군대의 공격을 받았다. 전쟁중에 빈은 폭격을 당했다. 하이든의 집 근처에도 포탄이 떨어졌지만, 나폴레옹은 보초들로 하여금 하이든의 집 둘레를 경비하도록 했다. 한 프랑스 장병이 하이든의 집을 방문하여 그와 그의 음악에 대해 경의를 표하자 병든 하이든에게도 잠시나마 기쁜 휴식이 주어졌다. 이 장병은 〈천지창조〉에 나오는 아리아 한 곡을 불렀고, 노래를 들은 하이든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노래를 부른 이 장병은 얼마 후 전사했고, 하이든도 그가 죽은 지 며칠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들은 프랑스 군인들이 영구차 뒤에서 열을 지어 따라 걸었다. 빈의 명사들과 프랑스의 고급 장교들도 이 천재 작곡가에게 경의를 표했다.
모차르트 (Wolfang Amadeus Mozart 1756~1791)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요제프 하이든과 더불어 18세기 빈 고전주의 악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오페라, 실내악,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등 여러 양식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겨 전시대를 통틀어 음악의 천재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1762년 첫번째 음악 여행에서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를 만났고 거기서 그의 첫번째 교향곡을 썼다. 1769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하이든의 현악 4중주를 보았고 첫번째 이탈리안 오페라를 썼다. 1780년대 후반 〈피가로의 결혼〉·〈돈 조반니〉·〈코지 판 투테〉등의 작품으로 그는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모차르트는 35살에 병으로 죽었는데, 이처럼 짧은 생애 동안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작곡가는 없다.
요제프 하이든과 더불어 18세기 빈 고전주의 악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오페라, 실내악, 교향곡, 피아노 협주곡 등 여러 양식에 걸쳐 방대한 작품을 남겨 전시대를 통틀어 음악의 천재 중 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바이올린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1719-87)의 아들이다. 그와 그의 누나인 마리아 아나(1751-1829)는 음악적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 1762년 레오폴트는 그의 어린 아이들과 유럽 음악 여행을 시작하였다.
모차르트는 첫번째 음악 여행(1762-69)에서 프랑스와 잉글랜드에 갔는데, 그곳에서 그는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를 만났고 거기서 그의 첫번째 교향곡을 썼다. 이탈리아 여행(1769-74)에서 그는 처음으로 요제프 하이든의 현악 4중주를 보았고 첫번째 이탈리안 오페라를 썼다. 1775-77년 그는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첫번째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했다. 그의 어머니가 1779에 죽자, 그는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서 잘츠부르크로 돌아왔고, 1781년 정가극 〈이도메네오 Idomeneo〉를 썼다.
1781년 그는 대주교와의 갈등으로 쫓겨났다. 모차르트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베버가로 옮기고, 비엔나에서 그의 독립적인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는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하였고, 〈The Abduction from the Seraglio〉(1782)와 많은 그의 위대한 피아노 협주곡을 썼다. 1780년대 후반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돈 조반니 Don Giovanni〉·〈코지 판 투테 Cosi fan tutte〉등의 작품으로 그는 최고의 성공을 거두었다. 모차르트는 35살에 병으로 죽었는데, 이처럼 짧은 생애 동안 위대한 업적을 남긴 작곡가는 없다.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1770~1837)
1770. 12. 17 독일 본에서 세례받음~ 1827. 3. 26 오스트리아 빈.
독일의 작곡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과도기의 주요인물이다.
베토벤의 음악세계는 하이든·모차르트의 고전주의 전통에 입각했고, 문학계의 동시대 작가 괴테와 실러의 작품에 표현된 새로운 시대정신을 포괄했으며,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열정적으로 부르짖던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좇았다. 베토벤은 이전의 어떤 작곡가들보다도 생생하게 삶의 철학을 대사 없는 음악으로만 표현해 음악의 위력을 드러냈다. 그의 몇몇 작품들에서는 인간의 의지에 대한 확신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그 자신은 낭만주의자는 아니었지만, 그를 따르는 여러 낭만주의자들의 작품들에 대해 사고의 원천이 되었다. 낭만주의자들이 따르게 된 특질들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설명적 음악인 표제음악에 대한 그의 이상에 있었다. 베토벤은 교향곡 6번 〈전원 Pastorale〉과 연관해 표제음악을 "회화적이라기보다는 감정의 표출"이라고 정의했다. 음악 형식에서도 위대한 혁신가였던 그는 소나타·교향곡·협주곡·현악4중주 등의 영역을 확대했고, 교향곡 9번에서는 지금까지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성악과 기악을 한데 결합시켰다. 그의 개인적 삶은 병든 귀에 대한 영웅적인 투쟁으로 점철되었고, 중요작품들 중 일부는 그가 완전히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마지막 10년간 작곡된 것이었다. 궁정과 교회의 후원이 사라진 때에 살았던 그는 악보 출판과 작곡료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야 했다. 그는 자신의 내적 감정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데만 관심을 가진 최초의 직업적인 음악가였다.
4. 낭만주의 음악(18세기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
낭만주의 음악은 독창성, 개성, 개인적인 감정의 표현, 실험정신이 가미된 자유로운 형식이 두드러진다(→ 색인 : 서양음악사). 루트비히 판 베토벤과 프란츠 슈베르트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잇는 교량이었으며 그들의 기법은 기본적으로 고전주의 양식이었지만, 강렬한 개인적 감정과 표제적 요소는 19세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에게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 또한 리트[歌曲], 야상곡(夜想曲), 간주곡, 카프리치오[奇想曲], 전주곡 및 마주르카 같은 새로운 음악형식이 등장함에 따라 음악의 극적인 표현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낭만주의적 정신은 시와 전설 및 민간 설화에서 영감을 얻었고, 문학과 음악을 표제음악이나 서곡, 부수음악 같은 형식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낭만주의 음악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낭만주의 초기의 주요 작곡가는 엑토르 베를리오즈, 프레데리크 쇼팽, 펠릭스 멘델스존, 프란츠 리스트였다. 이들은 오케스트라의 표현력을 최대한으로 확대하고, 반음계를 온전히 이용하기 위해 화성의 수를 늘렸으며, 악기와 사람의 소리를 조화시키는 방법을 연구했다(→ 색인 : 악기편성법). 낭만주의 음악의 중기 단계를 대표하는 작곡가는 안토닌 드브르자크, 에드바르트 그리그, 표트르 일리히 차이코프스키이다. 음악을 통해 민족의 독특한 정서를 표현하려는 낭만주의의 노력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안토닌 드보르자크, 베드르지흐 스메타나를 비롯하여 러시아, 프랑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여러 작곡가들의 작품에 드러나 있다.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는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작품으로 시작된 반면, 이탈리아에서는 가에타노 도니체티와 빈첸초 벨리니, 조아키노 로시니 같은 작곡가들이 발전시켰다. 이탈리아 낭만주의 오페라를 수준 높게 끌어올린 사람은 주세페 베르디였다.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낭만주의 음악의 마지막 단계를 대표하는 작곡가로는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활동한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에드워드 엘가, 얀 시벨리우스 등이 있다.
슈베르트 (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음악을 연결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선율과 화성적 면모가 두드러진 리트 (독일 가곡)와 실내악으로 유명하다. 가곡 중에는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 “아름다운 물레방앗간의 아가씨”, “백조의 노래”등도 있다.
그밖의 장르에 속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C장조 교향곡 〈대교향곡 The Great〉(1828), B단조 교향곡 〈미완성 교향곡 Unvollendete〉(1822), 다수의 미사곡, 피아노곡이 있다.
슈만 (Robert (Alexander) Schumann 1810~1856)
독일의 낭만주의 작곡가.
피아노 음악, 가곡(리트), 관현악곡으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적인 피아노곡들 중에는 1840년 아내가 된 피아니스트 클라라 슈만을 위해 작곡한 곡들이 많다.
쇼팽(Frédéric(-François) Chopin 1810. 바르샤바 근처 젤라조바볼라 ~ 1849. 파리)
낭만주의 시대 폴란드 태생 프랑스의 작곡가·피아니스트.
피아노 협주곡과 55곡의 마주르카, 13곡의 폴로네즈, 24곡의 전주곡, 27곡의 연습곡, 19곡의 야상곡, 4곡의 발라드, 4곡의 스케르초를 포함한 피아노 소품들로 유명하다. 뛰어난 상상력과 섬세한 장인 정신의 소유자인 그는 음악에 있어 위대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쇼팽은 어려서부터 음악 신동으로 알려졌다. 명성은 연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7세에 그는 폴로네즈 G단조를 작곡하여 출판하기도 했다. 피아노 음악과 평생 함께 한 쇼팽의 삶은 그러나 빈곤과 질병으로 시달렸다. 소설가 조르주 상드와의 만남과 결별도 그를 힘들게 했다.
피아노 협주곡과 55곡의 마주르카, 13곡의 폴로네즈, 24곡의 전주곡, 27곡의 연습곡, 19곡의 야상곡, 4곡의 발라드, 4곡의 스케르초를 포함한 피아노 소품들로 유명하다. 뛰어난 상상력과 섬세한 장인 정신의 소유자인 그는 음악에 있어 위대한 시인으로 평가되고 있다.
폴란드로 이주한 프랑스인인 쇼팽의 아버지 니콜라스는 젤라조바볼라의 스카르벡 가문을 포함한 여러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로 일했으며 스카르벡 집안의 가난한 친척과 결혼했다. 쇼팽이 태어난 지 8개월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바르샤바에 있는 학교의 프랑스어 교사가 되었으며 쇼팽 자신도 1823~26년 그 학교에 다녔다.가족 모두가 예술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아기의 쇼팽도 항상 그의 어머니나 누나가 연주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면서 이상한 행동을 하곤 했다. 6세 무렵에 이미 그는 그가 들었던 것을 재현하려고 하거나 새로운 선율을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다음해 그는 61세의 보이체크 (아달베르트) 지브니 밑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지브니는 당시 유행하던 근대의 기교파 작곡가들과 바흐, 모차르트 및 베토벤의 가치를 비교·고찰하는 명민한 감각을 소유했던 다재다능한 음악가였다.
쇼팽은 어려서부터 개인의 저택에서 열리는 저녁음악회에 초청되었고 8세에 공공 자선연주회에서 처음으로 공개연주를 가졌다. 3년 후 의회 개회를 위해 바르샤바에 온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앞에서 그는 새로운 종류의 오르간인 에올로멜로디콘(지방 음악가가 고안)으로 즉흥 연주를 했다. 신동으로서의 명성은 연주 때문만은 아니었다. 7세에 그는 폴로네즈 G단조를 작곡하여 출판했으며 곧 그가 작곡한 행진곡이 콘스탄틴 대공의 마음을 끌어 대공 자신의 군악대가 행진할 때 이 곡을 쓰도록 했다. 그밖에 폴로네즈·마주르카·변주곡·에코세즈(활기찬 스코틀랜드 춤곡)·론도(주요부분이 반복되는 음악 소품) 등을 계속 작곡했으며 그결과 그가 16세가 되었을 때 그의 가족은 그를 새로 설립된 바르샤바 음악원에 입학시켰다. 그 음악원의 교장은 폴란드의 작곡가 요세프 엘스너였는데 쇼팽은 그에게 여러 해 동안 음악이론을 배웠다. 쇼팽에 있어 엘스너는 최상의 선생이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낭만주의적 경향의 작곡가로서 전통적인 교육을 강조하면서도 쇼팽의 독창적인 상상력을 단순한 제도적 교육의 테두리에 가두어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샤바의 활기찬 음악생활에도 불구하고 쇼팽은 보다 폭넓은 음악적 경험을 필요로 했다. 재정적 보조 요청에 대한 정부의 거절에도 좌절하지 않고 쇼팽의 헌신적인 부모는 그를 빈으로 보낼 수 있는 돈을 구했다.
엘스너의 소개로 쇼팽은 곧바로 빈의 출판업자인 토비아스 하슬링거에게 갔으며 하슬링거는 쇼팽이 선전을 위해 무료로 공개연주회를 갖는다는 조건으로 그가 작곡한, 모차르트의 〈라 치 다렘〉 주제에 의한 변주곡들을 출판할 것에 동의했다. 빈에서 새로 사귄 다른 친구들도 그의 무대 출연을 주장했고 그결과 쇼팽은 1829년 8월에 2번의 연주회를 가졌다. 지나치게 섬세한 터치로 청중들에게 약간의 충격을 주기는 했지만 그는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으며 환영 인파의 광적인 소란 속에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그 소란은 그가 가능한 한 빨리 돌아감으로써만 완전히 진정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1829년 9월 바르샤바로 돌아온 쇼팽은 바르샤바 음악원의 매력적이고 인기있는 젊은 성악도인 콘스탄티아 글라드코프스카와 사랑에 빠졌다. 이 시기의 그에게 있어 영감의 원천은 사람의 목소리(특히 이탈리아 오페라에 포함된 것)로, 아름다운 선율과 현란한 장식이 있는 야상곡과 시적인 기교를 보여주는 2개의 피아노 협주곡의 서정악장들도 이때에 작곡되었다. 1830년 3월 피아노 협주곡 2번 F단조 연주로 성인으로 바르샤바 데뷔를 했다. 그는 이 협주곡의 느린 악장을 콘스탄티아를 추억하여 작곡했다고 고백했다.
1830년 11월말 빈에서 쇼팽은 대중의 취향이 너무 피상적이고 하슬링거가 자신의 작품을 계속 출판하는 모험을 주저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으며, 아무도 다투어 그를 연주회에 초청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더 많은 공부를 하려 했을 때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도 없었으며 이미 그의 부모에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경제적 부담을 주었다는 것도 알았다. 폴란드가 러시아에 대항해 봉기했다는 소식은 모두를 들뜨게 만들었다. 그의 가족은 그가 돌아와 싸움터로 나가기를 원하지 않았고 빈 사람들은 그의 개인적인 문제인 민족적 갈등에 대해 관심이 없었으므로 그는 곧 보다 이상적인 환경을 찾아 파리로 향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다. 여권 발급이 늦어지는 지루한 기간 동안 그는 애국적인 시에 곡을 붙이거나 〈스케르초 B단조〉 작품 20과 〈혁명 연습곡〉 작품 10·12와 같은 격렬한 피아노 독주곡을 작곡하면서 스스로를 달랬다. 결국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 도착해 바르샤바가 러시아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절망으로 거의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1831년 9월말경에 파리에 도착한 그는 그 규모와 함께 '화려함과 추잡함, 미덕과 악덕'의 극치에 압도당했다. 그러나 곧 폴란드 밖의 그 어디에서도 혈족의 끈끈한 유대감을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빈에 있는 친구의 소개로 파리의 연주 무대에서 성공한 인물들과 사귈 수 있게 되었지만 쇼팽은 곧 많은 폴란드 이주민들과 프란츠 리스트, 엑토르 베를리오즈, 펠릭스 멘델스존, 빈센초 벨리니를 포함한 보다 젊은 세대의 작곡가들과 첼로 연주자 오귀스트 프랑콤에게서 정서적인 동질감을 발견했다. 파리에서 먼저 부딪힌 문제는 직업과 재정적인 문제였다. 카미유 플레옐의 살롱에서 1832년 2월에 있었던 데뷔 연주와 음악원 대강당에서 5월에 있었던 연주 이후, 그는 건반을 다루는 데 있어서의 극단적인 섬세함으로 인해 보다 큰 공간에서는 모든 사람들의 취향에 부합할 수 없음을 알고 낙심했다. 그러나 금융업을 하는 부유한 로트쉴드 가족과 만나게 됨으로써 갑자기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되었다. 우아한 매너와 세련된 옷차림, 타고난 감각의 소유자인 쇼팽은 연주가·음악교사로서 파리의 대저택에서 가장 환영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 시기에 작곡된 피아노곡으로는 놀랄 만큼 시적인 2권의 연습곡집 〈발라드 G단조〉·〈즉흥 환상곡 Fantaisie-Impromptu〉, 쇼팽의 강한 민족주의적 정서를 반영하고 있는 마주르카와 폴로네즈 등 작은 소품들이 있다.
1835년은 개인적인 이유에서 기억할 만한 해였다. 쇼팽은 보헤미아의 카를스바드에서 그의 부모와 함께 짧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낸 후 독일의 드레스덴으로 가서 오랜 폴란드 친구인 보드진스키 일가를 만났는데 그는 그 집안의 딸인 매력적인 16세의 소녀 마리아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은 쇼팽의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소문을 들은 보드진스키 부인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크게 상심한 쇼팽은 친구 플레옐과 함께 영국으로 짧은 여행을 했는데 파리에 돌아왔을 때 그에게는 또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1836년 가을 리스트와 그밖의 문학하는 친구들과 함께 쇼팽은 선정적이며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는 여류 소설가인 조르주 상드(오로르 뒤팽 혹은 뒤드방 부인)를 만나 사랑에 빠졌는데 그녀는 스스로 원해서 그의 정부가 되었다. 처음에는 마리아에 대한 애정, 파리 사람들의 소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망설였지만 1838년 가을, 결국 그의 도덕적인 양심의 가책을 너무나 고지식한 것으로 생각하는 상드와 그녀의 아이들인 모리스, 솔랑주와 함께 겨울을 보내기 위해 마요르카 섬으로 갔다. 그들은 팔마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조촐한 별장을 빌려 목가적이고 행복한 나날을 보냈으나 얼마 안 가서 행복한 생활은 끝나고 쇼팽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그가 결핵이라는 소문이 별장 주인에게 전해지자 그들은 그곳에서 쫓겨났으며, 멀리 떨어진 발데모사의 마을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프랑스 영사의 배려에 그들 자신을 맡겨야만 했다.
추위와 습기, 영양실조, 게다가 그들의 이상한 관계에 대한 그곳 사람들의 의심과 제대로 된 연주용 피아노의 부재는 쇼팽의 작품활동에 지장을 주었으며 그의 위태로운 병세를 더욱 악화시켰다. 상드는 즉시 그곳에서 떠나야만 그의 생명을 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1839년 3월초에 마르세유에 도착했으며 훌륭한 내과의사의 도움으로 쇼팽은 불과 3개월 만에 충분히 회복되었고 파리로 돌아갈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그들은 파리 남쪽으로 290km 정도 떨어진 노앙에 있는, 상드가 좋아하는 시골집에서 1839년 여름을 보냈다. 쇼팽 역시 처음에는 장미꽃이 피고 나이팅게일이 노래하는 한적한 정원에 매혹되었지만 자신이 전원생활에는 적합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1841년 4월 첼로 연주자인 친구 프랑콤과 메조 소프라노 폴린 비아르도가 함께 출연하는 연주회에 앞서 계획된 플레옐의 저택에서 파리 귀환을 알리는 반(半) 공개연주회에 초청되어 파리로 돌아왔고, 또한 튈르리궁에서 루이 필리프 왕을 위해 연주회를 열도록 부탁받기도 했다. 이 연주회를 통해 경제적인 대가를 얻었지만 정신적인 압박은 너무나 컸다. 그는 안정된 수입원을 얻기 위해 다시 개인교습을 시작했다. 피아노 레슨에서 그는 손목과 팔의 유연한 움직임을 강조했으며, 아름답고 노래하는 듯한 소리를 만드는 것을 가장 필수적인 조건으로 삼아 민첩한 손놀림을 위해 과감하게 비전통적인 운지법을 사용하게 했다. 점차 새로운 작품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으며 출판업자를 상대하는 솜씨도 능숙해짐에 따라 그는 좀더 여유있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항상 건강이 좋지 않았다. 쇼팽에 대해 모성애적인 태도를 갖게 된 상드는 매년 여름(1840 제외) 그를 노앙으로 데려가 신선한 공기를 쐬며 휴식하게 했다. 폴린 비아르도와 화가인 외젠 들라크루아 등 절친한 친구들도 초대되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1844년에는 쇼팽의 누이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다. 쇼팽은 〈환상곡 F단조(1840~41), 〈바르카롤레〉(1845~46), 〈환상 폴로네즈〉(1845~46), 〈발라드 A이미지장조〉(1840~41), 〈발라드 F단조〉(1842), 〈소나타 B단조〉(1844) 등과 같은 소품과 그밖에 보다 규모가 큰 작품 등 자신의 작품 중 상당수를 노앙에서 작곡했다. 노앙에서 평온을 되찾았고 완벽을 추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음악적 아이디어를 보다 길고 복잡하게 발전시키려고 노력했으며 심지어는 대위법을 보강하기 위한 음악적 논문을 구하러 파리로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이 시기에 그의 화성 어법은 훨씬 대담해졌는데 그러면서도 감각적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 그는 평생토록 감각적 아름다움을 좇았으며 묘사적 제목이나 '표제'에 대한 암시 수법을 아주 싫어했다. 쇼팽이 좀더 안정된 성격의 소유자였다면 노앙에서 보낸 여름생활들을 훨씬 잘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오히려 상드와의 긴장된 관계로 인해 점차 우울해지고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1847년 여름 더이상 노앙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고 이듬해에 결국 상드와 헤어졌다. 둘은 재결합을 원했으나 자존심 때문에 이러한 바람은 끝내 무산되어 버렸다.
상드와의 결별이 가져다준 정신적 파탄과 1848년 2월 16일 플레옐의 저택에서 있었던 연주회(새로 작곡한 첼로 소나타를 프랑콤과 함께 연주함) 이후 불과 며칠 사이에 파리에서 발발한 혁명으로 인해 낙담한 쇼팽은 그를 숭배하는 44세의 스코틀랜드인 제자 제인 스털링의 초청을 수락하여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방문했다. 그해 부활절과 8월 사이에 3대의 그랜드 피아노를 놓을 수 있을 만큼 크고 우아한 방에서 머무는 동안 그는 필하모닉 협회에서 제안한 직책을 포함한 모든 고정 직책에 대한 제의를 거절하고는 런던 순회 레슨과 파티 참석에 열을 올렸다. 토머스 칼라일, 찰스 디킨스, 제닌 린드와 같은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예술을 단지 신분의 상징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많은 외국인들과의 접촉에서 오는 긴장을 조금은 경감시켜 주었다. 그러다가 한여름에 지칠 대로 지친 그는 스코틀랜드로 탈출해서 에든버러, 글래스고 및 스털링 근처에 있는 스털링 귀족 가문의 몇몇 친척 집에서 쉬었다. 그러나 점점 쇠약해지고 향수병에 시달려 스털링의 헌신적 애호에 보답할 수 없다는 난처한 생각에 빠져들게 되면서 작곡을 할 수 없게 되었다. 3주 동안 런던에 돌아와 있으면서 그는 폴란드 난민을 위한 자선무도회에서만 연주했으며 11월 24일 파리로 돌아왔다. 다음해 봄 건강이 악화되자 의사는 보다 맑은 공기를 위해 샤요 교외로 나갈 것을 권했고 친구들의 재정적 도움으로 요양을 하게 되었는데 나이든 그의 어머니까지 2,000프랑을 보내왔다. 1849년 8월에는 누이가 찾아왔으며 파리 중심부의 넓은 새 아파트로 돌아온 후 마지막 남은 몇 달 동안 보고 싶어하던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남은 생을 보냈다. 쇼팽은 폴란드 사제로부터 종부 성사를 받고 자신의 미완성 악보를 파기할 것과 그의 장례식에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연주하도록 유언했으며 그의 마지막은 평온했다. 장례식은 10월 30일 마들렌 성당에서 거행되었으며 식후에는 애도객들이 페르라셰즈 공동묘지까지 그의 관을 뒤따랐다. 1년 후 깨진 리라를 들고 슬퍼하는 뮤즈를 조각한 기념비가 제막되었을 때 폴란드에서 가져온 흙이 그의 무덤 위에 뿌려졌다.
비록 폴란드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아 엘스너를 실망시켰고, 파리 귀족들의 응접실에서 너무나 많은 시간을 낭비함으로써 폴란드의 망명 애국시인 아담 미츠키에비치를 낙담시켰으며, 규모가 큰 학구적인 업적으로만 예술적 가치를 평가하는 기성 비평가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의 가치는 보다 통찰력있는 동시대인들에 의해 즉각적으로 인식되었다. 당시의 다른 비평가들은 절묘한 기교와 조화된 놀라운 독창성에 감탄했다. 오늘날 그는 인간 내면의 은밀한 곳을 보는 통찰력과 피아노에서 끌어낼 수 있는 신비롭고 새로운 음향의 발견으로 인해 불멸의 음악인들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그는 개성적인 선율을 만들었고 마음으로 느껴지는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드문 재능을 가졌지만 결코 감상적으로 흐르지는 않았다. 비록 그 본질에 있어서는 낭만적이었지만 쇼팽의 음악에는 낭만주의의 치장이 전혀 없다. 그의 모든 작품에는 고전적 순수함과 신중함이 있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 2. 3, 독일 함부르크)
독일의 작곡가·피아니스트·지휘자·음악교사.
대표적 낭만주의 작곡가이며 〈한여름밤의 꿈〉 서곡, 〈이탈리아 교향곡〉 바이올린 협주곡, 2개의 피아노 협주곡, 오라토리오 〈엘리아 〉 등 다수의 실내음악이 유명하다. 조부는 철학자인 모제스 멘델스존이다.
멘델스존의 작품 중 많은 곡들은 아기자기한 세공과 같이 작고 깔끔하며, 즐거운 초상화처럼 묘사적이기는 하지만 낭만주의 본래의 깊이를 결여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바이올린 협주곡이나 그밖의 여러 실내 악곡들에서 볼 수 있듯이, 매력적이고 순진무구하며 신선하면서도 그 자체로 심오한 낭만적 경이감을 전달하고 있다.
대표적 낭만주의 작곡가이며 〈한여름밤의 꿈 Ein Sommernachtstraum〉(1826) 서곡, 〈이탈리아 교향곡 Italian Symphony〉(1833), 바이올린 협주곡(1844), 2개의 피아노 협주곡(1831, 1837), 오라토리오 〈엘리아 Elijah〉(1846) 등 다수의 실내음악이 유명하다. 조부는 철학자인 모제스 멘델스존이다.
브람스 (Johannes Brahms, 1833. 독일 함부르크 ~ 1897. 4. 3,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지금의 오스트리아) 빈)
다수의 교향곡·협주곡·실내악·피아노곡·합창곡 등 200여 곡이 넘는 가곡을 작곡했다. 1863년부터 빈에서 그의 대표작 〈독일 진혼곡 Ein Deutsches Requiem〉(1868)을 작곡했고 〈교향곡 1번 C단조〉(1876)·〈교향곡 2번 D장조〉(1877)·〈교향곡 3번 F장조〉(1883)·〈교향곡 4번 E단조〉(1885)를 완성했다.
젊은 피아니스트와 음악감독
호른·더블베이스 연주자인 가난한 야코프 브람스의 아들로 태어난 요하네스 브람스는 어려서부터 피아니스트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아버지에게 최초의 음악교육을 받았고 7세 때 F. W. 코셀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3년 후에 코셀은 그의 스승인 에두아르트 마르크센에게 브람스를 보냈다. 이 뛰어난 선생은 브람스를 미국으로 순회연주 보내려는 아버지의 생각에 대해 현명한 충고를 했으며 브람스는 그와 더불어 여러 해를 보냈다. 14~16세 때 브람스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하노버의 항만지역에 있는 허름한 여인숙에서 연주를 해서 돈을 벌었으며 그러는 틈틈이 작곡도 하고 독주회도 가졌다. 1850년에 그는 다소 무책임한 성격의 유대계 헝가리의 바이올린 연주자인 에두오르드 레메니를 만나 함께 연주회를 가졌으며 그로부터 일생 동안 영향을 받았던 헝가리의 민족음악을 배웠다.
1853년 요제프 요아힘을 만남으로써 첫번째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브람스의 재능을 즉각 파악한 요아힘은 그를 슈만에게 소개했으며, 그후 두 작곡가의 우정이 싹트게 되었다. 슈만은 〈신음악지 Neue Zeitschrift für Musik〉에서 브람스와 그의 작품을 격찬했으며 이 기사는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비록 어려운 상황은 항상 있었지만 이때부터 브람스는 음악세계의 중심권에 있게 되었다. 그러한 요소들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슈만의 찬사 그 자체에 내재해 있었다. 이미 리스트와 바그너가 주도하는 '신독일' 악파와 슈만이 대표하는 보다 보수적인 악파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다. 브람스에 대한 슈만의 격찬은 그 반대쪽의 입장에서는 좋지 않게 받아들여졌으며 비록 리스트는 브람스를 (거의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지만 브람스 자신(리스트를 포함한)은 자의식적인 모더니스트들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논쟁에 휘말려들었고, 평탄할 수도 있었던 그의 인생에 끼어든 대부분의 혼란은 이러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점차 브람스는 슈만의 가족들과도 가까워졌으며 1854년 슈만이 처음 정신질환을 앓았을 때는 클라라 슈만을 도와 그녀의 가계를 함께 꾸려나갔다. 당시 그는 클라라와 사랑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856년에 슈만이 죽은 후에도 그들 사이에 깊은 우정이 지속되기는 했어도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1857~60년 브람스는 데트몰트 궁정(이곳에서 그는 피아노를 가르치고 합창단을 지휘했음)과 괴팅겐 궁정 사이를 옮겨다녔으며 그러는 동안 1859년에는 함부르크에 있는 여성합창단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그러한 직책들은 그에게 유용한 실제경험을 제공했으며 자신의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 정서적 갈등이 어느 정도 해결되자 그의 창작은 날로 활발해졌다. 관현악을 위한 2곡의 유쾌한 〈세레나데 Serenades〉와 화려한 성격의 첫번째 〈현악 6중주 B이미지장조〉 외에 휘몰아치는 듯한 〈피아노 협주곡 1번 D단조〉가 여러차례 변화와 개작을 거친 후에 완성되었다. 1861년경 함부르크로 돌아간 그는 다음해에 빈을 처음 방문하여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함부르크 필하모닉 연주회의 지휘자 자리를 잃고서는 1863년 빈에 정착하여 훌륭한 아마추어 합창단체인 '징아카데미'(Singakademie)의 감독이 되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연주회의 성공과 실패 사이의 기복, 자신의 급한 성격으로 인한 언쟁, 그의 지지자와 바그너·브루크너 지지자 사이의 극심한 대립, 그리고 이루지 못한 1~2건의 연애사건 등으로 인한 소란을 제외한다면 전반적으로 평이하고 조용한 것이었다. 몇 번의 실패와 바그너주의자들의 지속적인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으며 그의 명성 또한 점점 높아져갔다. 1872년경 그는 '음악동호인협회'의 총지휘자가 되었으며 3시즌 동안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그가 선택한 곡목들은 기대했던 것만큼 보수적이지 않았으며(그가 지휘했던 작품 가운데는 베를리오즈의 〈이탈리아의 아롤 Harold en Italie〉이 포함됨), 비록 '브람스주의자'들은 바그너에 대한 그들의 투쟁을 계속했지만 브람스 자신은 항상 그의 경쟁자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브람스는 가끔 그의 동시대인들에 대해 공감대가 없었던 것으로 묘사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드보르자크에 대한 그의 호의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젊은 말러와 같은 작곡가를 격려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상태이고 닐센의 첫번째 교향곡에 대한 그의 열광은 더욱이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빈에서 2가지 직책에 있는 동안 브람스의 작품은 전성기를 맞았으며 그의 가장 중요한 몇몇 작품들은 이때 작곡되었다. 1868년에는 그의 가장 유명한 합창작품인 〈독일 진혼곡〉이 완성되었는데 이 작품은 슈만이 죽은 이후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었다. 작곡가 자신이 선택한 성서 구절에 근거한 이 작품은 1868년 성 금요일에 브레멘에서 초연되었을 당시 청중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는데 그후 독일 전역에서 연주되었다. 지금도 19세기 합창음악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로 간주되는 이 작품으로 브람스는 독일 작곡가들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브람스는 보다 가벼운 성격의 작품에 있어서도 성공적인 작품들을 남겼다. 1869년 그는 자신이 수집한 집시 선율을 화려하게 편곡한 피아노 2중주를 위한 2권의 〈헝가리 춤곡 Hungarian Dances〉을 내놓았다(→ 색인 : 예술가곡). 이것은 경이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며 전세계에서 연주되었다. 1868~69년에는 4중창과 2대의 피아노 반주를 위한 왈츠 〈사랑의 노래 Liebeslieder〉 작품52를 작곡함으로써 그가 선택한 제2의 고향인 헝가리에 경의를 표했다. 유머가 번뜩이는 이 작품에는 우아한 빈 춤곡의 선율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가장 위대한 가곡들 가운데 몇몇 작품 또한 이 시기에 작곡되었다.
원숙기와 명성
1870년대에 브람스는 중요한 실내악곡들을 작곡했으며 순수한 관현악적 작품으로의 일대 전환을 시도하고 있었다. 1873년 그는 그의 〈하이든 주제에 의한 변주곡 Variations on a Theme by Haydn〉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했다. 항상 자신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브람스조차 이 시도를 완전한 성공이라고 생각했으며, 그 이후 이미 6년 전에 그 첫번째 악장을 클라라 슈만에게 보여주었던 〈교향곡 1번 C단조〉의 작곡에 착수했다. 이 웅장한 작품은 1876년에 완성되어 그해에 초연되었다. 이로써 브람스는 교향곡 어법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고 다음해에는 〈교향곡 2번 D장조〉를 완성했는데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C단조 교향곡〉의 영웅적 정서를 피하는 목가풍의 조용한 곡이다. 〈교향곡 3번 F장조〉가 탄생하기까지는 6년이 걸렸는데 처음 세 악장은 교향곡 2번과 마찬가지로 비교적 조용하게 흐르지만 마지막 악장에 가서는 각 요소들의 거대한 갈등이 전개된다. 1년 후에 다시 마지막 교향곡인 〈교향곡 4번 E단조〉의 작곡에 착수했다. 이 작품은 브람스가 그 시기에 읽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의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했는지도 모른다. 이 교향곡의 가장 중요한 악장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악장이다. 브람스는 바흐의 칸타타 150번에서 단순한 주제를 택하여 31개의 고도로 복잡한 변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여기서 나타나는 기교적 솜씨는 사고의 명료성과 느낌의 강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경제적인 면에 있어서도 그의 음악은 가장 성공적이었다. 프리츠 짐로크가 1860년대 이래 본에서 출판한 브람스의 작품들은 널리 연주되었으며 그에게 막대한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가난하게 자란 이 작곡가는 그의 재산을 이상하리만치 부주의하게 다루었다. 그는 출판업자에게 재산관리를 맡겼으며 짐로크가 주식 투기로 엄청난 손실을 입혔을 때도 아무런 책망도 하지 않았다. 브람스는 사치와는 동떨어진 평범한 삶을 영위할 때 가장 편안한 느낌을 가졌으며 자신을 위해서는 거의 돈을 쓰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면 그는 자신의 막대한 수입에서 기쁨을 얻었다. 그는 자신의 가족에게도 관대했는데, 특히 그의 어머니가 죽고 새로 맞아들인 계모와 아버지에게 그러했으며 심지어 아버지가 죽은 후에도 계모와 그녀의 친지들에게 계속 경제적인 도움을 주었다. 더욱이 그는 많은 젊은 음악가들에게 몰래 경제적인 지원을 하기도 했다. 점차 브람스의 명성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너머로 확산되었다.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브람스의 예술을 올바로 인식했고 이 두 나라와 헝가리·폴란드를 경유한 브람스의 연주여행(부분적으로 요아힘과 동행하기도 했음)은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영국으로부터도 끈질긴 초청이 있었고 1876년 4월에는 케임브리지대학교가 그에게 명예 음악박사학위를 제안했다. 그는 처음 이 소식을 듣고는 매우 기뻐했지만 직접 가서 학위를 받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는 이를 거절했다. 그래도 브람스는 박사의 칭호를 얻게 되었는데 이는 1879년 브레슬라우(지금의 폴란드 브로추아프)대학교에서 그에게 명예 음악박사학위를 수여했기 때문이다. 브람스는 독일 학생들의 노래에 기초한 〈대학축전서곡 Academic Festival Overture〉을 작곡함으로써 이 대학에 감사의 뜻을 표했으며 브레슬라우에서 그 자신의 지휘 아래 이 곡을 초연했다.
그무렵 브람스의 동시대인들은 그의 작품들이 갖는 중요성을 잘 알게 되었다. 독일의 지휘자 한스 폰 뷜로가 처음에 한 말을 계기로 사람들은 '위대한 3B'(바흐·베토벤·브람스)에 대해 언급했으며,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브람스는 바흐·베토벤과 동등한 위치에서 평가받았다. 그러나 서로 입장이 다른 여러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브람스의 위대함을 인정하지 않는 상당한 규모의 음악가 그룹이 있었다. 바그너와 리스트로 대표되는 당시의 전위적인 작곡가들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들은 브람스의 작품을 구태의연하고 무미건조한 것으로 평가절하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작품 창작에 유용한 특정 유형의 생활방식을 굳혔다.
1871년 이후 그는 빈에서 그가 아끼던 음악동호인협회와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자상하고 인정 많은 여주인이 빌려준 방 3개짜리 조촐한 아파트에서 살았다. 순회연주를 할 때는 자신의 작품만을 연주·지휘했고, 그러자 너무 많은 신청곡들이 쇄도하여 그중 대부분을 거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봄에 이탈리아로 여행하는 것을 즐겼는데, 이 여행을 "아름다움 속에서 목욕하기 위해"라고 했다. 1871~93년 브람스는 감수성이 뛰어난 음악가이기도 했던 외과의사 테오도르 빌로트와 함께 9차례의 이탈리아 여행을 했는데 브람스는 자신의 〈현악 4중주〉 작품67을 빌로트에게 헌정한 적이 있다. 또다른 동반자인 스위스의 시인 J.V.비트만이 여행에 관한 재미있는 기록을 남겼다. 브람스는 그 모든 여행을 위한 철저한 준비를 했으며 이탈리아의 예술로부터 지속적인 영감을 얻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첫번째 체험 결과로 〈피아노 협주곡 2번 B이미지장조〉작곡되었는데 이 작품에는 아름답게 균형잡힌 고요함이 내재해 있다.
여름을 항상 시골에서 보냈던 그는 자연에 깊이 빠져들었으며 자연은 그의 창작에 있어 가장 강력한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각각 여름 휴양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 목가적인 〈교향곡 2번〉과 낭만적인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를 위한 활기찬 〈광시곡 Rhapsodies〉은 브람스가 1877~79년 머물렀던 남부 오스트리아의 뵈르터 호수 근처에서 작곡되었다. 스위스의 웅장한 툰 호수에서 3번의 여름을 보냈고 그곳에서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2중협주곡 A단조〉·〈첼로 소나타 F장조〉·〈피아노 3중주 3번 C단조〉·〈바이올린 소나타 D단조〉를 작곡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여름별장이 있는 매혹적인 오스트리아의 온천지 바트 이슐 또한 브람스가 즐겨 찾던 곳이었다. 1880년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한 그는 말년에 8번의 여름을 그곳에서 보냈으며 그곳에서 밝고 유쾌한 첫번째 〈현악 5중주 F장조〉 작품88을 완성했고 몇 년 후 힘찬 2번째 〈현악 5중주 G장조〉 작품111을 작곡했다.
말년의 생애
1890년에 완성한 2번째 〈현악 5중주〉로 창작활동을 마감하려는 것이 브람스의 의도였다. 그러나 다음해 여름 그는 새로운 시도를 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꼈다. 실내악에 클라리넷을 포함시키기 시작했는데 이는 그가 몇 달 전 연주를 들었던 탁월한 클라리넷 연주자 리하르트 뮐펠트와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뮐펠트를 마음 속에 두게 된 브람스는 바트 이슐에서 〈클라리넷·첼로·피아노를 위한 3중주〉 작품114, 〈클라리넷과 현을 위한 5중주〉 작품115, 〈클라리넷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작품120-1·2번을 작곡했다. 이 작품들은 구조적으로 완벽하며 목관악기의 잠재적인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려내고 있다.
63번째 생일에 베이스 성부와 피아노를 위한 〈4개의 엄숙한 노래 Vier ernste Gesänge〉를 완성했는데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가져온 그 가사는 모든 세속적인 일의 허망함을 다루면서 근심과 고통의 구원자로서 죽음을 맞아들이는 비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가사를 따온 마지막 노래에서 그는 사랑의 힘을 열광적으로 찬양했는데 이 작품은 병세가 심각하게 악화되어가는 클라라 슈만에 대한 브람스의 사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곧 가장 친한 벗(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그녀와의 만남은 그에게 "가장 커다란 풍요와 가장 고귀한 만족을 가져다준 생애 최고의 아름다운 경험"이었음)을 잃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1896년 5월 20일 클라라는 죽었고 브람스는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무모한 여행을 감행했지만 밤기차를 놓쳐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못했고 대신 그녀가 남편과 나란히 묻힌 본으로 향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병원을 찾아야 했으며 그의 건강은 이미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다. 1896년 여름 브람스는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오르간을 위한 〈11개의 합창전주곡 Eleven Chorale Preludes〉(그 마지막 곡은 판타지아 〈오 세상이여, 나는 그대를 떠나야만 하네 O Welt, ich muss dich lassen〉임)을 작곡했다. 1897년 3월 마지막으로 연주회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1897년 4월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바그너((Wilhelm) Richard Wagner, 1813. 5. 22, 독일 라이프치히)
독일의 극음악 작곡가·이론가.
바그너가 오페라 음악을 통해 이룬 혁신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던 사람들조차 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바그너 악극은 예술의 규모와 영역면에서 볼 때 독특한 업적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재료들을 한데 응축시켜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전해 내려오는 다양한 전설에서 따온 소재들을 적절히 선택하여 극의 구도 속에 집어넣었다.
이 구도에서 그는 아이스킬로스가 쓴 〈오레스테이아〉를 모델로 택하여 원작품의 플롯에서 결정적인 중요한 사건만을 취하여 줄거리를 단순화했으며, 행위는 주로 인물의 동기부여 과정에 할애했다. 바그너 이후의 음악사 중 상당한 부분이 바그너가 이루어놓은 혁신들에 대한 확장이거나 아니면 이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다.
바그너가 오페라 음악을 통해 이룬 혁신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던 사람들조차 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색인 : 음악극). 주요작품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Der fliegende Holländer〉(1843)·〈탄호이저 Tannhäuser〉(1845)·〈로엔그린 Lohengrin〉(1850)·〈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1865), 그리고 4부작 〈니벨룽겐의 반지 Der Ring des Nibelungen〉(1869~76) 등이 있다.
바그너 악극은 예술의 규모와 영역면에서 볼 때 독특한 업적이었다. 그는 여러 가지 재료들을 한데 응축시켜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전해 내려오는 다양한 전설에서 따온 소재들을 적절히 선택하여 극의 구도 속에 집어넣었다. 이 구도에서 그는 아이스킬로스가 쓴 〈오레스테이아 Oresteia〉를 모델로 택하여 원작품의 플롯에서 결정적인 중요한 사건만을 취하여 줄거리를 단순화했으며, 행위는 주로 인물의 동기부여 과정에 할애했다. 그는 대본인 시극에 음악을 붙이는 데 있어서 거시적 설계에 능했고, 이것은 베토벤으로부터 배운 것이었다. 이처럼 커다란 윤곽은 유지하면서도, 계속 주도동기들을 발전시킴으로써 심적 상황이 이루는 미묘한 변화를 반영했다. 이러한 동기사용법이 독단적이고 너무 사실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비판이 있는데, 이것은 바그너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바그너 자신은 동기를 '느낌의 반영물'이라 불렀고, 동기가 갖는 본질적으로 감정적이고 쉽게 변화하는 성질로 인해 이것들을 교대하거나 변형·결합하는 수법을 흔히 사용했으며, 따라서 바그너에게 동기는 극의 상징적 차원을 넘어서서 느낌의 미묘한 변화에 대한 표현의 기능을 한다. 이러한 방법을 사용한 결과 새로운 예술 형식을 만들 수 있었는데, 그 가장 뚜렷한 특징은 연극·언어·음악이라고 하는 3가지 차원에서 심오하고 복합적인 상징주의가 작용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상징주의가 갖는 중요성은 바그너의 후기 작품에 갈수록 더욱 커졌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제외한 그의 성숙기 작품들은 한결같이 '사랑을 통한 구원'이라는 낭만적 주제를 갖고 있다. 이 주제는 초기의 3개 오페라들에서는 다소 순박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이후의 악극들에서는 보다 심층적인 이념 복합체를 나타내기 위한 촉매 역할로 승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니벨룽겐의 반지〉에서는 독일 민족주의, 민족을 넘어선 사회주의, 쇼펜하우어 철학, 불교, 그리스도교 등 적어도 5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사상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또다른 차원에서 바그너의 작품들에는 성적 금기에서 비롯된 권력 콤플렉스, 근친상간, 모성집착,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 정신분석적 주제들이 다루어져 있어 그의 선구자적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노발리스(1772~1801)를 비롯한 독일 낭만 시인들이 탐닉한 '밤'·'죽음' 등의 주제에서 시작해서 인생을 사악한 환영이라 고발하고, 생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는 쇼펜하우어적 관념, 나아가 성적 욕망과 죽음의 갈구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근대 심리학적 발견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상징주의 노선을 밟고 있다.
한편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원숙한 지혜와 유머를 갖고 젊음의 혈기와 노년의 체념, 젊은이의 사랑의 환희, 음악의 소중함 등 친숙한 주제들을 보편적인 차원에서 다루고 있어서 그의 다른 작품들과 구별된다.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에서는 또다시 심오한 차원의 상징적 주제로 되돌아갔다. 바그너는 종교 주제를 너무 개인적으로 다루어 종교적 사랑과 세속의 사랑이라는 두 개념을 한데 섞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후대 심리학의 연구 결과를 놓고 보면 종교적 경험과 성적 경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러한 통찰은 그가 살던 시대를 앞지른 것이었다. 〈파르지팔〉에서는 순진무구와 순결, 성적인 탐닉과 고통, 회한과 성적 체념 등과 같은 주제를 열정과 깊은 사랑으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무의식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감으로써 그의 어느 작품보다도 환상적 면모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악극 작가, 작곡가로서 바그너가 끼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오페라 작곡가들 중 어느 누구도 직접 대본을 쓰는 데 바그너를 따를 사람이 없었으며 또한 극적인 깊이와 연속성, 작품들 간의 일관된 주제 등 바그너가 이룬 개혁 내용들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바그너의 영향은 순수음악 영역에서 더욱 컸다. 그는 실로 광대한 표현 영역을 개척함으로써 작품마다 독특한 감정세계를 깃들게 했고, 독일 음악의 선율, 화성 양식을 감정적·감각적 강도에서 절정에 올려놓았다. 바그너 이후의 음악사 중 상당한 부분이 바그너가 이루어놓은 혁신들에 대한 확장이거나 아니면 이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이다.
5. 후기 낭만주의
브루크너((Josef) Anton Bruckner, 1824. 오스트리아 안스펠덴 ~ 1896. 10. 11, 빈)
대표작으로는 9곡의 교향곡, 3곡의 대미사곡, 진혼곡, 〈주 찬양 Te Deum〉 등이 있다.
음악적 영향
브루크너는 오버외스터라이히의 린츠 근교에 있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여 1835년 봄에는 회르싱으로 가서 대부에게 오르간을 배웠다. 아버지의 병으로 공부를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아버지 대신 마을학교 교사와 오르간 연주자로 일했다. 1837년 6월 아버지가 죽자 브루크너는 린츠 근교에 있는 장크트플로리안 수도원 원장의 추천으로 그곳 성가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보낸 3년 동안 그는 음악교육을 중심으로 폭넓은 교양을 쌓았으며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1840~41년 사이에는 교사연수과정을 이수했다. 그후 1841~43년 빈트하크에서, 1843~45년에는 크론스토르프에서 보조교사로 일했으며 마지막에는 다시 장크트플로리안으로 돌아가 교편을 잡았다.
2번째로 장크트플로리안에 머물렀던 1845~55년은 예술가로서의 그의 생애에 있어 중요한 시기였다. 교사에서 음악가와 작곡가로 점차 바뀌게 된 전환점은 아마도 장크트플로리안 수도원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된(1848년에 잠정적으로 임명받고 1851년에 공식 임명받음) 사건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50년대초 브루크너는 린츠에서 교사연수과정에 참여했으며 1855년에는 고등학교 교사자격증을 얻기 위해 필요한 모든 시험에 합격해 있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의 조언과 격려는 그로 하여금 그의 미래가 음악에 있음을 확신시켜 주었고 결국 1856년 린츠 성당의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그보다 몇 달 앞서 브루크너는 대위법적인 작품들로 유명한 지몬 제히터의 제자가 되었다. 1855~61년에 계속된 대위법 집중훈련과정은 더러는 서신을 통해, 더러는 휴가기간에 브루크너가 빈을 방문할 때 이루어졌다. 이 과정은 최종시험에서 정점에 이르렀는데 그중에는 실기시험이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빈의 가장 저명한 음악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단은 일단은 회의적인 태도에서 출발했지만 곧 브루크너의 연주가로서, 또 즉흥연주가로서의 능력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린츠에서 보낸 12년 동안 그는 행복과 실망을 다 경험했다. 그의 행복은 여러 사람들과의 교제, 1860~61년과 1868년 지휘자로 있었던 프로진 성가대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점차적으로 작곡에 능숙해지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특히 음악의 형식과 관현악법을 공부하기 위해 바그너의 오페라〈탄호이저 Tannhäuser〉를 연구했던 1861년부터 그러한 인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것이 브루크너가 후일 경외심을 품게 된 바그너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이었다. 바그너의 작품은 제히터에게서 받은 대위법적 훈련에 완벽한 토양을 제공함으로써 그의 초기작품들이 탄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들로는 3곡의 대미사곡, G단조 서곡, 교향곡 0번 D단조, 교향곡 1번 C단조가 있다. 린츠에 있는 동안 그가 실망한 것은 결혼할 상대를 찾지 못해서였다. 예외 없이 그의 구혼은 거절당했고 강한 종교적 신념의 소유자인 그는 혼외정사마저도 불가능했다.
반대와 궁극적인 성공
1867년에 제히터는 죽었고 브루크너는 신경쇠약으로부터 회복중에 있었다. 빈에 있는 호프카펠레의 오르간 연주자 자리를 원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빈 음악원의 화성법과 대위법 교수로 초빙되었으며 무보수에 임시직인 궁정 오르간 연주자로 위촉되었다. 호프카펠레의 정식회원이 되기까지는 10년이 걸렸고 빈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려는 그의 시도는 1875년에야 결실을 맺었다. 빈대학교의 승인을 얻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는 빈의 유력한 음악비평가이자 빈음악대학의 학장이었던 에두아르트 한슬리크 때문이었다. 그는 브람스를 최고의 작곡가로 생각하는 한편 바그너에 대해서는 반감을 가졌는데, 브루크너를 바그너의 제자로 오인했던 것이다. 브루크너는 그의 생애에서 마지막 28년을 빈에서 보냈다. 그 기간에 그는 2~9번의 교향곡(마지막 곡은 미완성), 현악 5중주 F장조, 〈주 찬양〉·〈시편 Psalm CL〉·〈헬골란트 Helgoland〉, 그밖의 종교적·세속적 합창곡들을 작곡했다. 이 기간에 그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오르간의 거장으로서 1869, 1871년에 각각 프랑스와 영국을 방문한 것 외에는 거의 빈을 떠나지 않았다. 1880년대부터 1890년대초까지는 자신의 교향곡과 종교음악이 연주되는 것을 듣기 위해 독일의 여러 도시들을 여행하기도 했다. 그 여행에서 그는 대중들의 냉담함과 한슬리크를 비롯한 비평가들의 적대감에 대항해야 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과 그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그의 편에 섰고 1891년에는 빈대학교가 그에게 명예철학박사학위를 수여함으로써 공식적으로 그를 인정했다.
브루크너에게 있어 작곡은 종교의식을 위한 예술로서 중요성을 가졌다. 그는 신을 두려워하는 사제들이 종교의식을 주관하는 것과 같은 열의로 작곡에 임했다. 이러한 영적인 내용 때문에 세월이 지나 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사라진 지금까지도 그의 음악은 많은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다. 브루크너의 신앙심은, 자신이 신의 도구임을 절실히 느낄 만큼 본질적인 요소였다. 그의 위대함을 가늠하는 척도는 물질적인 가치에 오염되지 않은 그의 인생과 작품이 갖는 애타적(愛他的)인 속성에 있다.
말러(Mahler Gustav, 1860.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칼리슈테 ~ 1911. 빈)
유대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지휘자.
여러 낭만주의적 요소들이 집약된 10곡의 교향곡과 관현악 반주에 의한 다양한 가곡들로 유명하다. 비록 그가 죽은 뒤 50년 후에야 그의 음악이 인정받았지만 이후 20세기 작곡기법에 있어 중요한 선구자로 인식되었으며 아르놀트 쇤베르크,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벤저민 브리튼 등과 같은 작곡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초기생애
구스타프 말러는 지금의 체크 남서쪽 변방에 위치한 칼리슈테(독일어로는 Kalischt)라는 보헤미아 마을에서 유대교 혈통의 오스트리아인 여관 주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고 몇 달 후 그의 가족은 이흘라바(독일어로는 Iglau) 근처로 이사했으며 그곳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유대인 혈통을 가진 그는 어려서부터 인종 차별에 시달렸고, 이것은 그의 성격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독일어를 쓰는 오스트리아에서 그는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체크의 토착인들과도 어울릴 수 없었고, 오스트리아인에도 속할 수 없었다. 나중에 독일에서도 그는 보헤미아 출신의 오스트리아인, 유대인 양쪽 모두에게 이방인이었다.
또한 말러는 부모 사이의 갈등으로 고통받았다. 독학으로 공부한 거세고 활동적인 성격의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교양있는 집안 출신의 섬세한 여인이었으며 아내의 사회적 우위에 대해 열등감을 가졌던 그의 아버지는 폭력으로 그녀를 학대했다. 그결과 말러는 아버지와는 소원했던 반면 어머니에 대해서는 강한 집착을 보였는데 이러한 점은 신체적인 면에서도 나타났다. 다리를 약간 저는 습관은 불구였던 그의 어머니를 모방한 데서 생긴 것이었다. 유년시절 그는 11명이나 되는 형제, 자매들이 질병과 죽음으로 시달리는 것을 보아왔고, 유전적으로 어머니의 약한 심장까지 물려받아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 불안정한 초기의 성장배경은 말러의 삶과 음악에 팽배해 있는 정신적 긴장, 회의주의, 빈정댐,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려는 끊임없는 추구 등에 대한 설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를 작곡과 지휘의 대가의 위치에 올려놓은 엄청난 정열과 지적인 힘, 목표에 대한 불굴의 의지를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그의 기질 중에 긍정적인 요소들은 의심할 것도 없이 육체적으로 대단한 정력가였던 부계혈통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선천적으로 심장에 문제가 있었음에도 그는 무자비할 정도로 철저한 음악감독이었고 수영을 매우 즐겼으며, 끈기있는 산악인으로서 지극히 활동적인 인생을 살았다.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는 4세 무렵 근처 병영에서 들리는 군악과 체크의 노동자들이 부르는 노래에 매료되어 이를 아코디언과 피아노로 연주했으며 소품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자연의 소리와 더불어 군대음악과 민속음악은 커서도 그의 음악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10세 때 이흘라바에서 피아니스트로 데뷔했으며 15세에는 이미 음악적으로 성숙한 모습을 보여 빈 음악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피아노와 작곡 분야에서 상을 받고 졸업한 그는 작곡가로 인정받기까지 불규칙적인 개인 교습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주요작품 가운데 처음의 중요한 작품인 칸타타 〈탄식의 노래 Das klagende Lied〉로 빈 음악원의 베토벤 상에 응모했으나 실패했고, 이후 보다 안정된 생활을 위해 작곡은 긴 여름휴가에 하려고 잠시 미뤄두고, 지휘자로 변신했다.
지휘자로서의 경력
그후 17년 동안 말러는 지휘자로서 최정상에 올라섰다. 오스트리아에서 소극(笑劇) 지휘를 시작으로 부다페스트와 함부르크를 포함한 여러 지역을 두루 거친 다음 1897년 37세의 나이로 빈 궁정 오페라의 예술감독이 되었다. 그는 지휘자로서는 일반 청중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지만 작곡가로서는 처음의 창작기간 동안 대중들의 몰이해에 부딪쳤으며 이러한 시련은 일생 동안 그를 따라다녔다.
말러가 주로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 활동을 했기 때문에 완숙기의 작품 모두가 교향악적인 작품(40곡의 가곡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리트가 아니라 불완전한 교향악적 악장들인데, 사실 그 가운데 몇몇은 교향곡 작곡을 위한 부분적인 기초로 사용되기도 했음)이라는 사실은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와 프란츠 리스트 악파의 영향을 받은 말러의 음악적 목표는 개인적인 세계관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본질적으로 자전적인 것이었으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는 오페라라는 극적 수단보다는 가곡과 교향곡이 적합했다. 즉 가곡은 개인적인 서정성을 갖추고 있고 교향곡은(바그너와 리스트의 견해에 따르면) 주관적인 표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초창기 작품
말러의 창작시기는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매 시기마다 그는 각각 3부작 교향곡을 작곡했다. 초창기의 교향곡은 음악 외적인 이야기나 생각에 근거한 표제적인 기초에 입각하여 작곡했다. 이 교향곡들의 제목은 나중에 삭제했지만 고통과 죽음, 의혹과 절망이 지배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에 대한 궁극적 근거의 확립과 관련된 것이었다. 마지막에 가서 그는 베토벤의 교향곡 6번 F장조 〈전원 Pastoral〉과 베를리오즈의 〈환상 교향곡 Symphonie fantastique〉의 예를 따라 그때까지 전통적으로 지켜지던 4악장 구조를 탈피하여 한 곡의 교향곡 안에 더 많은 악장을 포함시켰다. 시간의 확장과 다양한 음색을 내기 위한 여러 관현악법의 사용과 무제한적 감정 표현의 추구에 있어서는 바그너의 음악극을, 독창과 합창의 도입은 베토벤의 교항곡 9번 d단조 〈합창 Choral〉을 따랐고, 다른 작품에 자신의 가곡(독일의 민속 선집인 〈이상한 뿔피리를 가진 아이 Des Knaben Wunderhorn〉에 실린 시에 곡을 붙인 가곡, 혹은 민속 양식으로 쓴 자작시에 붙인 가곡 등)을 도입한 것은 슈베르트의 실내악을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들과 더불어 말러는 특유의 긴장을 주는 수사학적 양식, 놀랄 만큼 생동감 넘치는 관현악 처리, 대중음악에 대한 반어적 용법을 잘 구사함으로써 전대 미문의 폭넓은 대조를 보여주는 3편의 교향곡을 완성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그의 빈틈없는 창조적 재능과 교향곡 구조에 대한 확고한 통제력으로 하나로 묶인다. 순전히 관현악으로만 된 교향곡 1번 D장조(다섯 악장 가운데 한 악장은 후에 삭제됨)의 표제는 그의 어린시절을 그린 자전적인 것이다. 생의 환희는 칼롯(Callot : 대중음악에 대한 패러디) 기법에 의한 소름끼치는 〈장송 행진곡〉이 울리는 가운데 죽음에 대한 강박으로 뒤덮여지지만 결국 열렬하고 화려한 피날레로 끝맺게 된다. 5악장으로 구성된 교향곡 2번은 죽음에 대한 망상(첫 악장의 〈장례식〉)으로 시작되어 영생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신앙고백에서 절정에 이른다(거대한 끝악장은 심판의 날을 묘사하고 18세기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클롭슈토크의 〈부활〉에 곡을 붙인 독창과 관현악을 위한 송가로 마침). 교향곡 3번 역시 독창과 합창을 포함하고 있으며 보다 규모가 큰 6악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생명이 없는 자연에서 인간의 자각과 구원적인 신의 사랑으로 연결되는 생명의 대사슬이라는 디오니소스적 세계관을 표현한다.
이들 작품에 있어 종교적 요소는 매우 중요하다. 말러는 불안정한 초기 성장 배경으로 인한 심적 장애와 유대교 신앙에 대한 결핍으로 인해(그의 아버지는 유대인이었지만 자유사상가였음) 형이상학적 고뇌의 상태로 이끌렸으나 후에 그리스도교로 귀의함으로써 이러한 문제는 일시적으로 해결되었다. 1897년 세례를 받은 것은 빈 오페라 극장에서 직책을 쉽게 얻으려는 편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리스도교로의 귀의가 절실한 동기에 의해 이루어졌음은 분명하다. 그곳에서의 10년 동안 그는 보다 안정된 중기 창작시대를 맞았다. 새로운 신앙과 빈 오페라 극장 음악감독이라는 안정된 직위는 충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원숙기를 가져다 주었고 알마 마리아 슈니들러와 결혼함으로써 그의 생활은 더욱 안정되었다. 그녀와의 사이에는 1902년과 1904년에 태어난 두 딸이 있다.
중기 작품들
말러는 빈 오페라 극장, 그리고 한 동안 빈 필하모닉 연주회의 감독으로 있으면서 아무도 다룰 수 없는 작품 해석과 새로운 연주 기준을 확립했다. 광적인 이상주의자였던 그는 개인적인 사정은 완전히 무시하고 무자비할 정도로 자신과 단원들을 몰아붙였기 때문에 그의 해직을 획책하는 적들을 만들게 되었다. 또한 같은 시기에 많은 순회 연주를 가짐으로써 유럽 각지에서 지휘자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그 무렵부터 작곡을 위해 오스트리아의 알프스에서 여름 휴가를 보냈는데 이는 오히려 끊임없는 정신적·신경적 에너지의 소모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의 허약한 체질에 견디기 힘든 이중 부담을 안겨주었다.
중기에 작곡된 대부분의 작품들은 원숙기에 들어선 말러의 맹렬한 역동성을 보여주고 있다. 보다 초기의 특성을 지닌 교향곡 4번만이 유일하게 예외에 속한다. 6악장으로 이루어진(결국 두 악장이 삭제됨) 이 작품에 포함된 피날레 악장은 원래 교향곡 3번의 한 악장으로 구상된 것으로, 그리스도교의 천국에 대한 순박한 촌부의 생각을 나타낸 소프라노를 위한 〈이상한 뿔피리를 가진 아이〉로 장식되어 있다. 또한 이 곡은 분명한 표제와 합창없이 일반적인 교향곡에 가까운 면모를 가지고 있고, 그런 점에 있어서 중기의 3대 교향곡인 5번·6번·7번 교향곡에 영향을 주고 있다. 이 교향곡들은 하드에지 추상화와 같은 선명한 색채감과 기하학적 도형미, 대위법적 명료성을 갖는 악기편성법을 보여주는 순수 관현악적인 작품이며 모두 표제의 사용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각각의 작품은 정신적인 갈등을 구현시키면서 종결부에 그 갈등의 해결을 이룩하고 있다. 5번과 7번 교향곡은(두 작품은 모두 5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음), 비록 빛이 사후세계를 밝혀주는 것이 아니라 세속에서의 삶을 유쾌하게 하는 것이지만, 암흑에서 광명으로 나아간다. 이 두 작품 사이에 말러 자신이 〈비극적 교향곡 Tragic Symphony〉이라고 한 4악장으로 된 교향곡 6번 A단조가 있는데 어렵게 암흑에서 벗어나서는 다시 완전한 밤으로 돌아간다. 이 세 교향곡 이후 그는 교향곡의 한 악장 전체나 일정부분에 자신의 가곡을 도입하는 것을 중단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이상한 뿔피리를 가진 아이〉나 프리드리히 뤼케르트의 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Kindertotenlieder〉 등을 새로운 곡에 미묘하게 암시했다.
이 시기의 마지막에 그는 8명의 독창자와 2개의 합창단, 관현악을 위한 기념비적 작품인 교향곡 8번 E장조를 작곡했다. 말러 자신이 붙인 것은 아니지만 이 작품이 필요로 하는 많은 인원 때문에 이 교향곡은 〈천인의 교향곡 Symphony of a Thousand〉으로 불리고 있다. 이 작품은 후기작품 중 초기의 광범위한 형이상학적 기법으로 전환해서 이것을 양식적으로 완성한 독자적인 작품이다. 이 곡은 합창과 관현악이 지속적으로 함께 등장하는 최초의 교향곡이다. 종교적 관점에서 보나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보나 이 작품은 인류의 염원에 대한 웅대한 표명이며 밝은 세상을 위한 외침이라 할 수 있다. 보통 교향곡의 1악장에 해당하는 전체 2부분 가운데 첫번째 부분은 중세 가톨릭 교회의 오순절 찬미가인 〈생명의 창조주이시여 어서 오소서 Veni Creator Spiritus〉에 곡을 붙인 것이며 전통적인 교향곡의 3악장 형식을 합쳐놓은 것과 같은 2번째 부분은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오는 신비스런 마지막 장면(파우스트의 속죄 장면)을 가사로 채택했다. 이 작품 이후로 원숙기의 절정에 오른 말러의 자신감은 차츰 상실되었는데 6번 교향곡인 〈비극적 교향곡〉을 작곡하면서 이미 예감했던 재난들이 〈천인의 교향곡〉 이후 계속 뒤따랐기 때문이다. 〈천인의 교향곡〉에는 처음으로 말러의 성격에 내재한 미신적 요소가 드러나 있다. 피날레에는 "운명은 영웅에게 3번의 타격을 가하는데 그중 마지막 타격에 영웅은 나무가 베어지듯이 몰락하고 만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커다란 해머로 3번 내려치는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이중 마지막 타격은 악보에서 빼버렸다. 후에 그는 이것을 1907년 자신에게 닥친 3번의 충격에 대한 전조로 생각했는데 그중 마지막 것은 바로 자신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빈 오페라가 그의 사직을 요구했고 3세된 딸 마리아가 죽었으며 의사가 그의 치명적인 심장질환을 진단했던 것이다.
말기 작품들
1907년을 기점으로 그의 말기가 시작되었고 47세의 말러는 다시 여기저기를 옮겨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공연을 감독하고 뉴욕의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의 지휘자가 되는 등 미국에서 지휘자로서의 명성을 새롭게 쌓아야 했다. 매년 여름 오스트리아의 시골로 돌아가 작곡했으나 1911년 결국 빈으로 돌아와 죽었다.
말기의 3대 작품은 〈대지의 노래 Das Lied von der Erde〉, 교향곡 9번, 완성되지 못하고(비록 사후에 연주용 완성판이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전체에 걸친 포괄적인 스케치만 되어 있는 교향곡 10번 F#장조인데 말러는 이것들이 연주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 가운데 말러의 미신에 대한 성향이 다시 나타난 〈대지의 노래〉는 독일어로 번역된 중국시에 곡을 붙인 연가곡으로 시작하며 '테너, 바리톤(혹은 콘트랄토), 관현악을 위한 교향곡'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베토벤과 브루크너의 경우처럼 9번째 교향곡은 그 작곡자의 마지막 교향곡이 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작품을 '교향곡 9번'이라고 부르려 하지 않았다. 그후 교향곡 9번의 작곡을 시작했을 때 그는 반농담조로 이 작품이 '실제로는 10번째' 교향곡이므로 위험은 지나갔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교향곡은 결국, 그의 마지막 교향곡이 되었으며 그가 죽었을 때, 교향곡 10번은 스케치로만 남았다.
말러의 가장 심오한 개인적 업적인 말기의 3대 작품들은 중기의 3대 작품들보다도 훨씬 더 과거로부터의 확실한 단절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작품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현대인의 근본적인 문제인 죽음의 실재성(그의 경우 죽음의 문제가 가상의 사건으로 인식됨에 따라 그 대립으로 설정했던 종교적 신앙이 파괴되었음)과 대화를 나누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먼저 〈대지의 노래〉는 2부분으로 된 오라토리오 교향곡인 교향곡 8번과는 달리 6개 악장으로 된 연가곡 교향곡으로 냉소·탐욕·슬픔을 차례로 나타내는 베일에 가려진 시적 언어를 통해 인간 만사의 덧없음과 인간이 죽어서 볼 수는 없지만 계속되는 대지의 아름다움에 의해 받게 되는 슬픈 위안을 표현하고 있다.
4악장으로 구성된 순전한 관현악적 작품인 교향곡 9번에서 죽음에의 직면은 개인적인 고뇌가 되는데, 특히 마지막 악장인 〈론도-벌레스크 Rondo-Burleske〉는 말러의 가장 현대적이고 예언적인 악장으로 공포와 쓰라림을 불러일으키면서 가슴 아픈 체념의 절정을 이룬다. 파국을 암시하기 위해 장황하게 길게 끄는 예외적인 방법으로 음악 짜임새를 해체하는 이 작품의 피날레는 오랫동안 인간 존재에 대한 말러 최후의 언급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교향곡 10번에 대한 이해가 더해감에 따라 그가 이 곡에서 보다 긍정적인 태도를 가졌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 작품의 다섯 악장들은 앞선 두 작품에서와 같은 갈등을 다루고 있지만 피날레 끝 부분의 체념은 무척 평온하고 긍정적이라는 해석이 새롭게 일고 있다.
평가
현대 비평가들은 20세기에 들어와 일어난 음악의 대변화에 끼친 말러의 지대한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는 20세기의 급진적 기법에 영향을 주기에 충분한 요인들이 발견된다. 이러한 요인들 가운데는 '경과적 조성'(처음 조성과는 다른 조성으로 작품을 끝마침)과 조성의 해체(반음계적 진행이나 그 조에 속하지 않은 화성의 사용을 통해 조성에 대한 느낌을 모호하게 함), 전체 관현악의 영역 안에서 독주 악기 그룹에 의한 대위법적 짜임새로의 이탈, 단순한 주제의 재현보다는 지속적으로 주제를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원리, 대중 양식과 일상생활에서의 자연 음향(새소리, 나팔 신호)에 대한 풍자적 인용, 리스트의 '순환' 기법(한 악장의 주제를 같은 작품의 다른 악장에서도 사용함)에서 응용한 교향곡의 새로운 형식적 통합 방법 등을 들 수 있다.
R.쉬트라우스(Richard (Georg) Strauss, 1864. 뮌헨 ~ 1949. 독일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
20세기초 대표적인 독일의 작곡가
교향시들과 〈살로메 Salome〉(1905)·〈엘렉트라 Elektra〉(1909)·〈장미의 기사 Der Rosenkavalier〉(1911) 같은 오페라로 특히 유명하다.
초기생애와 작품
슈트라우스의 아버지인 프란츠 슈트라우스는 독일에서 가장 뛰어난 프렌치호른 연주자였으며, 어머니 요제피네 프쇼르는 뮌헨에서 성공한 양조업자의 딸이었다. 4세 때 피아노 교습을 받기 시작했고 6세에 바이올린 교습을 받았으며 그의 첫 곡인 크리스마스 노래를 작곡했다. 11세에는 음악이론과 작곡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아직 성숙되지 않은 작품들이 칭찬 속에서 아무런 장애 없이 빠르고 자연스럽게 만들어져 나왔다. 당연히 노력과 정신집중의 필요성이 절실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음악적 소양 개발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그는 그의 가족들에게 헌신적이었으며 그들은 사치하지는 않았지만 아쉬운 것 없이 살았다. 그의 가족들은 연주와 교습, 그리고 뮌헨의 준직업적 오케스트라인 '빌데 궁글'의 지휘를 통해 벌어들이는 아버지의 수입에 의존했다. 슈트라우스는 아버지가 지휘하는 이 오케스트라에서 몇 년간 바이올린을 연주했으며 이를 통해 관현악 연습 및 연주에 관한 경험을 얻었다. 1882년 그는 철학과 미학, 예술사 과정을 시작했고, 이들 과목에 관한 개인적인 연구는 그의 전생애에 걸쳐 계속되었다.
뛰어난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와의 만남으로 그는 자신의 작품인 〈13대의 관악기를 위한 모음곡 Suite for 13 Winds〉 작품번호 4를 지휘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의 최초의 지휘였으며 리허설도 없었다. 그결과 1885년 10월 뷜로의 조수로 마이닝겐 궁정 오케스트라로 갔고, 1개월 후 뷜로우가 그곳을 떠남에 따라 그는 그 오케스트라를 전담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불과 6개월을 머물렀지만 그당시 오케스트라의 기본 레퍼토리를 재빨리 습득했다. 보다 중요한 직책을 원했던 슈트라우스는 뮌헨 오케스트라의 제3지휘자로 갔다. 슈트라우스에게 음악적으로 길잡이가 된 작곡가는 리하르트 바그너(초기 작품)와 요하네스 브람스였다. 처음에는 그의 아버지가 바그너의 후기 오페라에 대한 그의 이해를 막았지만 철학자인 친구 알렉산더 리터의 영향으로 아버지의 편견을 극복할 수 있었다. 1887년 뮌헨에서 이탈리아에 대한 자신의 생생한 인상을 기초로 작곡한 교향적 환상곡 〈이탈리아로부터 Aus Italien〉 작품 16을 지휘했다. 이 작품은 많은 관중의 야유를 받았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것을 알고는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1889년 여름에 그는 바이마르로 옮겼는데, 이는 뮌헨의 분위기가 점점 부담으로 느껴졌고 그의 상급자가 그를 질시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로부터〉의 형편없는 평판은 11월 바이마르 궁정 극장에서 있었던 교향시 〈돈 주앙 Don Juan〉의 연주가 청중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음으로써 극복되었다. 이것은 슈트라우스의 작품활동에 있어 성공의 시작이었다. 바그너의 부인이었고 1883년 바그너가 죽은 이래로 바이로이트 극장을 관리했던 코지마 바그너는 슈트라우스에게 자신을 도와 일해줄 것과 자신의 사위가 되어줄 것을 제안했으나, 그는 이미 1887년에 처음 만났던 프로이센 장군의 딸 파울리네 데 아나에게 구혼중에 있었다.
완숙기의 삶과 작품
1890년에 슈트라우스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객원 지휘자로 갔다. 1891~92년 과로로 2번이나 심하게 앓았던 그는 병세 회복을 위해 지중해로 갔으며 그곳에서 그리스에 대한 강한 정신적·영적 유대감을 발견했다. 1892년 크리스마스 때 이집트에서 전적으로 바그너적인 첫번째 오페라 〈군트람 Guntram〉을 작곡했다. 이 작품은 그가 소프라노 가수인 파울리네 데 아나와의 약혼을 발표했던 1894년 5월 바이마르에서 공연되었고, 두 사람은 4개월 후에 결혼했다. 10월에 그는 뮌헨의 궁정 지휘자가 되었으며 그곳에서 4년 동안 살았다. 슈트라우스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도 직책을 얻었으며 이로써 그는 30세에 작곡가와 지휘자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뮌헨으로 이사하자마자 파울리네는 남편의 생활방식을 바꾸어 항상 작곡에 먼저 시간을 할애하도록 하고 다른 일로 창작작업이 방해받지 않도록 했다. 비록 그녀의 비정상적이고 전횡적인 행동이 많은 비판과 일화를 만들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매우 사랑했다. 그가 나태해질 때면 그녀의 재촉이 뒤따랐는데, 그러한 재촉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그토록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아울러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은 그가 그녀에게 무조건적인 믿음을 보였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의 결혼은 육체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이해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며 슈트라우스가 결혼선물로 파울리네에게 바친 연가곡 〈4개의 노래 Vier Lieder〉 작품 27은 둘 사이의 정신적 사랑에 대한 완벽한 표현이다. 둘 사이에는 1897년에 태어난 아들 프란츠 알렉산더가 있었다.
다음 13년 동안 슈트라우스는 잦은 순회연주 지휘로 그의 힘을 유감 없이 발휘했다. 그는 주로 유럽을 여행했지만 러시아도 찾았으며, 1904년에는 미국을 방문해 이전에 작곡했던 교향시 〈영웅의 생애 Ein Heldenleben〉와 같이 자전적인 성격을 가진 〈Sinfonia Domestica〉를 초연했다. 세기가 바뀔 무렵 7곡의 교향시와 85곡의 가곡을 작곡했다. 가곡을 통해 그는 음악과 가사를 최대한 효과적으로 결합하는 방법을 익혔으며 그의 그러한 능력은 양식과 효과면에서 〈군트람〉과는 판이하게 다른 그의 2번째 오페라 〈화재 Feuersnot〉(1901, 드레스덴)에 잘 나타나 있다. 슈트라우스는 1903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것은 그에게 상당한 기쁨과 의미를 주는 사건이었다. 같은 해 독일 작곡가들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너무 헌신적이고 자발적으로 참여한 나머지 그는 음악 출판업자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그는 두 오페라 〈살로메〉·〈엘렉트라〉로 유럽의 가장 진보적인 작곡가로서 인식되었다. 〈살로메〉의 첫해 공연으로 받은 저작권 사용료로 가르미슈에 이상적인 저택을 지었는데 그곳은 그가 50세 되던 해부터 살기를 원했던 곳이었다. 1908년 베를린 궁정 오페라의 음악감독이 되었다.
〈엘렉트라〉는 당시 재능과 흥미 면에서 오스트리아 최고의 시인이었던 휴고 폰 호프만스탈의 대본을 사용한 최초의 작품이었다. 두 사람의 합작으로 만든 2번째 작품 〈장미의 기사〉의 성공으로 두 사람 모두 큰 돈을 벌었으며 슈트라우스는 그 돈을 영국에 투자했다. 바이에른 지방 사람이었던 슈트라우스는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감상할 수 있는 음악(특정 관습이나 사고에 지배되지 않는)을 쓰려고 했지만, 호프만스탈은 대중에게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지적이고 귀족적인 사람이었다. 〈낙소스의 아리아드네 Ariadne auf Naxos〉(1912)부터 계속된 호프만스탈의 철학적 상징주의는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슈트라우스가 만약 대본의 방향을 통제하고 오페라의 주제를 선정하는 데 좀더 강하게 의견을 피력했더라면, 〈엘렉트라〉에서 잠깐씩 시도했던 무조성적 경향에서 더 나아가 보다 진전된 음악적 실험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엘렉트라〉 이후 슈트라우스는 더이상 무조성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꺼렸다. 〈요제프의 전설 Josephslegende〉은 러시아의 흥행사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슈트라우스에게 음악을 위촉한 1시간짜리 발레였다. 슈트라우스는 이 작품에 전혀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으로부터가 아니라 뛰어난 음악적 기교로만 그 음악을 작곡했다. 그는 1914년 여름에 파리와 런던에서 이 발레를 지휘했고 그 직후 영국과 독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영국에서의 그의 재산이 압류되어 50세에 은퇴하려 했던 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재정적 손실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리한 지휘 일정을 소화해야만 했다.
슈트라우스는 정치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적어도 심정적으로는 정치에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정치 선전을 위해 자신의 이름이 사용되는 것을 거절했으며(황제를 위해 곡을 작곡한 적은 있음), 모든 복잡한 일들로 인해 공연히 호프만스탈과 합작할 다음 오페라 〈그림자 없는 여인 Die Frau ohne Schatten〉의 작업만 늦추어지는 데 대해 분개했다.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그는 이외에도 3가지 작업을 추진했다. 먼저 규모가 크고 묘사적 성격이 강한 교향시인 〈알프스 교향곡 Eine Alpensinfonie〉(1911~15) 작품 64를 작곡했고 호프만스탈과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와 함께 먼 장래를 염두에 둔 사업으로 잘츠부르크 음악제협회를 창설했으며 호프만스탈이 번역·각색한 원래의 대본과는 상관 없이 몰리에르의 〈서민 귀족 Le Bourgesis Gentilhomme〉을 새롭게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로 재탄생시켰다. 이로써 슈트라우스와 호프만스탈의 관계는 최악의 상태가 되었는데, 호프만스탈은 슈트라우스에 대해 무례한 태도를 보인 반면 슈트라우스는 친절과 관용으로 그를 대했다. 1918년 휴전 이후 슈트라우스는 잠시 국립 오페라단을 지휘하기 위해 베를린으로 초빙되었고 그후 빈으로 가서 그곳 오페라단의 공동 감독(프란츠 샬크와 함께)이 되었다. 〈그림자 없는 여인〉은 빈곤에 허덕이는 1919년의 빈 청중의 기호에는 맞지 않았다.
만년의 인생과 작품
그후 20년이 지나면서 작곡가로서의 슈트라우스의 명성은 그의 건강과 더불어 쇠퇴했다. 〈살로메〉·〈엘렉트라〉·〈장미의 기사〉는 그에게 예술적·재정적 성공을 가져다주지 못했고 오랫동안 유럽의 대표적인 작곡가로서의 지위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지휘자로서는 여전히 성공적이었다. 1920년대말에는 비록 오케스트라에 대한 통제권은 가지고 있었지만 지휘 활동은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는 앞으로 돌출한 넓은 이마와 연푸른 눈을 가진 키 큰 사내였으며, 언뜻 보기에는 냉담한 태도를 가진 것 같았으나 본성은 진실되고 자상했다. 〈인테르메초 Intermezzo〉(1924)를 제외한 양차 세계대전 사이의 오페라들은 그 이전 작품들에서와 같은 예술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인테르메초〉는 슈트라우스의 눈에 비친 자신과 파울리네의 모습을 자전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 그 이전의 〈영웅의 생애〉나 〈Sinfonia Domestica〉의 아이디어를 확대한 것이다. 또한 이 작품에는 새로운 종류의 말하는 듯한 노래, 정확히 계산된 관현악적 짜임새와 성악의 균형이 함께 시도되어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악보에 삽입된 글에 잘 설명되어 있다. 이 작품은 그 자신의 대본에 의한 것이지만 〈이집트의 헬렌 Die ägyptische Helena〉(1928)·〈아라벨라 Arabella〉(1933)에서는 다시 호프만스탈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두 사람의 마지막 오페라 작업으로 둘 사이의 우정을 회복시켜주었지만 불행하게도 호프만스탈은 〈아라벨라〉의 대본을 완성하고는 갑자기 죽었다. 비록 그때문에 슈트라우스가 보다 적절한 대본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두 사람은 함께 많은 업적을 이루었으며, 특히 의미심장한 사실은 1928년 이후에 작곡된 그의 모든 오페라는 호프만스탈이 고안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1932년 또다른 오스트리아의 시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슈트라우스의 대본 작가가 되었으며 〈말없는 여인 Die schweigsame Frau〉(1935)에서의 합작은 잘 진행되었다. 1933년 나치당이 독일을 지배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의 대표적인 지휘자였던 토스카니니가 나치를 인정하지 않고서 바이로이트에서 거행될 바그너의 〈파르치팔 Parzifal〉 공연 지휘를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슈트라우스는 토스카니니 대신 지휘를 하게 되었고, 또한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나치로부터 배척당했던 브루노 발터 대신 베를린 연주회를 맡았는데 그때 보수로 받은 돈은 고아 기금에 기부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예술사업을 보존하기 위한 정당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시각은 달랐다. 11월에 그는 제3제국 국가음악국(國家音樂局)의 총재가 되었는데 그는 단지 이 자리가 음악가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라는 생각에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슈트라우스에게는 재능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2가지 종류 인간만이 있을 뿐이었다. 1935년 드레스덴에서의 오페라 제작에 관해 유대인이었던 츠바이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러한 견해를 피력했다. 그러나 이 편지로 슈트라우스와 나치와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그 편지는 중간에 다른 사람의 손에 의해 가로채였고, 츠바이크와의 작업은 금지되었으며 더욱이 〈말없는 여인〉의 공연도 금지되었다. 독일 전역과 잘츠부르크에서의 지휘활동 또한 금지되었고, 1년 동안 공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츠바이크는 남아메리카로 탈출했고 이 사건으로 슈트라우스는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다시 대본작가가 없는 상황을 맞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며느리가 유대인이라는 사실도 새삼 압력의 요소가 되었다. 그는 공직에서의 사임을 강요받았지만, 1936년 7월에 있었던 베를린 올림픽 경기의 개막식을 위해 그가 작곡한 〈올림픽 찬가 Olympische Hymne〉는 그 자신이 지휘하도록 허락받았다. 11월에 그는 드레스덴 국립 오페라단과 함께 런던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로열 필하모닉 협회의 금메달을 받았다.
앞선 몇 년 동안에 걸쳐 뮌헨은 그의 오페라를 많이 공연했던 대표적인 곳이었으며 다시 단막 오페라 〈평화의 날 Friedenstag〉(1938)·〈다프네 Daphne〉(1938)가 그곳에서 공연되었다. 두 작품의 대본은 슈트라우스가 당시에 만났던 뛰어난 대본작가 요제프 그레고르가 썼다. 나치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939년에 있었던 슈트라우스의 75세 생일을 기념하는 행사는 순조롭게 치러졌다. 제1차 세계대전이 그의 재산을 앗아갔다면 제2차 세계대전은 그에게 존경의 상실과 가족에 대한 위험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나치의 지방관리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등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강구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부득이한 신병치료를 위해 스위스로 가는 것조차 금지당한 슈트라우스는 4년 동안을 가르미슈의 별장과 빈의 집 사이를 왕복하면서 보냈다. 그는 그가 사랑했던 4개 도시(베를린·뮌헨·드레스덴·빈)의 오페라 극장이 파괴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으며 죽을 때까지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슈트라우스는 1942~48년 다수의 작품을 썼는데 이 작품들에서 그는 이전의 힘과 감미로움을 되찾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스위스로 가서 부인과 함께 무일푼으로 4년을 머물면서 나치 전범 재판에 출석하라는 요구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의 무죄는 입증되었고 런던으로 초청되어 1947년 1개월 동안 열렸던 슈트라우스 음악제를 지휘했다. 스위스로 갈 무렵 병을 얻은 그는 수술을 받고 회복했으나 1949년 5월 독일로 돌아온 뒤 그해 가을에 바이에른 자택에서 죽었다. 그가 완성한 마지막 작품은 애절한 회상을 담은 〈4개의 마지막 노래 Vier letzte Lieder〉(1948)였다. 19세기의 마지막 낭만주의 작곡가였던 그는 관현악법의 대가로 뛰어난 작곡가이자 훌륭한 지휘자였으며 독일의 공직자라기보다는 바이에른의 토양에 뿌리를 박았던 진정한 애국자였다.
평가
초기의 교향시와 오페라 〈살로메〉·〈엘렉트라〉에서 전통을 타파한 전위적 작곡가로서의 면모를 보였던 슈트라우스는 후기에는 그의 주변에서 진행되었던 진보와 실험에 초연한 채 보수적인 경향으로 돌아섰으며 말년에 그의 양식은 모차르트식의 보다 고전적인 성향으로 기울었다. 사실 오페라 〈카프리치오 Capriccio〉(1942)와 23개의 독주 현악기를 위한 〈변용 Metamorphosen〉(1944~45), 〈4개의 마지막 노래〉는 독일 낭만주의와 신고전주의 간의 기법적인 완전한 융합을 성취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명성은 세월이 지나면서 널리 퍼졌으며, 그의 음악은 열렬한 지지나 혐오의 극단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보수주의적인 경향에도 불구하고 그는 20세기의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인물이다.
브루흐(Max Bruch, 1838. 쾰른 ~ 1920. 베를린 근처 프리더나우)
장인적 기교의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유명하다. 14세 때 교향곡을 작곡했고 장학금을 받아 쾰른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1858년 첫 오페라 〈해학, 책략, 복수 Scherz, List und Rache〉(괴테 원작에 기초함)가 연주되었다. 코블렌츠(1865)·존더스하우젠(1867)·베를린(1878)·리버풀(1880~83)·브레슬라우(1883~90) 등지에서 관현악단과 합창단들을 지휘했다. 1891년부터는 베를린 예술원에서 마스터 클래스를 지휘했다. 누구보다도 의욕적이고 작품도 많이 쓴 그는 생전에 〈아름다운 엘렌 Schön Ellen〉(1867)·〈오디세우스 Odysseus〉(1872) 등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대규모 작품들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 작품들은 특히 19세기말 독일합창단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이 작품들이 이후 연주회 곡목으로 자주 연주되지 못한 것은 작품의 장인적 기교와 효과적인 합창서법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작품을 흥미롭게 유지하기에는 독창성과 깊이가 다소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죽은 뒤 계속 연주되는 몇 안 되는 작품으로는 거장적 기교를 요구하는 바이올린이나 첼로를 위한 작품들, 특히 바이올린 협주곡 3곡, 바이올린과 관현악을 위한 〈스코틀랜드 환상곡〉 2곡, 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콜 니드라이 Kol Nidre〉 등이 있다. 바이올린 협주곡 G단조 1번은 바이올린 곡의 고전으로 꼽히는 아주 화려한 곡이다.
6. 국민악파 음악(19세기 후반)
민족주의 음악, 국민주의 음악, 또는 국민 악파는 작곡자가 자기 민족의 의식을 가지고 자기 민족의 고유한 특색을 음악에 담던 19세기 후반 서양의 음악 사조를 일컫는다.
음악 양식에 민족적인 것이나 민족성을 끌어들이는 것은 19세기 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그 전부를 민족주의 음악이라 부를 수는 없으며, 제국주의의 침략 등 어떤 사회적ㆍ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의식적으로 민족적 음악 소재를 작품화하였을 경우에 민족주의 음악으로 정의할 수 있다.
유럽의 시민 혁명기에 각 민족은 봉건성을 타파하고 통일적 근대 국가를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이때 봉건주의에 투쟁하는 자유주의와 개인의 감정과 감각을 해방하는 낭만주의가 태어났으며, 그와 동시에 각 민족의 정치ㆍ사회적 유대를 나타내기 위해 민족주의 음악이 강력한 사조로서 호응을 얻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과 맞물려, 이미 국민국가를 형성한 영국, 프랑스 등에 비하여 당시 외국의 지배를 받거나 봉건 세력으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이나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민족주의 음악이 강조되었다.
민족주의 음악은 주로 각 민족이 전통적으로 지켜온 민요나 춤곡 등을 중시하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민족적 요소를 있는 그대로 작품 속에 도입하는 경우도 많으나, 민족성을 기저에 깐 음악 형식이나 여러 음악 어법을 쓰기도 하고, 또 민요의 가사나 문학, 혹은 전설, 고담, 역사, 자연풍토, 민중생활 등을 소재로 하기도 하며 그 시대의 민족주의적인 새로운 문학을 제재로 자국어로 된 성악곡이나 오페라, 교향시, 모음곡 등의 표제음악을 작곡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전까지는 중부 유럽이 고전 음악의 중심이었으나, 이제는 주변의 다양한 민족 출신의 음악가가 많이 등장하였다.
차이코프스키(Peter Ilich Tchaikovsky, 1840~1893, 러시아)
19세기말 러시아의 대표적인 작곡가.
Pyotr Ilyich Chaikovsky(Tschaikovsky)라고도 씀.
그의 작품은 선율적 영감과 관현악법에 뛰어났다. 〈백조의 호수 Swan Lake〉·〈호두까기 인형 The Nutcracker〉·〈잠자는 숲속의 미녀 Sleeping Beauty〉 등의 작품으로 고전 발레 음악에 있어 최고의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다.
초기생애와 교육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의 보트킨스크에서 태어났는데 부친은 그곳 정부 소유 광산의 감독이었다. 어머니가 프랑스계 러시아인이었고 또 당시 러시아 상류사회의 관습이 그러했기 때문에, 그는 프랑스인 여자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차이코프스키는 음악적으로 조숙했지만 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은 적극적인 후원을 받지 못했는데, 이것은 그의 부모가 신경이 예민한 아이의 건강에 음악 공부가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정교사를 무척 좋아했으나 아버지가 근무지를 바꿔 모스크바로, 그리고 나중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면서 1848년 그 가정교사는 그만두게 되었다. 185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차이코프스키는 법률학교의 예비학교에 입학했는데 그곳에서 시골뜨기 취급을 받아 정신적인 고통을 겪었지만 곧 평정을 되찾았다.
14세 때 지극히 내성적인 그가 정열을 다해 사랑했던 어머니가 콜레라로 죽자 그는 매우 심한 타격을 입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상대적인 무관심으로 인해 받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피아노를 위한 짧은 왈츠곡을 작곡했으며 오페라를 작곡하려는 생각도 가지게 되었다. 죽은 어머니에 대한 그의 비정상적인 사랑과 아버지의 무능은 그의 잠재적인 동성애적 경향과 결코 무관하지 않았고, 남자 법률학교의 규율 역시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잠재적 욕구를 행동으로 나타냈다는 증거는 없다. 법률학교에 있는 동안 산발적으로 받은 성악·피아노·화성법 레슨이 그의 음악교육의 전부였으며 잦은 오페라 극장 출입이 부족한 음악 교육을 보완해주었는데 이러한 경험은 그의 음악적 취향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1862년 새로 설립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했다. 법무부 서기직은 점점 음악에 몰두하는 그를 막을 만큼 흥미 있는 일이 못되었다. 넋을 잃은 채 공문서를 찢어 차근차근 씹어먹다가 그것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어서야 정신을 차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는 곧 공무원의 직책을 사임하고 음악 학도가 되었다. 1864년 작곡한 첫번째 관현악 작품인 알렉산드르 오스트로프스키의 연극 〈폭풍 The Storm〉에 붙인 서곡은 후에 그의 음악에 수용되는 많은 양식적 특성들을 지니고 있으며 멘델스존 추종자였던 그의 스승 안톤 루빈스타인을 깜짝 놀라게 한 초기의 천박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865년말 루빈스타인 형제로부터 모스크바 음악원의 화성법 교수 자리를 제안받았다.
활동
그의 교향곡 1번 G단조(겨울날의 환상) 작품 13(1866)을 작곡하면서 계속되는 과로로 정신적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1866년 1월 모스크바에 편안하게 정착했다. 1860년대말과 1870년대초의 작품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 작곡가들의 음악과의 분명한 동질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둘 모두 민요와 러시아 민족음악 양식의 아버지인 미하일 글린카로부터 비롯된 화성을 다루고 있다. 그는 민족주의 음악(러시아 5인조 )의 지도자인 밀리 발라키레프와 교제를 했으며 발라키레프의 제안으로 서곡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1869)을 작곡했다. 차이코프스키를 알았던 사람들이 말하는 그의 본질적인 매력은 민족주의적 희가극 〈대장장이 바쿨라 Vakula the Smith〉(1874, 초연 1876)에서 가장 잘 나타나고 있으며 이 오페라를 개작한 〈귀여운 구두 Cherevichki〉에서는 러시아 5인조 가운데 가장 독창적인 작곡가인 모데스트 무소르크스키가 니콜라이 고골리의 우크라이나 민화를 각색한 오페라 〈소로친스크의 시장 Sorochintsy Fair〉과 유사한 장점을 지녔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의 오페라는 무소르크스키가 작곡한 그 어떤 오페라보다도 발라키레프의 민속음악적 어법과 더욱 밀접한 관계가 있다.
러시아를 방문한 이탈리아 오페라단의 프리마돈나인 데지레 아르토와의 이루지 못한 한 순간의 연애사건 이후에 그는 단 한 사람의 여자와 낭만적인 관계를 가졌다. 1870년대 중반 그는 또다시 신경쇠약에 걸렸다. 그의 생애에 있어 이러한 암흑기를 알리는 징후의 하나는 교향곡 4번 F단조 작품 36(1877)과 푸슈킨의 시를 각색한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 Eugene Onegin〉(1877~78)에서 정점을 이룬 거의 광적인 작곡 활동이었다. 그는 〈예브게니 오네긴〉의 여주인공 타탸나에게 연민을 느끼고 있었다.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가 그를 사랑하게 되어 자신의 사랑을 거절하면 자살하겠다고 하자 그는 그녀가 잔인하게 쫓겨난 타탸나로 생각되어 그녀와의 결혼을 승락했다. 그는 불완전한 결혼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고 더욱 불행한 것은 색광이었던 그의 아내가 그로 하여금 자살을 기도하게끔 몰고 갔다는 것이다. 그는 사회의 시각으로 볼 때 자신은 성적인 면에서 부랑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는 아이들을 좋아했지만 자신의 아이는 가지지 못했다. 남은 생애 동안 좌절과 고독 속에서 살아야만 했으며 폭음과 창작만으로 위안을 삼았다. 우크라이나의 카멘카에 있는 그의 누이 집에서 보냈던 행복했던 여름마저도 그녀의 아들인 어린 조카 블라디미르 다비도프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에 대한 지나친 죄의식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76년 그는 자신의 작품을 지지하는 부유한 미망인 나데츠다 폰 메크와의 특별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녀는 차이코프스키에게 충분한 연금을 지불하여 교수직에서 벗어나 작곡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녀의 뜻에 의해 두 사람은 한 번도 대면하지 못했다. 그들의 친밀한 서신에는 차이코프스키보다는 그녀가 더 노출되었다. 호감을 얻으려는 생각에서 그는 언제나 그가 진정으로 생각했던 것보다는 사람들이 읽고 싶어하는 바를 쓰려고 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특별히 그녀를 위해 완성한 4번 교향곡의 상세한 프로그램은 매우 용의주도하다. 나중에 그는 넘치는 감정을 토로하는 그녀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쓰는 것에 대해 귀찮다는 표현을 하기도 했다. 이 이상한 관계는 분명 양쪽 모두가 깊이 느끼고 있던 정신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것이었으며 특히 별거 후에도 아내가 성가시게 굴어 돈을 지불해야 했던 차이코프스키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폰 메크와의 플라톤적 관계는 그의 취향에 더욱 더 적합한 것이었다.
자신에 대한 그녀의 연금을 합리화시키려는 시도로 그는 다음 몇 년 동안 지나치게 많은 작품을 썼다. 그 가운데는 피아노 소타나 G장조 작품 37(1878), 관현악 모음곡 1번 D단조 작품 43(1878~79), 그의 후원자인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대관식을 위한 음악, 그리고 상업적인 성공을 목적으로 작곡된 최초의 오페라 〈오를레앙의 처녀 The Maid of Orleans〉(1878~79) 같은 한층 무미건조한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오페라를 상업적으로 작곡한 이유는 그가 보기에 먼저 작곡한 〈예브게니 오네긴〉이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극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878~81년의 기간 동안 많은 중요한 업적들이 이루어졌으며 이 시기에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35(1878)와 〈현을 위한 세레나데〉 C장조 작품 48(1880), 〈이탈리아 기상곡〉 작품 45(1880), 〈1812년 서곡〉 작품 49(1880) 등의 걸작이 작곡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초연 당시 간신히 체면을 유지할 정도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던 〈예브게니 오네긴〉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황제의 찬사로 말미암아 큰 인기를 누렸다. 1885년에 작곡된 〈만프레드 교향곡 Manfred Symphony〉 작품 58은 아낌 없는 격찬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몇몇 절망적인 역사 사건 속에서 말년의 차이코프스키의 삶과 음악이 따라가야 할 길을 보여주고 있다.
1885년에 모스크바 근교의 마이다노보에 자신의 집을 샀으며, 죽기 바로 전 해에 지금은 차이코프스키 박물관이 된 클린 근교의 집으로 옮기기까지 이곳에서 살았다. 러시아에서 보다 많은 여행을 시작했는데 코카서스에서는 특별히 즐거운 2번의 휴가를 보냈으며 트빌리시에서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새로 개작한 〈대장장이 바쿨라〉를 성공적으로 연주하여 지휘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했다. 1888년에는 라이프치히(이곳에서 그는 요하네스 브람스와 에드바르트 그리그를 만났음)와 함부르크·베를린·프라하·파리·런던에서 그 자신의 작품을 지휘하기 위한 연주 여행을 했으며 그의 음악은 어느 곳에서나 환영을 받았다. 이 여행은 차이코프스키의 말년에 있어 절정이었다. 이후로는 전에 작곡한 많은 작품들의 지속적인 성공, 그리고 푸슈킨을 각색한 2번째 오페라 〈스페이드의 여왕〉(1890 공연)과 그가 좋아한 발레곡 〈잠자는 숲속의 미녀〉(1890 공연, 처음에는 냉담한 반응을 얻었음) 등의 새로운 작품에 대한 갈채에도 불구하고 다시 신경쇠약 증세가 심해졌다. 교향곡 5번 E단조 작품 64(1888)를 필두로 한 그의 주요작품들은 점점 감정적으로 격해져 히스테리와 절망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차이코프스키는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더 많은 지역을 여행했는데 1889년에는 영국에서 유명한 피아노 협주곡 1번 B♭단조 작품 23(1874~75)을, 1893년에는 교향곡 4번을 지휘했다. 1893년에 케임브리지대학교에서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이러한 성공과 〈호두까기 인형〉을 서둘러서 연주회용 음악으로 개작한 모음곡 등에서 거둔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병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으며 1890년에 폰 메크 부인이 갑자기 둘의 관계와 연금을 끊어버리자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연금이 끊어지기는 했어도 그다지 큰 경제적 어려움은 겪지 않았는데 이것은 〈스페이드의 여왕〉에서 벌어들이는 인세가 손실을 충당했기 때문이었으며 또한 그무렵 그가 국가연금의 수혜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차이코프스키는 결코 그녀의 행동을 용서하지 않았으며, 그가 입은 정신적 충격이 얼마나 컸는가는 마지막 병상에서 정신착란을 일으켰을 때 그녀의 이름을 격분한 목소리로 반복해서 불렀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1893년 8월 차이코프스키는 마지막 교향곡이자 스스로 걸작으로 생각했던 교향곡 6번 B단조 작품 74를 완성해서 10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을 지휘했지만 청중들의 반응에 실망했다. 이 교향곡에서 새롭게 시도한 느린 빠르기의 마지막 악장으로는 불과 1년 6개월 전 보다 가벼운 〈호두까기 인형〉 모음곡의 초연에서 받았던 갈채를 이끌어낼 수 없었다.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그릇된 기대를 가졌으며 그 자신과 그 작품은 쟁점으로 부각되었다. 프로그램에 적은 이 작품에 대한 '신비한' 해설과 더불어 그는 이 작품 안에 그의 모든 영혼을 쏟아넣었으나 청중들은 그것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그 원인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로는 콜레라가 도시를 휩쓸고 있을 때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시고 콜레라에 감염되어 죽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학설로는 그가 황실의 남자들과의 동성애로 비난받게 되자 추문을 피해 음독 자살했다고도 한다.
평가
차이코프스키와 그의 음악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그의 작품은 자기 표현적이고 다소 매혹적이며 화려한가 하면 때로는 천박하기도 하며 절망감은 후기에 갈수록 점점 더 뚜렷하게 나타나 그 시대 가장 위대한 교향곡 가운데 하나인 6번 교향곡에서 절정에 이르고 있다. 전작품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음악은 풍부한 선율적 영감, 상상력, 관현악법에 대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 비록 후기 작품에 가서는 의식적인 러시아 민족주의를 거부하고 있지만 그 바탕에 있는 정서와 특징은 러시아 국민악파 작곡가들만큼이나 러시아적이다. 음악가와 일반 대중 사이의 연결에 있어서 그의 성공은 부분적으로는 소련에서의 그의 높은 위상이 설명해주고 있다.
차이코프스키 이래로 그 어떤 작곡가도 그만큼 유행의 변화, 그리고 과대평가와 과소평가의 양극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그는 보다 정서적인 작품들을 통해 폭넓은 계층의 청중들로부터 커다란 인기를 얻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만들어내는 최면효과 때문에 그의 진정한 음악적 재능에 대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단지 연주, 음반 녹음, 악보 출판이 계속되고 있고 아직도 발굴되어야 할 차이코프스키의 걸작들이 있기 때문이라면 시간이 갈수록 차이코프스키의 위상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높아질 것이라는 주장은 그럴듯해 보인다. 그는 분명 고전 무용음악에 있어 가장 위대한 작곡가이다. 그의 교향곡들은 그 질에 있어 다양하지만 모두 중요한 음악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지막 세 교향곡은 특히 유명하며 거기에 〈만프레드 교향곡〉이 추가될 수도 있다. 피아노 협주곡 1번과 바이올린 협주곡은 기교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 이상의 더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들이며, 그밖의 다른 관현악 작품들 가운데는 〈로미오와 줄리엣〉 서곡과 〈현을 위한 세레나데〉가 주목받을 만하다. 오페라 가운데는 〈예브게니 오네긴〉이 가장 걸작이며 〈스페이드의 여왕〉은 극적인 효과가 훌륭하다. 그의 현악 4중주도 뛰어나지만 피아노 음악은 대부분 별다른 특성이 없다. 그의 많은 가곡들 가운데는 훌륭한 작품들도 여러 곡 포함되어 있다.
그리그(Edvard (Hagerup) Grieg, 노르웨이 베르겐, 1843 ~ 1907)
노르웨이의 민속 전통에 뿌리를 두고 섬세한 서정 감각으로 음악을 작곡했다. 6세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를 배웠으며, 1858년 바이올린의 거장 올레 불의 추천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입학했다. 멘델스존과 슈만 풍의 음악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1863년 코펜하겐으로 가서 노르웨이의 젊은 민족주의 음악 작곡가 리카르트 노르로크와 사귀면서 음악적으로 발전했다. 1864~65년 스칸디나비아의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설립한 코펜하겐 음악협회 ‘외테르프’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1867~1901년에 10집으로 된 피아노곡 <서정 소곡집>을 작곡했다. 가장 사랑받는 곡은 <페르 귄트 모음곡> 작품 23과 <홀베르그 모음곡> 작품 40이다.
원래 스코틀랜드 출신인 그리그(예전에는 Greig) 가문은 그의 할아버지 때 쿨로뎅 전투 후에 노르웨이로 이민하였다. 아버지 알렉산더는 베르겐 주재 영국영사였고, 어머니 게신 하게루프는 노르웨이의 안정된 가문에서 태어나 함부르크에서 음악을 배웠다. 6세 때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웠으며 1858년 바이올린의 거장 올레 불의 추천으로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들어가 멘델스존과 슈만 풍의 음악 전통에 영향을 받았다. 이 시기에 늑막염을 심하게 앓았으며 끝내 완전히 치유하지 못했다.
1863년 코펜하겐으로 가서 1864년 노르웨이의 젊은 민족주의 음악 작곡가 리카르트 노르로크와 사귀면서 음악적으로 발전했다. "그를 통해 북부의 민속 가락과 내 자신의 특성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그리그는 말한 바 있다. 1864~65년 겨울, 스칸디나비아의 젊은 작곡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설립한 코펜하겐 음악협회 '외테르프'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1867년 사촌 누이동생 니나 하게루프와 결혼했고, 그녀는 그리그의 가곡에 대한 권위있는 해석가가 되었다. 1865~66년, 1869~70년 겨울을 로마에서 보내던 중, 그의 피아노 협주곡에 열광적 찬사를 보낸 리스트와 입센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1866년 크리스티아니아(지금의 오슬로)에 정착하여 노르웨이 정부의 종신연금(1,600크로나)을 받기 시작한 1874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1885년 베르겐 근방에 '트롤드하우겐'이라는 집을 지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스칸디나비아·유럽·영국에서 연주 여행을 가졌으며, 1888년 런던에서 자신이 작곡한 피아노 협주곡을 스스로 연주했다(→ 민속음악).
노르웨이의 민속 전통에 뿌리를 둔 그리그의 음악은 섬세한 서정 감각으로 유명하다. 1867~1901년 사이에 10집으로 된 피아노곡 〈서정 소곡집 Lyriske Stykker〉을 작곡했다. 활기찬 리듬은 민요와 연관이 깊으며, 화성법은 후기 낭만주의 양식에서 발전한 새로운 것이었다. 〈피아노 협주곡〉 작품 16과 〈현악 4중주 G단조〉 작품 27, 바이올린 소나타 및 피아노 소나타 각각 3곡 등 일부 작품에서 자유 소나타 형식을 썼다. 피아노를 위한 〈발라드〉 작품 24는 노르웨이의 민속 선율에 바탕을 둔 변주곡이다.
가장 사랑받는 곡은 〈페르 귄트 모음곡 Peer Gynt〉 작품 23과 〈홀베르그 모음곡 Holberg〉 작품 40이다. 노르웨이의 춤과 노래를 편곡한 작품 17, 작품 66과 특히 〈노르웨이 농민 춤곡 슬로터〉 작품 72는 리듬과 화성에 대한 그의 예리한 감각을 보여준다. 성악곡은 A. O. 비녜의 가사에 곡을 붙인 작품 33과 시가 〈산의 요정 Haugtussa〉 작품 67이 있는데, 이 작품들에서 그리그는 시의 정서를 그대로 음악으로 표현했다.
시벨리우스(Jean Sibelius, 1865. 핀란드 ~ 1957. 에르벤페에)
시벨리우스는 러시아 통치하에 핀란드 교원양성학교에서 공부할 때, 그에게 있어 지속적인 영감의 근원이 된 핀란드의 신화적 서사시 <칼레발라>를 접하게 되었다. <포횰라의 딸>·<루온노타르> 등을 포함한 그의 많은 교향시들이 이 서사시에서 비롯되었다. 법률가가 되려 했으나 그는 곧 헬싱키에서 법률 공부를 중단하고 음악에만 전념했다. 처음에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려고 했으나 베겔리우스의 지도를 받아 많은 실내악곡과 기악곡을 작곡했다. 20대 중반에 핀란드를 떠난 그는 베를린과 빈에서 계속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작곡가인 로베르트 푹스와 카를 골트마르크에게서 사사했다. 핀란드로 돌아오자마자 발표한 최초의 대규모 관현악 작품 <쿨레르보 교향곡>은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과 그 뒤를 잇는 <엔 사가>·<카렐리아>·<4개의 전설>로 그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부상했다. 그의 대표적 교향시 <핀란디아>는 1899년에 작곡되어 1900년에 개정되었다.
시벨리우스는 러시아 통치하의 핀란드에서 핀란드어로 가르치는 최초의 학교였던 핀란드 교원양성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핀란드의 문학, 특히 그에게 있어 지속적인 영감의 근원이 되었던 핀란드의 신화적인 서사시 〈칼레발라 Kalevala〉를 접하게 되었다. 〈포횰라의 딸 Pohjola's Daughter〉·〈루온노타르 Luonnotar〉 등을 포함한 그의 많은 교향시들이 이 서사시에서 비롯되었다. 법률가가 되려 했으나 그는 곧 헬싱키에서 법률 공부를 중단하고 음악에만 전념했다. 처음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려고 했다. 베겔리우스의 지도를 받아 많은 실내악곡과 기악곡을 작곡했다. 그는 자신의 음악 활동을 위해 원래의 세례명 대신 '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0대 중반에 핀란드를 떠난 그는 베를린과 빈에서 계속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작곡가인 로베르트 푹스와 카를 골트마르크에게서 사사했다.
핀란드로 돌아오자마자 발표한 그의 최초의 대규모 관현악 작품 〈쿨레르보 교향곡 Kullervo Symphony〉(1892)은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과 그 뒤를 잇는 작품들인 〈엔 사가 En Saga〉·〈카렐리아 Karelia〉·〈4개의 전설 Four Legends〉로 그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부상했다. 〈교향곡 1번 E단조〉(1899)를 작곡하기 이전인 1897년 핀란드 의회는 시벨리우스의 재능을 인정하여 그에게 연금을 지급하도록 의결했다. 그의 교향시 〈핀란디아 Finlandia〉는 1899년에 작곡되어 1900년에 개정되었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시벨리우스의 명성은 대륙을 관통했다. 학생으로서 헬싱키에서 시벨리우스와 친교를 맺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페루치오 부조니는 베를린에서 〈교향곡 2번 D장조〉(1901)를 지휘했고, 영국의 작곡가 그랜빌 밴톡은 〈교향곡 3번 C장조〉(1907)를 의뢰했다. 이 작품에서 시벨리우스는 2번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1903)와 같은 민족적 낭만주의에 등을 돌리고 〈엔 사가〉와 〈교향곡 4번 A단조〉(1911)에서처럼 더욱 철저하고 단호한 양식을 취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인 마지막 3개의 교향곡(5번 내림 E장조, 6번 D단조, 7번 C장조)과〈타피올라 Tapiola〉(1925)를 출판했지만 말년에는 긴 침묵에 빠졌다. 8번 교향곡(1930년대초에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음)과 심지어는 9번 교향곡이 있다는 설이 있지만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자필 악보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1930년대에는 영국의 세실 그레이와 컨스턴트 램버트, 미국의 올린 다운스 등의 작가들 덕분에 시벨리우스에 대한 인기가 유행처럼 번져갔다. 이러한 유행에 대한 다음 세대의 반동에도 불구하고 시벨리우스는 음악 대중에 대한 확고한 영향력을 견지했다. 비록 그의 음악적 영감이 스칸디나비아의 경관과 내밀한 연관이 있다고는 해도, 시벨리우스를 대뜸 '자연시의 시인'쯤으로 기억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교향시와 7곡의 교향곡에서 성취한 업적은 주로 형식에 대한 탁월한 섭렵에 기인한 것이다. 3번 교향곡의 1악장은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교향곡의 1악장에서 볼 수 있는 구조적 명료성을 가지고 있지만, 유기적 총체성과 음구조의 구축은 오히려 그 모델들을 능가하고 있다. 그의 천재성의 비밀은 이러한 유기적 구조물의 구축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드보르자크(Antonín (Leopold) Dvořák, )1841. 오스트리아 제국 보헤미아 넬라호제베스 ~ 1904. 프라하)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된 최초의 보헤미아의 작곡가.
보헤미아 지방의 민속자료를 19세기 낭만음악 양식 속에 바꿔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주요작품에는 〈슬라브 무곡〉(1878), 교향곡 9번 〈신세계〉(1893), 〈유모레스크〉(1894) 등이 있다.
드보르자크는 보헤미아(지금의 체크) 지방 프라하의 북부 블타바 강변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1857년 그의 음악선생은 드보르자크의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서 아버지에게 프라하에 있는 오르간 학교에 입학시킬 것을 권했다. 1875년 신진 예술가에게 주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국가 보조금을 받았고, 이것을 계기로 만나게 된 브람스와 계속해서 두터운 우정을 맺게 되었다. 〈모라바 2중창곡〉(1876)과 피아노 2중주 〈슬라브 무곡〉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얻었고, 이것을 계기로 보헤미아 음악이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음악은 당시 주요평론가들과 연주자·지휘자들로부터 찬탄을 받았고, 그의 명성은 계속해서 외국으로 퍼져나갔다. 그의 음악적 매력은 주로 풍부한 선율,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소박함, 단순미에 있다. 모든 음악 장르를 섭렵해서 골고루 명곡들을 남겼으며, 오페라에서만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는 데 실패했다.
보헤미아 지방의 민속자료를 19세기 낭만음악 양식 속에 바꿔넣은 것으로 유명하다(→ 색인 : 민속음악). 주요작품에는 〈슬라브 무곡 Slavonic Dances〉(1878), 교향곡 9번 〈신세계 From the New World〉(1893), 〈유모레스크 Humoresque〉(작품 101-7번, 1894) 등이 있다.
드보르자크는 보헤미아(지금의 체크) 지방 프라하의 북부 블타바 강변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운영하던 여인숙의 안팎에서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나이가 들면서는 아마추어 악단의 일원이 되어 시골 무도회장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일했다. 1857년 그의 음악선생은 드보르자크의 비범한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서 아버지에게 프라하에 있는 오르간 학교에 입학시킬 것을 권했다. 그후 아버지의 재정적인 도움도 받지 못한 채 그 오르간 학교의 2년과정을 마쳤고, 여인숙과 극장을 돌아다니면서 비올라를 연주하여 개인 교습으로 얻는 적은 봉급을 보충했다.
1860년대는 드보르자크에게 있어서 시련의 기간이었다. 시간과 경제적인 면에서 압박을 당하고 있었는데, 심지어 작곡할 종이와 피아노까지도 부족했다. 나중에 그는 당시 자신이 무엇을 작곡했는지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회상하고 있으나, 1864년경에 그의 책상 속에는 교향곡 2곡과 오페라와 실내악 작품 각각 1곡씩과 여러 편의 가곡들이 발표되지 않은 채 보관되어 있었다. 당시의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그가 베토벤과 슈베르트에 대한 이전의 관심으로부터 점차 리스트와 바그너에 대한 관심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873년 11월 몇 편의 작품 연주가 성공을 거두어 이름이 프라하에 알려지게 될 즈음 안나 체르마코바와 결혼하여 전에 없던 행복한 가정생활을 시작했다.
1875년 신진 예술가에게 주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국가 보조금을 받았고, 이것을 계기로 만나게 된 브람스와 계속해서 두터운 우정을 맺게 되었다. 브람스는 그에게 기술적인 조언을 해주었을 뿐 아니라 영향력있는 출판업자 프리츠 짐로크를 소개해주었다. 짐로크의 회사에서 출판한 소프라노·콘트랄토를 위한 〈모라바 2중창곡 Moravian Duets〉(1876)과 피아노 2중주 〈슬라브 무곡〉으로 세계적인 관심을 얻었고, 이것을 계기로 보헤미아 음악이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음악은 당시 주요평론가들과 연주자·지휘자들로부터 찬탄을 받았고, 그의 명성은 계속해서 외국으로 퍼져나갔으며, 자연히 고국에서는 더욱 크게 명성을 떨칠 수 있었다. 1884년 영국을 처음 방문하여(평생을 걸쳐 영국을 10번 방문했음) 자신의 작품들 중 특히 합창곡을 공연해서 성공했다. 그당시 발표된 곡 중에 걸작으로는 〈성모 애가 Stabat Mater〉(1877)·〈테 데움 Te Deum〉(1892)을 들 수 있다(→ 색인 : 합창). 1890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친구인 차이코프스키의 주선으로 연주회를 열어 성공적인 반응을 얻었고, 이듬해 케임브리지대학 명예음악박사학위를 받았다. 1892년에는 뉴욕에 새로 설립된 국립음악원의 원장직을 수락했고, 미국에 머무르는 수년 동안 아이오와 등 서부까지 여행하여 신세계의 환경에 흥미를 느끼고 자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 고국을 그리워하게 되었고, 1895년에 보헤미아로 돌아왔다. 만년에는 여러 곡의 현악4중주와 교향시들, 마지막 3개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의 음악적 매력은 주로 풍부한 선율,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소박함, 단순미에 있다. 모든 음악 장르를 섭렵해서 골고루 명곡들을 남겼으며, 오페라에서만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는 데 실패했다. 그의 작품 중 교향곡 9번 〈신세계〉(1893)가 가장 잘 알려지게 된 것은 이 작품이 미국 생활 중 흑인영가와 그밖의 요소들에서 받은 영향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 보헤미아적인 주제를 통해 고국에 대한 작곡가의 향수를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7. 근대음악(1890~1920)
近代音樂 현재의 시점, 즉 20세기 말에서 생각하는 근대음악이란 대체로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과 20세기 초의 20년 동안 합계 30년에 이르는 동안의 음악을 가리켜 말한다. 19세기 후반의 유럽 음악은 바그너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고 있었으나, 여기에서 탈피(脫皮)하여 초극(超克)하려는 시도가 작곡기법의 면에서는 종전의 조성음악(調性音樂)으로부터 비조성음악을 출현시킨다는 근본적 전환을 가져왔다. 독일의 작곡가보다는 바그너의 영향권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드뷔시의 개혁, 인상주의의 창시는 특히 뛰어났으며, 영향력은 크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의 반(反)낭만주의 운동으로서의 베리스모도 주목된다. (2) 낭만파에서 현대에의 가교적(架橋的) 역할을 하는 과도적인 음악의 정황(情況)으로서 특징적인 것은 민족주의의 발흥이다. 민족적 요소를 중시하는 사상은 원래 낭만파의 발상(發想) 중의 하나이나, 음악사에서는 후진제국, 아메리카,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슬라브계 각국 음악의 자각을 전제로 하여 갑자기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라벨((Joseph-) Maurice Ravel, 1875. 프랑스 시부르 ~ 1937. 파리)
<볼레로〉·〈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스페인 광시곡〉, 발레곡 〈다프니스와 클로에〉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 등의 작품에서 형식과 양식의 완성미와 장인정신을 잘 나타냈다.
1889년 14세 때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1905년까지 다녔다. 이 기간 동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현악 4중주〉 등 잘 알려진 작품들을 작곡했다. 그는 초기의 작품이 완숙기의 작품보다 완성도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몇 안되는 작곡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라벨의 생애는 대체로 평이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몇몇 친구들과의 사교 모임을 즐겼지만 파리 근교 랑부예 숲의 몽포르라모리에 은둔하다시피 지냈다.
〈볼레로 Boléro〉(1928)·〈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1899)·〈스페인 광시곡 Rapsodie espangnole〉(1907), 발레곡 〈다프니스와 클로에 Daphnis et Chloé〉(1912년 초연),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 L'Enfant et les sortilèges〉(1925) 등의 작품에서 형식과 양식의 완성미와 장인정신을 잘 나타냈다.
라벨은 프랑스의 생장드뤼 근교의 마을에서 스위스인 아버지와 바스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예술적이고 교양이 풍부했으며, 어려서부터 라벨이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보이자 그의 아버지는 가능한 모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1889년 14세 때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1905년까지 다녔다. 이 기간 동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현악 4중주〉 등 잘 알려진 작품들을 작곡했다. 이들 작품들, 특히 뒤의 2개의 작품은 평생동안 그의 작품에 품질 보증과 같이 따라다니는 완성된 양식과 장인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초기의 작품이 완숙기의 작품보다 완성도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몇 안되는 작곡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파리 음악원 재학 당시 3번의 시도 끝에 로마 작곡 대상에서 낙선한 사건(음악학자·소설가인 로맹 롤랑을 비롯한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음악가와 저술가들은 라벨을 지지했고, 그가 제출한 작품은 심사원들 중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에게 너무 '진보적'인 것으로 평가되었음)은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파리 음악원 원장 테오도르 뒤부아는 사임하고 그 자리는 라벨에게 작곡을 가르쳤던 가브리엘 포레가 맡게 되었다.
그러나 라벨은 결코 혁신적인 작곡가는 아니었다. 그는 조성(調性)에 기초한 당시의 형식적·화성적 기존 전통을 벗어나지 않는 작품들을 주로 썼다. 그러나 전통 음악 양식에 대한 그의 조작과 적용은 너무나 개성적이어서 바흐나 쇼팽 등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음악 언어를 창조해냈다. 그의 선율은 거의 언제나 선법적(즉 서구의 전통적인 장·단 온음계가 아니라 옛날 그리스의 프리지아와 도리아 선법에 근거함)인 데 반해, 그의 화성은 '부가음'과 아포자투라 를 화성적으로 해결시키지 않음으로써 신선한 맛을 풍긴다. 그는 초기의 〈물의 유희 Jeux d'eau〉(1901 완성)에서부터 〈밤의 가스파르 Gaspard de la nuit〉(1908)·〈쿠프랭의 무덤 Le Tombeau de Couperin〉(1917), 2개의 피아노 협주곡(1931)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걸작들을 통해 피아노 문헌을 풍부하게 확장시켰다. 협주용이 아닌 순수한 관현악 작품 가운데 〈스페인 광시곡〉과 〈볼레로〉가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것들은 관현악법의 완벽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활동의 절정은 러시아의 안무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프랑스의 작가 콜레트와의 공동작업으로 탄생시킨 작품들일 것이다. 라벨은 디아길레프의 발레를 위해 〈다프니스와 클로에〉를 작곡했고, 그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은 콜레트의 대본에 의한 작품이다. 〈어린이와 마술〉에서 라벨은 개구쟁이 소년이 등장하는 마법·마술 이야기 속에 동물들을 등장시키고, 사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등 기발하고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 기회를 가졌다. 그외의 오페라로는 풍자적 내용을 담은 〈스페인의 한때 L'Heure espagnole〉(1911 초연)뿐이었다. 가곡 작곡가로서 라벨은 〈자연의 역사 Histoires naturelles〉·〈스테판 말라르메의 3편의 시 Trois poémes de Stéphane Mallarmé〉·〈샹송 마데카스 Chansons madécasses〉 등의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으로 위대한 개성을 성취했다.
라벨의 생애는 대체로 평이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몇몇 친구들과의 사교 모임을 즐겼지만 파리 근교 랑부예 숲의 몽포르라모리에 은둔하다시피 지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잠시 전선에서 트럭 운전병으로 복무했는데 허약한 체질로는 감당하기에 벅차 1917년 육군에서 제대했다.
1928년 4개월 동안 캐나다와 미국 여행길에 올랐으며, 같은 해 영국을 방문하여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명예 음악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해에는 독창적인 형식의 〈볼레로〉가 이다 루빈슈테인의 주역으로 발레 작품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죽기 전 마지막 5년 간은 실어증에 시달렸다. 이 병으로 인해 언어력을 상실했으며, 단 한 줄의 음악도 더이상 작곡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름조차 서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진짜 비극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의 음악적 상상력이 다른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뇌로 통하는 혈관의 폐색(閉塞) 제거 수술은 성공하지 못했고, 스트라빈스키와 다른 음악가들과 작곡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살았던 파리 교외의 르발루아 공동묘지에 묻혔다.
라벨에게 있어서 음악은 신비한 제식(祭式)과도 같아서, 높은 장벽 뒤에서 작용해 외부세계로부터 감춰져 있으며 부당한 침입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독자적 법칙을 가졌다. 동시대인인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라벨을 '가장 완벽한 스위스의 시계제조업자'에 비유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사실 이 비유를 통해 그 스스로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복잡성과 정확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드뷔시 (Achille-) Claude Debussy, 1862 ~ 1918, 프랑스)
20세기 음악의 기초를 확립한 프랑스의 작곡가.
고도로 독창적인 화성 체계와 구조를 발전시켰으며, 당대의 인상주의 미술과 상징주의 문학이념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대표작으로는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Suite bergamasque〉(1890~1905) 가운데 〈달빛 Clair de lune〉·〈목신의 오후 전주곡 Prelude a l'apres-midi d'un faune〉(1894),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Pelleas et Melisande〉(1902)·〈바다 La Mer〉(1905)가 있다.
클로드 드뷔시는 1862년에 생 제르망 엉 레(Saint-Germain-en-Laye)에서 다섯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자기 가게 주인이었고,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그는 7세 때 그보다 나이가 많은 체루티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아이와 함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드뷔시의 레슨비는 그의 아주머니(aunt)가 지불했었다. 1871년에 수줍고 겁많은 소년 드뷔시는 마리 모테 드 플레비유(Marie Mauté de Fleurville) 부인에게 주목받았다.[1]
그녀는 자신이 프레데리크 쇼팽의 친구라고 주장했고, 드뷔시도 항상 그녀를 신뢰했지만, 실제로 그녀가 쇼팽의 친구였다는 증거는 없다.[2]
자신의 재능을 확실하게 보여준 덕분에, 1872년 11살의 나이로 드뷔시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고, 1872년부터 1884년까지 세자르 프랑크, 에르네스트 기로(프랑스어: Ernest Guiraud)과 함께 공부하였다. 재학 중에 러시아 음악과 무소르그스키의 작품을 접한 것이 이후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탕자>로 로마 대상을 받고, 1887년 말라르메의 살롱에 출입하였다. 이때 상징파 시인 및 인상파 화가와의 접촉에 의해 차츰 인상주의 음악에의 의식이 깊어졌다. 말라르메의 시에 의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으로 그의 인상파풍의 작품 경향은 확정되었다. 가극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에서는 반 바그너적, 반 튜튼적 성격이 더욱 뚜렷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군의 폭격이 한창일 때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스트라빈스키(Igor (Fyodorovich) Stravinsky, 1882.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 오라니엔바움 ~ 1971. 미국 뉴욕 시)
러시아 태생 미국의 작곡가.
〈불새 〉(1910 초연)·〈페트루슈카〉(1911)·〈봄의 제전〉(1913)·〈오르페우스〉(1947) 등의 발레 음악으로 유명하다.
부모의 반대에 그의 음악적 관심은 작곡으로 쏠리게 되었다. 1902년 여름 아버지가 죽기 몇 달 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 젊은 작곡가의 초기 작품 경향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그에게 음악원에 들어가 전통적인 학교교육을 받지 말고 개인적으로 자신의 길을 추구하라고 권유했다. 1909년 2월 6일 〈불꽃놀이〉와 초기의 관현악 소품인 〈환상 스케르초 Scherzo fantastique〉(1907~08)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되었을 때 스트라빈스키의 재능에 감명받은 무용가 디아길레프가그에게 자신의 예술적 협력자들의 모임에 참여하도록 요청하면서,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음악 시대가 열렸다.
러시아 시대
스트라빈스키의 아버지인 표도르 이그나체비치 스트라빈스키는 매우 유명한 베이스 가수였으며, 처음에는 키예프에서, 나중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오페라 가수로 성공적인 활동을 했다.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는 4형제 중에 3번째였으며 음악을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그는 집에서 오페라를 연습하는 아버지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되는 오페라와 발레를 볼 수 있었다. 9세부터 정규적인 피아노 교육을 받았으며 조금 뒤부터는 화성법과 대위법을 공부했다. 음악에 대한 그의 재능과 열의는 분명했지만 그의 부모는 그가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형사법과 법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 입학했으며 1905년 졸업했다.
그동안 그의 음악적 관심은 작곡으로 쏠리게 되었다. 1902년 여름 아버지가 죽기 몇 달 전 같은 대학에 다니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아들을 통해 그를 만났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 젊은 작곡가의 초기 작품 경향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그에게 음악원에 들어가 전통적인 학교교육을 받지 말고 개인적으로 자신의 길을 추구하라고 권유했다. 이 충고는 받아들여졌다. 1년 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스트라빈스키를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데 동의했으며 주로 악기편성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관계는 약 3년(1903~06) 동안 지속되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작품을 계획하고 작곡하면서 자기 스승과 함께 검토하는 습관이 있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러한 작품들 가운데 다수를 편곡했으며, 그 가운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적·공개적으로 연주되었던 〈교향곡 E♭ 장조〉(1905~07)가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탄생된 마지막 작품이 짧은 교향시인 〈불꽃놀이 Fireworks〉(1908)였는데, 스트라빈스키는 이 작품을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딸에게 주는 결혼선물로 작곡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 작품이 연주되기 전인 1908년 여름에 죽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제자는 스승을 기리기 위해 〈장례식 만가〉(1908)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되었지만 악보는 남아 있지 않다.
스트라빈스키는 1905년 대학을 떠났다. 다음해 그는 사촌인 예카테리나 노센코와 결혼했다. 그들은 스트라빈스키의 가족이 살고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아파트의 방 2개를 차지했으며, 여름에는 시골인 우크라이나 지방 볼리니아의 우스틸룽에서 지냈다. 1907년 아들 표도르가 태어났고 1년 뒤에는 딸 루드밀라가 태어났다.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와의 협력시대
1909년 2월 6일 〈불꽃놀이〉와 초기의 관현악 소품인 〈환상 스케르초 Scherzo fantastique〉(1907~08)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되었을 때 안무가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이 연주를 들었다. 당시 그는 파리에서 막을 열게 될 발레 뤼스의 여름 시즌을 위한 준비작업에 분주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재능에 너무나 감명받은 디아길레프는 그에게 자신의 예술적 협력자들의 모임에 참여하도록 요청했다. 1909년의 발레 시즌을 위해 스트라빈스키는 많은 발레 음악 작품들의 편곡을 위촉받았는데 그 가운데는 〈레 실피드 Les Sylphides〉를 위해 편곡한 쇼팽의 피아노 소품 2곡도 포함되어 있다. 디아길레프는 1910년의 시즌을 위해 새로운 발레 음악 〈불새〉를 그에게 위촉했다.
이후 몇 년 동안은 두 사람 사이에 긴밀한 협조관계가 유지된 시기였는데, 이것은 디아길레프가 그의 발레단을 통해 스트라빈스키의 새로운 주요작품들이 부상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파리 오페라에서 공연된 〈불새〉의 결정적인 성공(1910. 6. 25) 이후 스트라빈스키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연주회 소품 Konzertstück〉의 작곡을 시작했지만 디아길레프의 반대로 중단되었다. 그는 이미 작곡을 마친 음악을 새로운 발레 대본에 맞게 수정하는 것에 동의했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페트루슈카〉는 발레 뤼스의 1911년 시즌 파리 공연에서 초연되었다. 그 전에 스트라빈스키는 〈대 제물 Great Sacrifice〉이라 일컫는 원시적인 봄의 교향곡을 구상했는데, 다시 디아길레프가 발레의 형식으로 바꾸어 작곡하도록 그를 설득했다. 그결과 〈봄의 제전〉(최종 제목)은 1911~13년에 걸쳐 2년 만에 완성되었다. 이 역동적인 음악은 1913년 5월 29일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당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스트라빈스키는 덴마크의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나이팅게일 The Nightingale〉을 각색한 짧은 오페라(1908~09년에 작곡하기 시작함)를 완성하려 했으나 〈불새〉를 위촉받아 중단되었다. 이 오페라는 원래 모스크바 자유극장에서 위촉한 작품이었지만 이 새로운 사업계획이 무산되자 디아길레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작품을 인수하여 1914년 여름 시즌에 파리와 런던에서 공연될 발레 뤼스를 위한 작품으로 개작했다. 한편 그해 여름에는 〈결혼 The Wedding〉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발레 칸타타가 등장하기도 했는데, 스트라빈스키는 이 작품을 러시아 농민들의 선율과 관습에 근거하여 만들기로 결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이 새로운 작품은 1915년 또는 1916년에 발레 뤼스에 의해서 공연되었을 것이다. 비록 1917년에 작품이 완성되기는 했지만 최종적인 관현악 편성은 1923년에 가서야 결정되었다.
스트라빈스키와 디아길레프, 발레 뤼스와의 밀월관계는 1910~14년의 5년이라는 상당 기간을 그가 러시아 밖에서 보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개 발레단의 여름 시즌 동안은 파리에서 보냈지만 때로는 그들을 따라 로마·베를린·빈·부다페스트·런던 등지로 여행하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여름의 일정 기간을 우스틸룽의 시골집에서 보냈으며 그곳의 조용한 분위기는 그를 창작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방문은 점점 줄어들었다. 가족의 건강은 좋지 않았으며 결핵 증세에는 스위스의 공기가 필요했다. 그의 2번째 아들 소울리마는 1910년 스위스의 로잔에서 태어났고 둘째 딸 밀레나는 1914년 레쟁에서 태어났다. 〈봄의 제전〉·〈나이팅게일〉의 부분들이 스위스의 클라랑에서 작곡되었으며, 공백기간과 전쟁기간에는 전적으로 스위스에 머물렀는데 처음에는 클라랑에서, 나중에는 모르주에서 살았다.
망명시대
이 기간은 그에게 고립의 세월이었으며 결국 그를 망명으로 이끌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로부터뿐만 아니라 발레 뤼스(이 발레단의 유럽 공연 계약은 취소되었고 미국 순회공연으로 대체됨)와도 단절되었으며 베를린에 본사가 있는 그의 음악 출판사와도 관계가 끊어졌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난관을 극복하려 했다. 그는 제네바에서 전쟁 동안 그의 작품을 출판해줄 그 지역 출판업자를 찾았다. 스위스의 소설가 샤를 페르디낭 라뮈와 공동으로 '읽고 연주하고 춤추는' 오락물인 〈병사의 이야기 The Soldier's Tale〉(1918)를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소규모 순회극단의 순회공연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로잔에서의 성공적인 초연 이후 이 계획은 갑작스런 스페인 독감의 유행으로 취소되었다.
프랑스 시대
전쟁이 끝나자마자 스트라빈스키는 스위스를 떠나 프랑스에 정착하로 결정했다. 그후 20년(1920~39) 동안 그는 비아리츠·니스·포렙페·파리 등 여러 곳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 그의 음악에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초기 양식에서 러시아적 특징을 포기하고 신고전주의 어법을 수용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으며 소위 그가 '견본·실험·융합'이라 불렀던 여러 해 동안의 시도가 있은 다음에야 〈오이디푸스 왕 Oedipus Rex〉(1927)·〈시편 교향곡 Symphony of Psalms〉(1930) 등과 같은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초기 걸작들에 견주어 손색이 없는 이 작품들을 통해 그는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와 스트라빈스키의 관계는 새롭게 정립되었다. 그들의 관계는 전쟁 전에 비해 훨씬 느슨하게 되었는데 이는 스트라빈스키가 확고한 근거 없이 떠돌아다니는 발레단에서는 영속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후 디아길레프가 스트라빈스키에게 위촉한 새로운 발레곡은 〈풀치넬라 Pulcinella〉(1920)뿐이었는데,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의 악보를 스트라빈스키가 개작하고 나폴리의 코메디아 델라르테(16~18세기 이탈리아의 가면희극) 시나리오인 〈아폴로 무사게테스 Apollo Musagetes〉(1928)를 수정한 이 작품은 발레 뤼스가 무대에 올린 그의 마지막 신작 발레곡이 되었다. 1929년 디아길레프가 죽자 그의 발레단도 해체되었다.
러시아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피아노와 목관 악기들을 위한 협주곡(1923~24), 피아노 소나타(1924), 피아노를 위한 〈세레나데 A장조 Serenade in A〉(1925),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카프리치오〉(1929), 2대의 피아노 독주를 위한 협주곡(1935) 등을 비롯한 일련의 새로운 작품들은 주로 독주자로서 그 자신을 위한 곡들이었다. 매년 상당 기간을 독주자와 지휘자로 연주여행을 하는 데 보냈다. 이러한 여행은 대부분 유럽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1925, 1935, 1937년 각각 3차례 북아메리카를 방문했으며 1936년에 1번 남아메리카를 방문하기도 했다.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 창작은 디아길레프의 죽음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1920년대말 러시아의 무용가 이다 루빈스타인은 그녀 자신의 발레단을 결성하여 스트라빈스키에게 〈요정의 입맞춤 The Fairy's Kiss〉(1928)·〈페르세포네 Persephone〉(1934)를 위촉했다. 〈요정의 입맞춤〉은 러시아의 낭만주의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음악과 성악 음악을 선곡한 것에 기초하고 있다. 〈페르세포네〉는 20세기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의 시를 노래와 낭독, 춤과 마임이 있는 멜로드라마로 개작한 것이다. 당시 그는 새로 창단된 미국 발레단을 위해 〈카드 놀이 The Card Party〉(1937)를 작곡하기도 했다. 1938, 1939년에는 가족의 사별이 이어졌다. 1938년 가을 그의 맏딸이 폐결핵으로 죽었고 1939년 3월과 6월에는 그의 아내와 어머니가 각각 그 뒤를 이어 죽었다.
미국시대
제2차 세계대전은 그의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1939~40년의 학기 동안 찰스 엘리엇 노튼 강의를 맡아달라는 하버드대학교의 요청은 유럽을 떠나 미국에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1940년초 그는 여러 해 동안 교제해왔던 화가 베라 드 보세와 결혼했다. 하버드에서 음악 시론에 관한 강의가 끝나자 그들 부부는 캘리포니아를 여행했으며 할리우드에 집을 샀다. 그 집에서 그들은 25년 이상을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2곡의 중요한 관현악 작품인 〈교향곡 C장조 Symphony in C〉(1938~40)·〈3악장의 교향곡 Symphony in Three Movements〉(1942~45)이 작곡되었다. 〈목관 악기들을 위한 교향곡 Symphonies of Wind Instruments〉(1920)은 교향곡 계열에 있어 러시아 시대의 전형적인 음악 재료들을 독창적이고 정교하게 처리한 반면, 〈교향곡 C장조〉는 교향곡 형식에 있어 신고전주의적 원칙의 결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3악장의 교향곡〉은 협주곡의 본질적 특징을 교향곡의 특징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작품이다.
1948~51년에 그는 영국계 미국인 시인 W.H. 오든과 미국 작가인 체스터 캘먼의 대본에 의한 신고전주의의 전작 오페라인 〈난봉꾼의 행각 The Rake's Progress〉을 작곡했다.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스트라빈스키는 1939년 이후 처음으로 유럽을 방문했으며 베네치아의 페니체 극장에서의 초연을 지휘했다. 이 작품을 쓰고 있는 동안 그는 미국의 젊은 음악가 로버트 크래프트를 초청하여 할리우드의 집에서 진행중인 그의 음악작업을 돕도록 했다. 이 작업은 성공적이어서 크래프트는 결국 친구·상담자·음악조수로서 스트라빈스키의 집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때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적 발전에 있어 특별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난봉꾼의 행각〉 이후 자신의 신고전주의 작품들 안에서 착상들이 무르익고 있던 '특별한 부화기'를 벗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음렬음악에 관심을 갖는 크래프트의 경향은 스트라빈스키로 하여금 당시 그에게는 생소했던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안톤 폰 베버른,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의 몇몇 작품들을 조심스럽게 실험하도록 자극했다. 음렬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고조되었고 그의 어법도 점점 깊이 동화되어갔다. 우선 그의 음렬음악은 조성음악의 틀 안에서 수행되는 조심스런 실험이었으나 전위와 역행, 그리고 역행 전위를 포함하는 음렬음악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칸티쿰 사크룸 Canticum Sacrum〉(1955)과 발레곡 〈아곤 Agon〉(1953~57)은 규모가 큰 작품들인데 이 작품에서 음악은 선법적이고 조성적인 시작으로부터 완전히 음렬적인 중심으로 옮겨가며, 마지막에 가서는 처음의 선법적이고 조성적인 음악으로 복귀한다. 완전히 음렬적인 첫번째 작품은 〈트레니 Threni〉(1958)이며 그 뒤를 이어 〈움직임 Movements〉(1959)·〈변주곡 Variations〉(1964)·〈진혼 칸티클 Requiem Canticles〉(1966) 등이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들은 그의 러시아 시대와 신고전주의 시대의 걸작들에 필적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음렬음악 작품들은 그가 작곡한 조성음악에 비해 길이가 짧은 특징을 갖고 있지만 음악적 비중은 더 크다.
〈진혼 칸티클〉 이후 나빠진 건강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활동을 격감시켰지만, 죽기 1년 전인 1970년에도 그는 바흐의 몇몇 전주곡과 푸가들을 편곡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베네치아의 산미켈레 섬에 묻혔다.
음악에 대한 기여
스트라빈스키의 20세기 음악에 대한 특별한 공헌은 폭넓고 다양하다. 그는 결코 선입견을 가지고 작곡을 시작하지 않았으며 항상 신선하고 비판적인 귀로, 사용 이전의 음악 재료들을 실험했다. 그는 발전에 관한 기존의 관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그보다는 자신의 음악 재료들을 독자적인 실험체계에 종속시키려 했다. 이것은 특히 시간과 박자, 강약이 관련될 경우에는 언제나 재미있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스트라빈스키는 연장과 생략의 기법을 사용하여 비대칭적 유형의 복합박자를 실험하는 데 흥미를 가졌으며 대칭적 악구의 전통을 깨뜨렸다. 그는 음향의 명료도와 강세의 정도에 대해서도 세심한 처리를 했다. 그는 음악에 건강한 느낌을 주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맥박을 돌려주었으며, 이는 그토록 많은 그의 작품들이 춤추는 데 적합한 이유가 된다. 그의 음악은 '깨끗한 소리'(단순히 음량을 크게 하기 위해 여러 악기들이 함께 소리내지 않음)를 만들었으며, 교향시 〈나이팅게일의 노래〉(1917) 이후로 그는 관현악 처리에 있어 서로 비슷한 악기들의 악기군을 사용하여 쓸모 없이 쉬는 악기만 많아지는 것을 피하고 있다. 그는 결코 악기 처리에 대한 공식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모든 작품들은 그 어법에 관계없이 서로 다른 악기 배치와 서로 다른 음향을 가지고 있다.
쇤베르크 (Arnold (Franz Walter) Schoenberg, 1874. 9. 13, 빈 ~ 1951. 7. 13, 로스앤젤레스)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작곡가
쇤베르크는 한 옥타브를 구성하는 7개 온음과 5개의 반음을 포함한 12개의 음을 골고루 사용하여 곡을 구성하는 12음 기법을 적용한 곡을 작곡하여 장조나 단조의 조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 무조 음악을 선보인 인물이다. <현악4중주 D장조>는 쉰베르크의 곡 중 대중에게 최초로 연주된 것으로 브람스의 양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99년 발표된 현악6중주 <정화된 밤>은 낭만적인 표제음악 성격을 띠는 것으로 그의 작품세계에서 중대한 발전으로 꼽히며 후에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 되었다. 1909년 완성한 피아노 소품 작품 11-1번은 음 구성의 수단으로서의 '조성"과 완전히 결별한 최초의 작품이다. 12개의 음을 골고루 사용하는 방식으로 곡을 구성하는 ‘12음 기법’을 최초로 만들어 현대 음악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으며, 쉰베르크 이후의 작곡가들은 이 작곡법을 바탕으로 작곡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초년
아버지 사무엘은 빈의 유대인 제2지역에서 조그만 신발 가게를 경영했다. 사무엘과 아내 파울린은 음악에 대해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았으나, 그당시 대부분의 오스트리아인들이 그렇듯이 음악을 좋아했고, 가족 중 형 하인리히와 사촌 한스 나호드는 직업 가수였다. 나호드는 재능 있는 테너 가수로 쇤베르크의 〈구레의 노래 Gurrelieder〉의 초연 때 발데마어 역을 맡기도 했다. 9세가 되기 전에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품들을 작곡했고, 선생이나 사촌과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얼마 뒤 비올라를 연주할 줄 아는 친구를 만난 것을 계기로 2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현악 트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쇤베르크는 오스카르 아들러(나중에 유명한 점성가로 〈Das Testament der Astrologie〉를 저술했음)를 알게 되었고 그의 권고로 첼로를 배우게 되었다. 이로써 그와 그의 친구들은 현악4중주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쇤베르크는 곧 현악4중주를 작곡하기 시작했지만, 1악장 소나타 형식의 구성법을 배우지 못한 상태였으며 이러한 기술의 터득은 그의 가족이 할부로 구입한 백과사전 〈Meyers Grosses Konversations-Lexikon〉 중 S자(字) 편을 참고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1890년 아버지가 죽은 후 쇤베르크는 1895년까지 은행원으로 일해야 했다. 이 기간에 그는 성장을 거듭하던 젊은 작곡가이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폴리힘니아의 지휘자였던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를 알게 되어 그 관현악단에서 첼로를 연주했다. 쳄린스키와의 친밀한 우정 속에서 그에게 화성법·대위법·작곡법을 배웠고, 그 결실로 〈현악4중주 D장조〉(1897)를 작곡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쇤베르크의 곡 중 연주된 최초의 작품으로 브람스의 양식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곡은 1897~98, 1898~99년의 연주회 시즌에 빈의 청중들에게 좋은 평을 얻었다.
주요작품들
1899년 그는 상당히 낭만적인 표제음악 인 현악6중주 〈정화된 밤 Verklärte Nacht〉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작품세계에 있어서 중대한 발전이었다. 이 곡은 같은 제목의 리하르트 데멜의 시에 기초해서 만든 것으로, 현악6중주로 작곡된 최초의 표제음악이었으며 표제가 갖는 관능적 성격과 화성으로 인해 보수적인 표제음악 작곡가들을 격분시켰고, 그결과 1903년에 가서야 초연되었다. 초연 때에도 청중들의 강한 반발이 있었지만, 이후 그의 원래의 곡과 현악 편곡이 모두 쇤베르크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 되었다. 1901년 경제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베를린으로 옮겼고, 친구 쳄린스키의 누이인 마틸데 폰 쳄린스키와 결혼했다. 소박하고 예술적인 분위기의 카바레 위베르브레틀에서 지휘자로 일하기 시작했고, 이곳에서 연주하기 위해 소프라노와 피콜로·트럼펫·작은북·피아노를 위한 〈몽유병자 Nachtwandler〉 등 수편의 가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그의 생활과 창작활동에 충분할 정도의 보수를 제공해주지 못했다.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도움으로 슈테른 음악원의 작곡 교수직을 얻게 되었고, 독일음악진흥협회가 수여하는 리스트 장학금을 받았다. 슈트라우스의 격려로 벨기에의 작가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희곡을 기초로 대규모 관현악단을 위한 교향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Pelleas und Melisande〉(1902~03, 그의 유일한 교향시)를 작곡했고, 1903년 빈으로 돌아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와 사귀게 되어 이후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의 중요한 작품은 현악4중주 1번 D단조 작품 7(1904)이었는데, 이 작품은 두터운 음악적 짜임새와 이례적인 형식(고전적인 현악4중주의 전통적인 4개 악장들이 거의 중단 없이 하나로 묶여 50분 동안 계속됨)으로 인해 1907년 초연 때는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실내 교향곡 E장조 Chamber Symphony in E Major〉(1906)는 앞의 작품과 비슷한 형식을 사용했지만 더욱 압축적인 곡으로 합주악기의 선택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였다(후기 낭만주의에서 사용한 '거대한' 관현악단 대신 15대의 악기에 의한 실내악 편성을 사용함). 이 기간에 교육자로서 점차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04년 오스트리아의 젊은 작곡가인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버른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쇤베르크는 이들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었으며, 그 역시 제자들로부터 지적인 자극을 받았는데 저서 〈화성법 강의 Harmonielehre〉(1911) 서문에 "이 책은 내 제자들로부터 배운 것이다"라고 쓸 정도였다. 선생으로서의 재능은 이 책뿐 아니라 〈작곡 초심자를 위한 모범 Models for Beginners in Composition〉(1942)·〈화성의 구조적 기능 Structural Functions of Harmony〉(1954)·〈대위법 초보 연습 Preliminary Exercises in Counterpoint〉(1963)·〈작곡의 기초 Fundamentals of Musical Composition〉(1967) 등 교재 성격을 띤 여러 저술에도 잘 나타난다.
조성으로부터의 이탈
이전까지의 그의 모든 작품은 엄격하게 조성음악(하나의 주음을 중심으로 나머지 음들이 위계구조를 이룸으로써 조성감을 갖는 음악)의 테두리에 머물러 있었지만, 점차 복잡한 화성과 선율을 사용함에 따라 조성의 중요성이 훨씬 약화되었다. 조성을 '극복'하는 과정은 현악4중주 2번(1907~08)의 마지막 악장 시작부분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악장 앞에는 시인 슈테판 게오르크의 시구 "나는 또다른 흑성으로부터의 공기를 느낀다"(Ich fühle Luft von anderen Planeten)가 적혀 있는데, 흔히 쇤베르크가 새로운 음향세계(무조성의 세계)로 들어섬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해석되어왔다.
1909년 2월 19일 그가 완성한 피아노 소품 작품 11-1번은 음 구성의 수단으로서의 '조성'과 완전히 결별한 최초의 작품이다. 이제 그는 더이상 조성적 중심(음들간의 위계질서를 이루는 데 있어서 중심이 되는 음, 즉 으뜸음)이 존재하지 않고, 어떤 종류의 제한도 받지 않는 상태로 자유롭게 음들이 화성적·선율적으로 배합될 수 있는 음악을 쓰기 시작했고, 이것은 흔히 무조성 음악이라 불리게 되었다. 쇤베르크 자신은 무조성이라는 표현보다는 '범조성'(pantonality)이라는 표현을 좋아했다. 무조성으로 된 기악곡들은 흔히 길이가 아주 짧았고, 성악곡의 경우에는 길이가 길 수 있었지만 가사가 통일성의 수단을 제공해야만 했다. 그가 당시 작곡한 중요한 무조성 작품들로는 〈5개의 관현악 소품 Five Orchestral Pieces〉 작품 16(1909),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모노드라마 〈기대 Erwartung〉 작품 17(1924), 실내악 반주가 곁들여진 21개의 낭송적 '멜로드라마' 〈달빛 속의 피에로 Pierrot Lunaire〉 작품 21(1912), 음악이 있는 드라마 〈운명의 손 Die glückliche Hand〉 작품 18(1924), 미완성 오라토리오 〈야곱의 사다리 Die Jakobsleiter〉(1917 작곡 시작)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이전에 작곡한작품들도 처음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13년 2월 23일 〈구레의 노래〉(1900 작곡 시작)가 빈에서 초연되었다. 이 거대한 칸타타는 이례적으로 커다란 규모의 성악 및 관현악을 요구하는 작품으로, 말러의 교향곡 8번 〈천인의 교향곡 Symphony of a Thousand〉과 함께 후기 낭만주의의 기념비적 양식의 절정을 상징하는 곡이다. 이 작품은 초연 때 청중으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그 자신은 그 작품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으며 청중의 열광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1911년 빈에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자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겨 살았으며,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빈에서 징병검사를 받게 되었다. 1916~17년에 오스트리아 군대에서 잠시 복무했으나 질병으로 제대했다. 전쟁기간에는 작곡을 하지 못했는데, 군복무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조성으로부터의 이탈이 야기한 커다란 구조적 문제들을 어떤 식으로 풀 것인가에 대한 성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자유자재로 풍부한 화성·선율 재료들을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원리를 찾고자 했다. 1921년 7월말경 그는 한 제자에게 "오늘 나는 앞으로 100년간 독일 음악에 최고의 지위를 부여해주게 될 그 어떤 것을 찾아냈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곧 12음 기법(즉 12개 음들이 위계구조를 갖지 않는 가운데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 연관되도록 하는 새로운 작곡방법)이었다. 12음 기법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작품은 〈피아노 모음곡 Piano Suite〉 작품 25였다.
12음 기법에 의한 음악작품은 12개의 서로 다른 음들을 특정한 순서로 배열한 음렬로 이루어진다. 음렬에는 원래의 형태 그대로인 원형음렬과 이것의 변형들, 즉 전위음렬(원형음렬과 구성음들의 순서는 같되 음정관계를 뒤집어놓아 만든 음렬, 한 예로 원형음렬이 E음에서 F음으로 반음 상행 진행하면 전위음렬에서는 E음에서 E이미지음으로 반음 하행 진행함)·역행음렬(원형음렬의 음들을 뒤에서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형태로, 한 예로 원형음렬이 E음에서 E이미지음으로 진행하면 역행음렬에서는 E이미지음에서 E음으로 거꾸로 진행함)·역행전위음렬(역행을 하고 난 뒤 다시 전위를 하여 만든 음렬) 등이 있으며, 모든 음렬은 어떤 음높이로도 전이가 가능하여, 음렬은 정해진 음정관계만 유지하면 반음계의 12개 음 중 어느 음높이로도 시작할 수 있다. 이렇듯 하나의 원형음렬은 원형·역행·전위·역행전위에 의한 4가지 형태로 변형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48개(12×4개)의 변형음렬이 생기게 된다. 이로써 작곡가는 융통성을 갖고 작곡할 수 있게 되었다. 음렬의 각 음들은 또한 옥타브 진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한 음렬에서 만들 수 있는 선율의 가능성은 더욱 많아지게 된다. 한 예로 E-F-G로 시작하는 음렬을 가지고 작곡을 할 경우, 작곡가는 E-F-G를 반음씩 순차 상행 진행할 수도 있지만, 또한 E음 다음의 F음을 한 옥타브 위의 음으로 도약 진행시키고 또다시 G음을 도약 하행 진행시킬 수도 있다. 이로써 12음 체계의 융통성은 더욱 커지게 되며, 이것은 12음 기법에 의한 선율들이 종종 이례적인 도약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한 음렬의 음들은 시차적(선율적)으로 차례로 배열할 수도 있지만, 동시적(화성적)으로 배열함으로써 화음을 형성할 수도 있다. 사실 12음 기법을 사용한 곡에서 모든 화성 및 선율은 음렬에서 유도되어나온 것이다. 12음 기법은 얼핏 규칙에 얽매인 듯 보이지만, 쇤베르크는 대작 〈모세와 아론 Moses und Aron〉(1930 작곡 시작) 등의 실제 작곡을 통해 이러한 우려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12음 기법을 사용했다. 때로 전통적인 조성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지만, 이것은 그가 말한 대로 "C장조로 여전히 좋은 음악을 작곡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가 말년에 작곡한 조성음악 작품으로는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Suite for String Orchestra〉(1934)·〈레치타티보 선율을 주제로 한 오르간 변주곡 Variations on a Recitative for Organ〉 작품 40(1940), 〈밴드를 위한 주제와 변주곡 Theme and Variations for Band〉 작품 43A(1943) 등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쇤베르크의 음악은 점차로 명성을 얻었지만, 12음 기법의 고안 자체는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23년 그의 아내인 마틸데가 오랜 와병 끝에 죽었고, 1년 뒤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 루돌프 콜리슈의 누이 게르트루트 콜리슈와 재혼했다. 1925년에는 베를린에 있는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로부터 작곡과 마스터 클래스 수업을 요청받아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활동은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교습은 좋은 반응을 얻었고, 여러 중요한 작품들도 작곡했다. 그러나 1933년 독일에 들어선 나치 정권이 유대인들의 활동을 제약함에 따라 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결국 그는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정식으로 젊은 시절에 버렸던 유대교로 전향했다. 1933년 11월 보스턴의 말킨 음악원 교수가 되었고, 1934년 캘리포니아로 이주, 1941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후 여생을 보냈다. 서던 캘리포니아대학교(1935~36),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교(1936~44)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미국에서 작곡한 대표적인 작품들은 12음 기법의 처리에 있어서 더욱 능숙함과 자유로움을 보였고, 특히 뛰어난 곡으로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 36(1934~36), 현악4중주 4번 작품 37(1936), 피아노 협주곡 작품 42(1942),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Fantasia〉 작품 47(1949) 등을 들 수 있다. 1951년 7월 2일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신음악을 위한 여름학교' 프로그램의 하나로, 20세기 음악에 정통한 헤르만 셰르헨의 지휘로 〈모세와 아론〉 중 〈황금송아지를 에워싼 춤 Dance Around the Gold Calf〉이 연주되었다. 이 연주회의 대대적인 성공을 알리는 전보로 그는 매우 만족스러워했지만, 11일 후 죽었다. 그는 비록 전자음악에 의한 궁극적인 혁명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혁신적인 작품활동이 없었다면 전자음악도 빛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7. 근.현대음악(1890~현재)
近代音樂 현재의 시점, 즉 20세기 말에서 생각하는 근대음악이란 대체로 19세기의 마지막 10년 동안과 20세기 초의 20년 동안 합계 30년에 이르는 동안의 음악을 가리켜 말한다. 19세기 후반의 유럽 음악은 바그너의 영향을 지나치게 받고 있었으나, 여기에서 탈피(脫皮)하여 초극(超克)하려는 시도가 작곡기법의 면에서는 종전의 조성음악(調性音樂)으로부터 비조성음악을 출현시킨다는 근본적 전환을 가져왔다. 독일의 작곡가보다는 바그너의 영향권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드뷔시의 개혁, 인상주의의 창시는 특히 뛰어났으며, 영향력은 크다. 그리고 이탈리아에서의 반(反)낭만주의 운동으로서의 베리스모도 주목된다. (2) 낭만파에서 현대에의 가교적(架橋的) 역할을 하는 과도적인 음악의 정황(情況)으로서 특징적인 것은 민족주의의 발흥이다. 민족적 요소를 중시하는 사상은 원래 낭만파의 발상(發想) 중의 하나이나, 음악사에서는 후진제국, 아메리카, 러시아, 스칸디나비아, 슬라브계 각국 음악의 자각을 전제로 하여 갑자기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라벨 (Joseph-) Maurice Ravel,1875. 프랑스 시부르 ~ 1937. 12. 28, 파리)
<볼레로〉·〈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스페인 광시곡〉, 발레곡 〈다프니스와 클로에〉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 등의 작품에서 형식과 양식의 완성미와 장인정신을 잘 나타냈다.
1889년 14세 때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1905년까지 다녔다. 이 기간 동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현악 4중주〉 등 잘 알려진 작품들을 작곡했다. 그는 초기의 작품이 완숙기의 작품보다 완성도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몇 안되는 작곡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라벨의 생애는 대체로 평이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몇몇 친구들과의 사교 모임을 즐겼지만 파리 근교 랑부예 숲의 몽포르라모리에 은둔하다시피 지냈다.
볼레로 Boléro〉(1928)·〈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Pavane pour une infante défunte〉(1899)·〈스페인 광시곡 Rapsodie espangnole〉(1907), 발레곡 〈다프니스와 클로에 Daphnis et Chloé〉(1912년 초연),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 L'Enfant et les sortilèges〉(1925) 등의 작품에서 형식과 양식의 완성미와 장인정신을 잘 나타냈다.
라벨은 프랑스의 생장드뤼 근교의 마을에서 스위스인 아버지와 바스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예술적이고 교양이 풍부했으며, 어려서부터 라벨이 음악가로서의 재능을 보이자 그의 아버지는 가능한 모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1889년 14세 때 파리 음악원에 들어가 1905년까지 다녔다. 이 기간 동안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나〉, 〈현악 4중주〉 등 잘 알려진 작품들을 작곡했다. 이들 작품들, 특히 뒤의 2개의 작품은 평생동안 그의 작품에 품질 보증과 같이 따라다니는 완성된 양식과 장인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초기의 작품이 완숙기의 작품보다 완성도에서 결코 떨어지지 않는 몇 안되는 작곡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파리 음악원 재학 당시 3번의 시도 끝에 로마 작곡 대상에서 낙선한 사건(음악학자·소설가인 로맹 롤랑을 비롯한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음악가와 저술가들은 라벨을 지지했고, 그가 제출한 작품은 심사원들 중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에게 너무 '진보적'인 것으로 평가되었음)은 일대 파문을 일으켰다. 결과적으로 파리 음악원 원장 테오도르 뒤부아는 사임하고 그 자리는 라벨에게 작곡을 가르쳤던 가브리엘 포레가 맡게 되었다.
그러나 라벨은 결코 혁신적인 작곡가는 아니었다. 그는 조성(調性)에 기초한 당시의 형식적·화성적 기존 전통을 벗어나지 않는 작품들을 주로 썼다. 그러나 전통 음악 양식에 대한 그의 조작과 적용은 너무나 개성적이어서 바흐나 쇼팽 등과 마찬가지로 독자적인 음악 언어를 창조해냈다. 그의 선율은 거의 언제나 선법적(즉 서구의 전통적인 장·단 온음계가 아니라 옛날 그리스의 프리지아와 도리아 선법에 근거함)인 데 반해, 그의 화성은 '부가음'과 아포자투라 를 화성적으로 해결시키지 않음으로써 신선한 맛을 풍긴다. 그는 초기의 〈물의 유희 Jeux d'eau〉(1901 완성)에서부터 〈밤의 가스파르 Gaspard de la nuit〉(1908)·〈쿠프랭의 무덤 Le Tombeau de Couperin〉(1917), 2개의 피아노 협주곡(1931)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걸작들을 통해 피아노 문헌을 풍부하게 확장시켰다. 협주용이 아닌 순수한 관현악 작품 가운데 〈스페인 광시곡〉과 〈볼레로〉가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이것들은 관현악법의 완벽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작품활동의 절정은 러시아의 안무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 프랑스의 작가 콜레트와의 공동작업으로 탄생시킨 작품들일 것이다. 라벨은 디아길레프의 발레를 위해 〈다프니스와 클로에〉를 작곡했고, 그의 가장 유명한 오페라 〈어린이와 마술〉은 콜레트의 대본에 의한 작품이다. 〈어린이와 마술〉에서 라벨은 개구쟁이 소년이 등장하는 마법·마술 이야기 속에 동물들을 등장시키고, 사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등 기발하고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 기회를 가졌다. 그외의 오페라로는 풍자적 내용을 담은 〈스페인의 한때 L'Heure espagnole〉(1911 초연)뿐이었다. 가곡 작곡가로서 라벨은 〈자연의 역사 Histoires naturelles〉·〈스테판 말라르메의 3편의 시 Trois poémes de Stéphane Mallarmé〉·〈샹송 마데카스 Chansons madécasses〉 등의 상상력이 풍부한 작품으로 위대한 개성을 성취했다.
라벨의 생애는 대체로 평이했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으며, 몇몇 친구들과의 사교 모임을 즐겼지만 파리 근교 랑부예 숲의 몽포르라모리에 은둔하다시피 지냈다. 제1차 세계대전중에는 잠시 전선에서 트럭 운전병으로 복무했는데 허약한 체질로는 감당하기에 벅차 1917년 육군에서 제대했다.
1928년 4개월 동안 캐나다와 미국 여행길에 올랐으며, 같은 해 영국을 방문하여 옥스퍼드대학교에서 명예 음악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해에는 독창적인 형식의 〈볼레로〉가 이다 루빈슈테인의 주역으로 발레 작품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죽기 전 마지막 5년 간은 실어증에 시달렸다. 이 병으로 인해 언어력을 상실했으며, 단 한 줄의 음악도 더이상 작곡하지 못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름조차 서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진짜 비극은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의 음악적 상상력이 다른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뇌로 통하는 혈관의 폐색(閉塞) 제거 수술은 성공하지 못했고, 스트라빈스키와 다른 음악가들과 작곡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가 살았던 파리 교외의 르발루아 공동묘지에 묻혔다.
라벨에게 있어서 음악은 신비한 제식(祭式)과도 같아서, 높은 장벽 뒤에서 작용해 외부세계로부터 감춰져 있으며 부당한 침입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독자적 법칙을 가졌다. 동시대인인 러시아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라벨을 '가장 완벽한 스위스의 시계제조업자'에 비유했다. 스트라빈스키는 사실 이 비유를 통해 그 스스로 그토록 중요하게 생각했던 복잡성과 정확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드뷔시 (Achille-) Claude Debussy, 1862. 8. 22 프랑스 생제르맹앙레~ 1918. 3. 25 파리.)
고도로 독창적인 화성 체계와 구조를 발전시켰으며, 당대의 인상주의 미술과 상징주의 문학이념을 음악으로 표현했다. 대표작으로는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Suite bergamasque〉(1890~1905) 가운데 〈달빛 Clair de lune〉·〈목신의 오후 전주곡 Prelude a l'apres-midi d'un faune〉(1894),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Pelleas et Melisande〉(1902)·〈바다 La Mer〉(1905)가 있다.
클로드 드뷔시는 1862년에 생 제르망 엉 레(Saint-Germain-en-Laye)에서 다섯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도자기 가게 주인이었고, 어머니는 재봉사였다. 그는 7세 때 그보다 나이가 많은 체루티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아이와 함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드뷔시의 레슨비는 그의 아주머니(aunt)가 지불했었다. 1871년에 수줍고 겁많은 소년 드뷔시는 마리 모테 드 플레비유(Marie Mauté de Fleurville) 부인에게 주목받았다.[1]
그녀는 자신이 프레데리크 쇼팽의 친구라고 주장했고, 드뷔시도 항상 그녀를 신뢰했지만, 실제로 그녀가 쇼팽의 친구였다는 증거는 없다.[2]
자신의 재능을 확실하게 보여준 덕분에, 1872년 11살의 나이로 드뷔시는 파리 음악원에 입학하였고, 1872년부터 1884년까지 세자르 프랑크, 에르네스트 기로(프랑스어: Ernest Guiraud)과 함께 공부하였다. 재학 중에 러시아 음악과 무소르그스키의 작품을 접한 것이 이후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탕자>로 로마 대상을 받고, 1887년 말라르메의 살롱에 출입하였다. 이때 상징파 시인 및 인상파 화가와의 접촉에 의해 차츰 인상주의 음악에의 의식이 깊어졌다. 말라르메의 시에 의한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으로 그의 인상파풍의 작품 경향은 확정되었다. 가극 <펠레아스와 멜리장드>에서는 반 바그너적, 반 튜튼적 성격이 더욱 뚜렷해졌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 독일군의 폭격이 한창일 때 파리에서 사망하였다.
스트라빈스키 (Igor (Fyodorovich) Stravinsky, 1882.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처 오라니엔바움 ~ 1971. 미국 뉴욕 시)
〈불새 〉(1910 초연)·〈페트루슈카〉(1911)·〈봄의 제전〉(1913)·〈오르페우스〉(1947) 등의 발레 음악으로 유명하다.
부모의 반대에 그의 음악적 관심은 작곡으로 쏠리게 되었다. 1902년 여름 아버지가 죽기 몇 달 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 젊은 작곡가의 초기 작품 경향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그에게 음악원에 들어가 전통적인 학교교육을 받지 말고 개인적으로 자신의 길을 추구하라고 권유했다. 1909년 2월 6일 〈불꽃놀이〉와 초기의 관현악 소품인 〈환상 스케르초 Scherzo fantastique〉(1907~08)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되었을 때 스트라빈스키의 재능에 감명받은 무용가 디아길레프가그에게 자신의 예술적 협력자들의 모임에 참여하도록 요청하면서,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음악 시대가 열렸다.
러시아 시대
스트라빈스키의 아버지인 표도르 이그나체비치 스트라빈스키는 매우 유명한 베이스 가수였으며, 처음에는 키예프에서, 나중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오페라 가수로 성공적인 활동을 했다. 이고리 스트라빈스키는 4형제 중에 3번째였으며 음악을 좋아했다. 어려서부터 그는 집에서 오페라를 연습하는 아버지의 노랫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되는 오페라와 발레를 볼 수 있었다. 9세부터 정규적인 피아노 교육을 받았으며 조금 뒤부터는 화성법과 대위법을 공부했다. 음악에 대한 그의 재능과 열의는 분명했지만 그의 부모는 그가 음악가가 되는 것을 반대했다. 형사법과 법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에 입학했으며 1905년 졸업했다.
그동안 그의 음악적 관심은 작곡으로 쏠리게 되었다. 1902년 여름 아버지가 죽기 몇 달 전 같은 대학에 다니던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아들을 통해 그를 만났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 젊은 작곡가의 초기 작품 경향에 많은 관심을 보였으며, 그에게 음악원에 들어가 전통적인 학교교육을 받지 말고 개인적으로 자신의 길을 추구하라고 권유했다. 이 충고는 받아들여졌다. 1년 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스트라빈스키를 개인적으로 가르치는 데 동의했으며 주로 악기편성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관계는 약 3년(1903~06) 동안 지속되었다. 스트라빈스키는 작품을 계획하고 작곡하면서 자기 스승과 함께 검토하는 습관이 있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러한 작품들 가운데 다수를 편곡했으며, 그 가운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적·공개적으로 연주되었던 〈교향곡 E♭ 장조〉(1905~07)가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탄생된 마지막 작품이 짧은 교향시인 〈불꽃놀이 Fireworks〉(1908)였는데, 스트라빈스키는 이 작품을 림스키코르사코프의 딸에게 주는 결혼선물로 작곡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 작품이 연주되기 전인 1908년 여름에 죽었다. 그의 죽음을 슬퍼한 제자는 스승을 기리기 위해 〈장례식 만가〉(1908)를 작곡했다. 이 작품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되었지만 악보는 남아 있지 않다.
스트라빈스키는 1905년 대학을 떠났다. 다음해 그는 사촌인 예카테리나 노센코와 결혼했다. 그들은 스트라빈스키의 가족이 살고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아파트의 방 2개를 차지했으며, 여름에는 시골인 우크라이나 지방 볼리니아의 우스틸룽에서 지냈다. 1907년 아들 표도르가 태어났고 1년 뒤에는 딸 루드밀라가 태어났다.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와의 협력시대
1909년 2월 6일 〈불꽃놀이〉와 초기의 관현악 소품인 〈환상 스케르초 Scherzo fantastique〉(1907~08)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연주되었을 때 안무가인 세르게이 디아길레프가 이 연주를 들었다. 당시 그는 파리에서 막을 열게 될 발레 뤼스의 여름 시즌을 위한 준비작업에 분주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재능에 너무나 감명받은 디아길레프는 그에게 자신의 예술적 협력자들의 모임에 참여하도록 요청했다. 1909년의 발레 시즌을 위해 스트라빈스키는 많은 발레 음악 작품들의 편곡을 위촉받았는데 그 가운데는 〈레 실피드 Les Sylphides〉를 위해 편곡한 쇼팽의 피아노 소품 2곡도 포함되어 있다. 디아길레프는 1910년의 시즌을 위해 새로운 발레 음악 〈불새〉를 그에게 위촉했다.
이후 몇 년 동안은 두 사람 사이에 긴밀한 협조관계가 유지된 시기였는데, 이것은 디아길레프가 그의 발레단을 통해 스트라빈스키의 새로운 주요작품들이 부상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파리 오페라에서 공연된 〈불새〉의 결정적인 성공(1910. 6. 25) 이후 스트라빈스키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연주회 소품 Konzertstück〉의 작곡을 시작했지만 디아길레프의 반대로 중단되었다. 그는 이미 작곡을 마친 음악을 새로운 발레 대본에 맞게 수정하는 것에 동의했으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 탄생한 〈페트루슈카〉는 발레 뤼스의 1911년 시즌 파리 공연에서 초연되었다. 그 전에 스트라빈스키는 〈대 제물 Great Sacrifice〉이라 일컫는 원시적인 봄의 교향곡을 구상했는데, 다시 디아길레프가 발레의 형식으로 바꾸어 작곡하도록 그를 설득했다. 그결과 〈봄의 제전〉(최종 제목)은 1911~13년에 걸쳐 2년 만에 완성되었다. 이 역동적인 음악은 1913년 5월 29일 파리의 샹젤리제 극장에서 초연되었을 당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스트라빈스키는 덴마크의 작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동화 〈나이팅게일 The Nightingale〉을 각색한 짧은 오페라(1908~09년에 작곡하기 시작함)를 완성하려 했으나 〈불새〉를 위촉받아 중단되었다. 이 오페라는 원래 모스크바 자유극장에서 위촉한 작품이었지만 이 새로운 사업계획이 무산되자 디아길레프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 작품을 인수하여 1914년 여름 시즌에 파리와 런던에서 공연될 발레 뤼스를 위한 작품으로 개작했다. 한편 그해 여름에는 〈결혼 The Wedding〉이라는 제목의 새로운 발레 칸타타가 등장하기도 했는데, 스트라빈스키는 이 작품을 러시아 농민들의 선율과 관습에 근거하여 만들기로 결정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이 새로운 작품은 1915년 또는 1916년에 발레 뤼스에 의해서 공연되었을 것이다. 비록 1917년에 작품이 완성되기는 했지만 최종적인 관현악 편성은 1923년에 가서야 결정되었다.
스트라빈스키와 디아길레프, 발레 뤼스와의 밀월관계는 1910~14년의 5년이라는 상당 기간을 그가 러시아 밖에서 보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개 발레단의 여름 시즌 동안은 파리에서 보냈지만 때로는 그들을 따라 로마·베를린·빈·부다페스트·런던 등지로 여행하기도 했다. 그는 여전히 여름의 일정 기간을 우스틸룽의 시골집에서 보냈으며 그곳의 조용한 분위기는 그를 창작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방문은 점점 줄어들었다. 가족의 건강은 좋지 않았으며 결핵 증세에는 스위스의 공기가 필요했다. 그의 2번째 아들 소울리마는 1910년 스위스의 로잔에서 태어났고 둘째 딸 밀레나는 1914년 레쟁에서 태어났다. 〈봄의 제전〉·〈나이팅게일〉의 부분들이 스위스의 클라랑에서 작곡되었으며, 공백기간과 전쟁기간에는 전적으로 스위스에 머물렀는데 처음에는 클라랑에서, 나중에는 모르주에서 살았다.
망명시대
이 기간은 그에게 고립의 세월이었으며 결국 그를 망명으로 이끌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로부터뿐만 아니라 발레 뤼스(이 발레단의 유럽 공연 계약은 취소되었고 미국 순회공연으로 대체됨)와도 단절되었으며 베를린에 본사가 있는 그의 음악 출판사와도 관계가 끊어졌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 난관을 극복하려 했다. 그는 제네바에서 전쟁 동안 그의 작품을 출판해줄 그 지역 출판업자를 찾았다. 스위스의 소설가 샤를 페르디낭 라뮈와 공동으로 '읽고 연주하고 춤추는' 오락물인 〈병사의 이야기 The Soldier's Tale〉(1918)를 만들었는데 이 작품은 소규모 순회극단의 순회공연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로잔에서의 성공적인 초연 이후 이 계획은 갑작스런 스페인 독감의 유행으로 취소되었다.
프랑스 시대
전쟁이 끝나자마자 스트라빈스키는 스위스를 떠나 프랑스에 정착하로 결정했다. 그후 20년(1920~39) 동안 그는 비아리츠·니스·포렙페·파리 등 여러 곳에서 살았다. 이 시기에 그의 음악에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초기 양식에서 러시아적 특징을 포기하고 신고전주의 어법을 수용했다. 이러한 급격한 변화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으며 소위 그가 '견본·실험·융합'이라 불렀던 여러 해 동안의 시도가 있은 다음에야 〈오이디푸스 왕 Oedipus Rex〉(1927)·〈시편 교향곡 Symphony of Psalms〉(1930) 등과 같은 새로운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초기 걸작들에 견주어 손색이 없는 이 작품들을 통해 그는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디아길레프의 발레 뤼스와 스트라빈스키의 관계는 새롭게 정립되었다. 그들의 관계는 전쟁 전에 비해 훨씬 느슨하게 되었는데 이는 스트라빈스키가 확고한 근거 없이 떠돌아다니는 발레단에서는 영속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후 디아길레프가 스트라빈스키에게 위촉한 새로운 발레곡은 〈풀치넬라 Pulcinella〉(1920)뿐이었는데,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시의 악보를 스트라빈스키가 개작하고 나폴리의 코메디아 델라르테(16~18세기 이탈리아의 가면희극) 시나리오인 〈아폴로 무사게테스 Apollo Musagetes〉(1928)를 수정한 이 작품은 발레 뤼스가 무대에 올린 그의 마지막 신작 발레곡이 되었다. 1929년 디아길레프가 죽자 그의 발레단도 해체되었다.
러시아에 가지고 있던 재산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돈을 벌기 위해서 피아니스트와 지휘자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피아노와 목관 악기들을 위한 협주곡(1923~24), 피아노 소나타(1924), 피아노를 위한 〈세레나데 A장조 Serenade in A〉(1925),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카프리치오〉(1929), 2대의 피아노 독주를 위한 협주곡(1935) 등을 비롯한 일련의 새로운 작품들은 주로 독주자로서 그 자신을 위한 곡들이었다. 매년 상당 기간을 독주자와 지휘자로 연주여행을 하는 데 보냈다. 이러한 여행은 대부분 유럽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1925, 1935, 1937년 각각 3차례 북아메리카를 방문했으며 1936년에 1번 남아메리카를 방문하기도 했다.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 창작은 디아길레프의 죽음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1920년대말 러시아의 무용가 이다 루빈스타인은 그녀 자신의 발레단을 결성하여 스트라빈스키에게 〈요정의 입맞춤 The Fairy's Kiss〉(1928)·〈페르세포네 Persephone〉(1934)를 위촉했다. 〈요정의 입맞춤〉은 러시아의 낭만주의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음악과 성악 음악을 선곡한 것에 기초하고 있다. 〈페르세포네〉는 20세기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지드의 시를 노래와 낭독, 춤과 마임이 있는 멜로드라마로 개작한 것이다. 당시 그는 새로 창단된 미국 발레단을 위해 〈카드 놀이 The Card Party〉(1937)를 작곡하기도 했다. 1938, 1939년에는 가족의 사별이 이어졌다. 1938년 가을 그의 맏딸이 폐결핵으로 죽었고 1939년 3월과 6월에는 그의 아내와 어머니가 각각 그 뒤를 이어 죽었다.
미국시대
제2차 세계대전은 그의 인생에 완전히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주었다. 1939~40년의 학기 동안 찰스 엘리엇 노튼 강의를 맡아달라는 하버드대학교의 요청은 유럽을 떠나 미국에 정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1940년초 그는 여러 해 동안 교제해왔던 화가 베라 드 보세와 결혼했다. 하버드에서 음악 시론에 관한 강의가 끝나자 그들 부부는 캘리포니아를 여행했으며 할리우드에 집을 샀다. 그 집에서 그들은 25년 이상을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2곡의 중요한 관현악 작품인 〈교향곡 C장조 Symphony in C〉(1938~40)·〈3악장의 교향곡 Symphony in Three Movements〉(1942~45)이 작곡되었다. 〈목관 악기들을 위한 교향곡 Symphonies of Wind Instruments〉(1920)은 교향곡 계열에 있어 러시아 시대의 전형적인 음악 재료들을 독창적이고 정교하게 처리한 반면, 〈교향곡 C장조〉는 교향곡 형식에 있어 신고전주의적 원칙의 결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3악장의 교향곡〉은 협주곡의 본질적 특징을 교향곡의 특징과 성공적으로 결합시킨 작품이다.
1948~51년에 그는 영국계 미국인 시인 W.H. 오든과 미국 작가인 체스터 캘먼의 대본에 의한 신고전주의의 전작 오페라인 〈난봉꾼의 행각 The Rake's Progress〉을 작곡했다.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스트라빈스키는 1939년 이후 처음으로 유럽을 방문했으며 베네치아의 페니체 극장에서의 초연을 지휘했다. 이 작품을 쓰고 있는 동안 그는 미국의 젊은 음악가 로버트 크래프트를 초청하여 할리우드의 집에서 진행중인 그의 음악작업을 돕도록 했다. 이 작업은 성공적이어서 크래프트는 결국 친구·상담자·음악조수로서 스트라빈스키의 집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때가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적 발전에 있어 특별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왜냐하면 〈난봉꾼의 행각〉 이후 자신의 신고전주의 작품들 안에서 착상들이 무르익고 있던 '특별한 부화기'를 벗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음렬음악에 관심을 갖는 크래프트의 경향은 스트라빈스키로 하여금 당시 그에게는 생소했던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안톤 폰 베버른, 아르놀트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의 몇몇 작품들을 조심스럽게 실험하도록 자극했다. 음렬음악에 대한 그의 관심은 고조되었고 그의 어법도 점점 깊이 동화되어갔다. 우선 그의 음렬음악은 조성음악의 틀 안에서 수행되는 조심스런 실험이었으나 전위와 역행, 그리고 역행 전위를 포함하는 음렬음악의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칸티쿰 사크룸 Canticum Sacrum〉(1955)과 발레곡 〈아곤 Agon〉(1953~57)은 규모가 큰 작품들인데 이 작품에서 음악은 선법적이고 조성적인 시작으로부터 완전히 음렬적인 중심으로 옮겨가며, 마지막에 가서는 처음의 선법적이고 조성적인 음악으로 복귀한다. 완전히 음렬적인 첫번째 작품은 〈트레니 Threni〉(1958)이며 그 뒤를 이어 〈움직임 Movements〉(1959)·〈변주곡 Variations〉(1964)·〈진혼 칸티클 Requiem Canticles〉(1966) 등이 발표되었는데, 이 작품들은 그의 러시아 시대와 신고전주의 시대의 걸작들에 필적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음렬음악 작품들은 그가 작곡한 조성음악에 비해 길이가 짧은 특징을 갖고 있지만 음악적 비중은 더 크다.
〈진혼 칸티클〉 이후 나빠진 건강은 스트라빈스키의 작품활동을 격감시켰지만, 죽기 1년 전인 1970년에도 그는 바흐의 몇몇 전주곡과 푸가들을 편곡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베네치아의 산미켈레 섬에 묻혔다.
음악에 대한 기여
스트라빈스키의 20세기 음악에 대한 특별한 공헌은 폭넓고 다양하다. 그는 결코 선입견을 가지고 작곡을 시작하지 않았으며 항상 신선하고 비판적인 귀로, 사용 이전의 음악 재료들을 실험했다. 그는 발전에 관한 기존의 관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그보다는 자신의 음악 재료들을 독자적인 실험체계에 종속시키려 했다. 이것은 특히 시간과 박자, 강약이 관련될 경우에는 언제나 재미있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스트라빈스키는 연장과 생략의 기법을 사용하여 비대칭적 유형의 복합박자를 실험하는 데 흥미를 가졌으며 대칭적 악구의 전통을 깨뜨렸다. 그는 음향의 명료도와 강세의 정도에 대해서도 세심한 처리를 했다. 그는 음악에 건강한 느낌을 주는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맥박을 돌려주었으며, 이는 그토록 많은 그의 작품들이 춤추는 데 적합한 이유가 된다. 그의 음악은 '깨끗한 소리'(단순히 음량을 크게 하기 위해 여러 악기들이 함께 소리내지 않음)를 만들었으며, 교향시 〈나이팅게일의 노래〉(1917) 이후로 그는 관현악 처리에 있어 서로 비슷한 악기들의 악기군을 사용하여 쓸모 없이 쉬는 악기만 많아지는 것을 피하고 있다. 그는 결코 악기 처리에 대한 공식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의 모든 작품들은 그 어법에 관계없이 서로 다른 악기 배치와 서로 다른 음향을 가지고 있다.
쇤베르크 (Arnold (Franz Walter) Schoenberg, 1874. 빈 ~ 1951. 로스앤젤레스)
오스트리아 태생의 미국 작곡가
쇤베르크는 한 옥타브를 구성하는 7개 온음과 5개의 반음을 포함한 12개의 음을 골고루 사용하여 곡을 구성하는 12음 기법을 적용한 곡을 작곡하여 장조나 단조의 조성에 바탕을 두지 않는 무조 음악을 선보인 인물이다. <현악4중주 D장조>는 쉰베르크의 곡 중 대중에게 최초로 연주된 것으로 브람스의 양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1899년 발표된 현악6중주 <정화된 밤>은 낭만적인 표제음악 성격을 띠는 것으로 그의 작품세계에서 중대한 발전으로 꼽히며 후에 가장 인기있는 작품이 되었다. 1909년 완성한 피아노 소품 작품 11-1번은 음 구성의 수단으로서의 '조성"과 완전히 결별한 최초의 작품이다. 12개의 음을 골고루 사용하는 방식으로 곡을 구성하는 ‘12음 기법’을 최초로 만들어 현대 음악에 대단한 영향을 미쳤으며, 쉰베르크 이후의 작곡가들은 이 작곡법을 바탕으로 작곡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무조성 을 만드는 12음계에 의한 체계적인 작곡 기법을 창조했다.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곡자로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버른 등 중요한 작곡가들을 길러냈다
초년
아버지 사무엘은 빈의 유대인 제2지역에서 조그만 신발 가게를 경영했다. 사무엘과 아내 파울린은 음악에 대해 그다지 조예가 깊지 않았으나, 그당시 대부분의 오스트리아인들이 그렇듯이 음악을 좋아했고, 가족 중 형 하인리히와 사촌 한스 나호드는 직업 가수였다. 나호드는 재능 있는 테너 가수로 쇤베르크의 〈구레의 노래 Gurrelieder〉의 초연 때 발데마어 역을 맡기도 했다. 9세가 되기 전에 2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소품들을 작곡했고, 선생이나 사촌과 함께 연주하기도 했다. 얼마 뒤 비올라를 연주할 줄 아는 친구를 만난 것을 계기로 2대의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현악 트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쇤베르크는 오스카르 아들러(나중에 유명한 점성가로 〈Das Testament der Astrologie〉를 저술했음)를 알게 되었고 그의 권고로 첼로를 배우게 되었다. 이로써 그와 그의 친구들은 현악4중주를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쇤베르크는 곧 현악4중주를 작곡하기 시작했지만, 1악장 소나타 형식의 구성법을 배우지 못한 상태였으며 이러한 기술의 터득은 그의 가족이 할부로 구입한 백과사전 〈Meyers Grosses Konversations-Lexikon〉 중 S자(字) 편을 참고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졌다.
1890년 아버지가 죽은 후 쇤베르크는 1895년까지 은행원으로 일해야 했다. 이 기간에 그는 성장을 거듭하던 젊은 작곡가이자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폴리힘니아의 지휘자였던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를 알게 되어 그 관현악단에서 첼로를 연주했다. 쳄린스키와의 친밀한 우정 속에서 그에게 화성법·대위법·작곡법을 배웠고, 그 결실로 〈현악4중주 D장조〉(1897)를 작곡하게 되었다. 이 작품은 쇤베르크의 곡 중 연주된 최초의 작품으로 브람스의 양식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곡은 1897~98, 1898~99년의 연주회 시즌에 빈의 청중들에게 좋은 평을 얻었다.
주요작품들
1899년 그는 상당히 낭만적인 표제음악 인 현악6중주 〈정화된 밤 Verklärte Nacht〉을 작곡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작품세계에 있어서 중대한 발전이었다. 이 곡은 같은 제목의 리하르트 데멜의 시에 기초해서 만든 것으로, 현악6중주로 작곡된 최초의 표제음악이었으며 표제가 갖는 관능적 성격과 화성으로 인해 보수적인 표제음악 작곡가들을 격분시켰고, 그결과 1903년에 가서야 초연되었다. 초연 때에도 청중들의 강한 반발이 있었지만, 이후 그의 원래의 곡과 현악 편곡이 모두 쇤베르크의 가장 인기 있는 작품이 되었다. 1901년 경제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베를린으로 옮겼고, 친구 쳄린스키의 누이인 마틸데 폰 쳄린스키와 결혼했다. 소박하고 예술적인 분위기의 카바레 위베르브레틀에서 지휘자로 일하기 시작했고, 이곳에서 연주하기 위해 소프라노와 피콜로·트럼펫·작은북·피아노를 위한 〈몽유병자 Nachtwandler〉 등 수편의 가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그 자리는 그의 생활과 창작활동에 충분할 정도의 보수를 제공해주지 못했다.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도움으로 슈테른 음악원의 작곡 교수직을 얻게 되었고, 독일음악진흥협회가 수여하는 리스트 장학금을 받았다. 슈트라우스의 격려로 벨기에의 작가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희곡을 기초로 대규모 관현악단을 위한 교향시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Pelleas und Melisande〉(1902~03, 그의 유일한 교향시)를 작곡했고, 1903년 빈으로 돌아와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와 사귀게 되어 이후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의 중요한 작품은 현악4중주 1번 D단조 작품 7(1904)이었는데, 이 작품은 두터운 음악적 짜임새와 이례적인 형식(고전적인 현악4중주의 전통적인 4개 악장들이 거의 중단 없이 하나로 묶여 50분 동안 계속됨)으로 인해 1907년 초연 때는 청중들이 이해하지 못했다. 〈실내 교향곡 E장조 Chamber Symphony in E Major〉(1906)는 앞의 작품과 비슷한 형식을 사용했지만 더욱 압축적인 곡으로 합주악기의 선택에 있어서 새로운 시도였다(후기 낭만주의에서 사용한 '거대한' 관현악단 대신 15대의 악기에 의한 실내악 편성을 사용함). 이 기간에 교육자로서 점차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다. 1904년 오스트리아의 젊은 작곡가인 알반 베르크, 안톤 베버른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쇤베르크는 이들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었으며, 그 역시 제자들로부터 지적인 자극을 받았는데 저서 〈화성법 강의 Harmonielehre〉(1911) 서문에 "이 책은 내 제자들로부터 배운 것이다"라고 쓸 정도였다. 선생으로서의 재능은 이 책뿐 아니라 〈작곡 초심자를 위한 모범 Models for Beginners in Composition〉(1942)·〈화성의 구조적 기능 Structural Functions of Harmony〉(1954)·〈대위법 초보 연습 Preliminary Exercises in Counterpoint〉(1963)·〈작곡의 기초 Fundamentals of Musical Composition〉(1967) 등 교재 성격을 띤 여러 저술에도 잘 나타난다.
조성으로부터의 이탈
이전까지의 그의 모든 작품은 엄격하게 조성음악(하나의 주음을 중심으로 나머지 음들이 위계구조를 이룸으로써 조성감을 갖는 음악)의 테두리에 머물러 있었지만, 점차 복잡한 화성과 선율을 사용함에 따라 조성의 중요성이 훨씬 약화되었다. 조성을 '극복'하는 과정은 현악4중주 2번(1907~08)의 마지막 악장 시작부분에서도 목격할 수 있다. 이 마지막 악장 앞에는 시인 슈테판 게오르크의 시구 "나는 또다른 흑성으로부터의 공기를 느낀다"(Ich fühle Luft von anderen Planeten)가 적혀 있는데, 흔히 쇤베르크가 새로운 음향세계(무조성의 세계)로 들어섬을 암시하는 상징으로 해석되어왔다.
1909년 2월 19일 그가 완성한 피아노 소품 작품 11-1번은 음 구성의 수단으로서의 '조성'과 완전히 결별한 최초의 작품이다. 이제 그는 더이상 조성적 중심(음들간의 위계질서를 이루는 데 있어서 중심이 되는 음, 즉 으뜸음)이 존재하지 않고, 어떤 종류의 제한도 받지 않는 상태로 자유롭게 음들이 화성적·선율적으로 배합될 수 있는 음악을 쓰기 시작했고, 이것은 흔히 무조성 음악이라 불리게 되었다. 쇤베르크 자신은 무조성이라는 표현보다는 '범조성'(pantonality)이라는 표현을 좋아했다. 무조성으로 된 기악곡들은 흔히 길이가 아주 짧았고, 성악곡의 경우에는 길이가 길 수 있었지만 가사가 통일성의 수단을 제공해야만 했다. 그가 당시 작곡한 중요한 무조성 작품들로는 〈5개의 관현악 소품 Five Orchestral Pieces〉 작품 16(1909),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모노드라마 〈기대 Erwartung〉 작품 17(1924), 실내악 반주가 곁들여진 21개의 낭송적 '멜로드라마' 〈달빛 속의 피에로 Pierrot Lunaire〉 작품 21(1912), 음악이 있는 드라마 〈운명의 손 Die glückliche Hand〉 작품 18(1924), 미완성 오라토리오 〈야곱의 사다리 Die Jakobsleiter〉(1917 작곡 시작) 등을 들 수 있다. 이 시기에는 이전에 작곡한작품들도 처음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1913년 2월 23일 〈구레의 노래〉(1900 작곡 시작)가 빈에서 초연되었다. 이 거대한 칸타타는 이례적으로 커다란 규모의 성악 및 관현악을 요구하는 작품으로, 말러의 교향곡 8번 〈천인의 교향곡 Symphony of a Thousand〉과 함께 후기 낭만주의의 기념비적 양식의 절정을 상징하는 곡이다. 이 작품은 초연 때 청중으로부터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지만, 그 자신은 그 작품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으며 청중의 열광도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1911년 빈에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자 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겨 살았으며, 1915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빈에서 징병검사를 받게 되었다. 1916~17년에 오스트리아 군대에서 잠시 복무했으나 질병으로 제대했다. 전쟁기간에는 작곡을 하지 못했는데, 군복무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조성으로부터의 이탈이 야기한 커다란 구조적 문제들을 어떤 식으로 풀 것인가에 대한 성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자유자재로 풍부한 화성·선율 재료들을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원리를 찾고자 했다. 1921년 7월말경 그는 한 제자에게 "오늘 나는 앞으로 100년간 독일 음악에 최고의 지위를 부여해주게 될 그 어떤 것을 찾아냈다"라고 말했는데, 이것이 곧 12음 기법(즉 12개 음들이 위계구조를 갖지 않는 가운데 서로 대등한 자격으로 연관되도록 하는 새로운 작곡방법)이었다. 12음 기법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작품은 〈피아노 모음곡 Piano Suite〉 작품 25였다.
12음 기법에 의한 음악작품은 12개의 서로 다른 음들을 특정한 순서로 배열한 음렬로 이루어진다. 음렬에는 원래의 형태 그대로인 원형음렬과 이것의 변형들, 즉 전위음렬(원형음렬과 구성음들의 순서는 같되 음정관계를 뒤집어놓아 만든 음렬, 한 예로 원형음렬이 E음에서 F음으로 반음 상행 진행하면 전위음렬에서는 E음에서 E이미지음으로 반음 하행 진행함)·역행음렬(원형음렬의 음들을 뒤에서부터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형태로, 한 예로 원형음렬이 E음에서 E이미지음으로 진행하면 역행음렬에서는 E이미지음에서 E음으로 거꾸로 진행함)·역행전위음렬(역행을 하고 난 뒤 다시 전위를 하여 만든 음렬) 등이 있으며, 모든 음렬은 어떤 음높이로도 전이가 가능하여, 음렬은 정해진 음정관계만 유지하면 반음계의 12개 음 중 어느 음높이로도 시작할 수 있다. 이렇듯 하나의 원형음렬은 원형·역행·전위·역행전위에 의한 4가지 형태로 변형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48개(12×4개)의 변형음렬이 생기게 된다. 이로써 작곡가는 융통성을 갖고 작곡할 수 있게 되었다. 음렬의 각 음들은 또한 옥타브 진행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한 음렬에서 만들 수 있는 선율의 가능성은 더욱 많아지게 된다. 한 예로 E-F-G로 시작하는 음렬을 가지고 작곡을 할 경우, 작곡가는 E-F-G를 반음씩 순차 상행 진행할 수도 있지만, 또한 E음 다음의 F음을 한 옥타브 위의 음으로 도약 진행시키고 또다시 G음을 도약 하행 진행시킬 수도 있다. 이로써 12음 체계의 융통성은 더욱 커지게 되며, 이것은 12음 기법에 의한 선율들이 종종 이례적인 도약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한 음렬의 음들은 시차적(선율적)으로 차례로 배열할 수도 있지만, 동시적(화성적)으로 배열함으로써 화음을 형성할 수도 있다. 사실 12음 기법을 사용한 곡에서 모든 화성 및 선율은 음렬에서 유도되어나온 것이다. 12음 기법은 얼핏 규칙에 얽매인 듯 보이지만, 쇤베르크는 대작 〈모세와 아론 Moses und Aron〉(1930 작곡 시작) 등의 실제 작곡을 통해 이러한 우려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12음 기법을 사용했다. 때로 전통적인 조성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지만, 이것은 그가 말한 대로 "C장조로 여전히 좋은 음악을 작곡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가 말년에 작곡한 조성음악 작품으로는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모음곡 Suite for String Orchestra〉(1934)·〈레치타티보 선율을 주제로 한 오르간 변주곡 Variations on a Recitative for Organ〉 작품 40(1940), 〈밴드를 위한 주제와 변주곡 Theme and Variations for Band〉 작품 43A(1943) 등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쇤베르크의 음악은 점차로 명성을 얻었지만, 12음 기법의 고안 자체는 상당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23년 그의 아내인 마틸데가 오랜 와병 끝에 죽었고, 1년 뒤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 루돌프 콜리슈의 누이 게르트루트 콜리슈와 재혼했다. 1925년에는 베를린에 있는 프로이센 예술 아카데미로부터 작곡과 마스터 클래스 수업을 요청받아 그곳에서 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의 활동은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교습은 좋은 반응을 얻었고, 여러 중요한 작품들도 작곡했다. 그러나 1933년 독일에 들어선 나치 정권이 유대인들의 활동을 제약함에 따라 이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결국 그는 파리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했고, 이곳에서 정식으로 젊은 시절에 버렸던 유대교로 전향했다. 1933년 11월 보스턴의 말킨 음악원 교수가 되었고, 1934년 캘리포니아로 이주, 1941년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후 여생을 보냈다. 서던 캘리포니아대학교(1935~36),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학교(1936~44)에서도 교편을 잡았다.
미국에서 작곡한 대표적인 작품들은 12음 기법의 처리에 있어서 더욱 능숙함과 자유로움을 보였고, 특히 뛰어난 곡으로 바이올린 협주곡 작품 36(1934~36), 현악4중주 4번 작품 37(1936), 피아노 협주곡 작품 42(1942),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환상곡 Fantasia〉 작품 47(1949) 등을 들 수 있다. 1951년 7월 2일 독일 다름슈타트에서 '신음악을 위한 여름학교' 프로그램의 하나로, 20세기 음악에 정통한 헤르만 셰르헨의 지휘로 〈모세와 아론〉 중 〈황금송아지를 에워싼 춤 Dance Around the Gold Calf〉이 연주되었다. 이 연주회의 대대적인 성공을 알리는 전보로 그는 매우 만족스러워했지만, 11일 후 죽었다. 그는 비록 전자음악에 의한 궁극적인 혁명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혁신적인 작품활동이 없었다면 전자음악도 빛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8. 극음악
오페라와 뮤지컬을 중심으로 음악을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부터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고대 이집트. 큰 뱀에 쫓기던 왕자 타미노는, 밤의 여왕 세 시녀의 도움으로 구원을 받고 밤의 여왕을 만납니다. 타미노는 그녀로부터 자라스트로는 폭군으로 그녀의 딸 파미나를 그가 납치해갔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파미나를 구출하기로 결심하는데, 밤의 여왕이 건네주는 마술피리를 가지고 새 사냥꾼 파파게노와 함께 적지에 잠입한 타미노는, 여왕의 말과는 정반대로 자라며, 악과 어둠의 세계를 지배하는 밤의 여왕으로부터 청순한 딸을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타미노와 파미나 두 젊은이의 사랑은 많은 시험과 험한 시련을 이기고 마침내 사랑의 승리를 얻게된다는 내용입니다.
아이다의 줄거리
이집트의 장군 라다메스는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게 되는데요.
이에 이집트 공주는 장군과의 결혼으로 한껏 기대에 부풀었어요.
하지만 장군이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있는 아이다 공주와 사랑하는 관계임을 눈치채고
질투에 눈이 멀게 됩니다.
한편 아이다의 아버지인 이디오피아 왕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면서 딸에게 이집트 군대
기밀문서를 가져오라고 부탁을 하게 되는데요.
이에 사랑에 눈이 먼 라다메스는 아이다에게 정보를 누설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이집트 공주에게 들켜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집트 공주는 아이다를 포기하면 용서를 해 주겠다고 제안을 했지만 장군은
거절을 하게 되고 산채로 신전의 돌무덤에 묻혀서 죽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 돌무덤에 아이다는 미리 들어와 있었는데요.
이에 장군은 그녀를 말렸지만 아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겠다며 돌무덤속에서
죽게 되는 비련의 이야기입니다.
푸치니 “투란도트” 줄거리
제 1막: 전설시대 중국 북경 성벽 앞 광장
막이 열리면 한 관리가 나타나 포고문을 읽기 시작한다. '북경의 백성들이여 들어라. 황제의 딸 투란도트 공주는 자신이 내놓은 세 가지 수수께기를 맞추는 왕가 혈통의 구혼자와 결혼할 것이다. 그러나 수수께기를 풀지 못하는 자는 참수형에 처한다. 페르시아 왕자가 도전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달이 떠오르면 그의 목은 망나니의 칼에 떨어질 것이다'
이때 군중에 떠밀려 쓰러진 한 노인을 지나가던 젊은이가 부축해준다. 노인은 타타르 왕국에서 축출되어 유랑생활을 하던 티무르요, 도와준 젊은이는 아들 칼라프 왕자였다. 두 사람은 우연한 재회를 기뻐하고 티무르는 망명생활 중 자신을 돌봐준 여자노예 류를 칼라프에게 소개한다. 류는 옛날부터 남몰래 칼라프 왕자를 사모해 왔다.
달이 떠오를 때가 가까와지자 군중들이 하나 둘 다시 모여든다. 사형집행인들의 칼가는 소리에 맞춰 군중들은 '숫돌을 돌려라. 도끼를 갈아라'하며 사형집행에 대한 기대감을 숨기지 않는다. 이때 동자승 무리가 군중들 사이를 지나가며 중국 민요에서 차용한 유유하고 슬픈 선율을 노래한다. 밤은 더욱 깊어가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페르시아 왕자의 행렬이 군중 앞을 지난다. 창백한 페르시아 왕자의 얼굴은 동정심을 자아내고, 백성들은 합창으로 투란도트 공주에게 자비를 애원하지만 궁궐 망루에 나타난 투란도트 공주는 얼음같이 차가운 표정으로 사형집행을 지시한다. 이때 멀리서 투란도트 공주를 지켜보던 칼라프는 공주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만다. 페르시아 왕자는 형장으로 이끌려가고 광장에는 칼라프, 티무르, 류만 남는다.
칼라프는 아버지 티무르에게 자신은 투란도트 공주에게 반했다고 말하고는, 티무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수수께기에 도전하겠다고 말한다. 칼라프가 궁궐을 향해 뛰어가는데 갑자기 가면을 쓴 세 명의 중국관리 핑,팡,퐁이 나타나 칼라프를 가로막으며 '멈춰라. 아름다운 공주라도 얼굴 하나에 손발 두 개씩 있는 보통 여자일 뿐. 목숨이 아까우면 빨리 돌아가라'고 말한다. 핑,팡,퐁이 우스꽝스럽고 과장된 몸짓으로 칼라프의 무모함을 조롱하나 칼라프는 '승리는 나의 것, 투란도트는 나의 사랑'이라며 요지부동이다.
티무르가 나이 든 아버지를 버리느냐며 비탄에 빠지자, 옆에 있던 류가 왕자에게 다가가 흐느끼며 아리아 '들어보세요 왕자님 (Signore Ascolta)'을 노래한다. 그러나 류의 애원에도 칼라프는 아리아 '울지마라 류 (Non piangere Liu)'를 부르며 아버지 티무르를 부탁한다는 말만을 남긴채 도전을 감행하고자 한다. 칼라프, 티무르, 류, 핑,팡,퐁 그리고 합창이 가세한 장대한 피날레가 펼쳐지는 가운데 결국 칼라프는 징을 세 번 울려 공주의 수수께기에 도전을 선언한다. 티무르와 류는 충격에 빠지고, 핑,팡,퐁은 큰 웃음으로 왕자를 조롱하는 가운데 칼라프는 단호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제 2막
제1장: 북경의 누각
핑,팡,퐁 세 명의 관리들이 모여 공주에게 도전장을 낸 왕자 칼라프의 이야기를 한다. 지금까지 수수께기를 풀지 못해 사형당한 남자는 셀 수 없이 많은데 칼라프는 호랑이해인 올해만 13번째 도전자에 해당한다고 한다. 지나간 세월의 무상함과 고향 호난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면서도, 투란도트 공주가 사랑에 눈을 떠 중국에 다시 한번 평화가 깃들기를 염원한다.
제 2장: 왕궁 앞 광장
드디어 공주의 수수께기를 풀 시간이다. 황제 알투움이 먼저 나와 도전자 칼라프를 만류하며 목숨을 아깝게 여기라고 말하지만 칼라프는 자신만만하다. 이윽고 공주가 등장해 아리아 '옛날 이 궁전에서(In questa Reggia)'를 노래한다. 저 옛날, 궁궐에 쳐들어온 외국군대가 로우링 공주를 능욕하고 죽인 사실을 이야기하며, 그 공주의 원한을 풀어주기 위해 외국에서 온 젊은이에게 풀기 어려운 수수께기를 내어 복수해 왔으며, 아무도 자신을 차지할 수 없다고 말한다. 공주가 도도하고 위협적인 자세로 '이방인이여, 수수께기는 세 개, 그러나 죽음은 하나 (Gli enigmi sono tre, la morte una!)'라고 말하자 이를 되받아 칼라프가 '수수께기는 세 개, 생명이 하나 (Gli enigmi sono tre, una e la vita!)'라고 외친다. 나팔이 울리면서 드디어 수수께기가 시작된다.
첫번째 수수께기
공주: 그것은 어두운 밤을 가르며 무지개빛으로 날아다니는 환상. 모두가 갈망하는 환상. 그것은 밤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아침에 되면 죽는다.
왕자: 그것은 '희망 (La Sprenza)'
두번째 수수께기
공주: 불꽃을 닮았으나 불꽃은 아니며, 생명을 잃으면 차가워지고, 정복을 꿈꾸면 타오르고, 그 색은 석양처럼 빨갛다.
왕자: 그것은 '피 (Il Sangue)'
세번째 수수께기
공주: 그대에게 불을 주며 그 불을 얼게하는 얼음. 이것이 그대에게 자유를 허락하면 이것은 그대를 노예로 만들고, 이것이 그대를 노예로 인정하면 그대는 왕이 된다.
왕자: 그것은 바로 당신, '투란도트 (Turandot)'!
칼라프가 모든 수수께기를 풀어내자 공주는 매우 당황해하며 '모욕적으로 쳐다보지마라. 나는 네 소유가 되진 않는다'고 소리친다. 그러나 황제는 맹세는 신성한 것이라 말하고, 군중들도 이에 가세한다. 이때 칼라프가 역으로 한가지 제안을 한다. '새벽녘까지 내 이름을 알아내보시오. 알아맞힌다면 그대의 승리. 원한다면 내가 죽으리다'
•제 3막: 왕궁의 정원
칼라프가 계단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는데, 저 멀리서 '왕자의 이름을 알아낼때까지 잠들어선 안된다'며 공주의 명령을 전하는 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칼라프가 일어서서 사랑의 승리를 확신하는 아리아 '아무도 잠들지 못한다 (Nessun Dorma)' - 흔히 '공주는 잠 못 이루고'로 알려져있다 -를 노래한다.
갑자기 핑,팡,퐁이 달려나오며 왕자에게 이름을 밝히라고 위협한다. 칼라프가 거절하자, 그들은 반라의 여자들과 보물을 들이대며 끊임없이 왕자를 회유하고 북경의 백성들도 왕자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하면 자신들이 죽게되니 제발 북경을 떠나달라고 애원과 협박을 되풀이한다. 이때 위병들이 티무르와 류를 끌고 나오니 백성들은 이들 두 사람이 칼라프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며 환호성을 올린다. 투란도트 공주가 등장해 티무르를 고문하려고하자 류가 왕자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자신 뿐이라며 티무르의 앞을 막아선다. 그러나 잔혹한 고문에도 류는 끝내 왕자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이를 의아하게 여긴 투란도트가 류에게 이유를 묻자. 류는 아리아 '가슴 속에 숨겨진 이 사랑(Tanto amore, segreto)'을 노래한다. 공주는 초조해하며 류를 죽일 마음을 품고, 죽음을 직감한 류는 '얼음장 같은 공주님의 마음도(Tu, che di gel sei cinta)'라는 최후의 아리아를 마치고 위병의 단검을 뽑아 자결한다. 그녀의 희생에 깊은 감명을 받은 사람들은 칼라프와 공주만 내버려두고 슬픔에 빠진 티무르의 뒤를 쫓으며 류의 시체를 운반한다. 푸치니는 바로 여기까지 작곡하고 숨을 거두었다.
홀로 남은 칼라프와 투란도트. 칼라프는 투란도트에 다가가 그녀의 얼굴을 감싼 베일을 벗겨버리고, 거세게 거부하는 투란도트를 억지로 껴안으며 격정적인 키스를 한다. 공주는 크게 화를 내지만 칼라프가 더욱 열정적으로 사랑을 호소하자 공주의 차가운 마음도 점점 녹아 눈물을 흘린다. 날이 밝아 새벽이 되자 왕자는 공주에게 '이제 공주는 나의 것, 내 이름도 목숨도 공주에게 바치리라. 나는 타타르의 왕자 칼라프'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다. 곧이어 심판의 시간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려퍼지고 황제가 나타난다. 공주는 아버지 알투움에게 '이 젊은이의 이름을 알아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Amor)!'이라고 소리높여 외치고, 칼라프가 공주를 뜨겁게 포옹하며 주위사람들이 두 사람의 사랑을 축복하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오페라의 유령” 줄거리
프랑스의 추리작가 가스통 르루(Gaston Leroux)가 1910년에 발표한 소설을 영국의 작곡가 앤드루 L. 웨버(Andrew L. Webber)가 뮤지컬로 만든 작품이다. 1986년 10월 런던에서 초연되었다. 고전적 선율에 의지하여 극 전체의 구성을 오페라의 형태로 끌어가는 오페레타(Operetta) 형식이다.
파리 오페라극장을 무대로, 천사의 목소리를 타고 났지만 사고로 흉측하게 변한 기형적인 얼굴을 가면으로 가린 괴신사가 아름답고 젊은 프리마돈나를 짝사랑하는 이야기는 1861년 파리에서 시작된다.
주인공인 '오페라의 유령'은 언제나 오페라극장의 5번 박스석에 자리하는 괴신사이다. 리허설 도중에 연속적으로 사고가 일어나자 주역 여가수가 출연을 거부한다. 합창단원들의 추천으로 무명인 크리스틴이 대역으로 나서서 노래를 완벽하게 부르고 공연은 성공을 거둔다.
'오페라의 유령'은 오페라 《한니발》의 리허설을 끝내고 분장실로 돌아온 크리스틴을 납치하여 분장실의 거울을 통해 지하 호수에 있는 마궁으로 사라진다.
'오페라의 유령'은 크리스틴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바치면서 자기가 작곡한 오페라에서 노래해줄 것을 간청한다. 흉측하게 일그러진 괴신사의 얼굴을 본 크리스틴은 경악하고 오페라극장에서는 예기치 못한 사고가 계속해서 발생한다. 두려움에 떠는 그녀에게 연인 라울은 자신을 믿으라며 사랑을 고백한다.
6개월 후 공연 날 '오페라의 유령'은 등장인물로 변신해 크리스틴을 납치한다. 마궁에 뒤따라온 라울이 함정에 빠져 위험에 처하자 그녀는 그를 구하려고 '오페라의 유령'에게 키스를 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유령은 그들을 풀어준다. 경찰이 마궁을 덮쳤을 때 '오페라의 유령'의 흰 가면만이 그들을 맞이한다.
'오페라의 유령'이 크리스틴을 납치하여 마궁으로 노를 저어가는 신비스런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타이틀 곡 《오페라 유령》, 수십 개의 촛불 속에서 '오페라의 유령'이 부르는 《밤의 노래》와 크리스틴과 라울의 러브송 《그대에게서 바라는 것은 오직 사랑뿐》 등 감미로운 멜로디와 복고풍의 환상적인 무대장치가 관객을 사로잡는다.
1986년에 런던 올리버상의 3개 부문에서 수상하였고, 1988년에 뉴욕 토니상의 최우수 뮤지컬작품상, 남우주연상, 감독상 등 7개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1988년 브로드웨이 머제스틱 극장(Majestic Theatre) 공연에서 20일 만에 예매액 1,700만 달러라는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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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대 미인과 춘래불사춘 (春來不似春 봄이 와도 봄같지 않다)- 복사해 온 글 (0) | 2022.12.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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